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조선시대사 이해 (독서)/3.조선의전쟁

임진전쟁과 민족의 탄생 (김자현)

동방박사님 2022. 12. 4.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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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을 때 한국 민족이 탄생했다

임진전쟁 중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16세기판 ‘위안부’ 설치를 직접 명령했다
민족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의병봉기, 한글의 사용이
민족의 출현을 이끈 주요 요인이었다
특히 한자의 압도적인 헤게모니 아래 있었던 한글이
전쟁 중에 ‘우리의 것’ 혹은 ‘민족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임진전쟁(과 만주족의 침입)은 조선과 중국,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중국에서는 명·청 교제가 이뤄졌고,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주전장이었던 한반도에서는 조선왕조가 300년 더 지속되었다. 이에 대해 김자현 교수(컬럼비아대)는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 같은 조선에서 사실은 민족의 출현이라는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임진전쟁과 병자호란이라는 대규모 외침을 겪고 대항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구성원들에게 ‘타-민족’과 구별되는 ‘자-민족’에 대한 인식이 생겼으며, 이는 ‘민족 정체성’의 형성과 강화로 이어졌다. 책은 임진전쟁 중에 나타난 의병운동, 한글의 사용, 전후 기념사업 등을 통해 이러한 징후를 포착하고 논증한다. 전쟁 중 의병장이 발송한 격문과 통문, 초유사의 초유문에서 우리와 타자를 구별하는 수사를 발견하고, 우리말과 한글, 문화와 역사가 우리와 외부인(명군과 일본군)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임진전쟁을 거치며 조선인은 ‘우리’의 범위를 인식하고 그것으로 ‘타자’를 배척하거나 구분했다. 전후 기념사업으로 이러한 인식이 더욱 굳어지며 근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목차

머리말
옮긴이 머리말

서장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큰 전쟁
한국의 민족담론
역사서술에 대한 고민: 개념과 용어
동아시아에서 민족과 근대성 개념
한국 역사학계에서 민족의 개념
역사적 고려: 트라우마와 담론
접근과 구성

1장 의병과 민족담론
서곡
의병 봉기
백성들에게 탄원하다: 격문과 민족담론의 출현
순국: 마음속에서 그리고 전장에서
종족과 민족담론에 대한 수사들

2장 의병과 상상의 공동체 출현
전파 방식과 격문의 수신
의병들의 군사적 활약
인민주권과 재지사족
여파

3장 언어 전쟁: 일본군 점령기 한문의 위상 변화
일본의 혼란한 공간 침투
서울로 진군
히데요시의 점령 계획
조선의 식민지화
서울에서 벌인 대학살
일본군의 후퇴

4장 언어 전략: 일상어를 통한 민족적 공간의 출현
명의 칙서
기다림
명 다루기의 복잡성
조선의 민족적 일상어 공간의 출현
선조의 도약: 조선말로 백성을 호명하다
강화 협상
자존의 중요성을 강하게 인식하는 조선
새로운 문어: 한한(韓漢)병용
정서의 언어
전후 문서의 공간

5장 후유증: 몽유록과 기념문화
기념과 전후 담론장
몽유록과 전복
전투: 장례를 치르지 못한 시체
이름 없는 백성의 시신
묻히지 못하는 여성 시체
문학작품의 생산과 패권적 질서

김자현의 연구목록
미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김자현 (JaHyun Kim Haboush ,金滋炫)
 
이화여대 영문학부를 졸업했고, 미시간대에서 중국문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컬럼비아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리노이대 교수를 거쳐 컬럼비아대 동아시아언어문화학과 교수를 지냈다. 2011년 향년 69세로 별세하였다. 대표 저서로 박사학위논문을 토대로 한 A Heritage of Kings: One Man’s Monarchy in the Confucian World(컬럼비아대 출판부, 1988, 보급...

역 : 주채영

건국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CJ그룹에서 14년간 근무했다. 서강대 사학과(조선후기 전공)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책 속으로

히데요시는 또한 서로 다른 대관에게 세세한 지시를 내렸다. 그중 기요마사에게 보낸 한 명령에는 ‘서비스 여성’이나 첩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쓰카이 메(使い女, つかいめ)’를 요구하는 특이한 항목이 있었다. 이 지시는 일본 당국이 조선인에게 세금, 다른 농산물과 함께 이 ‘서비스 여성’을 보내야 한다고 알린 것이었다. 기타지마는 이러한 명령이 일본의 고위 관료와 대관, 지방행정의 책임자 및 기타 책임 있는 장수들에게 섹스를 비롯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내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위안부에 대한 정치적 논란을 고려할 때 ‘서비스 여성’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잠재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큰 주제이다. 이 문제를 온전히 다루려면, 당대 사료를 면밀히 분석하여 16세기의 맥락에서 점령군의 여성 정복 실태와 그 의미의 맥락을 면밀히 고찰해야 한다. 점령지 여성에 대한 강간은 전시에는 일반적 현상이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서비스 여성’에 대한 제도화를 최상위 기구에서 시작한 점이다. 우리는 ‘서비스 여성’의 규모나 누구를 ‘서비스 여성’으로 동원했는지, 이러한 풍습이 민간 가정에서 얼마나 일어났는지, 혹은 얼마나 강제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조선 여성을 일본 점령자가 ‘서비스 여성’으로 취급한 증거가 있다. 그뿐 아니라 이 ‘서비스 여성’이 그들 가정으로 돌아왔을 때, 조선 남성은 환대하지 않았다. 『난중잡록』은 이와 관련된 여성 이야기를 전한다. 의병장 김면은 지례(知禮) 전투에서 승리한 뒤 적병을 모두 태워 죽였다. 그는 전라도에서 일본군에게 사로잡혀 온 수많은 ‘아름다운 여성’을 발견했다. 여성들은 목숨을 구걸했지만, 김면은 그들 또한 일본 병사들과 함께 태워 죽였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다음과 같은 젠더화한 상징 및 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더럽혀진 여성은 자기 여자를 지키지 못한, 정복당한 남성의 거세를 상징하며, 남성의 분노는 더럽혀진 여성에게 향했다. 강간으로 태어날 혼혈 자식에 대한 공포도 존재했다. 여성의 순결이 상징하는 것과 그것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문제는 임진전쟁뿐만 아니라 병자호란(1636~1637) 때도 개인은 물론이고 국가적 차원에서도 중요한 문제였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주제가 민족적이면서도 국가적인 정체성 차원의 문제였다는 점을 언급해두는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 pp.132~133
 

출판사 리뷰

임진전쟁을 통해 한국에서 민족이 출현하기 시작했다는 저자의 선언은 파격적인 화두다. “우리 한민족은 단군 이래 단일 민족으로...”라는 수사에 익숙한 보통 사람들에게나 한국 민족은 개항 이후 들어온 근대의 산물로 여기는 한국 학술계 모두에게 이는 심각한 논쟁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서구 학계에서 활동한 저자의 장점을 살려 민족과 민족담론을 16세기 말의 조선을 대상으로 논의하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아울러 이 책은 임진전쟁을 ‘언어의 전쟁’ 혹은 ‘소통의 전쟁’으로 분석한 관점 역시 매우 신선하다. 전쟁 중 조정에서는 조선 백성만 해독할 수 있는 메시지 전달 방법을 고민했는데 그 해답을 한글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전쟁 이전 한자의 압도적인 헤게모니 아래 폐쇄적이고 지역적 특성을 지녔던 한글이 전쟁 중에 ‘우리의 것’ 혹은 ‘민족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김자현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바,『반일종족주의』저자들이 2차 세계대전 중 ‘위안부’가 자발적 매춘부였다는 주장에 대해, ‘위안부’ 문제가 일본사회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뿌리가 깊은 문제라는 사실(史實)임을 발굴, 소개한다. 임진전쟁 중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내린 명령 중 ‘서비스 여성’이나 첩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쓰카이 메(使い女, つかいめ)’를 요구하는 특이한 항목이 있었다는 것이다. 전시에 점령지 여성을 유린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저자가 주목한 것은 이 여성들에 대한 동원과 제도화가 최상위 기구의 명령이었다는 것이다. 16세기의 맥락에서 일본군의 정복 실태와 그 의미의 맥락을 면밀히 고찰해 볼 중요한 문제이다. ‘보도자료’의 마지막에 이 책의 본문을 달았다.

배우자인 윌리엄 하부시 교수는 인상적인 머리말에서 이 책이 저자의 연구 인생을 총결산할 기획이었지만 2011년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에 따라 출판되었다는 미완성 유작임을 알린다. 마르티나 도이힐러(런던대), 김지수(조지워싱턴대) 등 동료와 제자들이 편집을 맡았다. 서구학계의 주류에서 활동하는 몇 안 되는 한국 학자였던 김자현은 임진전쟁을 한국사 차원이 아닌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사 차원에서 접근하고 분석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놀라울 정도의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한국은 17세기에 ‘nation'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민족이 유럽 중심의 지식체계에서 탄생한, 다분히 근대적 개념이지만 저자는 16세기말 임진전쟁으로 조선에서 민족이 출현했으며, 그것이 만주족의 침략으로 조정 및 강화되며 근대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김자현은 자신의 논지를 설명하기 위해 서장에서 유럽 학계에서 발전한 민족의 개념과 민족담론을 소개하고, 한국 학계에서는 민족담론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설명한다. 흥미로운 점은 서양의 지식 체계와 조선의 유교적 인식 체계의 적극적 융합을 시도한 점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를 16세기 조선 사회에 적용한 점이나 인민주권(popular sovereignty)과 같은 개념을 조선사에 접목해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려는 것은 서구 학계에서 활동한 저자의 장점을 잘 살린 시도이다. 물론 유럽과는 다른 국가 체제를 구축한 동아시아 전근대 역사에 서구에서 만들어진 민족(nation), 주권(sovereignty) 등을 적용하는 것이 저자에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용어들을 기존의 용례에서 치환 가능한 유사성을 찾아 상호작용 시킬 수 있다면 확장성을 가질 것이며, 유럽 중심의 지식체계를 다양화하고 분산시킬 수 있을 것이라 저자는 기대했다.


조선을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기 시작한 ‘민족의식’의 증거들

이 책은 민족에 관한 세계 학계의 논의와 이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된 서장부터 임진전쟁에서 출현한 ‘자발적 군대’인 의병의 격문과 통문 속에 나타난 민족담론과 상상의 공동체, 전쟁 전후 한글의 사용과 민족의 출현, 그리고 전후 임진전쟁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방식 속에서 민족담론의 모습을 살피는 모두 5개 장으로 이뤄졌다. 저자는 임진전쟁을 통해 민족이 출현했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각 장에서 의병장의 격문이나 격서, 초유문, 선조와 장수들의 서간, 전후 기록문학 등을 분석하여 그 근거를 제시한다.

극히 제한된 지역 외에서는 타국인을 만나 본 적이 거의 없던 조선인들은 건국 이래 200여 년간 지속된 평화기에 갑작스런 대규모 외적의 침입을 맞닥뜨렸다. 미증유의 국가적 위기 속에서 의병은 의무도 경험도 없지만 자발적으로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감으로써 의(義)와 충(忠)을 바탕으로 한 애국주의를 구현했으며 조선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출현시켰다. 일부 의병장은 격문과 통문을 통해 타 지방의 사족과 인민들에게도 의병활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며 소통의 공간을 전국으로 확대시켰다. 전쟁 중 타-민족을 배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된 한글은 한자를 보완하는 위치로 위계가 상승했다. 한글이 전쟁 중에 ‘민족적 성격’을 대표했다면, 전후에는 하위문화의 영역에서 조선인의 담론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수평적 공간을 탄생시켰다. 조선 조정은 광범위한 전후 기념 사업을 추진하여 전쟁 기억의 국유화 작업을 진행했다. 기억의 주된 목적은 애국주의였으며, 이에 대한 평가와 보상이 이뤄졌다. 조선은 임진전쟁의 기억을 통해 애국심을 공유하는 민족의 공간을 만들었다. 이렇게 저자는 임진전쟁 전후로 나타난 여러 징후들이, 조선 민족이 공유하는 “상상의 공동체”에 대한 증거임을 논증하며 이 시기에 조선에서 민족과 민족담론이 출현했음을 역설한다.


한글은 다양한 민족담론을 제안하고 대안적인 담론공간을 창출했다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주제가 ‘한글’이다. 임진전쟁은 군사 부분만이 아니라 소통의 싸움이기도 했다. 저자는 전쟁 중 타 민족을 배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된 한글이 한자를 보완하는 위치로 위계가 상승하였으며 많은 사회계층이 참여할 수 있는 소통 공간을 구축한 사실에 주목했다.

궁지에 몰린 선조는 북방 경계에서 돌아온 후 왜 갑작스럽게 한글 교지를 내렸을까? 한글교서의 배포는 명과 왜 사이의 강화협상에 들어선 시기에 이뤄졌다. 명군의 참전과 함께 조선은 종속적 위치에 처했다. 조선의 반대에도 명군은 일본과의 강화협상에 나섰고 조선은 배제되었다. 명군에게 소외당한 조선 조정은 결국 ‘민’에 의존해야 한다는 자각을 하였고, 이를 위해 명과 왜를 명확히 분리하는 언어 정책을 시도했다. 결국 한글은 조선 조정이 조선인 사이에서 단결을 이끌어내고, 통합을 시도하기 위한 메커니즘이었다. 초기의 한글 교지는 일반 교지처럼 중국 경전의 표현 등을 활용하여 작성한 후 번역했다. 하지만 소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한글이 가지는 배타성과 한국인만 공유할 수 있는 정서를 살려야 한다는 자각을 하였고, 한국인의 정서를 담은 한글 문서를 짓고 공유했다. 선조가 보낸 교지 중에서 “옛 고을로 돌아가 예전에 하던 일을 다시 시작하라”는 메시지는 밝은 미래를 제시한 적에 대항하여, 내부자만의 과거를 공유한 것이었다. 배타적 문자는 공유한 역사와 운명의 독점을 의미했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는 국가 재건을 위한 백성의 희생을 다시 요구했다. 중요한 것은 조선 민족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일깨우기 위해 한자본과 한글본을 모두 공공기관에 비치했다는 점이다.

17세기 만주족의 침입 이후, 조선은 유교문화 담지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한문과 한자를 더욱 강조하였기 때문에 한글은 다시 하위 언어로 되돌아간 듯 보였다. 하지만 하위문화의 공간에서 한글은 자율성, 합법성, 가시성을 통해 담론을 생산하였다. 모국어인 한글은 다양한 민족담론을 제안하고 대안적인 담론공간을 창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