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문학의 이해 (책소개)/3.한국문학

4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동방박사님 2022. 3. 27.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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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내추럴 본 쿨 걸'에게도 나름대로 진정성은 있다고 주장하는 작가 정이현의 '쿨'한 여자들에 관한 8편의 단편 모음집. 다분히 냉소적이고 싸늘하며, 실리적이고 확고한 여성 주인공들은 우리 시대 남성중심적인 연애방정식의 오류 속으로 과감히 침입, 그 부조리를 가볍게 제거한다. 저자의 매력적인 글쓰기 방식은 발칙한 주인공들의 근원적인 에너자이저이다. 기발한 각주의 맛, 날렵한 구성, 명료한 영화적 글쓰기가 돋보이는 이 책은 지질한 연애로 초토화된 인생을 가뿐하게 복구시켜 줄 것이다.

목차

낭만적 사랑과 사회
트렁크
소녀 시대
순수
무궁화
홈드라마
신식 키친
이십세기 모단 걸_신 김연실전

해설: 그녀들의 위장술, 로맨스의 정치학 - 이광호
작가의 말

 

저자 소개
저 : 정이현 (鄭梨賢)
 
1972년 서울 출생으로 성신여대 정외과 졸업, 동대학원 여성학과 수료, 서울예대 문창과를 졸업했다.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 『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
 

YES24 리뷰

21세기형 팜므 파탈의 쾌거
최세라 (rasse@yes24.com)
정이현의 '사회'에는 좀 더 영악해진 여자들과 좀 더 어리숙해진 남자들이 모여산다. 주인공은 시대를 초월해 말 많고 탈 많을 수 밖에 없는 여자들. 그렇다고 우울하고 염세적인 혹은 허무하고 절망적인 모파상의 여자들은 절대 아니다.'딸-아내-어머니'로의 여자의 일생에서 전혀 엉뚱한 막다른 골목과 면벽하게 된 여자들의 용감무쌍한 짧은 탈출기이다.

크리스탈같은 첫날 밤을 기대하는 강남족, 출세지욕에 살인도 마다않는 중견간부, 가정불화를 말끔히 정리해버리는 16살 소녀, 남편 셋을 먼저 잃은 부인, 조건맞는 남자와 결혼에 성공한 신부,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까지 하나같이 여자들의 팔자는 드세고, 남자들은 진부하다.

탈출을 꾀한 것은 비단 그의 주인공들만은 아니다. 작가 자신도 평이한 글쓰기 구조를 벗어나 텍스트에 영상적 요소들을 십분 활용했다. 깜찍한 각주 활용에다 친절한 설명을 보태는가 하면, 때론 연극 대본을 읽는듯한 재미 혹은 실험영화를 보는 듯한 파편화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한 편 한 편은 서로 다른 색감과 느낌을 주지만 결국은 재기발랄이라는 하나의 흐름 속으로 통합되어 흘러간다. 소설의 가장 탄력적인 힘인 작가의 가볍고 발랄한 문체는 가부장적 사회 질서의 틈새와 남성중심적 구조의 모순 속을 날카롭게 파고 들어 은근하게 비틀고 교묘하게 이용한다. 그 수법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핵심적이라 습관적으로 언저리만을 주무르던 실력없는 안마사 대신 프로 정신 물씬 풍기는 노장에게 마사지를 받은듯한 시원한 기분이다. 21세기가 말하는 '사랑'과 '낭만'은 지금까지 존중되었던 요소들 - 무한한 이해심, 뼈를 깎는 인내, 끝없는 애정, 두말 없는 용서 등 - 을 살짝 비켜서서 어이없이 바라본다.

그러나 잔뜩 움츠리고 있는 허전함이 어디선가 부터 몰려온다. 명민하고 똑똑하며 현실적인 21세기형 '팜므 파탈' 들은 자신감, 당돌함과 함께 공허와 허탈을 불러들였다. 작가는 8편의 단편을 장조와 단조를 아우르는 변주곡으로 이 두가지 요소들을 교차편집했다. 더없이 통쾌하고 남달리 시원하나 마치 거식증에 걸린 주인공이 되어 버린 듯한 상실감이 남는 것, 이것 또한 21세기형 '낭만적 사랑과 사회'가 풀어야할 숙제가 아닐까.
 

줄거리

낭만적 사랑과 사회
대학교 3학년인 나는(유리) 레이스 달린 팬티는 입지 않는다. 푹푹 삶아 물 빠진 누런 팬티를 입는다. 팬티를 사수하는 것은 세상을 사수하는 것이다. 주위에 접근해오는 남자들 중 가장 확실하게 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남자에게만 허락될 것이다. 서울 강남 반포동에 사는 나의 집은 소위 잘 나가는 강남 문화권에 겨우 편입했으며, 나의 엄마는 문화센터 다니는 것을 생활의 여유라고 자부하는 평범한 아줌마다. 나는 엄마 같은 인생을 살 수는 없다. 강해져야 한다. 미국 로스쿨에 다니는 부잣집 막내아들을 사귀게 되었다. 나는 청순함을 컨셉으로 그와 만나고 있고, 결혼을 염두에 두고 성패를 겨루기 위해 잠자리 십계명을 실천하기로 한다. 내가 꿈꾸었던 유리의 성,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그와 잠자리를 갖고 나는 십계명 대로 실천한다. 그러나 호텔을 나오며 손도 잡아주지 않는 그. 아니다. 누가 뭐래도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다.

트렁크
그녀는 외국인 화장품 회사의 중견 간부이다. 눈 오는 어느 날 우연히 차 트렁크를 열어보았더니 한 소녀가 웅크리고 있다. (과거로 시간 이동) 그녀는 한 달 전 진주색 소나타를 새로 구입했다. 규칙적인 아침 운동과 이른 출근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녀는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커리어우먼이다. 그녀는 회사의 젊은 CEO 브랜든의 신임을 받고 있고, 내연의 관계였던 권은 멀리 하고 있다. 퇴근길에 사무실 여직원을 자신의 차에 태워준 그녀는 다음날 자신의 차 트렁크에서 그 여직원을 발견한다. 이 당혹스런 일로 권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권은 그녀가 여직원을 죽였다고 몰아붙이고 그녀는 권을 살해한다. 다음날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브랜든과 아침인사를 주고받는다.

소녀 시대
열여섯의 나는 나에게 하나도 도움을 주지 않는 부모들을 관찰하며, 나의 미래를 꿈꾸는 소녀다. 아빠 김용진씨는 국립대학 교수이고, 원조교제를 한다. 엄마 정은숙씨는 대구 양반 가문의 딸로 갖가지 취미생활을 전전하며 딸에겐 관심 없는 주부다. 나는 단짝 친구 민지와 수다 떨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부모의 잦은 싸움으로 집에 분란이 끊이지 않자,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빠의 원조교제 상대를 만나 담판 짓는다. 그러나 그녀가 임신을 했다고 한다. 나는 소개팅으로 만난 용이오빠와 짜고 가짜 납치극을 벌여 집에서 돈을 뜯어내, 용이오빠와 나누고 아빠의 원조교제 상대에게 준다. 부모님의 분란은 좀 잦아들고 나는 짱 멋진 소녀시대를 만끽하고 있다.

순수
주인공의 진술서 형식. 세번째 남편이 식물인간이 된 상황에서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하며 진술한다. 토목기사 자격증을 가진 첫번째 남편은 교통사고로 죽으며 두둑한 보험금을 남겼다. 두번째 남편은 잘생긴 중국계 미국인이고 부유하다. 그는 잠자리에서 더러운 행위를 일삼는 다혈질이고, 나는 그의 운전사 양과 관계한다. 양은 나를 사랑한다며 남편을 살해하고, 나는 부유한 미망인이 된다. 세번째 남편은 대학에서 사회철학을 강의하며, 전처의 딸이 있다. 나는 그 딸과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고 그 아이를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나에게 딸이 몹시 혼날 날 쇼핑을 끝내고 돌아와보니, 딸의 방에서 남편이 가슴에서 피를 쏟고 누워 있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된다.

무궁화
너는 여성동성애자 사이트 정기 모임에서 그녀를 만난다. 그녀는 주부다. 그녀가 시간 나는 틈틈이 너는 그녀와 만나서 사랑을 나눈다. 너는 그녀와의 너무 부족한 짧은 만남에 지쳐 헤어지자고도 해본다. 그녀는 불쑥 찾아와 여행을 가자고 한다. 그녀와의 짧은 여행 후 그녀는 더 이상 연락이 되지 않는다.

홈드라마
드라마 대본 형식으로 진행. 남자주인공 김재호와 여자주인공 박수진은 결혼을 결심했다. 남자는 입사 2년차의 대기업 평사원이다. 서로 학력이나 가정환경 등이 비슷비슷하고 연애한 지 5년이나 되었으니 결혼은 당연한 수순이다. 양가 부모의 상견례가 있고, 서로 기싸움을 하며 간신히 마친다. 결혼 날짜, 장소, 피로연, 예단 등으로 서로 설전이 오가기도 하며 가까스로 합의를 본다. 신혼집 장만이 문제의 절정으로 신랑측에선 시댁에 들어와 살라하고, 신부측에서 펄펄 뛰며, 급기야 극한 상황까지 치닫는다. 결국 양가에서 각출하여 신혼집을 장만하기로 합의하고, 눈부신 결혼식을 치른다.

신식 키친
거식증에 관한 이야기로, ‘신식 키친’은 음식이 조리되는 현대적 공간으로서, 육체의 이미지를 둘러싼 현대의 정신적 질환과 관련되는 장소이다. 이 공간에서 ‘폭식’과 ‘거식’이라는 사적인 사건이 발생하며, 그런 맥락에서 키친은 그녀가 먹은 것들을 모두 게워내는 ‘화장실’의 공간과 짝을 이룬다. 이 작품은 파편화된 구성으로 여성 주인공의 행위와 의식을 묘사하며, 중간중간에 다이어트의 방법과 관련된 정보가 병치적으로 삽입되어 있다. 이것은 그녀의 의식을 지배하는 정보들과 이미지들을 나열함으로써, 그 사회적 연관을 독자들이 추론하도록 만드는 소설적 장치이다.

이십세기 모단 걸-신 김연실전
김동인의 소설 「김연실전」의 패러디이다. 연실의 어미 박씨는 평양의 기생조합 출신이다. 수줍은 기생 박씨를 신흥 부자의 아들 김영찰이 눈독을 들인다. 김영찰은 전처와 사별하여 본처 자리가 공석인지라, 박씨는 본처가 될 것을 약조 받고 김영찰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소실이 된 자신의 운명을 깨닫는 순간, 연실이 태어난다. 박씨는 어린 연실을 김영찰의 집에 맞겨둔 채 사라진다. 연실은 측실의 자식으로 자라나 총명하여 신식 여학교에 다니게 된다. 우등상을 받으며 졸업한 연실은 일본에 유학을 떠나, 문학에 뜻을 두게 된다. 조선 유학생 사회에서 남학생들의 희롱을 받으나 당당하게 버텨낸다. 유학생 맹호덕이 연실에게 연정을 품고 접근하고, 그녀를 겁탈하려고 하나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다. 그러나 유학생 잡지에서 연실을 방탕한 여학생으로 모함한 글을 읽게 된다. 선구적 모단걸 김연실은 머리를 자른 후 당당히 유학생 잡지에 글을 남기고 길을 떠난다.
 

관련 자료

내가 쓴 글들이 소설 비슷한 것은 되는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비스듬한 포즈로, 안도 밖도 아닌 곳에 혹은 경계 위에 서 있었을 뿐. 저토록 견고한 이분법의 세계를 열심히 관찰하다 보면 언젠가는 실금 같은 틈새라도 발견하게 되겠지. 나는 다만 즐겁게 욕망한다. '내추럴 본 쿨 걸'에게도 나름대로 진정성은 있는 것이다.

출판사 리뷰

점점 더 강해지고 아름다워지는 그녀들의 이야기 "그대들이여, 로맨스를 장악하라!"
2002년 봄 데뷔 이후 독자와 언론으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아온 화제의 신인 작가 정이현이 그동안 발표해온 단편소설 8편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정이현은 새로운 로맨스를 꿈꾸며 성적 일탈을 일삼는 1990년대적 여성 주인공 대신에, 그 로맨스에서 결혼에 이르는 사회적 과정에 자신을 철저히 적응시키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채택한다. 그것을 통해 로맨스와 결혼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여성 개인을 호명하는 방식과 그 순응의 과정 안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국면들을 드러낸다. 로맨스를 둘러싼 ‘멜로 드라마’의 시선을 역전시킴으로써, ‘친밀성’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가장 사적이고 일상적 사건들의 사회적 관계를 성찰할 계기를 부여한다.
정이현의 주인공들은 ‘위장’의 방식으로 체제가 요구하는 여성의 존재를 ‘연기’함으로써 자기 욕망을 실현한다. 그녀들은 이 체제에 대한 순응과 공모, 저항 사이의 ‘경계'에 서 있다. 그 경계적인 행위의 정치적 국면을 드러내는 함축적 화자의 비판적 시선을 통해, 소설은 체제에 대한 예리한 칼날을 준비한다. 연애와 가족제도와 관련된 너무나 세속적이고 낯익은 일상적 장면들의 정치적 관계를 날카롭게 드러냄으로써, 그 ‘정상성’과 ‘자명성’을 낯설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 로맨스와 결혼과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지배적 상징 질서가 개인의 일상적 세계를 어떻게 규율하는가를 아주 ‘사실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 이데올로기를 ‘탈자연화’하고 ‘탈운명화’시키는 것. 이를 통해 정이현의 소설은 지배적 서사에 대한 일종의 ‘역담론’이 될 수 있다. 가장 사적이고 일상적인 영역조차 정치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작업은, 여성에게 부과된 제도적 삶의 ‘외부’를 사유할 수 있는 출발점이다.

정이현의 소설 속에는 ‘악한 여자’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남편과 정부를 죽게 하고(「순수」 「트렁크」), 부모를 상대로 가짜 납치극을 벌이며(「소녀시대」), 남자 친구와 약혼자를 기만하고(「낭만적 사랑과 사회」 「홈드라마」), 결혼한 여자와 위험한 동성애에 빠진다(「무궁화」). 그들은 공적인 도덕적 가치나 내면의 윤리학에 따르기보다는 욕망의 개인 전략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한다. 좀더 의식적인 차원에서 로맨스, 결혼, 가족, 국가 등을 둘러싼 제도적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만드는 존재이다. 여성 자신의 욕망이 빚어낸 캐릭터들로 자신의 시선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자신의 언어로 말하려 한다.

남성적 위선과 엄숙주의를 뒤집는 발칙하고 불온한 상상력과 언어 구성력을 통해, 정이현은 새로운 여성 문법의 가능성을 스스로 발견한다. 소설 미학의 유연함과 발랄함, 로맨스의 정치학에 대한 통찰력은, 한 문제적 신인 작가의 ‘도발’에 세대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한다. 정이현의 ‘나쁜 여자들’과 ‘위장하는 그녀들’은 이 시대의 ‘신여성'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들에 대한 작가적 시선은 ‘20세기적인’ 소설 관념을 교란하고 있다.

한국의 여성 문학은 여성적 문법의 개발과 남성적 억압 구조의 의식화라는 문학적 성취를 쌓아왔으며, 특히 1990년대 여성 문학은 여성적 ‘내면’의 탐구와 가부장적 가족 제도로부터의 ‘탈출’의 욕망을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이제 이 시점에서 정이현의 소설들은 기존 여성소설에 대한 ‘질문’이며, 동시에 새로운 여성문법에 대한 ‘발견’이다.
 

추천평

남성적 위엄과 엄숙주의를 뒤집는 발칙하고 불온한 상상력과 언어 구성력을 통해, 정이현은 새로운 여성 문법의 가능성을 스스로 발견한다. 소설 미학의 유연함과 발랄함, 로맨스의 정치학에 대한 통찰력은, 한 문제적 신인 작가의 '도발'에 세대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한다. 정이현의 '나쁜 여자들'과 '위장하는 그녀들'은 이 시대의 '신여성'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들에 대한 작가적 시선은 '20세기적인' 소설 관념을 교란하고 있다. 이제 정말 '2000년대적인' 문학이 시작된 것일까?
--- 이광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