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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의릉(조선 20대 경종과 두번째 왕비 선의왕후 어씨의 능) 2024-05-12

동방박사님 2024. 5. 12.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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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릉 (懿陵)

조선시대사 유적 문화재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있는 조선 제20대 경종과 선의왕후 어씨의 동원상하릉.

의릉(懿陵)은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있는 조선 제20대 경종과 선의왕후 어씨의 동원상하릉이다. 1724년에 경종의 능침을 조성하고, 1730년에 경종과 같은 언덕에 약 80자 정도 아래에 선의왕후의 능침을 마련하여 상하로 배치된 두 개의 봉분이 완성되었다. 1962년에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가 의릉 경내에 자리 잡으면서 의릉의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에 연못을 만들고 정원으로 활용하였으나, 1995년 중앙정보부가 이전하고 능역의 복원이 이루어졌다.

건립경위

1724825일에 경종(景宗, 1688~1724, 재위 1720~1724)이 창경궁 환취정에서 승하하였다. 산릉 터를 자세히 살핀 결과, 옛 영릉(寧陵) 자리와 양주 중량포가 후보지로 거론되었다. 영조는 옛 영릉의 터는 건원릉(健元陵) 내에 있으며 산세도 좋으나, 천릉하고 옮겨 간 옛터에 새 능을 조성한 사례가 없으므로 중량포를 선택하였다. 924일에 공역을 시작하여 1216일에 국장 의례를 마치고 1224일에 완공되었다.

1730(영조 6) 629일에 선의왕후(宣懿王后, 1705~1730)가 경희궁의 어조당에서 승하하였다. 선의왕후는 1724년에 의릉을 조성할 당시, 같은 능역의 동쪽에 산릉을 조성할 곳을 예정하고 경종 곁에 묻히려는 의지를 나타내었다. 그 뜻에 따라 의릉 주변을 자시히 살펴 경종의 능침이 조성된 지점에서 약 80자 정도 아래에 선의왕후의 능침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공역은 86일에 시작되었으며, 1019일에 국장 의례를 행하였다. 이로써 의릉에 경종과 선의왕후의 능침이 하나의 언덕에 상하로 배치되는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으로 완성되었다.

변천

1730년에 선의왕후의 능침을 마련하고 상례를 거행하기 위하여 가정자각(假丁字閣) 5칸 규모로 건립하였다. 경종의 산릉에 왕후를 합부한 것이니, 광릉(光陵)의 전례를 따라 가정자각을 지어 상례를 마치고 철거하여, 본래 정자각(丁字閣)에서 제례를 합하여 지내도록 하였다.

1962년에는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가 의릉 경내에 들어서면서 왕릉의 우측 능선을 깎고 청사를 세웠다. 1970 5월에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나, 1972년 정자각 앞에 인공 연못을 만들어 정원으로 사용하였다. 1973년에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1897~1970)의 영원(英園)을 조성하면서 재실(齋室)을 옮겨가는 등 훼손이 일어났다. 1995년에 중앙정보부가 이전하면서 능역을 점차 복원하였다.

조선 제 20 대 경종과 선의왕후 어씨의 동원상하릉

형태와 특징

의릉은 양주 치소(治所)의 남쪽에 신좌인향(申坐寅向)으로 자리잡았다. 산릉의 제도는 명릉(明陵)의 전례를 따라 봉릉에는 병풍석(屛風石)을 갖추지 않고 난간석(欄干石)만 둘렀으며, 정자각은 8칸 규모에 맞배지붕으로 건립하였다.

능상의 문석인(文石人)과 무석인(武石人)은 혜릉(惠陵)의 돌거리를 참고하여 조각하였다. 특히 무석인의 갑옷은 허리띠 아래로 꼬리가 둥글게 말린 표범가죽을 걸친 모습으로 조각되었는데, 이것은 혜릉과 의릉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이다.

의의 및 평가

동원상하릉은 여주의 영릉과 의릉에서만 보이는 특별한 배치이다. 1673년에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의 영릉을 여주로 천릉하고 1674년에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의 능을 조성할 때, 대왕릉과 같은 언덕에 상하로 배치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있었다.

당시 풍수적인 논란이 있었으나 왕릉을 위쪽에 두고 아래에 왕후릉을 배치하여 위계에 따라 배치하고, 왕후릉에 곡담을 생략하여 막힘이 없도록 조성하였다. 영릉의 전례를 따라 의릉도 경종의 능침 아래에 선의왕후의 능침을 마련하여 동원상하릉으로 조성하였다.

조선 제 20 대 경종

경종 (景宗)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제20대 왕 / 본명:이균(李畇) / :휘서(輝瑞) / 시호: 덕문익무순인선효(德文翼武純二宣孝) / 탄생연도 1688(숙종 14) ~ 사망 연도 1724(경종 4) / 본관: 전주(全州)

경종은 조선 제20대 임금이다. 재위 기간은 1720~1724년이다. 숙종과 희빈장씨 사이에서 태어나서 곧 원자로 정해졌고, 3세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왕비는 심호의 딸 단의왕후(端懿王后)이고, 계비는 어유구의 딸 선의왕후(宣懿王后)이다. 30년 동안 왕세자로 국왕 수업을 받았고, 무리 없이 대리청정을 수행하였다. 왕위에 올라서 4년의 재위 기간 동안 연잉군의 세제 책봉과 세제의 대리청정 문제 등으로 소론과 노론 사이에 격심한 정쟁이 있었지만, 부왕인 숙종의 뜻을 지키고 백성을 위한 정사를 펼치려 애쎴다.

가계 및 인적 사항

1688(숙종 14) 10월 숙종과 희빈장씨에게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균(), 자는 휘서(輝瑞)이다. 백일이 되기 전에 원자로 명호(名號)가 정해졌고, 3세인 1690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왕세자가 4세가 되자, 천자문에 친히 서문을 적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내려 주었다. 6세 때부터는 서연(書筵)을 하였으며, 8세에 입학례를 하였다. 같은 해에 시민당(時敏堂)에서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의 주관으로 왕세자의 관례가 행해졌다.9세에 유학 심호(沈浩)의 딸을 왕세자빈으로 맞이하였으나, 1718(숙종 44) 왕세자빈이 사망하였다. 이해에 병조참지(兵曹參知) 어유귀(魚有龜)의 딸을 왕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동복(同腹) 형제 성수(盛壽)는 어려서 죽었고, 이복 형제로는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영조(英祖)가 있다.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1717(숙종 43) 부왕인 숙종(肅宗)의 눈병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고, 숙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 4년째인 1724년에 사망하였다. 시호는 덕문익무순인선효(德文翼武純二宣孝), 묘호는 경종, 능호는 의릉(懿陵)이다.

주요 활동

경종은 원자로 호칭이 정해질 때부터 조정의 논란이 있었는데, 중궁(中宮)이 왕자를 생산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숙종은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원자의 생모를 소의(昭儀)8에서 빈()으로 승진시켰다. 그후 숙종은 중궁을 폐하고 원자의 생모인 희빈장씨를 왕비에 책봉하고, 원자를 왕세자에 책봉하였다.경종은 왕세자 시절에도 당쟁에 휘말렸다.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생모가 왕비에서 빈으로 강등되었고, 1701(숙종 27) 숙종이 그의 생모에게 신당을 만들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죄명으로 자진(自盡)하라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다. 왕세자의 생모와 삼촌에 대한 처벌 문제를 놓고 왕세자에게 동정론을 펴는 소론(少論)과 노론(老論)이 대립하게 되었다. 숙종 후반으로 갈수록 이들 정파 간의 갈등이 커졌는데, 1716(숙종 42) 숙종의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노론이 정국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1717년 왕세자가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게 되었다. 왕세자의 업무는 종묘와 산릉(山陵)의 제향을 대행하고, 5일마다 있는 빈청의 일차(日次)에 대신과 비변사(備邊司) 신료가 왕세자의 처소인 시민당에 입대(入對)하면, 인사 · 형정(刑政) · 군권을 제외한 서무를 직접 재결하되, 결단하기 어려운 중대한 일은 숙종에게 아뢰는 것 등이었다. 그는 대리청정을 하는 동안 무리없이 맡은 일을 수행하였다. 경종은 1720년 왕위에 올랐지만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1721(경종 1) 정국을 주도하던 노론 측에서는 임금이 후사가 없다고 연잉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게 하였다. 그리고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은 병약하다는 이유로 이제 막 즉위한 경종에게 정무에서 손을 떼고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라는 상소를 올렸고, 노론 대신들은 연명차자(聯名箚子)를 올려 경종을 압박하였다.

조선 제 20 대 경종

소론의 김일경(金一鏡)은 대리청정을 제기한 조성복은 물론 연명차자를 올린 노론 대신을 임금에 대한 불충(不忠)으로 몰아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이듬해에는 노론 일파가 임금을 시해하려 했다는 목호룡의 고변으로 노론의 김창집(金昌集) · 이이명(李頤命) · 이건명(李健命) · 조태채(趙泰采) 등 네 명의 대신 이하 관련자들이 사사, 유배, 추방 등의 처벌을 받았다. 1721(신축년) · 1722(임인년) 2년에 걸친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소론의 급진파가 정국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이처럼 격화된 당쟁으로 비변사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해 양역변통(良役變通), 주전(鑄錢) 북한산성 의승(義僧) 존폐 등과 같은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는 데 혼선이 빚어지곤 하였다. 경종은 혼돈된 정국 속에서도 세제를 지켜서 왕위를 계승할 수 있게 하였고, 부왕 숙종의 뜻을 받들어 지나친 사친(私親) 추숭(追崇)을 주장한 이를 유배보냈고, 민생에도 관심을 가졌다. 기근이 든 제주도에 호서(湖西)와 영남(嶺南)의 쌀 7천 석을 옮겨 진휼하고 말의 공납을 정지하였다. 양가(良家)의 딸은 궁인으로 뽑지 않도록 했으며, 살아 있는 노루의 공납을 죽은 것으로 대체하게 하였다.진하사(進賀使)가 청나라에서 받아온 서양의 시계 문진종(問辰鐘)이 밤과 낮, 날씨에 관계없이 시각을 추측할 수 있다고 하여 관상감에 내려 만들게 하였다. 또 관상감 관원이 청나라에 갔다가 가져온 소화기인 수총(水銃)을 만들어 화재에 대비하게 하였다.

의의 및 평가

조선왕조실록의 사관들은 경종이 훌륭한 임금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지만, 좌우의 신료들이 제대로 보좌하지 못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조선 제 20 대 경종
선의왕후 어씨

선의왕후 (宣義王后)

조선후기 제20대 경종의 왕비.

시호: 선의(宣懿) / 이칭: 경순효인혜목선의왕후(敬純孝仁惠穆宣懿王后) / 출생 연도: 1705(숙종 31)~ 사망 연도1730(영조 6) / 본관: 함종(咸從: 지금의 평안남도 강서본관은 함종(咸從). 영돈녕부사 어유구(魚有龜)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18(숙종 44) 첫번째 세자빈(世子嬪)인 심씨(沈氏: 端懿王后)가 죽자 그 해에 14세의 나이로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가례(嘉禮)를 올렸고,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1722(경종 2) 왕비책봉에 백관의 축하를 받았으며, 1726(영조 2) 경순왕대비(敬純王大妃)라는 존호를 받았다.

1730년 죽자 시호를 선의(宣懿)라 하고 휘호(徽號)를 효인혜목(孝仁惠穆)이라 하였다. 매사에 익숙하였고 온유하였으며 소생은 없다. 지문(誌文)은 판부사 이의현(李宜顯)이 지었다. 시호는 경순효인혜목선의왕후(敬純孝仁惠穆宣懿王后)이고, 능호는 의릉(懿陵)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에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의왕후 어씨
선의왕후 어씨
선의왕후 어씨
선의왕후 어씨
선의왕후 어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