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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코로나19 팬데믹 시대, 재난이 된 한국교회를 진단하다
교회는 어쩌다 혐오의 대상이 되었나
지금까지의 교회는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로서 비판을 받아온 게 사실이다. 사회적 취약계층 즉, 경제적 빈곤자, 사회주의자, 성소수자, 여성, 이슬람, 장애인 등에 대해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고 지속적으로 그들을 소외, 배제해왔다. 기획 시리즈 중 하나인 『혐오와 한국 교회』(삼인, 2020)는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의 생산기지이자 첨병 역할을 하는 한국 개신교 교회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바이러스에 걸린 교회』에서도 교회에 의한 혐오의 문제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그런데 믿지 못할 일이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혐오의 주체였던 교회가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를 맞아 외려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
총 12명의 연구자들이 참여한 이 책에서는 언택트가 뉴 노멀이 된 사회에서도 개신교회가 왜 대면 예배를 포기할 수 없는지 그 역사적, 신학적, 사회경제적 배경을 살펴보고, 팬데믹 시대에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 한국교회의 한계와 그 원인에 대한 분석을 거쳐, 사회적 취약계층에 대한 교회의 역할 및 이미 시작된 교회의 변화, 즉 온라인 교회의 등장, 가정 교회의 가능성을 조명함과 함께 향후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모습과 방향, 대안 등을 제시한다.
교회는 어쩌다 혐오의 대상이 되었나
지금까지의 교회는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로서 비판을 받아온 게 사실이다. 사회적 취약계층 즉, 경제적 빈곤자, 사회주의자, 성소수자, 여성, 이슬람, 장애인 등에 대해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고 지속적으로 그들을 소외, 배제해왔다. 기획 시리즈 중 하나인 『혐오와 한국 교회』(삼인, 2020)는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의 생산기지이자 첨병 역할을 하는 한국 개신교 교회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바이러스에 걸린 교회』에서도 교회에 의한 혐오의 문제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그런데 믿지 못할 일이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혐오의 주체였던 교회가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를 맞아 외려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
총 12명의 연구자들이 참여한 이 책에서는 언택트가 뉴 노멀이 된 사회에서도 개신교회가 왜 대면 예배를 포기할 수 없는지 그 역사적, 신학적, 사회경제적 배경을 살펴보고, 팬데믹 시대에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 한국교회의 한계와 그 원인에 대한 분석을 거쳐, 사회적 취약계층에 대한 교회의 역할 및 이미 시작된 교회의 변화, 즉 온라인 교회의 등장, 가정 교회의 가능성을 조명함과 함께 향후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모습과 방향, 대안 등을 제시한다.
목차
이 책을 펴내며 권지성
글머리
양권석 코로나19와 함께한 1년
제1부 취약계층은 더욱 취약해지고
정경일 고독으로/부터의 연대
-재난 시대의 영성
배근주 코로나19 전쟁(?) 시대, 여성을 이야기하다
-돌봄, 쉼, 치유의 교회 공동체
시우 우리의 불안과 그들의 취약함이 입을 맞출 때
-2020년 이태원 집단감염 사건을 돌아보며
제2부 재난이 된 종교
박정위 코로나19와 탈종교사회의 종교성
김진호 ‘언택트의 사회’ 바깥에서 언택트를 묻다
-코로나19와 작은 교회
오제홍 신천지 현상과 그리스도교 그리고 성경 문자주의
황용연 대면/비대면(예배)에 대한 왈가왈부는 무엇을 드러내는가
제3부 교회에게 말하다, 대안에 관하여
유기쁨 ‘그들만의 방주’가 되어버린 한국교회
-교회와 세계의 ‘다시 연결’을 바라며
조민아 부서지고 나누며 다가가는 그 몸
-코로나19, 성체성사와 신앙 공동체
김주인 코로나19 위기 속 교회의 변화와 이웃됨의 자세
김승환 백화점 교회의 종말과 새로운 교회들
글머리
양권석 코로나19와 함께한 1년
제1부 취약계층은 더욱 취약해지고
정경일 고독으로/부터의 연대
-재난 시대의 영성
배근주 코로나19 전쟁(?) 시대, 여성을 이야기하다
-돌봄, 쉼, 치유의 교회 공동체
시우 우리의 불안과 그들의 취약함이 입을 맞출 때
-2020년 이태원 집단감염 사건을 돌아보며
제2부 재난이 된 종교
박정위 코로나19와 탈종교사회의 종교성
김진호 ‘언택트의 사회’ 바깥에서 언택트를 묻다
-코로나19와 작은 교회
오제홍 신천지 현상과 그리스도교 그리고 성경 문자주의
황용연 대면/비대면(예배)에 대한 왈가왈부는 무엇을 드러내는가
제3부 교회에게 말하다, 대안에 관하여
유기쁨 ‘그들만의 방주’가 되어버린 한국교회
-교회와 세계의 ‘다시 연결’을 바라며
조민아 부서지고 나누며 다가가는 그 몸
-코로나19, 성체성사와 신앙 공동체
김주인 코로나19 위기 속 교회의 변화와 이웃됨의 자세
김승환 백화점 교회의 종말과 새로운 교회들
책 속으로
지난 1년간 우리가 경험한 거리두기와 언택트 사회는 그 사회를 뒷받침하기 위한 필수 노동자 혹은 기본 노동자로서 그리고 재난 상황 속에서 가장 심각하게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사회경제적 약자들로서 거리두기를 제대로 지킬 수 없거나 아니면 포기해야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사회였다. 언택트 사회의 실상과 미래는 재택근무를 통해 거리두기를 지키거나 온라인 거래를 통해 상품을 사고파는 사람들의 모습에서가 아니라, 과로사로 죽어가는 배달 노동자들의 행렬을 통해서 가장 분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 p. 25
우리에게 필요한 고독은 세상의 고통을 등지는 소승小乘적 고독이 아닌 세상의 고통을 등에 지는 대승大乘적 고독이다. 깨달음을 이룬 붓다와 예수가 고통의 땅으로 돌아온 것처럼, 우리가 고독으로부터 나와 향하는 영성의 목적지요 실현지는 세상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삶이다. 재난 시대 영성의 장소는 재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삶이다. 재난 이전부터 삶이 재난이었던 사람들 곁에 다가가 함께 고통을 겪는 것, 그것이 팬데믹 시대의 그리스도교 영성이다.
--- p. 61
기독교인들을 하느님의 군사로, 인간의 삶을 영적 전쟁의 장으로 표현하는 군사화된 기독교는 전쟁으로 표현되는 코로나19와 이념적으로 잘 맞는다. 그러나 전쟁이 아닌 상황을 전쟁에 빗대는 것은 위험하고 잘못된 행동을 불러올 수 있다. 전쟁 용어는 우리에게 알 수 없는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끊임없이 누가 적인지를 찾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 적, 코로나바이러스를 퍼뜨렸다고 생각되는 중국인들, 집단 방역지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 돌봄노동에 피로와 불만을 호소하는 사람들, 힘들게 만들어놓은 K-방역 체계와 의료시스템에 무임승차하는 외국인들, 교회 모임을 막는 정부, 교회 모임을 강행하는 교회들. 코로나19를 전쟁으로 받아들이는 한, 우리 사회는 지속적으로 적을 만들어낸다. 끊임없는 분열과 적대감을 조장하는 전쟁 은유가 아니라 삶의 깊은 의미를 되돌아보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모습을 만들어갈 수 있는 코로나19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내러티브가 필요하다.
--- p. 80
코로나19에 감염되는 것은 생물학적 사건이지만 감염병 발생과 전파에 어떠한 의미가 부여되는지는 사회적 사건이다. 이태원 집단감염 사건을 다룬 자극적인 언론보도는 한국에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낙인이 얼마나 쉽게 용인되는지 깨닫게 했다.
--- pp. 87-88
우선 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의 칼럼집에 나왔던 이야기부터 해보자. 이 학자에게 동료 교수가 마르크스주의가 그리스도교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단다. 선뜻 대답을 못 하는 이 학자에게 동료 교수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렇다.
우선 조직의 문제인데, 한 주일에 한 번씩 당대회를 여는 것이 그리스도교인데, 마르크스주의가 이걸 무슨 수로 감당하겠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라 자금의 문제도 있단다. 한 주에 한 번씩 당비를 걷고, 그것도 총수입의 10분의 1씩이나 걷으면서도, 더 많이 내지 못했다고 회개하는 기도까지 하게 만드니까 말이다.
--- p. 186
비대면 예배의 한계로 지적되는 요소들은 대체로 앞에 인용한 설문조사에서 지적했던 비대면 예배에서 충족되기 어려운 지점과 겹친다. 주로 지적된 측면이 만남과 교제, 성찬 등인데, 이는 교회 내의 지평에서 보면 대면 만남이 어려워져서 조직 유지에 문제가 생긴다거나 성찬의 온라인 진행이 상당히 어렵다는 기술적 문제가 존재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교회 내의 지평에서 교회는 언제나 상호 교류를 전제하는 교인들과 신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어야 하고 예배는 그 교인들 간의 상호 교류와 교인들과 신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자리이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 것인데, 만남과 교제, 성찬 등은 바로 이 교인들 간의 그리고 교인들과 신 간의 상호 교류를 형성하는 핵심 요소들이다. 따라서 비대면 예배가 이 지점을 충족하기가 어렵다면 교회 내의 지평에서는 근원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 pp. 199-200
많은 생태철학자들과 생태운동가들은 인간이 일단 ‘발전’과 ‘성장’의 바퀴를 멈추고 스스로를 돌아보기를, 우리 인간이 살아온 방식을 성찰할 것을, 다르게 살 것을 요청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로만 보였다.
그런데 21세기 초입에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엄청난 속도로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마침내 인류는 잠시 멈추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보게 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된 세계를. 코로나19가 야생동물로부터 몇 단계를 거쳐 인간 사회에서 놀라운 속도로 대유행하게 된 뿌리에는 인간이 야기한 생태 위기의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눈 비비고 살펴보니 지금까지 우리의 인간 중심적인 시야에서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동물’이, 인간이 파괴한 그들의 서식지가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코로나19는 운이 나빠서 어쩌다가 유행하게 된, 박멸이 가능한 어떤 것이 아니다. 코로나19는 더 크고 광범위한 위기, 생태 위기의 한 가지 징후에 불과하며, 우리가 그 해결을 위해 효과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결국 인류는 걷잡을 수 없는 고통을, 파멸을 목전에 두게 될 것이다.
--- pp. 213-214
우리는 호혜적 교환 체계, 선물과 답례로 이루어진 관계가 살아 있는 생명 시스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살펴보았다. 교회가 살아 있는 시스템의 건강한 한 부분이 되려면, 교회 역시 생태계의 호혜적 교환 체계에서 자기 역할을 해야 한다. 세계 내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고 관계 맺는 가운데 다양한 형태의 선물과 답례의 흐름이 이어지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많은 교회에서 선물과 답례의 흐름은 열린 세계에서 흘러가기보다는 닫힌 폐쇄회로 안에서만 빙빙 도는 듯하다. 분명 교회가 세계 안에 자리하며 자연으로부터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받고 있지만, 한국 개신교에서는 받은 은혜를 감사한 마음으로 갚는 대상이 교회로, 일부에서는 교회의 성직자에게로 집중되는 듯하다.
--- p. 234
피부를 표면으로 하여 닫혀 있는, 마치 돌이나 플라스틱과 같은 무기물처럼 폐쇄적으로 집중되어 있는 어떤 덩어리로 몸을 간주하는 것이다. 무기물은 물리적 접촉을 통해서만 그 존재가 확인된다. 따라서 몸을 무기물처럼 생각한다면, 물질과 물질로서의 몸이 맞닿지 않는 상태, 상대방의 동질성과 접촉 가능성이 물리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관계 형성이 극단적으로 제한된다고 믿게 된다. 몸을 무기물로 인식하는 사고는 공동체를 무기물로 인식하는 사고로 이어진다. 몸과 마찬가지로 공동체를 꽉 닫힌, 고정된 목적을 가진, 일관된 세계관을 가진, 일정한 행위 규범을 가진, 동질적인 몸과 마음을 묶어주고 정체성을 공고하게 하는 폐쇄된 어떤 덩어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모이지 말라’는 사회적 요구를 교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시각에는 몸과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 pp. 243-244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는 쇼핑몰과 너무나 유사한 전략을 취한다. 특정 교회를 브랜드화하고 교회가 제공하는 신앙 프로그램을 귀족화하여 마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는 차별화된 영적 권위를 취득한 것으로 착각하게 한다. 쇼핑몰이 새로운 상품을 진열하고 할인 행사를 실시하며 각종 마케팅과 이벤트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것처럼 교회들은 다양한 신앙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영적 레벨을 업그레이드해주면서 차별화된 신앙의 경험이 가능한 것처럼 유혹한다. 소비문화가 이룩한 제국에서 쇼핑몰은 왕국이나 신전과 같다. 소비제국의 백성들에게 쇼핑몰은 성스러운 공간이며 그 안에서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된다. 교회도 쇼핑몰과 다르지 않다. 자신들이 제공하는 종교적 프로그램들이 새로운 종류의 신자로 거듭나게 할 것처럼 성도들을 현혹한다. 창문도 없고, 시계도 없는 쇼핑몰이 그 안에서 일상의 삶과 단절된 환상적인 유토피아 세계를 구현하는 것처럼 교회 건물도 세상과 단절된 자신들만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안간힘이다. 신앙의 내용보다는 그것이 상징하는 기호와 브랜드로 자신을 치장하며 스스로 좋은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하게 한다.
--- p. 25
우리에게 필요한 고독은 세상의 고통을 등지는 소승小乘적 고독이 아닌 세상의 고통을 등에 지는 대승大乘적 고독이다. 깨달음을 이룬 붓다와 예수가 고통의 땅으로 돌아온 것처럼, 우리가 고독으로부터 나와 향하는 영성의 목적지요 실현지는 세상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삶이다. 재난 시대 영성의 장소는 재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삶이다. 재난 이전부터 삶이 재난이었던 사람들 곁에 다가가 함께 고통을 겪는 것, 그것이 팬데믹 시대의 그리스도교 영성이다.
--- p. 61
기독교인들을 하느님의 군사로, 인간의 삶을 영적 전쟁의 장으로 표현하는 군사화된 기독교는 전쟁으로 표현되는 코로나19와 이념적으로 잘 맞는다. 그러나 전쟁이 아닌 상황을 전쟁에 빗대는 것은 위험하고 잘못된 행동을 불러올 수 있다. 전쟁 용어는 우리에게 알 수 없는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끊임없이 누가 적인지를 찾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 적, 코로나바이러스를 퍼뜨렸다고 생각되는 중국인들, 집단 방역지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 돌봄노동에 피로와 불만을 호소하는 사람들, 힘들게 만들어놓은 K-방역 체계와 의료시스템에 무임승차하는 외국인들, 교회 모임을 막는 정부, 교회 모임을 강행하는 교회들. 코로나19를 전쟁으로 받아들이는 한, 우리 사회는 지속적으로 적을 만들어낸다. 끊임없는 분열과 적대감을 조장하는 전쟁 은유가 아니라 삶의 깊은 의미를 되돌아보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모습을 만들어갈 수 있는 코로나19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내러티브가 필요하다.
--- p. 80
코로나19에 감염되는 것은 생물학적 사건이지만 감염병 발생과 전파에 어떠한 의미가 부여되는지는 사회적 사건이다. 이태원 집단감염 사건을 다룬 자극적인 언론보도는 한국에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낙인이 얼마나 쉽게 용인되는지 깨닫게 했다.
--- pp. 87-88
우선 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의 칼럼집에 나왔던 이야기부터 해보자. 이 학자에게 동료 교수가 마르크스주의가 그리스도교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단다. 선뜻 대답을 못 하는 이 학자에게 동료 교수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렇다.
우선 조직의 문제인데, 한 주일에 한 번씩 당대회를 여는 것이 그리스도교인데, 마르크스주의가 이걸 무슨 수로 감당하겠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라 자금의 문제도 있단다. 한 주에 한 번씩 당비를 걷고, 그것도 총수입의 10분의 1씩이나 걷으면서도, 더 많이 내지 못했다고 회개하는 기도까지 하게 만드니까 말이다.
--- p. 186
비대면 예배의 한계로 지적되는 요소들은 대체로 앞에 인용한 설문조사에서 지적했던 비대면 예배에서 충족되기 어려운 지점과 겹친다. 주로 지적된 측면이 만남과 교제, 성찬 등인데, 이는 교회 내의 지평에서 보면 대면 만남이 어려워져서 조직 유지에 문제가 생긴다거나 성찬의 온라인 진행이 상당히 어렵다는 기술적 문제가 존재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교회 내의 지평에서 교회는 언제나 상호 교류를 전제하는 교인들과 신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어야 하고 예배는 그 교인들 간의 상호 교류와 교인들과 신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자리이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 것인데, 만남과 교제, 성찬 등은 바로 이 교인들 간의 그리고 교인들과 신 간의 상호 교류를 형성하는 핵심 요소들이다. 따라서 비대면 예배가 이 지점을 충족하기가 어렵다면 교회 내의 지평에서는 근원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 pp. 199-200
많은 생태철학자들과 생태운동가들은 인간이 일단 ‘발전’과 ‘성장’의 바퀴를 멈추고 스스로를 돌아보기를, 우리 인간이 살아온 방식을 성찰할 것을, 다르게 살 것을 요청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로만 보였다.
그런데 21세기 초입에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엄청난 속도로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마침내 인류는 잠시 멈추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보게 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된 세계를. 코로나19가 야생동물로부터 몇 단계를 거쳐 인간 사회에서 놀라운 속도로 대유행하게 된 뿌리에는 인간이 야기한 생태 위기의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눈 비비고 살펴보니 지금까지 우리의 인간 중심적인 시야에서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동물’이, 인간이 파괴한 그들의 서식지가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코로나19는 운이 나빠서 어쩌다가 유행하게 된, 박멸이 가능한 어떤 것이 아니다. 코로나19는 더 크고 광범위한 위기, 생태 위기의 한 가지 징후에 불과하며, 우리가 그 해결을 위해 효과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결국 인류는 걷잡을 수 없는 고통을, 파멸을 목전에 두게 될 것이다.
--- pp. 213-214
우리는 호혜적 교환 체계, 선물과 답례로 이루어진 관계가 살아 있는 생명 시스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살펴보았다. 교회가 살아 있는 시스템의 건강한 한 부분이 되려면, 교회 역시 생태계의 호혜적 교환 체계에서 자기 역할을 해야 한다. 세계 내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고 관계 맺는 가운데 다양한 형태의 선물과 답례의 흐름이 이어지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많은 교회에서 선물과 답례의 흐름은 열린 세계에서 흘러가기보다는 닫힌 폐쇄회로 안에서만 빙빙 도는 듯하다. 분명 교회가 세계 안에 자리하며 자연으로부터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받고 있지만, 한국 개신교에서는 받은 은혜를 감사한 마음으로 갚는 대상이 교회로, 일부에서는 교회의 성직자에게로 집중되는 듯하다.
--- p. 234
피부를 표면으로 하여 닫혀 있는, 마치 돌이나 플라스틱과 같은 무기물처럼 폐쇄적으로 집중되어 있는 어떤 덩어리로 몸을 간주하는 것이다. 무기물은 물리적 접촉을 통해서만 그 존재가 확인된다. 따라서 몸을 무기물처럼 생각한다면, 물질과 물질로서의 몸이 맞닿지 않는 상태, 상대방의 동질성과 접촉 가능성이 물리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관계 형성이 극단적으로 제한된다고 믿게 된다. 몸을 무기물로 인식하는 사고는 공동체를 무기물로 인식하는 사고로 이어진다. 몸과 마찬가지로 공동체를 꽉 닫힌, 고정된 목적을 가진, 일관된 세계관을 가진, 일정한 행위 규범을 가진, 동질적인 몸과 마음을 묶어주고 정체성을 공고하게 하는 폐쇄된 어떤 덩어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모이지 말라’는 사회적 요구를 교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시각에는 몸과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 pp. 243-244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는 쇼핑몰과 너무나 유사한 전략을 취한다. 특정 교회를 브랜드화하고 교회가 제공하는 신앙 프로그램을 귀족화하여 마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는 차별화된 영적 권위를 취득한 것으로 착각하게 한다. 쇼핑몰이 새로운 상품을 진열하고 할인 행사를 실시하며 각종 마케팅과 이벤트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것처럼 교회들은 다양한 신앙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영적 레벨을 업그레이드해주면서 차별화된 신앙의 경험이 가능한 것처럼 유혹한다. 소비문화가 이룩한 제국에서 쇼핑몰은 왕국이나 신전과 같다. 소비제국의 백성들에게 쇼핑몰은 성스러운 공간이며 그 안에서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된다. 교회도 쇼핑몰과 다르지 않다. 자신들이 제공하는 종교적 프로그램들이 새로운 종류의 신자로 거듭나게 할 것처럼 성도들을 현혹한다. 창문도 없고, 시계도 없는 쇼핑몰이 그 안에서 일상의 삶과 단절된 환상적인 유토피아 세계를 구현하는 것처럼 교회 건물도 세상과 단절된 자신들만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안간힘이다. 신앙의 내용보다는 그것이 상징하는 기호와 브랜드로 자신을 치장하며 스스로 좋은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하게 한다.
출판사 리뷰
코로나19 팬데믹 시대, 재난이 된 한국교회를 진단하다
교회는 어쩌다 혐오의 대상이 되었나
지금까지의 교회는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로서 비판을 받아온 게 사실이다. 사회적 취약계층 즉, 경제적 빈곤자, 사회주의자, 성소수자, 여성, 이슬람, 장애인 등에 대해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고 지속적으로 그들을 소외, 배제해왔다. 기획 시리즈 중 하나인 『혐오와 한국 교회』(삼인, 2020)는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의 생산기지이자 첨병 역할을 하는 한국 개신교 교회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바이러스에 걸린 교회』에서도 교회에 의한 혐오의 문제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그런데 믿지 못할 일이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혐오의 주체였던 교회가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를 맞아 외려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
2020년 1월 20일 첫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 한국은 현재까지 총 네 번의 코로나19 대유행 시기를 맞았다. 그중 두 번이 교회로 인해 촉발된 것이었고, 대면 예배 자제라는 방역지침만 따랐어도 큰 사회적 희생을 치르지 않았으리라는 점에서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2020년 9월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국민의 74%가 코로나19에 대해 교회가 잘못 대응하고 있다고 응답했으며, 8.15 집회 이전인 7월의 조사에서는 개신교 신자에 대해서도 ‘거리를 두고 싶은’(32.2%), ‘이중적인’(30.3%), ‘사기꾼 같은’(29.1%)의 부정적 이미지가 주를 이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코로나19로 인해 없던 문제가 새로 생긴 것이 아니다. 개신교회 내부에 깊이 뿌리내린 병증들이 팬데믹을 통해 드러났을 뿐이라는 게 『바이러스에 걸린 교회』의 중론이다.
총 12명의 연구자들이 참여한 이 책에서는 언택트가 뉴 노멀이 된 사회에서도 개신교회가 왜 대면 예배를 포기할 수 없는지 그 역사적, 신학적, 사회경제적 배경을 살펴보고, 팬데믹 시대에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 한국교회의 한계와 그 원인에 대한 분석을 거쳐, 사회적 취약계층에 대한 교회의 역할 및 이미 시작된 교회의 변화, 즉 온라인 교회의 등장, 가정 교회의 가능성을 조명함과 함께 향후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모습과 방향, 대안 등을 제시한다.
개신교회는 왜 대면예배를 고집하는가
언택트는 팬데믹 시대 뉴 노멀의 핵심 키워드로 부상했다. 감염의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존의 뉴 노멀이었던 ‘상생’보다도 더 절박하게 요청된 것이 ‘얽힘의 최소화’ 즉, 사회적 거리두기이다. 방역당국의 대면 예배 자체 요청에 따라 다수 종교단체가 온라인 비대면 예배 병행으로 전환했으나 아직도 많은 수의 개신교회는 대면 예배를 강행하고 있다. 황용연 연구자는 「대면/비대면(예배)에 대한 왈가왈부는 무엇을 드러내는가」에서 그 이유를 교회 내의 지평에서 찾는다. 교회에서의 예배는 교인들 간의 상호 교류뿐 아니라 교인들과 신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자리이다. 그리고 이들 상호 교류를 형성하는 핵심 요소들이 바로 만남과 교제, 성찬 등인데 필자에 따르면 비대면 예배가 이 지점을 충족하기 어렵기 때문에 근원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교인 감소와 교인 동원의 비활성화로 인한 생존의 위기를 들고 있다. 팬데믹 이후 대면, 비대면 예배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논쟁에 가려 정작 예배의 의미에 대한 담론은 사라져버린 상황을 필자는 개탄한다.
양권석 교수 역시 머리글 「코로나19와 함께한 1년」에서 경제적 이유와 함께 대면 예배가 교회와 신자들의 자의식을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장치이기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뿐만 아니라 필자에 의하면 교회 내부를 지배하는 질서와 의사결정 구조, 구성원들 사이의 교육적?목회적 관계 형식들, 더 나아가 교회가 예산이나 재정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체계 등이 모두 대면 예배의 형식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한편 정경일 원장은 「고독으로/부터의 연대」에서 대면 예배 강행 이유로 교회의 집단주의 문화에 주목한다. 한국 개신교는 예배, 영성, 교육, 친교, 봉사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집단주의 문화가 강하며, 군대식으로 교인들을 집단 훈육할 뿐 아니라, 교회의 각종 모임과 프로그램은 신자를 데려오거나 붙잡아두기 위한 교회 유지와 성장의 수단이라고 꼬집는다. 필자가 보기에 교회의 다수 평신도가 집단 훈육 구조를 벗어나 자유롭게 사유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는 시민-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고독이 필수적이다. 고독으로 들어가 자유로운 성찰적 주체가 되고, 고독으로부터 나아와 책임 있는 관계적 주체가 되며, 이는 공동체로 이르는 길 즉 만남, 성찰, 치유, 연대로 이어진다.
한국교회의 한계와 원인
박정위 교수의 「코로나19와 탈종교사회의 종교성」, 김진호 목사의 「‘언택트의 사회’ 바깥에서 언택트를 묻다」, 오제홍 연구자의 「신천지 현상과 그리스도교, 그리고 성경 문자주의」는 한국교회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 원인을 분석한 글들이다.
오제홍 연구자는 신천지와 일부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한계로 보수주의와 문자주의에서 기인한 ‘단순화’를 꼽는다. 천국과 지옥 혹은 구원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등 이분법적 가치판단을 하는 단순화는 복잡한 사고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단조롭고 강한 신념을 갖게 할 뿐 아니라, 이것은 결국 배타적 행동 양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개인 구원을 강조하는 종교들에서 자주 나타나는데, 필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인식 개선이 먼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성경에 기록된 문자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문맥과 문맥 사이에 담긴 메시지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 힘써야 함은 물론 단순 암기식 방법에서 벗어나, 역사를 비롯한 시대적 연구 및 시야 확대를 위해 창의적 교육법을 통해 구성원들의 인식 속에 내재된 편견을 바로잡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박정위 교수는 한국 개신교회의 출발지인 미국 백인 기독교의 신학을 집중 조명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자신의 입지 강화를 위해 되레 질병에 대한 파괴적인 은유의 질료를 제공해왔다. 세계가 팬데믹의 대유행에 위협당하고 있는 현재, 기독교가 건설적인 담론을 제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파괴적인 은유만 양산하는 원인을 필자는 미국 백인 교회의 정체성에서 찾는다. 백인우월주의가 강한 미국 백인교회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이해관계로 그들의 신학을 정하고 이후에는 그 신학으로 인해 모순된 사회관계를 지탱하려는 모양을 보인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신앙생활을 강조하고 개인 구원을 신앙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와 미국 백인교회 사이의 신학적 유사성이 뚜렷이 드러난다고 전제한 뒤, 종교의 이익을 기준으로 형성된 신학은 사회적인 주제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참여하기를 어렵게 했고, 자기 종교 집단의 유지와 성장에만 몰두하는 현상의 배경이 되어왔다고 지적한다.
김진호 목사는 교회 세습, 재정 불투명성과 목사들의 비리?배임, 건축비 중심의 재정 운영, 성범죄를 포함한 반인권적 행태, 박약한 공공성, 그리고 극우주의 등을 교회의 한계로 진단하며, 1990년대 이후 이러한 문제들이 널리 알려지면서 교회로부터 이탈하는 떠돌이 신자 현상, 즉 가나안 성도 현상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고 분석한다. 여기에 더해 온라인 관계망 형성 속도와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급격한 이행도 교회로부터의 이탈을 가속화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신자들의 신앙에서 ‘장소로서의 교회’의 의미가 퇴조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 되었고, 이에 필자는 새로운 교회의 모델로 ‘작은 교회’를 제안한다. 필자가 규정한 ‘작은 교회’란 규모에 따른 기계적 분류보다는 성장주의에 저항하는 교회, 더 나아가 신앙적, 신학적 노선을 종합해 ‘탈성장, 탈권위, 탈성별을 추구하는 교회’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가능케 하는 존재들, 그러나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자들
김진호 목사는 작은 교회의 역할로, 충분한 정당성을 가진 것처럼 포장된 시민사회적 언택트를 그대로 수용하지 말고, 바깥을 질문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민들의 건강을 위한 질서를 대변하는 제도로 구현되었지만, 플랫폼 노동자의 과로사나 최말단 노동자의 사고사처럼,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이들은 사회적 거리두기 국면에서 유령이 되었다는 게 필자의 견해다.
양권석 교수는 지난 1년간 우리가 경험한 거리두기와 언택트 사회는 그 사회를 뒷받침하기 위한 필수 노동자 혹은 기본 노동자로서 그리고 재난 상황 속에서 가장 심각하게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사회경제적 약자들로서 거리두기를 제대로 지킬 수 없거나 아니면 포기해야 하는 사람들에 의해 뒷받침되는 사회였다고 지적한다. 재난의 위기 상황에서 강제된 거리두기와 언택트의 뉴 노멀 질서는 우리 사회에서 불평등과 차별을 감수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많은 희생과 배제를 요구하고 있으며, 때로는 그들이 오도된 혐오와 분노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황용연 연구자는 코로나19 사태가 신천지와 보수적 개신교회처럼 시민적 상식에 미달한 이들의 약점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민적 상식에 의해 구성된다는 시민성 자체의 약점도 드러낸다고 보았다. 이는 ‘가장 큰 부족’ 안에서의 합의점들이 사회의 상식이라고 주장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고, ‘큰 부족’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 성소수자 등이 집단적 공격의 대상이 되거나 혹은 집단적 공격의 시도의 대상이 되었음을 환기시킨다.
구체적 실례를 통해 이들 취약계층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차별, 낙인을 살피고 교회의 역할을 주문한 글이 배근주 교수의 「코로나19 전쟁(?) 시대, 여성을 이야기하다」와 시우 연구자의 「우리의 불안과 그들의 취약함이 입을 맞출 때」이다.
배근주 교수는 페미니스트 신학과 평화 윤리 관점에서 코로나19를 전쟁으로 은유하는 행위를 비판하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위해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돌봄의 윤리, 돌봄의 공동체를 제시한다. 코로나19 시대를 전시에 빗대어 헤쳐 나가려 할 때 외면하는 문제들, 특히 가부장제에 기반을 둔 성역할의 고착화로 인해 어떤 이들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는 ‘돌봄’에 대해 분석한다. 돌봄의 폭력화는 단순히 여성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으로 돌봄을 떠맡아야 하는 모든 사람의 문제이다. 필자는 이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으로 정신적, 육체적 상해들, 즉 ‘도덕적 상해’를 꼽는다. 또한 교회가 영성 돌봄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돌봄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담론 만들기를 주문한다.
시우 연구자는 2020년 5월을 전후로 발생한 서울 이태원 집단감염 사건을 되짚어보면서 사회적 소수자가 위기 상황에서 어디에 배치되고 어떻게 해석되며 무엇과 부딪히는지를 분석하고, 보수 개신교회의 반퀴어 운동을 비판적으로 추적한다. 코로나19에 감염되는 것은 생물학적 사건이지만 감염병 발생과 전파에 어떠한 의미가 부여되는지는 사회적 사건이다. 필자는 이태원 집단감염 사건을 다룬 자극적인 언론보도는 한국에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낙인이 얼마나 쉽게 용인되는지를 깨닫게 한다고 지적한다.
이미 시작된 변화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로의 방향
김승환 연구자는 「백화점 교회의 종말과 새로운 교회들」에서 새로운 교회론으로 온라인 교회와 가정 교회에 주목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는 쇼핑몰과 유사한 전략을 취할 뿐 아니라 특정 교회를 브랜드화하고 교회가 제공하는 신앙 프로그램을 귀족화하여 마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는 차별화된 영적 권위를 취득한 것으로 착각하게 한다고 꼬집는다. 코로나19로 인해 건물 중심의 신앙이 붕괴되고 있다고 본 필자는 신앙의 정체성이 건물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신적 경험과 관계적 만남을 통한 진정성에 있음을 강조하며, 오늘날 디지털 종교개혁은 건물과 성직자 중심의 신앙체제를 무너뜨리고 다양한 참여와 실천이 가능한 신앙의 해방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그 실례로 온라인 교회와 가정 교회의 등장을 들고 있다.
김주인 연구자 역시 「코로나19 위기 속 교회의 변화와 이웃됨의 자세」에서 교회의 사회적 고립이 가속화되는 상황을 타개할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모색한다. 필자는 온라인 교회의 부상과 목회자 이중직의 확산을 변화하는 시대에 대한 응답인 동시에 기존 질서에 고착된 개신교회에 새로운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와 함께 교회가 지향해야 할 이웃됨의 자세로서 ‘조건 없는 환대’와 ‘이웃과의 상호인정’을 제안한다. 오늘의 시대에 교회가 위치한 자리에서 목소리를 내어도 외면당하는 이들, 목소리를 낼 수조차 없는 이들이 누구인지 다시금 돌아보고 그들을 맞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조민아 교수는 「부서지고 나누며 다가가는 그 몸」을 통해 그리스도교에서 공동체의 친밀감과 유대를 압축하는 표현이었던 ‘한 몸’ 비유에 질문을 던지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몸을 닫혀 있는 무기물로 인식하는 사고는 공동체를 무기물로 인식하는 사고로 이어지는데, ‘모이지 말라’는 사회적 요구를 교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시각에는 몸과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고 꼬집는다. 군집성과 결속력이 우선시되는?‘한 몸’에 대한 열정은 본당 내부로는 훈육과 강제를, 외부로는 배제를 합리화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필자는 한 덩어리로 묶여 하나의 생각으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라, 내부의 다양성과 외부의 자극에 늘 열려 있어야 하는 몸으로서의 신앙 공동체라는 신학적 제안을 건넨다.
유기쁨 연구자는 「‘그들만의 방주’가 되어버린 한국교회」에서 스스로를 세계의 ‘표면에서’ 부유하는 ‘방주’로 자리매김한 교회의 한계를 지적한 뒤,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다시 연결’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곧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와, 그리고 ‘시야에서 사라지는 존재들’과의 연결을 다시 추구하는 일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연 세계를 직접 경험하여 느끼는 한편,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게 되어버린 존재들, 잊힌 존재들을 발견하고, 보고 듣고 호명하는 다양한 시도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교회는 어쩌다 혐오의 대상이 되었나
지금까지의 교회는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로서 비판을 받아온 게 사실이다. 사회적 취약계층 즉, 경제적 빈곤자, 사회주의자, 성소수자, 여성, 이슬람, 장애인 등에 대해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고 지속적으로 그들을 소외, 배제해왔다. 기획 시리즈 중 하나인 『혐오와 한국 교회』(삼인, 2020)는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의 생산기지이자 첨병 역할을 하는 한국 개신교 교회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바이러스에 걸린 교회』에서도 교회에 의한 혐오의 문제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그런데 믿지 못할 일이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혐오의 주체였던 교회가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를 맞아 외려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
2020년 1월 20일 첫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 한국은 현재까지 총 네 번의 코로나19 대유행 시기를 맞았다. 그중 두 번이 교회로 인해 촉발된 것이었고, 대면 예배 자제라는 방역지침만 따랐어도 큰 사회적 희생을 치르지 않았으리라는 점에서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2020년 9월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국민의 74%가 코로나19에 대해 교회가 잘못 대응하고 있다고 응답했으며, 8.15 집회 이전인 7월의 조사에서는 개신교 신자에 대해서도 ‘거리를 두고 싶은’(32.2%), ‘이중적인’(30.3%), ‘사기꾼 같은’(29.1%)의 부정적 이미지가 주를 이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코로나19로 인해 없던 문제가 새로 생긴 것이 아니다. 개신교회 내부에 깊이 뿌리내린 병증들이 팬데믹을 통해 드러났을 뿐이라는 게 『바이러스에 걸린 교회』의 중론이다.
총 12명의 연구자들이 참여한 이 책에서는 언택트가 뉴 노멀이 된 사회에서도 개신교회가 왜 대면 예배를 포기할 수 없는지 그 역사적, 신학적, 사회경제적 배경을 살펴보고, 팬데믹 시대에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 한국교회의 한계와 그 원인에 대한 분석을 거쳐, 사회적 취약계층에 대한 교회의 역할 및 이미 시작된 교회의 변화, 즉 온라인 교회의 등장, 가정 교회의 가능성을 조명함과 함께 향후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모습과 방향, 대안 등을 제시한다.
개신교회는 왜 대면예배를 고집하는가
언택트는 팬데믹 시대 뉴 노멀의 핵심 키워드로 부상했다. 감염의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존의 뉴 노멀이었던 ‘상생’보다도 더 절박하게 요청된 것이 ‘얽힘의 최소화’ 즉, 사회적 거리두기이다. 방역당국의 대면 예배 자체 요청에 따라 다수 종교단체가 온라인 비대면 예배 병행으로 전환했으나 아직도 많은 수의 개신교회는 대면 예배를 강행하고 있다. 황용연 연구자는 「대면/비대면(예배)에 대한 왈가왈부는 무엇을 드러내는가」에서 그 이유를 교회 내의 지평에서 찾는다. 교회에서의 예배는 교인들 간의 상호 교류뿐 아니라 교인들과 신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자리이다. 그리고 이들 상호 교류를 형성하는 핵심 요소들이 바로 만남과 교제, 성찬 등인데 필자에 따르면 비대면 예배가 이 지점을 충족하기 어렵기 때문에 근원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교인 감소와 교인 동원의 비활성화로 인한 생존의 위기를 들고 있다. 팬데믹 이후 대면, 비대면 예배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논쟁에 가려 정작 예배의 의미에 대한 담론은 사라져버린 상황을 필자는 개탄한다.
양권석 교수 역시 머리글 「코로나19와 함께한 1년」에서 경제적 이유와 함께 대면 예배가 교회와 신자들의 자의식을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장치이기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뿐만 아니라 필자에 의하면 교회 내부를 지배하는 질서와 의사결정 구조, 구성원들 사이의 교육적?목회적 관계 형식들, 더 나아가 교회가 예산이나 재정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체계 등이 모두 대면 예배의 형식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한편 정경일 원장은 「고독으로/부터의 연대」에서 대면 예배 강행 이유로 교회의 집단주의 문화에 주목한다. 한국 개신교는 예배, 영성, 교육, 친교, 봉사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집단주의 문화가 강하며, 군대식으로 교인들을 집단 훈육할 뿐 아니라, 교회의 각종 모임과 프로그램은 신자를 데려오거나 붙잡아두기 위한 교회 유지와 성장의 수단이라고 꼬집는다. 필자가 보기에 교회의 다수 평신도가 집단 훈육 구조를 벗어나 자유롭게 사유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는 시민-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고독이 필수적이다. 고독으로 들어가 자유로운 성찰적 주체가 되고, 고독으로부터 나아와 책임 있는 관계적 주체가 되며, 이는 공동체로 이르는 길 즉 만남, 성찰, 치유, 연대로 이어진다.
한국교회의 한계와 원인
박정위 교수의 「코로나19와 탈종교사회의 종교성」, 김진호 목사의 「‘언택트의 사회’ 바깥에서 언택트를 묻다」, 오제홍 연구자의 「신천지 현상과 그리스도교, 그리고 성경 문자주의」는 한국교회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 원인을 분석한 글들이다.
오제홍 연구자는 신천지와 일부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한계로 보수주의와 문자주의에서 기인한 ‘단순화’를 꼽는다. 천국과 지옥 혹은 구원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등 이분법적 가치판단을 하는 단순화는 복잡한 사고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단조롭고 강한 신념을 갖게 할 뿐 아니라, 이것은 결국 배타적 행동 양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개인 구원을 강조하는 종교들에서 자주 나타나는데, 필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인식 개선이 먼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성경에 기록된 문자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문맥과 문맥 사이에 담긴 메시지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 힘써야 함은 물론 단순 암기식 방법에서 벗어나, 역사를 비롯한 시대적 연구 및 시야 확대를 위해 창의적 교육법을 통해 구성원들의 인식 속에 내재된 편견을 바로잡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박정위 교수는 한국 개신교회의 출발지인 미국 백인 기독교의 신학을 집중 조명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자신의 입지 강화를 위해 되레 질병에 대한 파괴적인 은유의 질료를 제공해왔다. 세계가 팬데믹의 대유행에 위협당하고 있는 현재, 기독교가 건설적인 담론을 제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파괴적인 은유만 양산하는 원인을 필자는 미국 백인 교회의 정체성에서 찾는다. 백인우월주의가 강한 미국 백인교회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이해관계로 그들의 신학을 정하고 이후에는 그 신학으로 인해 모순된 사회관계를 지탱하려는 모양을 보인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신앙생활을 강조하고 개인 구원을 신앙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와 미국 백인교회 사이의 신학적 유사성이 뚜렷이 드러난다고 전제한 뒤, 종교의 이익을 기준으로 형성된 신학은 사회적인 주제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참여하기를 어렵게 했고, 자기 종교 집단의 유지와 성장에만 몰두하는 현상의 배경이 되어왔다고 지적한다.
김진호 목사는 교회 세습, 재정 불투명성과 목사들의 비리?배임, 건축비 중심의 재정 운영, 성범죄를 포함한 반인권적 행태, 박약한 공공성, 그리고 극우주의 등을 교회의 한계로 진단하며, 1990년대 이후 이러한 문제들이 널리 알려지면서 교회로부터 이탈하는 떠돌이 신자 현상, 즉 가나안 성도 현상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고 분석한다. 여기에 더해 온라인 관계망 형성 속도와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급격한 이행도 교회로부터의 이탈을 가속화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신자들의 신앙에서 ‘장소로서의 교회’의 의미가 퇴조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 되었고, 이에 필자는 새로운 교회의 모델로 ‘작은 교회’를 제안한다. 필자가 규정한 ‘작은 교회’란 규모에 따른 기계적 분류보다는 성장주의에 저항하는 교회, 더 나아가 신앙적, 신학적 노선을 종합해 ‘탈성장, 탈권위, 탈성별을 추구하는 교회’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가능케 하는 존재들, 그러나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자들
김진호 목사는 작은 교회의 역할로, 충분한 정당성을 가진 것처럼 포장된 시민사회적 언택트를 그대로 수용하지 말고, 바깥을 질문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민들의 건강을 위한 질서를 대변하는 제도로 구현되었지만, 플랫폼 노동자의 과로사나 최말단 노동자의 사고사처럼,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이들은 사회적 거리두기 국면에서 유령이 되었다는 게 필자의 견해다.
양권석 교수는 지난 1년간 우리가 경험한 거리두기와 언택트 사회는 그 사회를 뒷받침하기 위한 필수 노동자 혹은 기본 노동자로서 그리고 재난 상황 속에서 가장 심각하게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사회경제적 약자들로서 거리두기를 제대로 지킬 수 없거나 아니면 포기해야 하는 사람들에 의해 뒷받침되는 사회였다고 지적한다. 재난의 위기 상황에서 강제된 거리두기와 언택트의 뉴 노멀 질서는 우리 사회에서 불평등과 차별을 감수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많은 희생과 배제를 요구하고 있으며, 때로는 그들이 오도된 혐오와 분노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황용연 연구자는 코로나19 사태가 신천지와 보수적 개신교회처럼 시민적 상식에 미달한 이들의 약점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민적 상식에 의해 구성된다는 시민성 자체의 약점도 드러낸다고 보았다. 이는 ‘가장 큰 부족’ 안에서의 합의점들이 사회의 상식이라고 주장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고, ‘큰 부족’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 성소수자 등이 집단적 공격의 대상이 되거나 혹은 집단적 공격의 시도의 대상이 되었음을 환기시킨다.
구체적 실례를 통해 이들 취약계층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차별, 낙인을 살피고 교회의 역할을 주문한 글이 배근주 교수의 「코로나19 전쟁(?) 시대, 여성을 이야기하다」와 시우 연구자의 「우리의 불안과 그들의 취약함이 입을 맞출 때」이다.
배근주 교수는 페미니스트 신학과 평화 윤리 관점에서 코로나19를 전쟁으로 은유하는 행위를 비판하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위해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돌봄의 윤리, 돌봄의 공동체를 제시한다. 코로나19 시대를 전시에 빗대어 헤쳐 나가려 할 때 외면하는 문제들, 특히 가부장제에 기반을 둔 성역할의 고착화로 인해 어떤 이들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는 ‘돌봄’에 대해 분석한다. 돌봄의 폭력화는 단순히 여성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으로 돌봄을 떠맡아야 하는 모든 사람의 문제이다. 필자는 이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으로 정신적, 육체적 상해들, 즉 ‘도덕적 상해’를 꼽는다. 또한 교회가 영성 돌봄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돌봄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담론 만들기를 주문한다.
시우 연구자는 2020년 5월을 전후로 발생한 서울 이태원 집단감염 사건을 되짚어보면서 사회적 소수자가 위기 상황에서 어디에 배치되고 어떻게 해석되며 무엇과 부딪히는지를 분석하고, 보수 개신교회의 반퀴어 운동을 비판적으로 추적한다. 코로나19에 감염되는 것은 생물학적 사건이지만 감염병 발생과 전파에 어떠한 의미가 부여되는지는 사회적 사건이다. 필자는 이태원 집단감염 사건을 다룬 자극적인 언론보도는 한국에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낙인이 얼마나 쉽게 용인되는지를 깨닫게 한다고 지적한다.
이미 시작된 변화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로의 방향
김승환 연구자는 「백화점 교회의 종말과 새로운 교회들」에서 새로운 교회론으로 온라인 교회와 가정 교회에 주목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는 쇼핑몰과 유사한 전략을 취할 뿐 아니라 특정 교회를 브랜드화하고 교회가 제공하는 신앙 프로그램을 귀족화하여 마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는 차별화된 영적 권위를 취득한 것으로 착각하게 한다고 꼬집는다. 코로나19로 인해 건물 중심의 신앙이 붕괴되고 있다고 본 필자는 신앙의 정체성이 건물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신적 경험과 관계적 만남을 통한 진정성에 있음을 강조하며, 오늘날 디지털 종교개혁은 건물과 성직자 중심의 신앙체제를 무너뜨리고 다양한 참여와 실천이 가능한 신앙의 해방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그 실례로 온라인 교회와 가정 교회의 등장을 들고 있다.
김주인 연구자 역시 「코로나19 위기 속 교회의 변화와 이웃됨의 자세」에서 교회의 사회적 고립이 가속화되는 상황을 타개할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모색한다. 필자는 온라인 교회의 부상과 목회자 이중직의 확산을 변화하는 시대에 대한 응답인 동시에 기존 질서에 고착된 개신교회에 새로운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와 함께 교회가 지향해야 할 이웃됨의 자세로서 ‘조건 없는 환대’와 ‘이웃과의 상호인정’을 제안한다. 오늘의 시대에 교회가 위치한 자리에서 목소리를 내어도 외면당하는 이들, 목소리를 낼 수조차 없는 이들이 누구인지 다시금 돌아보고 그들을 맞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조민아 교수는 「부서지고 나누며 다가가는 그 몸」을 통해 그리스도교에서 공동체의 친밀감과 유대를 압축하는 표현이었던 ‘한 몸’ 비유에 질문을 던지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몸을 닫혀 있는 무기물로 인식하는 사고는 공동체를 무기물로 인식하는 사고로 이어지는데, ‘모이지 말라’는 사회적 요구를 교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시각에는 몸과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고 꼬집는다. 군집성과 결속력이 우선시되는?‘한 몸’에 대한 열정은 본당 내부로는 훈육과 강제를, 외부로는 배제를 합리화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필자는 한 덩어리로 묶여 하나의 생각으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라, 내부의 다양성과 외부의 자극에 늘 열려 있어야 하는 몸으로서의 신앙 공동체라는 신학적 제안을 건넨다.
유기쁨 연구자는 「‘그들만의 방주’가 되어버린 한국교회」에서 스스로를 세계의 ‘표면에서’ 부유하는 ‘방주’로 자리매김한 교회의 한계를 지적한 뒤,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다시 연결’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곧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와, 그리고 ‘시야에서 사라지는 존재들’과의 연결을 다시 추구하는 일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연 세계를 직접 경험하여 느끼는 한편,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게 되어버린 존재들, 잊힌 존재들을 발견하고, 보고 듣고 호명하는 다양한 시도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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