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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인도의 사상가이자 행동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그의 사상과 지성의 역사, 사회사를 집대성한 비판적 평전
역사는 변화한다. 정신도, 지성도, 사상도, 사회도, 문화도, 문명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이 책은 간디에 대해서도 ‘불변의 위대한 인물’이라는 종래의 관점으로 바라보기를 거부한다. 우리가 흔히 간디를 말할 때 사용하는 ‘마하트마(Mahatma)’라는 호칭은 그의 이름의 일부가 아니라 ‘성자’라는 뜻의 존칭이다. 간디의 평전을 쓴 요게시 차다(Yogesh Chadha, 1934~)는 그 호칭이 도리어 그의 진정한 인격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이 책은 간디를 성자가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조명한다. 그것은 그의 약점이나 문제점도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 책은 간디의 지성사이자 사상사, 사회사로서 쓰였다. 간디의 사상이 사회 변화에 대응하여 변하여 온 과정을 살피며 그의 역사를 여러 측면에서 조명하되, 그것 또한 변화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우리가 사상가 간디에게 배울 점은 무엇보다도 이의 제기와 비판 정신에 있다. 간디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으며, 특히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를 극도로 경계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디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그에 대한 종래의 비판과 비교적 최근에 제기된 비판까지 다각도로 검토하고 공정하게 판단하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관점이다. 특히 최근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 1935~)와 인도 공산당 등이 제기한 비판에 대해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비판적 간디 평전’이다.
간디는 비폭력을 주장했지만 비겁한 자들의 비폭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공장이나 회사에서의 노동 파업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영국의 세계 지배라는 거대한 ‘역사적 과업’과 나아가 ‘근대 서양 문명’이라는 것 자체를 파업하자고 외쳤다. 그 파업의 수단은 ‘사티아그라하’였다. 그가 파업을 주장한 이유는 그때 그 사람이 진정으로 두려움이 없어져 남들은 불가능할 정도의 자유를 누리는 까닭이다. 마음에서 공포가 제거되면 타인의 노예가 되는 것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파업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독립인임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국가나 정부는 물론, 사회나 가족에 대해서도 대항할 수 있게 한다. 그처럼 자유로운 개인이야말로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사회를 창조하는 ‘자치’를 할 수 있다. 간디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자치하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그의 사상과 지성의 역사, 사회사를 집대성한 비판적 평전
역사는 변화한다. 정신도, 지성도, 사상도, 사회도, 문화도, 문명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이 책은 간디에 대해서도 ‘불변의 위대한 인물’이라는 종래의 관점으로 바라보기를 거부한다. 우리가 흔히 간디를 말할 때 사용하는 ‘마하트마(Mahatma)’라는 호칭은 그의 이름의 일부가 아니라 ‘성자’라는 뜻의 존칭이다. 간디의 평전을 쓴 요게시 차다(Yogesh Chadha, 1934~)는 그 호칭이 도리어 그의 진정한 인격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이 책은 간디를 성자가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조명한다. 그것은 그의 약점이나 문제점도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 책은 간디의 지성사이자 사상사, 사회사로서 쓰였다. 간디의 사상이 사회 변화에 대응하여 변하여 온 과정을 살피며 그의 역사를 여러 측면에서 조명하되, 그것 또한 변화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우리가 사상가 간디에게 배울 점은 무엇보다도 이의 제기와 비판 정신에 있다. 간디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으며, 특히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를 극도로 경계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디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그에 대한 종래의 비판과 비교적 최근에 제기된 비판까지 다각도로 검토하고 공정하게 판단하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관점이다. 특히 최근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 1935~)와 인도 공산당 등이 제기한 비판에 대해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비판적 간디 평전’이다.
간디는 비폭력을 주장했지만 비겁한 자들의 비폭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공장이나 회사에서의 노동 파업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영국의 세계 지배라는 거대한 ‘역사적 과업’과 나아가 ‘근대 서양 문명’이라는 것 자체를 파업하자고 외쳤다. 그 파업의 수단은 ‘사티아그라하’였다. 그가 파업을 주장한 이유는 그때 그 사람이 진정으로 두려움이 없어져 남들은 불가능할 정도의 자유를 누리는 까닭이다. 마음에서 공포가 제거되면 타인의 노예가 되는 것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파업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독립인임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국가나 정부는 물론, 사회나 가족에 대해서도 대항할 수 있게 한다. 그처럼 자유로운 개인이야말로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사회를 창조하는 ‘자치’를 할 수 있다. 간디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자치하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목차
머리말
일러두기
1부 간디 안내
1. 나는 왜 이 책을 쓰는가? | 2. 간디를 알기 위한 인도 소개 | 3. 간디 부교재
2부 식민지 인도에서 자라다(1869~1888)
1. 세포이 항쟁 | 2. 포르반다르의 유아 시절 | 3. 라지코트의 학창 시절
3부 제국에서 배우다(1888~1891)
1. 런던 유학 시절 | 2. ‘채식주의자’ 간디 | 3. ‘종교인’ 간디
4부 남아프리카에서 서다(1891~1901)
1. 남아프리카로 가다 | 2. ‘인도인’ 간디 | 3. ‘사회운동가’ 간디 | 4. ‘군인’ 간디 | 5. ‘언론인’ 간디 | 6. ‘사회인’ 간디
5부 ‘사티아그라하’로 싸우다(1906~1915)
1. ‘민족주의자’ 간디 | 2. ‘톨스토이주의자’ 간디 | 3. ‘사상가’ 간디 | 4. ‘농민’ 간디 | 5. ‘승리자’ 간디
6부 인도에서 싸우다(1915~1928)
1. 인도로 돌아오다 | 2. ‘수도인’ 간디 | 3. 사티아그라하의 시작 | 4. 시행착오 | 5. 물레 | 6. 『바가바드 기타』 | 7. 세계의 간디
7부 완전 독립을 향해(1928~1939)
1. ‘순례자’ 간디 | 2. ‘고독자’ 간디 | 3. 카스트 문제 | 4. 세바그램 아슈람
8부 인도, 독립하다(1939~1948)
1. 전쟁 | 2. 인도의 분열 | 3. 마지막 단식 | 4. 인도가 간디를 죽였다
꼬리말: 지금 우리에게 간디는? _ 509
간디 연보 _ 525
일러두기
1부 간디 안내
1. 나는 왜 이 책을 쓰는가? | 2. 간디를 알기 위한 인도 소개 | 3. 간디 부교재
2부 식민지 인도에서 자라다(1869~1888)
1. 세포이 항쟁 | 2. 포르반다르의 유아 시절 | 3. 라지코트의 학창 시절
3부 제국에서 배우다(1888~1891)
1. 런던 유학 시절 | 2. ‘채식주의자’ 간디 | 3. ‘종교인’ 간디
4부 남아프리카에서 서다(1891~1901)
1. 남아프리카로 가다 | 2. ‘인도인’ 간디 | 3. ‘사회운동가’ 간디 | 4. ‘군인’ 간디 | 5. ‘언론인’ 간디 | 6. ‘사회인’ 간디
5부 ‘사티아그라하’로 싸우다(1906~1915)
1. ‘민족주의자’ 간디 | 2. ‘톨스토이주의자’ 간디 | 3. ‘사상가’ 간디 | 4. ‘농민’ 간디 | 5. ‘승리자’ 간디
6부 인도에서 싸우다(1915~1928)
1. 인도로 돌아오다 | 2. ‘수도인’ 간디 | 3. 사티아그라하의 시작 | 4. 시행착오 | 5. 물레 | 6. 『바가바드 기타』 | 7. 세계의 간디
7부 완전 독립을 향해(1928~1939)
1. ‘순례자’ 간디 | 2. ‘고독자’ 간디 | 3. 카스트 문제 | 4. 세바그램 아슈람
8부 인도, 독립하다(1939~1948)
1. 전쟁 | 2. 인도의 분열 | 3. 마지막 단식 | 4. 인도가 간디를 죽였다
꼬리말: 지금 우리에게 간디는? _ 509
간디 연보 _ 525
책 속으로
간디의 소년 시절은 인도 사회의 계층화가 진행되고, 거의 변화가 없는 고정된 사회를 향한 전통화가 진행된 시기였다. 그것은 철도 부설에 따른 환금 작물의 급속한 확대가 지방의 권력구조를 바꾸고 부유한 상인들이 수소 보호, 사회 개혁, 사원 제사 등을 후원하여 진행된 전통 회귀적인 힌두 개혁을 수반했다. 가령 간디와 같은 카티아와르 출신 산야시 다야난드 사라스와티(Sannyasi Dayanand Saraswati, 1824~1883)가 1857년에 창설한 아리아 사마지(Arya Samaj)는 기독교의 영향하에 프로테스탄티즘적인 힌두교 개혁을 도모했다. 그러나 간디는 더욱 다원적인 힌두교를 지향했다.
---「라지코트의 학창 시절」중에서
영국인 지주 제도는 협동 생활과 공동 참여라는 지역 공동체의 특성을 깨뜨렸고 봉사자와 기능의 협동 체제를 사라지게 했다. 본래 인도의 전통적 재판은 판차야트에 의한 것으로 빠르고 효과적이며 경비가 쌌다. 그것은 정의의 사랑과 공정한 운영을 조성했고, 진실을 말하는 습관을 격려했다. 그곳에 영국인이 세운 사법 조직은 부적당하고 모호하며 현학적이었다. 유럽인 재판관과 치안판사는 배타적이었다. 그들은 언어도, 국민의 관습과 감정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라지코트의 학창 시절」중에서
피셔는 간디가 영국 신사 흉내를 낸 것을 두고 그가 언제나 주위와 조화를 이루고자 노력한 탓이라고 했다. 수십 년 뒤 옷 대신 천 조각을 걸친 이유는 수천만 명의 인도 농민들은 그 정도로 입고 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런던에서 간디는 그런 조화를 곧 포기했다. 참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 비 조각을 걸치는 것은 참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평생을 그렇게 지냈다. 한편 영국에서는 물론이고 남아프리카에 가서도 양복 차림은 그대로 유지했다. 그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런던 유학 시절」중에서
영국 생활을 하며 가장 힘든 것은 식사였다. 영국의 친지들은 간디에게 육식을 권했으나 그는 어머니에게 했던 맹세를 굳게 지켰다. 런던으로 오는 배 안에서 만난 영국인도 런던에서는 건강을 위해 반드시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말했으나 듣지 않았다. 런던에서는 슈클라도 그에게 육식을 권했으나 거부했다.
---「‘채식주의자’ 간디」중에서
간디는 계급의 의무와 살육을 요구하는 신의 부름이 『바가바드 기타』에 대한 힌두교의 정통 해석임을 알고 불쾌해했다. 심지어 1888~1889년 런던에서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 그는 그것을 비유라고 불렀다. 즉 전장은 인간의 마음을 상징하고, 아르주나는 악과 싸우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종교인’ 간디」중에서
『자서전』 2부에서 간디는 뭄바이에서 맡은 최초의 소송에 실패한 뒤 라지코트로 가서 대서소 업무 같은 것을 할 때 ‘일생 최초의 충격’을 받은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앞에 다른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을 경험한 뒤 뭄바이로 가서 인도에서 변호사업을 할 수 있도록 법원에 등록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간디가 ‘일생 최초의 충격을 받은 사건’부터 설명할 필요가 있다. (…) 이 사건은 단순히 주재관과 간디 두 사람의 개인적인 성격이 충돌한 것이 아니라, 지배국과 식민지라는 관계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당시 인도 청년들은 영국에서 좋은 학교를 다녀 일정한 자격을 갖추면 영국인처럼 출세하고 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리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간디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식민지 현실에서 그들은 좌절했다. 인도인이 런던에서 영국인을 만난 추억 같은 것은 식민지 인도에서 전혀 무의미했다.
---「남아프리카로 가다」중에서
마리츠버그 사건이 생긴 지 일주일도 안 되어 간디는 프리토리아의 인도인들을 모아놓고 백인의 차별에 대해 연설했다. 그의 첫 번째 공식 연설이었다. 대의에 대한 열정으로 수줍음도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청중은 대부분 무슬림 상인이었고 힌두인도 몇 사람 있었다. 그 최초의 단계부터 그의 리더십의 독특한 성격이 나타났다. 그는 그들에게 사업함에 있어 정직할 것, 더욱 위생적인 습관을 기를 것, 종교적 상이와 카스트의 차이를 잊을 것을 요청했다. 그의 목적이 남아프리카 인도인에 대한 공정한 대우였기 때문에,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인 인도인이 먼저 스스로를 개혁하고 나쁜 습관을 버리도록 해야 했다. 사실 간디는 종종 정치적 목표를 확보하는 것보다도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이 되는 인간 자체에 더 흥미를 가졌다. 인간 자신이 향상되지 않는데 그의 지위가 높아진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간디의 목표는 실제로 보다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그는 항상 개인을 순화시키고자 노력했다.
---「‘사회운동가’ 간디」중에서
한국 사회, 지역사회, 학교 사회 등 우리는 사회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인간의 집단을 공동체, 제도, 사회라는 세 종류로 구분하고 그 각각의 기반을 감정, 지식, 의지로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종래 사회를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로 구분한 것과 다르다. 게마인샤프트(공동사회)는 공동체이지 사회가 아니다. 게젤샤프트(이익사회)는 국가나 회사와 같은 제도이지 공동체나 사회와 다르다. 공동체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등 여러 가지 혈연 차원의 구성원, 제도인 국가나 회사에서는 그 조직의 직급으로 사장과 직원 등을 구분할 수 있지만, 사회에는 인간인 개인밖에 없다.
「‘사회인’ 간디」중에서
요컨대 수동적 저항이란 비폭력 저항을 잘못 부른 것이라고 했다. 비폭력 저항은 폭력 저항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형태를 취해도 결코 수동적이고 무기력하지 않다. 즉 악에 대한 모든 투쟁의 포기가 아니라, 부정에 대한 더욱 적극적이고 실제적인 투쟁이다. 구체적으로는 비협력, 시민 불복종, 단식, 피케팅, 파업과 같은 전술이다. 특히 소로의 시민 불복종에 러스킨이나 톨스토이를 원용하여 높은 도덕성을 추구한 것이 간디의 독자적인 사티아그라하다. 간디는 그것이 종교적 운동임을 처음부터 분명히 했다. 그 결과 종교와 정치를 일체화하고자 하는 간디의 바람이 이루어졌다. 간디는 사티아그라하가 예수의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왼쪽 뺨도 내주는’ 가르침과 같고, 톨스토이가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에서 말한 것과도 같다고 말했다. 간디의 경우 진실, 사랑, 비폭력, 신은 언제나 같은 것이다. 즉 사랑은 폭력을 배제하므로 비폭력이고, 비폭력은 신의 본성과 관련된다. 이야말로 간디가 당대의 민족주의자들과 가장 분명하게 구별되는 지점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종교와 정치의 일체화라는 말은 우리 헌법을 비롯한 모든 민주주의 헌법에 규정된 정교분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특정한 종교가 국교가 되어 정치를 조종하거나 지도하는 것, 정부가 특정한 종교를 억압하고 탄압하는 것은 당연히 금지된다. 간디가 그런 의미에서 힌두교를 인도의 국교로 삼아 정치를 조종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물론 아니다. 간디가 말하는 종교는 특정한 종교가 아니라 보편의 종교다.
---「‘민족주의자’ 간디」중에서
간디는 카펜터가 말한 문명에 의한 사회 파괴는 유럽뿐 아니라 인도에서도 볼 수 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실천하고 있는 채식과 공동체 생활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욕망을 자극하는 서양식 육식을 피하고, 서양식 의료도 거부해야 몸의 건강뿐 아니라 사회와 민족의 건강도 보장된다고 믿었다.
---「‘민족주의자’ 간디」중에서
간디는 출옥하고 며칠 뒤 더반에서 열린 대중 집회에 기장이 길고 칼라가 없는 인도식 셔츠 쿠르타를 입고 인도인들이 허리에 걸치는 긴 천 도티를 두른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는 파업 도중에 살해된 광부들에게 조의를 표하고자 양복 입기를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청중에게 희생된 동포들과 운명을 함께 나눌 용의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큰 소리로 그렇다고 답했다. 이어 간디는 남녀노소 누구나 월급, 직업, 가족, 몸을 돌보지 말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는 보통 사람들로부터 『바가바드 기타』와 같은 자기희생을 보기를 기대했다. 그들에게는 신앙이 있었기에 그는 그들의 자기희생을 확보했다. 그는 그 싸움이 “인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고, 따라서 종교를 위한 투쟁”이라고 강조했다.
---「‘승리자’ 간디」중에서
간디 일생의 절정은 최고의 출세나 축재 따위가 아니라 가장 치열한 싸움이었다. 간디는 1917년부터 1918년에 걸쳐 인도 각지에서 사티아그라하를 실천하고 1919년부터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혼란기에 전국적인 반롤럿법운동을, 1921년에는 국민회의파의 중심으로 비협력운동을 실시했다. 그러나 그것을 독립운동 사건들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인도의 자치』에서 말했듯이 인도인의 성격을 바꾸어 영국의 식민지 기반을 무너트리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자 했다. 간디가 그러한 목표를 위해 택한 도구는 행동적 비폭력인 사티아그라하였다. 이는 인도 총독부가 강경노선을 포기한 점과 궤를 같이했지만, 영국 문명의 물질적 힘을 인도 문명의 정신적 힘이 이긴다고 하는 문명 비판에 근거한 것이었다. 간디는 정치적 독립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정신적 독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인도의 독립 노선과는 너무나도 상이했지만, 간디는 평생 그것을 자신의 신조로 삼았다.
---「인도로 돌아오다」중에서
롤럿법 반대 사티아그라하는 인도 최초의 범국민적 사티아그라하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간디는 아마다바드에서 행동 계획을 수립했고 회의 본부는 뭄바이에 설치되었다. 가장 치열한 행동은 뭄바이 관구와 북인도에서 일어났고, 마드라스와 콜카타가 투쟁의 중심이 되었다. 전국에서 수백만 명이 참가했다. 그것은 폭력을 수반했다는 점에서 간디에게는 실패였으나, 폭력에 이르기 전까지는 가장 전형적인 사티아그라하로 진행되었다. 그 목적은 개인의 시민권을 침해하므로 부당하고 영국에 의한 인도 정복을 획책하는 점에서 불의라 여겨지는 법률을 철폐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정부에 대항하는 행동 계획은 철저히 비폭력적이었다. 아무 소요 없이 법률을 위반했고, 경찰에 의해 야기되는 폭력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가장 손쉬운 위반이 가능하게 했다. 자급자족을 위해서 신문을 간행하고 도서를 판매했고, 협상을 충분히 시도했다. 그러나 대중은 사티아그라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 결국 폭력화되었다. 따라서 그 실패는 사티아그라하 자체의 실패라기보다는, 그 운동을 계획하고 실행한 사람들이 참여자들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시행착오」중에서
간디에게 단식은 동료들과 소통하는 수단이었다. 그전에 간디는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글을 써도 두 사회를 융합시킬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고 했다. 따라서 남은 것은 단식뿐이었다. 소통을 위해 서양인은 말하거나 움직인다. 반면 동양인은 명상을 하고 앉아서 고통을 겪는다. 간디는 동서양의 방식을 모두 사용했다. 말을 해서 실패하면 단식을 한 것이다. 간디는 평생 소통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그는 대규모 군중집회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연설하는 대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몸을 좌우로 흔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미소 지으며 힌두교 인사법으로 두 손을 들어 합장했다. 그러면 군중은 무릎을 꿇고 울었다. 그것은 소통이었다. 그는 그들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인터뷰에서도 간디는 단순히 발표하거나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의 주된 목표는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상호 이해하는 데에 말보다도 더욱 기여했기 때문이다. 단식도 사람들의 가슴과 마음에 이르는 방법의 하나였다. 간디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개조하기 위해 단식한다”고 했다. 그리고 “독재자에 대항하여 단식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독재자는 남을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에 단식과 같은 사랑의 무기는 그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다.
---「시행착오」중에서
자치하고 자급자족하는 마을은 부근의 자기 충족적인 마을과 주로 거래하고, 복잡한 기계 수입은 최소화하는 것이 아시아 민주주의에 대한 간디의 처방전이었다. 이러한 지역적 단위가 저변의 상호 협력에 의해 수립되는 정도에 따라, 위에서나 멀리서 오는 독재의 여지는 더욱 작아진다는 것이었다. 간디는 무덥고 추악하며 공장 지대에 밀집하여 빈민가를 이룬 도시보다 시골을 좋아했다. 간디가 산업화 이전 사회로의 회귀를 주장했다는 가정이 반복되었지만 근거 없는 것이다. 그는 서양 기술의 도움을 받아 진보하기를 바랐지만, 그 진보가 정신적 존재인 인간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이기를 바랐다. 유럽의 산업주의가 초래한 갖가지 죄악, 특히 동방 착취로 인해 더욱 추악하게 된 그것은 인도는 물론 아시아의 어디에서도 보기 좋은 것이 아니었다.
---「물레」중에서
더욱 고차의 철학적 차원에서 간디는 문명의 위험과 공포를 그 누구보다 앞서 인식했다. 기계는 인간을 해방한다는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기는커녕 인간을 노예로 만들지도 모른다. 1931년 런던에서 찰리 채플린이 간디에게 만나기를 청했다. 그 전까지 영화를 본 적이 없었던 간디가 그의 이름을 알 리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배우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 배우가 런던의 빈민가 람베스(Lambeth) 출신임을 알고는 약속을 잡았다. 서양인 방문자가 기계에 대한 간디의 태도를 오해하는 일은 흔했다. 그들의 대화 또한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후 간디의 대답은 채플린에게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주었고, 그는 인간과 기계 사이에 매일같이 일어나는 경쟁에 대한 영화 〈모던 타임스Modern Times〉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물레」중에서
간디는 지속적인 인간 개혁가였지만, 그럼에도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다. 사랑이 그를 관대하게 했다. 그는 스스로 엄격한 생활 규범을 두었지만, 남에게는 부드러운 규범을 설정했다. 그는 신이나 비폭력, 순수성은 물론, 심지어 간디조차 믿지 않는 수많은 남녀를 그의 아슈람에 초대하여 행복한 조화를 이루며 지냈다. 사실상 그는 반항이나 부적응을 개인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서 권장했다. 그에 대한 불충을 불쾌해하지 않았지만, 원칙에 대한 불충은 기분 나쁘게 생각했다. 원칙에 불충하는 것은 모든 사회 체제에 보편적인 현상이다. 원칙에 충실하려면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독재 정권하에서 그 대가는 죽음일 수 있다. 민주주의하에서 그 대가는 불안과 역경이다. 간디는 어떤 대가라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질적으로 궁핍할수록 더 많이 지불할 수 있었고, 정신적으로 더욱 부유할 수 있었다. 정신이야말로 그가 참으로 소중하게 여긴 것이었다. 그는 똑같은 태도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길러주었다.
---「물레」중에서
소금 행진과 그 여파는 두 가지 사실을 초래했다. 첫째, 그것은 인도인에게 자신들의 어깨 위에 씌워진 외국인의 멍에를 벗어던질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둘째, 그것은 영국인들에게 자기들이 인도를 강압으로 지배하고 있음을 알게 했다. 1930년 이후 인도가 언젠가 지배를 거부할 것임이 분명해졌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영국이 언젠가 지배하기를 거부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인도인은 스스로 경찰봉과 개머리판의 세례를 받으면서도 움츠리지 않음으로써 영국은 무력하고 인도는 꺾을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었다. 나머지는 오로지 시간문제였다.
---「‘순례자’ 간디」중에서
신문기자들은 쉬지 않고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어느 기자가 복장에 대해 질문하자 간디는 “여러분은 팔다리를 덮는 옷을 입고 있고, 나는 팔다리를 드러내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간디가 조지 5세와 메리 여왕으로부터 버킹엄 궁전 다과회에 초대받았을 때에는, 그가 어떤 복장을 할지를 두고 영국 전역이 시끄러웠다. 간디는 평소처럼 허리에 천을 두르고 숄을 걸친 뒤 샌들을 신고 손목시계를 헐겁게 차고서 궁궐로 갔다. 누군가가 그에게 복장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간디는 답했다. “왕이 우리 두 사람에게 충분한 옷을 입었습니다.”
---「‘고독자’ 간디」중에서
간디는 이러한 비극적 진실을 파악하고 인도 대륙을 횡단하여 콜카타로 달려갔다. 벵골 주민들이 그 뼈와 살을, 두뇌와 가슴을, 동쪽과 서쪽을 분리하는 수술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파키스탄은 태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그는 콜카타 사람들에게 물었다, “위에서 일이 잘못되었을 때 밑바닥 사람들의 선의가 위로부터의 악영향을 배제하고 스스로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이는 그의 간절한 염원이었다. 벵골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문화, 영국이 20세기 초에 그곳을 분할하려고 했을 때에 함께 저항한 공통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벵골이니 이제 진나가 시도하는 분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저항하지 않겠는가?
---「인도의 분열」중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간디의 죽음에 대해 인류가 슬픔을 느끼는 것은, 피셔가 말하듯이 그가 죽었을 때도 그전과 마찬가지로 부·재산·명예·공적 지위·학문적 칭호·과학적 업적 등 78년을 산 인간으로서 남길 수 있는 영광이 하나도 없는 평범한 일개 시민으로, “가장 가난하고 고독하며 불행한 사람들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도를 오랫동안 지배한 영국의 조문 대표 필립 노엘-베이커(Philip Noel-Baker, 1889~1982)의 말이지만 간디를 가장 정확하게 본 것이었다. 간디가 남긴 것은 안경과 회중시계, 가죽 샌들, 피 묻은 비 조각뿐이었다.
---「인도가 간디를 죽였다」중에서
영국의 정치가 스태퍼드 크립스 경은 “정신력이 물질계를 초월한다는 것을 그처럼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증명한 사람을 나는 그 어느 시대에서도, 최근 역사에서도 일찍이 보지 못했다”고 선언했고,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조지 C. 마셜(George C. Marshall, 1880~1959) 장군은 “마하트마 간디는 인류 양심의 대변자였다”고 했다. 간디는 분명 인류 양심의 대변자였지만, 그것이 그의 정신이 물질을 이겼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간으로서 갖기 마련인 물욕이나 성욕 등의 모든 욕망을 이겼다고 하면 모를까. 피셔는 1954년 말했다. “가난한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간성이 메말랐다. 그 뒤에 남겨진 사람 누구도 국내외의 강력한 적에 대해 그처럼 친절, 정직, 겸손, 비폭력이라는 무기로 대항하여 수많은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남다른 방법으로 비범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은 그 뒤 반세기가 지금 2023년에도 여전히 옳은 말이다.
---「인도가 간디를 죽였다」중에서
최대한의 자율을 전제로 하여 그 자율을 보장하는 불가피한 수준의 제도만을 인정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면, 전통적인 계급은 그런 제도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간디가 카스트를 인정한 점에 대해 지금까지도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간디는 카스트를 고정된 계급으로서 인정한 것이 아니라 본래적인 직업 분화 제도인 바르나(Varna)로 인정하고 그것이 영국의 지배 뒤에 계급화한 점을 비판했다. 특히 달리트에 대한 차별에 반대했지만, 그 정도의 논의도 결국은 현존하는 계급적 카스트를 인정한 것이었기에 당연히 비판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간디 생존 시의 암벳카는 물론 최근까지도 아룬다티 로이를 비롯한 인도의 많은 지성인이 간디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카스트제도에 대한 견해로 인해 간디를 비판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간디의 모든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간디는 종교인이나 학자가 아니라 정치인이었다. 그의 최대 과제는 인도의 자율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인도의 자치, 자유의 확보였다. 이를 위해 그는 인도인이 단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카스트를 그 본래의 직업적 분화 제도 정도로 인정하여 파기하지 않기를 바랐다. 흔히 간디의 사상이나 행동은 마키아벨리즘과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져왔지만, 적어도 그의 행동은 정치적이라고 보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그의 비폭력주의도 당시 인도에서 벌어진 수많은 폭력 행위에 대해 주장된 것임을 주의할 필요가 있고, 특히 그가 폭력 행위를 묵인한 경우도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간디는 필요에 따라 말을 바꾸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라지코트의 학창 시절」중에서
영국인 지주 제도는 협동 생활과 공동 참여라는 지역 공동체의 특성을 깨뜨렸고 봉사자와 기능의 협동 체제를 사라지게 했다. 본래 인도의 전통적 재판은 판차야트에 의한 것으로 빠르고 효과적이며 경비가 쌌다. 그것은 정의의 사랑과 공정한 운영을 조성했고, 진실을 말하는 습관을 격려했다. 그곳에 영국인이 세운 사법 조직은 부적당하고 모호하며 현학적이었다. 유럽인 재판관과 치안판사는 배타적이었다. 그들은 언어도, 국민의 관습과 감정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라지코트의 학창 시절」중에서
피셔는 간디가 영국 신사 흉내를 낸 것을 두고 그가 언제나 주위와 조화를 이루고자 노력한 탓이라고 했다. 수십 년 뒤 옷 대신 천 조각을 걸친 이유는 수천만 명의 인도 농민들은 그 정도로 입고 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런던에서 간디는 그런 조화를 곧 포기했다. 참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 비 조각을 걸치는 것은 참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평생을 그렇게 지냈다. 한편 영국에서는 물론이고 남아프리카에 가서도 양복 차림은 그대로 유지했다. 그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런던 유학 시절」중에서
영국 생활을 하며 가장 힘든 것은 식사였다. 영국의 친지들은 간디에게 육식을 권했으나 그는 어머니에게 했던 맹세를 굳게 지켰다. 런던으로 오는 배 안에서 만난 영국인도 런던에서는 건강을 위해 반드시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말했으나 듣지 않았다. 런던에서는 슈클라도 그에게 육식을 권했으나 거부했다.
---「‘채식주의자’ 간디」중에서
간디는 계급의 의무와 살육을 요구하는 신의 부름이 『바가바드 기타』에 대한 힌두교의 정통 해석임을 알고 불쾌해했다. 심지어 1888~1889년 런던에서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 그는 그것을 비유라고 불렀다. 즉 전장은 인간의 마음을 상징하고, 아르주나는 악과 싸우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종교인’ 간디」중에서
『자서전』 2부에서 간디는 뭄바이에서 맡은 최초의 소송에 실패한 뒤 라지코트로 가서 대서소 업무 같은 것을 할 때 ‘일생 최초의 충격’을 받은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앞에 다른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을 경험한 뒤 뭄바이로 가서 인도에서 변호사업을 할 수 있도록 법원에 등록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간디가 ‘일생 최초의 충격을 받은 사건’부터 설명할 필요가 있다. (…) 이 사건은 단순히 주재관과 간디 두 사람의 개인적인 성격이 충돌한 것이 아니라, 지배국과 식민지라는 관계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당시 인도 청년들은 영국에서 좋은 학교를 다녀 일정한 자격을 갖추면 영국인처럼 출세하고 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리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간디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식민지 현실에서 그들은 좌절했다. 인도인이 런던에서 영국인을 만난 추억 같은 것은 식민지 인도에서 전혀 무의미했다.
---「남아프리카로 가다」중에서
마리츠버그 사건이 생긴 지 일주일도 안 되어 간디는 프리토리아의 인도인들을 모아놓고 백인의 차별에 대해 연설했다. 그의 첫 번째 공식 연설이었다. 대의에 대한 열정으로 수줍음도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청중은 대부분 무슬림 상인이었고 힌두인도 몇 사람 있었다. 그 최초의 단계부터 그의 리더십의 독특한 성격이 나타났다. 그는 그들에게 사업함에 있어 정직할 것, 더욱 위생적인 습관을 기를 것, 종교적 상이와 카스트의 차이를 잊을 것을 요청했다. 그의 목적이 남아프리카 인도인에 대한 공정한 대우였기 때문에,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인 인도인이 먼저 스스로를 개혁하고 나쁜 습관을 버리도록 해야 했다. 사실 간디는 종종 정치적 목표를 확보하는 것보다도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이 되는 인간 자체에 더 흥미를 가졌다. 인간 자신이 향상되지 않는데 그의 지위가 높아진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간디의 목표는 실제로 보다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그는 항상 개인을 순화시키고자 노력했다.
---「‘사회운동가’ 간디」중에서
한국 사회, 지역사회, 학교 사회 등 우리는 사회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인간의 집단을 공동체, 제도, 사회라는 세 종류로 구분하고 그 각각의 기반을 감정, 지식, 의지로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종래 사회를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로 구분한 것과 다르다. 게마인샤프트(공동사회)는 공동체이지 사회가 아니다. 게젤샤프트(이익사회)는 국가나 회사와 같은 제도이지 공동체나 사회와 다르다. 공동체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등 여러 가지 혈연 차원의 구성원, 제도인 국가나 회사에서는 그 조직의 직급으로 사장과 직원 등을 구분할 수 있지만, 사회에는 인간인 개인밖에 없다.
「‘사회인’ 간디」중에서
요컨대 수동적 저항이란 비폭력 저항을 잘못 부른 것이라고 했다. 비폭력 저항은 폭력 저항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형태를 취해도 결코 수동적이고 무기력하지 않다. 즉 악에 대한 모든 투쟁의 포기가 아니라, 부정에 대한 더욱 적극적이고 실제적인 투쟁이다. 구체적으로는 비협력, 시민 불복종, 단식, 피케팅, 파업과 같은 전술이다. 특히 소로의 시민 불복종에 러스킨이나 톨스토이를 원용하여 높은 도덕성을 추구한 것이 간디의 독자적인 사티아그라하다. 간디는 그것이 종교적 운동임을 처음부터 분명히 했다. 그 결과 종교와 정치를 일체화하고자 하는 간디의 바람이 이루어졌다. 간디는 사티아그라하가 예수의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왼쪽 뺨도 내주는’ 가르침과 같고, 톨스토이가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에서 말한 것과도 같다고 말했다. 간디의 경우 진실, 사랑, 비폭력, 신은 언제나 같은 것이다. 즉 사랑은 폭력을 배제하므로 비폭력이고, 비폭력은 신의 본성과 관련된다. 이야말로 간디가 당대의 민족주의자들과 가장 분명하게 구별되는 지점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종교와 정치의 일체화라는 말은 우리 헌법을 비롯한 모든 민주주의 헌법에 규정된 정교분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특정한 종교가 국교가 되어 정치를 조종하거나 지도하는 것, 정부가 특정한 종교를 억압하고 탄압하는 것은 당연히 금지된다. 간디가 그런 의미에서 힌두교를 인도의 국교로 삼아 정치를 조종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물론 아니다. 간디가 말하는 종교는 특정한 종교가 아니라 보편의 종교다.
---「‘민족주의자’ 간디」중에서
간디는 카펜터가 말한 문명에 의한 사회 파괴는 유럽뿐 아니라 인도에서도 볼 수 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실천하고 있는 채식과 공동체 생활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욕망을 자극하는 서양식 육식을 피하고, 서양식 의료도 거부해야 몸의 건강뿐 아니라 사회와 민족의 건강도 보장된다고 믿었다.
---「‘민족주의자’ 간디」중에서
간디는 출옥하고 며칠 뒤 더반에서 열린 대중 집회에 기장이 길고 칼라가 없는 인도식 셔츠 쿠르타를 입고 인도인들이 허리에 걸치는 긴 천 도티를 두른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는 파업 도중에 살해된 광부들에게 조의를 표하고자 양복 입기를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청중에게 희생된 동포들과 운명을 함께 나눌 용의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큰 소리로 그렇다고 답했다. 이어 간디는 남녀노소 누구나 월급, 직업, 가족, 몸을 돌보지 말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는 보통 사람들로부터 『바가바드 기타』와 같은 자기희생을 보기를 기대했다. 그들에게는 신앙이 있었기에 그는 그들의 자기희생을 확보했다. 그는 그 싸움이 “인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고, 따라서 종교를 위한 투쟁”이라고 강조했다.
---「‘승리자’ 간디」중에서
간디 일생의 절정은 최고의 출세나 축재 따위가 아니라 가장 치열한 싸움이었다. 간디는 1917년부터 1918년에 걸쳐 인도 각지에서 사티아그라하를 실천하고 1919년부터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혼란기에 전국적인 반롤럿법운동을, 1921년에는 국민회의파의 중심으로 비협력운동을 실시했다. 그러나 그것을 독립운동 사건들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인도의 자치』에서 말했듯이 인도인의 성격을 바꾸어 영국의 식민지 기반을 무너트리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자 했다. 간디가 그러한 목표를 위해 택한 도구는 행동적 비폭력인 사티아그라하였다. 이는 인도 총독부가 강경노선을 포기한 점과 궤를 같이했지만, 영국 문명의 물질적 힘을 인도 문명의 정신적 힘이 이긴다고 하는 문명 비판에 근거한 것이었다. 간디는 정치적 독립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정신적 독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인도의 독립 노선과는 너무나도 상이했지만, 간디는 평생 그것을 자신의 신조로 삼았다.
---「인도로 돌아오다」중에서
롤럿법 반대 사티아그라하는 인도 최초의 범국민적 사티아그라하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간디는 아마다바드에서 행동 계획을 수립했고 회의 본부는 뭄바이에 설치되었다. 가장 치열한 행동은 뭄바이 관구와 북인도에서 일어났고, 마드라스와 콜카타가 투쟁의 중심이 되었다. 전국에서 수백만 명이 참가했다. 그것은 폭력을 수반했다는 점에서 간디에게는 실패였으나, 폭력에 이르기 전까지는 가장 전형적인 사티아그라하로 진행되었다. 그 목적은 개인의 시민권을 침해하므로 부당하고 영국에 의한 인도 정복을 획책하는 점에서 불의라 여겨지는 법률을 철폐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정부에 대항하는 행동 계획은 철저히 비폭력적이었다. 아무 소요 없이 법률을 위반했고, 경찰에 의해 야기되는 폭력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가장 손쉬운 위반이 가능하게 했다. 자급자족을 위해서 신문을 간행하고 도서를 판매했고, 협상을 충분히 시도했다. 그러나 대중은 사티아그라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 결국 폭력화되었다. 따라서 그 실패는 사티아그라하 자체의 실패라기보다는, 그 운동을 계획하고 실행한 사람들이 참여자들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시행착오」중에서
간디에게 단식은 동료들과 소통하는 수단이었다. 그전에 간디는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글을 써도 두 사회를 융합시킬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고 했다. 따라서 남은 것은 단식뿐이었다. 소통을 위해 서양인은 말하거나 움직인다. 반면 동양인은 명상을 하고 앉아서 고통을 겪는다. 간디는 동서양의 방식을 모두 사용했다. 말을 해서 실패하면 단식을 한 것이다. 간디는 평생 소통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그는 대규모 군중집회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연설하는 대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몸을 좌우로 흔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미소 지으며 힌두교 인사법으로 두 손을 들어 합장했다. 그러면 군중은 무릎을 꿇고 울었다. 그것은 소통이었다. 그는 그들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인터뷰에서도 간디는 단순히 발표하거나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의 주된 목표는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상호 이해하는 데에 말보다도 더욱 기여했기 때문이다. 단식도 사람들의 가슴과 마음에 이르는 방법의 하나였다. 간디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개조하기 위해 단식한다”고 했다. 그리고 “독재자에 대항하여 단식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독재자는 남을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에 단식과 같은 사랑의 무기는 그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다.
---「시행착오」중에서
자치하고 자급자족하는 마을은 부근의 자기 충족적인 마을과 주로 거래하고, 복잡한 기계 수입은 최소화하는 것이 아시아 민주주의에 대한 간디의 처방전이었다. 이러한 지역적 단위가 저변의 상호 협력에 의해 수립되는 정도에 따라, 위에서나 멀리서 오는 독재의 여지는 더욱 작아진다는 것이었다. 간디는 무덥고 추악하며 공장 지대에 밀집하여 빈민가를 이룬 도시보다 시골을 좋아했다. 간디가 산업화 이전 사회로의 회귀를 주장했다는 가정이 반복되었지만 근거 없는 것이다. 그는 서양 기술의 도움을 받아 진보하기를 바랐지만, 그 진보가 정신적 존재인 인간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이기를 바랐다. 유럽의 산업주의가 초래한 갖가지 죄악, 특히 동방 착취로 인해 더욱 추악하게 된 그것은 인도는 물론 아시아의 어디에서도 보기 좋은 것이 아니었다.
---「물레」중에서
더욱 고차의 철학적 차원에서 간디는 문명의 위험과 공포를 그 누구보다 앞서 인식했다. 기계는 인간을 해방한다는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기는커녕 인간을 노예로 만들지도 모른다. 1931년 런던에서 찰리 채플린이 간디에게 만나기를 청했다. 그 전까지 영화를 본 적이 없었던 간디가 그의 이름을 알 리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배우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 배우가 런던의 빈민가 람베스(Lambeth) 출신임을 알고는 약속을 잡았다. 서양인 방문자가 기계에 대한 간디의 태도를 오해하는 일은 흔했다. 그들의 대화 또한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후 간디의 대답은 채플린에게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주었고, 그는 인간과 기계 사이에 매일같이 일어나는 경쟁에 대한 영화 〈모던 타임스Modern Times〉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물레」중에서
간디는 지속적인 인간 개혁가였지만, 그럼에도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다. 사랑이 그를 관대하게 했다. 그는 스스로 엄격한 생활 규범을 두었지만, 남에게는 부드러운 규범을 설정했다. 그는 신이나 비폭력, 순수성은 물론, 심지어 간디조차 믿지 않는 수많은 남녀를 그의 아슈람에 초대하여 행복한 조화를 이루며 지냈다. 사실상 그는 반항이나 부적응을 개인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서 권장했다. 그에 대한 불충을 불쾌해하지 않았지만, 원칙에 대한 불충은 기분 나쁘게 생각했다. 원칙에 불충하는 것은 모든 사회 체제에 보편적인 현상이다. 원칙에 충실하려면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독재 정권하에서 그 대가는 죽음일 수 있다. 민주주의하에서 그 대가는 불안과 역경이다. 간디는 어떤 대가라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질적으로 궁핍할수록 더 많이 지불할 수 있었고, 정신적으로 더욱 부유할 수 있었다. 정신이야말로 그가 참으로 소중하게 여긴 것이었다. 그는 똑같은 태도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길러주었다.
---「물레」중에서
소금 행진과 그 여파는 두 가지 사실을 초래했다. 첫째, 그것은 인도인에게 자신들의 어깨 위에 씌워진 외국인의 멍에를 벗어던질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둘째, 그것은 영국인들에게 자기들이 인도를 강압으로 지배하고 있음을 알게 했다. 1930년 이후 인도가 언젠가 지배를 거부할 것임이 분명해졌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영국이 언젠가 지배하기를 거부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인도인은 스스로 경찰봉과 개머리판의 세례를 받으면서도 움츠리지 않음으로써 영국은 무력하고 인도는 꺾을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었다. 나머지는 오로지 시간문제였다.
---「‘순례자’ 간디」중에서
신문기자들은 쉬지 않고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어느 기자가 복장에 대해 질문하자 간디는 “여러분은 팔다리를 덮는 옷을 입고 있고, 나는 팔다리를 드러내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간디가 조지 5세와 메리 여왕으로부터 버킹엄 궁전 다과회에 초대받았을 때에는, 그가 어떤 복장을 할지를 두고 영국 전역이 시끄러웠다. 간디는 평소처럼 허리에 천을 두르고 숄을 걸친 뒤 샌들을 신고 손목시계를 헐겁게 차고서 궁궐로 갔다. 누군가가 그에게 복장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간디는 답했다. “왕이 우리 두 사람에게 충분한 옷을 입었습니다.”
---「‘고독자’ 간디」중에서
간디는 이러한 비극적 진실을 파악하고 인도 대륙을 횡단하여 콜카타로 달려갔다. 벵골 주민들이 그 뼈와 살을, 두뇌와 가슴을, 동쪽과 서쪽을 분리하는 수술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파키스탄은 태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그는 콜카타 사람들에게 물었다, “위에서 일이 잘못되었을 때 밑바닥 사람들의 선의가 위로부터의 악영향을 배제하고 스스로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이는 그의 간절한 염원이었다. 벵골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문화, 영국이 20세기 초에 그곳을 분할하려고 했을 때에 함께 저항한 공통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벵골이니 이제 진나가 시도하는 분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저항하지 않겠는가?
---「인도의 분열」중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간디의 죽음에 대해 인류가 슬픔을 느끼는 것은, 피셔가 말하듯이 그가 죽었을 때도 그전과 마찬가지로 부·재산·명예·공적 지위·학문적 칭호·과학적 업적 등 78년을 산 인간으로서 남길 수 있는 영광이 하나도 없는 평범한 일개 시민으로, “가장 가난하고 고독하며 불행한 사람들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도를 오랫동안 지배한 영국의 조문 대표 필립 노엘-베이커(Philip Noel-Baker, 1889~1982)의 말이지만 간디를 가장 정확하게 본 것이었다. 간디가 남긴 것은 안경과 회중시계, 가죽 샌들, 피 묻은 비 조각뿐이었다.
---「인도가 간디를 죽였다」중에서
영국의 정치가 스태퍼드 크립스 경은 “정신력이 물질계를 초월한다는 것을 그처럼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증명한 사람을 나는 그 어느 시대에서도, 최근 역사에서도 일찍이 보지 못했다”고 선언했고,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조지 C. 마셜(George C. Marshall, 1880~1959) 장군은 “마하트마 간디는 인류 양심의 대변자였다”고 했다. 간디는 분명 인류 양심의 대변자였지만, 그것이 그의 정신이 물질을 이겼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간으로서 갖기 마련인 물욕이나 성욕 등의 모든 욕망을 이겼다고 하면 모를까. 피셔는 1954년 말했다. “가난한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간성이 메말랐다. 그 뒤에 남겨진 사람 누구도 국내외의 강력한 적에 대해 그처럼 친절, 정직, 겸손, 비폭력이라는 무기로 대항하여 수많은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남다른 방법으로 비범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은 그 뒤 반세기가 지금 2023년에도 여전히 옳은 말이다.
---「인도가 간디를 죽였다」중에서
최대한의 자율을 전제로 하여 그 자율을 보장하는 불가피한 수준의 제도만을 인정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면, 전통적인 계급은 그런 제도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간디가 카스트를 인정한 점에 대해 지금까지도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간디는 카스트를 고정된 계급으로서 인정한 것이 아니라 본래적인 직업 분화 제도인 바르나(Varna)로 인정하고 그것이 영국의 지배 뒤에 계급화한 점을 비판했다. 특히 달리트에 대한 차별에 반대했지만, 그 정도의 논의도 결국은 현존하는 계급적 카스트를 인정한 것이었기에 당연히 비판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간디 생존 시의 암벳카는 물론 최근까지도 아룬다티 로이를 비롯한 인도의 많은 지성인이 간디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카스트제도에 대한 견해로 인해 간디를 비판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간디의 모든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간디는 종교인이나 학자가 아니라 정치인이었다. 그의 최대 과제는 인도의 자율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인도의 자치, 자유의 확보였다. 이를 위해 그는 인도인이 단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카스트를 그 본래의 직업적 분화 제도 정도로 인정하여 파기하지 않기를 바랐다. 흔히 간디의 사상이나 행동은 마키아벨리즘과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져왔지만, 적어도 그의 행동은 정치적이라고 보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그의 비폭력주의도 당시 인도에서 벌어진 수많은 폭력 행위에 대해 주장된 것임을 주의할 필요가 있고, 특히 그가 폭력 행위를 묵인한 경우도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간디는 필요에 따라 말을 바꾸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꼬리말: 지금 우리에게 간디는?」중에서
출판사 리뷰
간디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정신사
총 8부에 걸쳐 조명하는 간디의 생애
흔히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성취한 민족주의자 리더라 여겨진다. 이제까지 우리나라에 소개된 간디상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간디의 영웅적 리더십이 인도 독립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간디 외에도 여타 많은 독립투사와 인도인 전체의 노력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민족 독립을 중심으로 한 세계정세 변화에 힘입은 바가 크기 때문이다. 이 책은 독립운동가로서 간디 삶의 측면보다는 비폭력 불복종 운동가 또는 인권 투쟁가로서의 보편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을 더욱 강조한다. 나아가 그의 인권투쟁은 정치적 독립이나 자유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평등과 새로운 삶의 형태를 추구한 점에서 어떤 인권투쟁보다도 폭넓고 깊이가 있음을 조명하는 것도 이 책의 특징이다.
이 책은 모두 8부로 구성된다. 1부에서는 간디의 생애와 인도에 대한 배경지식 등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 사실을 안내한다. 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2부에서는 어린 시절을, 3부에서는 영국 유학 시절을 다룬다. 유학 생활은 삼 년도 채 안 되지만, 간디가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기본이 된 경험과 지식을 쌓은 시기다. 이 시기를 하나의 부로 상세히 다룬다는 점이 이 평전의 특색이다. 4부와 5부에서 다루는 남아프리카 시절과 그 뒤로도 간디는 오랫동안 동서양의 다양한 사상을 섭취하고 종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에 근거하여 실천하려는 치열한 노력 끝에 인도 역사상 최초로 대중을 민족독립운동, 나아가 아나키즘적인 민중운동으로 이끌 수 있었음을 6부부터 8부까지에 걸쳐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분량을 간디가 인도에서 펼친 독립운동을 설명하는 데 할애하는 여타 평전들과 달리, 그의 생애 전반을 비교적 균형 잡힌 비중으로 다룬다는 것이 이 책의 특색이다. 간디가 독립운동 이전에 남아프리카에서 했던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중시한 점 또한 그러하다.
간디를 비판한 암베드카르나 타고르, 네루 등에 대해서도 그 까닭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상세히 설명했다. 또한 톨스토이, 라이찬드라. 비베카난다 등 간디의 생애와 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에 대해 상술한다.
간디의 핵심 사상 사티아그라하
사티아그라하는 파업이다
우리나라에는 간디에 대해 정확히 다룬 책이 적다. 특히 그의 핵심 사상이자 평생 영국에 저항하는 독립투쟁의 목적·방법으로써 사용한 사티아그라하의 의미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진리 파지 운동’이나 ‘진리 실험 운동’ 등의 어려운 말로 번역되었지만, 한마디로 반체제, 파업이다. 이 책은 간디의 ‘파업 인생’ 이야기다.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인도의 모든 이가 한번 듣고 바로 실행할 수 있었을 만큼 단순한 일이 우리나라에 와서는 왜 이토록 어렵게 표현된 것일까? 간디의 사티아그라하는 대단히 신비롭고 복잡해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도 어려운 철학적·종교적 운동처럼 알려졌으나 실상은 아주 단순하다. 거짓·불공정·부정의·불평등·억압·착취·비겁·침략·폭력·욕망 등에서 벗어나 공정·정의·평등·자유·배려·용기·비폭력·절제 등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다. 간디의 사티아그라하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이기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불사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통념에 어긋나기 때문이지 그 자체가 난해해서는 아니다. 간디는 평생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참’, 즉 진실을 추구하며 살았다. 그것이 우리가 그에게서 본받아야 할 가장 소중한 점이다.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즉 파업의 대상에는 종교·학문·사상·제도 등과 심지어 육식이라는 식사 양식까지 서양의 모든 것이 포함되었다. 간디는 모든 것에 대한 반체제자였다. 그는 잘못된 제국과 문명에 의해 타락한 인도의 전통도 파괴하고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도의 독립을 주장하면서도 지배자가 영국인에서 인도인으로 바뀔 뿐인 독립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인도의 독립은 영국 문명으로부터의 독립이어야 했다. 간디는 더불어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 스스로 만들고 운영하는 작은 마을 사회 아슈람을 이상적인 삶의 기본 단위로 삼았다. 그리고 독립된 인도가 하나의 강대국이 아니라 수만 개의 작은 마을 사회로 이루어진 연방이기를 바랐다. 이는 인도에서는 물론이고 어떤 제3세계 지도자들에게서도 볼 수 없는 발상이다.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파업은 어려운 일이다. 법적으로도 많은 제약이 따르며, 엄청난 민·형사책임을 지게 된다. 노동조합에 대한 사회 분위기도 적대적이다. 간디는 영국이 지배하는 식민지 인도에서 평생 ‘파업질’을 한 ‘파업꾼’이었으나, 그가 그로 인해 오늘날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일들을 당하지는 않았다. 책에는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로서의 파업이 어째서 ‘나쁜 짓’ ‘반사회적인 일’로 여겨지게 되었는가에 대한 저자의 진지한 회의와 고민이 담겨 있다.
철저히 자기성찰하고 치열히 투쟁한 인간 간디
그래서 우리는 지금 간디를 읽는다
‘불변의 성자’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바라보는 간디는 ‘비폭력 시민저항’ ‘청빈’ ‘자기성찰’ 등을 보여준 사상가이자 행동가다. 간디를 적대하였던 윈스턴 처칠은 그를 ‘약한 지도자’라 평하였으나, 아인슈타인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앞으로 인류 앞에 그와 같은 사람이 다시 나타나기는 힘들 것”이라 말했다. 이 책은 우리가 사는 현대에 미루어보았을 때 간디는 가장 훌륭한 인간이었다 평한다. 그러나 간디가 작금에 우리가 처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에게도 비판할 지점이 있다. 특히 만년에 어린 손녀와 나체로 동침하였다는 것과 카스트제도를 인정한 점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러한 일면들만으로 그의 생애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간디 또한 실수가 잦았으며 약점과 모순이 많았으나, 언제나 그것을 솔직하게 드러냈고, 고치려고 노력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철저히 자기성찰하는 인간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정직하게, 진지하게, 치열하게 들여다보고 반성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단순히 평화에 대한 지향으로서의 비폭력이 아니라, 어떠한 숭고한 투쟁의 수단, 인간 진보를 위한 계몽의 수단으로서의 비폭력의 의의를 발견하게 된다.
간디 일생의 절정은 최고의 출세나 축재 따위가 아니라 가장 치열한 싸움이었다. 그의 삶 자체가 비판자들과의 투쟁이었다. 가장 큰 싸움은 대영제국을 상대로 한 것이었으나, 그는 공산주의자뿐 아니라 민족주의자와 국가주의자, 심지어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지도자들과도 싸웠다. 그런 싸움들 속에서 갖가지 비판과 혐오가 생겨났고, 결국 간디는 극단의 비판자 내지는 혐오자가 쏜 흉탄에 스러졌다.
이 책은 오늘날 한국에 간디 동상을 세우는 것과 같은 일을 꾀하지 않는다. 인도에 가면 도처에서 간디 동상을 볼 수 있고 간디의 초상을 담은 지폐가 통용되지만, 지금 인도가 간디의 길을 따르고 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모든 일은 간디의 뜻을 존경하여 따르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자신들이 자행하는 일을 간디라는 권위에 기대 합리화하기 위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는 더욱더 그러하여, 간디를 말로서나 그럴듯하게 가장하는 수단으로 숭배할 뿐이다. 숭배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잘못을 가리기 위한 숭배는 위선일 뿐이다. 이 책은 간디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그의 목소리를 본래 그대로 들어야만 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쓰였다. 그리하여 간디를 무조건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방치하기보다 그의 삶과 사상을 통해 ‘오늘 우리가 본받아 따라야 할 점’이 무엇인가를 적확하게 짚어낸다. 무한한 폭력과 욕망의 시대에 ‘비폭력’과 ‘청빈’의 표상으로서의 간디의 생애는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전할 것이다.
총 8부에 걸쳐 조명하는 간디의 생애
흔히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성취한 민족주의자 리더라 여겨진다. 이제까지 우리나라에 소개된 간디상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간디의 영웅적 리더십이 인도 독립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간디 외에도 여타 많은 독립투사와 인도인 전체의 노력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민족 독립을 중심으로 한 세계정세 변화에 힘입은 바가 크기 때문이다. 이 책은 독립운동가로서 간디 삶의 측면보다는 비폭력 불복종 운동가 또는 인권 투쟁가로서의 보편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을 더욱 강조한다. 나아가 그의 인권투쟁은 정치적 독립이나 자유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평등과 새로운 삶의 형태를 추구한 점에서 어떤 인권투쟁보다도 폭넓고 깊이가 있음을 조명하는 것도 이 책의 특징이다.
이 책은 모두 8부로 구성된다. 1부에서는 간디의 생애와 인도에 대한 배경지식 등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 사실을 안내한다. 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2부에서는 어린 시절을, 3부에서는 영국 유학 시절을 다룬다. 유학 생활은 삼 년도 채 안 되지만, 간디가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기본이 된 경험과 지식을 쌓은 시기다. 이 시기를 하나의 부로 상세히 다룬다는 점이 이 평전의 특색이다. 4부와 5부에서 다루는 남아프리카 시절과 그 뒤로도 간디는 오랫동안 동서양의 다양한 사상을 섭취하고 종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에 근거하여 실천하려는 치열한 노력 끝에 인도 역사상 최초로 대중을 민족독립운동, 나아가 아나키즘적인 민중운동으로 이끌 수 있었음을 6부부터 8부까지에 걸쳐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분량을 간디가 인도에서 펼친 독립운동을 설명하는 데 할애하는 여타 평전들과 달리, 그의 생애 전반을 비교적 균형 잡힌 비중으로 다룬다는 것이 이 책의 특색이다. 간디가 독립운동 이전에 남아프리카에서 했던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중시한 점 또한 그러하다.
간디를 비판한 암베드카르나 타고르, 네루 등에 대해서도 그 까닭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상세히 설명했다. 또한 톨스토이, 라이찬드라. 비베카난다 등 간디의 생애와 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에 대해 상술한다.
간디의 핵심 사상 사티아그라하
사티아그라하는 파업이다
우리나라에는 간디에 대해 정확히 다룬 책이 적다. 특히 그의 핵심 사상이자 평생 영국에 저항하는 독립투쟁의 목적·방법으로써 사용한 사티아그라하의 의미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진리 파지 운동’이나 ‘진리 실험 운동’ 등의 어려운 말로 번역되었지만, 한마디로 반체제, 파업이다. 이 책은 간디의 ‘파업 인생’ 이야기다.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인도의 모든 이가 한번 듣고 바로 실행할 수 있었을 만큼 단순한 일이 우리나라에 와서는 왜 이토록 어렵게 표현된 것일까? 간디의 사티아그라하는 대단히 신비롭고 복잡해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도 어려운 철학적·종교적 운동처럼 알려졌으나 실상은 아주 단순하다. 거짓·불공정·부정의·불평등·억압·착취·비겁·침략·폭력·욕망 등에서 벗어나 공정·정의·평등·자유·배려·용기·비폭력·절제 등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다. 간디의 사티아그라하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이기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불사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통념에 어긋나기 때문이지 그 자체가 난해해서는 아니다. 간디는 평생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참’, 즉 진실을 추구하며 살았다. 그것이 우리가 그에게서 본받아야 할 가장 소중한 점이다.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즉 파업의 대상에는 종교·학문·사상·제도 등과 심지어 육식이라는 식사 양식까지 서양의 모든 것이 포함되었다. 간디는 모든 것에 대한 반체제자였다. 그는 잘못된 제국과 문명에 의해 타락한 인도의 전통도 파괴하고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도의 독립을 주장하면서도 지배자가 영국인에서 인도인으로 바뀔 뿐인 독립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인도의 독립은 영국 문명으로부터의 독립이어야 했다. 간디는 더불어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 스스로 만들고 운영하는 작은 마을 사회 아슈람을 이상적인 삶의 기본 단위로 삼았다. 그리고 독립된 인도가 하나의 강대국이 아니라 수만 개의 작은 마을 사회로 이루어진 연방이기를 바랐다. 이는 인도에서는 물론이고 어떤 제3세계 지도자들에게서도 볼 수 없는 발상이다.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파업은 어려운 일이다. 법적으로도 많은 제약이 따르며, 엄청난 민·형사책임을 지게 된다. 노동조합에 대한 사회 분위기도 적대적이다. 간디는 영국이 지배하는 식민지 인도에서 평생 ‘파업질’을 한 ‘파업꾼’이었으나, 그가 그로 인해 오늘날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일들을 당하지는 않았다. 책에는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로서의 파업이 어째서 ‘나쁜 짓’ ‘반사회적인 일’로 여겨지게 되었는가에 대한 저자의 진지한 회의와 고민이 담겨 있다.
철저히 자기성찰하고 치열히 투쟁한 인간 간디
그래서 우리는 지금 간디를 읽는다
‘불변의 성자’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바라보는 간디는 ‘비폭력 시민저항’ ‘청빈’ ‘자기성찰’ 등을 보여준 사상가이자 행동가다. 간디를 적대하였던 윈스턴 처칠은 그를 ‘약한 지도자’라 평하였으나, 아인슈타인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앞으로 인류 앞에 그와 같은 사람이 다시 나타나기는 힘들 것”이라 말했다. 이 책은 우리가 사는 현대에 미루어보았을 때 간디는 가장 훌륭한 인간이었다 평한다. 그러나 간디가 작금에 우리가 처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에게도 비판할 지점이 있다. 특히 만년에 어린 손녀와 나체로 동침하였다는 것과 카스트제도를 인정한 점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러한 일면들만으로 그의 생애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간디 또한 실수가 잦았으며 약점과 모순이 많았으나, 언제나 그것을 솔직하게 드러냈고, 고치려고 노력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철저히 자기성찰하는 인간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정직하게, 진지하게, 치열하게 들여다보고 반성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단순히 평화에 대한 지향으로서의 비폭력이 아니라, 어떠한 숭고한 투쟁의 수단, 인간 진보를 위한 계몽의 수단으로서의 비폭력의 의의를 발견하게 된다.
간디 일생의 절정은 최고의 출세나 축재 따위가 아니라 가장 치열한 싸움이었다. 그의 삶 자체가 비판자들과의 투쟁이었다. 가장 큰 싸움은 대영제국을 상대로 한 것이었으나, 그는 공산주의자뿐 아니라 민족주의자와 국가주의자, 심지어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지도자들과도 싸웠다. 그런 싸움들 속에서 갖가지 비판과 혐오가 생겨났고, 결국 간디는 극단의 비판자 내지는 혐오자가 쏜 흉탄에 스러졌다.
이 책은 오늘날 한국에 간디 동상을 세우는 것과 같은 일을 꾀하지 않는다. 인도에 가면 도처에서 간디 동상을 볼 수 있고 간디의 초상을 담은 지폐가 통용되지만, 지금 인도가 간디의 길을 따르고 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모든 일은 간디의 뜻을 존경하여 따르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자신들이 자행하는 일을 간디라는 권위에 기대 합리화하기 위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는 더욱더 그러하여, 간디를 말로서나 그럴듯하게 가장하는 수단으로 숭배할 뿐이다. 숭배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잘못을 가리기 위한 숭배는 위선일 뿐이다. 이 책은 간디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그의 목소리를 본래 그대로 들어야만 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쓰였다. 그리하여 간디를 무조건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방치하기보다 그의 삶과 사상을 통해 ‘오늘 우리가 본받아 따라야 할 점’이 무엇인가를 적확하게 짚어낸다. 무한한 폭력과 욕망의 시대에 ‘비폭력’과 ‘청빈’의 표상으로서의 간디의 생애는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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