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조선시대사 이해 (독서)/3.조선의전쟁

난중일기

동방박사님 2022. 11. 5.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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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군자의 모습이 가장 잘 어울리는 명장의 징비록
이기고 나서 전쟁을 시작한 준비과정의 일기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앉아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끊나니


이 시조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중에 경남 통영 한산도에 주둔하면서 지은 것으로 잠들지 못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통절하게 담아낸 비탄의 글이다.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라 걱정에 홀로 잠 못 이루며 슬픔에 잠긴 충무공 이순신의 애끊는 심중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것 같아 가슴을 멍멍하게 한다.

이순신 3부작을 연출한 김한민 감독은 “잠들기 전 『난중일기』를 습관처럼 읽으면서 남의 일기를 흠처 보는 재미도 있었다.”고 했고, 영화 ‘한산’에서 이순신역을 연기한 박해일은 “이순신 장군은 붓과 활이 잘 어울리는 군자다운 무인”이라고 했다. 조선 역사의 가장 치욕적인 고통과 함께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임진왜란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 이순신이라는 명장을 배출하기도 했다.

충무공 이순신은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수군을 지휘해 한산도, 명량, 노량 등지에서 왜병을 격퇴하고 전란의 전세를 조선의 승리로 이끈 명장이다. 사후 조선 조정으로부터 충무공(忠武公)의 시호를 받았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조선 선조 25년(1592년) 음력 1월 1일(양력 2월 13일)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선조 31년(1598년) 음력 9월 17일(양력 10월 16일)까지의 2,539일간의 군중에서의 생활과 전란의 정세에 대한 내용을 적은 진중의 일기이다.

 

목차

책머리에

임진년(1592)

임진년 정월 | 임진년 2월 | 임진년 3월 | 임진년 4월 | 임진년 5월 | 임진년 6월 | 임진년 8월

계사년(1593)

계사년 2월 | 계사년 3월 | 계사년 5월 | 계사년 6월 | 계사년 7월 | 계사년 8월 | 계사년 9월

갑오년(1594)

갑오년 정월 | 갑오년 2월 | 갑오년 3월 | 갑오년 4월 | 갑오년 5월 | 갑오년 6월 | 갑오년 7월 | 갑오년 8월 | 갑오년 9월 | 갑오년 10월 | 갑오년 11월

을미년(1595)

을미년 정월 | 을미년 2월 | 을미년 3월 | 을미년 4월 | 을미년 5월 | 을미년 6월 | 을미년 7월 | 을미년 8월 | 을미년 9월 | 을미년 10월 | 을미년 11월 | 을미년 12월

병신년(1596)

병신년 정월 | 병신년 2월 | 병신년 3월 | 병신년 4월 | 병신년 5월 | 병신년 6월 | 병신년 7월 | 병신년 8월 | 병신년 윤?8월 | 병신년 9월 | 병신년 10월

정유년(1597)

정유년 4월 | 정유년 5월 | 정유년 6월 | 정유년 7월 | 정유년 8월 | 정유년 9월 | 정유년 10월 | 정유년 11월 | 정유년 12월

무술년(1598)

무술년 정월 | 무술년 9월 | 무술년 10월 | 무술년 11월

에필로그
이순신 연보

 

 

저자 소개 

저 : 이순신 (李舜臣, 본관 : 덕수(德水), 자 : 여해(汝諧), 시호 : 충무(忠武))
 
이순신(1545-1598)은 1643년(인조21년) 3월 '충무(忠武)'란 시호가 내려진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그의 본관이 덕수德水이며 서울 건천동(을지로 4가와 충무로 4가 사이), 넉넉하지 못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22세 때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1576년 32세에 무과 시험에 합격하여,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충청병사 군관, 발포 수군만호, 함경도 건원보 권관 등 주로 함...

역 : 장윤철

 
부산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북경대학교 대학원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하였다. 저서를 기반으로 중국을 한국에 소개하고 한국을 중국에 소개하는 한·중 문화 교류가 꿈이며 또한 전쟁과 혼돈의 중심을 산 지도자 조조의 삶과 재능에 관심을 갖고 그를 연구하여 복잡한 현대를 사는 삶의 지혜를 얻고자 했다. 전작으로 왕경국 박사와 편저한 『유식의 즐거움』, 『조조 같은 놈』, 『조조 같은 놈 매뉴얼』, 『내 안에 적을 깨...

 

책 속으로

초2일 -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바로 당진 선창(唐津船倉, 통영군 산양면)에 이르니 왜적의 배 20여 척이 나열하여 정박하고 있었다. 둘러싸고 싸웠는데 큰 배 한 척은 크기가 우리나라 판옥선만 하고, 배 위에 꾸민 누각은 높이가 두 길은 됨직했다. 누각 위에는 왜장(倭將)이 우뚝 버티고 앉아서 끄떡도 하지 않았다. 화살과 크고 작은 승자총통(勝字銃筒)을 비 오듯이 어지럽게 마구 쏘아 댔다. 왜장이 화살에 맞아 떨어지자 여러 왜적들은 일시에 놀라 흩어졌다. 여러 장병들이 한꺼번에 모여들어 사격해 대니 화살을 맞아 쓰러지는 자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남김없이 다 섬멸해 버렸다. 이윽고 왜적의 큰 배 20여 척이 부산으로부터 바다에 대열을 지어 들어오다가 우리 군사들 바라보고는 도망쳐서 개도(介島, 통영군 산양면 추도楸島)로 들어가 버렸다.
---「임진년 6월 초2일 일기」중에서

26일 (정미) - 맑기도 하고 비가 내리기도 했다. 원 수사가 왔다. 이윽고 우영공(이억기)·정 영공(정걸)이 한꺼번에 모였다. 순천 부사·광양 현감·가리포 첨사는 즉시 돌아갔다. 흥양 현감이 오기에 제사 음식을 대접했다. 원공이 술을 마시고 싶다고 하므로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하여 흉측한 말을 함부로 지껄여 대니 해괴하다. 낙안 군수가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명나라 조정에 올린 글의 초안과 명나라 사람이 낙안에 당도하여 기록한 것을 보내왔는데 통분함을 이길 수 없었다.
---「계사년 8월 26일 일기」중에서

초5일 (계미) - 새벽에 겸사복(兼司僕, 윤붕尹鵬)을 당항포로 보내어 적선을 쳐서 불태웠는지를 탐지하게 했더니 우조방장 어영담이 급히 보고하기를 적들이 우리 군사들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밤을 타서 도망 가고 빈 배 17척을 남김없이 불태워 버렸다고 하며 경상 수사의 보고도 같은 것이었다. 우수사가 찾아왔을 즈음 비가 크게 내리고 바람도 몹시 사나워 즉시 그의 배로 돌아갔다. 이날 아침 순변사에게서도 토벌 독려 공문이 왔다. 우조방장 및 순천 부사·방답 첨사·배 첨사(배경남裵慶男)도 와서 서로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에 원 수사가 배에 오자 여러 장수들은 각각 돌아갔다. 이날 저녁 광양의 새 배가 들어왔다.
---「갑오년 3월 초5일 일기」중에서

초8일 (신축) - 맑음. 나라의 제삿날(세조의 제삿날)이다. 이날 새벽 일찍 식사를 하는데 고기 반찬을 차렸으므로 먹지 않고 도로 내어 보냈다. 아침 식사 후 길을 떠나 감목관 있는 곳으로 가니, 감목관 및 영광 군수가 같이 있었다. 국화 떨기 속에 들어가서 술을 몇 잔 마셨다. 저물어서 동산원(東山院, 무안군 현경면 옹산원翁山院)에 도착하여 말에 먹이를 주고 말을 재촉하여 임치진(臨淄鎭)에 가니, 이공헌(李公?)의 8살 난 딸이 그의 사촌의 계집종 수경(水卿)과 함께 와서 인사했다. 공헌(公?)을 생각하니 애처로움을 이길 수 없었다. 수경은 내버린 아이를 이담(李琰)의 집에서 얻어다 기른 아이였다.
---「병신년 9월 초8일 일기」중에서

19일 (기묘) - 맑음.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호곡(號哭)했다.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천지간에 나와 같은 일이 어디에 있으리오. 어서 죽느니만 같지 못하다.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에 하직을 고하고 가다가 금곡(金谷, 연기군 광덕면) 강 선전(姜宣傳)의 집 앞에 이르러 강정(姜晶)·강영수(姜永壽) 씨를 만나 말에서 내려 곡을 하고 갔다. 보산원(?山院, 광덕면)에 이르니 천안 군수가 먼저 와서 냇가에서 말을 내려 쉬고 있었다. 임천 군수(林川郡守) 한술(韓述)이 중시(重試, 초시에 합격한 사람이 다시 보는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올라오는데 앞길을 지나가다가 내가 간다는 소식을 듣고 들어와서 조문(弔問)을 하고 갔다. 아들 회·면과 조카 봉·해·분·완 및 변 주부(卞主簿, 변존서)가 함께 따라왔다. 천안(天安)의 원인남(元仁男)도 찾아왔기에 작별하고 말에 올랐다. 가다가 일신역(日新驛, 공주군 장기면)에 이르러 잤다. 저녁에는 비가 뿌렸다.
---「정유년 4월 19일 일기」중에서

18일 (정미) - 맑음.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기를, 16일 새벽에 수군이 야간 기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충청 수사 및 여러 장수 등 다수가 해를 입어 수군이 대패했다고 하니 들려 오는 것마다 통곡이 나오는 것을 이길 수 없다. 이윽고 원수가 이르러서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리오 하면서 오전 10시경까지 이야기했으나 뜻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연해안 지방으로 가서 듣고 보고 한 뒤에 결정하겠다고 고했더니 원수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뻐했다. 나는 송대립·유황·윤선각·방응원·현응진·임영립·이원룡·이희남·홍우공과 더불어 길을 떠나 삼가현에 이르렀더니 삼가 현감이 새로 도임하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치겸(韓致謙)도 와서 오래 이야기했다.
---「정유년 7월 18일 일기」중에서

15일 (계묘) - 맑음. 조수(潮水)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는 명량(鳴梁)이 있는데 수효 적은 수군으로는 명랑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는 까닭에서였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기를, 병법에는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고, 또 한 사람이 길을 지키면 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지금 우리를 두고 이름이라, 너희 여러 장수들은 각각 조금도 영을 어긴다면 즉각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일망정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두 번 세 번 엄중하게 약속했다. 이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어떠한 신인(神人)이 지시(指示)하면서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크게 이기고, 이와 같이 하면 지게 된다는 꿈이었다.
---「정유년 9월 15일 일기」중에서

초2일 (갑인) - 맑음. 오전 6시경에 진군했는데 우리 수군이 먼저 출항하여 12시까지 서로 싸워 적을 많이 죽였다. 사도 첨사(황세득黃世得)가 탄환을 맞아 전사하고, 이청일(李淸一)도 죽음에 이르게 되고, 제포 만호 주의수(朱義壽)·사량 만호 김성옥(金聲玉)·남해 현령 유형(柳珩)·진도 군수 선의문(宣義問)·강진 현감 송상보(宋尙甫)는 탄환을 맞았으나 죽지 않았다. 초3일 (을묘) - 맑음. 도독이 유 제독의 비밀 서신을 받고 초저녁에 나가 싸워 밤 12시경에 이르도록 쳐부수었다. 사선(沙船, 명나라 배) 19척과 호선(?船, 명나라 배) 20여 척이 불타서 도독이 엎드러지고 넘어지는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안골포 만호 우수(禹壽)가 탄환을 맞았다. 초4일 (병진) - 맑음. 이른 아침에 배를 출항하여 적을 공격했다. 종일 맞붙어 싸웠더니 적들이 허둥지둥 달아났다.
---「무술년 10월 초2일, 3일, 4일 일기」중에서
 

출판사 리뷰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난중일기』
한 편의 역사 드라마를 보듯 충무공 이순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본다


이 책은 조선 중기의 무신(武臣)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7년 동안 일본군과 싸우면서 군중에서 쓴 일기이다. 『난중일기(亂中日記)』는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76호로 지정 당시 명칭은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다. 그러다 2010년 8월 25일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일기 7책과 서간첩 1책, 임진장초 1책까지 총 9권이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13년 6월 18일 광주에서 열린 제11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회의에서 받아들여, 새마을운동 기록물과 함께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었다.

거북선과 학익진으로 전투를 이기고, 무한한 자긍심을 심어준 이순신

충무공 이순신은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수군을 지휘해 한산도, 명량, 노량 등지에서 왜병을 격퇴하고 전란의 전세를 조선의 승리로 이끈 명장이다. 사후 조선 조정으로부터 충무공(忠武公)의 시호를 받았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조선 선조 25년(1592년) 음력 1월 1일(양력 2월 13일)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선조 31년(1598년) 음력 9월 17일(양력 10월 16일)까지의 2,539일간의 군중에서의 생활과 전란의 정세에 대한 내용을 적은 일기이다.

『난중일기』라는 제목은 조선 정조 19년(1795년) 왕명으로 간행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서 처음 붙여졌다. 원래 제목은 연도별로 『임진일기(壬辰日記)』, 『계사일기(癸巳日記)』 등으로 일기가 다루는 해의 간지를 붙여 표기하였다. 현존하는 『난중일기』의 판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친필 원본은 초서로 되어 있으며, 『이충무공전서』 편찬과 함께 원본 일기의 초서를 정자(正字)로 탈서(脫草)한 전서본이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전서본은 친필 원본을 탈서편집한 것이나, 원본 일기에 빠진 부분(을미년 일기의 경우 전서본에만 존재)을 담고 있어 상호 보완 관계에 있으며,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전서본과 친필본을 합본하여 『난중일기초』를 간행하였다.

“이순신이 없었다면 전쟁에 패했을 것이고 류성룡이 없었다면 나라가 망했을 것이다”

7년간의 전쟁 동안 출정한 날, 이순신 본인이 항명죄로 한양으로 압송되어 있던 시기에는 일기를 쓰지 못한 경우가 있었으나, 날짜마다 간지 및 날씨를 빠뜨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적었다. 내용은 시취(時趣)에 넘치는 일상생활, 동료·친척과의 왕래 교섭, 사가(私家)의 일, 수군(水軍)의 통제에 관한 비책(秘策), 충성과 강개의 기사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식구와 관련된 내용은 물론, 상관과 장수 및 부하들 간의 갈등문제를 비롯해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으며 임진왜란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료(史料)이다.

“이순신이 없었다면 전쟁에 패했을 것이고 류성룡이 없었다면 나라가 망했을 것이다.”라는 말처럼 이순신이 직접 쓴 『난중일기』, 서해 류성룡이 쓴 『징비록』을 통해 진실을 외면하는 순간 치욕의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또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순신과 류성룡이 피로 쓴 임진왜란의 참상을 기록한 이 책들을 인생의 반면교사로 삼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