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역사이야기 (관심>책소개)/3.망우역사인물

남파 박찬익 독립운동의 주춧돌 (2024)

동방박사님 2024. 8. 15.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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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비명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조명하는 ‘망우인문학총서’를 펴내며

망우리공원(망우역사문화공원)은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역사적 인물과 서민이 공존하는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다. 우리는 그들의 비명(碑銘)을 통해 격동적인 한국 근대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망우리 인물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정리하는 ‘망우인문학총서’의 첫 번째 책 《남파 박찬익》은 ‘백범 김구의 오른팔’로 불린 독립운동가 박찬익의 생애를 소개한다. 박찬익은 임시정부 시절 대중국 외교를 전담하고 한국광복군 창설과 해방 후 재중 한인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 및 귀환을 담당한 주화대표단장으로 활동했으며 임시정부의 환국에도 지대한 역할을 한 인물이지만, 관련 자료와 학계의 연구는 미약하다.

이 책은 소설가 박영만(1914~1981)이 지은 《주춧돌》(신태양사, 1963)을 현대 어법에 맞게 문장을 다듬고 고쳐 재출간한 것으로 박찬익에 대한 가장 충실한 자료이자,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유이민사와 독립운동사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이다.

목차

〈망우인문학총서〉 간행에 부쳐
옮긴이 서문
지은이 서문

박 정승댁 도련님
새로운 길
오리골 탄실이
망국 전야
망명
만주 벌판
진구렁 속에서
넓은 무대
폭풍 속에서
주춧돌

지은이 후기
옮긴이 후기
 

저자 소개 

저 : 박영만 (朴英晩, 화계(花溪))
평안남도 안주 출신. 1929년 진남포공립상공학교 3학년 재학 시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하여 퇴학당했다. 1933년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으나 임시정부와 주고받은 영문편지가 발각되어 중퇴하였다. 유학시 석남 송석하의 권유로 매년 방학 때마다 귀국하여 전래동화를 채집하여 《조선전래동화집》(1940)을 펴냈다. 1937년 송촌 지석영의 일생을 다룬 희곡 「선구자」를 썼다가 항일혐의로 일경에 압수...

역 : 김영식 (金榮植)작가, 번역가, 망우인문학자. 중앙대학교 일문과를 졸업했다. 2002년 계간리토피아 신인상(수필)을 받았고 블로그 ‘일본문학취미’는 2003년 문예진흥원 우수문학사이트로 선정되었다. 산림청장상(2012), 리토피아문학상(2013), 서울스토리텔러대상(2013)을 받았고, 서울시와 중랑구의 망우리공원 관련 연구 용역을 수행했다.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 이사·망우리분과위원장. 중랑구 문화예술진흥위원회, 망우역사문화공...

책 속으로

두서없는 망향심에 잠겨 있던 박찬익은 문득 붓을 들었다. ‘앞 남(南)’ 자를 쓰고 그 밑에 ‘언덕 파(坡)’ 자를 써 보았다. 남쪽에 있는 내 나라 내 고향의 언덕들에 새싹이 트는 봄이 한없이 그리워서 써 본 것뿐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가족들이 그리워지고 기다려짐에 따라 왠지 모르게 ‘남파(南坡)’라는 두 글자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 두 글자를 자기의 아호로 정해 버렸다.
--- p.189

임시정부! 임시정부! ‘그렇구나! 우리도 임시정부를 세워야 한다. 흩어져 있는 모든 독립군과 독립운동가들에게 명령할 수 있고 총괄할 수 있는 임시정부를 세워야 한다! 장작림의 세력과 마주 설 수 있는 강력한 발언권을 가진 임시정부를 조직해야 한다!’ 이런 구상이 떠올랐다. 남파가 이 생각을 서일이나 김좌진, 나중소 등에게 말하였더니 쌍수를 들어 대찬성을 해 주었다.
--- p.227

‘입을 다물리라! 삼일운동을 일으키자고 나와 예관 형님이 맨 처음 상의하여 사람을 일본으로 보내고 본국으로 보내고 만주로 가서 독립선언서를 지어 국내에 보냈다는 일들을 모두 입을 다물어 입 밖에 내지 않으리라.’ 자신을 향해 다짐하는 남파였다. 이러한 자신의 다짐을 그는 평생토록 지켰다. 이것으로 보아도 그는 너무도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파묻어 두려 하는 사람이었다.
--- p.246

감투가 없을지라도 그는 자신의 위치를 차지하고도 남았다. 남파야말로 일을 창조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명예나 지위보다도 언제나 일하는 그것을 재미로 아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이 허다한 독립운동가 중에서 저자가 흥미를 가장 많이 느꼈던 점이며 언젠가 그의 생애를 한번 다루어 보자는 의욕이 생긴 소치이다.
--- p.349

조금 나아졌다고 방심하지 말고 절대 안정하라는 의사의 말을 듣지 않고 백범에게 가서 마곡사(麻谷寺)로의 은퇴를 설득하여 결심하게 만들었다. 은퇴하여 잠시 냉각기를 두었다가 다시 나와 이승만과 합작하여 민족진영의 단결을 바랐던 남파가, 아픈 중에서도 백범의 은퇴 성명서를 손수 써 놓았던 것이 남파가 서거하자 그의 베개 밑에서 나왔지만, 그러나 백범의 은퇴는 백범의 측근 두 사람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 p.366

말하자면 나는 눈에 나타나 보이는 기둥이라든가 대들보보다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주춧돌이었지. … 주춧돌이 되겠다. 내 나라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인데 그걸 누구에게 알리겠는가. 알아주기를 바라겠는가. 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말하자면 내 신념이었어…. 그러니까 내가 죽으면 떠벌리지 말고 부고도 낼 거 없고 그저 조용히 망우리에 모신 아버님 산소 옆에 묻어다오.
--- p.368

출판사 리뷰

침체에 빠진 임시정부와 독립군 재건의 기틀을 마련한 외교의 달인 박찬익

손문(쑨원), 장개석(장제스), 송미령(쑹메이링), 진과부(천궈푸), 진기미(천치메이) 등은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중에서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다섯 명의 외국인으로서 모두 중국인이다. 우리와 손잡고 항일운동을 펼쳤던 배경도 있었겠지만, 이들의 공훈 이면에는 뛰어난 중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중국 혁명가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으며 국민당 정부의 요인들과 밀착 외교를 펼친 박찬익의 활약이 있었다. 중국에서 벌인 독립운동이 중국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광복군 창설이나 좌우합작을 비롯해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의 거주 및 생계 문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정책 및 자금 지원을 얻는 일 등에 박찬익은 특유의 외교적 수완과 기지를 발휘했다. 가령 박찬익은 1933년 백범 김구와 장개석을 만나게 함으로써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 이후 침체에 빠진 임시정부와 독립군 재건의 기틀을 마련, 우리 독립운동사상 중요한 비약과 발전을 가져오는 일대 전환기를 마련한 바 있다.(290쪽 참고)

그러나 파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남파 박찬익의 대중국 외교 활동은 그 중요성이나 의미에 비해 구체적으로 알려진 내용이 없다. 1989년 ‘남파 박찬익 전기 간행위원회’가 펴낸 《남파 박찬익 전기》가 있지만 이 책은 상당 부분에 걸쳐 박영만 선생의 《주춧돌》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다행히 지난 2015년 박찬익의 유족이 경기도박물관에 2천여 점이 넘는 유물자료를 기증해 특별전시가 개최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박찬익의 집안 이야기가 대중과 언론의 관심을 받았을 뿐이다.

백년 전 필름을 보는 듯 생생한 만주 및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이야기

책의 저자 박영만은 광복군 출신으로 중경에서 직접 남파 선생을 대면하고 남파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직간접적으로 들으며 남파를 존경하게 되었다. 저자는 “남파 선생 같은 분이야말로 참으로 많았던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특출한 분”으로 기억한다. 특히 남파에 관한 글을 집필한 계기를 ‘지은이 서문’에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한 인간이 아무리 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한다 해도 그토록 자기를 돌보지 않고 다 바칠 수 있을 것인가 싶도록 그는 조국을 위해 언제나 전부를 바치려고 작정한 순교자와 같은 성스러운 데가 있던 분이다. 그러므로 참다운 한 인간이 꾸준히 걸어간 길은 언제나 우리에게 무엇을 주리라 믿기에, 나는 언제고 그분을 두고 내 무딘 붓으로나마 한번 가다듬어 써 보고 싶었던 터인데, 이번에 뜻을 이루었으니 오랜 체증이 내린 것 같은 후련함을 느낀다.”(‘지은이 서문’에서)

박영만 저자의 붓끝에서 펼쳐지는 대한제국의 망국 과정과 만주와 중국에서 펼쳐지는 독립운동 이야기, 그리고 당시 일반 민중이 감내해야 했던 현실은 책의 소설적 구성에 힘입어 생생한 현장감과 몰입감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박찬익이라는 인물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가족과 명예를 돌보지 않고 자기가 하는 일이 조국 독립이라는 집을 짓기 위한 터 닦이며 주춧돌을 마련해 놓는 것이라 스스로 믿고 헌신한, 순교자 같은 독립운동가를 만난다. 시인 조지훈이 쓴 그의 망우리 묘비명 “깊이 감추고 팔지 않음이여 지사의 뜻이로다. 한 조각 붉은 마음이사 백일이 비치리라”라는 구절의 의미가 통절하게 다가온다.

길림성의 왕 장작상과 교섭, 중광단에 실탄과 무기 제공

박찬익이 할 일은 늘 태산 같았다. 서간도의 신흥학교에서는 중국어와 한국 역사를 가르쳐야 했으며 경학사(서로군정서)라는 독립군양성소에서 외교를 도맡고 있었다. 당시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들어오는 의병들을 끌어모은 군사단체(훗날의 북로군정서)인 중광단 단장이었던 서일은 어느 날 남파에게 “사람은 있으나 무기가 통 없는 빈손이라 군대라고는 명색뿐이니 제발 남파가 와서 중국 당국과 교섭하여 무기를 얻어달라”고 부탁한다.(197~198쪽) 남파는 자신에게 중국어를 가르쳐준 선생의 소개장을 들고 만주의 왕 장작림의 아우인 장작상을 만난다. 장작상은 당시만 해도 만나 본 사람이 없다는 길림성의 왕이었다. 남파는 우리나라의 독립이 없으면 만주의 독립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망국의 억울한 사정과 독립을 기어코 쟁취해야겠다는 열변을 토한다. 남파는 결국 보병총 삼백 자루와 권총 열 자루, 수류탄 백오십 발, 탄환 오천 발을 얻어 중광단에게 제공한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남파의 존재감이 커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장작림과 장작상의 인연 또는 악연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가령 장작림의 동북군이 신흥학교를 포위하고 한국인들을 사흘 안에 내쫓으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숱한 동포들이 굶어 죽고 자살하게 된 사건을 남파는 수완과 기지를 발휘해 해결하기도 했다.(215~219쪽)

임시정부의 구상과 예관 신규식과의 만남

남파는 군사 활동에만 치중하는 독립운동의 한계를 누구보다 일찍 간파했다. 만주의 군벌인 장작림이나 장작상에게 대항할 만한 조직력과 군사력도 없는 상황에서 하루아침에 만주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남파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 임시정부였다.

“그렇구나! 우리도 임시정부를 세워야 한다. 흩어져 있는 모든 독립군과 독립운동가들에게 명령할 수 있고 총괄할 수 있는 임시정부를 세워야 한다! 장작림의 세력과 마주 설 수 있는 강력한 발언권을 가진 임시정부를 조직해야 한다!” (227쪽)

이후 남파는 남북 만주를 두루 돌아다니며 임시정부 수립과 무장세력의 단일화를 역설하지만, 그 과정은 험난했다.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임시정부를 설치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뒤통수를 맞은 듯 배신감과 허탈감까지 느꼈다. 이때 만난 예관 신규식은 남파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신규식과의 만남으로 박남파에게는 넓은 대륙에서의 활동 무대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의형제 관계를 맺은 신규식은 상해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연락과 지도기관으로 동제사와 한중 혁명가들의 조직인 신아동제사라는 두 단체를 조직해 중국인 혁명가들과 친숙한 관계를 구축해 놓은 인물이었다. 신규식은 그의 중국인 동지들에게 남파를 소개해줌으로써 훗날 남파가 대중국 외교의 최전선에서 활약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었다.

삼일운동의 도화선이자 신호탄, 무오독립선언서를 선포하다

박찬익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접하고 중국 혁명의 거두 호한민을 찾아가 미화 450달러를 얻어 가지고 온다. 돈이 마련되자 남파와 신규식은 상해에 와 있던 일본 유학생 지도자 조소앙을 불러 이틀 동안 논의한다. 며칠 후 조소앙은 일본으로 건너가 명령받은 바를 실천하고 만주로 간다. 그 뒤를 이어 동제사 회원 방효상, 곽경, 정원택 등과 신규식의 동생 신건식 등이 신규식의 밀서를 들고 본국으로 떠난다. 월남 이상재나 의암 손병희 등에게 밀서를 전달하기 위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남파 자신도 상해를 떠나 만주로 가서 일본에서 본국을 거쳐 만주로 온 조소앙을 다시 만난다. 이 둘은 서일, 김좌진, 나중소 등을 비롯한 39명을 끌어모아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한 후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남북 만주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가와 동포에게 뿌린다. 이것이 바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의 탄생 배경이다. 이후 상해로 돌아간 남파는 일본 동경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발표했다는 소식과 뒤이어 본국의 삼일운동을 접하고 감격과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입을 다물리라! 삼일운동을 일으키자고 나와 예관 형님이 맨 처음 상의하여 사람을 일본으로 보내고 본국으로 보내고 만주로 가서 독립선언서를 지어 국내에 보냈다는 일들을 모두 입을 다물어 입 밖에 내지 않으리라.”(246쪽)

세끼 밥은 굶어도 담배는 끊을 수 없다던 백범이 담배를 끊은 이유

남파의 올곧은 성미를 경원해 오던 임시정부 몇 사람은 남파가 재정 조달과 대외적 교섭을 도맡고 있는 것에 대한 시기와 질투심으로 모략을 꾸며 백범 김구마저 움직이게 만든다. 결국 남파의 권한이자 임무를 안중근의 셋째 아우 안공근에게 맡기게 되는데, 남파는 이때 인생의 쓰라림을 뼈저리게 맛보고 백범 및 임시정부와 갈라서며 방황하게 된다.

신규식과 막역한 관계였던 호한민을 찾아간 남파에게 호한민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란 다 그런 거요. 죽도록 일을 해 주고 나면 열매는 딴 놈이 따 먹으려 한단 말이지. 왜 저 강물을 건널 때 여울을 찾느라 막대기를 쓰지 않아? 막대기를 짚으면서 얕은 곳을 찾아 강을 건넌단 말이지. 강을 건너고 나면 고마운 막대기를 내동댕이친단 말이지.”(298쪽)

그러나 남파 대신 새로 임무를 맡은 이가 하는 일은 불미스러운 일뿐이고 신통한 성과가 없자 백범은 크게 뉘우치고 이동녕의 중재로 남파와 화해를 한다. 이때 백범은 남파를 멀리하였던 것을 자기의 죄책으로 알고 뉘우치며 한 가지 결심을 한다. 백범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담배를 끊어버린 것이다.(333쪽) 세끼 밥은 굶어도 담배만은 끊을 수 없다고 말하던 백범이 남파를 대하는 방식이 이러했다.

임시정부 중경 시절의 남파, 광복군 창설과 오당통일의 과업을 이뤄내다

중경에서 남파는 국무위원이자 법무부장을 지내면서 막중한 몇 가지 일을 수행한다. 대표적인 일은 광복군의 창설이다.(344쪽) 중일전쟁이 터지자 본국에서 수많은 동포 청년이 밀물처럼 중국 각지로 일자리를 얻으러 들어와 임시정부의 문을 두드린다. 남파는 이들을 조직해 조국 광복 전선에 내세워 중일전쟁이 세계 전쟁으로 번져가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이라는 민족의 비원을 풀 때라고 판단했다. 이청천, 이범석 등의 독립군 출신 장군들이나 김구 등과 이마를 맞대고 의논에 의논을 거듭하고, 집에 돌아오면 광복군 창설에 관한 의견서나 계획서, 임시정부의 공문을 작성하는 등의 노고를 바쳐 마침내 한국광복군을 창설한다.

한국광복군을 창군한 것 외에도, 임시정부의 유지비와 공작금으로 총 9억 원에 달하는 돈을 중국 정부로부터 끌어내 임시정부 활동을 지탱하였으며, 중경에 있는 모든 한국독립운동가와 그들의 가족에 이르기까지 나눠줄 배급미인 평가미(平價米)를 매달 여든 섬씩 지급하도록 하였다. 특히 남파가 정치적으로 비범한 수완을 가진 사람임을 증명해 준 일은 오당통일(五黨統一)이라는 과업이다. 임시정부에는 각기 다른 정당이 있었기에 임시정부 내부의 단결에 장애가 되었다. 임정에서의 이 고질을 없애고자 임시정부가 애를 썼으나 성과를 내지 못하다 중경에서 남파의 역할이 주가 되어 마침내 오당통일을 해냈다. 남파는 자신이 맡고 있던 법무부장 자리도 내주면서 오당통일에 힘을 보탰다.

해방 후 주화대표단장을 맡아 수백만 동포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내다

세월의 풍상을 겪은 임시정부와 광복군 사람들은 해방이 되자 설레는 가슴으로 그립던 조국 산천을 향해 떠난다. 그러나 남파와 그 밖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중국을 떠날 수가 없었다. 중국 천지에 남아 있는 수백만의 동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파는 한인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 및 귀환을 책임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의 단장이라는 막중한 직책을 맡는다. 임시정부 안에 이러한 중책을 맡아 볼 사람은 남파 한 사람밖에 없었다.(356쪽 참조)

이 중책을 맡자 단장 남파가 처음으로 한 일은 6억 원이라는 막대한 돈을 환국하는 임시정부 요원들의 여비로 얻어 낸 일이며, 임시정부 전체 가족들이 중국을 떠날 때까지의 생활비를 받기로 한 것, 그리고 장개석에게 중국 안에 있는 한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절대로 보호해 주라는 명령을 내리게 하였으며 직접 방송하게 한 일이었다. 물론 만주에 있는 동포들도 이 명령에 포함되어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중국과 만주에 있는 수백만 명의 동포는 남파 박찬익이라는 한 사람의 힘을 크게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