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테마여행 (2006~) (여행)/6.인물기념관

남한산성 만해 한용운 기념관

동방박사님 2021. 7. 11.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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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은 누구인가?

만해 한용운 선생 (1879~1944)은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27세에 설악산 백담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불교계 의 개혁과 재중 화를 위해 조선불교 유신론 (1913)과 불교 대전(1914)을 차례로 저술하였으며, 불교잡지유심을 창간하여 언론 활동을 통한 불교 대중화에 앞장섰다.  만해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으로 3.1 운동을 주도하였다. 특히 옥중에서 쓴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에서 인간의 기본정신인 자유. 평등. 평화사상에 입각한 독립은 당연한 민족의 자존심이라며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민족적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또한 1926년에 발표한 시집 님의 침묵은 일제 치하의 암울한 시기에 우리들의 염원을 "님"이라는 동양적 정신과 한글의 운율로 표현하여 시문학사, 사상사에 있어 불후의 명작으로 꼽힌다. 선생은 일본의 회유와 압박을 끝까지 거부하고 일관되게 독립운동을 하였다. 55세 때부터 조선총독부를 마주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지은 심우장에서 해방 1년 전인 1944년 6월 29일 영양실조로 생을 마감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인 대한민국장 이 추서 되었다.

 

 

남한산성과 만해

남한산성은 위대한 호국정신의 산실이자 민족의 치열한 역사가 숨 쉬는 곳이다. 성곽을 축조하고 산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조선 인조 임금 때부터였다. 당시 산성 축조에 동원된 인력들은 8도의 승군들이었다.  따라서 성내 곳곳에는 사찰들이 들어섰으며 국청사, 개원사, 천주사 등 그 이름에서도 풍기듯 '나라를 지키고 국가를 안위하는' 절들이었다. 1636년 병자호란 시에는 조선의 백성으로서 끝까지 적과 싸울 것을 주장하다 순절한 삼학사 (홍익환, 윤집, 오달제)의 영혼을 모신 조선 선비의 영원한 고향땅  남한산성이 되었다. 이러한 승군들의 호국정신과 병자호란 당시 끝까지 지조와 절개를 지켰던 삼학사의 애국 충정이 깃든 남한산성에 자랑이자 큰 스승인 만해 한용운 선생의 기념관을 설립했다.

 

만해 한용운의 육신의 고향은 충남 홍성, 정신의 고향은 내설악 백담사이며 마지막 삶의 현장은 서울 성북동 심우장으로, 이곳들은 만해 한용운과 인연 깊은 장소들이다. 현재 남한산성 만해 기념관은 1981년 성북동 심우장에서부터 시작되어 1990년 남한산성으로 이전하여 만해정신의 중심 도량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남한산성은 조선의 호국 승군들에 의해 축성된 호국정신의 상징적 장소이다. 이곳에 만해기념관을 설립함으로써 호국정신과 민족자존의 정신이 함께 빛나는 곳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뜻을 세우다

만해 한용운은 조선 왕조 말 국운이 기울어가던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선 군에서 한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유천이었다. 충훈부 도사였던 선친 한응준은 어린 유천에게 역사상 빛나는 의인들과 세상 형편, 국내외 정세를 소상히 설명해 주었다. 이와 같은 선친으로부터의 감화는 어린 유천으로 하여금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에 눈떠가게 하였다. 

 

불교인으로 지향

만해 한용운은 근대사 격량의 소용돌이 앞에서 무력한 자신을 발견하고 27세에 설악산 백담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스승 김연 곡 스님의 도움으로 양게 초의 영환 지략을  읽고 세계정세와 서양철학에 관심을 갖고 세계일주 여행을 계획하여 실천에 옮긴다. 그 후 일본의 신문물도 견학하였다. 1910년 인간 정신의 유신을 위한 조선불교 유신론을 탈고한다. 또한 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방문, 격려하는가 하면 임제종 운동을 통하여 한일 불교운동 동맹조약을 분쇄하며 1912년한문 독본, 1913년 조선불교 유신론 1914년 불교 대전 1917년정선 강의 채근담을 차례로 내놓으면서 민족계몽운동에 앞장을 섰다. 

 

 

3.1 운동의 선봉에 서서

 1919년 만해 한용운은 3.1 운동의 선봉에 서서 민족을 대표하여 연설하고, 만세삼창을 선창하였다. 또한 자유.평등.평화의 대강령을 밝힌 장문의 독립선언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옥중집필 했다. 옥중에서는 옥중투쟁 3대원칙 (1.변호사를 대지말것, 2.사식을 취하지 말것, 3.보석을 요구치 말 것)을 정하여 몸소 실천에 옮긴다. 독립 선언 후 만해는 이제 내 나라에 죽으니 한이 없다 는 생사를 초월한 정신으로 자신이 추가한 공약삼장을 그대로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굳세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독립선언서 

독립선언서는 게이오대학에서 재학 중이던 유학생 염상섭이 1919년 3월 19일 일본 오사카에서 재대판 한국인 노동자대회에 개최 당시 발표할 목적으로 등사 복제한 것이다 

 

만해 한용운은 설악산 오세암에서 중국 동안 상찰 선서 (?~961)의의 선화 게송인 십현담에 주. 해를 달았다. 만해는 선의 이치에 이해가 깊었다. 그는 선에서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ㅇ; 솟아 나와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1926년 사랑의 증도가 님의 침묵에서 자유. 평등. 평화의 사상을 침묵 속에 담고 그 침묵의 노래를 상징적을 향하여 투영했다.

 

심우장의 정절

만해 한용운은 말년(1933년, 55세)에 이르러 비로소 성북동 막바지에 집한칸을 갖게 되었다.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기 싫다 하여 남향의 집을 북향으로 고쳐지은 것으로 유명한 심우장이다. 심우는 만해 한용운 니 손수 지은 택호로 소를 찾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소를 마음에 비유하여 "마음자리 바로 찾아 무상 대도를 깨치기 위한 집"이라는 뜻이다. 심우장에서 만해 한용운은 비밀 결사인 만당의 영수로 추대되고 단채 신채호 선생의 애국지사 묘비명을 손수 썼으며,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한 독립운동의 선구자 일송 김동삼 선생의 시신으 모셔다 장레를 치르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린 곳 이기도 하다. 일제의 황민화 정책, 창 씨 개명운동. 조선인 학병 출정 등을 반대하던 북향집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이 손수 심은 향나무 한 그루와 함께 우리의 역사를 묵묵히 말해주고 있다. 

 

만해가 떠난 그 후

 1944년 6월 29일 민족운동가, 불교사상가, 근대 시인으로 집약되는 만해 한용운 선사는 66세를 일기로 심우장에서 입적했다. 학병. 징병을 거부하고 일제의 배급을 거부하며 영양실조가 되었던 선사의 육신은 조국 광보 글 한해 앞두고 영원히 잠들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영원히 남아 역사의 등불이 되고 있다.  그는 민족의 갈망을 절심 하게 노래한 시인이었고 또 구국 일념으로 살아온 독립지사였고, 가혹한 고난과 탄압 속에서도 의연함을 보이며 꺾임 없는 지조로 불굴의 투지로써 겨레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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