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동양철학의 이해 (독서)/1.동양철학사상

일본의 정토사상

동방박사님 2022. 4. 3.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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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본 불교와 절대 타력 신앙

일본의 정토 사상과 신란? 상당히 낯설다. 단어 자체가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일본이라는 국가 때문인데, 그동안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일반적인 감정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발간(“종교와 영성 연구” 전집 5권)되는 길희성 교수의 『일본의 정토사상』은 종교와 영성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낯섦을 넘어서게 하는 새로운 전망을 보여준다. 특별히 ‘신란의 절대 타력他力신앙’이라는 부제에서도 드러나듯이 자력적인 종교로 알려진 불교의 또 다른 측면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 대부분은 일본에 대하여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갖는다. 전반적으로 한국 불교는 일본 불교를 그다지 높이 평가하고 있지 않으며, 깊이 연구해야 할 동기조차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가 일본 불교를 연구하고 또 한국 독자들에게 이를 소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목차

머리말
제1장 이도易道
제2장 범부凡夫 신란
호넨을 만나다
숙업(宿業)의 자각
유배지에서의 신란
간토에서의 신란
신란의 염불관
교토로 돌아오다
제3장 신심信心
심적 현상으로서의 신심
신심의 역동성
신심과 타력
제4장 신심에 근거한 삶
역설적 구원
신심과 도덕적 책임
제5장 상相과 무상無相

부록 「일본의 정토 사상」에 대하여/ 얀 반 브라그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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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길희성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학위를,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비교종교학)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2011년부터 현재까지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다. 주요 저서로 『종교 10강』, 『인도 철학사』, 『일본의 정토사상』, 『지눌의 선사상』, 『보살예수』,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인문학의...
 

책 속으로

내가 생각하기로 신란은 일본 사상의 가장 좋은 면을 대표한다. 인간 실존의 문제를 안고 고민하고 씨름하는 그의 진지성과 정직성, 전통적 불교와 신도神道의 종교성이 지니고 있는 강한 현세성과의 명확한 단절, 개인의 구원을 향한 강렬한 열정 그리고 그가 세운 신앙공동체의 평등주의적 성격과 그의 인간적 겸손 등은 모두 인류 전체를 위한 항구적이고 보편적 가치를 지닌 신란 사상의 면모들이다.
--- [머리말] 중에서

헤이안조 말기에 사람들이 필요로 한 것은 세간적 안전보다는 초세간적 구원이었으며, 국가와 집단의 종교가 아니라 개인적 신앙이었으며, 옛 종교의 안이한 시각을 떠나 세계와 인간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종교였다. 말법 시대를 맞아 전통적인 해답들은 설득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효력마저 상실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구원을 향한 갈망은 유례없이 치열했으나 기성 교단은 이를 충족시킬 능력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난관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이것이 헤이안조 말기 일본 불교계가 직면했던 중심 문제였으며 그 해답은 곧 이도易道, 즉 남녀노소, 사회적 신분의 귀천 그리고 도덕적 선악의 공과에 관계없이 누구나 따를 수 있으며 모두를 구원할 수 있는 ‘쉬운 길’이었다.
--- [1장 _ 이도易道] 중에서

범부 중생이 너무도 악해서 악이 진실로 무엇인지 모른다면 상식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선악의 구별은 ‘거짓이요 잡소리’일 수밖에 없다. 신란은 아미타불의 은총에 접하게 됨으로써 바로 이 점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된 것이다. 죄악에 대한 그의 자각은 은총의 발견 이후 사라지거나 경감되기는커녕 더욱더 깊어지고 선명하게 드러나 그로 하여금 자기 밖에서 오는 구원에 매달릴 수밖에 없게끔 한 것이다.
신란에게 죄와 악은 숙세宿世의 업業이라는 깊은 뿌리를 지녔기 때문에 쉽게 근절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란은 죄악을 마치 그리스도교의 원죄 사상처럼 거의 결정론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죄악을 생사의 세계에 유전하면서 수많은 전생에 걸쳐서 축적된 업의 결과로 인식했던 것이다.
--- [2장 _ 범부凡夫 신란] 중에서

신란은 신심을 들음(聞)과 동일시한다. 오히려 들음을 신심과 동일시한다고 해야 더 정확할 말이 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듣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원이 일어나게 된 본말을 듣고 의심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또 신란은 말하기를 “신심은 여래의 서원을 듣고 의심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라 한다. 들음은 중생으로 하여금 아미타불의 이름과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그의 서원과 명호에 나타난 타력에 대한 믿음을 갖게 만든다는 것이다.
자력 구원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신란으로서는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해 회향되는’ 금강석과도 같이 견고한 흔들림 없는 신심이야말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참다운 불성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부처가 될 수 있는 그 어떤 가능성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내재적 가능성이 아니라 우리 밖에서 오는 아미타불의 선물로서의 가능성일 뿐이다.
--- [3장 _ 신심信心] 중에서

신심이란 ‘자연법이’로 작용하는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모든 것을 맡겨 버리는 단순하고 순수한 행위이다. 이와 같이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아미타불의 은총의 세계에서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와 같이 뛰노는 경지야말로 아마도 신란이 현세에서 누릴 수 있었던 최고의 경지, 최고의 지혜와 통찰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실로 선 불교적 ‘깨달음’에 매우 가깝게 접근한 경지였다고 말할 수 있다.
미래적 실재도 아니고 현재적 현실도 아닌 이 열반은 미래성과 현재성을 동시에 지닌 어떤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며, 바로 이것이 신란이 그의 신심 속에서 경험한 진실이며 그가 그러한 역설적 표현으로 뜻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예수가 이해한 하느님 나라(Kingdom of God)의 시간성에 관한 신학적 표현을 빌리면, 신심을 지닌 자들에게 열반은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다’(already, but not yet)이다.
--- [4장 _ 신심에 근거한 삶] 중에서

신란에 의하면 법성법신은 방편법신인 아미타불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으며 후자 또한 전자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법성법신은 결코 중생의 고통에 초연한 어떤 비인격체적 실재가 아니라 중생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고통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비의 성품을 지녔기에 스스로 상相의 제약을 감수하면서 법장보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가 하느님 아들의 육화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예수가 로고스의 유일한 육화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정토 불교에서는 진리의 역사적 매개자인 석가모니불 그리고 나아가서 그를 이은 정토 종사들까지 아미타불의 화신이라 믿는다. 우리가 만약 아미타불이 곧 그리스도임을 믿는다면,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는 무량광인 아미타불의 화신이며 석가모니불은 하느님의 아들, 즉 로고스의 또 하나의 육화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성서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빛이요 생명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는 아미타불이 된 법장보살의 모습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 준 존재로서 그의 육화라 해도 좋다. 정토 불교 신자들에게는 물론 아미타불의 은총의 신비를 계시해 준 석가모니불이야말로 그의 화신이다.
--- [5장 _ 상相과 무상無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일본 불교와 절대 타력 신앙

일본의 정토 사상과 신란? 상당히 낯설다. 단어 자체가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일본이라는 국가 때문인데, 그동안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일반적인 감정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발간(“종교와 영성 연구” 전집 5권)되는 길희성 교수의 『일본의 정토사상』은 종교와 영성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낯섦을 넘어서게 하는 새로운 전망을 보여준다. 특별히 ‘신란의 절대 타력他力신앙’이라는 부제에서도 드러나듯이 자력적인 종교로 알려진 불교의 또 다른 측면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 대부분은 일본에 대하여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갖는다. 전반적으로 한국 불교는 일본 불교를 그다지 높이 평가하고 있지 않으며, 깊이 연구해야 할 동기조차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가 일본 불교를 연구하고 또 한국 독자들에게 이를 소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불교를 연구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종교학자이며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바로 여기에서 저자가 특히 일본의 정토 신앙, 그것도 신란이라는 인물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타력他力신앙을 표방하는 정토 불교가 그리스도교와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민간 신앙이나 대중 불교의 차원에서는 ‘나무아미타불’을 연상할 정도로 정토 신앙이 널리 자리 잡고 있다. 정토진종의 창시자 신란은 타력 신앙을 극도로 몰고 감으로써 매우 독창적인 정토 사상을 전개한 일본 불교의 대표적 사상가이며, 그의 사상은 실로 정토 사상의 극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 ― 종교를 넘어서서 인간을 화합과 구원으로 이끌 수 있는가!

이 책은 주로 신란의 사상에 초점을 맞춘 연구서다. 신란은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에 걸쳐 90년의 생애를 보냈다. 그는 교토에서 태어나 4세 때 부친을 여의고 연이어 모친과 사별한다. 이렇게 고아가 된 그는 극심한 가난과 슬픔으로 어린 나이에 출가하게 되고 29세 때 쇼토쿠 태자의 현몽에 이끌려 스승 호넨(法然)을 만난다. 1205년 신란은 스승 호넨으로부터 『선택본원염불집(選擇本願念佛集)』의 서사(書寫)와 스승의 초상화 제작을 허락받는 등 두터운 신임을 얻는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호넨 교단에 대한 기존 교단의 견제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급기야 1207년 일부 염불승들의 풍기문제를 발단으로 전수염불 금지령이 내려진다. 그로 인해 호넨을 비롯한 제자들이 체포되어 유배를 당하게 되는데, 신란도 에치고(越後, 지금의 니가타현)로 유배된다. 유배 시절 에치고의 호족 미요시 다메노리의 딸 에신니(惠善尼)와 결혼한다. 1211년 11월 유배에서 풀려난 신란은 이듬해 1월 호넨이 입적하자 에신니와 함께 히타치(常陸, 지금의 이바라기현)로 이주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도호쿠(東北)지방의 교화에 힘쓰며, 나름의 사상을 심화시켜 간다.
신란이 교토에 머무르며 호넨 문하의 다른 타력 염불승들의 논저를 서사하여 제자 지도와 저술, 교화 활동에 힘쓰고 있을 무렵, 신란의 가르침을 빙자한 이단자들이 속출했다. 대표적인 예가 신란의 친아들이었던 젠란(善鸞)이다. 결국, 신란은 아들과 부자의 연을 끊는다. 이후로도 활발히 저술활동을 하던 신란은 1262년 11월 28일 입적한다.
본서를 통하여 우리는 신란의 사상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일본의 정토 신앙과 사상은 물론이요 일본 불교 전반의 특성을 이해하게 되는 것으로 발전할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기독교 신학 연구가이며 불교 연구가이기도 한 저자의 독특한 이력으로 인하여 이 책은 우리로 불교와 기독교의 교류를 비롯한 대화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가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저자는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단순한 학문적 관심의 대상 이상으로 여기고 있다. 저자는 두 종교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정신적 유산으로 사회 ? 문화 ? 인종의 장벽을 넘어서서 모든 인간을 화합과 구원으로 이끌 수 있는 힘을 지닌 종교라고 믿고 있다.
본서를 통하여 우리는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사용하고 있는 현격한 언어와 개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궁극적 진리의 차원에서 만날 수 있다는 기대와 가정을 가지게 될 것이다. 본서는 신란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학적 논의는 아니다. 일차적으로 신란 사상의 연구와 이해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서를 읽으면서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자연스럽게 만나 대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저자의 신란 이해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의 그리스도교 신학적 배경이 자연스럽게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것이 자신의 신란 이해에 장애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으며 동시에 신란의 정토 사상의 이해를 통해 자신의 그리스도교 이해 또한 영향을 받고 변화되었다고 고백한다.
본서는 다문화 - 다종교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할까를 고민하게 만들고 나갈 방향을 짐작하게 한다. 불교 혹은 기독교 등의 종교를 넘어서 오늘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종교에서 영성을 향하는 길로 우리를 안내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