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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는 본성인가 : 인종,인종주의자에 대한 오랜역사

동방박사님 2022. 10. 7.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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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인종은 없다. 인종'주의'만 있을 뿐이다.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미묘한 차별에서 홀로코스트의 참극에 이르기까지, 인종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인종은 어떤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는 걸까? 현대의 유전과학이 인종 구분의 비과학성을 여러 가지로 증명하고 있지만 인종주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책은 인종, 인종주의, 인종주의자에 대한 오랜 역사를 바탕으로, 허구의 인종 구분에 기반한 인종주의가 어떤 동력으로 유지되어 왔는지 살펴본다.

 

목차

머리말

1장 - 인종주의와 인종주의자
2장 - 어둠에 대한 공포: 인종주의의 기원
3장 - 과학적 인종주의, 민족 그리고 색깔의 정치학
4장 - 제국주의, 우생학, 홀로코스트
5장 - 과학적 인종주의는 정말 과학적일까?
6장 - 새로운 인종주의의 출현
7장 - 인종주의자들의 정체성
8장 - 제도적 인종주의를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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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자 : 알리 라탄시 Ali Rattansi
맨체스터대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런던 시티대학교 사회학과 방문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인종주의, 근대성, 정체성Racism, Modernity and Identity』(공저), 『‘인종’, 문화, 차이'Race', Culture and Difference』(공저), 『인종주의와 반인종주의: 불평등, 기회, 정책Inequalities, Opportunities and Policies』(공저), 『마르크...
 
역자 : 구정은
서울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했고, 문화일보를 거쳐 경향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천 가지 얼굴의 이슬람, 나의 이슬람』, 『세계의 신화』 등의 책을 번역했다.
 
 

출판사 리뷰

성찰하는 지식인의 필독서를 모토로 대안적 지식과 담론을 소개하는 ‘한겨레지식문고’의 신간이 나왔다. 신간 『인종주의는 본성인가 - 인종, 인종주의, 인종주의자에 대한 오랜 역사』는 아직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없는, 오히려 최근 더 부상하고 있는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미묘한 차별에서 홀로코스트의 참극에 이르기까지, 인종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인종은 어떤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는 걸까? 현대의 유전과학이 인종 구분의 비과학성을 여러 가지로 증명하고 있지만 인종주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책은 인종, 인종주의, 인종주의자에 대한 오랜 역사를 바탕으로, 허구의 인종 구분에 기반한 인종주의가 어떤 동력으로 유지되어 왔는지 살펴본다.

인종주의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했다?

많은 이들이 인종주의는 고대에서부터 인류와 함께해왔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사료를 찾아보면 이런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고대 이집트인이 남긴 예술품에는 이집트인과 이집트인이 아닌 사람이 구분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인은 자신들과 ‘야만인(barbarian)’을 구분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반감을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인들이 타 민족을 야만인으로 간주했다는 증거도 많다.
하지만 이런 사례에서 오늘날의 인종 개념의 연원을 찾는 것에는 무리가 따른다. 이집트의 예술작품에 옷차림이나 외모가 구분되어 나타났다고 해서 그것에 어떤 가치판단이 들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검은 피부로 그려졌던 누비아인들은 타고난 군사적 능력으로 당시에 인정을 받았다. 그리스인들인 barbarian이라 부른 야만인들은 사실 신체적 구분이라기보다는 단지 그리스어가 서툰 사람들을 나타낼 뿐이었다. 더듬거리며 barbar라는 소리밖에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보면 ‘그리스 혈통’은 운 좋게도 지리적 중간자 위치를 차지하여 기술과 지능 그리고 영혼을 지닐 수 있었고 그래서 다른 민족을 통치할 능력이 있다고 나온다. 역으로 생각하면 아시아인이나 북유럽인도 일정 기간 적당한 조건에서 살면 그리스에서와 같은 정치체제를 만들 수 있다는 함의가 있다. 점차적으로 그리스를 대체해간 로마제국에서 비로마인 출신이 집권하는 사례가 많은 것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여서 야만인들도 중국의 관습을 적절히 받아들이면 문명을 습득할 수 있다는 생각이 폭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중세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반감이 시간을 두고 조금씩 발전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을 살해한 자들’이라는 주장이 퍼져나갔고, 유월절에 어린이의 피를 뽑아 빵을 만들어 먹는다는 소문도 퍼졌다. 그리고 십자군 원정 이후 다양한 직업군에 종사하던 유대인들이 주로 고리대금업에 종사하게 되면서 탐욕의 이미지를 덮어쓰게 되었다. 중세와 근대 초기 유럽에서는 유대인 공동체를 겨냥한 군중들의 폭력 사태가 자주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오랜 기간에도 생물학적인 차별이 저질러졌다는 증거는 없다. ‘커다란 코’라든가 ‘못생긴 발’ 같은 유대인에 대한 전형적인 묘사들은 중세나 근대 초기까지만 해도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콜럼버스 이후 식민지를 만들어가는 시기에 낯선 존재들을 만나가면서 느낀 이중적 감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을 매력적인 이방인으로 생각하는 한 축과 원숭이에 가까운 금수로 보는 한 축이 있었는데 점점 후자 쪽으로 흐르게 된다. 여기에는 무척 많은 계기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주게 된다. 계몽의 시대를 풍미했던 합리성이 주로 분류학의 형태로 나타나면서 다양한 인종 구분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노예를 사고파는 과정도 편견이 고착화되는 데 큰 영향을 줬다. 그리고 민족국가의 형성으로 ‘민족’이라는 개념이 성장하면서 인종 개념과 복잡하게 얽히게 된다.
하지만 이런 외부 조건 못지않게 유럽 내부의 불안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민족주의가 자라나고 무너져가는 귀족적 위계질서에 대한 보수적인 반동이 나타나면서 이 두 가지가 결합돼 ‘내부의 인종주의’가 자라나는 비옥한 토양이 됐다. 인종은 계급, 젠더 등과 결합하면서 더 이상 ‘우월한 백인종과 열등한 다른 인종’이라는 단순란 공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양상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인종주의는 과학적이다?

네오나치 강경파 조직의 구성원이거나 극우파 집단의 일원이 아니라면, 오늘날에는 스스로 ‘인종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인종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조차도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인종이 존재하고, 과거의 인종주의자들이 생각한 인종과 오늘날의 인종 개념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합의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인류는 인종으로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프란츠 보아스가 20세기 초에 한 연구를 살펴보자. 그는 이탈리아계 이민자들과 유대계 이민자들의 두개골을 비교 연구하였는데, 이주자들의 환경이 달라지면 신체적으로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탈리아계와 유대계 사이의 차이보다 각 집단 내에서 이민 1세대와 2세대의 차이가 오히려 크게 나타난 것이다. 또한 보아스는 학생들과 함께 미군을 대상으로 IQ 검사 결과 분석해보았는데, 북부의 흑인들이 남부의 백인들보다 지능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뿐만 아니라 인류형질학적 연구와 가계도를 분석해보니 흑인과 백인의 혼합으로 태어난 ‘잡종’ 인구가 ‘순수 유럽계’로 알려진 사람들보다 오히려 인종적으로 더 동질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외에도 줄리언 헉슬리, 랜슬럿 호그벤 등에 의해 이미 1930년대에 인종 분류의 과학성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많이 입증되었다.

인종주의라는 유령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1960~70년대에 들어서면 인종차별을 철폐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이에 대한 입법조치들이 시작된다. 그 후 여러 조치들을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인종 구분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인종 차별’ 구분은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았다. 그러는 사이 1980년대에 이르면서 새로운 인종주의가 등장한다. 생물학적인 차원을 탈색시키고 문화적인 차이와 민족성의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종교적인 모습을 핵심기준으로 하는 이슬람 혐오증도 이런 범주다. 그리고 최근 이런 신인종주의에 기반한 극우정당들의 약진이 유럽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 국민전선의 르 펜을 비롯해 벨기에,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에서 이런 현상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렇지만 유권자들이 극우파 정당들을 밀어줬다는 것을, 곧바로 인종주의에 대한 지지로 해석할 수는 없다. 극우 정당의 인기는 일정 부분 사회 전반에 퍼진 반감과 저항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유럽에서 극우파가 되살아난 기폭제가 된 것은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등에서 온 ‘가난뱅이 유색 이주자들’이 유럽 국가들의 민족적 정체성과 번영을 위협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불쾌감이었다.
인종주의에 대한 그동안의 논의가 주로 인종주의적인 것과 인종주의가 아닌 것, 인종주의자와 인종주의자가 아닌 사람을 가르는 데 치중해왔다는 점은 뼈아픈 지점이다. 다차원적이고 복합적이라 모호하면서도 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인종주의 문제를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으로 구분하기 위해 접근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다. 인종주의와의 싸움에 걸림돌이 되는 함정 하나를 짚자면, 인종주의자를 일종의 ‘질병’에 걸린 환자처럼 바라보는 태도다. 그들을 생물학적으로 규정하고 병균처럼 취급하는 것은 인종주의자들이 소수 집단을 절멸시켜야할 기생충으로 여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인종주의는 비합리적인 일탈이 아니다. 인종주의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환경에서 성장했으며, 마치 인류 문화의 본질인 양 외피를 둘러쓰는 데 성공했다. 인종주의적 관점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의학이 아니라 문화적, 정치적인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인종주의를 정의내리는 것보다 인종주의 프레임을 깨트리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