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한국근대사 연구 (책소개)/1.한국근대사

한국 근현대 전력산업사, (1898~1961)

동방박사님 2022. 8. 10.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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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앞으로 30년간 이 주제, 이 수준의 책이 나오기 힘들 것”
한국 근대화, 산업화 역사를 읽는 새로운 틀


전기가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힘들다. 온갖 첨단 기기와 기술로 ‘정보혁명’ 운운하지만 모두 전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만큼 전기 혹은 전력산업의 중요성은 막대하지만 현대인에게는 워낙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평상시에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이 책은, 그 소중한 전기를 생산하고, 전달하는 전력산업의 역사를 살핀다. 1898년 한성전기가 설립된 때부터 1961년 전기3사가 한국전력주식회사로 통합될 때까지의 한국 전력산업사를 다뤘다. 지은이는 다양하고도 희귀한 자료를 바탕으로 대한제국기, 일제강점기, 제1?2공화국으로 나눠 60여 년에 걸친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흥미롭게 들려준다.

 

목차

머리말
연보

서론

Ⅰ. 대한제국기 전력산업의 형성

1. 한성전기회사의 설립과 경영
한성전기의 설립과정과 회사의 성격
콜브란 측의 경영 확장 기도
한성전기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
채무분규와 이용익의 경영권 장악 모색

2. 한성전기회사의 한미전기회사로의 개편
국제정세의 변화와 채무분규의 해결
한미전기로의 개편과정과 경영성적

3. 일제의 전력산업 장악과정
일제의 ‘시정개선’과 전력산업의 장악 기도
일한와사의 설립과 한미전기의 인수

Ⅱ. 일제강점기 전력산업의 구조

1. 1910~1920년대 전력산업정책과 전력업계의 동향
1910년대 전력산업의 감독제도 정비와 전력업계
1920년대 수력발전소 건설과 전력통제정책의 필요성 대두

2. 1930년대 초 전력통제정책의 수립과정
전력통제정책을 둘러싼 갈등과 정책 수립 지연
공영화운동의 고조와 전력통제정책의 수립

3. 전력통제정책의 전개와 전력산업의 구조개편
‘북=수력, 남=화력’ 분리된 두 계통의 전력네트워크 구축
지역별 배전회사의 통합 추진
거대 발송전회사의 등장과 대규모 발송전 설비

4. 전시 말 전력국가관리체제의 수립
전력통제정책이 초래한 문제와 해결방안 모색
일원적 전력국가관리의 실시 요구와 도입 지연
조선전력관리령 공포와 조선전업의 설립

Ⅲ. 1945~1961년 전력산업의 위기와 극복

1. 해방 직후 전력산업의 위기
미군정기 전력난과 5?14단전
전력자급체제 구축을 위한 전력개발계획
한국전쟁으로 인한 전력시설의 파괴

2. 1950년대 전원개발의 추진과 업계 동향
장기전원개발계획의 수립과 변천
전기 3사의 경영난과 전력산업구조개편 논의

3. 전기 3사의 통합과 한국전력(주)의 창립
수급격차 해소를 위한 긴급전원개발의 추진
전기3사 통합정책의 난항
한국전력(주)의 창립

결론

참고문헌
주석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오진석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경제사를 전공하였으며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은 「한국근대 전력산업의 발전과 경성전기(주)」이다. 주로 은행, 백화점, 전기회사와 같은 한국 근대기업의 발전과정을 연구해 왔고, 기업가나 경제학자, 경제관료 등을 다룬 논문을 쓰기도 했다. 현재는 대전에 있는 배재대학교 행정학과에서 한국사와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책 속으로

미국에서 전등시설을 수입하려고 했지만 갑신정변의 발발로 일차 연기되었고, 1886년 말에서야 에디슨의 대리인 프레이저Everett Frazer(厚禮節)를 통해 에디슨전등회사로부터 전등설비를 구매하여 1887년 초 미국인 전등교사電燈敎師 맥케이William McKay(麥巨)에 의해서 경복궁 내 건청궁에 백열전등 750등 규모의 전등소가 설치되어 최초로 점등이 이루어졌다. 세계적으로도 매우 이른 전등 도입이었다.
--- p.39

콜브란은 원래 영국 태생이지만 1881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주로 철도, 광산업 등에 종사하며 콜로라도미들랜드 철도회사의 총지배인을 거쳐 미들랜드터미널철도회사의 사장을 역임한 이 분야 전문가였다.
--- p.40

이 문서에 의하면, 광무황제의 내탕금 10만원과 경인철도미국회사(콜브란측)로부터 차관 10만원을 합쳐 20만원의 자본금으로 전기회사(명칭은 ‘경성전기회사’)를 설립하여 한성부 내에 전차, 전등, 전화를 공급토록 하고 차관을 갚을 때까지 경인철도미국회사가 경영권의 일부를 장악하고 회사 재산도 저당토록 한다는 계획이었다.
--- p.41

한성전기는 명목상으로는 한국인 민간회사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황실기업이었으며, 그 성격은 황실과 미국 자본의 파트너십에 가까웠다. 알렌이 미 국무부에 보내는 전문에서 서울의 전기철도는 “사실상 미국기업의 소유”라고 과시한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 p.48

콜브란측은 황제의 승인을 받아 한성전기 본사 사옥의 건립을 추진했다. 현상건을 통해 종로대로변(현재 종로2가 8번지)에 부지를 구입하고 르네상스식 2층 건물을 건립해 1902년 1월 2일 준공식을 거행하기에 이르렀다. 대지 533평에 지상건물 3동 203평 규모로 부지 구입비를 제외하고 공사비로만 7만5천 엔이 투입되었다. 옥상에는 전기로 움직이는 시계탑까지 설치한 최신식 건축물로서 당시에는 근대화의 상징이자 서울의 랜드마크로 기능했다.
--- p.62

개화파 관료들은 군주권의 제약을 통한 입헌군주제의 수립을 이상으로 여기며 갑오개혁 이래 민간 중심(외자 포함)의 상공업진흥정책을 적극 추진하고자 하였지만, 이용익은 황제의 무한한 군권을 바탕으로 한 절대군주제를 근대화의 방안으로 생각하여 황실 산하 궁내부 주도로 각종 근대산업육성정책을 추진하고 자신이 직접 관련 기구를 통제 관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이용익의 입장에서 보면, 한성전기는 친미파가 황제를 감언이설로 속여 무분별하게 외국자본을 끌어들여 설립한 회사로서 미국인들에게 각종 이권을 넘겨주고 그 대가로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세력을 강화해 나가는 수단이므로 결코 용인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 p.66

1903년 5월 15일에 주사 김중진이 전차를 타는 한국인들은 대한제국의 신민이 아니라는 취지로 거리에 포고문을 붙였고, 그 다음 날에는 종로에서 화서학파 김평묵의 문도 서병달(본명 서병칠)이 장부조사를 거부하는 콜브란측을 성토하고 앞으로 전차를 타지 말자고 연설하여 호응을 얻었던 적이 있었다.
--- p.88

광무황제는 미국과의 관계 강화의 한 방책으로 콜브란측과의 채무분규 타결을 급히 서둘렀다. 1904년 2월 11일 이학균과 샌즈를 콜브란에게 보내 그간의 채무분규를 타결하기 위해 현금 70만 엔을 주는 대신 한미전기회사를 설립하여 모든 권리와 자산을 이 회사에 인계하고 주식의 절반은 광무황제가 인수하는 방안을 제시토록 했다. 또한 황궁 내의 전등설비도 콜브란측에 인도하고 궁내부 소속 광산의 개발권도 주기로 약속했다.
--- p.99

1902~1903년에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이용익의 한성전기 경영권 장악 구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콜브란측은 명실상부하게 합법적으로 한성전기의 경영권과 소유권을 장악할 토대를 구축하였고, 광무황제는 새로이 조직될 한미전기의 주식 절반을 인수하여 대주주로서 회사 경영에 관여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을 뿐이다.
--- p.101

한미전기가 전등의 적극적인 판촉에 나섰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우선 전등가설 신청서와 전등규칙을 다국어로 제작 배포해 전등 사용을 권유했고, 전등뿐만 아니라 기계 운전 또는 공장의 동력을 위해 전력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주문에 응하기로 했다. 또한 전등을 다수 설치할 때는 가설비를 할인해 주었고, 동일 가옥 또는 구내에 250촉광 이상의 전등을 사용할 경우 촉광수에 따라 할인해 주는 제도도 시행했다.
--- p.108

일본이 콜브란측의 경영활동에 강력한 제약을 가했던 이유는 경제적 이해관계의 충돌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 한미전기가 광무황제의 ‘주권수호외교’를 지원하고 이에 필요한 비밀자금 조달창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 p.124

일본은 대한제국의 전력산업 장악을 위해서 시부사와를 비롯한 정상들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배후에서는 통감부가 이들을 적극 지원하는 체제를 구축하였다. 우선 일본은 시부사와 등을 동원해 수력전기회사 설립을 추진했다. 전술하였듯이 시부사와, 오오쿠라, 쿠사카, 오오하시, 핫토리, 오다카, 츠치자키 등은 1906년 3월에 한강과 대동강 수력발전소 설립을 청원하여 동년 6월에 특허를 받았다.
--- p.127

일본정부는 한때 50만 엔을 주고 콜브란측의 지분을 인수한 다음 황실 소유주와 합쳐 한성부유漢城府有로 경영할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지만 일본인 민간회사가 한미전기를 인수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고, 콜브란측이 소유한 전기?수도사업권을 동시에 매수하려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자 하나씩 매수하기로 방침을 수정했다. 일본정부는 일한와사가 창립되자 이 회사를 내세워 한미전기회사의 매수협상을 본격 추진하였다.
--- p.135

일한와사에서는 콜브란과 매수협상을 벌여 전체 120만 엔에 한미전기의 특허, 권리, 자산, 재산을 모두 인수(광무황제 지분 포함)하고 별도로 50만 엔의 사채를 승계하기로 하여 협상을 타결지었다.
--- p.137

1904년 러일전쟁의 와중에 유리한 조건으로 한성전기를 한미합자의 한미전기로 개편하고 경영권을 장악했던 콜브란측은 한때 광무황제의 주권수호외교를 도우면서 한층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광무황제로부터 다양한 지원을 획득하였지만, 일본의 대한제국 합병 기운이 농후해지고 일한와사의 등장으로 향후 사업의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광무황제와 제대로 협의조차 하지 않고 일본에 사업을 매각해 버리고 말았다.
--- p.138

1911년 3월 6일에는 조선총독부령 제24호로 전기사업취체규칙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전력회사의 설립과 운영은 총독부의 허가사항이 되었고(제10조), 전기요금은 총독부의 인가를 필요로 하는 인가제가 채택되었다(제18조). 그러나 전기사업취체규칙은 원래 보안과 위험 방지를 주요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 p.144

1910년대 후반 한국에서도 경기호황에 따라 전등과 전동력 수요는 크게 늘어났지만, 석탄을 비롯한 물가폭등으로 전력업계는 경영이 악화되고 있었고 자재 입수난까지 겹쳐 발전설비를 늘리지 못하는 사정에 있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설비 보전과 발전력 부하 때문에 쇄도하는 전등 신청을 사절해야 할 정도로 ‘전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부 폐등廢燈?휴등休燈하는 수요가의 전등은 프리미엄까지 붙어서 거래될 정도였다.
--- p.150

한국인 중역이 과반을 차지하는, 다시 말해 한국인 소유 주식이 과반 이상이라고 추측되는 회사는 1921년 현재 해주전기와 개성전기 2개사, 1931년 현재 강릉전기, 북청전등, 선천전기, 서선전기, 장연전기, 개성전기, 성남전등 등 7개사에 불과했으며, 전원 한국인 중역으로 구성된 회사는 성남전등 한 곳뿐이었다. 일본에 본점을 둔 지점회사는 1921년 현재 5개사, 1931년 현재 1개사뿐이었다. 1910~1920년대 전기회사는 대부분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 지역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서 설립했던 것이다.
--- p.159

공영화운동이 확산되자 업계는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동업자단체인 조선전기협회(이하 전협)를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대응했다. 총독부를 상대로 로비를 펴기도 하고 신문, 잡지를 활용해 공영론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 목소리를 높여 나갔다. 이들은 공영론을 이상론자의 선전에 불과한 시기상조, 시대착오적 이론이라고 비판하고 일종의 ‘허영적 호기심’, ‘매명적賣名的 공명심’에서 나온 주장으로 치부하였다.
--- p.162

1910년대 말부터 추진된 금강산전기철도의 ‘유역변경식’ 수력발전의 성공은 한국 내에서 수력발전이 절망적이라는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총독부는 수력전기의 경제성에 다시 주목하기 시작했다.
--- p.165

평양에서는 부민들이 소등동맹까지 결성할 정도로 격렬히 투쟁한 끝에 1927년 3월에 평양전기가 부영으로 전환되었고, 이후 전국에서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전기를 공급하고도 상당한 이익을 거두어 매년 10여만 원씩을 평양부에 전입하는 등 성공적으로 경영되고 있었다.
--- p.185

우선 송전간선만을 국영으로 하고 나머지 송전(송전지선)과 발전, 배전은 민영에 맡기는 원칙을 채택하되 전력계통으로 보아 발송배전을 일체로 경영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판단되면 이를 민영에 맡길 수 있도록 하였다.
--- p.192

전력공급시스템은 전력통제정책에 의해서 수력발전 중심으로 크게 변모될 예정이었다. 특히 대규모 수력발전소는 북쪽에 장진강수력, 남쪽에 강릉수력을 2대 핵심발전소로 개발하기로 하고, 이 발전소를 기점으로 주요 소비지까지 송전간선망을 부설하기로 계획하였다.
--- p.195

1930년대 초반에 확정된 전력통제정책은 북쪽의 장진강수력과 남쪽의 강릉수력 개발을 핵심사업으로 삼아 추진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수력발전소와 소비지를 연결할 장거리 고압송전망 건설도 시급히 요구되었다.
--- p.201

경성전기는 거액이 소요되는 강릉수력 개발에도 나서지 않았다. 총독부는 경성전기를 대신해 개발할 민간자본을 물색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총독부에서는 강릉수력 개발을 일단 뒤로 미루고, 당초 예비용 발전소로 구상되었던 영월의 화력발전소 건설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 p.205

조선전력은 송전선의 출발점을 강릉에서 영월로 바꾸었으며, 영월에서 상주를 거쳐 대구에 이르는 송전선과 상주와 대전을 연결하는 송전선만을 건설하고 단양에서 분기하여 충주와 경성을 연결하는 송전망은 건설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북의 장진강수력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가 평양을 지나 경성까지만 송전되고 그 이남으로는 내려올 수 없게 되어 경성 이남에서는 영월화력발전소에서 생산되는 화력전기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다. 이는 한반도에 ‘북=수력, 남=화력’의 분리된 두 계통의 전력네트워크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 p.206

원래 남선, 호남, 중선, 서선, 북선 등 5개 지역으로 통합하려던 배전통합계획은 남선과 호남을 합해 남선, 중선, 서선, 북선 등 4개 지역으로 수정되어 진행되고 있었는데, 1938년 이전까지 서선합전, 남선합전, 함남합전 같은 대형 배전회사들이 등장하여 일정 부분 진척되기는 했지만, 원래 총독부가 기대한 대로 조속한 시일 내에 완수되지 못하고 있었다.
--- p.235

중심인물이 바로 이마이 전기과장이었다. 그는 도쿄제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기술관료 출신으로서, 탁월한 업무능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1930년대 초 전력통제정책 수립을 주도해 이마이다 정무총감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으며, 무려 7년여간 전기과장의 직책을 수행하며 부하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다.
--- p.258

국가관리의 범위는 발전?송전?배전 전체의 일원적 관리를 목표로 하되 당분간 지방적 수요 또는 자가 전용專用을 위한 발송배전은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향후 발송전에 이어 배전까지 통합할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지만, 끝내 실현하지는 못했다. 한편, 자가용을 제외한 발송전회사를 통합해 국책대행기관인 조선전업주식회사를 설립하기로 하였지만, 만주국과 공동으로 개발에 착수한 조선압록강수전은 여기서 제외하기로 했다.
--- p.274

해방 당시 남북한의 발전능력을 비교해 보면, 북한은 152만 3,913kW(88.5%)였지만 남한은 19만8,782kW(11.5%)에 불과했다. 게다가 남한의 전력시설은 대부분 화력발전소인 데다가 수력에 비해 효율이 크게 떨어져 예비용으로 전환되어 있었기 때문에 북한과 남한의 발전실적은 95.7% 대 4.3%로 그 격차가 더욱 크게 벌어졌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해방 이전에 한반도 전역에 걸쳐 전력네트워크가 구축된 것은 5년을 채 넘지 못했지만, 이 기간 남쪽에서는 북쪽의 수력전기에 대한 의존도가 급속도로 높아져 가고 있었다.
--- p.289

1947년 6월 17일 남북전력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이 협정에 따르면 남측은 1945년 8월 16일부터 1947년 5월 31일 사이에 공급된 전력에 대한 요금 1,633만4,735원을 협정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북측에 현물로 지급하고 1947년 6월 1일 이후의 전기요금은 매월 단위로 청산하기로 했다. 일단 최고 8만kW까지 전기를 공급하되 향후 10만kW까지 늘리기로 약정했다. 1948년 5월 31일까지는 위와 같은 조건 아래 전기를 공급하되 양측이 이의가 없을 경우에는 1개월 단위로 자동연장하기로 합의했다.
--- p.291

1947년 11월 18일 오전 북측에서 갑작스럽게 2시간이 넘도록 송전을 중지하여 큰 혼란이 일었고, 그 이후에도 발전소 사고를 이유로 들며 당분간 종전 송전량의 절반만 공급할 수 있다고 통보하였다. 갑작스러운 북측의 제한 송전으로 인하여 남측에서는 전력난이 심각해졌다. 특히 영등포공업지대와 인천공업지대에서 받은 타격이 커서 일부 공장은 생산량의 60~80%가 감소했다고 보고할 정도였다.
--- p.294

북한은 1948년 5월 14일 정오 전력대금 미지불을 이유로 들어 일방적으로 송전을 중단했다. 이른바 ‘5?14단전’의 시작이었다.
--- p.296

공장 휴업으로 인해 각 지역에서 실업자가 속출했으며, 통신, 수도, 교통, 치안 등에 대한 우선배전제 때문에 한때 민간 배전은 아예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미군정은 문제 해결을 위해 하지 중장의 명의로 소군정에 대해서 계속 송전을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했지만, 소군정은 북조선인민위원회와 교섭하라며 책임을 미루었고, ……
--- p.297

새로운 발전소의 건설에는 거액이 소요되기 때문에 미국의 지원과 협조 없이 남한정부의 독자적인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사안이었다. 그런데 미국은 장기간의 공사에 고액의 비용이 들어가는 수력발전소의 건설보다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건설비용이 적게 소요되는 화력발전소를 선호했다. 게다가 장거리 송전과정에서의 전력 손실을 고려해 대규모 전력소비지 인근에 화력발전소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p.300

정부는 1949년 6월 1일 자로 ‘발송전일원화’를 전격 단행했다. 남한 내 중요 발전소들을 모두 조선전업에 이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로써 상공부 관할의 영월, 경성전기의 당인리, 남선전기의 부산 등의 화력발전소들과 농림부 관할의 보성강수력발전소, 그리고 발전선 자코나호와 엘렉트라호가 조선전업에 이관되었다. 남한의 중요 발송전 시설들이 모두 조선전업에 집중됨에 따라 이제 조선전업을 국영기업으로 개편하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 p.302

전쟁 이전에 북한은 화천수력의 방수량을 인위적으로 조절해 청평수력의 정상 가동을 방해하곤 했는데 이제 남한에서 화천과 청평을 모두 관할하기 때문에 이러한 불확실성을 해소할 수 있었다. 전쟁 중 남한정부가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화천발전소의 확보에 사활을 걸었던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 p.309

조선전업을 비롯한 전기회사들은 해방 이후 일본인 보유 주식이 남한정부에 귀속되어 있었으므로 소유권은 남한정부에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정부에서 임원에 대한 임명권을 장악하고 주무부서에서는 업무상 강력한 감독권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사실상의 국영기업으로 간주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p.313

헌법개정을 전후하여 국영기업에 대한 민영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우선 정부에서는 1954년 4월 17일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국영 및 정부관리기업체에 대한 지정을 해제하여 귀속기업으로 환원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따라 조선전업, 경성전기, 남선전기 등도 국영기업체 지정에서 해제되었다. 이는 대상 기업들을 언제든지 민영화할 수 있도록 사전준비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 p.336

전기회사의 경영난이 가중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비탄력적인 요금결정구조에서 비롯된 요금인상 억제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전기요금은 인가제로 운영되어 왔는데, 1951년 9월 24일 자로 시행된 재정법(제3조, 제81조)에 의해 종래의 인가제를 넘어서 국회 동의까지 필요하게 되었다.
--- p.339

장면정권에서는 위의 장기전원개발계획 수립에 근거해 조만간 전력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며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주무장관인 주요한이 향후 화력과 수력을 합쳐 100만kW를 확보할 수 있다며 공언하기도 하였고, 재무부 장관 김영선은 향후 3년 이내에 최저 80만kW 최고 100만kW 확보가 가능하다고 호언하기도 했다.
--- p.357

태완선은 조선전업에 근무한 인연이 있었고, 이 문제에 대해서 오랫동안 식견을 쌓아 온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가였다. 태완선이 전기3사통합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이 문제를 주도적으로 처리하게 된 배경은 이러하였다.
--- p.365

위원회에서는 전기3사를 통합하여 한국전력주식회사(가칭)를 만들기로 하고 이를 위해 한국전력주식회사법 초안을 작성하여 검토하였다. 그 결과 1961년 2월 8일에 국무회의에서 이 법안이 통과되기에 이른다. …… 우선 기존의 전기3사를 통합하여 새로운 통합법인으로서 한국전력주식회사를 설립하기로 하되 귀속주를 정부투자로 전환하여 정부가 과반의 주식을 소유토록 하였다.
--- p.369

군사정권에서는 경제문제 해결 의지를 《혁명정부경제청서》에 담아 공표하였는데, ……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경제문제로 전력난을 거론했다. 구 정권에서 이권투쟁에만 급급한 나머지 발전시설 확충을 제때 이루지 못해 전력난이 일어났다고 비판하고 3사를 통합하여 인사를 쇄신하고 효율화를 추구하여 전원개발에 적극 나설 것을 공언하였다.
--- p.378

전업3사통합설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 위원회에서는 거의 매일 회의를 거듭하며 한국전력주식회사법안을 만들었고, 6월 23일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이 법안을 심의하여 통과시켰으며, 다음날 곧바로 3사 사장과 9사단장 박영준 준장이 설립위원에 임명되어 3사 합병계약을 체결하였다.
--- p.379
 

출판사 리뷰

대한제국, 한성전기회사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

한국의 전력산업은 고종과 친미개화파 관료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영국 태생의 미국 실업가 콜브란과 손잡고 설립한 최초의 전기회사 한성전기는 명목상 민간회사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황실기업이었으며 대한제국의 산업진흥정책을 상징하는 대표적 기업이었다. 여기엔 명성황후가 묻힌 홍릉을 반일의 상징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도록 전차를 놓으려는 고종의 의도도 반영됐다(49쪽). 정치 주도로 시작된 한성전기는 경영 과정에서 이용익을 중심으로 한 근왕파의 반대, 러일전쟁을 전후한 미일 등 국제정치의 세력 다툼을 겪으며 한미전기회사로, 종내는 일본인 회사인 일한와사에 매각된다. 한성전기의 실패를 두고 미국 의존적이었다거나 대한제국은 미일에 비해 손해만 떠안게 되었다는 비판이 나오지만 지은이는 이에 이견을 제시한다. 탄생 자체가 ‘정치적 산물’이었고, 한미 간 그리고 미일 간 외교문제이기도 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 1903년에 반미운동의 하나로 전차 승차 거부운동이 벌어졌다는 흥미로운 일화(88쪽) 등을 곁들여서.

일제강점기, ‘북=수력’ ‘남=화력’이라는 기형적 산업구조

일제강점기를 다룬 부분은 전력통제정책과 일제 말에 형성된 전력 국가관리체제의 내용과 성격을 면밀히 검토한다. 1920년대 초 북한강 상류에 ‘유역변경식’ 수력발전소가 성공했지만 남쪽의 강릉수력 건설이 무산되면서 영월화력으로 대치된 것이 ‘북=수력, 남=화력’이란 전력산업구조의 기본 틀이 마련되는 계기였다고 설명한다(195쪽). 여기에 1930년대 초에는 한반도 전역에 무려 63개의 전기회사가 영업할 정도로 전력산업이 양적으로 성장했지만 한국인 소유 주식이 절반을 넘는 회사는 1931년 현재 7개사에 불과했다는 등 식민지 경제체제의 실상을 보여준다(159쪽). 한반도를 4개 구역으로 나눠 배전회사를 세워 전력통제를 했다든가 일제 말에 이르러서는 ‘전력 국영론’이 대두해 ‘조선전업’을 통해 전력 국가관리를 꾀한 사실 등 제도사에 비중을 두면서도 일제 전력산업 정책의 중심인 총독부 전기과의 핵심 이마이 과장의 이력을 소개하는(258쪽) 등 역사의 이면에 대한 관심도 놓치지 않는다.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5?14단전과 한국전쟁의 시련과 그 극복

해방 직후 남북한의 발전실적은 4.3% 대 95.7%였다. 한반도 전역에 전력네트워크가 구축된 것이 5년이 채 못 되었지만 북쪽 수력전기에 대한 남쪽의 의존도가 클 수밖에 없었다. 한데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선거 직후인 1948년 5월 14일 북한은 ‘남북전력협정’에도 불구하고 전력 대금 미지불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송전을 중단했다(296쪽). 앞서 47년 11월 두 시간여의 송전 정지 때 일부 공장의 생산량이 60~80%가 줄었으니 5?14단전의 쇼크는 막대했다(294쪽).
한국전쟁으로 전력산업 시설이 파괴된 여파는 말할 것도 없다. 오죽하면 한국정부가 전쟁 전 북한 지역에 있던 화천발전소 확보를 위해 엄청난 희생을 무릅썼을까(309쪽). 전력난을 극복하기 위해 이승만 정부는 부산 감천발전소 건설을 위한 국제입찰에 일본 기업에 문호를 개방했을 정도였다(350쪽).

한국전쟁~5?16군사정변, 전력산업 틀 마련

전쟁이 멈춘 뒤 이승만 정부는 본격적인 전원개발계획 마련에 나서 미국의 원조를 기반으로 당인리 등지에 화력발전소를 신설하면서 전력난은 일시 해소되었다. 수력발전소 신설 계획이 미국의 관심을 끌지 못해 계속 지연되면서 미국 원조를 얻기 위해 조선전업, 경성전기, 남선전기 등 전기3사를 통합해야 한다는 전력산업의 구조개편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과도정부, 장면 정권 시절엔 정치적 혼란으로 성사되지 못했고, 5?16 이후 군사정권은 전기3사를 통합을 밀어붙여 1961년 7월 전기3사를 통합한 한국전력주식회사를 설립함으로써 이후 경제성장기의 전력산업 틀을 마련했다.
지은이는 다양한 자료를 통해 이 과정을 꼼꼼히 보여주면서 반일을 부르짖던 이승만 정부가 부산 감천발전소 건설을 위한 국제입찰에 일본 기업에 문호를 개방했다든가(350쪽) 한때 전기료는 국회 동의 사항이었다는 등 흥미로운 이야기도 들려준다.

학술사적 의의

지금껏 한국 전력산업사를 다룬 논문은 많지 않았고 학술서적은 더더욱 드물었다. 그런 점에서 대한제국기부터 60여 년이란 장기간에 걸쳐 전력산업의 형성과 변화를 일별한 이 책은 연구사란 측면에서도 의의가 있다. 어느 학자는 앞으로 30년간은 다시 나오기 힘든 책이라 평가할 정도다. 여기에 일본과 미국 등지의 도서관 박물관 등으로 발품을 팔고, 한성전기와 관련 있는 미국인 보스트위크의 후손들이 소장한 자료까지 직접 파악한 지은이의 성실성이 책의 가치를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