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조선시대사 이해 (독서>책소개)/3.조선의전쟁

임진왜란 (2023)

동방박사님 2023. 4. 20.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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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전쟁사는 단순한 전투사의 총합이 아니다!

한국에서 ‘임진왜란’에 대한 이미지는 역사의 질곡과 권력의 정당화, 혹은 필요에 따른 ‘역사의 정치화’·‘선택적 기억’을 통해 때로 과장되고 때로 왜곡된 형태로 해석되어 왔다. 특히, 이순신과 의병처럼 이들이 비록 국난극복의 영웅임에 틀림없다 해도, 전쟁에 대해 일부 전투사나 지나치게 개개 인물들(대부분은 이순신 연구)에만 집중함으로써 임진왜란 자체의 역사적 의미를 축소시키고 오히려 편향시키는 문제를 만들어 냈다. 그러다 보니 실제에 입각한 임진왜란의 역사상(歷史像)은 올바르게 정립될 수 없었다. 그 최대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임진왜란을 조선과 일본, 혹은 조선·명과 일본의 전쟁으로만 보는 단순한 ‘일국사’ 시각과 전투사의 총합을 전쟁사라고 잘못 파악하는 시각이다. 임진왜란은 조선·명·일본이 복잡하게 얽힌 ‘동아시아 국제전쟁’이었고, 조선에 파견된 명군에는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군사들도 편입되어 있었다. 물론 류큐와 동남아 지역 국가들이 임진왜란과 직·간접으로 관련되었던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연구가 되어야 할 과제다.

목차

들어가며

1장 임진왜란 연구의 현황과 과제

머리말
한국학계의 임진왜란 연구현황
일본학계의 임진왜란 연구시각
맺음말을 대신하여

2장 임진왜란 원인론

머리말
한국학계
일본학계
패전 전 / 패전 후
맺음말

3장 동아시아 속의 임진왜란

머리말
도요토미 권력의 조선침략 계획
명분 없는 침략-임진왜란
파죽破竹의 진격 / 조·명군의 반격
강화 없는 ‘강화교섭’
허무한 전쟁-정유재란
맺음말

4장 정응태무주사건丁應泰誣奏事件과 강화교섭

머리말
정응태무주사건의 발생과 강화교섭
명·일 장수들의 강화교섭 / 제1차 정응태무주와 조선의 대응/ 제2차 진주사 파견
제2차 정응태무주사건
조선의 대응
맺음말

5장 명군 유철留撤을 둘러싼 조·명 교섭

머리말
제1차 철병-명의 ‘3만 유병안’과 조선의 ‘1만5천 유병안’
제2차 철병-명의 ‘1만5천 유병안’과 조선의 ‘8천 유병안’
제3차 철병-명의 ‘1만 유병안’과 조선의 ‘3천 유병안’
명군의 완전 철병과 조선의 ‘1천 유병안’
맺음말

6장 정유재란 종결 전후의 강화교섭과 조·명·일 3국의 동향

머리말
정유재란 종기의 강화교섭과 조선
명·일 장수들의 철병 교섭 / 쓰시마 정벌론 261
정유재란 종결 직후의 강화교섭
강화교섭에서 화호교섭으로의 전환
맺음말

7장 조·일 화호·통호 교섭

머리말
명군 철수 후의 조선과 명
쓰시마 기미론 313 / 명의 동아시아 전략의 변화
조선과 쓰시마의 화호교섭
정탐사 파견과 조선·쓰시마의 화호관계 성립
맺음말

8장 조·일 화호 관계의 성립

머리말
조선·쓰시마의 화호 성립
‘회답겸쇄환사’ 파견을 둘러싼 조·일 교섭
맺음말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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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이계황
 
1954년 9월 충남 당진군 면천 출생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대학원 사학과 석사 졸업
일본 교토대학 박사과정 졸업(문학박사)
현 인하대학교 명예교수
전 인하대학교 문과대학 일본언어문화학과 교수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전 외교통상부 독도정책 자문위원
전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
전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검정심의회 위원장
 
 

출판사 리뷰

임진왜란은 한국과 일본 양국 모두 최대의 역사업적을 자랑하는 연구 주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임진왜란은 그 원인조차 정설이 없고, 임진왜란과 관련한 정응태무주사건, 정유재란 말기의 강화교섭과 정유재란 종전 직후의 강화교섭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다시피 하며, 임진왜란 후 벌어진 국교 재개 교섭을 규정한 요인들도, 시기구분에 대해서도 명확하지 않다. 특히 명나라 원군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군사권·외교권이 어떻게 변화하고 어떤 과정을 통해 다시 회수되는지에 대해서도 일관된 관점이 없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 전체 과정(조·명·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갑갑한 마음이 들게 된다. 기존의 임진왜란 연구 경향, 즉 일국사 시각, 전쟁사 없는 ‘전투사’, 타자 없는 역사, 편향된 소재 중심의 연구, 사안들의 관계에 대한 미천착 등 때문이다. 많은 연구성과가 축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연구가 재점검되고 재정립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이번에 새로 출간된 『임진왜란-동아시아 국제전쟁』에는 이러한 깊은 고민들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 일본근세사를 전공한 저자 이계황 인하대 명예교수는 이미 두 권으로 된 『일본근세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을 출간하여 근세기 일본의 모습을 개괄적이되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그려내 보였는데, 이번 책을 통해 평생 일본사를 연구하며 숙제처럼 껴안고 고민하던 임진왜란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었다. 책은 제목 그대로 머리말에서부터 임진왜란을 조·명·일이 긴밀하게 관련된 ‘동아시아 국제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시작하였다. 물론 단순히 명과 류큐, 그리고 동남아 여러 국가가 임진왜란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만 들어, 임진왜란을 ‘동아시아 국제전쟁’이라고 성격 규정한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 자체가 조선·명·일본 3국의 국가 이해가 서로 뒤얽혀 있었고, 해결방법 역시 이 3국의 이해관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오랜 전쟁 기간도 대부분 ‘외교교섭’으로 채워졌고, 임진왜란 이후의 3국 사이의 관계도 이전과는 다른 형태를 보이게 되었다.

저자는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개 과정에 대해, 일본은 ‘전국 규모의 대명영국제(大名領國制)’가 갖고 있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명나라는 ‘순망치한론, 문정론’이라고 하여 명을 지키기 위해 조선을 전쟁터로 만드는 군사전략과 전투를 고려하였다. 조선은 책봉체제라는 틀을 이용하여 명나라에 일본을 방어할 원병을 요청하여 전쟁을 수행했다. 여기에서 특히 ‘순망치한론, 문정론’에 따른 명의 원군 파견은 조선의 군사·외교권을 근본에서 규제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임진왜란을 다룬 영화나 소설을 보면서 ‘죽도록’ 고생해서 승리를 거두고도 조선의 장수가 명나라 장수에게 꼼짝도 못한다든가 일견 말도 안 되는 명령까지 받아들이며 울분을 참는 것으로 묘사되는 모습에 ‘왜 저러냐’며 답답한 심정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임진왜란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전쟁중이나 종전후 조·일, 조·명 교섭은 복잡다단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종결 이후의 동아시아 국제관계도 기존의 책봉체제 중심의 명분 외교에서 벗어나 현실을 중시하는 외교관계로 전환하게 된다.

저자는 조선 민중에게 임진왜란은 ‘일본’과의 전쟁이자 ‘명군’과의 전쟁이었고 ‘지배층’과의 전쟁이었다고 단언했다. 일본 민중에게도 이 구조는 마찬가지였다(‘조선’과의 전쟁, ‘명군’과의 전쟁, ‘지배층’과의 전쟁). 일본에게 임진왜란은 조선·명과의 전쟁이었고, 명에게는 일본과의 전쟁이었다(임진왜란이 명나라 민중에게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한 판단은 보류하지만 정유재란 때 동원된 조선군이 3만 정도였던 데 비해 조선파견 명군은 10만 이상이었다고 하니 그로 인한 피해는 상당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저자가 임진왜란의 최대 피해자였던 조선·일본의 민중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못할 것이라고 미리 고백하였는데, 이 책의 구성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면서도 전쟁에 비참하게 노출된 민중을 전쟁주체로서 장악할 자신과 논리를 구축하지 못한 점을 반성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조·일 국교 재개 교섭 역사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여전히 절실한 이유

책은 임진왜란 발발 직전부터 정유재란 후 조·일 국교 재개까지의 시기를 다루었는데, 오래 전부터 주장해 온 동아시아 지역사의 입장과 전투사가 아닌 전쟁사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책의 도입부인 「1장 임진왜란 연구의 현황과 과제」와 「2장 임진왜란 원인론」은 임진왜란 연구 시각과 연구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한 기초작업에 해당한다. 저자는 학자들이 인과법칙을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임진왜란 발발 원인을 둘러싸고 여전히 정설이 없는 희한한 상황을 언급하며, 이것은 역으로 임진왜란 연구에 일관성과 논리성, 그리고 역사상이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보았다.

「3장 동아시아 속의 임진왜란」에서는 동아시아 지역사로서의 임진왜란상(동아시아 국제전으로서의 임진왜란)에 대한 입체적, 동태적, 총합적인 서술을 시도하였는데, 특히 조·명·일의 타자성을 인정한 전투사가 아닌 전쟁사로서의 임진왜란상=동아시아 국제전쟁상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계획, 명분 없는 침략(임진왜란), 강화 없는 ‘강화교섭’, 허무한 전쟁(정유재란) 순으로 기술하며 임진왜란의 전체 역사상을 추구하였다.

「4장 정응태무주사건(丁應泰誣奏事件)과 강화교섭」에서는 정유재란 말기에 명나라 관리 정응태가 경리 양호가 명 조정에 올린 울산성전투 보고를 허위라고 상주하면서 시작된 사건을 다루었는데, 이 사건에는 명조정의 일본과의 전쟁을 둘러싼 강화파와 주전파의 대립, 임진왜란 발발과 관련한 ‘조·일 음결’ 즉 조선과 일본 밀약설에 대한 의구심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자칫 조선이 임진왜란 발발 책임까지 뒤집어쓸 사안이었고, 이 때문에 조선이 군사·외교권을 근본에서 박탈당할 수도 있었다. 저자는 이 무주사건의 발생과 그에 대한 조선의 대응을 자세히 다루어 명조정과 조선에 파견된 명 장수들 간의 임진·정유재란에 대한 태도의 차이를 명확히 하면서, 명조정의 동아시아전략의 일단과 이에 대한 조선의 대응을 살펴보고 사건의 역사적 의의를 밝혔다. 특히 이 사건은 전쟁 이후 조·명 외교·군사 관계, 조·일 국교 재개 교섭을 근저에서 규제한 요소 중 하나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5장 명군 유철(留撤)을 둘러싼 조·명 교섭」은 조선에 파견된 명군의 주둔과 철병을 둘러싼 교섭 과정을 세밀하게 다루었다. 유철 문제는 명군의 조선 내원(來援)과 논리상 수미관계에 있으며, 명과 일본 장수들 간의 강화교섭, 일본군의 재침 가능성과 그에 대한 조·명의 대응과 관련되어 있다. 조선에게는 대일본 강화·화호 교섭과 조선의 군사·외교권 회복, 정응태무주사건과도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조선이 풀어야 할 최대의 정치·군사·외교 사안이었다. 이 문제는 오늘날 외국군의 주둔과 철수를 어떻게 보아야 하며, 외국군의 철수에 얼마나 지난한 노력과 고민이 필요한지 새삼 돌아보게 만든다.

「6장 정유재란 종결 전후의 강화교섭과 조·명·일 3국의 동향」에서는 정유재란 종결 전후 시기에 이루어진 명·일 장수들 간의 강화교섭과 조·일 교섭 문제를 다루었다. 교섭에 대해서는 보통 임진왜란기를 주로 다루고, 정유재란기는 소홀한 편인데, 사실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 이후의 조·일, 명·일 장수들 간의 교섭은 정유재란 종기의 강화교섭을 전제로 진행된 것이었다. 여기에는 조선 왕자·대신의 일본 파견, 조선의 일본 입조(入朝), 조선주둔 명 장수들이 일본군의 철수로 확보를 위해 명조정의 허락도 없이 비밀리에 인질을 일본으로 보낸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조선과 명 장수의 대일 강화 교섭, 조선과 명 장수들의 유철 교섭, 조·일 음결 문제까지 역시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저자는 조·명·일의 상황 변화에 주목하면서 이 문제들을 추적하였는데, 다음 장에서 다룰 조·일 화호교섭의 본격화가 이 문제들이 해결을 보고나서야 진척되므로 그 전제가 되는 이 문제들을 명확히 하였던 것이다.

「7장 조·일 화호·통호 교섭」은 명군이 철수한 후의 조·일 화호교섭을 다루었다. 명군 철수는 명나라의 동아시아전략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 조·일 화호를 인정하겠다는 의미였다. 조선은 철수를 통해 군사·외교권을 확보하고 적극적으로 일본과의 외교에도 임하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조선이 독단적으로 일본과의 외교를 전개할 입장은 아니었다. ‘조·일 음결’ 문제는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었고, 따라서 조·명 관계가 우선 정상화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한편, 쓰시마는 경제적 이익을 위해 조선과의 교섭에 최선을 다했고, 히데요시를 이어 일본 최강자로 올라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외교권을 장악하여 권력을 강화하려 하였다. 이런 배경 하에 조선과 쓰시마의 화호관계가 성립하고, 일본과의 화호교섭으로 넘어간다.

「8장 조·일 화호 관계의 성립」에서는 조·일 화호 교섭 과정과 조·일 교린관계의 성립을 다루었다. 조선이 일본과 화호교섭에 나섰다는 것은 조선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자주적인 군사·외교권을 명으로부터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일본은 이에야스의 장군직 취임과 관련하여 조선에 신사(信使)의 파견을 지속적으로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런 교린관계의 성립을 위해서는 조선의 경우, 일본 통치권자의 확인, 임진왜란 발발 책임론, 그에 따른 사과와 그 표현으로서의 신뢰성 확보, 국서의 교환 방법 및 조건 등 산적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 책이 다룬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16~17세기에 일어난 그저 옛날 역사로만 보고 넘길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저자는 서글퍼하였다. 우리는 1953년 휴전협정 성립 후 휴전상황(남북 군사대치)이고, 남한에는 적지 않은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우리는 이 남북 군사대치 상황과 미군 주둔, 그리고 그것과 관련한 남북 갈등의 구조 해소를 위한 어떠한 노력을 얼마나 했을까? 북핵과 관련하여 한·미, 미·북, 남·북의 군사·외교 관계에서 자주 회자되는 ‘코리아 패싱’이나, 남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외교 규제 같은 민감한 문제들은 이미 임진왜란과 종전 후 조·일 국교 재개 교섭기에도 보였다. 조선은 명군 철수와 조·일 국교 재개 교섭을 둘러싸고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피나는 노력 끝에 군사·외교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도 임진왜란과 조·일 국교 재개 교섭 역사에 대한 진지한 연구는 필수불가결 수밖에 없다. 임진왜란 연구를 그저 가볍게 권력과 정권의 이데올로기 문제로 보면 안 되는 이유다.

짧게 보아도 저자는 25년 전부터 명군의 유병(留兵)과 철병 문제를 제기하고 또 조선의 군사·외교권을 근저에서부터 규제한 정응태무주사건을 제기하였다. 그럼에도 역사학계는 여전히 이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답을 찾으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저자 스스로 자신을 새털처럼 가벼운 연구자로 표현하면서 자신을 포함한 역사학자들의 얕은 현실인식과 그것에 바탕한 역사서술에 계속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끝을 맺었다. 이는 사실 연구자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 역시 진지하게 숙고해 볼 문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