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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인권길 2 (기억의 터, 통감 관저 터, 위안부 할머니 기억공간)

동방박사님 2022. 7. 17.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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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통감관저

경술국치 이후 통감관저는 조선총독관저로 쓰였다. 1939년 새 총독관저를 경복궁 옛 후원 자리(현재 청와대 자리)에 세운 뒤부터는 역대 통감과 총독들의 업적이라 쓰고 만행이라 읽는다을 기리고 유물을 전시하는 시정기념관으로 쓰였다. 당시 매일신보에서는 시정기념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2층에는 17점의 사군자폭(四君子幅)이 걸려 있다. 이것을 보아가던 기자는 우뚝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는 방 안에 나섰다. 이 방은 합병조인실(合倂調印室). 이 방이 바로 30년 전 일한합병의 도장을 찍던 그 한순간을 가졌던 방인 것이다. 오늘의 조선을 낳아놓던 역사적 산실(産室)이요, 이 강산 백의인에게 새길을 밝혀준 봉화대(烽火臺)도 되었던 것이다. 여섯 칸 남짓한 방 안에 거울을 좌우로 이토공(伊藤公)으로부터 미나미 총독에 이르기까지 8대 통감 총독들의 흉상이 놓여 있고 중앙의 테블- 그 위에는 벼룻집과 잉크 스탠드가 있고 좌우로 네 개의 의자와 한 개의 소파가 놓여 있다. ‘, 이것으로서 완전히 우리는 한 형제요 한 임군을 섬기며 나아갈 길을 연 것이요하며 허허허하고 소리를 높여 웃는 옛 어른들의 환영이 눈앞에 움직이는 것 같다.19401122매일신보기사.

 

통감관저 건물은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남아있었다. 19464월에는 국립민족박물관이 들어섰고, 1950년에 국립민족박물관이 국립박물관으로 흡수되면서 남산 분관으로 쓰였다. 19546월에는 신설된 연합참모본부가 입주했고 국립박물관은 덕수궁 석조전으로 옮겨갔다.

 

정부는 시내 중구 예장동에 있는 '연합참모본부 건물'을 개수 내지 증축해서 국무총리 관저로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동 건물은 신관과 구관으로 되어 있는바 한일합병조약 체결 당시 합병조인을 하였던 구관은 건물이 낡았기 때문에 허물어 버리고 신관만을 개수 또는 증축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1960922동아일보기사.

 

1960년에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통감관저를 국무총리 관저로 쓰려고 했다. 그러나 19615.16 군사정변이 터져 중앙정보부가 생긴 이후 이 일대는 완전히 비밀스런 공간이 되었고, 구 통감관저 건물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거의 잊혔다.

 

통감관저 알림 표석

건물은 현재 헐려 사라진 상태이며 언제 헐렸는지도 알려져있지 않다. 한동안 이 자리는 그냥 빈 터로 남았으며 통감관저 터임을 알리는 그 어떤 구조물도 없었다. 그러다 2003년 경 부터 근현대문화재 전문가 이순우가 각종 자료를 뒤지며 3년간 추적하고 고증한 끝에 2005년에야 거의 망각에 빠진 통감관저 터를 찾아냈다. 그후 이순우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경술국치가 시작된 '통감관저 터' 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우고자 노력했지만, 서울특별시와 중구청의 비협조로 세우지 못했다가 2010829일에야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표석을 세울 수 있었다.

[출처 : 나무위키]

 

하야시 곤스케

일본 제국의 외교관으로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에도 시대 말기 아이즈 번에서 안세이(安政) 7(1860) 음력 32(양력 323) 출생하였다. 그가 9살이던 메이지 원년(1868)에 도바 후시미 전투로 할아버지 야스사다(安定)와 아버지 마타이치로(又一郎)를 잃었다. 이 때문에 아이의 몸으로 하야시() 집안의 가독(家督)을 상속받았다. 할아버지의 정식 이름은 '야스사다'지만 일반적으로는 '곤스케(権助)'라고 불렸는데 그는 할아버지의 통칭까지 물려받아 이후로 '하야시 곤스케(林 權助)'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어린 몸이지만 가독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계속 무진전쟁에 참가하여 아이즈의 영주와 함께 메이지 정부군에 맞서 싸웠다. 전쟁이 끝난 뒤 하야시 가문은 멀리 도나미번(斗南藩)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받아 고향을 떠났다. 그리하여 온 가족이 쌀 3홉을 배급받아 살기가 힘들어서 어머니는 지인을 믿고 다시 아이즈 번으로 돌아가 지인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생활했다. 이 때 할아버지의 친구인 육군 소좌 고다마 사네후미(児玉実文)가 옛 친구의 유족들이 이렇게 사는 사실을 알고 곤스케를 데려가 키워주었다. 고다마가 곤스케를 데리고 가고시마로 가던 중인 1877년 세이난 전쟁이 일어났는데 고다마가 군인인 덕에 곤스케 또한 전쟁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곤스케는 1878년 오사카전문학교(긴키대학)에 들어갔다가 도쿄대학 정치학과로 진학하여 1883년 졸업하였는데 도쿄대학 총장 와타나베 고키(渡辺洪基)가 추천하여 1887년 외무성에 들어가면서 그의 인생에 본격적으로 꽃이 피었다. 인천과 상하이의 영사, 영국과 청나라에 주재하는 수석서기관 등을 역임하고 1899년 외무부의 통상국장이 되었다. 1900년 한국 주재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받아 1906년까지 재임하였는데 이 무렵 가쓰라 다로(桂 太郎), 고무라 주타로(小村寿太郎)와 함께 '세 남자(三人男)'라고도 불렸다고 하는데 곤스케가 얼마나 비중있는 외교관으로 부상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주한 특명전권공사로 재임하는 동안 곤스케는 제1차 한일협약과 을사조약 체결에 앞장섰으며 1907년 남작 작위를 받아 화족이 되었다. 이후 청나라, 이탈리아, (신해혁명 이후) 중국, 영국 대사를 맡으며 계속 외교관으로서 삶을 살았고 1927년 일본으로 귀국한 후 추밀원 의원을 지내다가 1939627일 향년 80(79)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장남 林安1921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외교관이 되었고 사위 오카모토 다케조(岡本武三) 역시 외교관이 되어 주 이란 대사를 지냈다.

우습게도 하야시 곤스케의 고향 아이즈 번과 이토 히로부미의 고향 조슈 번은 그때나 지금이나 서로 반목하는 사이였다. 더군다나 하야시 본인도 어릴 적에 보신 전쟁을 직접 경험해본 사람이다. 그러나 한반도를 강점하겠다는 목표 앞에서 이 두 작자들은 지역감정도 잠시 잊고 하나가 되었다.

오늘날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 앞에서 남산인권숲 쪽으로 퇴계로26가길을 따라 들어가면 초입에 구 통감부 관저 터가 나온다. 1936년에는 관저의 경내에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을 세웠는데, 이듬해에 현 청와대 터에 총독관저를 완공하자 구 통감관저 터를 시정기념관으로 바꾸었다. 1945년 광복 후에는 통감관저 건물은 국립민족박물관, 국립박물관 남산분관, 국군연합참모본부 등으로 쓰이다 1960년 이후 철거되어 완전히 잊혔고, 하야시의 동상도 어느새 누군가가 파괴했다.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이 20058월 구 통감관저 터를 찾다가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을 받치던 좌대에 쓰인 판석 몇 점을 발견했는데, 여기에는 '남작하야시곤스케군상(男爵林權助君像)'이라는 명문이 있었다. 2010년에는 판석에 새긴 명문을 누군가가 훼손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20158월 서울시는 을사늑약의 치욕을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판석을 모아 야외에 거꾸로 세워서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하였다.KBS 보도 좌대 위에 있던 동상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출처 :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