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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와 함께 독립의 길을 걷다 (2024) - 독립운동가들의 숨겨진 이야기

동방박사님 2024. 8. 15.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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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도산 안창호와 뜻을 함께한 독립운동가들의 숨겨진 이야기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이 책은 1913년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을 위해 창립한 흥사단에 60여 년을 몸담아온 이만근 작가가 최초로 공개하는 도산 안창호와 독립의 길을 함께하고 행동으로 실천한 애국지사들과 안창호 선생의 가족들의 숨겨진 이야기가 공개된다. 가족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는가는 부인 이혜련과 장남, 장녀와 조카와 조카사위까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과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받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강남구신사동에는 도산공원이 있다. 그곳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기념관과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부인 이혜련과 합장한 묘가 있다. 대한민국 독립운동 역사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은 헌신적인 독립운동과 민족 계몽 활동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평생을 바친 혁명가로,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와 기관을 설립하고 이끌었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흥사단과 신민회의 창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대한 업적 뒤에는 수많은 동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다.

목차

머리말

1. 힘이다, 힘을 기르자

밥을 먹어도 독립, 잠을 자도 독립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다
필대은과의 만남, 밀러학당 입학
민족의식을 일깨워준 필대은
배움의 길을 열어준 밀러

2. 독립과 구국 운동에 나서다

‘쾌재정’ 연설로 명성을 얻다
점진학교와 탄포리교회를 세우다
평양지역 개화 운동을 선도한 임기반
동지요 의형제 의사 김필순

3. 공부보다 동포가 먼저다

장래 희망은 교사다
유학의 꿈을 미루다
평생 동지이며 후원자 이강
연해주 독립운동을 이끈 정재관

4. 새 국민 새 국가 건설

5년 만의 귀국과 신민의 꿈
대성학교 설립과 청년학우회 조직
도산이 영향을 받은 개화 운동가 유길준
교육진흥과 모범촌을 추진한 이승훈
몽골의 ‘귀중한 금강석’이 된 의열단 이태준

5. 나의 사랑 한반도야

‘거국가’를 남기다
무관 출신 풍운아 이갑

6. 민족 전도 대업의 기초

4년 만에 가족 품으로
흥사단 창립
대한인국민회 출범
그늘진 곳에서 도산을 도운 송종익
한인비행사양성소를 세운 김종림

7. 임시정부 통합을 이루다

상해로 가다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출범
주치의이자 독립운동가 김창세
연해주 독립운동을 이끈 안태국

8. 다시 미주 동포를 찾아가다

동포의 삶을 보살피다
서재필을 만나다
‘제2의 도산’으로 일컫는 장리욱
도산의 미주 독립운동 최측근 곽림대

9. 독립운동 근거지 모범촌 건설

민족유일독립당 창립과 모범촌 후보지 물색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다
윤봉길 의거로 피체
‘27인의 결사대’ 이탁
도산의 그림자, 임시정부의 파수꾼 차리석

10. 송태산장 ‘서벽사’에 들다

가석방 출감하다
여성 교육에 힘쓴 도산의 의남매 조신성
애국심을 고취하는 목사 한승곤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은 작가 한흑구

11. 깊은 밤, 큰 별 지다

나는 죽음의 공포가 없소
유상규 곁에 잠들다
도산공원으로 이장, 합장
도산을 어버이로 모신 유상규
도산의 유택을 제공한 조카사위 김봉성
애국자 만드는 공장주 조카 안맥결
북한의 누이동생 안신호

12. 가족이 힘이다

2천만의 아버지
“나의 사랑하는 아내 혜련”
여장부 아내 이혜련
할리우드의 별 안필립
휴즈항공사 부사장 안필선
미국의 여성 영웅 안수산
집안 살림 도맡고 문게이트 운영한 안수라
아버지 얼굴도 보지 못한 안필영

안창호 연보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 : 이만근 (李萬根)
건국대 경제학과 졸업. 흥사단 본부 조직홍보부장, 한국청소년연맹 문화홍보국장, 범양사 출판담당 상무이사, ㈔신사회공동선연합 본부장, (재)동아시아연구원 상임이사 등으로 근무하였다. 1964년부터 흥사단 운동에 참여하여 고등학생 대구아카데미를 창립하였고, 흥사단 본부의 공의회장과 심사회장. 흥사단아카데미 총동문회장, ㈔도산아카데미 부원장과 자문위원(현), 한국문인협회 감사 등을 역임하였다. 흥사단의 『흥사단교...

책 속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할 생각인가?”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 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대한의 독립은 반드시 된다고 믿는다.”
“무엇으로 그것을 믿는가?”
“대한 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대한이 독립될 것이요, 세계의 공의(公義)가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대한이 독립될 것이요, 하늘이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은 반드시 독립될 것이다.”
---「밥을 먹어도 독립, 잠을 자도 독립」중에서

임기반은 1898년 7월 25일(음력), 독립협회 평양지회 창립식과 이른바 평양 만민공동회의 ‘쾌재정’ 연설회를 앞장서서 적극 지원하고 후원하였다. 평양지역의 개화운동과 자유민권운동을 선도하던 임기반의 사랑방에는 우국 청년과 지역 유지가 많이 드나들었다. 임기반이 그들을 독립협회 평양지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권유하였으며, 본인 스스로 앞장섰다. 이어 안창호가 점진학교와 탄포리교회를 세울 때도 임기반이 적극 지원하고 후원하였다.

안창호는 이때 임기반의 집 사랑방에서 만난 이강, 임준기, 이갑 등과 사귀었고, 그들과 평생 동지가 되었다. 임기반의 손자뻘 되는 임준기는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안창호와 독립운동을 함께 하였다.
---「평양지역 개화 운동을 선도한 임기반」중에서

신민회는 국권 회복 운동과 자유 독립국을 세우는 공화정치를 목표로 출발하였다. 도산은 신민회가 비밀 조직이기에 겉으로는 강연회와 학회 활동을 통한 애국 계몽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일제의 눈을 피해 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구국 운동, 잡지와 서적 출판, 회사 설립 등 민족 실업 운동을 추진하며, 해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 방안까지 구상하였다.

도산이 중국으로 망명을 떠날 무렵에는 신민회 회원이 3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김구는 400명, 박은식은 800명에 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도산은 신민회를 설립한 후 2~3년간을 서울과 평안도, 황해도 등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애국 계몽 강연에 치중하였다.
---「5년 만의 귀국과 신민의 꿈」중에서

도산은 미국에 돌아오자 곧바로 흥사단 창립을 위한 동지 규합에 힘을 기울이면서 샌프란시스코 강영소(姜永韶, 1886~1934)의 집에서 하상옥, 정원도, 강영소 등과 여러 차례 창립 준비모임을 가졌다. 도산은 앞서 유길준이 조직한 ‘흥사단(興士團)’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도산은 “우리 민족이 완전히 부응하여 생존 번영을 누리고 나아가서 전체 인류 사회의 공존, 공영에 공헌을 짓는 대사명을 달성하는 유일한 길은 오직 흥사단의 주의 주장이다”라고 밝혔다. 흥사단은 국내의 청년학우회를 계승하여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 강영소의 집(1914 Lyen st.)에서 창립하였다.
---「흥사단 창립」중에서

또 9월 6일 임시의정원이 도산을 이승만 임시대통령이 취임할 때까지 ‘대통령 대리’로 선출하였음에도 도산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도산 스스로 자기를 낮추고 희생해 가면서 치밀한 조직력으로 온갖 반대와 갈등을 극복하며 험난하고 힘들어 보였던 임시정부 통합을 마침내 이루어냈다.

9월 10일 새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부임하기까지 당분간 국무총리 대리 직책을 수행하도록 임시의정원이 결의하였다. 이튿날 9월 11일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국무총리와 총장의 취임이 늦어져 11월 3일에야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재무총장 이시영, 법무총장 신규식 등의 취임식이 있었고, 도산이 축하 연설을 하였다.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중에서

곽림대는 흥사단 초기에 약법을 기초한 일을 비롯하여 5년여를 도산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흥사단 사무를 보았다. 도산이 1917년 이승만과 박용만의 불화로 하와이를 약 6개월간 방문하였을 때나 1918년 멕시코를 방문하여 8개월간 어저귀 농장의 한인 고용 문제 해결을 위해 로스앤젤레스를 떠났을 때, 도산은 언제나 곽림대에게 흥사단 사무 일체를 부탁하였다.

또한 그는 1922년부터 1929년까지 약 8년간 뉴욕에 머물 때도 흥사단 사무를 적극 도왔으며, 1929년에는 흥사단 이사부장(현 이사회장)을 맡아 활약하였다.
---「도산의 미주 독립운동 최측근 곽림대」중에서

이탁의 ‘27결사대’는 1919년 3월 3일 고종 황제의 국장일 이후 삼우제 때 매국 7적 등을 응징하기로 하고 그날 행렬이 지나가는 망우리고개에 매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완용 등 매국 역적과 순종(純宗)이 타고 있던 마차가 너무 가까워 황제가 다칠 위험이 있어 응징에 실패하고, 고종 독살 진상과 매국 7적의 죄상을 꾸짖는 성토문을 순종이 탄 마차 안으로 던져 넣고 만주로 탈출하였다.

이탁은 1920년 만주에서 한족회(韓族會) 간부로 있으면서 대한청년단연합회 조직에도 참여하여 교육부장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3월 광복단 단장에 선출된 이탁은 4월 19일 열린 대한청년단연합회 총회에 참석하였다.
---「27인의 결사대 이탁」중에서

한승곤은 1920년 흥사단 의사부장(현 공의회 의장)에 선출되어 흥사단을 이끌면서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근거지 마련과 동명학원 신축 공사비 지원 등을 이사부와 협력하여 추진하였다. 또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다뉴바지회 서기로 활동하면서 상해 임시정부에 보낼 독립 의연금 모금과 독립공채 판매에 헌신하였다.

그는 목회 활동을 하면서도 1925년 1월 1~2일 로스앤젤레스 청년회관에서 개최할 제11차 흥사단 서부대회를 도산의 미국 순방에 맞추어 일정을 조정하여 다수의 단우를 입단시키는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한승곤은 1926년 8월 24일 날짜로 도산이 ‘한승곤과 장리욱’ 두 사람에게 임시정부의 형편을 소상히 알리는 편지를 받았다. 믿는 동지에게 하소연하듯 옛날의 상해와는 딴판으로 분열이 심하여 극히 혼란스럽고 임시정부 명의의 존속도 어렵게 되고 있다는 도산의 우려가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애국심을 고취하는 목사 한승곤」중에서

한흑구는 석방된 후 도산의 고향 근처 평안남도 강서군 성태면 연곡리 안말로 이사하고 과수원을 일구며 작품을 쓰면서 살았다.

한흑구의 삶과 문학이 우리나라 현대문학사에서 귀중한 의미를 생성한 시기는 1929년 3월부터 1934년 3월까지 5년 동안의 미국 유학과 방랑, 그 기간에 창작한 문학 작품과 행동 자취, 그리고 그때의 공부와 체험을 바탕으로 귀국 후 평양에서 발표한 문학 작품과 문학적 활약 등이다. 특히 그는 『동광』, 『개벽(開闢)』 등에 흑인의 시를 최초로 번역, 소개한 대표적인 전신자(轉信者)로 일컬어진다.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은 작가 한흑구」중에서

1938년 초 어느 날, 도산은 병실을 찾아온 선우훈鮮于燻(1892~1961)에게 “나는 죽음의 공포가 없소… 나는 죽으려니와 내 사랑하는 동포들이 그렇게 많은 괴로움을 당하니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오… 일본은 자기 힘에 지나치는 큰 전쟁을 시작하였으니 필경 이 전쟁으로 인하여 패망하오… 아무런 곤란이 있더라도 인내하시오…”라고 말하였다. 이어서 “내가 대보산을 사랑해… 묻힐 자리를 택하는 건 욕심이나 형편이 허락하거든 대보산으로 가져가고… 그럴 수 없거든 망우리가 좋아… 망우리로 가게 되면 유상규(劉相奎, 1897~1936) 곁에 묻도록 하오…” 하였다.
---「나는 죽음의 공포가 없소」중에서

도산은 참석한 동포에게 자신을 꾸준히 지원해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와 함께 장기화하고 있는 독립운동에 동요하지 말고 희망을 잃지 말며 서로 단결하여 앞으로 나아가자고 하였다.

곧이어 아내 이혜련을 바라보며 “나는 평생을 통해서 당신에게 치마 한 감, 저고리 한 채 사줘 보지 못한 부족한 남편이오”라고 말하고, 또 장남 필립과 그 동생들을 향해 “나는 너희들이 소학교, 중학교를 졸업하는 동안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 사줘 보지 못한 아비다”라고 말하였다고 그 자리에 참석하였던 장리욱이 증언한다.

도산은 이제 떠나면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마지막이 될 것으로 알기라도 한 듯이, 필립에게 “어린 너에게 가족을 맡기는 것이 하늘에 대해 죄인이 되는 것 같다”라고 하였다.
---「2천만의 아버지」중에서

안필립은 영화배우로서만이 아니라 부모님의 헌신적 조국 사랑과 독립운동을 스스로 이어가고자 나섰다. 자신이 미국 최초의 한인 2세로서 1930년대에 미국 최초의 한인 2세 청년단과 한인 2세를 도울 ‘2-8클럽’을 조직하였다. 이들 단체는 다양한 활동을 하였지만, 무엇보다 한국 독립운동가와 후손이 만나는 ‘부모님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지원하는 일에 앞장섰다.

1932년 4월 29일, 상해에서 아버지가 체포되자 안필립은 석방에 도움을 줄 정당과 미국 의회 의원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상해 주재 미국대사관 영사, 한국 주재 대사와 영사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하였다. 또 아버지 도산이 다시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자 한국 주재 미국대사관의 영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할리우드의 별 안필립」중에서

출판사 리뷰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나라가 없고서는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 혼자만이 영광 누릴 수 없다.”

*통합과 화합과 조직의 리더 안창호의 업적들*
3개나 되던 임시정부를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
미국에서 직접 가져온 2만 5천 달러로 청사 마련
체계적인 지휘, 연락을 위해 연통제를 실시하고 교통국 설치
부상병 치료를 국제조직과 연계하기 위해 대한적십자회 창립
독립운동 등을 알리기 위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 창간

60여 년을 흥사단에 몸담아온 저자의 추적이 담긴 기록
도산 안창호 선생의 계몽운동과 민족정신을 일깨운다!!

『도산 안창호와 함께 독립의 길을 걷다』에는 60여 년을 흥사단에 몸담아온 저자가 도산 안창호와 뜻을 함께하고 행동으로 실천한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추적하여 실었고, 가족들 독립운동사의 숨겨진 이야기까지 함께 수록한 새로운 시도로 기획된 참신한 책이다.

대한민국 독립운동 역사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은 헌신적인 독립운동과 민족 계몽 활동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평생을 바친 혁명가로,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와 기관을 설립하고 이끌었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흥사단과 신민회의 창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대한 업적 뒤에는 수많은 동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다.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하고 민족의식을 일깨운 필대은, 외국인 독립운동가로서 한국 학생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준 밀러, 도산 안창호 선생보다 10년 연상으로 이웃 동네에서 일찍부터 함께 독립운동을 도운 임기반, 독립군 주치의로서 신민회를 함께 조직한 김필순, 안창호를 한국에 보낸 흥사단의 일원 이강, 안창호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공립협회를 창립한 정재관, 민족 교육과 독립운동을 이끈 유길준, 장돌뱅이 출신으로 안창호의 강연을 듣고 매료되어 술과 담배를 끊고 단발을 결행한 후 신민회에 가입한 이승훈, 의열단에 폭탄 제조 기술자를 소개한 이태준, 무관 출신의 풍운아 이갑, 그늘진 곳에서 독립 자금을 지원하며 평생 흥사단을 위해 헌신한 송종익, 비행기를 두 대 직접 사들여 전투 비행 조종사를 양성하려고 했던 쌀의 대왕 김종림, 도산의 주치의이자 동서인 김창세, 연해주 독립운동을 이끈 안태국, 제2의 도산으로 불리는 장리욱, 미주 독립운동의 최측근 곽림대, 27인의 결사대 이탁, 임시정부의 파수꾼 차리석, 도산의 의남매 조신성, 애국심을 고취시킨 목사 한승곤, 단 한 줄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은 한흑구, 상해 임시정부에서 안창호의 비서로 일한 유상규 등, 이들은 도산 안창호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이끌며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나, 그들의 이름은 도산 안창호라는 거대한 이름에 가려져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 역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도산의 아내인 김혜련은 대한여자애국단을 주도하였으며 세탁과 삯바느질로 저축한 돈을 합한 300달러와 ??신한민보?? 주필로 초청한다는 여행 증명서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갑에게 보내기도 했다. 김필순의 집안은 독립운동 명문가이다. 김윤방(金允邦, 소래교회와 학교 설립)과 둘째 형?김윤오(金允五)는 서우학회(西友學會) 조직하여 한북학회(漢北學會)와 통합하였다. 서북학회(西北學會) 설립과 셋째 형 김윤렬(일찍 죽음), 누이동생 김구례(金求禮)와 김순애金淳愛(상해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와 김필례(金弼禮, 한국 YWCA 창설, 근우회 설립) 등이며,?조카?김마리아(金瑪利亞,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회장,?임시정부에 군자금 전달), 둘째 누이동생 김순애 남편 김규식(金奎植,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 부주석),?첫째 누이동생 김구례의 남편 서병호(徐丙浩, 신한청년당 창당, 안창호와 대한적십자회 설립, 서경석 목사의 할아버지)?등이다.

김필순의 셋째 아들은 김염으로 중국에서 ‘영화 황제’였다. 배우로 크게 성공한 후에는 항일 영화만을 제작하고 오직 항일 영화에만 출연함으로써 독립운동을 하였다. 또 조선인 학교를 후원하는 등 동포를 돕고 아울러 항일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송종익의 아들 윌리는 서울에서 중학교 재학 중 일제의 학도병 징집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경에서 미국 육군 전략 첩보처(OSS) 정보부대에 입대하고 항일 지하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만 5천 달러를 흥사단에 기탁하여 장학금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안맥결의 남편인 김봉성 역시 전짐학교 교사로 임명되어 청소년의 민족의식 함양에 힘쓰다가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한다.

이처럼 이 책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업적뿐만 아니라 그의 동지들의 업적과 알려지지 않은 그의 가족들까지도 조명하고자 출간된 책으로, 안창호 선생과 그의 동지와 가족들을 기리는 성격도 띠고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걷던 독립의 길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수많은 동지가 있었고, 함께 힘을 보탰던 가족들의 있었다. 그들의 노력이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중요한 축을 이뤘고 도산 안창호 선생과 그의 동지들은 대한민국의 독립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희생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도산 안창호는 독립운동 외에도 교육과 계몽 활동에 많은 힘을 쏟았으며 그는 청년들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실력 양성 운동을 펼쳤다. 안창호의 신념은 교육을 통해 국민 개개인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강한 나라를 만드는 길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신념은 그와 동지들이 함께 세운 흥사단, 대성학교, 신민회 등의 활동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번 책 출간을 통해 도산 안창호의 업적을 포함해 그의 이름 아래 가려진 이들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 이밖에 이름도 없이 묻혀버린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업적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그와 함께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동지의 노고를 기리는 소중한 기회가 되길 바란다. 독립운동의 숨은 영웅들을 재조명함으로써, 그들의 희생과 헌신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리고 이를 통해 후손들은 우리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하고, 그들의 뜻을 이어받아 더욱 밝은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그의 동지들이 함께 이룬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이들의 헌신과 희생이 없었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책이 도산 안창호 선생과 그의 동지들의 고귀한 정신을 널리 알리고, 그들의 뜻을 이어받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