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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북] 08월 23일 (1971 실미도 특수부대원 난동)

동방박사님 2024. 8. 22.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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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월 23일 한국사 주요사건 일지

1899 독립운동가 김법린 출생 / 1971 실미도 특수부대원 난동 / 1973 천마총서 천마도 발굴  / 1974 긴급조치 1.4호 해제 / 1999 한중 첫 국방회담이 베이징에서 개최 / 2005 조용필 평양 류경정주영 체육관에서 광복 60주년 조용필 평양공연 / 2005 청계천 광통교 93년만에 복원

실미도 사건이 일어난 버스

실미도 사건(實尾島事件)

실미도 사건(實尾島事件)1971823일 실미도에서 북한 침투작전 훈련을 받던 중 가혹한 대우를 견디지 못한 684부대원들이 무장 탈영해 인천을 경유하여 서울로 진입한후 군·경과 교전을 벌이다가 숨진 사건으로 실미도에서 교관 및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탈출한 부대원 23명은 버스를 탈취하여 서울로 진입한 뒤 총격전을 벌이다가 수류탄으로 자폭했고 4명이 부상당한 채 생포되었으나 곧 사형에 처해졌으며 총격전으로 경찰 2명과 민간인 6명이 사망하였다.

배경

1.21 사태

1968121일에 북한 124부대 소속 무장 공비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하려다 미수에 그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휴전선을 넘은 31명의 무장 공비들은 21일 밤 930분경에 서울 청운동 세검정 터 부근 청와대 앞 500미터까지 진출한 뒤 창의문 근처에서 있었던 경찰의 불시검문에 불응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무장공비들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을 잡기 위해 비상경계태세가 내려진 가운데 군경합동 소탕작전을 버린 결과 31명 중 29명은 사살되었고 1명은 북으로 도주, 1명은 생포되었으며 그 와중에 민간인을 포함해 30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을 입었다.

국가안보 우선주의

정부는 '국가안보 우선주의'을 선언하며 향토예비군, 육군3사관학교, 전투경찰대를 창설하였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는 교련 교육이 실시되었으며 대통령 경호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인왕산과 북악산, 청와대 앞길까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다.

북한은 사건관련성을 전면 부인하였으나 생포된 김신조는 대통령을 제거하는 것이 남파의 목적이었다고 진술함에 따라 중앙정보부는 김일성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특수부대인 684부대를 창설하였다.

684 부대 창설

19684월에 중앙정보부장(현 국가정보원장) 김형욱은 실미도에 북파목적의 특수부대인 684 부대를 만들었는데 총인원은 지난 '1.21 사태' 때 남파되었던 북한 무장공비와 동일하게 31명으로 구성되었다.

684부대원들은 북한에 침투하여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실미도에 고립된 채 합숙하며 혹독한 훈련을 받았으나 국제적인 '데탕트'와 함께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침투 작전 자체가 불확실해지며 계획이 기약없이 연기되었다.

더욱이 부대를 창설했던 김형욱이 3선 개헌의 진통 속에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면서 19691020일 중앙정보부에서 경질되었고부대원들의 원 소속은 공군이었음에도 관리는 중앙정보부가 담당했지만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직에서 경질된 이후 무관심 속에 방치되며 존재마저 잊혀져 갔고 부대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가혹한 훈련은 지속되었으나 부실한 부식과 처우등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았고 오랜 기다림으로 부대원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가기 시작했다.

사건 전개

탈출과 서울 진입 / 부상당한 부대원의 후송

1971823일 오전 6시경 교관 및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한 이후[9] 섬을 빠져나간 23명의 684부대원들은 1220분경 인천 옥련동 독부리(옹암) 해안에 상륙한 뒤 인천 시내버스(현대 R-192)를 탈취하여 청와대 방향으로 향했고 인천에서 육군과의 총격전으로 타이어가 터진 바람에 버스가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이들은 수원-인천간 시외버스(신진 FB100L, 태화상운 소속)를 다시 탈취하여 이동하였다.

오후 1415분경 서울 동작구 대방동(당시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본사 건물 앞에 도착하였는데 여기서 마지막 총격전을 벌이다 부대원 거의 대부분이 스스로 수류탄을 터뜨려 목숨을 끊었고 생존자 4명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197231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상한 정부 발표

이 사건으로 김포국제공항이 폐쇄되고 한강교가 차단되면서 시민들이 불안과 공포에 떨었고 또한 초기에 정부가 북괴 무장공비의 침입이라 발표하자 공포는 증폭되었다.

나중에 군 특수범이라 정정 발표하는 등 혼란을 야기했는데 군 장성 출신 야당 국회의원 이세규가 특수부대원의 난동이라고 진상을 폭로하자 김종필 총리도 군 특수범이 아니라 특수 부대 요원이라고 실토하는등 여러차례 말을 바꾸었다.

정치 인물 영웅담 <000 죽이기> 시리즈의 집필자이자 정치평론가인 강준만 교수는 박정희 정부가 이 사건을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규정하고 부대의 진상을 은폐하기 위해 노력했고, 진상을 폭로했던 신민당 이세규 의원에게는 심한 고문을 가하는등 보복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신민당 김한수 의원은 시국 강연회에서 군 특수범들의 소속부대를 언급했을 뿐인데 군수사 기관에 끌려가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모진 고문을 당했고 '실미도 사건 부대 이름을 공표해 반공법 등을 어겼다'는 이유로 징역 3년을 살아야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미도 난동사건' 때문에 의원들이 체포되었다는 직접적인 근거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세규와 김한수등 다수의 신민당 의원들은 1972년 유신 특별선언 발표 이후 반독재·반유신 투쟁을 벌이면서 옥고를 치렀었고 수사과정 중 자신이 당했던 고문 실상을 회고록에 자세히 밝혀 놓았던 김옥두 또한 수사관들이 신민당 의원들의 정치자금을 댄 기업인의 이름이나 김대중에 대한 진술을 요구했다고 언급한다.

공교롭게도 이때 유신 선언에 반대하다 체포된 의원들 대다수가 김대중 의원과 같은 지역 출신, 같은 정당 소속의 측근들이었는데 그 명단으로는 나석호, 김경인, 김상현, 김녹영, 김옥두, 박종률, 강근호, 류갑종, 조연하, 이종남이 있다.

사건 이후

실미도 기간병 유족 11명은 2005년 참여정부 시대때 특수임무를 수행하다 순직한 기간요원에 대한 정부 보상이 필요하다2000~1억원 상당의 국가 보상을 신청했지만 특수임무수행자보상심의원회는 기간병들은 북파공작을 위한 임무를 부여받지 않은 요원들로 보상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취지로 신청을 반려했고 유족회는 관련 행정소송을 제기했으나 2007년 패소했다.

영화 실미도

잊혀가던 사건은 1999년에 684부대의 실상을 소재로 하는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가 발표된 뒤 이 소설을 바탕으로 2003년 말 동명영화가 개봉하면서 사건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실미도에 앞서 실미도 사건을 다룬 <쿠데타>가 개봉될 예정이었으나 제작비 등 여러 문제가 겹쳐 좌절됐으며 이 과정에서 드라마 PD 출신 김종학 감독의 영화 감독 데뷔가 무산되기도 하였다.

20042월에 대한민국 국방부는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에서 19683월 한꺼번에 행방불명된 7명의 청년이 684부대의 대원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부대 예산 횡령

공군 수사당국은 축소 수사로 일관했고 부대를 창설한 공군을 지휘하였던 중앙정보부에서 실미도 부대로 내려간 예산이 대거 횡령된 정황도 포착되었지만 유야무야 되었다 

 [Sources Wikipedia]

책소개

올해 50주년을 맞이하는 실미도 사건 진상규명에 참여했던 저자가 조사 과정에서 면담했던 당시 사건 관계자들의 증언 장면을 통해 실미도 부대 창설 과정, 즉 창설의 배경과 부대원 모집 과정을 재구성하고, 특히 진상규명 과정에서 보여준 그들의 무책임한 태도를 그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함으로써 이 사건의 축소, 조작, 은폐, 왜곡의 실상을 보여준다. 또 실미도 부대원들의 최후 폭사 현장에서 살아남은 4명의 심문 기록, 그리고 그들이 사형장에서 남긴 최후 유언도 그대로 담아냈다. 강대국의 논리에 의해 강제로 분단된 나라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삶이 어떻게 뒤틀리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즉 과거의 역사에 눈감지 않음으로써 오늘의 우리의 역사에서도 되풀이되는 비극에 눈감지 않고자 하는, 오늘 우리 삶의 건강성을 지켜내고자 하는 각오와 염원을 담은 책이다.

목차

들어가는 말

1부 | 실미도 사건

1. 창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2. 모집: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가?”
3. 유린: “운동선수 규칙 위반”, “깨지는구나”
4. 봉기: “중앙청으로 가자”
5. 덮기: “조용히 처리하라”, “일본에서 머리 좀 식히고 오라”
6. 재판: “베트남에 같이 가자”, “기억이 나지 않는다”
7. 횡령: “뜯어 먹어도 그렇게 뜯어 먹을 수가 없어”
8. 발굴: “오빠, 이 나라를 절대 용서하지 마!”

2부 | 사형수 4인의 육성

1. 피의자 신문조서
2. 사형집행 관련 문서
3. 형장의 유언

저자 소개

평화여성회(NGO) 대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주요 공저로 《한국전쟁: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나》, 《한반도의 외국군 주둔사》, 《세계화와 여성안보》, 《끝나지 않은 국가의 책임: 산청, 함양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책 속으로

1부에서는 위원회가 실미도 부대 창설 과정부터 4명의 사형 집행까지 관여했던 자들의 조사면담 내용을 중심으로 싣는다. 2부에서는 흔적도 없이 이 땅에서 사라져야 했던 사형수 4명의 육성을 공개하기로 한다. 이들 4명이 실미도에서 겪었던 3년 4개월, 총 4,860일의 기록이다. 소설과 영화, 그리고 수많은 기사와 영상들이 세상에 나왔지만 공작원들이 실미도에서 몸소 겪었던 내용들과는 거리가 먼 것도 있고, 사실을 왜곡·호도하는 내용도 많았다. 암매장 관련자들이 언젠가 입을 열 날을 기다리며, 이들 4명의 피의자 신문 조서와 사형집행 문서, 그리고 사형 집행장에서의 최후 유언을 공개한다.
--- p.23

실미도 부대의 창설은 박정희와 김일성이 각각 개입하였던, ‘제2의 한국전쟁’이라 불리었던 베트남 전쟁이 배경이 된다. 박정희와 김일성은 각각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을 지원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수호,” “사회주의권의 국제적 의무”라는 명분을 표방하면서 직접 전쟁에 참전하였다. 1968년 ‘1·21사태’ 직후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의 지시에 의해 공군이 책임을 맡아, 공군 내에 대북 보복으로 ‘김일성의 목을 따기’ 위한 특수임무부대로 684부대가 실미도에 만들어졌다. 창설 직후 6개월 정도는 예산도 충분히 지급되었으나 1968년 말 베트남 전쟁 종결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우며 등장한 닉슨이 3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중략) 박정희 정권은 닉슨 정권에 의해 대북 화해를 강요받았고, 이 과정에서 실미도 부대의 창설 목적과 임무는 폐기되었다. 중정과 공군의 무책임한 방기가 진행되면서 예산 전횡과 부대 관리 소홀이 이어졌고, 공작원들은 허기와 무력감을 느끼며 불만을 쌓아 가고 있었다.
--- p.34

실미도 부대 공작원 (중략) 모집 대상은 주로 전쟁고아, 무연고자 등으로 미군 부대, 한국군 첩보부대 인근이나 기지촌 주변에서 살아가는 남성으로 채워졌으며, 모집 마감이 임박하자 초등학교 동창인 7명의 옥천 청년 등으로 급하게 채워졌다. 주 임무는 ‘김일성의 목을 따 오는’ 것이었으며, 대우조건은 (1) 3개월 내지 6개월간의 훈련 (2) “월급 600불” (3) 신탄진 담배 지급 (4) 훈련 종료 후 소위 임관 (4) 임무 수행 후 미군 부대 등 취직 알선 등이었다. (중략) 31명은 ‘1·21사태’를 일으킨 북한의 124군 부대의 31명과 같은 숫자로서, 모집관들은 마지막까지 이 숫자를 지키고자 애썼으며, 신현준·강신옥·윤석두 등 마지막으로 입도한 3명은 부대 창설식이 임박해서 들어와 제대로 된 인적사항도 남아 있지 않다.
--- p.74

중정의 관리감독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중정 실무담당 윤진원은 자신은 딱 한 번 실미도 부대를 방문하였으며, 모든 훈련은 공군이 책임지고 잘 할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늘 보고를 받았다면서 공작원이 훈련 중에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사건에 대해서는 “모른다. 없었다. 구두로도 받은 바 없다”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공군 수뇌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실미도 현지에서 근무한 기간병들은 한결같이 위 사건들이 상부에 보고되었다고 사건 수사 과정에서 진술하고 있다.(재판기록)
--- p.100

결국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채, 잊혀진 부대인 실미도 부대 공작원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관련 자료가 상부로부터의 지시 또는 정식 문서가 아니라는 이유로 문서 담당자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파기되었고, 사건을 입증할 물증이 사라짐으로써 온전한 사건의 실체는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다.
--- p.139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971년 11월 5일에 공군 보통 군법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재판장이 군사 보안상의 이유로 공판의 공개를 정지시켜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유가족들에게 통지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략) 김이태는 본인이 김응수의 지시로 이들 4명에게 “베트남에 같이 가자”며 상고 포기를 종용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상고 포기 후 12월 29일에 사형이 확정되고 사건 발생 후 채 7개월도 되지 않은 이듬해 1972년 3월 10일에 이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p.140-141

이들의 사형집행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시신 처리와 매장 등 관련자 70여 명은 보안각서를 제출하도록 강요받았다. 사형집행 내용은 군사기밀에도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이들이 작성·제출했다는 보안각서는 원천적으로 무효이다. 그러나 오류동으로 추정되는 암매장지와 관련하여 아직도 관련자들은 보안각서를 핑계로 정확한 내용을 증언하지 않고 있고, 공군과 국방부는 예전의 벽제 매장설, 유실설만 주구장창 낡은 레코드판 돌리듯 반복하고 있다.
--- p.142

벽제 유해 발굴 후 DNA 검사 결과 김기정, 정기성, 박원식, 김용환, 장명기, 이명구, 박기수, 장정길 등 총 8명의 신원이 확인되었고, 다른 시료들은 불량이거나 감정 불능으로 판명되었다. 이영수, 윤태산, 임기태, 황철복, 박응찬, 정은성, 신현준, 강신옥 등 공작원 8명의 유가족은 확인되지 않았고, 실미도 사건 당일 현장에서 사라진 이영수, 전균 등 2명의 시신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들의 시신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 p.170

‘실미도 사건’은 한국전쟁의 연장선, 즉 정전협정 체결 이후 한반도의 남과 북이 무력을 동원하여 폭력적 체제 경쟁을 추구하는 가운데 발생한 참사였다. “국가란 무엇인가?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명확하다. 국가는 국민 개개인의 생명을 보호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1·21사태’와 이에 대한 보복 응징 대책 실패작인 ‘실미도 사건’은 ‘샴쌍둥이’인 남북의 호전적 정권 안보 세력들이 펼친 적대적 무력 정책이 국가의 존재 이유를 망각한 채, 어떻게 국가 구성원들의 삶을 뒤틀리게 만드는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많은 유사사건에서 그러했듯이 ‘실미도 사건’에서도 정권보위를 부르짖는 자들은 사건을 축소·조작·왜곡·은폐하였고, 공작원들의 인권보호는커녕 이들을 인간 병기로 만들어 분단 갈등의 폭력적 대결에 써 먹으려는 생명 경시 경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국가 폭력은 치유될 수 없는 상처이다. ‘국가’란 이름 뒤에 숨어 수많은 사람을 해쳤던 비열한 인간들을 더 이상 용인해서는 안 된다.
--- p.279-280

출판사 리뷰

1.

‘1971년 8월 23일 영등포로터리’에서 저지되었던 실미도 부대원들의 ‘중앙청으로 가는 길’과 그 이후 이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발표나 언론 보도, 그리고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2000년대 초의 진상규명 과정에서 일관되게, 전형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진상에 대한 축소, 조작, 은폐, 왜곡이었다.
‘북한군 특수부대에 의한 1·21사태 → 남한의 보복 차원에서 준비된 실미도 부대 →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용도 폐기되고 잊힌 부대가 된 실미도 부대 → 부당한 처우 → 중앙청으로 가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자 봉기 → 군경의 저지에 막혀 대치 중 폭사 →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고, 생존자들을 비밀 재판 후 처형, 일부 사망자들은 암매장 → 50주년이 될 때까지 축소, 조작, 은폐, 왜곡!

이것이 실미도 사건의 기본적인 골격이다. 남북한 간의 대치 상황만으로는 이 사태가 설명되지 않는다. 한국 정부 뒤의 미국 정부, 당시의 베트남 전쟁, 그리고 박정희 독재 정부의 광기 어린 대응, 그리고 무엇보다 국가가 그 존재 이유를 망각하고, 그 속의 국민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근본적인 사태가 이 사건에 개재해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이 사태의 본질은 아니다.

실미도 사건이 일어난 지 올해로 50주년이다. 30여 명의 장정들이 온갖 감언이설에 속아 실미도로 들어갔다가, 몇 년 동안 비인간적인 수준의 대우와 살인적인 훈련만을 받으며 착취까지 당하다가 결국 당국자들로부터 버려지고 잊힌 사람들이 되어야 했던 그들은 결국, ‘국가’의 이름을 도용하고, ‘안보’와 ‘통일’을 볼모로 온갖 불법, 탈법적인 방법으로 국민의 인권을 유린한 세력의 희생양일 뿐이다.

실미도 사건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우리가 여전히 분단된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는, 그리고 그것이 한 개인의 삶을 어떻게 유린하고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비극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결국 국가, 혹은 자본이 국민을 장기판의 졸(卒)로 여기는 역사의 사기극을 끝장내는 민중 항쟁이기도 하다.

2.

이 책은 실미도 사건 30주년 전후에 이 사건의 진상규명에 참여했던 저자가 그로부터 다시 20년이 지난 시점에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사건의 진상규명을 ‘여전히’ 시도하는 노력의 출발점이다. 저자가 이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목격한 것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태인 학살에 참여했던 아이히만이 보여주었던 ‘악의 평범성’처럼, 일견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 속에 또렷이 자리 잡은 근원적인 악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저자 자신마저 그러한 악의 모습에 굴복해서는 안 되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이 사건의 진실 규명 작업을 그만두지 못하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악한 사람들의 악행”은 그 악에 “침묵”할 때 완성된다는 자각으로 말미암아, 이 사건의 진상 규명에 (한때 손을 놓았다가) 다시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우리 역사의 비극의 장면마다 깃들어 있는 ‘남성의 시각’과 ‘남성 중심성’을 극복하기 위한 한 방안으로, “여성의 시각으로 한반도 근현대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이 사건의 진실 규명에 매달린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여성의 시각’은 그가 간여한 또 하나의 역사의 진실 규명/접근 작업의 하나인,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 피해자들을 만날 때에도 뼈저린 경험으로 다가왔음을 고백한다. 베트남 전쟁은 이 사건 - 실미도 사건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시각은 지금까지의 역사를 새롭게 써 나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50년 전의 역사를 지금 여기의 것으로 이해하기에 너무 멀고 아득하다는 생각을 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공식 선언된 21세기 20년째의 해에도 현실에서의 진실을 왜곡하는 일은 지속적으로, 더 교모하고, 더 큰 규모로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기득권자들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일들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러한 현실에 “스스로가 깨어 있겠다는 다짐을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라고 저자는 고백한다. 저자는 “국가는 진실을 기억할 의무가 있다. 스스로 포기하더라도 마지막까지 국가에 의해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 인권이다”(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라는 말을 떠올리며, 책을 마무리한다.

그런 점에서 돌이켜보면, 실미도 사태의 희생자들은 이들 자신은 국가에 대한 믿음을 끝내 버리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만큼 순진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만큼 비극적인 인물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그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의 남은 과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진상 규명과 보상/배상이 이루어져야만 하는 사건의 희생자들이다.

책소개

국가의 꼼수와 거짓말에서 벗어나기

사태1. 2013년 8월 8일 세법개정안 발표
사태2.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 바다 ‘세월호’ 침몰
사태3. 2014년 9월 22일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 발표

세 사태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정부의 무능과 거짓으로 인해 국민들이 피해를 본 사례라는 점이다. 세월호 참사에서는 보고 오류와 늦장 대처와 부처 간 책임 떠넘기기가, 담뱃값 인상과 연말정산 논란에서는 ‘증세 없는 복지’라는 난센스 공약을 억지로 이행하기 위해 정부가 꼼수를 쓴 것이 문제였다. 이런 식의 논란이 계속되면서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땅으로 떨어졌다. 신뢰를 상실한 국가의 피해자는 결국 국민이다.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포퓰리즘 공약을 앞다투어 내놓는다. 이런 공약들은 지켜도 문제, 지키지 않아도 문제다. 애초에 실현 가능성이 없는 당선용 공략을 지키게 되면 국가 재정을 비롯한 전체 국가 운용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고, 지키지 않으면 국민의 신뢰를 잃어 정권의 지지 기반이 약해진다.

이런 일들은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종종 있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서울을 지키겠다’고 라디오 방송을 하고는 한강철교를 끊고 홀로 남쪽으로 도망을 갔다. 박정희 정권은 북파 공작원 부대인 실미도 부대를 창설하고는 대외 상황의 변화로 ‘김일성 암살’이라는 창설 목적이 무색해지자, 그들을 ‘무장 공비’로 둔갑시켜서 사살했다. 전두환 정권 때는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깡패 척결’이라는 명목으로 무고한 시민들을 끌고 가 학대했고, 김영삼 정부 때는 국가 경제가 어렵다는 사실을 쉬쉬하면서 경제난을 키우다 끝내 국민들을 실업의 나락으로 빠뜨렸다. 최근의 이명박 정부는 ‘한반도 대운하 사업’이 반대에 부딪히자 ‘4대강 정비 사업’이라고 이름만 바꿔서 이치에 맞지 않는 치수 사업에 막대한 국가 재정을 쏟아부었다. 『국가의 배신』은 국가가 국민을 배신하고 기만한 치욕의 역사를 차례차례 살피면서, ‘국가에 속고 살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숙고하게 만든다.

목차

국가의 거짓에서 벗어나기

배신국가
대통령의 말을 믿었던 국민이 부역자로 몰리다 거짓 라디오 방송
국가에 속아서 끌려다니다 희생되다 국민방위군 사건
국가가 국민을 용도 폐기하다 실미도 사건
눈 가리고 아웅하며 혈세를 낭비하다 4대강 정비 사업

폭력국가
국가의 속임에 넘어가 학살되다 국민보도연맹 사건
죽은 빨갱이, 산 빨갱이 거창·산청 양민 학살 사건
무고한 국민을 깡패로 둔갑시키다 삼청교육대

무능국가
결정장애 국가의 최후 IMF 구제금융 사태
국가 공무원들의 도덕적 해이 저축은행 연쇄 부도 사태
국가의 적나라한 실체가 드러나다 세월호 참사

신뢰와 숭배 사이에서
 

저자 소개

저자 : 도현신
순천향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쳤다. 틀에 박힌 역사학계의 고루한 서술 방식을 벗어나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과 문장으로 역사서 분야의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가는 젊은 글쟁이다. 2004년 장편소설 『마지막 훈족』(전2권)을 출간했으며, 단편소설 「나는 주원장이다」로 2005년 제4회 전국신인문학상 장려상을 수상했다. 2008년 『원균과 이순신』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역사 논픽션 저술에 뛰...

책 속으로

1950년 6월 27일 오후 12시 30분 이승만은 대구역에 도착했는데, 육군 3사단장과 경북도지사를 만난 자리에서“각하, 너무 멀리 오셨습니다”란 말을 들었다. 이 말을 듣고 민망했는지 이승만은 열차를 돌려 대전으로 향했고 오후 4시 30분에 일행은 대전역에 도착했다. 대전에 도착한 이승만은“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방송을 해야겠어”라고 말한 뒤에 비서관인 황규면에게 연설을 받아 적게 하고는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서, 자신이 읽는 내용을 그대로 방송하게 했다.……라디오 방송에서 이승만은 자신이 이미 대전으로 도망 왔으며 국회도 이승만을 따라 대전으로 옮기기로 결정했고, 국군은 패주를 거듭해 북한군이 서울 코앞까지 쳐들어왔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이 거짓말은 오후 9시부터 11시까지 세 번이나 연속으로 방송되었다. 국민들은 이승만이 경무대에서 직접 방송을 하는 것으로 믿었고, 정부 요인들이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한 줄 알고서 피난을 가지 않고 그대로 서울에 남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제때 피난을 못 가고 서울에 있다가 북한군에게 사로잡혀 온갖 고초를 겪었다.
--- p.23~24

실미도 부대원들은 섬과 인근 바다에서 낙하산 강하 훈련과 암벽 등반 훈련, 허공에서 밧줄을 잡고 이동하는 훈련, 배의 밧줄에 매달린 채로 바다 속에서 버티는 훈련과 총검술 훈련 등을 받았다. 이밖에도 실미도 부대원들은 전투와 적진 침투 및 요인 암살 등의 임무에 대비해 사격술과 격투 훈련, 폭탄 설치와 폭파, 완벽한 북한식 말투와 북한군 제복 착용 등을 배웠다.……북파 공작원들의 훈련 내용 중에는, 소수 인원별로 팀을 결성해서 북한으로 침투를 하다가 동료가 다치면 증거 인멸을 위해 동료를 죽여야 한다는 실로 끔찍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만큼 실미도 부대원들의 훈련은 비인간적이었는데, 이는 그들을 담당하고 훈련시켰던 자들이 부대원들을 인간이 아니라 그저 전쟁용 도구로밖에 보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 p.74~76

도올 김용옥은 2011년 10월 28일, 팟캐스트 방송인 [나는 꼼수다]에 직접 출연해,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4대강 사업에 직격탄을 퍼부었다.……“이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4대강 사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건 정신이 돈 사람 아니에요? 이건 도대체 국민의 혈세를 그렇게 강바닥에 퍼붓는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선거 기간에 (이명박 전 대통령과 함께) 차 안에 앉아서 말했어. 지금 도대체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가려고 하느냐? 당신 도대체 대운하라는 게 말이나 되는 거냐? 이거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거다.……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서 거대 정치 담론을 다 도배하겠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 땅의 지도자일 수 있어. 단군 이래 이런 적이 없었어. 연산군도 궁궐에서나 발광을 한 거야. 이렇게 전 국토가 파헤쳐지고, 연산군이 아무리 폐위를 당했지만 우리나라에 폐를 끼친 사람은 아니야. 그런데 이건 너무 심했잖아.”
--- p.90~92

출판사 리뷰

국가의 꼼수와 거짓말에서 벗어나기

사태1. 2013년 8월 8일 세법개정안 발표
정부는 세법개정안을 발표하면서 각종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연소득 3,450만 원 이상인 434만 명의 세금 부담이 증가한다고 발표했다가 ‘월급쟁이 증세’라는 비난에 일주일 만에 수정안을 발표했다. 연 소득 3,450만 원~5,500만 원 중산층은 세금 부담이 증가하지 않고, 5,500만~7,000만원인 경우에만 소폭 증가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자녀 등 부양가족에 따른 공제 혜택 등은 전보다 줄었고, 세액공제 방식으로 전환된 탓에 교육비와 의료비, 연금 저축 부담은 늘었다. 이듬해 연말정산을 한 직장인 사이에서 ‘13월의 세금 폭탄’이란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정부가 국민을 속였다’는 반발은 점점 거세졌다. 결국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머리를 숙이고 사과했지만 사후약방문이었다.

사태2.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 바다
인천에서 제주도를 향해 가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승객 총 476명 중 295명이 목숨을 잃고 9명이 실종된 대형 참사였다. 사고가 나자 선장 등 승무원들이 가장 먼저 배에서 탈출했다. 진도 해상교통센터(VTS)와 해양경찰은 ‘해상 수색구조 매뉴얼’조차 준수하지 않아 피해를 키웠다. 정부의 허술한 보고는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낳았다. 구조를 맡은 정부 기관들은 난립했다. 6개나 되는 기관들이 서로의 책임과 관할 문제를 따지느라 구조 작업은 뒷전이었다. 세월호 특별법은 여야의 힘겨루기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끝없이 부유했다. 정부는 초동 대응 미숙 및 잘못된 상황 전파로 혼선을 초래한 해양수산부, 해양경찰, 안전행정부 관련자들을 엄중 문책할 것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솜방망이 처벌로 끝났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제대로 된 진상 조사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왔고, 정부는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사태3. 2014년 9월 22일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 발표
보건복지부는 담배소비세를 현행보다 2,000원가량 인상하는 담뱃세 인상 계획을 발표했다. 보건복지부는 현행 담뱃값이 다른 국가에 비해 낮은 편이며, 성인 남성의 흡연율도 OECD 국가 중 대단히 높은 수준이어서 흡연율 인하를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최고의 금연 정책은 담뱃값 인상이라고 하며, 가격 정책이 보건소 금연 사업 등 다른 정책에 비해서 효과가 제일 크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야당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담뱃세 인상에 대하여 “서민층이 주로 많이 흡연을 하고, 이들에게 세금 부담을 가하는 서민 증세”이며 “정부가 세입 부족에 대하여 편법 증세를 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담뱃값 인상이 발표된 후 보루 단위로 담배를 구매하는 등의 사재기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기획재정부는 담배 사재기를 금지하는 고시를 발표했다.

역사에서 반복된 국가의 국민 기만
세 사태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정부의 무능과 거짓으로 인해 국민들이 피해를 본 사례라는 점이다. 세월호 참사에서는 보고 오류와 늦장 대처와 부처 간 책임 떠넘기기가, 담뱃값 인상과 연말정산 논란에서는 ‘증세 없는 복지’라는 난센스 공약을 억지로 이행하기 위해 정부가 꼼수를 쓴 것이 문제였다. 이런 식의 논란이 계속되면서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땅으로 떨어졌다. 신뢰를 상실한 국가의 피해자는 결국 국민이다.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포퓰리즘 공약을 앞다투어 내놓는다. 이런 공약들은 지켜도 문제, 지키지 않아도 문제다. 애초에 실현 가능성이 없는 당선용 공략을 지키게 되면 국가 재정을 비롯한 전체 국가 운용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고, 지키지 않으면 국민의 신뢰를 잃어 정권의 지지 기반이 약해진다.
이런 일들은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종종 있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서울을 지키겠다’고 라디오 방송을 하고는 한강철교를 끊고 홀로 남쪽으로 도망을 갔다. 박정희 정권은 북파 공작원 부대인 실미도 부대를 창설하고는 대외 상황의 변화로 ‘김일성 암살’이라는 창설 목적이 무색해지자, 그들을 ‘무장 공비’로 둔갑시켜서 사살했다. 전두환 정권 때는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깡패 척결’이라는 명목으로 무고한 시민들을 끌고 가 학대했고, 김영삼 정부 때는 국가 경제가 어렵다는 사실을 쉬쉬하면서 경제난을 키우다 끝내 국민들을 실업의 나락으로 빠뜨렸다. 최근의 이명박 정부는 ‘한반도 대운하 사업’이 반대에 부딪히자 ‘4대강 정비 사업’이라고 이름만 바꿔서 이치에 맞지 않는 치수 사업에 막대한 국가 재정을 쏟아부었다. 『국가의 배신』은 국가가 국민을 배신하고 기만한 치욕의 역사를 차례차례 살피면서, ‘국가에 속고 살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숙고하게 만든다.

배신국가 국가의 거짓에 속아 길에서 죽어간 ‘국민방위군’
국민방위군 설치법 통과 후 전국 각지에서 징집된 장정들은 임시 수도인 부산까지 내려갔다. 한겨울인 12월의 혹한 속에도 국민방위군 장병들에게 겨울용 동복은 물론 군화조차 지급되지 않았다. 동복과 군화 관련 예산을 정부에서 배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초 장비인 동복과 군화도 보급하지 못하는 군에서 총이나 수류탄 같은 무기를 줄 리는 만무했다. 국민방위군을 담당한 전국 각지의 훈련소는 그들을 제대로 훈련조차 시키지 못하고, 그냥 다른 훈련소로 가라며 그들을 전출시키기만 했다. 국민방위군은 애초부터 적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었다. 국민방위군은 한국전쟁 초반, 서울 시민들이 북한군의 포로가 되어 북한의 의용군으로 탈바꿈하는 일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중공군과 북한군이 아군을 병사나 노역부로 쓰지 못하도록, 그들이 점령할 것으로 예측되는 지역들에서 미리 청장년들을 포섭하는 것이 국민방위군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이를 달리 생각해보면, 국민방위군은 애초에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공산군에게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그들을 데려다가 몽땅 죽여도 상관이 없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국민방위군 병사들이 보급 부족으로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병들어 죽은 것은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다.

폭력국가 무고한 국민을 깡패로 둔갑시킨 ‘삼청교육대’
입소 기준이 ‘인근 동네 주민들에게 미움을 받는 대상’일 정도로, 삼청교육대 인원 선별은 완전히 엉터리였다. 경찰들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 경찰들은 가벼운 경범죄 용의자, 심지어 평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마저 기회다 싶어서 마구잡이로 끌고 갔다. 길거리에서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거나, 부부싸움을 하거나, 술을 마시고 화투를 친 사람들, 끌고 가도 뒤탈이 없는 노숙자들까지 죄다 잡아갔다. 이밖에도 경찰이 집에서 자고 있는 가정주부를 찾아와서 ‘신원 조회 좀 하자’며 강제로 끌고 간 일도 있었다. 몸에 문신이 새겨져 있으면 무조건 조폭이나 불량배로 간주해서 잡아들였다. 그들 중 상당수는 자기가 무슨 이유로 끌려왔는지조차 잡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한 피해자는 자신이 군인들의 빨래를 해주러 전방 부대에 가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무능국가 국가의 적나라한 실체가 드러난 ‘세월호 참사’
세월호의 선장과 고위 승무원들은 승객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하고, 자기들끼리 구명정에 몸을 싣고 배 밖으로 달아났다. 승객들은 그 방송을 믿고 구조되기만을 기다리다가 목숨을 잃었다. 세월호에 탔던 모든 승객이 죽은 것은 아니다. 배 밖으로 나와 바다에 뛰어들어 구조를 기다린 승객들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어선에 구조되었다. 오전 8시 50분 무렵에 배는 이미 기울어지고 있었고, 그때까지 배에서는 ‘움직이지 말고 제자리에서 기다리라’는 방송만 흘러나왔다. 이때 승객들은 둘로 나뉘었다. 방송 내용을 그대로 믿은 사람들과 믿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책임자의 말을 믿고 그대로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믿지 않고 자기 목숨을 스스로 챙긴 사람들만 살았다. 이승만의 거짓 라디오 방송을 그대로 믿고 서울에 남았던 사람들은 죽고 다치고, 방송을 믿지 않고 서둘러 피난을 떠난 사람들은 살아남은 과거의 역사와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2317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