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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역사문화공원 101인 (2023) - 그와 나 사이를 걷다

동방박사님 2024. 8. 15.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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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경계를 넘나들고 경계를 허무는 길, 망우역사문화공원 사잇길을 걷다

망우리공원은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격동적인 시기를 체험할 수 있는 인문학 공원이다. 100인 이상의 유명 인사를 비롯해 서민의 묘가 다수 존재하고, 고인들의 숱한 비명을 통해 우리 근현대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다.

망우리공원은 2022년 4월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이름을 새로 바꾸고 서울의 대표적인 역사문화공원으로 탈바꿈했다. 또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주변 환경과 적극적으로 교감하는 ‘중랑망우공간’이라는 공공건축물이 들어서서 역사와 문화를 품은, 아름다운 공원으로 새롭게 단장했다. 기억의 공간이자 도심 속 휴양의 공간이며, 땅과 하늘, 자연과 도시가 한데 어우러진 풍경으로 거듭났다.

망우역사문화공원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과정에서 『그와 나 사이를 걷다』라는 저서를 출간해 망우리공원에 안치된 역사 인물을 꾸준히 발굴하고 조명해 온 김영식 작가의 역할을 빼놓을 수가 없다. 2009년 이 책의 초판 발행 이후 망우리공원은 2012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선정 ‘꼭 지키고 싶은 우리의 문화유산’, 2013년 서울시 선정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되었고, 2016년에는 서울시가 예산을 들여 인문학 ‘사잇길’ 조성 사업을 펼쳐 묘를 찾는 이정표와 안내판까지 설치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의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발전해 왔다.

저자는 판을 거듭할 때마다 새로 발굴하거나 자료 부족으로 다루지 못했던 사실과 인물을 추가하면서 망우리 인물 열전의 내용을 증보해 왔다. 최종 완결판에 해당하는 이번 개정 4판에서는 기존 내용을 수정 및 보완하고 23명의 인물을 새로 추가했다. 식물학의 선구자 장형두, 기상학의 선구자 국채표, 만주기독교회 창립자 변성옥 목사, 19세기의 유명한 역관 문인이자 한성판윤에 5회 제수된 변원규, 조선어학회 회원 신명균과 박현식, 교육가이자 시인인 허연 등이 새로 추가된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이곳에는 얼마나 많은 역사 인물이 있을까? 저자는 책의 ‘맺음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2006년 시점에서는 17명이 관리사무소의 리스트에 있었다. 2009년 필자가 초판을 내며 40명, 2015년 개정 2판 때 50명, 2018년 개정 3판 때 60명을 소개했다. 다시 2021년 중랑구청 용역으로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리분과위원회가 묘역전수조사를 실시한 결과, 41인의 유명 인사(비석 9인 포함)를 추가로 밝혀냈다.”

결국 망우리에는 100명을 훨씬 웃도는 유명 인사가 존재한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유명 인사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고, 감동적인 비문을 남긴 서민의 무덤을 비롯해 수만을 헤아리는 합장 묘역도 있거니와 무엇보다도 역사가 깃들어 있는 장소성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수치는 무의미하다. 기억의 장소이면서 그 기억을 토대로 살아 있는 자들의 정체성에 준거를 제공하는 곳 그 자체의 의미가 훨씬 크다. 따라서 저자는 망우리공원에 100명 이상의 유명 인사가 있다는 의미에서 이번 완결판의 제목을 ‘망우역사문화공원 101인-그와 나 사이를 걷다’로 정하고, “이곳 망우리에서, 삶과 죽음의 사이, 어제와 오늘의 사이, 그와 나 사이의 ‘사잇길’을 걸어가며 ‘망우’해 보지 않겠는가”라고 말을 건넨다.

목차

추천사
-더없이 중요한 역사의 공간, 망우역사문화공원(유홍준)

머리말

1부 그 잎새에 사랑의 꿈

1 시를 남기고 가을 속으로 떠난 ‘목마’ - 시인 박인환
2 동화 속으로 떠나간 아이들의 산타 - 소파 방정환
3 ‘꿈을 찍는 사진관’의 주인 - 아동문학가 강소천
4 한국 근대 유화의 슬픈 자화상 화가 - 이인성과 이중섭
5 한국 근대 조각의 선구자 - 조각가 권진규
6 이념의 벽 앞에 잊힌 문인 - 함세덕과 최학송
7 가사가 세 번이나 바뀐 노래의 주인 - 작곡가 채동선
8 낙엽 따라 가버린 ‘오빠’의 원조 - 가수 차중락
9 한국 야구의 원조 ‘호무랑’ 타자 - 야구인 이영민
10 비운의 영화인이 부른 ‘밤하늘의 부루스’ - 영화감독 노필
11 여성 최초의 예술원 회원 및 기독교 장로 - 끝뫼 김말봉
12 망우리공원의 문인들 - 김상용 김이석 계용묵 이광래

2부 이 땅의 씨앗과 뿌리

1 근대 서양의학의 선구자 - 지석영과 오긍선
2 개화에 앞장선 근대 최고의 서화가 - 위창 오세창
3 ‘조선의 마음’을 일깨운 사학자, 언론인 - 호암 문일평
4 독특한 국어학자였던 조선의 변호사 - 학범 박승빈
5 망우리의 조선어학회 3인방 - 신명균 박현식 이탁
6 한글을 연구한 애국지사 - 지기 문명훤
7 한국 민속학의 원조 - 석남 송석하
8 한국 식물학의 선구자 - 서울사대 교수 장형두
9 동아일보의 편집국장 - 소오 설의식과 그 가족
10 대한민국 엔지니어의 선구자 - 대한중석 초대 사장 안봉익
11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 제2대 관상대장 국채표
12 우리나라 방송계의 선구자 - 노창성, 이옥경 부부
13 대한변호사협회 초대회장 - 최병석

3부 겨자씨 한 알의 믿음

1 100년 만에 찾은 유관순 열사의 묘 - 이태원묘지무연분묘합장묘
2 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 동기 - 여경국장 김분옥
3 동아일보의 초대 주필 - 설산 장덕수
4 경기여중고 15년의 교장 - 난석 박은혜
5 도산 선생의 발치에 묻어다오 교육가 - 추담 허연
6 한국 최초의 기독교 유아 세례자 - 송암 서병호
7 함북 성진의 3·1운동을 이끌다 - 목사 강학린
8 초교파 만주 조선기독교회 창립자 - 목사 변성옥
9 한국 최초의 몰몬교 신자, 콩 박사 - 영양학자 김호직
10 크리스천 홈의 태양 MRA 운동의 개척자 - 이경숙
11 전도부인 어머니와 독립지사 아들 - 주룰루와 김명신
12 한복을 입고 이 땅에 묻힌 일본인 - 민예연구가 아사카와 다쿠미
13 한반도에 포플러와 아카시아를 심다 - 총독부 초대 산림과장 사이토 오토사쿠

4부 한 조각 붉은 마음

1 민족대표 33인의 영(榮)과 욕(辱) - 한용운과 박희도
2 임시정부 통합에 힘쓴 겨레의 지도자 - 도산 안창호
3 도산 안창호의 영원한 비서 외과의사 - 태허 유상규
4 도산의 조카사위, 흥사단원 - 김봉성
5 평북 선천 애국계몽활동의 주역 - 향산 이영학
6 고당 조만식의 오른팔 - 고송 조종완
7 글 없는 비석이 전하는 침묵의 소리 - 죽산 조봉암
8 좌우의 투쟁 속에 사라진 젊은 혼 - 삼학병 김명근, 박진동, 김성익
9 깊이 감추고 팔지 않음이여 지사의 뜻이로다 - 남파 박찬익
10 반민특위의 선봉장, 민위원 - 현포 이병홍
11 조선의 마지막 공주 - 명온공주와 부마 김현근
12 신립 장군의 아들, 무인 출신 영의정 - 충익공 신경진
13 한성판윤에 5회 제수된 역관 - 길운 변원규
14 독립운동의 역사를 말하다 - 망우리공원의 애국지사들

그 외
1 하늘을 찌르는 의병의 기상 - 13도창의군탑(허위, 이인영)
2 변영만의 글, 오세창 김흡의 글씨 - 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
3 최고학 할아버지의 기원 - 국민강녕탑
4 어여간 나의 마음, 가르어간 나의 몸 - 서민의 비명

맺음말 - 망우리공원의 개요
부록 - 망우리공원 역사인물 종합요약표

저자 소개 

저 : 김영식 (金榮植)
작가, 번역가, 망우인문학자. 중앙대학교 일문과를 졸업했다. 2002년 계간리토피아 신인상(수필)을 받았고 블로그 ‘일본문학취미’는 2003년 문예진흥원 우수문학사이트로 선정되었다. 산림청장상(2012), 리토피아문학상(2013), 서울스토리텔러대상(2013)을 받았고, 서울시와 중랑구의 망우리공원 관련 연구 용역을 수행했다.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 이사·망우리분과위원장. 중랑구 문화예술진흥위원회, 망우역사문화공...

책 속으로

박인환은 시 ‘세월이 가면’을 쓰기 전날 망우리공원에 있는 첫사랑 애인의 묘에 갔다 왔다고 한다. 어떤 죽음의 예감이 그에게도 있었던 것일까. 시 구절 그대로 박인환은 차마 그 사람 이름을 잊었을 리는 없다.
--- p.26

동양 최초로 열린 세계아동예술전람회는 대구의 이인성이 화가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 동기를 제공했다. 후에 이인성은 일본국전 및 조선국전에도 입상해 한국 화단의 귀재로 부상했으니 소파 방정환과 동료들이 3년 동안 준비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가 없었다면 어린이 이인성의 인생 항로는 180도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 p.42

‘브랜드’ 이중섭이 경매장에서 화려하게 부활할 때 ‘예술가 이중섭’의 망우리 묘지는 찾는 이 없어 황량하기만 하다. 파리의 공동묘지에 있는 예술가의 묘 앞에는 생화가 끊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곳 ‘국민화가’의 비석에는 자원봉사단의 조화가 꽂혀 있을 뿐이다. 이조차 최근의 일이지 몇 년 전에는 아무것도 없어 필자는 찾아갈 때마다 근처의 야생화를 뜯어 꽂아드리곤 했다.
--- p.70

사람이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듯, 금속이 현대문명을 상징하는 재질이라면 흙은 현대인의 고향을 상징하는 재질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흙에서 멀어질수록 심신의 건강을 잃는다. 따라서 현대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흙으로의 갈망은 더욱 커져만 간다. 예술이 가진 효용의 하나가 인간성의 회복에 있다고 한다면, 권진규의 테라코타야말로 시간이 갈수록 더욱 크게 조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 p.78~79

차중락은 키보이스 멤버인 사촌형 차도균의 권유로 1963년 10월 키보이스에 합류했는데, 미8군 무대에 오른 첫날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시민회관(세종문화회관 자리)에서 시민에게 선보인 첫 공연 때 차중락은 가죽부츠 대신에 검은 고무장화를 신고 나갔는데, 이 모습까지 엘비스와 흡사하다 하여 한국의 엘비스로 깊이 각인되었다.
--- p.110

고인을 추모하여 대한야구협회는 1958년부터 고교생에게 ‘이영민타격상’을 수여하고 있지만, 한국야구의 선구자이면서 협회조차 관리하지 않는 비운의 스타 이영민은 대다수 국민에겐 여전히 낯선 이름일 뿐이다.
--- p.137

문학이 가진 목적의 하나는 보다 나은 현실을 만드는 데 필요한 인문학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인데 문학의 정신, 기독교의 정신을 작품뿐 아니라 실천을 통해 세상에 펼친 김말봉은 실로 우리 여성계와 문단에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 p.157

만해 한용운도 위창 오세창의 집을 찾아가 무려 2박 3일 동안 소장 작품을 감상하고 돌아왔다는 기록도 보일 정도로 상당한 양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부의 아들 전형필은 위창의 지도를 받으며 평생 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사들여 지금의 간송미술관을 열게 되었다.
--- p.197

1935년 7월 20일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송석하의 가면극에 관한 논문이 독일어로 번역되어 오스트리아의 권위 높은 인류학지 《안트로포스》에 실린다는 기사가 있었다. 우리 민속학의 연구 논문이 세계에 처음으로 소개된 사건일 터인데 필자는 아직 그 논문을 찾지 못했다. 관련 학계나 관심 있는 분의 노력을 기대한다.
--- p.243

지금 와서 보건대, “우리의 역사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이런 사람들에 의해 지탱되어 가는 것이고 또 발전되어 갈 것이다”라고 하며 그 옛날에 망우리에 묘를 마련하고 비문을 남긴 유달영 박사의 판단은 옳았다. … 비록 이경숙은 망우리의 다른 유명인처럼 사회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유달영 박사가 남겨준 비석으로 인해 우리는 평범하되 신앙의 힘으로 아름답게 살다 간 한 여성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 p.344

『조선의 소반』에서 아사카와 다쿠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친 조선이여, 남의 흉내를 내는 것보다 갖고 있는 소중한 것을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 자신에 가득 찰 날이 오리라. 이 말은 비단 공예의 길에 한한 것만은 아니다.”
--- p.355

현충원으로 이장하게 되면 이곳의 비석은 두고 가야 한다. 현충원 규격의 비석은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줄지어 서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이렇게 말한다. “명예로운 곳이긴 하지만, 현충원은 11평 주공아파트, 여기는 자연 속의 너른 전원주택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 모시는 것이 잘 모시는 것일까요.”
--- p.378

학병 3인의 무덤은 왼쪽부터 ‘학병 김명근, 박진동, 김성익 의사지묘’라고 쓰인 비석과 함께 상석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세 비석의 뒷면에는 ‘1946년 1월 19일 祖國(조국)을 爲(위)하여 죽다’라고 똑같이 씌어 있다. 출생년도나 본관도 씌어 있지 않은 비석이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 때 학병으로 나갔다가 전사한 사람도 아니고 6 ·25전쟁 때 학도병으로 나가 전사한 사람도 아니다. 그럼 전쟁과 무관한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광복 후인 1946년 1월 19일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p.443

출판사 리뷰

‘예썰의 전당’ 유홍준 교수와 함께 걷는 망우역사문화공원 답사에서
BTS RM 애정하는 조각가 권진규의 삶 소개


2023년 3월 KBS 공영방송 50주년 기념 ‘예썰의 전당’ 프로그램에서는 유홍준 교수와 함께 ‘기억을 걷는 시간-망우역사문화공원’편을 방송했다. 방송에서는 특히 우리나라 근현대를 대표하는 예술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잊힌 예술가 가운데 비극적인 생을 마치고 망우리공원에서 친구가 된 두 천재 예술가 ‘이인성’과 ‘권진규’를 소개했다.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한국의 고갱’ 이인성은 24살 어린 나이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는 등 온갖 상을 휩쓸었고, 고향 대구에는 “달리기는 손기정, 춤은 최승희, 그림은 이인성”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아이콘이었다. 〈지원의 얼굴〉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조각가 권진규는 일본 무사시노미술대학교 개교 80주년 기념으로 “졸업생 중 가장 예술적으로 성공한 작가”를 선정해 회고전을 열었을 때 그 주인공으로 선정될 정도로 우리 근대미술의 선구자였다. 방송에서는 방탄소년단의 RM 역시 권진규의 〈말〉이라는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내용도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천재적인 두 예술가는 당시의 명성과 달리 현재 우리에게 낯설다. 어떤 이유로 그들의 명성은 이어지지 않았을까.

한편 ‘어린이들의 영원한 친구’이자, 살아서도 죽어서도 단짝이었던 두 예술가가 있다. 바로 ‘방정환’과 ‘강소천’이다. 방정환은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최초의 아동잡지 《어린이》를 발간하는 등 어린이의 인권 신장에 힘썼던 인물이고, 비교적 생소한 이름의 강소천은 〈코끼리 아저씨〉, 〈스승의 은혜〉 등 수많은 동요의 작사자로서 ‘어린이헌장’을 만든 인물이다. 방송에서는 살아생전에는 어린이를 위해 평생을 바치고, 죽어서는 망우리공원에 함께 묻힌 아동문학의 선구자 두 분, 그들에 얽힌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흙”이 되어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잠든 일본인이 있다. 유홍준 교수가 꼭 소개하고 싶은 특별한 분으로 언급한 묘는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는 묘비명과 묘 옆에 팔각백자항아리 조각이 있는 특이한 묘였다. 이 무덤의 주인공인 일본인이 망우리공원에 잠들게 된 사연도 흥미를 자아냈다.

책에서는 방송에서 소개된 인물들의 삶과 사랑, 죽음과 관련된 더 자세한 내용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 독립운동가를 만나볼 수 있다.

망우인물열전의 완결판에서 새롭게 소개하는 내용과 인물

하나, ‘시를 남기고 가을 속으로 떠난 ‘목마’의 시인 박인환 관련 사진 추가


망우리공원에는 화가 이중섭, 시인 박인환, 소설가 계용묵, 조각가 권진규 등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잠들어 있다. 특히 박인환 시인은 추모객이 많이 찾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유족의 참석하에 해마다 추모제를 지내고 고인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헌신, 사랑을 되새긴다. 새로 펴낸 이번 개정판에는 박인환 시인이 책방 마리서사를 열었을 무렵 책방 앞에서 임호권 시인과 나란히 찍은 사진을 실었다. 임호권 시인은 해방기에 박인환과 함께 모더니즘 시 운동을 전개한 문인이다. 또한 1950년대 명동 휘가로 다방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도 추가했다. ‘휘가로’는 조병화, 김수영, 박태진, 김광주, 전봉래 등 당시 문인들이 애환과 낭만을 나눴던 다방이다.

둘, 1930년 조선어학회의 맞춤법통일안 작성위원 18명 중 3명(신명균, 박현식, 이탁)

신명균은 조선어학회의 중심인물로서 스승 주시경의 사망 후 대종교에 입교했다가 시인 조지훈에 따르면 교주 나철의 사진을 품은 채 자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글의 보급과 연구에 많은 일을 했음에도 가족의 월북 등으로 조명을 받지 못했고, 망우리공원에서도 파손된 비석만 남아 있어 비석만으로는 고인이 누군지 알 수가 없다. 또한 소설가이자 법학자, 교육자였던 유진오의 회고록에 따르면, 박현식은 재동공립보통학교 교사로서 유진오에게 한글 철자법의 기본을 가르쳤다. 한편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이력도 있는 이탁은 해방 이후 1961년까지 서울대 사법대학에서 국어학을 가르친 인물이다.

셋, 애기똥풀, 금낭화, 바람꽃 등 식물에 우리말 이름을 붙인, 한국 식물학의 선구자 장형두

일제 강점기 우리 고유식물의 학명은 일본이 독점하다시피 지었다. 장형두는 일본인 중심의 조선박물학회와 별도로 조선박물연구회를 조직하고 주체적인 연구에 나서서 우리의 동식물에 우리말 이름을 붙인 인물이다. 애기똥풀, 금낭화, 바람꽃, 괴불주머니 등이 그가 새로 명명한 이름이다. 1936년에는 조선일보의 백두산탐험단에 식물학자로 참여해 새로운 종을 채집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 후 서울사대 식물과 교수로 재직할 때 어이없게도 좌익 혐의로 고문치사를 당했다.

넷, 우리나라 제2대 관상대장, 국내 최초 기상학 박사 국채표

2022년 6월 16일 조선일보의 기사 헤드라인은 “태풍 진로 정확도, 처음으로 미, 일 제쳤어요”였다. ‘72시간 태풍 진로 예보 오차’에서 우리나라가 미국과 일본을 제쳤다는 내용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기상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한 우리나라의 기반을 만든 선구자 국채표가 망우리 가족묘에 부모와 함께 있다. 1963년 12월 19일 한국기상학회를 발족해 회장에 취임하고 1964년 7월에는 「한국에 올 가능성이 있는 태풍의 중심시도와 진로의 예보법」이라는 논문으로 교토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기상학으로는 국내 최초의 박사였다. 그가 논문에서 제시한 ‘국(鞠)의 방법(Kook’s Method)’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져 당시 기상예보에 활용되었다. 앞서 언급한 ‘미 ·일을 제친 태풍 진로 예측’이라는 성과의 근원에 국채표가 있는 것이다.

다섯, 조선말 외교의 중추적 인물이자 한성판윤에 5회 제수된 역관 변원규

은둔의 나라 조선에 19세기 이후 외국의 문물을 소개하며 나라를 개화의 방향으로 이끈 주역 가운데 외교 현장에서 활약한 역관들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망우리에 있는 변원규는 5회나 한성판윤을 제수받을 정도로 조선말 외교의 중추적 인물로서 두터운 인맥을 활용해 청나라와의 외교에서 크게 활약했고 시와 글씨에도 능했다. 1883년 7월에 체결된 조일통상장정의 기념연회도에서는 김옥균의 옆 좌석에 앉아 있을 정도의 위상을 가진 인물이었다. 관련된 일화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많은 그였지만 전근대적 신분사회에서는 몸을 낮추어 살아가야만 했다.

추천평

“망우역사문화공원의 무덤은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음을 생각하는 공간이다. … 이제는 더없이 중요한 역사의 공간이 된 망우리공원을 우리는 하나의 문화재로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청순한 산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날 때 이곳을 거닐다 보면,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아들임을 떠올리며 멀리 한강을 처연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몇 차례 학생들과 여기를 답사 다녀왔고, 또 어느 해 봄엔 여기를 찾아갈 것이다.”
-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