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출생 1947년 2월 14일 / 미 군정 조선 경기도 부천군 오정면(현 대한민국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 사망 2011년 12월 30일(64세)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성별 남성 / 국적 대한민국 / 학력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 / 직업 정치인 / 배우자 인재근 / 자녀 슬하 1남 1녀 / 종교 천주교 (세례명:즈카리아) / 의원 선수 3 / 의원 대수 15·16·17 / 정당 민주통합당 / 지역구 서울 도봉구 갑(15·16·17) / 웹사이트 김근태의 평화와 상생을 위한 한반도재단 / 국회의원 / 선거구 서울 도봉구 갑(15·16·17) / 당선 횟수 3 / 임기 1996년 5월 30일~2008년 5월 29일 / 제43대 보건복지부 장관 / 임기 2004년 7월 1일~2006년 2월 9일 /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
김근태(金槿泰, 영어: Kim Geun Tae, 1947년 2월 14일 ~ 2011년 12월 30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생애
김근태는 1947년 2월 14일에 경기도 부천군에서 태어났다. 1965년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1960년대 무렵에 학생운동을 주도하여 손학규, 조영래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3총사’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까지 각종 재야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수배와 투옥을 반복하였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던 1985년 9월에 구속되어 민청련 사건으로 22일간 경기도경찰국의 고문기술자인 이근안 경감에게 고문을 받았다. 이근안의 고문에 김근태는 애원했고 이후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서울민사지방법원 합의41부(재판장 고현철 부장판사)는 1990년 전민련 결성사건과 관련하여 구속기소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홍성교도소에서 복역중인 전 민청연 의장 김근태(46)가 "1985년 9월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고문을 당했다"며 국가 등을 상대로 낸 5천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김씨가 경찰에 불법연행돼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한 것이 인정된다"며 "물고문 및 전기고문등 가혹행위는 범죄행위일 뿐만 아니라 고문을 금지하고 형사 피의자의 진술거부권을 보장한 헌법규정(12조2항)에 위배된다 김씨를 구속영장 없이, 또는 구속영장 발부 후 영장을 제시하지 않고 연행,구금한 것도 역시 불법행위이다. 고문피해사실의 유력한 객관적 증거인 金씨의 상처딱지가 구치소 재소자의 휴대품 영치를 규정한 행형법에 따라 구치소에 영치되지 않고 관계 교도관들에 의해 강제수거된 후 폐기처리된 것은 관계규정을 무시한 위법행위이다 이같은 불법행위들로 인해 김씨가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신체적,정신적으로 죽음에 버금가는 고통과 함께 그 영혼과 인격에 지울수 없는 상처를 받은 점이 경험칙상 인정되므로 국가는 이에 대해 금전으로나마 배상을 해야할 의무가 있다 아무리 고상한 명분이나 국가적 목적이 있는 수사라 하더라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무시한 고문을 통해 얻어진 사회안정과 국가안보는 무의미하다"는 이유로 "국가는 김씨에게 고문행위에 따른 위자료 3천 5백만원, 23일간에 걸친 불법구금 및 고문증거(상처딱지)탈취, 인멸행위로 인한 손해배상금 각 5백만원 등 모두 4천 5백만원에 대해 가집행조건을 붙여 지급하라"고 1992년 1월 30일 원고 승소판결을 내렸다. 김근태가 "1985년 9월 차안본부 남영동 분실로 끌려가 23일간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수사경찰관들로부터 물고문. 전기고문등을 받았다"는 이유로 검찰에 낸 고소사건이 무혐의 처리되자 서울고등법원에 재정신청을 냈으며 이것이 받아들여져 서울형사지방법원은 당시 고문을 한 김수현(56.전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경감)등 4명에게 징역 5년에서 2년까지를 선고했었다.
1996년부터 제 15, 16, 1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보건복지부 장관, 열린우리당 의장 등을 지냈다. 2008년 제18대 선거에서는 신지호 한나라당 의원과 겨뤘으나 낙선했다.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역임하였다.
지병인 파킨슨 병이 민주화 운동 도중 당한 고문으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2011년 12월 초 뇌정맥혈전증 투병사실을 외부에 공개하였고, 12월 말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2011년 12월 30일 오전 5시 30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6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 2016년 '민주주의자 김근태 상'이 제정되었다.
별칭으로는 민주주의자, 민주화의 대부, 세계의 양심수 등이 있다.
학력
청북초등학교 → 진위초등학교 → 원덕초등학교 → 양수초등학교 (졸업)
광신중학교 졸업 / 경기고등학교 졸업 /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
경력
1971년 2월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 수배
1974년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수배
1983년 민청련 초대 의장
1985년 민청련 사건으로 구속당해 고문 피해 (~1987년까지 복역)
1988년 배우자 인재근과 공동으로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
1989년 전민련 정책기획실장, 집행위원장 역임
1990년 전민련 활동으로 구속 수감 (~1992년까지 복역)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1996년 5월 ~ 2000년 5월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원 (서울 도봉구 갑)
1999년 국제금융박람회 추진위원회 위원장
2000년 5월 ~ 2004년 5월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서울 도봉구 갑)
2001년 한반도평화와 경제발전전략연구재단(한반도재단) 이사장
2001년 11월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2002년 11월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
2003년 10월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2004년 5월 ~ 2008년 5월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서울 도봉구 갑)
2004년 7월 ~ 2005년 12월 보건복지부 장관
2006년 2월 ~ 2006년 5월 열린우리당 최고위원
2006년 6월 ~ 2007년 2월 열린우리당 의장
2007년 8월 대통합민주신당 창당발기인 및 중앙위원
2008년 2월 통합민주당 상임고문
2011년 12월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사건
고문 피해자
“ 본인은 1985년 9월 한 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하였습니다(어지러운 듯 말을 중단하고 난간을 붙들면서 잠깐 쉬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9월 4일 각 5시간씩 두 차례 물고문을 당했고, 9월 5일, 9월 6일 각 한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 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차례, 13일 …… 13일 금요일입니다. 9월 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날이다."
이러한 협박을 가하면서 두 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 그 다음에 9월 20일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차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9월 25일날 집단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물론 잠을 못 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대략 절반쯤 됩니다. 고문 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먹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밥을 먹지 못합니다.... (중략) ...
결국 9월 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 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집단폭행을 가한 후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 김근태의 진술, 1985년 12월 19일 서울형사지방법원 118호 법정 서울형사지법 합의 11부(재판장 서성, 배석 김희근, 여상훈) 심리
흑색선전 피해자
2004년 11월에 충청북도 도청 소속 6급의 한 공무원이 김근태 형제, 숙부가 월북, 빨갱이라는 내용을 350차례 언론사 독자게시판에 올리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가족 관계
배우자: 인재근 / 딸: 김병민 / 아들: 김병준
상훈
2004년 미주한인입양인네트워크 감사패
1987년 로버트케네디 인권상 (인재근과 공동수상)
저서
2007년 5월 10일 《남영동》, 중원문화, ISBN 978-89-7728-715-0
2007년 6월 21일 《일요일에 쓰는 편지》, 샛별디앤피,
2004년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올벼, ISBN-10 8990987016
2001년 10월 31일 《희망은 힘이 세다》, 다우, ISBN-10 8988964128
1995년 6월 30일 《희망의 근거》, 당대, ISBN-10 8981630038
1992년 《열린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
1992년 《우리 가는 이 길은》
대중문화의 김근태
1998년 《육남매》김종철 (배역: 김정현)
2012년 《남영동1985》김종태 (배역: 박원상)
역대 선거 결과
실시년도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1996년 총선 15대 국회의원 서울 도봉구 갑 새정치국민회의 27,768표
38.85%
1위 초선
2000년 총선 16대 국회의원 서울 도봉구 갑 새천년민주당 34,233표
50.85%
1위 재선
2004년 총선 17대 국회의원 서울 도봉구 갑 열린우리당 42,583표
52.13%
1위 3선
2008년 총선 18대 국회의원 서울 도봉구 갑 통합민주당 31,335표
46.16%
2위 낙선
출처 위키피디아
책소개
포악한 시대에 맞서 ‘희망을 증언한 인간’ 김근태를 만나다
최근 1980년대 ‘어두웠던 시대의 대한민국'을 다룬 두 편의 영화가 개봉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 바로 《남영동 1985》와 《26년》이다. 특히 《남영동 1985》의 고문 장면은 관객들을 무거운 침묵과 분노로 이끌며 ‘용서할 수 없는 포악한 시대다.’, ‘믿기지 않게 참혹하다.’라는 관람평을 얻고 있다. 또한 이 영화는, 누구라도 몸서리칠 수밖에 없는 그 끔찍한 일들을 실제 겪은 현실의 인물이 바로 김근태라는 사실을,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까지 알리는 역할을 해냈다.
김근태 사후에 출간되는 첫 평전인『민주주의자 김근태 평전』은 일생을 ‘민주화의 길’에 바친 김근태의 삶을 조명한다. 철저한 민주화운동가이자 그 변화세력의 선봉장이었던 김근태가 1994년 새민주당의 부총재로 ‘야당 입당’하며 현실 정치에 뛰어들기까지의 과정과 배경 등을 꼼꼼히 다룬다. 김근태 사후에 출간되는 첫 평전으로, 김근태가 관통해야 했던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되살리면서, 그 시대의 한가운데서 ‘따뜻한 투사’ 김근태가 어떻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맞섰는지 잘 보여준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평전 전문 필자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저자 김삼웅은, 이 원고 집필을 마치고 나서 며칠간 끙끙 앓았다고 한다. 그만큼 김근태의 평전은, 그간 한국사의 굵직한 인물들에 대한 수 많은 평전을 작업해온 저자에게도 “어려운 숙제”였던 것이다. 『민주주의자 김근태 평전』을 통해 우리에게 김근태를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은 ‘인간 존엄을 말살한 포악한 현실’과 힘차게 맞서는 일로서도 의미 있는 일이다.
목차
프롤로그 /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삶과 죽음
1부 ‘투사’의 탄생, 1947-1982
1장 비극의 가족, 모범생의 소년기
‘고향 없는 소년’
세 형의 실종
경기고 ‘범생이’의 저항의식
2장 노동운동과 수배, 고통의 청춘
대학 신입생, 굴욕 회담을 반대하다
제적과 강제 징집
첫 지명수배
이 길이냐 저 길이냐
‘위장취업’과 동지 인재근
1980년, 노동자들의 성실한 친구
3장 ‘민청련’을 이끌다
‘민청련’ 창립
민청련 의장 추대, 고난의 행진
반독재ㆍ반외세 투쟁과 탄압
연대투쟁의 연대기
2부 고문과 인간의 존엄, 1982-1992
4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민주화 투쟁의 전위
구속, 5공의 제물
남영동의 인간망종들
“이래도 진술 거부할 거야?”
온몸에 전류가 흐르고
‘최후의 만찬’
5장 야비한 재판, 결연한 감옥살이
서울구치소 수감
‘고문 증거를 인멸하라’
고문경찰을 고발하다
당당하고 준열한 최후진술
감옥에서 부른 〈사랑의 미로〉
일곱 살 아들의 편지
자유의 박탈, 역사의 소명
6장 6월항쟁기, 외로운 옥중에서
6ㆍ29 항복선언, ‘민중 승리’의 소식
야권의 분열, 분노와 좌절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
2년 10개월만의 출소
전민련, 그리고 노태우 정권의 공안통치 본색
‘현대판 민족개조론자’
공안통치와 ‘합법정당론’
두 번째 감옥행
옥중에서 어린 자식을 그리며
‘고무신을 거꾸로 신을 자유’
‘서정시인’ 혹은 ‘사회학자’ 김근태
3부 정치와 영혼, 1992-2002
7장 민주대연합을 향해, 국회의원 김근태
만기 출옥
다시 ‘민주대연합론’
‘국민회의’ 결성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 창립
실망스런 김영삼 정권
간디의 길에서 네루의 길로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서
15대 국회의원 당선
현실정치에 뛰어든 재야 운동가
‘영혼을 지키면서’ 걷는 정치인의 길
‘DJP 연대’의 갈등
8장 ‘가장 뛰어난 국회의원’ 김근태
당내의 비주류
‘수평적 정권교체’와 ‘정치개혁’
‘북한에 강경ㆍ온건파가 있는가?’
‘공적 자금 제대로 쓰이나’
“정책대안으로 신뢰받고 싶다”
‘민주평화국민연대’ 창립
제16대 국회의원 재선
9장 차세대 지도자에서 좌절까지
청렴한 생활, 다양한 취미
운명적인 만남 1, 노무현
운명적인 만남 2, 이근안
‘한반도재단’ 설립
‘동교동계 해체’ 쓴 소리
족벌신문 비판
‘차세대 지도자’, 대선 출마 준비
‘반부패 대통령’이 되기 위한 양심선언
‘아름다운 꼴찌’ 후보 사퇴
4부 민주주의자의 죽음, 2002-2011
10장 노무현 정부와 국정 참여
노무현의 당선을 위해
이라크 파병의 고뇌
반쪽짜리 여당의 원내대표, 17대 의원 당선
개혁진영 152석 확보, 그러나……
열정을 바친 보건복지부장관 18개월
일요일에 쓰는 편지
11장 위기에 빠진 집권당의 당의장을 맡다
당의장 출마와 패배
열린우리당 비대위원장 선임
개성공단 방문, 춤 파문
한미 FTA 협상과 단식투쟁
대선 불출마 선언
18대 총선, 뉴라이트에 패배하다
12장 ‘2012년을 점령하라’
이명박 정권의 사찰
청빈한 삶, 시민 곁으로
“우리는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한 생애
후주
김근태 연보
추천의 말 / 망각에 맞서, 또렷한 기억을 위하여 ? 인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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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출판사 리뷰
2012년 12월 서거 1주기, 그가 남긴 ‘희망’을 기억하라!
인간 존엄의 가치에 헌신한 ‘아름다운 영혼의 정치인’
포악한 시대에 맞서 ‘희망을 증언한 인간’ 김근태를 만나다
차기 5년간 대한민국 국정을 이끌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 때문에 정치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다. 한편 최근에 개봉한 두 편의 영화는 1980년대 ‘어두웠던 시대의 대한민국’을 다루어 화제다. 《남영동 1985》와 《26년》이다. 영화에 대한 소감 중에 이런 말들이 있다. ‘용서할 수 없는 포악한 시대다.’, ‘믿기지 않게 참혹하다.’ 특히 《남영동 1985》의 고문 장면은 관객들을 무거운 침묵과 분노로 이끈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누구라도 몸서리칠 수밖에 없는 그 끔찍한 일들을 실제 겪은 현실의 인물이 바로 김근태라는 사실을,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까지 알리는 역할을 해냈다. 그처럼 역사가, 정치가 ‘기억의 제자리’를 찾는 작업이라면 ‘김근태’라는 기억은 우리에게 어떠한 좌표가 될까? 고(故) 김근태. 이제 12월 30일이면 서거 1주기를 맞는 김근태는 아직도 ‘남은 자’들에게 호소할 어떤 메시지가 있는 것일까. 놀랍게도 우리는 그것을 알아볼 수 있다. 김근태는 서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기는 글을 통해, 정확히 지금 이곳의 우리에게 이렇게 외쳤다.
“2012년을 점령하라!”
민주화의 길에 몸 바친 한 투사의 생애
『민주주의자 김근태 평전』은 일생을 ‘민주화의 길’에 바친 김근태의 삶을 조명한다. 김근태의 이력에는 두 가지의 굵직한 줄기가 있다. 민주화 운동가의 이력과 정치인의 이력. 1994년 새민주당의 부총재로 ‘야당 입당’하며 현실 정치에 뛰어들기 전까지, 김근태는 철저한 민주화 운동가였고 그 변화 세력의 선봉장이었다. 김근태가 자신의 생을 형극의 길이나 다름없는 ‘운동’에 바친 이유를 간명하게 설명할 방법은 없다. 주요 요인으로, 우선은 그가 겪은 시대가 그러했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몇 해 전에 태어나 전쟁통에 자랐고, 이어 박정희의 쿠데타를 보았으며 유신 정국에 살았다. 박정희가 죽으면서 비로소 자신의 신변을 온통 강제하던 긴급조치 9호에서 벗어나지만, 곧바로 전두환의 신군부 일당이 광주를 피로 물들여버린다. 1982년에는 부인 인재근(현 국회의원) 사이에서 둘째가 태어나는데, 바로 다음해에 김근태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하고 초대 의장까지 맡는다. 그는 대학생 때부터도 이미 그랬지만, 한시도 자유롭지 못한 ‘구속의 삶’을 이어간다.
1985년, 그 ‘구속의 삶’에 더 큰 비극이 닥친다. 김근태는 남영동에 끌려가 생사를 넘나드는 고문을 당하고 몸은 모조리 망가져버린다. 하지만 청년기 후로 쭉 품어온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은 더 커진다. 또 잠시, 1986년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에 걸려 2년 10개월간 수감된다. 출옥 후 다시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창설에 참여하며 민주화 운동의 선봉 자리로 돌아오지만, 다음해 또 2년간의 구속이 그를 기다린다. 그가 마지막 감옥살이를 마치고 출옥하자 세상은 1990년대 중반으로 가고 있었다. 이때 벌써 20년 넘도록 수배와 구속과 고문을 거듭 당해온 김근태였다. 앞서 적었듯, 김근태는 1994년을 기점으로 현실 정치에 입문한다. 김근태는 정치 입문에 계속 신중한 입장이었다. 거의 10여 년 전인 1985년에 김영삼으로부터 총선 출마를 권유받았을 때 김근태는 거절했다. 1991년 김대중으로부터도 신민당 부총재직을 제의받았지만 또 거절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김근태는 스스로 말하길 ‘네루의 길’을 가기로 하고, 정치인의 길에 들어선다.
“간디가 가는 길이 있고 네루가 가는 길이 있습니다. 재야운동은 사회운동과 정치운동의 길이 있습니다. 상징적으로 말하면 사회운동의 길은 간디의 길이고 정치운동의 길은 네루의 길입니다. 이 두 길은 서로 다르지만 지원하고 협력하는 길입니다”
김근태 자신이 정치 입문의 변을 거창하게 말한 적은 없지만, 그러한 변화를 결심한 계기는 앞뒤 행적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간디의 길’에서 헌신하던 때부터 끊임없이 ‘민주대연합’을 외쳤다. 야권의 정치적 연대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절박한 일인지를 온 몸으로 아는 이상 외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김근태의 정치인 생활은 애초부터 ‘대연합’을 소명으로 삼았던 성품처럼, 특히 삿되기만 한 정략과 기만들을 ‘정치’로부터 타파하는 일이었다. 더불어, 정의롭지 못한 기득권에 맞서는 투쟁의 연장이었다. 정치인 김근태는 수차례나 ‘차세대 대통렴감’을 묻는 설문에서 선두에 언급되고, 몸담고 있는 야당에서 수장에 오르기도 여러 번이었으니 ‘성공적인 정치인’이라 평가해도 무리는 없다. 하지만 김근태가 바란 것은 애초에 정치력이나 권세가 아니었기에, ‘김근태는 성공한 정치인’이라는 말은 지극히 어색할 수밖에 없다. 김근태는 정치에 품었던 높은 이상을 현실에서 못 다 펼쳤다는 점에서 ‘비운의 정치인’에 가깝다. 그러나 ‘민주화 투사 김근태’에 이어 ‘정치인 김근태’는, 한결 같이 따뜻하고 정직한 ‘인간 김근태’라는 뚜렷한 각인을 우리에게 새겼으니 ‘비운’이라는 말도 김근태에게 어울릴 수는 없다. 이 평전은 책의 제목처럼, 김근태는 어느 길을 걷든 어느 노선에 있든 ‘민주주의자 김근태’로서 한결 같았다는 점을 그의 발자취를 통해 우리에게 증명하고 있다.
따뜻한 인간, 정직한 인간
인간 존엄의 가치에 헌신한 인간 김근태를 되살려낸 최초의 평전
김근태가 자신을 ‘형극의 길’에 바친 이유를 간명하게 설명하지 못하겠다고 했는데, 유력한 이유 중 하나는 다름 아니라 그의 ‘성품’이다. 김근태는 고등학생 때만 해도 사회의식이 미미했다. 당시에는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생각도 없었고 오히려 당시
“박 대통령의 말이 대단히 합리적”이라고 여겼다는 사실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런 김근태에게 새로운 결심은 심어준 것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 포악한 시대의 현실이었다. 김근태는 수배와 구속과 고문을 겪을수록 흔들리는 쪽이 아니라 더 확고해지는 쪽이었다. 무엇보다 김근태는 거짓을 용납할 수 없었다. 명백한 진실을 말하는 일에도 온갖 고초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 작은 신념이라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 빤히 내다보이는 상황에서도 김근태는 다른 길을 택하지 못했다. 1997년에 그가 엄연한 시대 현실 앞에서 어떤 자세를 가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저항할 수 있어야 꿈꿀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작은 일들을 위해 많은 것을 걸었던 것이다.”
또한 사람들에게 더할 수 없이 따뜻했던 성품 또한, 그가 다른 길을 가지 못하도록 붙잡은 요인이지 않았을까 싶다. 『민주주의자 김근태 평전』에는 김근태가 가족 및 지인들과 주고받은 수많은 편지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가 자신과 인연을 나눈 사람들, 혹은 일면식도 없지만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던 서민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꼈는지는 그가 고른 단어 하나하나에 생생히 새겨져 있다. 이 평전은 김근태가 관통해야 했던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되살리면서, 그 시대의 한가운데서 ‘따뜻한 투사’ 김근태가 어떻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맞섰는지 잘 보여준다. 김근태 이력의 가장 도드라진 특징은, 언제나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했다는 점, 그러기 위해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희생의 크기가 한 사람의 몫을 초월하더라도 언제나 그렇게 했다는 점이다. 남에게 온정을 베풀기 위해 자신이 희생하는 김근태의 가치관은 일상생활에서 뿐 아니라 민주화 운동 경력과 정치인 경력에서도 여지없이 이어졌다. 저자 김삼웅은, 김근태의 삶을 상징할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로 ‘인간의 존엄’을 꼽는다. 포악한 군사독재에 맞서고, 민주주의를 지키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해 앞장서 싸우는 데 헌신한 김근태가 추구한 궁극의 가치, 그것은 한마디로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 아니었을까. 실로 평전이 기록하는 김근태의 생애는 그 자체로 ‘존엄한 인간’의 본보기를 보여주며, 모든 이의 존엄을 위해 싸운 한 민주주의자가 새긴 그 ‘희망’을 성찰하게 한다.
『민주주의자 김근태 평전』은 김근태 사후에 출간되는 첫 평전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평전 전문 필자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저자 김삼웅은, 이 원고 집필을 마치고 나서 며칠간 끙끙 앓았다고 한다. 김근태의 평전은, 그간 한국사의 굵직한 인물들에 대한 수 많은 평전을 작업해온 저자에게도 “어려운 숙제”였다고도 털어놓는다. 김근태는 물론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인물로, 그의 행적을 기록하고 보존할 필요는 당연하지만, 일생에 ‘정도(正道)’를 추구한 한 인물을 조명해보는 일로도 가치가 있다. ‘평전의 대가’ 김삼웅은 이 책으로 무려 20권 평전 출간 목록을 채웠다. 그는 앞으로도 『함석헌 평전』, 『안창호 평전』, 『홍범도 평전』 등을 집필하여 ‘인간 냄새나는 우리 현대사의 문제적 인물들의 삶’을 조명해나갈 계획이다. 김근태와 함께 한국의 민주주의를 올바로 지키고자 평생을 헌신한 또 한 사람의 ‘민주주의자’인 아내 인재근 여사(현 국회의원)는, 평전 출간을 기념하며 간곡한 말을 덧붙였다. 그의 말은 김근태를 기억하는 일이 단지 한 인물을 돌아보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확인해준다. 우리에게 김근태를 기억하고 되새기는 일은 ‘인간 존엄을 말살한 포악한 현실’과 힘차게 맞서는 일로서도 의미 있는 것이다.
“(…) 김근태를 기억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의 행적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민주주의와 인권의 퇴행을 막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작가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망각에 대한 투쟁이 권력에 대한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사에 대한 온갖 망언들은 과거의 권력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발이고, 권력 투쟁의 일부입니다. 화해와 망각은 다릅니다. 가장 또렷한 기억 위에서만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꼭 기억해주십시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3602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김근태는 갔지만, 그가 구상하던 ‘좀 더 나은 세상’을 이루는 숙제는 산 자들의 몫으로 남았다.”
2011년 12월 30일, 추운 겨울날,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이 예순넷의 나이로 숨을 거둔지 어느것 1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두 번의 선거가 있었고, 다시 겨울이 돌아왔다. 김근태가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활동하던 한반도재단(한반도 평화와 경제발전 전략 연구 재단)은 민주주의자 김근태 서거 1주기를 맞이하여, 김근태를 추모하여 그의 뜻을 되새기겠다는, 살아남은 이들의 마음을 엮은 책 『김근태, 당신이 옳았습니다』를 내놓았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마지막 당부”라는 제목으로 김근태의 유언이 된 그의 마지막 원고 ‘2012년을 점령하라’와, 그의 마지막 인터뷰 소개를 필두로 강금실, 고상만, 김정길 등 장례식 기간 동안 여러 매체에 실렸던 추모의 글들을 모아 정리한 두 번째 부분이 이어진다. 마지막에는 김근태의 유년 시절부터 학생 시절, 민주화운동 과정을 거쳐, 정치에 입문해 ‘민주대연합’을 모색하다가 영면에 들기까지.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삶을 소략하나마 주요한 역정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훑고 있다. 비록 2012년을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책 속에 담긴 글들을 통해 김근태는 무엇을 위해 일생 동안 싸워 왔으며 또 그가 우리에게 남긴 과제가 무엇인지를 가슴 깊이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목차
책을 엮으면서 - 당신이 그립습니다 _ 최상명
1부 마지막 당부
2012년을 점령하라 _ 김근태
인터뷰 “분노하고, 도전하라”_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
민주주의자 김근태, 우리 가슴에 묻다
화보 _ 빈소에서 장지까지
2부 김근태, 당신이 옳았습니다
미안해요, 김근태
아름답고 진지했던 인간… 선배님은 역사였습니다 | 강금실
풀잎처럼 부드럽고 대추씨처럼 단단한 존재 예술가여 | 김형수
당신이 베푼 사랑, 이제 국민이 당신에게 돌려주고 있습니다 | 손학규
미안해요, 김근태! 당신과 함께여서 행복했습니다 | 유은혜
청취자, 유권자 그리고 김근태 | 이갑수
김근태의 마지막 말, “분노하라, 투표하라!” | 이인영
착한 사람들이 상을 받는구나, 하게 하소서 | 함세웅
고마워요, 김근태
‘오비추어리’와 ‘커튼콜’: 김근태 | 김호
우리가 잊고 있던, 김근태 선생의 또다른 길 | 박태견
謹弔 김근태: 그만한 정치인을 보지 못했다 | 신정록
김근태, ‘반독재 20년’만큼 치열했던 정치 역정 | 윤태곤
좋은 정치인, 김근태가 우리에게 남긴 무거운 숙제 | 이남주
생각과 행동이 일치한 드문 사람, 그가 할 일 아직 많건만 | 이명재
스스로의 선택으로 ‘거절된 자’의 길을 간 김근태 | 이해학
우리에게 김근태는 영원한 ‘희망의 근거’다 | 최경환
기억할게요, 김근태
김근태에게서 들은 마지막 메시지, 이웃과 ‘함께 살기’ | 고상만
아름다운 꼴찌들이 힘 모을 게요 | 김상곤
김근태 동지여, 이 땅 위의 큰 별이 되어 조국을 지켜 주시기를 | 김정길
진솔하고 겸허한 삶 지켜 온 당신께 감사합니다 | 김해자
따뜻하고 정중한 목소리, 아직도 기억납니다 | 박경철
분노를 넘어 인간적 고결함의 시대로 | 안병진
내 기억 속의 김근태 | 이기수
따뜻한 민주주의자 김근태 | 이준구
김근태를 가슴에 묻고 “2012년을 점령하라” | 전홍기혜
3부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걸어온 길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삶과 꿈 _ 성한용
김근태 연보
책 속으로
지금 창밖에선 11월 큰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바람도 드세서 낙엽이 꽃잎처럼 날립니다.
이젠 11월과 겨울이 불편합니다.
당신이 많이 아팠던 11월이었고, 당신이 우리 곁을 떠난 겨울이었지요.
인재근의 11월이 더 춥고 더 무거워졌습니다.
며칠 전 버마에 다녀왔습니다.
아웅산 수치 여사를 만나고 이런저런 얘기를 했습니다.
조국과 국민에 대한 사랑과 민주주의에 대해 확고한 신념,
온화하면서도 강인한 눈빛, 지적이고 기품 있는 몸가짐이
당신과 참으로 비슷했습니다.
당신과 수치 여사가 만나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금방 두 살 터울의 다정한 오누이같이 되었을 겁니다.
다른 약속을 취소해서라도, 정겨운 미소를 주고받으며
정치, 역사, 문화, 예술 등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누었을 겁니다.
당신이 남긴 흔적이 매우 큽니다.
당신을 기억하는 많은 분들이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남영동은 영화로 만들어졌고, 당신을 주제로 학술행사도 열립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민주주의연구소, 고문치유센터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세상 그 무엇보다
당신이 남긴 가장 큰 흔적은 바로 인재근입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국회의원이 되어, 당신의 이름으로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훗날 하늘나라에서 당당하게 당신을 만날 수 있도록,
당신이 못다 이룬 뜻을 꿋꿋이 이어 가겠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보고 싶을 줄 몰랐습니다.
늘 당신을 사랑합니다.
2012년 11월
인재근
출판사 리뷰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첫 부분은, 맨 먼저 “마지막 당부”라는 제목으로 김근태의 유언이 된 그의 마지막 원고 ‘2012년을 점령하라’와, 그의 마지막 인터뷰(2011년 7월 5일, 프레시안 게재)가 소개된다. 그에 뒤따르는 “민주주의자 김근태, 우리 가슴에 묻다”는 닷새에 걸친 그의 장례식 이모저모를 스케치한 화보 페이지, 그리고 김근태를 추모하는 짧은 글을 적은 포스트잇이 빼곡하던 ‘추모의 벽’에서 뽑은 글로 구성되어, 한 해 전에 겪었던 우리의 안타까움과 슬픔을 조용히 되새기게 한다. 두 번째 부분 “김근태, 당신이 옳았습니다”는 장례식 기간 동안 여러 매체에 실렸던 추모의 글을 모아 정리했다. 강금실, 고상만, 김상곤, 김정길, 김해자, 김형수, 김호, 박경철, 박태견, 손학규, 신정록, 안병진, 유은혜, 윤태곤, 이갑수, 이기수, 이남주, 이명재, 이인영, 이준구, 이해학, 전홍기혜 , 최경환, 함세웅, 이 스물세 사람의 추모글은 저마다의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인연을 통해 김근태의 삶과 이력의 다양한 단면들을 이야기하는데, 무엇보다 그에게 빚진 자로서 미안해하고, 고마워하고, 그러면서 그의 뜻을 잊지 않고 새겨 나가겠노라 다짐한다. 세 번째 부분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걸어 온 길”은 한겨레신문 성한용 기자가 정리한 ‘김근태의 삶과 꿈’이다. 유년 시절부터 학생 시절, 민주화운동 과정을 거쳐, 정치에 입문해 ‘민주대연합’을 모색하다가 영면에 들기까지,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삶을 소략하나마 주요한 역정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훑고 있다. 이 글을 통해 필자는 김근태는 무엇을 위해 일생 동안 싸워 왔으며 또 그가 우리에게 남긴 과제가 무엇인지 밝히고자 하였다.
“김근태는 갔지만, 그가 구상하던 ‘좀 더 나은 세상’을 이루는 숙제는 산 자들의 몫으로 남았다.”
“2012년을 점령하라!” 김근태가 우리에게 남긴 이 마지막 당부를 2012년의 우리는 지키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 마지막 당부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그것이 구현되기를 꿈꾸던 숱한 약자들을 깊은 절망감에 빠뜨렸다. 그러니, 그의 이 마지막 당부는 여전히 우리에게,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실패한 민주 진보 진영과 그 지지자들에게 남겨진 소중하고도 무거운 과제인 바, 우리는 또다른 이름의 희망을 싹 틔워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큰 스웨덴’을 모델로 하는 ‘민주적 시장경제’를 설파했고, 병상에 눕기 직전까지도 ‘제2차 민주대연합’을 이루기 위한 ‘국민대오’를 구상하던 그의 뜻과 정치 철학은 여전히 우리에게 절실하고 유효한 과제인 것이다. 이것이 유난히 춥게 느껴지는 이 두 번째 겨울에, 『김근태, 당신이 옳았습니다』라는 책이 민주주의자 김근태를 추모함과 더불어 우리에게 더더욱 유의미하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
어찌하여 이런 날들이 계속 이어지는 걸까?
세상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고 했어
…
승리의 환희 앞에서 축배를 드는
한때의 수도승들이 늠름한 장군처럼
제도와 권력의 블랙홀로 도취해 들어갈 때
세상은 날마다 진보하는 거야, 수다 떠는 도시
골목과 골목, 사람과 사람 틈을
탐욕의 홍수가 우당탕 쓸고 갈 때
…
사랑을 믿을 수 없을 때
따사로운 정오의 햇살이 낡아 보일 때
간절히 바라던 일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을 때
탐스런 눈송이들이 허술한 나뭇가지 위에서 녹아버릴 때
모두 괴물이 된 것 같아. 심지어는 나조차 믿을 수 없을 때
그때 저 멀리서 떨고 있는 별의 이름을 불러
불타버린 희망의 음성이 남아 있지 않을까?
쓰다버린 낡은 휴대폰 폴더에
새로 구입한 스마트폰 카카오톡의 난삽한 사투리들 속에
그래도 그 젊음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까?
인류 진화의 최전방에 다다른 양심의, 지성의, 자유의 이니셜
GT. 어느 겨울 새벽빛 속으로 떠나버린 오래된 목소리
GT. 아, 사라진 나의 별
- 김형수 시인이 ‘고 김근태 의장의 죽음에 부쳐’ 쓴 조시 〈사라진 별을 기리는 노래〉 중에서
김근태의 생애
김근태는 1947년 2월 4일 경기도 부천시에서 태어났다. 1965년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1960년대 무렵에 학생운동을 주도하여 손학규, 조영래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3 총사"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까지 각종 재야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수배와 투옥을 반복하였다. 전두환 정권시절이던 1985년 9월 39세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23일간 경기도 경찰국의 고문 시술자 이근안 경감에게 고문받았다.
서울민사 지방법원 합의 41부 (재판장 고현철 부장판사)는 1990년 전민련 결성 사건과 관련하여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홍성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전 민청연 의장 김근태 (46)가 ' 1985년 9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치안본부 (현 경찰청) 대공분실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고문을 당했다"며 국가 등을 상대로 낸 5천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김 씨가 경찰에 불법 연행돼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한 것이 인정된다며~ (중략)
1996년부터 제15,16,1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모건 복지부 장관, 열린 우리당 의장 등을 지냈다. 2008년 제18대 선거에서는 신지호 한나라달 의원과 겨뤘으나 낙선했다. 민주당 상임고문을 역임하였다.
지병인 파킨슨 병이 민주화운동 도중 당한 고문으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2011년 12월 초 뇌 정맥 혈전증 투병 사실을 외부에 공개하였고, 12월 말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2011년 12월 30일 오전 5시 30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6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 2016년 "민주주의자 김근태 상"이 제정되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4975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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