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한국근대사 연구 (책소개)/1.한국근대사

근대 개성상인과 인삼업

동방박사님 2022. 8. 10.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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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개성상인들이 이끈 ‘가삼家蔘에서 고려 인삼까지’
“인삼업은 이미 19세기 중엽 ‘산업화’ 이뤄”

우리나라는 국내외에서 인정받는 ‘인삼 종주국’이다. 그러니 진작 이런 책이 나왔어야 했다. 식민사관이 아닌 우리 눈으로, 약효에 관한 흥밋거리 일화 모음이 아니라 산업사의 측면에서 인삼업 전반을 아우르면서 인삼업의 주역인 개성상인의 역할에도 주목한 그런 책이 필요했다. 개성상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양정필 제주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이런 주제를 다루기에 맞춤인 역사가이다. 그래서 그의 노작인 이 책은 그 자체로 반갑고 값지다.

목차

책머리에
연보

Ⅰ. 서론

Ⅱ. 19세기 개성상인의 투자와 근대 인삼업의 성장

1. 19세기 초 인삼 재배의 확산과 개성상인의 인삼업 투자
2. 19세기 개성상인의 투자 확대와 인삼업의 성장
3. 인삼업 관계자의 유형과 사례

Ⅲ. 대한제국의 홍삼 정책과 일제의 인삼업 침탈

1. 황실의 홍삼 전관과 정책의 특징
2. 인삼업 변동과 일제의 침탈에 의한 위기
3. 삼포민의 대응과 분화

Ⅳ. 일제의 홍삼 전매제 시행과 거대 삼포주의 등장

1. 일제의 홍삼 전매제 시행과 특징
2. 일제의 인삼업 재편과 거대 삼포주의 활동
3. 거대 삼포주 개성 공씨가의 삼포 경영과 자본 전환

Ⅴ. 일제강점기 인삼업자의 활동과 백삼 산업의 성장

1. 개성상인의 백삼 상품화와 판매 촉진활동
2. 금산 지역 인삼업자의 활동과 금산 백삼의 성장

Ⅵ. 인삼업의 자본 구성과 투자 방식

1. 인삼 경작법과 생산비 구성
2. 삼업자본 조달과 투자 방식

Ⅶ. 결론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양정필 ( Yang, Jeong-pil,梁晶弼)
 
제주도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주제는 개성상인이었다. 현재도 개성상인과 인삼을 계속 연구하고 있다. 2013년 가을학기부터 현재까지 제주대학교 사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최근에는 제주도 역사도 공부하고 있다. 그동안 몰랐던 제주 역사를 새롭게 알아가면서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책 속으로

한국 인삼 재배의 기원은 문헌 기록에 의해서도 17세기 중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인삼 재배의 기원 시점으로서 17세기 중후반은 문헌 기록에 근거한 하한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수십 년간의 시행착오를 감안하면 인삼 재배 기술은 임진왜란 전후 혹은 그 이전에 확보되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 p.44

18세기 중엽 이후 자연산 인삼이 절종 단계에 이르면서 대청무역이 침체에 빠지자, 자연산 인삼을 대신하여 청국에 수출할 수 있는 물품으로 재배 인삼=가삼家蔘을 가공한 홍삼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이 되면 재배 지역이 영남은 물론 호남과 강원도로까지 확대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p.46

1797년에 조정은 재배 인삼으로 제조한 홍삼의 대청 수출을 공식적으로 허가하면서 수출량을 연 120근으로 결정하였다. …… 120근의 홍삼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700칸 정도의 삼포가 필요하였다. …… 그런데 1810년대 이후 개성상인이 본격적으로 삼포 투자에 나서면서 면적이 급격히 확대되었다. 그 결과 1832년에는 공식 홍삼 수출량이 8,000근으로, 1847년에는 4만 근으로 급증하였다. 8,000근의 홍삼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대략 4만 8,000칸의 삼포가, 4만 근의 홍삼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24만 칸의 삼포가 필요하였다
--- p.47

조정의 홍삼 정책은 1797년부터 시행되었다. 그해에 조정에서는 홍삼에 대한 최초의 규정이라고 할 수 있는 「삼포절목蔘包節目」을 반포하였다. 「삼포절목」은 사행을 통한 홍삼 교역을 처음으로 정식 인정한 규정으로 그 의의가 크다
--- p.48

개성에서 인삼 재배가 시작된 시기는 삼남 지역과 비교하면 꽤 늦다. 김택영에 의하면 그 시기는 1810년 무렵이다. 그리고 개성이 인삼 산지로 각인된 시기는 1820년 전후이며, 1820~1830년대 이후 개성은 인삼 주산지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늦은 출발에도 불구하고 개성 지역이 인삼 주산지로 발전할 수 있었던 저력은 …… 하나는 의주상인, 즉 만상灣商과의 오랜 협력관계와 그로 인한 증포소蒸包所의 개성 이전이고, 다른 하나는 개성상인이 갖고 있던 충분한 자본력과 신용제도이다
--- p.51

개성상인은 신용만 잃지 않으면 언제든지 시변을 통해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근대적인 금융기관이 없었던 19세기에 시변은 개상인들 사이에서 근대적인 금융기관 이상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고, 이는 개성상인의 삼포 투자를 이끌어 내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p.59

19세기 중엽에 개성상인의 홍삼 생산 능력은 연 4만 근에 이르렀다. 이는 대량 생산으로서 근대적인 산업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 홍삼은 거의 전량 청나라로 수출되어 막대한 수출 이익을 창출하였다. 일제강점기 및 해방 이후에도 꾸준히 성장한 홍삼 산업은 19세기 중엽에 이미 성립하였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인삼업을 근대적인 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면 19세기 인삼업도 근대적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질적으로 가능케 한 개성상인은 근대적인 생산자, 자본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p.61

제1기는 인삼 재배 초창기로, 개성상인이 삼업 투자를 시작하였지만, 아직 초창기로서 그 규모가 크지 않고 따라서 삼포 면적도 소규모였던 시기이다. 대체로 1820년대까지로 볼 수 있다. 제2기는 인삼 재배 전성기로 …… 대체로 1850년을 전후한 시기까지로 볼 수 있다. 이때는 인삼 재배 면적 급증과 그로 인한 수삼 수확량 증가가 홍삼 수출량 증가로 이어지는 시기였다, 제3기는 인삼 재배 소강기로, 1850년 무렵 최고 수준에 도달한 삼업 투자가 일정하게 위축되지만 격감하지는 않은 때이다. …… 이 시기에는 홍삼 생산량의 증감이 이전보다 심하였다
--- p.69

홍삼 밀수출 단속의 책임을 지고 있는 송도와 의주부에서 홍삼의 잠조잠매潛造潛賣를 단속하기는커녕 오히려 조정의 공식 허가 수량을 넘어서는 홍삼의 제조 및 수출을 묵인해 주고 그 대가로 지방 관아에서 합안세를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삼 합안세의 존재는 개성상인의 삼포 투자를 자극하였음이 분명하다
--- p.73

임상옥은 순조 집권 초반 세도가 박종경 집안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 인삼 무역의 10년간 독점권을 얻었다고 한다. 이는 1810년대 홍삼 무역을 전적으로 만상에게 담당시키던 무렵의 일이다. …… 그의 집에는 부기를 적는 사람만 7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거상으로 성장한 39세에 조상의 묘소 아래 커다란 집을 건축하였는데, 그 크기가 수백 칸에 이르렀다고 한다. …… 한번은 원접사遠接使, 평안 감사, 의주 부윤이 임상옥 집을 찾았는데, 그 일행이 700여 명이었다. 그런데 이 700명의 요리를 각 상으로 일시에 들였다고 한다
--- p.93

오희순(1854~1899)은 …… 1880년대에 홍삼 무역을 통해 거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오희순은 일제강점기에 ‘평안도의 김성수’로 불리던 오치은의 아버지이며, 일제하 유력한 자본가였던 오희원의 사촌형이다. 오희원은 남강 이승훈의 물주로 유명했고, 오희원과 오치은도 안창호 등이 대성학교를 세울 때 총 1만 원의 기부액 중 7,000원을 부담하였다
--- p.94

고종은 의병운동 지원비=운동비를 1891년과 1892년도 홍삼 수입에서 지출하려 했음을 할 수 있다. 그 액수는 80만 환으로 한 해 평균 40만 환이 된다. …… 당시 왕실에서 홍삼 무역에 참여하여 상당한 수입을 얻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홍삼 판매 대금은 당시 상해에 있던 민영익이 관리하고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 p.96

황실은 ‘배상금 선교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는 배상금을 담보로 하여 봄에 10만~20만 원 정도를 삼포주들에게 미리 지급해 주고 가을에 수삼 납부 시 변제하는 제도로, 삼포주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1904년까지는 삼포 경영은 위축되지만, 심각한 위기 상황은 아니었다
--- p.104

황실은 1896년에 홍삼 매입이란 방법을 통해서 삼정 전관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황실의 삼정 전관을 주도한 이는 고종의 최측근 이용익이었다. …… 1896년 9월 당시 평안북도 관찰사였던 이용익은 홍삼 1만 5,000근을 매입해 오라는 국왕의 지시를 받고 개성에 갔다. 그때 이용익은 홍삼의 매입에 그치지 않고, 국왕의 칙령을 개성 남대문에 고시하고서 독자적인 삼업 정책을 추진하고자 시도하였다
--- p.109

1898년도에는 유례없는 삼업 투자가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인삼 종자 가격의 폭락이었다. 1895년 무렵부터 인삼 종가 가격이 점점 등귀하였다. 당시 신화폐로 1근에 3원 50전 내지 4원의 가격을 유지하였다. 인삼 종자 가격 폭등은 3~4명의 간사한 상인을 낳았다. 그들은 1896년부터 팔방으로 손을 써서 이듬해인 1897년 가을부터 일본 또는 중국 광동 지방의 값싼 종자를 매입하여 그것을 당시 인삼 종자 산지인 금산, 용인 지방의 종자와 섞어서 상품上品처럼 만들었다
--- p.129

1898년 가을에 이용익이 황실의 수입으로 하라는 계하啓下를 받들고 개성에 오자마자 돌연 종래의 민업을 폐하고 관영으로 하려 했다. 이에 지방 인민의 격앙은 예상외로 분출하여 분요紛擾를 거듭하여 마침내 이용익은 폭민 때문에 습격 받고 잠시 몸을 피하였다. 이 분요 때 백성들은 모두 주창하길 우리들은 삼업에 의하지 않아도 선조의 제사를 끊이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이리하여 각자 소유한 인삼 종자를 모두 남대문 밖에 모아 가로에 산포하거나 태워버려 거의 탕진하기에 이르렀다
--- p.131

개성 민요의 발생 원인은 일본인의 인삼 도굴 행위에 있었다. 삼포민은 일본인의 삼포 도굴 혹은 부당한 수삼 저가 구매로 삼포 경영에 위기를 맞게 되어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런데 관헌은 이러한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삼포민이 일본인과 몰래 거래한다고 의심하여 개성 삼포민을 투옥하거나 벌금까지 물렸던 것이다. 이에 삼포민이 불만을 폭발시키니, 그것이 바로 개성 민요였다. 민요를 일으키면서 삼포민이 서로 단결하여 인삼 농사를 다시 짓는 자는 화장하기로 결의했던 만큼 삼포 투자가 급격히 위축되는 것은 당연했다
--- p.132

일본인들이 조선인 삼포주와 수삼 거래를 둘러싸고 맺은 관계는 크게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 화매和賣, 늑채勒採, 도채盜採가 그것이었다. 화매는 일본인이 정상적으로 수삼을 구매하고 그 대가를 조선인 삼포주에게 지불한 경우였다. 그러나 …… 당시 조선인 삼포주가 수삼을 일본인에게 판매하는 것은 나라에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거래는 힘들었다. 그래서 …… 3~4월경에 삼포주의 대리인과 일본인이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착수금으로 통상 전체 판매 금액의 절반을 건넸다. …… 채굴 시기가 다가와서 인삼 인도 일자가 약정되면, 약속된 날 밤 산록 혹은 마을 어귀에서 만나 채굴해 갔다. 그때 삼포주는 고의로 당황한 척 순검에게 달려가 도적이 삼포를 침입하여 인삼을 탈취해 갔다고 호소하였다
--- p.134

‘화폐정리’로 인한 전황과 상업의 불황은 개성 지역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개성 역시 당시 백동화 유통 지역으로 분류되던 경기도에 속해 있었다. 실제 개성상인들이 전황으로 크게 곤란을 겪고 있었던 사실은 “개성은 상업이 융성하다. 그런데 전년(1905년-필자) 공황 후 금융이 불량하여 목하 큰 곤란 중”이라는 개성인 박우현의 언급에서 확인할 수 있다.104‘전년 공황’이 1905년의 ‘화폐정리’에 따른 공황임은 말할 것도 없다
--- p.145

일본인은 가짜 인삼 주인을 내세워 삼포를 저가로 구매하였다. 심한 경우 일본인 삼적은 밤에 병기를 들고 100여 명이 무리를 이루어 1,000칸 삼포를 일거에 도채해 가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삼포민들은 대변통이 있은 후에야 민업이 피곤하지 않고 세액이 곤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특단의 조처, 즉 일본영사와 담판하여 개혁할 것을 요구하였다
--- p.148

강유주의 운명은 격심한 정책 변화와 일본인 삼적蔘賊 등이 만들어 낸 인삼업 위기 속에서 몰락해 간 사례로 주목된다. 강유주는 1896년 자료로 추정되는 『삼포적간성책』에서 1만 370칸을 소유한 최대 삼포민이었다. 그런데 내장원 간매間買 사업을 대행했다가 일이 잘못되어 낭패를 보고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렀다
--- p.153

김진구는 부호가 많기로 유명한 개성에서도 최상급에 속하였다. 1901년의 「목청전중건원조성책」은 기부 액수에 따라 이름이 적혀 있는데 당시 부윤이 1만 냥으로 최다 출연자였고, 그다음으로 8,000냥씩을 기부한 네 사람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김진구였다. ……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교육 사업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가 설립한 학교는 맹동의숙이다. 이 학교는 1910년 사립 삼인학교로 바뀌는데, 김진구는 직접 10년 동안 교생校生을 하였다. 이후 그는 전교 재산을 공립보통학교에 기부하였다. 그리고 공립상업학교 건축 시 그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 p.157

홍삼 제조권과 판매권을 장악한 일제는 이제 이 인삼 경작 허가제를 통해 경작 부문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이로써 인삼업에 대한 완전한 전매제를 실시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경작 허가제를 통해서 삼포주를 선택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일제의 의도에 맞는 삼포주들을 중심으로 삼업을 재편할 수 있었다. 삼포주 입장에서도 삼포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일제의 허가를 받아야 했던 만큼 일제와 대립각을 세우기는 쉽지 않게 되었다
--- p.168

일제는 …… 인삼 경작자가 사사로이 경작 칸수를 감소시키거나 또는 경작을 폐지하면 정부는 그 감작지減作地 또는 폐작지廢作地에서 생산할 수삼 가격에 상당하는 금액을 납부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수확 시 인삼 경작자가 정당한 사유 없이 정부가 사정한 수량 또는 근수 이상의 수삼을 납부하지 않으면, 정부는 그 부족액의 8배를 납부시킬 수 있었다(전매법 12조). …… 홍삼 전매제의 또 다른 특징은 인삼특별경작구역을 지정한 것이다. …… 1908년 7월 30일 탁지부령 제22호로 지정된 인삼특별경작구역은 경기도의 개성군·장단군·풍덕군, 황해도의 금천군·토산군·평산군·서흥군·봉산군이었다
--- p.169

1918년도 …… 총독부는 수삼 배상금과 홍삼 제조 비용을 합해도 50만 원이 채 안 되는 비용을 지출하였지만, 그렇게 제조한 홍삼을 200만 원이 넘는 금액을 받고 미쓰이물산에게 넘긴 것이다. 단순히 계산해도 순수입만 150만 원 정도가 된다. …… 미쓰이 역시 엄청난 폭리를 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 미쓰이물산은 수삼 재배와 홍삼 제조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판매만 담당하였지만, 제반 비용을 제하더라도 100만 원 내외의 이익을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6년간 애써 인삼을 재배한 삼포주가 그 대가로 33만 5,000여 원을 수령한 것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 p.195

1909년 손봉상은 개성학회장을 역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성에서도 1904년 러일전쟁 이후 국권 침탈의 위기 속에서 국권 회복을 위한 교육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 개성에서 맨 처음 설립되어 교육장려론의 도화선이 된 학교는 배의학교였다. 강조원, 임규영 등이 국민교육이 급무라는 것을 자각하고 1905년 10월에 설립하였다. 이어서 보창학교, 영창학교, 한영서원, 맹동의숙, 숭명학교 등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었다. 그 결과 각종 학교가 10여 개, 학생 수가 1,5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통일하는 기관으로 개성학회가 조직되어 교육의 진보 발달을 꾀하고 있었다
--- p.213

박우현은 …… 삼업자본을 바탕으로 고려삼업사, 개성사 등을 경영하였고, 개성보승회를 중심으로 사회활동도 전개하였다. 고려삼업사는 백삼 판매를 목적으로 설립한 회사였다. 1913년에 창립을 계획하고 1914년 2월에 설립하였는데, …… 4년 정도가 지난 1917년 무렵에는 일본의 각 현은 물론 중국, 타이완으로부터 멀리 남양에 이르고 있었다
--- p.214

합명회사 개성사는 1917년 당시 경기도에서 두 번째로 큰 무역회사였다. 설립 연도는 1907년으로 1911년 당시 사장은 이건혁이었다. …… 설립 목적은 경성 혹은 인천 등지를 거치지 않고 수입 물품을 직접 일본 등지에서 구입, 판매하려는 데 있었다. …… 식민지 초기 개성사의 영업활동은 실적이 좋아서 매 분기 1할 이상의 이익 배당을 하였다. 박우현은 개성사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 p.215

지방 출상을 통해 돈을 모아 개성으로 돌아온 공응규가 선택한 사업은 인삼업이었다. …… 1896년 당시 개성의 삼포를 조사한 기록인 『부외촌경내각읍삼포적간성책』에는 당시 공응규가 경영하던 삼포……는 6좌였고 그 총 칸수는 5,891칸이었다. …… 『적간성책』에 기재된 삼포주 615명 가운데 네 번째로 큰 것이었다. …… 공성학이 공응규를 이어서 가업인 삼업을 주도하기 시작한 시기는 1909년 무렵으로 그의 나이 서른한 살 때였다
--- p.223

1920년대 초반 15만 원의 삼포 경영 수입을 얻고 있던 공성학의 경제력은 …… 고부 김씨가 큰 집안의 1년 지대 수입과 비슷한 수준이었고, 백삼 판매 금액까지 포함하여 15만 원으로 추정할 경우에는 김씨가 큰 집안의 1년 지대 수입을 능가하였다. 1920년대 초반 공성학이 이룩한 경제력은 ‘호남 재벌’과 비교할 수 있는 상당한 규모였던 것이다
--- p.227

공성학이 투자한 주요 회사로는 영신사를 들 수 있다. 영신사는 1912년에 자본금 4만 원으로 창립되었다. 창립 당시에는 점옥店屋 및 창고 대여가 주요 업무였다. 그런데 1918년 자금을 30만 원으로 증자하면서 성격이 크게 바뀌었다. 당시 증자의 주요 목적은 수산물 무역에 있었다고 하며, 그를 위해 원산에 출장소를 설치하였다
--- p.230

공진항의 회고에 의하면 1932년 무렵 차인제도에 의해 운영되던 회사로는 신막에 있는 신곡자동차부, 사리원에 있는 서선무역사, 성진에 있는 해산물취급점포, 서울 을지로 입구에 있는 개성상회 등이었다. 신곡자동차부는 종씨宗氏가 경영하고 있었고, 서선무역사는 봉산군에서 생산되는 가마니에 대한 일수 판매권을 가진 회사였다. 1928년 서울의 개성상회는 한약상이었다. 이들 회사는 공씨가의 자본을 배경으로 차인들이 독립적으로 경영하던 회사였다
--- p.235

일제하 개성을 대표하는 백삼 상회로는 고려삼업사와 개성인삼상회를 꼽을 수 있다. 고려삼업사는 인삼 경작자가 중심이 되어 만든 회사였고, 개성인삼상회는 경작자가 아닌 순수 백삼 판매 상인이 만든 회사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 p.257

개성인삼상회는 삼포주가 아닌 백삼 전문 상인으로 볼 수 있는 최익모가 세운 상회였다. …… 최익모는 이전에 새끼줄로 묶어 판매할 뿐 백삼 자체를 포장하지 않던 관행을 버리고 …… 백삼 허리를 금띠로 감쌌다. …… 백삼을 담는 상자 장식에도 각별한 신경을 썼다. 찬란한 종이상자에 오색이 영롱한 상표를 붙여 봉한 후 다시 화인花印을 박은 나무상자에 넣었다. …… 포장 혁신에 그치지 않고 상품 이름도 바꾸었다. 당시에는 주로 개성 백삼을 ‘송백삼’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것을 버리고 대신 ‘고려인삼’으로 개명한 것이다
--- p.261

1929년 당시 금산군 산업기수였던 호소카와 간지細川治一의 기록이다. 그는 금산 인삼이 1770년경 김립金笠이란 사람이 개성에서 인삼 종자를 갖고 와서 묘포를 만들어 시험 삼아 재배하였는데 좋은 성적을 거두어 그 생산한 세근細根(어린 묘)을 개성 인삼업자에게 판매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적고 있다
--- p.274
 

출판사 리뷰

역사가의 눈으로 실증적·입체적 분석

역사 연구의 성패는 사료가 크게 좌우한다. 지은이는 근현대 150년간의 인삼업을 살피기 위해 승정원일기 등 널리 알려진 사료는 물론 당시 개성부의 「호적세표」, 이성계의 사저를 중건하는데 쓰인 「목청전중건원조성책」, 『외상장책』 등 숨어 있는 자료까지 들춰내 인삼업 발달사를 촘촘히 그려냈다. 예를 들면 1832년 공식 홍삼 수출량 8,000근을 제조하기 위해 삼포가 얼마나 있어야 했는지, 일제강점기에 홍삼 수출을 독점한 미쓰이물산의 수익이 얼마였는지 등을 숫자로 보여준다. 이뿐 아니다. 초창기, 전성기, 소강기로 나눠 황실과 일제 총독부의 홍삼 정책, 이에 대한 개성상인의 대응과 삼업계 개편, 삼포 경영 자금과 노동력 등 인삼업을 입체적으로 분석한다.

설득력 있는 ‘개성 인삼’ 성공 비결

당초 경상도 지역에서 시작됐던 인삼 재배는 어떻게, 왜 개성에서 뿌리를 내렸을까. 지은이는 개성이 1820~30년대 인삼 주산지로 각인된 원인으로 의주상인과의 협력관계, 홍삼을 제조하는 증포소의 이전, 개성 특유의 신용제도를 꼽는다. 개성의 ‘지방 출상인’들이 재배법을 들여왔고, 농사만으로는 생계유지가 어려웠던 개성의 자연조건 탓에 개성 사람들이 수익성 높은 인삼 재배에 매달렸던 것이 큰 이유라는 설명이다. 여기에 중개인을 두고 무담보 신용대출이 가능한 개성 특유의 시변 제도 덕분에 6년이란 재배 기간에 투여할 자금을 융통하기 쉬웠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원료인 수삼을 구입하는 데 편리함 등을 이유로 당초 한강 변에 있던 증포소를 개성으로 옮겨온 것도 큰 몫을 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주요 개성상인들의 면면

그렇다고 이 책이 딱딱하지만은 않다. 개성 지역의 교육계몽운동을 이끈 개성학회의 회장을 지낸 ‘인삼대왕’ 손봉성, 차인제도를 이용해 무역회사 등 다수 ‘기업’을 운영했던 공씨 일가, 격심한 정책 변화와 일본인 삼적蔘賊의 횡포에 치여 한때 최대 삼포민이었다가 몰락한 끝에 결국 죽음에 이른 강유주 등이 곳곳에서 흥미를 돋운다. 1910년대 말 중국, 타이완은 물론 멀리 남양까지 백삼을 수출했던 고려삼업사를 설립한 박우현이 일제를 무시할 수 없었던 재계 거물로서 “일선동화론에 대해 극히 동정을 표한다”해야 했던 고충은 또 어떤가.

이 중 가장 눈길을 끄는 인물은 개성인삼상회를 운영했던 백삼 전문 상인 최익모다. 그는 백삼 허리를 금띠로 감싸고, 영롱한 상표를 붙여 봉한 뒤 화인花印을 찍은 상자에 담아 고급화를 꾀한 마케팅의 귀재였다. 이미지가 좋지 않은 ‘송백삼’ 대신 ‘고려인삼’이라 이름 지은 것도 그였다니 알 만하지 않은가.

우리가 몰랐던 인삼의 굴곡진 역사

인삼업에 관해 정사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가치를 높인다. 1898년 조정의 삼업정책을 통괄하던 이용익이 인삼업을 관영화하려 하자 개성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다. ‘개성 민요’다. 이들은 “우리는 삼업에 의하지 않아도 선조의 제사를 끊이지 않을 수 있다”며 각자 소유한 인삼 종자를 모아 길에 뿌리거나 태워버렸다니 반발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나아가 인삼 농사를 다시 짓는 자는 화장하기로 결의까지 했단다.

일본인과 조선인 삼포주 간의 수삼 거래방식엔 화매和賣라는 것이 있었는데 착수금을 미리 주고 수확기에 잔금을 준 뒤 몰래 채굴해 가면 삼포주는 모르는 척 도난당했다고 신고하는 식이었다. 한데 일본인들이 이를 악용해 가짜 삼포주를 내세워 계약했다며 저가로 후려치거나 아예 삼적 100여 명이 병기를 들고 1,000칸 삼포를 도채盜採해 가기도 했다니 사업은 예나 지금이나 만만치 않은 듯하다.

19세기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150까지 150여 년의 인삼업 역사를 다각도로 꼼꼼하게 짚은 지은이는 일제강점기 때 수출량을 이미 19세기 중엽에 생산했음을 들어 인삼업이 근대산업으로 일찍이 자리 잡았다고 주장한다. 굳이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만을 근대산업의 기준으로 삼을 것은 아니란 이유에서다. 판단은 독자들이 할 일이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