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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자는 성서에 삶을 보람차게 하는 깊은 진리가 있음을 발견한다. 있을 것을 있게 하시는 영께서 강자들이 구축한 바벨탑에 짓밟혀서 아우성치는 무리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삼고, 새로운 내일을 찾아 구하고 문을 두드리는 자들을 통하여 환희에 찬 ‘생명문화공동체’를 이룩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성서의 첫 대목인 창세기와 출애굽기 그리고 갈릴래아 청년 예수의 삶과 선교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산업문화가 절정에 이르러 온갖 비극을 초래하는 오늘날, 그 가르침들은 새롭게 살아야 할 소망의 길을 제시해준다.
그리하여 저자는, 바로 오늘 이 ‘생명문화공동체운동’을 어떻게 재연시킬 것이냐를 생각해보자고 한다. 이 일을 위하여 기독교의 기본 틀을 그릇되게 잡은 바울 신학 및 그의 선교와, ‘생명문화공동체’를 창출한 갈릴래아 청년 예수의 삶과 선교를 비교하는 것이 이 책을 관통하는 큰 주제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바로 오늘 이 ‘생명문화공동체운동’을 어떻게 재연시킬 것이냐를 생각해보자고 한다. 이 일을 위하여 기독교의 기본 틀을 그릇되게 잡은 바울 신학 및 그의 선교와, ‘생명문화공동체’를 창출한 갈릴래아 청년 예수의 삶과 선교를 비교하는 것이 이 책을 관통하는 큰 주제이다.
목차
시작하는 말
첫째 마당: 마당 고르기
첫째 마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둘째 마디: 하느님 이해에 관한 두 개의 흐름
둘째 마당: 예수의 삶과 선교
첫째 마디: 갈릴래아의 구도자 예수
둘째 마디: 예수의 선교
셋째 마디: 하느님 나라 건설
넷째 마디: 예수의 마지막 결단과 당부
셋째 마당: 바울의 삶과 선교
첫째 마디: 사울이 바울이 되기까지
둘째 마디: 바울 신학에 대한 오해 풀기
셋째 마디: 바울의 선교
넷째 마디: 바울의 선교 과정
다섯째 마디: 바울의 선교 대상
여섯째 마디: 바울을 심려하게 한 문제들
일곱째 마디 : 바울의 마지막 인사
넷째 마당: 예수와 바울의 대조
다섯째 마당: 대망 공동체와 공권력의 쌍무곡(雙舞曲)
첫째 마디: 바울의 대망 공동체와 콘스탄티누스 대제
둘째 마디: 공권력으로 이룩된 공교회와 힘의 철학
셋째 마디: 개신교회와 공권력
넷째 마디: 한국 선교의 진상
다섯째 마디: 찬송가를 통한 선교사들의 신학
여섯째 마디: 분단된 한국과 기독교
여섯째 마당: 종교에서 생명문화공동체운동으로
첫째 마디: 새 술은 새 부대에
둘째 마디: 생명문화공동체를 위한 교육-성서적 입장에서
맺는 말: 새 술은 새 부대에
첫째 마당: 마당 고르기
첫째 마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둘째 마디: 하느님 이해에 관한 두 개의 흐름
둘째 마당: 예수의 삶과 선교
첫째 마디: 갈릴래아의 구도자 예수
둘째 마디: 예수의 선교
셋째 마디: 하느님 나라 건설
넷째 마디: 예수의 마지막 결단과 당부
셋째 마당: 바울의 삶과 선교
첫째 마디: 사울이 바울이 되기까지
둘째 마디: 바울 신학에 대한 오해 풀기
셋째 마디: 바울의 선교
넷째 마디: 바울의 선교 과정
다섯째 마디: 바울의 선교 대상
여섯째 마디: 바울을 심려하게 한 문제들
일곱째 마디 : 바울의 마지막 인사
넷째 마당: 예수와 바울의 대조
다섯째 마당: 대망 공동체와 공권력의 쌍무곡(雙舞曲)
첫째 마디: 바울의 대망 공동체와 콘스탄티누스 대제
둘째 마디: 공권력으로 이룩된 공교회와 힘의 철학
셋째 마디: 개신교회와 공권력
넷째 마디: 한국 선교의 진상
다섯째 마디: 찬송가를 통한 선교사들의 신학
여섯째 마디: 분단된 한국과 기독교
여섯째 마당: 종교에서 생명문화공동체운동으로
첫째 마디: 새 술은 새 부대에
둘째 마디: 생명문화공동체를 위한 교육-성서적 입장에서
맺는 말: 새 술은 새 부대에
책 속으로
필자가 전공한 것은 성서학이 아니라 교육학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 성서를 공부하기는 했으니 교육학적인 측면에서 성서를 이해해보려 한다. 교육학적 관심의 초점은 생명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에 바람직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그 과제로 삼고 있다. 따라서 언제나 삶을 주시한다. 그리고 역사를 주시한다. 무엇이 삶을 해치는지, 어떻게 해야 삶을 새롭게 할 수 있을지를 항상 추구한다. 성서의 관심도 역시 초점은 생명이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예수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생명을 창조하신 야훼의 관심사도 약자를 도와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생명문화공동체’를 이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서를 읽는 과정에서도 무엇이 삶을 해치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삶을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인지를 항상 추구해야 한다. 생명은 교육학과 성서의 공통된 관심사이다.
교육학에서는 삶에 변화를 초래하는 것을 경험이라고 본다. 삶을 해치는 것도, 삶을 재생시키고 피어나게 하는 것도 우리가 겪는 경험이다. 사람[生徒]을 돕는 길이란 사랑으로 삶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수용하면서 행동과 말로써 이롭게 하는 일이다. 어떤 법과 제도를 설정해놓고 그것을 절대화하여 강요하는 것은 삶을 새롭게 할 수 없다. 율법의 무용화가 바로 그 까닭이다.
---「시작하는 말」중에서
여기서 또 한 가지 밝혀야 할 것이 있다. 있을 것을 있게 하시는 야훼 하느님은 어느 한 민족만을 그의 선민으로 삼으시는 편협한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모든 민족이 서로 축복하면서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세 번째 약속도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민족들이 서로 축복하면서 사는 생명공동체를 이룩하라는 것이었다. 출애굽 공동체도 다민족 공동체였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그곳에 있는 ‘하비루’들과 더불어 야훼를 섬기는 평화공동체를 이루었다. 따라서 어느 민족이나 모두 그들 속에는 하느님의 생명의 영이 있어서, 악을 악으로 보고 새 내일을 찾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하느님은 그들의 영과도 기화하여 새 내일을 창출하게 하시는 분이다.
……
따라서 출애굽 공동체는 왕을 가지지 않고, 출애굽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판관들의 지도하에 생명 사랑의 정신으로 살았다. 판관 기드온이 용맹하게 공동체를 수호하자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모시려 했다. 기드온은 이를 거부하면서 야훼 하느님 외에 어느 누구도 왕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언명했다(판 8: 22~23).
---「첫째 마당: 마당 고르기」중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그는 하느님이 예수를 부활시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신이라고 하는 로마황제의 세력이 정치범으로 몰아 십자가에 처형한 예수를 하느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믿은 것이다. 이 놀라운 사건이 바울의 생각을 사로잡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당시 그의 마음을 괴롭혔던 것은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였다. 로마황제는 스스로 평화의 신이라고 자처하며 갖은 폭압을 일삼았다. 신이신 그는 무엇이나 해도 좋다며 다른 나라들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아 혹사했다. 그 폭압이 너무나 비참했다. 그랬던 그가 십자가에 처형한 예수를, 하느님이 다시 살리신 것이 아닌가?
바울은 이 질문을 가지고 아라비아로 간 것이다. 그곳에서 이 문제와 씨름을 하고 그의 신학을 조성했다. ……
이런 신학을 구성하는 데 틀을 준 것은 메시아사상의 변형인 계시록 사상이었다. 계시록 사상에 따르면 역사의 주이신 야훼 하느님은 얼마 동안 이 세상 통치자들에게 권한을 주어 다스리게 하신다. 그러나 때가 이르면 자신의 종을 보내어 이 세상 권력들을 정리하고 역사를 자신에게로 돌리신다는 것이다. 이제 때가 이르자, 하느님은 그의 의로운 경륜대로 그의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어 로마의 형틀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시고, 그를 부활하게 하시어 그의 거룩한 경륜을 이룩하시려는 것이라고 바울은 확신했다. 따라서 그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외에는 다른 것은 알 필요가 없었다고 거듭 말했다. 그는 아무와도 의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셋째 마당-바울의 삶과 선교」중에서
바울은 자신이 믿는 복음을 철저히 말로 전했다. ……그러나 아래에서 더 설명을 하겠지만, 그가 전도한 교회들에서 갖가지 문제가 일어나 바울을 괴롭혔다. 왜 그랬는가? 그가 말로 전한 복음은 복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윗 왕조가 야훼를 다윗의 수호신이라고 한 주장을 그대로 믿었다. 그리고 로마제국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메시아라고 확신했다. 야훼 하느님이 그를 다시 살리시어 그의 오른편에 앉아 있게 하시다가 때가 이르면 다시 세상으로 보내어 이 세상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실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다윗 왕조의 망상에 불과하였다. 그런 조작된 이념이 좋은 열매를 맺을 리가 없다.
---「셋째 마당-바울의 삶과 선교」중에서
사실 예수가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동등한 분이라는 것을 현대인이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는가? 그가 하느님과 같이 계시다가 다시 오시어 이 세상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이룩하신다는 것 역시 어찌 믿을 수 있는가? 무려 200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 말이다. 이것은 기원후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교회의 신조로 결정된 것인데, 그것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압력을 넣어 그렇게 결정되었다. 이에 반대하는 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데도 말이다.
왜 이런 사고가 형성되었나? 무엇이 이런 생각을 조성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바울이 신봉하고 있던 다윗 왕조의 메시아사상이다. 제2이사야를 위시한 많은 예언자들이 야훼 하느님은 다윗의 후손 중에서 메시아를 보내어 다윗 왕국을 재건하실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것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눈이 땅을 적시어 오곡백과를 열리게 하고야 마는 것처럼 틀림없다고 선언하였다.
---「셋째 마당-바울의 삶과 선교」중에서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을 가장 중요시 한다. 이것이 신앙인의 자세라고 한다. 이 역시 예수가 삶을 대하는 자세와 다르다. 바울은 예수가 하느님의 독생자로서 우리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나 하느님이 그를 살리시어 그를 믿는 자의 구주가 되게 하신다고 믿는 것이다. 소망이란 그런 예수가 언젠가 이 세상에 재림하여 메시아왕국을 이룩할 것을 바라는 소망이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형제자매들 사이의 사랑을 강조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메시아사상을 강력히 거부하셨다. 메시아사상 자체도 부정하셨다. 그가 믿은 것은 있을 것을 있게 하시는 야훼 하느님이 한 많은 떠돌이들을 깨우치시어 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 위에서 이룩되게 하실 것을 믿었다. 그리고 자신을 다 던져서 떠돌이들을 깨우치시어 생명문화공동체의 주역이 되게 하셨다. 참된 생명의 길을 찾으면서도 다윗 왕조의 그릇된 문화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을 위해 예루살렘의 대사제들에게 도전함으로 십자가에 달리시어 많은 사람들을 깨우치는 각성교육까지 단행하시었다. 그럼으로써 예수가 사시고 가르치신 길만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믿게 하셨다. 에덴동산의 재연을 바라면서 그의 뒤를 따르게 하셨다.
교육학에서는 삶에 변화를 초래하는 것을 경험이라고 본다. 삶을 해치는 것도, 삶을 재생시키고 피어나게 하는 것도 우리가 겪는 경험이다. 사람[生徒]을 돕는 길이란 사랑으로 삶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수용하면서 행동과 말로써 이롭게 하는 일이다. 어떤 법과 제도를 설정해놓고 그것을 절대화하여 강요하는 것은 삶을 새롭게 할 수 없다. 율법의 무용화가 바로 그 까닭이다.
---「시작하는 말」중에서
여기서 또 한 가지 밝혀야 할 것이 있다. 있을 것을 있게 하시는 야훼 하느님은 어느 한 민족만을 그의 선민으로 삼으시는 편협한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모든 민족이 서로 축복하면서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세 번째 약속도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민족들이 서로 축복하면서 사는 생명공동체를 이룩하라는 것이었다. 출애굽 공동체도 다민족 공동체였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그곳에 있는 ‘하비루’들과 더불어 야훼를 섬기는 평화공동체를 이루었다. 따라서 어느 민족이나 모두 그들 속에는 하느님의 생명의 영이 있어서, 악을 악으로 보고 새 내일을 찾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하느님은 그들의 영과도 기화하여 새 내일을 창출하게 하시는 분이다.
……
따라서 출애굽 공동체는 왕을 가지지 않고, 출애굽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판관들의 지도하에 생명 사랑의 정신으로 살았다. 판관 기드온이 용맹하게 공동체를 수호하자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모시려 했다. 기드온은 이를 거부하면서 야훼 하느님 외에 어느 누구도 왕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언명했다(판 8: 22~23).
---「첫째 마당: 마당 고르기」중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그는 하느님이 예수를 부활시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신이라고 하는 로마황제의 세력이 정치범으로 몰아 십자가에 처형한 예수를 하느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믿은 것이다. 이 놀라운 사건이 바울의 생각을 사로잡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당시 그의 마음을 괴롭혔던 것은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였다. 로마황제는 스스로 평화의 신이라고 자처하며 갖은 폭압을 일삼았다. 신이신 그는 무엇이나 해도 좋다며 다른 나라들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아 혹사했다. 그 폭압이 너무나 비참했다. 그랬던 그가 십자가에 처형한 예수를, 하느님이 다시 살리신 것이 아닌가?
바울은 이 질문을 가지고 아라비아로 간 것이다. 그곳에서 이 문제와 씨름을 하고 그의 신학을 조성했다. ……
이런 신학을 구성하는 데 틀을 준 것은 메시아사상의 변형인 계시록 사상이었다. 계시록 사상에 따르면 역사의 주이신 야훼 하느님은 얼마 동안 이 세상 통치자들에게 권한을 주어 다스리게 하신다. 그러나 때가 이르면 자신의 종을 보내어 이 세상 권력들을 정리하고 역사를 자신에게로 돌리신다는 것이다. 이제 때가 이르자, 하느님은 그의 의로운 경륜대로 그의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어 로마의 형틀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시고, 그를 부활하게 하시어 그의 거룩한 경륜을 이룩하시려는 것이라고 바울은 확신했다. 따라서 그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외에는 다른 것은 알 필요가 없었다고 거듭 말했다. 그는 아무와도 의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셋째 마당-바울의 삶과 선교」중에서
바울은 자신이 믿는 복음을 철저히 말로 전했다. ……그러나 아래에서 더 설명을 하겠지만, 그가 전도한 교회들에서 갖가지 문제가 일어나 바울을 괴롭혔다. 왜 그랬는가? 그가 말로 전한 복음은 복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윗 왕조가 야훼를 다윗의 수호신이라고 한 주장을 그대로 믿었다. 그리고 로마제국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메시아라고 확신했다. 야훼 하느님이 그를 다시 살리시어 그의 오른편에 앉아 있게 하시다가 때가 이르면 다시 세상으로 보내어 이 세상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실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다윗 왕조의 망상에 불과하였다. 그런 조작된 이념이 좋은 열매를 맺을 리가 없다.
---「셋째 마당-바울의 삶과 선교」중에서
사실 예수가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동등한 분이라는 것을 현대인이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는가? 그가 하느님과 같이 계시다가 다시 오시어 이 세상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이룩하신다는 것 역시 어찌 믿을 수 있는가? 무려 200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 말이다. 이것은 기원후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교회의 신조로 결정된 것인데, 그것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압력을 넣어 그렇게 결정되었다. 이에 반대하는 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데도 말이다.
왜 이런 사고가 형성되었나? 무엇이 이런 생각을 조성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바울이 신봉하고 있던 다윗 왕조의 메시아사상이다. 제2이사야를 위시한 많은 예언자들이 야훼 하느님은 다윗의 후손 중에서 메시아를 보내어 다윗 왕국을 재건하실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것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눈이 땅을 적시어 오곡백과를 열리게 하고야 마는 것처럼 틀림없다고 선언하였다.
---「셋째 마당-바울의 삶과 선교」중에서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을 가장 중요시 한다. 이것이 신앙인의 자세라고 한다. 이 역시 예수가 삶을 대하는 자세와 다르다. 바울은 예수가 하느님의 독생자로서 우리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나 하느님이 그를 살리시어 그를 믿는 자의 구주가 되게 하신다고 믿는 것이다. 소망이란 그런 예수가 언젠가 이 세상에 재림하여 메시아왕국을 이룩할 것을 바라는 소망이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형제자매들 사이의 사랑을 강조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메시아사상을 강력히 거부하셨다. 메시아사상 자체도 부정하셨다. 그가 믿은 것은 있을 것을 있게 하시는 야훼 하느님이 한 많은 떠돌이들을 깨우치시어 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 위에서 이룩되게 하실 것을 믿었다. 그리고 자신을 다 던져서 떠돌이들을 깨우치시어 생명문화공동체의 주역이 되게 하셨다. 참된 생명의 길을 찾으면서도 다윗 왕조의 그릇된 문화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을 위해 예루살렘의 대사제들에게 도전함으로 십자가에 달리시어 많은 사람들을 깨우치는 각성교육까지 단행하시었다. 그럼으로써 예수가 사시고 가르치신 길만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믿게 하셨다. 에덴동산의 재연을 바라면서 그의 뒤를 따르게 하셨다.
---「넷째 마당: 예수와 바울의 대조」중에서
출판사 리뷰
바울의 신학 안에 갈릴래아 청년 예수는 없다
제2성서 27개 텍스트 가운데 13개가 바울의 이름으로 된 문서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학의 큰 흐름은 바울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울 신학에 대한 연구가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 되는 만큼, 주석적, 역사적, 현장 신학적 관점 등 다양한 시각에서 각각 바울 신학을 비판하려는 시도들도 있었다. 한편 그러한 바울 신학에 대한 비판을 비판하는 관점에서 바울을 재해석하고 바울의 메시지에 대한 바른 시각을 새로이 세워보려는 움직임도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즉, 역사적 그리스도교 안에서 바울 신학을 비판하는 관점과 역사적 그리스도교의 해석에 의해 바울의 진의가 왜곡되었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려는 움직임이 유기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비판이든 수용이든, 또는 비판적 수용이든, 기독교 교리를 논함에 있어 바울 신학에 관해 재해석해보려는 시도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렇듯 바울 신학에 대한 각양의 시각들이 대두되는 가운데, 저자 문동환은 바울 신학에 앞서 바울이라는 인물이 품고 있던 사상의 근본부터 지적해 비판한다. 저자는 우선 바울이 천착하여 설파한 메시아사상과 그 근저에 자리한 민족주의적인 야망에 주목한다. 저자의 시각에서, 바울이 추구하던 메시아사상은 유대인의 유일신 야훼가 자신의 선민을 위해 적극적으로 역사에 개입한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즉, 유대민족은 야훼의 의지로 이 세상에 왕림한 메시아를 구원자로 삼아 로마의 압제를 이겨내고, 이러한 울타리 안에 이방인들까지 포섭해 이로써 다윗 왕조의 문화를 그대로 복원하고 계승, 전파하게 된다는 것이 그 골자인 것이다.
저자는 바울의 이러한 메시아사상은 갈릴래아 청년 예수가 찾으려던 참된 생명의 길과는 정반대의 목표를 안고 있다는 점, 혁명가 예수가 부수어내고 폐기하려던 강자의 논리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바울은 예수를 다윗 왕조가 조작한 메시아로 보았으며, 이러한 바울이 추구하던 세상과 예수가 만들어 전파하고자 했던 가치는 과정에서 목표까지, 극과 극이라 할 정도로 먼 거리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의 기본 틀을 애초부터 그릇되게 잡은 바울 신학은 2000년 넘게 기독교를 장악해, 전 세계를 힘의 논리로 구성하는 데 사상적 기여를 하고 말았다는 것이, 바울 신학이 지닌 씻을 수 없는 죄과라고 주장한다.
바울과 예수의 삶부터 설파하려던 복음의 의미와 목적, 십자가에 대한 이해, 그들이 조성한 공동체, 또 두 선교자가 창출해낸 문화의 다른 점을 대조해 보임으로써 바울 신학이 예수의 본뜻을 얼마나 훼손하고 오도하였는지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을 관통하는 큰 주제다.
이 일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저자는 이야기를 여섯 마당으로 나누어 풀어낸다.
첫째 마당에서는 우선,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때부터 예수 당시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개관을 살펴본다. 또 바울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친 계시록 사상과 예수 당시의 로마제국을 함께 들여다보며 메시아사상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를 짚어본다.
둘째 마당에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참된 삶의 길을 찾은 구도자, 갈릴래아 청년 예수의 삶과 선교를 깊이 살펴본다.
셋째 마당에서는 바울의 삶과 선교를 논한다. 여기서는 주로 바울의 메시아사상이 어떠한 것인지와 함께,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신으로 모시는 신학이 사용한 용어들을 역이용하여 자신의 신학 논리를 구성한 과정을 본다.
넷째 마당에서는 예수의 삶과 선교, 그리고 바울이 전한 복음과 선교를 비교하여 두 선교자가 어떻게 다른지를 명확히 제시한다. 둘의 사상은 사랑을 강조한 점이라든지 믿음, 소망, 사랑을 공동체 삶의 원칙으로 삼으라고 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런 점들을 두 선교자의 기본적인 삶과 사고의 틀에서 해석해보면 그 내용은 판이하다.
다섯째 마당에서는 바울이 오도한 ‘대망 공동체’가 로마제국을 비롯한 이 세상의 권력과 손잡고 연주한 죽음의 쌍무곡(雙舞曲)을 파헤친다. 먼저 로마제국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도와서 조성된 공교회의 쌍무곡을 살펴보고,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뱅이 어떻게 이 세상 권력과 서로 도우면서 공존했는지 살핀다. 그런 다음 식민지 국가들과 교회의 선교사들이 어떻게 서로 발맞추어 세력을 확대해 갔는지 언급하고 식민지주의 패권국인 영국과 미국이 어떻게 하느님을 오용했는지를 들여다본다.
마지막 맺는 마당에서는 예수가 구축하고자 했던 참된 목표이자 오늘날 세계 방방곡곡에서 일어나는 ‘생명문화공동체운동’을 예로 들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제2성서 27개 텍스트 가운데 13개가 바울의 이름으로 된 문서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학의 큰 흐름은 바울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울 신학에 대한 연구가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 되는 만큼, 주석적, 역사적, 현장 신학적 관점 등 다양한 시각에서 각각 바울 신학을 비판하려는 시도들도 있었다. 한편 그러한 바울 신학에 대한 비판을 비판하는 관점에서 바울을 재해석하고 바울의 메시지에 대한 바른 시각을 새로이 세워보려는 움직임도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즉, 역사적 그리스도교 안에서 바울 신학을 비판하는 관점과 역사적 그리스도교의 해석에 의해 바울의 진의가 왜곡되었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려는 움직임이 유기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비판이든 수용이든, 또는 비판적 수용이든, 기독교 교리를 논함에 있어 바울 신학에 관해 재해석해보려는 시도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렇듯 바울 신학에 대한 각양의 시각들이 대두되는 가운데, 저자 문동환은 바울 신학에 앞서 바울이라는 인물이 품고 있던 사상의 근본부터 지적해 비판한다. 저자는 우선 바울이 천착하여 설파한 메시아사상과 그 근저에 자리한 민족주의적인 야망에 주목한다. 저자의 시각에서, 바울이 추구하던 메시아사상은 유대인의 유일신 야훼가 자신의 선민을 위해 적극적으로 역사에 개입한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즉, 유대민족은 야훼의 의지로 이 세상에 왕림한 메시아를 구원자로 삼아 로마의 압제를 이겨내고, 이러한 울타리 안에 이방인들까지 포섭해 이로써 다윗 왕조의 문화를 그대로 복원하고 계승, 전파하게 된다는 것이 그 골자인 것이다.
저자는 바울의 이러한 메시아사상은 갈릴래아 청년 예수가 찾으려던 참된 생명의 길과는 정반대의 목표를 안고 있다는 점, 혁명가 예수가 부수어내고 폐기하려던 강자의 논리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바울은 예수를 다윗 왕조가 조작한 메시아로 보았으며, 이러한 바울이 추구하던 세상과 예수가 만들어 전파하고자 했던 가치는 과정에서 목표까지, 극과 극이라 할 정도로 먼 거리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의 기본 틀을 애초부터 그릇되게 잡은 바울 신학은 2000년 넘게 기독교를 장악해, 전 세계를 힘의 논리로 구성하는 데 사상적 기여를 하고 말았다는 것이, 바울 신학이 지닌 씻을 수 없는 죄과라고 주장한다.
바울과 예수의 삶부터 설파하려던 복음의 의미와 목적, 십자가에 대한 이해, 그들이 조성한 공동체, 또 두 선교자가 창출해낸 문화의 다른 점을 대조해 보임으로써 바울 신학이 예수의 본뜻을 얼마나 훼손하고 오도하였는지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을 관통하는 큰 주제다.
이 일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저자는 이야기를 여섯 마당으로 나누어 풀어낸다.
첫째 마당에서는 우선,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때부터 예수 당시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개관을 살펴본다. 또 바울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친 계시록 사상과 예수 당시의 로마제국을 함께 들여다보며 메시아사상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를 짚어본다.
둘째 마당에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참된 삶의 길을 찾은 구도자, 갈릴래아 청년 예수의 삶과 선교를 깊이 살펴본다.
셋째 마당에서는 바울의 삶과 선교를 논한다. 여기서는 주로 바울의 메시아사상이 어떠한 것인지와 함께,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신으로 모시는 신학이 사용한 용어들을 역이용하여 자신의 신학 논리를 구성한 과정을 본다.
넷째 마당에서는 예수의 삶과 선교, 그리고 바울이 전한 복음과 선교를 비교하여 두 선교자가 어떻게 다른지를 명확히 제시한다. 둘의 사상은 사랑을 강조한 점이라든지 믿음, 소망, 사랑을 공동체 삶의 원칙으로 삼으라고 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런 점들을 두 선교자의 기본적인 삶과 사고의 틀에서 해석해보면 그 내용은 판이하다.
다섯째 마당에서는 바울이 오도한 ‘대망 공동체’가 로마제국을 비롯한 이 세상의 권력과 손잡고 연주한 죽음의 쌍무곡(雙舞曲)을 파헤친다. 먼저 로마제국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도와서 조성된 공교회의 쌍무곡을 살펴보고,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뱅이 어떻게 이 세상 권력과 서로 도우면서 공존했는지 살핀다. 그런 다음 식민지 국가들과 교회의 선교사들이 어떻게 서로 발맞추어 세력을 확대해 갔는지 언급하고 식민지주의 패권국인 영국과 미국이 어떻게 하느님을 오용했는지를 들여다본다.
마지막 맺는 마당에서는 예수가 구축하고자 했던 참된 목표이자 오늘날 세계 방방곡곡에서 일어나는 ‘생명문화공동체운동’을 예로 들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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