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역사기억여행 (2010~) <여행지>/1.민주인권기억

4.19 혁명기념관

동방박사님 2023. 4. 14.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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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의 개요

원 인 

우리나라는 1945년 8월15일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되었으나 1950년 6월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온 나라가 황폐해지고 국민들의 생활은 곤경에 빠졌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국가를 재건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주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장기 집권에 몰두하여 민의를 거스른 독재 정치를 지속하고 부정. 부패가 난무했다. 국민의 신임을 잃은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간접선거에 의한 당선이 어렵게되자 직선제로 헌법을 바꾸어 2대 대통령에 강선 되었다. 당시 영구집권을 위해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을 없애는 내용으로 헌법을 고쳐 3대 대통령이 되었다. 1960년 3월15일, 4대 정.부통령 선거에는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여 이승만과 이기붕이 정.부통령에 당선됨으로서 국민들의 분노가 폭팔하게 되었다.

4.19혁명기념관 건물

진행과정 

 1960년 2월28일,  대구에서는 일요일임에도 학생들의 야당 유세참여를 막기 위해 교육 당국이 학생들을 강제로 등교시키자 시위가 일어나 3월14일까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대통령 선거일인 3월15일에는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폭로하여 선거부효를 외치는 시위대를 경찰이 총을 쏘며 진압하였다. 4월11일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누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학생과 시민들이 2차 마산시위를 벌였다. 4월18일에는 고려대 신학생들이 시위도중 정치깡패들에게 피습당하자 고교생과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전국으로 시위가 퍼져 다음날 4.19혁명이 이어졌다. 4월25일 대학교수단 258명이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시위에 나서자 소강상태에 바졌던 시위는 다시 활기를 띠었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총을 쏘며 시위를 진압하여 이 기간 중 총 186명이 사망하고 6,0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4월26일,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 일가족은 자살했다. 마침내 4.19혁명이 자유당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것이다

1층전시관 입구

의 의

첫째, 4.19혁명은 특정 주도세력이 없이 학생과 시민들이 부정선거와 부패한 권력에 대해 자발적으로 봉기한 저항운동이  었다. 둘째,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므로 국민을 위한 정치를 지향해야 하며,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받지 못하는 정권은 존립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셋째, 허약하고 무능한 정부, 경제 사회적 기반이 취약한 국가는 민주발전을 이룩하기 어렵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넷째, 해방과 더불어 수용된 서구 민주주의가 모방과 이식만으로는 정착될 수 없고, 우리나라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많은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다섯째, 20세기 말 일기 시작한 세계적인 student power의 하나로서 일본등 국제학생운동에도 영향을 주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