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이데올로기 연구 (독서)/7.전체주의

폭력에서 전체주의로 (2012) - 카뮈와 사르트르의 정치사상

동방박사님 2023. 2. 18.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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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목표로 하는 공산주의는 역사의 진보를 꿈꾸는 사람들의 혁명적 열정을 타오르게 했다. 그러나 혁명의 공간으로 여겨지던 소련에 폭력과 억압의 강제수용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이는 지식인 사회에 치열한 논쟁을 불러온다. 공산주의라는 미래의 이상과 폭력이라는 현실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미래의 휴머니즘은 현재의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카뮈와 사르트르는 이 논쟁에서 정반대의 입장에 서면서 타협할 수 없는 결론에 도달했고 결국 그들의 우정에도 금이 갔다. 개인은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어떻게 사회를 구성하며 역사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 카뮈와 사르트르의 주요 저서를 비교하며 그들의 정치사상의 차이를 분석한다.

목차

저자 서문
감사의 말
서론

1부_카뮈
1장 「희생자도 가해자도 아닌」
2장 『반항하는 인간』
3장 부조리
4장 프로메테우스와 율리시즈
5장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6장 “인간은 인간에 대해 신이다”
7장 자유와 정의
1부 결론

2부_사르트르
1장 사르트르와 공산주의
2장 복종의 계약
3장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
4장 ‘존재’와 ‘행동’
5장 사르트르와 역사
2부 결론

결론
참고문헌
옮긴이의 말
카뮈-사르트르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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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자 : 에릭 베르네르 Eric Werner
1940년생. 스위스 국적의 철학자로 파리정치학교에서 수학한 후, 제네바대학에서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네바대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절대 숭배와 정치 : 정치철학 연구』, 『말살에 관하여』, 『전략가 몽테뉴『 등이 있다.
역자 : 변광배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같은 대학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몽펠리에 3대학에서 사르트르 연구로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존재와 무 : 자유를 향한 실존적 탐색』, 『제2의 성 : 여성학 백과사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레비나스 평전』, 『사르트르 평전』, 『사르트르와 카뮈 : 우정과 투쟁』, 『변증법적 이성비판『 등이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대우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같은 대...
 

책 속으로

비폭력을 내세우는 자유주의의 원칙은 정치제도들 사이의 차별화 기준으로서는 아무런 유용성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 메를로퐁티의 견해였다. 왜냐하면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이든 전체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이든 간에, 폭력이 이미 도처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관점에서 공산주의와 파시즘이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자유주의에 대해서도 결국 같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p. 19

사르트르와의 논쟁에서 카뮈는 다음과 같은 점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공산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적을 ‘고매한 영혼’, 다시 말해 멍청하고 특히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이상주의자들로 취급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러나 카뮈는 이와 같은 비판은 그대로 그 비판자들에게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결국 이 문제는 누가 이상주의자인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겪은 고통’에 관심을 갖는 자가 이상주의자인가, 아니면 이론이나 애매한 선전에 기대어 그런 고통을 추상화해 버리는 이념주의자가 이상주의자인가? --- p. 37

카뮈와 사르트르 사이에 첫번째 대립의 윤곽이 뚜렷하게 그려진다. 카뮈의 긍정에 대해 사르트르의 부정이 자리한다. 카뮈는 뿌리내리기의 주제(더 정확하게는 다시 뿌리내리기)를 전개하고 있는 데 반해 사르트르는 분리와 망명의 주제를 펼치고 있다. 사르트르적 인간은 본질적으로 기투인 반면 카뮈적 인간은 본질적으로 향수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카뮈는 충실함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반면, 사르트르는 ‘윤리’를 정립하기 위해 배반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필요한 것은 방향을 바꾸는 것이 필요한 매 순간 스스로를 다시 ‘문제 삼을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니까 진정성은 고정된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변화를 위한 이용 가능성에 있는 것이다. --- p. 77

카뮈에게 있어서 자유는 선험적으로 정의의 적이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정의의 특권적인 보조사이다. 카뮈는 대화를 높이 평가한다. 그 이유는 대화를 통해 ‘개별’의지가 일반화되며, 또한 어떤 면에서는 그 자체로 스스로 일반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이 대화 덕택에 앞서 문제가 되었던 정의와 불의 사이의 일치는 조금씩 현실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전제자들 역시 정의의 지배를 내세운다. 다만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추상적이며, 개인들을 초월하는 정의일 뿐이다. 결국 그것은 더 이상 정의가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여기에서 정의는 구체적 특성을 갖는다. 사실상 자유들과 대립되기는커녕 정의는 자유에 선행한다. 정의는 각자의 일이다. 왜냐하면 각자는 정의(를 정의( 내리는 일에 협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 113
 

출판사 리뷰

‘진보’를 향한 정의로운 ‘폭력’은 가능한가?!
카뮈와 사르트르, 타협할 수 없었던 두 참여 지식인의 치열한 논쟁!


1952년 프랑스에서는 월간지 『현대』(Les Temps modernes)의 8월호가 재쇄까지 매진되어 버린 일대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현대』지에는 카뮈와 사르트르가 서로 주고받은 논쟁적 편지들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카뮈와 사르트르의 이러한 지상 논쟁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에 강제수용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둘러싼 것이었는데, 당시 프랑스에서 이는 뜨거운 논쟁으로 번졌다. 그리고 카뮈와 사르트르 각자가 공산주의와 맺고 있는 관계는 당시 프랑스 지성계의 양 축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한때는 서로를 지지하며 돈독한 우정을 나누기도 했던 두 사람은 이 논쟁에서 서로 정반대의 입장에 서면서 타협할 수 없는 결론에 도달했고 결국 그들의 우정에도 금이 가고 만다. 카뮈와 사르트르는 항상 함께 거론되고, 흔히 실존주의 작가로 나란히 연결되곤 하지만 사실 둘 사이에는 뿌리 깊은 철학적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폭력에서 전체주의로』(De la violence au totalitarisme)는 카뮈와 사르트르의 논쟁을 그들의 근본적인 철학적 차이를 통해 분석하는 저작이다. 카뮈와 사르트르의 문학 작품이 아닌 그들의 철학 사상을 본격적으로 비교하며 다룬 저서가 국내에 많지 않은 가운데, 사르트르 전공자로서 『변증법적 이성비판』의 번역자로도 참여한 바 있는 변광배가 번역한 이 책의 출간은 국내 카뮈와 사르트르의 사상적 연구에 깊이를 더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이 책은 그들의 논쟁의 핵심이 되었던 주체와 객체, 소외, 실존, 연대성, 실천, 공산주의, 휴머니즘, 역사의 진보 등 20세기를 관통한 주요 정치적?철학적 주제들을 다룸으로써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질문들을 던진다.

무너진 공산주의적 이상향 : 소련에 강제수용소가 존재한다!

공산주의는 많은 이들의 꿈이었다.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목표로 하는 공산주의는 역사의 진보를 꿈꾸는 사람들의 혁명적 열정을 타오르게 했고,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도 공산주의는 주도적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이처럼 뜨거운 혁명적 분위기가 무르익는 가운데, 진정한 혁명의 공간으로 여겨지던 소련에 폭력과 억압의 강제수용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지식인들은 큰 충격과 혼란에 빠져들었다. 공산주의라는 미래의 이상과 폭력이라는 현실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미래의 휴머니즘은 현재의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프랑스에서 이러한 공산주의 논쟁은 반공산주의, 반-반공산주의 등의 세력을 형성하며 치열하게 전개된다. 그리고 카뮈는 이 논쟁에서 반공산주의의 진영에, 사르트르는 그 반대 진영의 선봉에 서게 된다.

이 책의 저자 에릭 베르네르(Eric Werner)는 카뮈와 사르트르가 이처럼 이념적으로 결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그들의 주요 저서들을 비교하며 분석한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와 『반항하는 인간』,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와 『변증법적 이성비판』이 그것이다. 즉, 그들의 불화는 단순히 당시의 시사적 현안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 두 사람의 근본적인 철학적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 방법에서 베르네르는 매우 능숙한 항해사와 같다. 베르네르의 항해 지도를 따라서 카뮈와 사르트르의 철학적 사유의 흐름 사이를 누비며 나아가다 보면 우리는 20세기 프랑스 지성사의 또 다른 주인공들인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가스통 페사르(Gaston Fessard), 레이몽 아롱(Raymond Aron) 등과도 만나게 된다. 이들이 서로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사유를 발전시켜 나갔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카뮈와 사르트르의 논쟁을 좀더 입체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균형적으로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카뮈의 긍정과 사르트르의 부정 : 타자와의 차이는 화해 가능한가

부조리의 철학자 카뮈와 앙가주망의 철학자 사르트르. 두 사람은 어떤 점에서 그토록 다른 길을 가게 되었을까? 사실 젊은 시절의 카뮈와 사르트르의 저작에서는 그 둘의 차이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들 각자의 초기 저작인 『시지프 신화』와 『존재와 무』는 모두 인간의 유한성 문제, 그리고 그 이면에 자리한 존재 욕망, 절대에의 향수 등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카뮈가 『반항하는 인간』을 출간한 뒤 이어진 『현대』지에서의 논쟁 이후 그들의 차이는 격렬하게 부각되었다. 두 사람은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에서 근본적으로 대립했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타자. 우리는 서로 다른 차이를 넘어서 자유롭게 화해할 수 있는가, 아니면 서로 다른 차이를 제거하고 하나로 통일되어야만 안정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과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이처럼 공산주의를 둘러싼 카뮈와 사르트르의 논쟁의 뿌리는 인간 존재에 대한 고민에까지 닿아 있었던 것이다.

이는 실로 핵심적인 질문이었다. 비판의 자유가 완벽히 보장되는 이상적인 혁명 국가로 믿어지던 소련에 강제수용소가 웬 말인가?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내부의 차이에 대해서는 폭력과 억압으로 통제하는 것이 진정 공산주의란 말인가? 카뮈는 이러한 현실에서 부조리를 강하게 느낀다. 사르트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를 주창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카뮈와 사르트르의 이러한 논쟁을 루소와 홉스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저자에 의하면, 카뮈는 루소적 전통을 이어 받아 타자와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본다. 즉, 인간은 자연적으로 사회적이기 때문에 서로 연합을 통해 화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사르트르는 홉스적 전통을 이어 받아 타자와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본다. 즉, 인간의 자연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기 때문에 전제자에게 복종함으로써만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차이로 인해 카뮈는 공산주의도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전체주의라는 결론에 이르는 반면 사르트르는 공산주의의 전체성을 정당화하는 이론을 더욱 탄탄하게 다져가게 된다.

철학적 전통의 차이가 단지 이데올로기 논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현실에서의 행동에 대한 실천적 차이에까지 직접적 영향을 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공동체들이 해체되고 개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고립되어 가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서로 다른 개인들이 과연 무엇을 근거로 연대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과 관련하여 카뮈와 사르트르의 사유는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게 다가온다. 그러나 『폭력에서 전체주의로』는 카뮈와 사르트르 중 어느 쪽이 옳았다고 섣부른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카뮈도 사르트르도 개인적?시대적 문제를 피하거나 추상화하지 않고 직면하며 헤쳐 나가려 분투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해결 방향은 달랐지만 두 사람 모두 어떤 신비화나 이상주의를 타파하고 현재 조건에 충실하게 사유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이러한 지적 치열함과 성실함은 결국에 누가 옳았는가의 문제를 떠나서 시대의 지성, 참여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주며 후대의 지식인들에게도 쉽게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실어 준다.

역사에서 발견되는 의미 : 희망은 '언제' 실현되는가

어떤 이들은 말한다. 카뮈의 철학은 불투명한 회색이며 체계도 없고 모호할 뿐이라고. 또 어떤 이들은 말한다. 사르트르는 정치에 대해서는 너무나 단순한 아마추어에 불과했다고.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에릭 베르네르는 이와 같은 손쉬운 비난들을 경계한다. 그는 카뮈의 철학에서 변치 않는 일관성을 밝혀내고, 사르트르의 철학을 더 넓은 역사의 차원에서 조망한다. 저자는 카뮈와 사르트르의 사상을 다양한 층위에서 비교 분석하는데, 최종적으로 그 층위들이 모이는 지점이 바로 역사의 의미에 관한 문제이다. 이 책은 묻는다. ‘역사는 어느 정도까지 진보인가? 그리고 역사가 진보라는 사실이 인간의 비참함을 어떤 면에서 제거할 수 있는가?’ 사르트르는 타자와의 화해 가능성에 대해서는 비관적이지만 사실 역사의 진보에 대해서는 낙관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폭력 그 자체를 제거해 가는 폭력인 ‘진보적 폭력’ 개념을 가져와서 미래에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 이처럼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현재의 괴로움을 역사 속에서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물론 현재에 충실한 카뮈는 진보적 폭력을 믿지 않았다. 카뮈의 희망은 언제나 현재에, 지금-여기의 대지 위에 있었던 것이다.

레이몽 아롱은 카뮈와 사르트르의 논쟁을 분석하면서 “최근에 제기된 문제로 인해 카뮈와 사르트르가 서로 충돌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물론 카뮈와 사르트르의 태도에는 그들 각자의 철학 전체와 밀접하게 연결된 뉘앙스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의 오류를 지적하고 지적받으며 각자의 사상을 함께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적 사유의 흐름은 그들의 저작들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이런 점에서 카뮈와 사르트르의 우정에 금이 갔다고 하는 표현은 어쩌면 적절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들은 한 세기의 지성사를 함께 써 내려갔던 것이다. 『폭력에서 전체주의로』는 카뮈와 사르트르의 이와 같은 겹침과 서로 안에서 발견한 한계들을 촘촘하게 따라가며 그들이 논쟁했던 시대의 지성사를 스케치한다. 끊임없이 반항하며 본연의 자기를 찾아 가고자 하는 자 카뮈. 끊임없는 실천으로 존재를 기투하며 나아가는 자 사르트르. 더 나은 삶과 사회를 향한 열망으로 치열하게 분투했던 그들의 사유를 이어받아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