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테마여행 (2006~) (여행)/6.인물기념관

양주 독립운동가 조소앙 기념관

동방박사님 2020. 2. 1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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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 수학과 일본 유학시기

조소앙은 1887년 4월 8일(음력) 경기도 쇼하군 (현파주시) 월롱면에서 부친 조정규(趙精奎)와 모친 박필양의

6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02년 7월 만15세의 나이로 성균관 경학과에 입학하여 사서삼경들의 유교경전, 만국역사, 각국지리, 작문, 산술 등을 익혔다. 성균과 재학중인 1903년 이하영등 친일정부관료들이 산림등의 황무지 개간권을 일본에 넘기려하자, 신채호, 유인식 등과 함께 성토문을 작성하여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선생은 이것이 자신이 참여한 최초의 학생운동이었다고 회고하였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개전과 더불어 일본군의 대한제국 영토 내에서의  행동과 군사기지 설치자유를 강요한 한일 의정서가 체결되자, 성균관을 그만두고 황실 유학생 선발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1904년 10월 일본으로 건너가 11월에 도쿄부립 제일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되고, 일본인 교장이 한국유학생들에게 대한 고등교육이 무리라고 발언한데 대해 항의하고 동맹퇴교를 결행하였다. 1908년 3월 메이지대학 고등예과에 입학하여, 이듬해 법학부 분과를 거쳐 1912년 6월 법학부 졸업시험후 곧바로 귀국하였다. 귀국후 경신학교, 양정의숙, 대동법률전문학교 교사로 활동하면서 중국 망명을 준비하였다.


일본유학시기 선생은 한인유학생 활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병탄 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각 유학생의 기관지 [공수학보][대한흥학보] 의 편찬위원과 주필등을 지냈으며, 대첩비를 처음 발견한 사실을 기고하고 '누가 이 사실에 분개하지 않을 것이며(북관대첩비를 빼앗긴)큰 죄를 면할수 있겠는다'라며 북관대첩비의 한국반환을 주장하였다. 1910년을 전후하여 국가와 민족적 위기를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위한 방안을 모색하고자 종교와 철학에 대한 공부에 집중하였다.



소앙선생의 호적표

소앙의 증조부 가선대부 嘉善大夫  맹식 孟植 조부 통전대부 通政大夫 성룡, 부친 정규의 이름 및 형(용하 용하)과 두명의 동생 용주주 용한)의 이름등 가계도를 알수 있는 호적표


조소앙선생 한

소앙이 1935년 10월 중국 항저우에서 활동할 때 고향 뒷산인 감악산을 생각하며 쓴 한시


일본 유학시절의 일기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 본과 2학년 재학중이던 1910년 (융희4년) 1월1일 이후의 일기. 1월 17일 이후 7월 17일 까지 일기는 소실 되어 있다.                                                                 [동유락초 東遊略秒 4권]


동유기

소앙이 일본 유학시절인 1907년 1월 27일에 남긴 일기, 오전에 시장에가서 일기책과 우산 등을 샀다는 것과 9월7일 동경부립제일 중학교에 입학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소양은 성균관 재학중 황실유학생에 선발되어 집을 떠날때 부터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할때 (1904년 10월9일~1912년 5월31일) 자신의 각종활동, 학교생활등을 일기로 남겼는데, 이를 동략유초 東遊略秒 라고 한다


당의 원문도해


한국독립당의 기본이념인 삼균주의를 함축하고 있는 당의 黨議를 3단계 (동기, 진행, 결과)로 나누어 설명한 <당의 원문도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소앙의 독립운동 활동과 업적을 기려 정부에서 1989년 추서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소앙선생 주민등록표

광복 후 대한민국정부에서 발행한 소앙선생 주민등록표



"합심하면 성립하고 분산하면 무너진다"

중국 망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해온 박은식, 신채호등과 활동하는 한편, 박달학원교사로 재직하며 상하이 거주 한인청년들을 교육하였다. 1914년에는 "육성일체와 각계각층의 대동단결을 강조" 하는 육성교를 구상하였고 이를 체계화하여 [일신교령을 집필하고 이듬 해에 발표하였다.


1917년 7월 상하이에서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등 14명의 명의로 독립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곤, 즉 임시정부의 수립을 촉구한 [대동단결선언]에 참여하였고, 1919년에는 지린吉林에서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국외독립운동가 39명의 명의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 ] (세칭; 무오독립선언서) 초고를 작성하였다.


1919년 3.1운동결과로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선생은 임시정부 수립과정에서 적극 참여하여 민주주의 원리에 기초한 대한민구 최초의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 (1919.4.11 공표)을 기초하였다. 4월과 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개최된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여 국무원 비서장에 선출되었다.







대동 단결선언문

소앙 선생이 박은식 등과 함께 1917년 7월 독립운동단체의 대동단결을 촉구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제의한 선언문.


대한독립 선언서 (무오독립선언서)

1919년 2월 소앙선생이 김교현 김교현. 박은식등 39명의 명의로 발표한 독립선언서로 3.1운동 시기 발표된 수많은 독립선언서 중 유일하게 "독립군의 총궐기와 한민족 전체의 육탄 혈전"을 강조하고 있다.

  


삼균주의가 본 세계

삼균주의의 청년동맹 경상남도 지방위원회 선전무에서 발행한 [삼균논의론]에 실린 글로 삼균주의 사회의 완벽한 실현을 위해 노력하자는 내용이다 ( 1949.3.24)


대한 민국 임시정부 에서 발행한 대한독립선언서 (1919.4)


조소앙 국무위원 겸 외무부장 임명장

1940년 10월 소앙선생을 국무위원 겸 외무부장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명의의 임명장.



철학적 당의 도표

한국독립당의 당의와 기본이념인 삼균주의를 철학적으로 풀어 설명한 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펼친 독립운동


외교활동의 전개

199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후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릏 위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참석한 김규식을 지원하기위해 파리로 건너갔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 참석은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선생은 유럽에서  외교역량강화와 독립 승인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8월에는 스위스 루체른에서

개최된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석하여 한국독립승인안을 제출, 승인을 받았고, 이어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2회 만국사회당 집행위원회에 참석하여 한국독립 문제 실행 요구안을 제출하였고 통과 시켰다.


이후 1921년 12월 중국상하이로 돌아올 때까지 영구, 덴마크.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러시아의 샹테페트르부르크. 모스코바. 이르쿠츠크. 치타 등지를 순방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위한 외국 열강들의 지지와 지원 등을 호소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5월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만주리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는 모스코바에서 열린 공산당대회를 참관하고 러시아 각지를 순방하면서 보고 체험한 공산주의 비판을 한 내용이었다.




1920~1940

삼균주의란?

삼균주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의 방법과 이론을 제시한 대표적인  이론가이자 사상가인 조소앙이 창안하였다. 1919년 만주 지린 (吉林)에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에 삼균주의 기본이 제시 되었다. 1920년대 중국 관내에서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 과정에서 다듬어 졌고 1930년 1월 창당된 한국독립당의 기본이념으로 채택되었다.


삼균주의는 균등, 즉 평등을 기본이념으로 하고 있다.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통해 개인과 균등생활을 이루고 이를 기반으로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균등생활을 실현하여, 긍국적으로 세계일가를 추구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삼균주의는 1930년대 우익진영은 몰론 좌익 진영의 독립운동 정당의 기본이념으로 채택 되면서, 독립운동의 공동지도 이념으로 정착되었다. 마침내 1941년 11월 광복 후 건설할 민족국가에 대한 기본계획인 [대한민국건국강령]에도 기본 이념으로 채택되었다.




한국독립당 선언

한국독립당에서 이봉창의사의 도쿄의거에 대한 거사 이유와 목적등을 밝힌 선언서 (1932.1.10)


한국독립당 창당선언

우익진영 3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을 해체하고 새롭게 결성한 "한국독립당" "창립선언문. 중문으로 번여가여 중국 국민당 등 유관기관과 주요인사들에겍도 배포하였다. (1940.5.9)


한국독립당 재건 선언 소앙

소앙 선생이 민족혁명당에서 탈당한 후 1935년 9월 항저우(杭州)에서 한국독립당을 재건하며 발표한 선언문'


본당 창립기념 선언

우익진영 3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결성한 목적과 향후 활동 방향 등을 제시한 ,<본당창립 기념선언> 

(1940.5.9)  


해체선언문

1940년 5월8일 임시정부를 지지. 후원하는 우익진영 3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을 해체하고 3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결성한다는 내용의 3당 해체 선언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에서의 활동

1935년 7월 민족유일당으로 결성된 민족혁명당에 한국독립당의 대표로 참여하면서 임시정부 국무위원직을 시작하였다. 1930년 국무위원으로 다시 선임되어 외무부장에 임명될 때까지 임시의정원  의원과 상임의원을  지내면서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이기간에 우익진영 3당의 연합체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 한국독립당(재건) 대표로 참여하여 창립선언문을 기초하였다.


1939년 임시정부 외무부장에 선임되어 삼균주의 이념에 의거한 민족주의 국가 건설의 기본계획과 방향을 제제시한[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하였다. 1942년 11월 [대한민국임시악현(1940.9)을 개정하기 위한 약현개정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어 1944년 4월에 공포된 [대한민국임시헌장]을 마련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45년 8월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으로 미국과 중국등 연합국을 대상으로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 독립운동 지원요청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특히 1943년 카이로 회담 소식을 듣고 장제스를 만나 전후 한국에 대한 국제공동돤리에 반대하고 독립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그 결과 1943년 12월 카이로선언에서 "전후 적당한 시기에 한구의 독립을 보장" 하는 국제적 약속이 발표되었다.

 



사직서

소양선생이 임시정부 외무부장 직무의 중요성과 본인 능력의 부족함을 이유로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제출한 외무부장 사직서 (1945.4.9)



사직한 봉환 문서

소앙 선생이 제출한 외무부장 겸 국무위원 사직서에 대해 국무위원회에서 논의한 결과 사직서을 반환하기로 했다는 내용의 문서








중경시 외적거민 신분증

중경시에서 1942년 10월31일자로 발행한 외국인 거주 신분증으로 직업과 주소, 여권번호 등이 기록되어 있다


조소앙 위생검사 기록

중국 충칭시 위생국에서 소앙선생의 키. 시력, 몸무게 등 건강상태를 검사하고  기록한 검진표 (1941.3.1)

나이: 55  신장 : 165 cm 체중: 76.2kg


대한민국건국강령

독립운동의 최종 목적인 광복 후 수립할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전반적인 계획과 핵심 내용을 담고있는 < 대한민국건국강령> (1941.11)



1945~1958

광복과 환국, 그리고

균등한 사회를 건설 하기 위한 노력

1945년8월 독립운동의 결과로 쟁취한 광복을 맞이하여 12월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제 2진으로 귀국하였다.

귀국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수립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한국독립당의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이 기간에 신탁통치 반대를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으로 인식하고 반탁운동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47년 국민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자주적인 국가건설운동을 추진하였고, 1946년 12월 삼균주의청년동맹을 1948년 3월에는 삼균주의 학생동맹을 결성하여 삼균주의가 실현되는 국가건설 작업을 추진하였다.


1948년 4월 김구와 김규식이 추진한 남붇협상에 참여하여 평양을 다녀왔다. 12월에는 사회당을 경ㄹ성하여 당수로 추대되었고, 이를 통해 삼균주의가 실현되는 국가건설 작업을 추진하였다.


1948년 4월 김구와 김규식이 추진한 남북협상에 참여하여 평양을 다녀오ㅘㅆ다. 12월에는 사회당을 결성하여 당수로 추진되었고, 이를 통해 삼균주의 원칙을 대한민국에서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1950년 6월 제2대 국회의뤈선거에 성북구에서 출마하여 전국최다 득표로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중 강제납북되어 1968년 9월 평양에서 서거하였다.



삼균주의 청년동맹에서 발표한 선언서

소앙 선생이 1946년 12월 한국독립당 산하에 삼균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을 추진하기위 위해 청년들로 조직한 삼균주의 청년동맹에서 발표한 선언서로 '삼균주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완전한 균등사회 건설을"을 주장하고 있다.

테로는 고대누습

소양 선생이 1947년 12월 20일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등 모든 직위를 내려놓고 정계를 은퇴하면서 밝힌 성명서 (새한민보. 1948.1.5)


나의 출마 이유와 정견

소앙 선생이 1950년 5월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을 결심하고 출마 이유와 자신의 추진할 정책등을 9가지로 나누어 1950년 3월에 발표한 글


신당 준비위원회 소집문

소앙 선생이 신당발기준비위원장 자격으로 1948년 12월 신당인 사회당을 결성하기 위해 1948년 11월28일 제 5차 준비위원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의 회의 소집문 


국회의원 당선사례


1950년 5월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성북구에서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된 후 " 유권자의 참다운 대변인으로서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임을 밝힌 당선 사례문 (1950.6.2)








삼균주의 연구논집

1975년 조만영 선생과 조소앙의 동생이 함께 삼균학회를 창립하고 간행해 온 " 삼균주의 연구 논집

(1983.12. ~ 2016.2)




조소앙선생 약전 (1989.5)


제 6회 학술연구 발표회 (1989.9)


소양선생 문집

조소양선생의 삼균주의사상과 글을 모아 만든 문집 (1979.7) 


삼균주의 연구논선

조소앙선생의 사상적 배경인 "삼균주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주제의 내용(2003.4) 















나의 주장

소앙 선생이 1948년 10월 한국독립당을 탈당하고 12월에 사회당을 결성한 후 정치. 경제. 교육분양의 여러문제를 해결할 정책들을 밝힌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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