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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제국주의의 침탈 과정에서 식민지에 세워진 박물관은 원활한 식민지배를 위한 문화적 도구로 활용되었는데, 1915년 일제에 의해 세워진 조선총독부박물관 또한 이러한 역할에 충실한 식민지 문화기관이었다. 식민지 문화재정책에 부응하여 발굴품과 미술공예품의 전시를 통해 열등한 조선의 문화를 재현하는 공간이자 문화재의 조사, 보호, 보존 등 문화재 관리 기관이었던 조선총독부박물관은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을 통해 국립박물관으로 이어졌다.
이 책은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과 전시, 조사연구의 연원이기도 한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설립과 운영을 통해 열패한 식민지 문화가 어떻게 전파되었으며, 조직과 인력, 소장품의 출처와 상설전시를 통해 식민지 박물관의 토대가 어떻게 구축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폈다. 더불어 일제시기 변동과 파행을 거친 고적조사 과정과 전시체제 아래 균열과 퇴락의 길을 걸어온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역사를 상세히 들여다본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실체를 파악하는 이러한 연구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사를 제대로 알아가는 것뿐 아니라 제국의 식민지 박물관의 특징을 규명하는 작업으로서도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이 책은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과 전시, 조사연구의 연원이기도 한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설립과 운영을 통해 열패한 식민지 문화가 어떻게 전파되었으며, 조직과 인력, 소장품의 출처와 상설전시를 통해 식민지 박물관의 토대가 어떻게 구축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폈다. 더불어 일제시기 변동과 파행을 거친 고적조사 과정과 전시체제 아래 균열과 퇴락의 길을 걸어온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역사를 상세히 들여다본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실체를 파악하는 이러한 연구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사를 제대로 알아가는 것뿐 아니라 제국의 식민지 박물관의 특징을 규명하는 작업으로서도 그 의미가 매우 크다.
목차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를 출간하면서
책머리에
프롤로그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역사적 궤적을 찾아
제1부 설립: 열패한 식민지 문화의 전파
1장 설립 과정
1. 데라우치 총독과 문화재
2. 박람회와 박물관
2장 설립 목적
1. 조선 문화의 재현
2. 식민지의 문화재 관리
제2부 운영: 식민지 박물관의 토대
3장 조직
1. 직제
2. 관방 소속의 박물관
3. 고적조사과의 신설
4. 소관의 부유
4장 인력
1. 시기별 변천
1) 총무과·문서과 단계
2) 고적조사과 단계
3) 종교과 단계
4) 사회과 단계(1930년대 후반)
2. 인력의 성격
3. 박물관협의원
5장 소장품
1. 초기 소장품
1) 현황
2) 성격
3) 초기 소장품의 입수 기준
2. 소장품의 확대
1) 취득 방식
2) 소장품 확대의 추이와 성격
6장 상설전시: 유물에 갇힌 식민지 역사
1. 상설전시 복원을 위한 자료
1) 기존 연구 자료
2) 새로운 연구 자료
2. 상설전시의 개편
1) 1915년 개관 상설전시
2) 1921년 상설전시
3) 1926년 상설전시
3. 상설전시 변천의 성격
제3부 조사: 변동과 파행
7장 총독부박물관과 고적조사사업
1. 박물관 설립 이전의 고적조사
1) 탁지부-내무1과: 고건축조사
2) 편집과 사료조사
2. 주체의 변동
3. 제국대학 아카데미즘의 보조
4. 연구주체의 재설정
1) 일선동조론을 넘어
2) 조선 고유문화의 발견
8장 1925년 도쿄제대의 낙랑고분 조사
1. 도쿄제대와 낙랑고분
2. 1926년, 또 하나의 신청
3. 남겨진 유물과 과제
9장 조선고적연구회의 설립과 활동
1. 조선고적연구회의 설립 과정
2. 조직과 운영
3. 재정과 활동
1) 1931년도 재정과 활동
2) 1932년도 재정과 활동
4. 성격과 한계
제4부 전시체제하 박물관: 균열과 퇴락
10장 종합박물관 건립의 추진과 좌절
1. 총독부박물관의 확장 계획
1) 1922년 구로이타 가쓰미의 주장
2) 1922년 총독부박물관의 증축 계획
3) 1929년 총독부박물관의 확장 계획
4) 1930년대 초 확장 논의
2. 종합박물관 건립 계획의 배경
3. 종합박물관 건립 계획의 추진
1) 1934~1935년 부지 논란
2) 1935년 부지와 건립 계획의 확정
3) 건축 설계와 직제
4. 종합박물관 건립 계획의 좌절
11장 공출과 소개
1. 공출
1) 태평양전쟁과 금속회수
2) 총독부박물관 소장 재래 병기
3) 박물관 소장품의 공출
2. 소개
1) 박물관과 소개
2) 일본의 문화재 소개
3) 총독부박물관의 소개
12장 식민지 박물관의 주변
1. 총독부박물관과 조선인
1) 총독부박물관의 조선인 직원
2) 총독부박물관의 조선인 관람객
2. 경성고고담화회의 활동
1) 관련 자료의 검토
2) 결성과 운영
3) 구성원
4) 성격
에필로그 미완의 식민지 박물관, 조선총독부박물관
본문의 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책머리에
프롤로그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역사적 궤적을 찾아
제1부 설립: 열패한 식민지 문화의 전파
1장 설립 과정
1. 데라우치 총독과 문화재
2. 박람회와 박물관
2장 설립 목적
1. 조선 문화의 재현
2. 식민지의 문화재 관리
제2부 운영: 식민지 박물관의 토대
3장 조직
1. 직제
2. 관방 소속의 박물관
3. 고적조사과의 신설
4. 소관의 부유
4장 인력
1. 시기별 변천
1) 총무과·문서과 단계
2) 고적조사과 단계
3) 종교과 단계
4) 사회과 단계(1930년대 후반)
2. 인력의 성격
3. 박물관협의원
5장 소장품
1. 초기 소장품
1) 현황
2) 성격
3) 초기 소장품의 입수 기준
2. 소장품의 확대
1) 취득 방식
2) 소장품 확대의 추이와 성격
6장 상설전시: 유물에 갇힌 식민지 역사
1. 상설전시 복원을 위한 자료
1) 기존 연구 자료
2) 새로운 연구 자료
2. 상설전시의 개편
1) 1915년 개관 상설전시
2) 1921년 상설전시
3) 1926년 상설전시
3. 상설전시 변천의 성격
제3부 조사: 변동과 파행
7장 총독부박물관과 고적조사사업
1. 박물관 설립 이전의 고적조사
1) 탁지부-내무1과: 고건축조사
2) 편집과 사료조사
2. 주체의 변동
3. 제국대학 아카데미즘의 보조
4. 연구주체의 재설정
1) 일선동조론을 넘어
2) 조선 고유문화의 발견
8장 1925년 도쿄제대의 낙랑고분 조사
1. 도쿄제대와 낙랑고분
2. 1926년, 또 하나의 신청
3. 남겨진 유물과 과제
9장 조선고적연구회의 설립과 활동
1. 조선고적연구회의 설립 과정
2. 조직과 운영
3. 재정과 활동
1) 1931년도 재정과 활동
2) 1932년도 재정과 활동
4. 성격과 한계
제4부 전시체제하 박물관: 균열과 퇴락
10장 종합박물관 건립의 추진과 좌절
1. 총독부박물관의 확장 계획
1) 1922년 구로이타 가쓰미의 주장
2) 1922년 총독부박물관의 증축 계획
3) 1929년 총독부박물관의 확장 계획
4) 1930년대 초 확장 논의
2. 종합박물관 건립 계획의 배경
3. 종합박물관 건립 계획의 추진
1) 1934~1935년 부지 논란
2) 1935년 부지와 건립 계획의 확정
3) 건축 설계와 직제
4. 종합박물관 건립 계획의 좌절
11장 공출과 소개
1. 공출
1) 태평양전쟁과 금속회수
2) 총독부박물관 소장 재래 병기
3) 박물관 소장품의 공출
2. 소개
1) 박물관과 소개
2) 일본의 문화재 소개
3) 총독부박물관의 소개
12장 식민지 박물관의 주변
1. 총독부박물관과 조선인
1) 총독부박물관의 조선인 직원
2) 총독부박물관의 조선인 관람객
2. 경성고고담화회의 활동
1) 관련 자료의 검토
2) 결성과 운영
3) 구성원
4) 성격
에필로그 미완의 식민지 박물관, 조선총독부박물관
본문의 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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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건물이라는 물리적 실체의 역사성은 비교적 가시적으로 잘 드러난다. 그러나 박물관의 소장품이나 전시 등 내용적 측면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의 현재 모습이 지니는 시간의 나이테는 정체나 성격을 포착해내기가 쉽지 않다. 마치 원래 현재의 모습을 당연히 유지해오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박물관의 소장품, 전시, 조사연구 등 제반 활동은 결코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과거의 전통과 경험이 장기간 누적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성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 국립중앙박물관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어떠하며, 얼마나 철저하게 과거를 극복하고 현재에 자리하며 미래를 지향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중략)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사(前史)로서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살펴본 것이다. 총독부박물관의 실체와 내용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이루어져야만, 국립중앙박물관의 현재 모습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하며, 미래의 발전 방향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롤로그」중에서
총독부박물관은 물산공진회 미술관 건물을 활용하여 개관했다. 물산공진회 미술관은 임시 건물로 지어진 물산공진회의 다른 전시관들과는 달리 벽돌로 지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2층 건물이었다. 이는 미술관을 건축한 당초부터 물산공진회가 종료된 다음 다른 용도로 사용할 것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중략) 물산공진회의 미술관 건물을 박물관으로 전용한 일본의 사례를 식민지 조선에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하여 총독부박물관을 개관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카쿠라 덴신이 데라우치 총독에게 건의한 방식이기도 하였다.
---「1장 설립 과정」중에서
총독부박물관은 식민지 문화의 재현과 식민지 문화재의 관리라는 두 축으로 설립되고 운영되었다. 두 가지 미션의 경중을 따지기는 힘들지만, 소장품을 기반으로 전시, 교육 기능을 중심으로 하는 일반적인 근대 박물관의 성격보다는 식민지의 문화재 관리와 보존사업의 기능을 지닌 식민권력의 말단 행정기구로서의 비중이 결코 작지 않았다. 박물관 관람이 일상화되지 않은 식민지 조선에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기관으로서의 역할에 비해 어쩌면 초기에는 후자가 식민지 박물관으로서 총독부박물관에게 부과된 우선적 책무였는지도 모른다.
---「2장 설립 목적」중에서
고적조사과의 신설은 3·1운동 이후 식민지배의 변화를 배경으로 한다. 무단통치로 식민지 지배와 동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제는 3·1운동을 계기로 조선의 제반 문제에 대한 조사·연구가 부족했음을 통감하였다. 1920년대 초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전통과 관습, 역사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그 보존 혹은 규명을 위해 ‘객관적’ 근거를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자료 수집과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3·1운동 이후 고조된 조선인들의 민족적 자각과 반일의식에 대해 ‘문화’를 내세우며 조선에 대한 존중감을 부각시킬 수 있었고, 각종 자료의 수집과 정리, 이를 바탕으로 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고자 하였다.
---「3장 조직」중에서
고고학이나 미술사학은 일본인의 전유물이었다. 새로운 자료의 취득을 위해서는 총독부의 허가나 지원이 있어야 했으며, 해석을 위해서는 별도의 수학과 훈련 과정을 거쳐야 하였다. 일본인이 자료의 획득과 지식의 생산 및 유통을 독점하였으며, 한국인의 접근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 (중략) 이러한 민족적 배타성과 일본인의 독점으로 인해 해방이 되자 박물관을 인수하여 운영할 만한 경험과 전문성을 지닌 조선인은 찾아보기 힘든 상태였다. 불가피하게 남한에서는 총독부박물관의 아리미쓰 교이치가, 북한에서는 평양부립박물관의 고이즈미 아키오가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년여 동안 억류된 채 각기 미군정과 소련군정에 박물관을 인계하고 지도하는 곤궁한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4장 인력」중에서
식민지 권력이 조선에 설립한 박물관이라면 조선을 중심으로 하면서 주변 지역과 관련된 물건을 수집하여 전시하는 것이 상례이다. 구하라가 기증한 중앙아시아 컬렉션은 식민지 조선의 역사나 문화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자료들임에도 불구하고 총독부박물관의 전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총독부박물관이 중앙아시아 컬렉션을 기증받아서 전시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5장 소장품」중에서
고고유물과 미술공예품을 중심으로 한 총독부박물관의 상설전시는 ‘유물에 의한 역사서술로서의 전시’가 아니라, ‘유물’의 ‘역사적 전시(Historical Display)’였다. 구체적으로 식민사관의 역사 해석에 부합하는 역사서술로서의 유물 전시가 아니라, 고고유물과 미술공예품의 시계열적 배열, 즉 역사적 전시라는 은유적 방식의 문화사적 재현이었다. 이를 통해 (중략) 조선 문화의 유구성, 고유성, 우수성이 아니라, 타율성, 정체성 등의 열등감을 조장하고, 일본과의 친연성을 의도적으로 부각시켜 식민지 신민으로서의 의식을 고양시킨다는 식민지 박물관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였다.
---「6장 상설전시」중에서
도쿄제대 문학부가 발굴한 석암리 205호분의 발굴 유물은 발굴 직후 보고서 출간을 위한 유물 정리를 명분으로 일본 도쿄제대로 반출되었으며, 또 1930년 보고서가 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그대로 있다.
---「8장 1925년 도쿄제대의 낙랑고분 조사」중에서
조선고적연구회는 설립 당초 민간으로부터 재원을 마련하고자 했기 때문에, 재정의 취약성은 연구회의 운영과 사업 내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자금을 외부로부터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가시적인 성과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는 평양의 낙랑고분이나 경주의 신라고분을 중심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그중에서도 주로 도굴이 되지 않은 고분을 대상으로 하였다.
---「9장 조선고적연구회의 설립과 활동」중에서
총독부박물관의 마지막 모습은 아리미쓰 교이치의 회고록에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총독부박물관의 전시실은 폐쇄되었다. 박물관 본관은 지방으로 소개하지 못한 소장품을 한데 모아둔 창고가 되었다. (중략) 용산에 있던 철도국이 박물관의 청사 공간으로 들어오려고 노렸으며, 박물관의 존속이 전쟁 수행에 장애가 된다고까지 공공연하게 말하는 관리도 있었다. 중앙아시아 벽화가 있던 수정전은 인원이 급증한 부서의 사무실로 바뀌었고, 종래 사무실이 있던 자경전은 총독부 고관들의 관사로 징발되었다. (중략) 이러한 모습은 제국 일본이 자신들의 박물관과 문화재를 대하는 태도와 그에 따른 정책과 행정 집행과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전시체제의 종말에 패전이 다가오는 급박한 말기적 상황에서 일제 식민지배의 본질적 모습을 처연하지만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것이 총독부박물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11장 공출과 소개」중에서
경성고고담화회는 식민지 조선의 유일한 고고학 관련 모임이었는데, 총독부박물관과 경성제대 등 대표적인 조사 및 학술기관 중심의 인맥들은 식민지 지배자 중심의 고고학 담론을 형성하고 있었다. (중략) 종래 식민지 조선의 고고학에서는 조선인이 배제되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그런데 경성고고담화회에는 나가타 다네히데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한 식민지 관료 김병욱을 제외하더라고 몇몇 조선인들이 확인된다. 바로 고유섭, 이규필, 김재원 등이다.
---「프롤로그」중에서
총독부박물관은 물산공진회 미술관 건물을 활용하여 개관했다. 물산공진회 미술관은 임시 건물로 지어진 물산공진회의 다른 전시관들과는 달리 벽돌로 지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2층 건물이었다. 이는 미술관을 건축한 당초부터 물산공진회가 종료된 다음 다른 용도로 사용할 것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중략) 물산공진회의 미술관 건물을 박물관으로 전용한 일본의 사례를 식민지 조선에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하여 총독부박물관을 개관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카쿠라 덴신이 데라우치 총독에게 건의한 방식이기도 하였다.
---「1장 설립 과정」중에서
총독부박물관은 식민지 문화의 재현과 식민지 문화재의 관리라는 두 축으로 설립되고 운영되었다. 두 가지 미션의 경중을 따지기는 힘들지만, 소장품을 기반으로 전시, 교육 기능을 중심으로 하는 일반적인 근대 박물관의 성격보다는 식민지의 문화재 관리와 보존사업의 기능을 지닌 식민권력의 말단 행정기구로서의 비중이 결코 작지 않았다. 박물관 관람이 일상화되지 않은 식민지 조선에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기관으로서의 역할에 비해 어쩌면 초기에는 후자가 식민지 박물관으로서 총독부박물관에게 부과된 우선적 책무였는지도 모른다.
---「2장 설립 목적」중에서
고적조사과의 신설은 3·1운동 이후 식민지배의 변화를 배경으로 한다. 무단통치로 식민지 지배와 동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제는 3·1운동을 계기로 조선의 제반 문제에 대한 조사·연구가 부족했음을 통감하였다. 1920년대 초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전통과 관습, 역사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그 보존 혹은 규명을 위해 ‘객관적’ 근거를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자료 수집과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3·1운동 이후 고조된 조선인들의 민족적 자각과 반일의식에 대해 ‘문화’를 내세우며 조선에 대한 존중감을 부각시킬 수 있었고, 각종 자료의 수집과 정리, 이를 바탕으로 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고자 하였다.
---「3장 조직」중에서
고고학이나 미술사학은 일본인의 전유물이었다. 새로운 자료의 취득을 위해서는 총독부의 허가나 지원이 있어야 했으며, 해석을 위해서는 별도의 수학과 훈련 과정을 거쳐야 하였다. 일본인이 자료의 획득과 지식의 생산 및 유통을 독점하였으며, 한국인의 접근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 (중략) 이러한 민족적 배타성과 일본인의 독점으로 인해 해방이 되자 박물관을 인수하여 운영할 만한 경험과 전문성을 지닌 조선인은 찾아보기 힘든 상태였다. 불가피하게 남한에서는 총독부박물관의 아리미쓰 교이치가, 북한에서는 평양부립박물관의 고이즈미 아키오가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년여 동안 억류된 채 각기 미군정과 소련군정에 박물관을 인계하고 지도하는 곤궁한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4장 인력」중에서
식민지 권력이 조선에 설립한 박물관이라면 조선을 중심으로 하면서 주변 지역과 관련된 물건을 수집하여 전시하는 것이 상례이다. 구하라가 기증한 중앙아시아 컬렉션은 식민지 조선의 역사나 문화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자료들임에도 불구하고 총독부박물관의 전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총독부박물관이 중앙아시아 컬렉션을 기증받아서 전시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5장 소장품」중에서
고고유물과 미술공예품을 중심으로 한 총독부박물관의 상설전시는 ‘유물에 의한 역사서술로서의 전시’가 아니라, ‘유물’의 ‘역사적 전시(Historical Display)’였다. 구체적으로 식민사관의 역사 해석에 부합하는 역사서술로서의 유물 전시가 아니라, 고고유물과 미술공예품의 시계열적 배열, 즉 역사적 전시라는 은유적 방식의 문화사적 재현이었다. 이를 통해 (중략) 조선 문화의 유구성, 고유성, 우수성이 아니라, 타율성, 정체성 등의 열등감을 조장하고, 일본과의 친연성을 의도적으로 부각시켜 식민지 신민으로서의 의식을 고양시킨다는 식민지 박물관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였다.
---「6장 상설전시」중에서
도쿄제대 문학부가 발굴한 석암리 205호분의 발굴 유물은 발굴 직후 보고서 출간을 위한 유물 정리를 명분으로 일본 도쿄제대로 반출되었으며, 또 1930년 보고서가 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그대로 있다.
---「8장 1925년 도쿄제대의 낙랑고분 조사」중에서
조선고적연구회는 설립 당초 민간으로부터 재원을 마련하고자 했기 때문에, 재정의 취약성은 연구회의 운영과 사업 내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자금을 외부로부터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가시적인 성과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는 평양의 낙랑고분이나 경주의 신라고분을 중심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그중에서도 주로 도굴이 되지 않은 고분을 대상으로 하였다.
---「9장 조선고적연구회의 설립과 활동」중에서
총독부박물관의 마지막 모습은 아리미쓰 교이치의 회고록에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총독부박물관의 전시실은 폐쇄되었다. 박물관 본관은 지방으로 소개하지 못한 소장품을 한데 모아둔 창고가 되었다. (중략) 용산에 있던 철도국이 박물관의 청사 공간으로 들어오려고 노렸으며, 박물관의 존속이 전쟁 수행에 장애가 된다고까지 공공연하게 말하는 관리도 있었다. 중앙아시아 벽화가 있던 수정전은 인원이 급증한 부서의 사무실로 바뀌었고, 종래 사무실이 있던 자경전은 총독부 고관들의 관사로 징발되었다. (중략) 이러한 모습은 제국 일본이 자신들의 박물관과 문화재를 대하는 태도와 그에 따른 정책과 행정 집행과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전시체제의 종말에 패전이 다가오는 급박한 말기적 상황에서 일제 식민지배의 본질적 모습을 처연하지만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것이 총독부박물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11장 공출과 소개」중에서
경성고고담화회는 식민지 조선의 유일한 고고학 관련 모임이었는데, 총독부박물관과 경성제대 등 대표적인 조사 및 학술기관 중심의 인맥들은 식민지 지배자 중심의 고고학 담론을 형성하고 있었다. (중략) 종래 식민지 조선의 고고학에서는 조선인이 배제되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그런데 경성고고담화회에는 나가타 다네히데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한 식민지 관료 김병욱을 제외하더라고 몇몇 조선인들이 확인된다. 바로 고유섭, 이규필, 김재원 등이다.
---「12장 식민지 박물관의 주변」중에서
출판사 리뷰
일제시기 식민지배의 대표적인 문화 도구로 활용된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실체를 파헤친다!
이 책은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의 두 번째 권으로, 제국 일본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해온 주요 조직 중 하나인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다.
서구 열강은 제국주의 침탈 과정에서 원활한 식민지배를 위한 문화적 도구로 박물관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학술기관을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식민지에 설립된 박물관은 서구의 문명적 과업을 식민지인들에게 과시하고, 식민통치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제시한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근대 일본의 문화시설은 이러한 서구의 선행 사례를 모델로 한 것으로, 제국 일본은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박물관을 타이완과 조선, 만주 등의 식민지에 이식해나갔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은 1915년 12월 1일 경복궁 내에 개관했는데, 박물관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는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그는 원활한 식민지 통치를 위해 문화 침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식민지 조선의 박물관과 문화재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식민지 박물관으로서의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일제의 식민지 문화재정책에 부응하여 발굴품과 미술공예품을 통해 시대적 특질을 문화사적으로 조망하는 박물관을 지향하였다. 또한 실물 자료의 전시를 통해 조선의 문화를 재현하고, 이 과정에서 일본과 중국, 구미와의 비교를 겸하여 식민지 조선의 문화가 얼마나 열등한지를 스스로 자각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으며, 아울러 조선에서 문화재 조사와 보호, 보전을 위한 행정 업무를 총괄한 식민지 문화행정기관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러한 조선총독부박물관의 건물과 소장품은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국립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이 책은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설립과 운영, 조사 과정 등 구체적인 활동을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사로서뿐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 박물관으로서 총독부박물관의 특성을 온전히 규명하고자 한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유산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 조선총독부박물관 연구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일제시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일본인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따라서 해방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을 미군정에 인계하기까지는 1년의 시간이 걸렸다. 인수인계 작업을 주도한 이는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근무하던 아리미쓰 교이치로, 그는 이후 일본 교토대학의 교수로 재직한다. 1998년 어느 날 아리미쓰 교수는 식민지 조선에서 직접 발굴했던 고고학 유적들의 보고서를 마무리하기 위해 관련 자료 협조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요청해왔다.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논의가 전개되었다.
발굴 유물과 관련한 유리원판사진은 식민지에, 발굴자와 발굴 기록은 식민 모국에 각각 흩어진 채 오랜 시간이 흘렀다면, 과거의 발굴 자료를 공개할 책임과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또한 학술 자료의 지적 권리와 정리의 책임은 발굴자에게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식민지 박물관을 계승한 현재의 박물관에 있는 것인가?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은 조선총독부박물관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사로서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살펴본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과 전시, 조사연구의 연원은 불가피하게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비롯되었으며, 관리 운영 시스템 등도 상당 정도 영향을 받았음에도 일제시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언제 어떻게 성립되었으며, 무엇을 위해 어떤 활동을 펼쳤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부족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현재 모습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선 시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실체와 내용을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설립과 운영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으며, 이 책은 그 오랜 연구의 결실이라 하겠다.
열패한 식민지 문화의 전파를 위해 탄생한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실체와 흥망성쇠
― 이 책의 구성과 주요 내용
이 책은 1915년 세워진 조선총독부박물관이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미군정으로 인계되기까지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제1부에서는 열패한 식민지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설립 과정과 목적을 살펴보았는데, 박물관 설립을 주도한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식민지 조선의 문화재를 수집하고 박물관 설립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경위를 검토하였다. 특히 그가 수많은 문화재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총독부의 기밀비를 사용했기 때문임을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를 통해 밝혀내고 있다. 또한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와 총독부박물관의 연속성을 건축물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조선 문화의 재현과 식민지 문화재 관리에 근거한 총독부박물관의 설립 목적을 검토하였다.
제2부에서는 박물관의 조직과 주요 인력, 그리고 소장품의 입수 경로와 성격, 이 소장품들의 상설전시 등 구체적인 운영 과정을 통해 식민지 박물관의 토대가 구축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들려준다. 이 가운데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초기 컬렉션이 구축되어간 과정을 밝힌 내용은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의 역사를 살피는 재미를 넘어 당시 어떤 소장품을 수집하고 배제했는지를 알려준다. 특히 역사성이 배제된 고고품과 미술공예품의 상설전시는 식민지의 역사와 문화를 오브제 중심으로 일제의 의도에 맞게 재현함으로써 ‘유물에 의한 역사서술로서의 전시’가 아니라 단순한 시계열적 배열인 ‘유물’의 ‘역사적 전시(Historical Display)’였음을 확인시켜준다.
3부에서는 일제시기 변동과 파행으로 점철되었던 박물관의 고적조사사업 과정에서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어떠한 역할을 했으며, 고적조사 주체가 변동됨에 따라 그들이 생산한 고고학 담론이 어떻게 경합했는지를 고찰하였다. 고대사 연구자인 저자는 그중에서도 특히 1925년 도쿄제대 문학부의 낙랑고분 조사가 이루어진 배경과 이때 발굴한 평양 석암리 205호 발굴 유물이 당시 도쿄제대로 반출된 후 오늘날까지 돌아오지 않은 역사를 자세히 들려준다. 이와 함께 1931년 민간 재원으로 설립한 조선고적연구회가 외부 자금을 끌어들이고자 가시적인 성과에 집중하게 되면서 화려한 유물이 출토된 평양의 낙랑고분과 경주의 신라고분 중심으로 발굴조사가 파행적으로 이루어진 한계를 짚어내고 있다.
4부에서는 1930년대 종합박물관 건립을 추진하다 좌절된 과정을 살피고 전시체제 말기에 소장품의 금속 공출에 의한 훼손 실태와 소장품의 소개(疏開)에 대해 살폈으며,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전시와 고적조사가 일본인이 독점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식민지 조선인들의 위치와 함께 박물관의 조선인 직원과 관람객 수의 변화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더불어 당시 조선총독부박물관 주변에서 고고학 지식을 소비하던 경성고고담화회의 활동을 자세히 들려준다.
일제시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식민지 박물관으로서 본연의 역할에는 충실했으나 여러 가지 근대적 성격이 착종된 복합성과 증층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해방을 맞이하면서 조선총독부박물관은 국립박물관으로 이어졌으나 조선인 연구자와 박물관 운영자가 전무한 상태에서 아리미쓰 교이치 등을 강제로 억류하면서 박물관 운영의 지식을 전수받아야만 했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박물관의 그림자는 지금도 여전히 국립중앙박물관 곳곳에 짙게 드리워 있다. 이 책은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시작과 끝에 이르기까지 그 미완의 역사를 온전히 재현함으로써 국립중앙박물관이 미래로 나아가는 데 작은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실체를 파헤친다!
이 책은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의 두 번째 권으로, 제국 일본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해온 주요 조직 중 하나인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다.
서구 열강은 제국주의 침탈 과정에서 원활한 식민지배를 위한 문화적 도구로 박물관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학술기관을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식민지에 설립된 박물관은 서구의 문명적 과업을 식민지인들에게 과시하고, 식민통치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제시한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근대 일본의 문화시설은 이러한 서구의 선행 사례를 모델로 한 것으로, 제국 일본은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박물관을 타이완과 조선, 만주 등의 식민지에 이식해나갔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은 1915년 12월 1일 경복궁 내에 개관했는데, 박물관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는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그는 원활한 식민지 통치를 위해 문화 침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식민지 조선의 박물관과 문화재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식민지 박물관으로서의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일제의 식민지 문화재정책에 부응하여 발굴품과 미술공예품을 통해 시대적 특질을 문화사적으로 조망하는 박물관을 지향하였다. 또한 실물 자료의 전시를 통해 조선의 문화를 재현하고, 이 과정에서 일본과 중국, 구미와의 비교를 겸하여 식민지 조선의 문화가 얼마나 열등한지를 스스로 자각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으며, 아울러 조선에서 문화재 조사와 보호, 보전을 위한 행정 업무를 총괄한 식민지 문화행정기관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러한 조선총독부박물관의 건물과 소장품은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국립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이 책은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설립과 운영, 조사 과정 등 구체적인 활동을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사로서뿐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 박물관으로서 총독부박물관의 특성을 온전히 규명하고자 한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유산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 조선총독부박물관 연구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일제시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일본인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따라서 해방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을 미군정에 인계하기까지는 1년의 시간이 걸렸다. 인수인계 작업을 주도한 이는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근무하던 아리미쓰 교이치로, 그는 이후 일본 교토대학의 교수로 재직한다. 1998년 어느 날 아리미쓰 교수는 식민지 조선에서 직접 발굴했던 고고학 유적들의 보고서를 마무리하기 위해 관련 자료 협조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요청해왔다.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논의가 전개되었다.
발굴 유물과 관련한 유리원판사진은 식민지에, 발굴자와 발굴 기록은 식민 모국에 각각 흩어진 채 오랜 시간이 흘렀다면, 과거의 발굴 자료를 공개할 책임과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또한 학술 자료의 지적 권리와 정리의 책임은 발굴자에게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식민지 박물관을 계승한 현재의 박물관에 있는 것인가?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은 조선총독부박물관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사로서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살펴본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과 전시, 조사연구의 연원은 불가피하게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비롯되었으며, 관리 운영 시스템 등도 상당 정도 영향을 받았음에도 일제시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언제 어떻게 성립되었으며, 무엇을 위해 어떤 활동을 펼쳤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부족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현재 모습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선 시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실체와 내용을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설립과 운영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으며, 이 책은 그 오랜 연구의 결실이라 하겠다.
열패한 식민지 문화의 전파를 위해 탄생한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실체와 흥망성쇠
― 이 책의 구성과 주요 내용
이 책은 1915년 세워진 조선총독부박물관이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미군정으로 인계되기까지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제1부에서는 열패한 식민지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설립 과정과 목적을 살펴보았는데, 박물관 설립을 주도한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식민지 조선의 문화재를 수집하고 박물관 설립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경위를 검토하였다. 특히 그가 수많은 문화재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총독부의 기밀비를 사용했기 때문임을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를 통해 밝혀내고 있다. 또한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와 총독부박물관의 연속성을 건축물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조선 문화의 재현과 식민지 문화재 관리에 근거한 총독부박물관의 설립 목적을 검토하였다.
제2부에서는 박물관의 조직과 주요 인력, 그리고 소장품의 입수 경로와 성격, 이 소장품들의 상설전시 등 구체적인 운영 과정을 통해 식민지 박물관의 토대가 구축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들려준다. 이 가운데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초기 컬렉션이 구축되어간 과정을 밝힌 내용은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의 역사를 살피는 재미를 넘어 당시 어떤 소장품을 수집하고 배제했는지를 알려준다. 특히 역사성이 배제된 고고품과 미술공예품의 상설전시는 식민지의 역사와 문화를 오브제 중심으로 일제의 의도에 맞게 재현함으로써 ‘유물에 의한 역사서술로서의 전시’가 아니라 단순한 시계열적 배열인 ‘유물’의 ‘역사적 전시(Historical Display)’였음을 확인시켜준다.
3부에서는 일제시기 변동과 파행으로 점철되었던 박물관의 고적조사사업 과정에서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어떠한 역할을 했으며, 고적조사 주체가 변동됨에 따라 그들이 생산한 고고학 담론이 어떻게 경합했는지를 고찰하였다. 고대사 연구자인 저자는 그중에서도 특히 1925년 도쿄제대 문학부의 낙랑고분 조사가 이루어진 배경과 이때 발굴한 평양 석암리 205호 발굴 유물이 당시 도쿄제대로 반출된 후 오늘날까지 돌아오지 않은 역사를 자세히 들려준다. 이와 함께 1931년 민간 재원으로 설립한 조선고적연구회가 외부 자금을 끌어들이고자 가시적인 성과에 집중하게 되면서 화려한 유물이 출토된 평양의 낙랑고분과 경주의 신라고분 중심으로 발굴조사가 파행적으로 이루어진 한계를 짚어내고 있다.
4부에서는 1930년대 종합박물관 건립을 추진하다 좌절된 과정을 살피고 전시체제 말기에 소장품의 금속 공출에 의한 훼손 실태와 소장품의 소개(疏開)에 대해 살폈으며,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전시와 고적조사가 일본인이 독점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식민지 조선인들의 위치와 함께 박물관의 조선인 직원과 관람객 수의 변화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더불어 당시 조선총독부박물관 주변에서 고고학 지식을 소비하던 경성고고담화회의 활동을 자세히 들려준다.
일제시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식민지 박물관으로서 본연의 역할에는 충실했으나 여러 가지 근대적 성격이 착종된 복합성과 증층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해방을 맞이하면서 조선총독부박물관은 국립박물관으로 이어졌으나 조선인 연구자와 박물관 운영자가 전무한 상태에서 아리미쓰 교이치 등을 강제로 억류하면서 박물관 운영의 지식을 전수받아야만 했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박물관의 그림자는 지금도 여전히 국립중앙박물관 곳곳에 짙게 드리워 있다. 이 책은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시작과 끝에 이르기까지 그 미완의 역사를 온전히 재현함으로써 국립중앙박물관이 미래로 나아가는 데 작은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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