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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화성 융릉 건릉 (2024 -05-25)

동방박사님 2024. 5. 28.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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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융릉 (華隆陵)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조선후기 제21대 영조의 아들인 장조와 왕비 헌경왕후의 능.

사적(1970 05 26일 지정) / 경기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안녕동)

내용

1970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장조(莊祖)와 그의 비 헌경왕후(獻敬王后)의 능이다. 근처에 위치한 건릉(健陵)과 함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장조는 1735(영조 11) 창경궁에서 탄생해 그 이듬해에 세자에 책봉되고, 1762 28세 때 창경궁에서 죽었는데, 영조가 뒤에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뒤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세자(莊獻世子)라 하고 고종 때 장조로 추존되었다가 1899년 의황제(懿皇帝)로 다시 추존되었다.

헌경왕후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로서 1744년 세자빈에 간택되었다가 세자가 죽은 뒤 1762년 혜빈(惠嬪)의 호를 받았다. 1776(정조 즉위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혜경(惠慶)으로 올랐다. 1815(순조 15) 80세로 창경궁에서 죽었는데, 1899년 의황후(懿皇后)로 추존되었다.

융릉은 원래 경기도 양주시의 배봉산(拜峰山)에 있었던 영우원(永祐園)을 수원의 옛 도읍 뒤의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정조는 현륭원을 마련할 때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그 결과 조선시대의 어느 원보다도 후하고 창의적인 상설(象設)을 하였다.

능상설은 병석(屛石)을 두르고 인석(引石)은 화뢰형(花蕾形)으로 하고 문무석인을 세웠다. 장명등은 전기의 8각 장명등과 숙종 · 영조 연간에 등장한 4각 장명등의 양식을 합한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어 세웠다.

석인도 예전에는 가슴까지 파묻혀 있던 목이 위로 나와 있어 시원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등 조각 수법이 사실적이다. 능의 뒤에는 곡장(曲牆)을 돌렸다. 19세기 이후의 능석물 양식(陵石物樣式)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사도세자 사건 (임오옥(壬午獄), 임오화변)

1762(영조 38) 5월 사도세자가 부왕인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사망한 사건.

내용

임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임오옥(壬午獄)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노소당인(老少黨人)들의 정쟁(政爭) 과정에서 노론에 의해 세자가 희생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조선 후기의 당쟁은 탕평책이 추진되는 속에서도 보다 심각한 국면을 드러내게 되었다. 영조는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와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에게는 소생이 없었고 정빈이씨(靖嬪李氏) 소생으로 효장세자(孝章世子: 뒤에 眞宗으로 추존), 영빈이씨(暎嬪李氏) 소생으로 사도세자(思悼世子: 莊獻世子)가 있었다. 효장세자가 요절하였으므로, 영조는 1749년에 사도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하게 하였다.

그런데 세자가 대리청정을 맡기 전까지는 영조와 성격상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효심과 우애심이 두터웠고, 왕세자로서의 도량과 덕을 겸비하여 영조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리청정에 임하게 되면서 세자는 행동에 형평을 잃고, 비정상적인 성격이 나타나 영조로 하여금 세자에게 국정을 맡길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히게 하였다.

이보다 부자간의 대립 관계가 표면화된 것은 영조가 병석에 있을 때 신하들이 세자에게 약을 권하도록 종용하였으나 이를 거절한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국 영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세자를 보좌하던 소론(少論)의 영수였던 이종성(李宗城)이 탄핵을 받아 조정에서 물러나게 된 때부터이다.

1761년 세자는 임금도 모르게 관서지방을 유람, 순행하고 돌아오자 윤재겸(尹在謙) 등이 상소해 세자의 행동이 체통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영조는 세자의 관서순행에 관여한 자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영조가 세자를 참살한 또 다른 계기는 1762 5월에 세자의 실덕과 비행을 고발하는 나경언(羅景彦)의 무고 사건과 문소의(文昭儀) 등의 부자간의 이간책 등이 작용하였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하고, 세자와 영빈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하였다. 영조가 뒤에 이를 후회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린 것으로 보아 사건의 계기가 된 부자간의 불신과 이간은 노소론의 당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남인·소론 등이 부왕 영조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세자를 앞세워 보수적인 성격이 짙은 노론 정권의 전복을 꾀하다가 실패한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헌경왕후獻敬王后

조선의 추존 왕비 / 대한제국의 추존 황후 / 조선의 세자빈

재위:174419~ 1762년 윤513(음력)

전임;세자빈 조씨 (효순왕후) /후임:세자빈 조씨 (신정왕후)

별호;혜경궁(惠慶宮) · 자궁(慈宮)

신상정보

출생일:173586(양력) / 출생지:조선 한성부 반송방(盤松坊) 외가

사망일;181611(80) (양력) /사망지:조선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

가문 풍산 홍씨 /부친 영풍부원군 홍봉한 /모친 한산부부인 한산 이씨

배우자 장조 (사도세자)

자녀 22

의소세자 · 정조 · 청연공주 · 청선공주

능묘 융릉(隆陵)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산 1-15

헌경왕후 홍씨(獻敬王后 洪氏, 173586(음력 618) ~ 181611(1815년 음력 1215)) 또는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는 조선의 왕세자빈이자 추존 왕비이며, 대한제국의 추존 황후이다. 영조의 차남인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이다.

개요

사도세자의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죽은 이후 영조에 의해 혜빈(惠嬪)이라는 빈호를 하사받고 사가에 머물렀다. 아들 정조가 영조의 명에 의해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승통을 계승하였으므로 생전의 신분은 세자빈이었지만, 국왕의 생모로서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을 자궁(慈宮)으로 칭하며 사실상 왕대비로 대우하였다.

원래 시호는 헌경혜빈(獻敬惠嬪)이었으나, 1899(광무 3)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종(莊宗)으로 추존하면서 혜경궁을 헌경왕후로 추존하였고, 장종을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하여 황제로 격상하면서 헌경왕후 또한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격상하였다. 정조가 내린 궁호인 혜경궁(惠慶宮) 또는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로도 알려져 있다.

아들 정조와 손자 순조 대에 여러 차례에 걸쳐 사도세자의 죽음과 본인의 60년 동안의 궁중에서의 삶을 회고한 자전적 회고록인 한중록의 저자이다.

화성건릉(華城健陵)

화성건릉(華城健陵)은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와 효의왕후 청풍김씨의 합장 단릉이다. 정조건릉은 1800년 현륭원 동쪽에 처음 조성되었다가 1821년 현재의 위치로 천릉하고, 효의왕후를 합장해 단릉으로 조성하였다. 장조(莊祖, 사도세자)와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 홍씨)의 융릉(隆陵)과 함께 사적 화성 융릉과 건릉(華城 隆陵健陵)’으로 지정되어 있다.

건립 경위

최초의 건릉은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 현륭원(顯隆園)1의 동쪽으로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가 미리 정해 놓은 자리였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한 뒤 이곳에 건릉이 조성되었으며, 1821322일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이 상소로 천봉(薦奉)이 결정되었다.182139일 효의왕후(孝懿王后) 청풍김씨(淸風金氏, 1753~1821)가 승하하자 능호(陵號)를 정릉(靜陵)으로 정했지만, 322일 정조 건릉의 천릉과 효의왕후의 합장이 결정되자 건릉의 능호를 따르게 되었다.

변천

건릉 천릉 시 건릉의 석물을 대체로 옮겨 사용하였으며, 난간의 죽석(竹石)3, 좌향석(坐向石) 등 일부만 새로 제작하였다. 건릉에 사용된 석재는 현륭원과 마찬가지로 수원 앵봉(鶯峯)의 석재를 사용하였다.

형태와 특징

건릉의 상설은 봉분 주변에 12면의 난간석, 난간석 뒤편에 양석(羊石)4, 호석(虎石)5  2쌍과 곡장(曲墻)6이 있다. 봉분 남쪽에 석상(石床, 혼유석)이 고석(鼓石)7 위에 올려져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望柱石)8 1, 혼유석 남쪽에 8각의 장명등(長明燈)9이 있다. 장명등 남쪽에 문석인(文石人)10 1, 무석인(武石人)11 1쌍과 마석(馬石) 2쌍이 있다.정조는 생전에 병풍석(屛風石)12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이를 따랐다. 현륭원에서 양석, 마석, 호석은 1쌍씩만 제작하였으나, 능침에서는 모두 2쌍을 사용한다는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의 내용에 따라 조성하였다.능강(陵岡) 아래에는 정자각(丁字閣)13과 홍살문(紅箭門)14이 남북으로 자리하고 그 사이에 향로(香路: 제향 시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와 어로(御路)15가 설치되어 있다. 정자각 주변에는 예감(瘞坎)과 비각(碑閣), 수라간(水刺間), 수복방(守僕房) 등이 건립되었으며, 홍살문 곁에 판위(版位)16가 있다.

금석문

건릉의 표석은 1800년 처음 건립하였으며, 1821년 합봉(合封) 표석을 개수(改修)하였다. 1899년 정종(正宗)의 묘호를 정조(正祖), 효의왕후를 효의황후(孝懿皇后)로 높이면서 현재의 표석으로 건립하였다.

의의 및 평가

1800년 조성된 건릉의 구릉지는 2011~2012년까지 발굴되어 곡장, 현궁, 퇴광 등의 위치가 확인되었으며, 각종 명기(明器)가 발견되어 조선 후기 왕릉 조성과 왕실 공예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장조(莊祖, 사도세자)와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 홍씨)의 융릉(隆陵)과 함께 사적  화성 융릉과 건릉(華城 隆陵 健陵)’으로 지정되어 있다.

효의왕후 孝懿王后 

재위 176223~ 1776310(음력조선 정조의 왕비 대한제국의 추존 황후 /재위 1776310~ 1800628(음력) /전임 정순왕후 김씨 후임 순원왕후 김씨 / 조선의 왕대비 / 재위 180074~ 182139(음력) /전임 예순왕대비 김씨 (정순왕후) 후임 명경왕대비 김씨 (순원왕후

신상정보

출생일 17531225(양력) / 출생지 조선 한성부 가회방 사저 / 사망일 1821329(67) (양력) /사망지 조선 한성부 창경궁 자경전 / 가문 청풍 김씨 /부친 청원부원군 김시묵 / 모친 당성부부인 남양 홍씨 / 배우자 정조 / 자녀 없음

능묘 건릉(健陵)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金氏, 17531225(음력 1213) ~ 1821329(음력 39))는 조선 정조의 왕비로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시호와 존호는 장휘예경자수효의왕후(莊徽睿敬慈粹孝懿王后)이다. 1899년 고종황제가 정조를 선황제(宣皇帝)로 추존함과 동시에 효의선황후(孝懿宣皇后)로 추존하게 된다

생애

아버지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이고, 어머니는 당성 부부인(唐城府夫人) 홍씨이다

정조의 배필이 된 까닭은 그녀가 현종비 명성왕후의 친정 집안인 청풍 김씨라는 것이 크게 작용하였다. 명성왕후가 숙종을 낳았듯이, 정조의 배필이 되어 후손을 낳기를 바라는 영조의 뜻이었다. 그녀가 세손빈 된 후 그녀의 사촌여동생도 시모인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남동생과 혼인하여 왕실의 이중삼중으로 인척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9세인 1761(영조 37) 삼간택을 거쳐 별궁으로 들어갔으나 천연두를 앓아 이듬해 1762(영조 38) 210세에 11세인 세손과 가례를 올려서 세손빈(世孫嬪)이 되었다

임오화변 때 영조가 헌경왕후와 효의왕후에게 제각기 사가로 가라고 명하였으나, 효의왕후가 사가로 가지 않고 시어머님(헌경왕후: 혜경궁홍씨) 이 계신 곳에 있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영조가 그 말을 듣고 매우 착하게 여기어 같이 헌경왕후의 사가로 나가라고 허락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다시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이때 효의왕후가 어린아이로 어려운 때를 당하여 차분하게 조신과 처사를 올바르게 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영조의 환심을 산 것이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고, 슬하에 소생은 없고 순조를 친아들처럼 아꼈다. 정조 승하 후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비에 봉해졌다. 효심이 깊어 정순왕후, 혜경궁을 극진히 모셨다. 69세의 일기로 창경궁 자경전(慈慶殿)에서 승하하였고 정조와 함께 합장한 건릉(健陵)에 능이 있다. 사후 시호는 예경자수효의왕후(睿敬慈粹孝懿王后)였다가 고종때 장휘(莊徽)의 존호가 추시되었고, 1898년 대한제국 때 선황후(宣皇后)로 추존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정조正祖

22대 조선 국왕

재위; 1776 3 10 ~ 1800 6 28 (음력) / 즉위식; 경희궁 숭정문 /전임:영조/후임:순조 /재위:1759 2 12 ~ 1776 3 10 (음력) / :이산(李祘) 혹은 이성 /묘호:정종(正宗, 1800)  정조(正祖, 1899) /능호 건릉(健陵)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신상정보

출생일 1752 10 28 (양력) / 출생지 조선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 /사망일 1800 8 18(47) (양력) /사망지 조선 한성부 창경궁 영춘헌 /부친 친부 : 장조 (사도세자), 양부 : 진종 (효장세자) /모친 생모 : 헌경왕후 홍씨 (혜경궁 홍씨), 양모 : 효순왕후 조씨 (효순현빈 조씨) / 배우자 효의왕후 김씨 / ; 문효세자 · 순조 · 숙선옹주

정조(正祖, 1752 10 28 ~ 1800 8 18, 재위: 1776 4 27(음력 3 10)~ 1800 8 18(음력 6 28)는 조선 제22대 왕이며,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이다. 성은 이(), 휘는 산 또는 성(),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11세 때 아버지 장조(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었으며, 할아버지인 영조가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해 왕통을 계승하게 했다. 1775년부터 1776년까지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하였다. 1776년 영조의 승하로 즉위하여, 1800년까지 조선의 제22대 국왕으로 재위하였다. 재위 초기 홍국영에게 막강한 실권을 주는 세도 정치를 하였으나, 1780년 홍국영을 실각시킨 뒤로는 친정을 하였다.

즉위 후 정약용, 채제공, 안정복 등 권력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계 인사들을 등용하여 정계로 다시 발탁하는 동시에, 노론 청명당의 원칙론자인 스승 김종수와 이미 사망한 유척기의 문하생들을 각별히 중용하였다. 소론이 생부 장조(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계되었다 하여 특히 노론 벽파와의 갈등이 후일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정조는 벽파의 당수인 심환지 등을 총애하여 측근으로 두었다.

재위 기간 중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에 치중하였으며,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창설과 자신의 저서 홍재전서를 비롯한 문집과 법전의 재간행, 수원 화성 축성 등을 추진하였다. 무예와 함께 유학의 각 경전에도 두루 통달하여 경연장에서 신하들을 강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중흥기를 이끈 대표적인 군주로 평가된다. 하지만 홍국영을 기용하여 측근 가신에 의해 정사가 좌우되는 폐단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승하 직전에 어린 세자가 걱정되어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았지만 힘이 한쪽으로 기우면서 자충수가 되어 세도 정치의 배경이 되었다. 윤지충 사건(신해박해)이후 노론 벽파의 공세가 강화되자 노론 내 소수파였던 북학파 박지원 등의 문장을 이용하여 문체반정과 같은 필화 사건을 일으켜 반성문을 쓰게 하였다.

본래의 묘호는 정종(正宗)으로, 사후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존호는 장휘(莊徽), 이후 묘호가 정종에서 정조로 바뀌고 대한제국 때 선황제(宣皇帝)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이다.

출생

정조가 8세에 세손으로 책봉되기 이전 원손(元孫) 시절 큰외숙모에게 쓴 한글 편지

정조는 1752 10 28일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창경궁의 경춘전(景春殿)에서 태어났다. 형인 의소세자가 3살의 어린 나이로 먼저 요절한 뒤 태어났기 때문에 탄생 당일 영조에 의해 원손(元孫)이 되었다. 의소세자의 장례를 치른지 3년이 지나 세손으로 책봉하였다.

1755(영조 31), 영조는 어린 원손이 네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총명한 것을 기뻐하였으며 신하들 앞에서 경전을 읽어보도록 하였다. 원손은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 10자를 외고 부모 두글자를 썼다. 영조는 이후로도 여러 차례 원손이 한번 본 사람을 구별하여 가리키는 것이나 글씨를 쓰는 것을 칭찬하였다. 1757년 영조는 직접 자서를 보고 글자를 골라 원손의 이름을 정하였다.

영조는 김종수를 세자의 교리(校理)로 삼아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고 1761 4 14(영조 37년 음력 3 10)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사도세자의 죽음

할아버지 영조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1749(영조 25)부터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다. 당시 세자의 나이는 15세였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으나 그의 일 처리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질책하였고, 임금의 자리를 넘겨주겠다고 짐짓 떠보기도 하여 세자는 홍역을 앓는 와중에도 돗자리를 깔고 사죄하기도 하였다. 정조가 태어난 해인 1752(영조 28) 영조는 병중에도 사도세자가 올리는 탕약을 받지 않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인 영조와의 불화로 심리적인 위기를 겪었다. 장인이었던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니 남몰래 약을 지어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심리학자 강현식은 사도세자가 우울증이기 보다는 오히려 조증과 함께 감정 통제가 되지 않는 심리 상태를 보였다고 판단하면서 이는 숙종, 영조, 정조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집안 내력이라고 보고 있다.

사도세자는 노론이었던 홍봉한 가문을 처족으로 맞이하였지만 대리청정을 하면서 소론에 우호적이었고, 노론과는 충돌을 거듭하여 영조와 불화를 자초하였다. 또한 관서행, 서연 불참, 기녀들과 풍류를 즐기는 등 문제 되는 행동을 많이 했다. 영조 스스로가 경종 시절 노론의 힘을 업고 왕세제(王世弟)가 되어 즉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조의 탕평책 역시 노론의 입장을 두둔할 수 밖에 없었다.

1762(영조 38) 5월에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었으며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힌지 8일 뒤에 죽었다.  5 13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직전 무겸선전관 이석문이 어린 세손을 등에 업고, 수문장들을 밀치고 궐내로 들어왔다. 어린 세손은 할아버지 영조에게 아비를 살려줄 것을 청했으나 강제로 끌려나갔고, 윤숙, 권정침 등이 세자 구명을 상소했으나 거절당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뒤 그를 복위시키고 사도라는 시호를 내려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치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8 26일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은 상소를 올려 사도세자의 죽음이 병때문에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였고, 영조는 금등고사를 언급하며 더 이상 이일을 언급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