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혜옹주 결혼기념비
대마도를 둘러보면서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곳 중에 덕혜옹주비가 있다. 이 碑는 한일관계의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의미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제26대 고종황제의 외동딸인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쓰시마번주 소다케유기백작과 결혼하였다. 두사람 사이에는 딸 正惠가 있었으며 덕혜옹주는 1955년 이혼 후 1961년 대마도에서 귀국한다. 덕혜옹주는 1989년 낙선재에서 별세하였다.
이 碑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뜻으로 건립되었는데 2001년 11월 10일 대마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다시 복원되었다.
덕혜옹주는 1912년 5월25일 조선 제25대왕 고종황제가 회갑을 맞은 때에 궁녀인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은 4명의 딸이 있었지만 1살이 되지 못하여 사망하여 덕혜옹주가 고명딸로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덕혜옹주는 서녀였다는 이유로 일본 총독부에서 왕족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1921년 덕혜옹주는 서울에서 히노데소학교에 다녔다.
소학교를 다니면서 일본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였으며 조선인은 고관의 자제분이 다녔던 학교이다.
그동안 복녕당 아가씨로 불리다가 이 무렵에 덕혜라는 호를 내려 받았다 한다. 1925년 3월에 왕족은 일본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강제로 일본으로 데려갔다. 일본 학교에 입학하여 학교를 다녔지만 자신이 조국이 조선이라 늘 무시당한다. 일본인 학생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덕혜를 괴롭혔다.
덕혜옹주는 독살의 위헙을 감지했기에 늘 보온병에다 끓인물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일본학생이 엎질러버리면 그날은 물을 먹지 안했고 한다. 또 집단 구타를 해도 살려달라고 한마디도 하지 안하고 비명도 지르지 않고 어떤 말 한마디도 그들에게 하지 안했고 한다.
그녀의 시련은 계속 이어진다. 조발성 치매증으로 병을 앓고 있어 덕혜옹주는 정략 결혼을 하게 된다. 배필로 맞이할 사람은 다케시마영주의 아들인 백작 소다케유기이다. 얼마 후에 덕혜옹주는 임신을 했다. 그러나 덕혜는 엄습해 오는 두려움 때문에 임심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로 나타났다. 일본에 있으면서 마음을 나누던 복순이가 없어진 것이다.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지만 덕혜는 여자아이를 낳았고 아이의 이름은 정혜(마사에)라 지었다. 덕혜는 정혜에게 한국어와 왕실의 법도를 가려쳤다. 정혜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일본은 패망하였다
다케유키와 사이가 점점 멀어져 1955년 이혼을 하게된다. 1956년 외동딸 정혜가 결혼을 하였지만 실패하였고 3개월뒤 유서를 남기고 실종 되었다. 하지만 덕혜옹주는 정혜가 현해탄에서 투신 자살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한다.
덕혜옹주는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도 순탄하지 안았다. 당시 이승만대통령의 정치적 입지에 부정적 영양을 우려해 귀국이 거부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마침내 1962년 1월26일 귀국하여 1982년 20년만에 호적을 만들었졌으나 결국 지병으로 1989년 4월21일 낙선재에서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