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한국정치의 이해 (책소개)/3.한국좌파정치

기우뚱한 균형 (2008) - 동요하는 우파와 좌파에게 권하는 우충좌돌 정치철학

동방박사님 2023. 5. 25.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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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사회의 우파와 좌파에게 권하는, 철학자 김진석의 정치비평이다. 우리 사회의 논쟁이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이유를 우파와 좌파들이 낡은 패러다임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으로 규정하며 '소통의 부재’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을 제시하고 있다. 그 방법은 '우충좌돌'이라 부르는 것으로, 먼저 이제까지 주류였었고 앞으로도 한동안 강하게 남아 있을 우파에 부딪치기. 그 다음엔 좌측에도 부딪치기이다.

이같은 작업을 위해 저자는 김훈과 홍세화 사이로, 김일병과 전두환 사이로, 우파 근본주의와 좌파 근본주의 사이로, 자율과 공공 사이로, 우석훈과 박노자 사이로, 보편주의와 실용주의 사이로, 위선과 위악 사이로, 마지막으로 스스로의 솔직함과 뻔뻔함 사이로 우충좌돌하며 걷기 시작한다.

이처럼 한국사회에서 좌파, 우파 어느 한 편에 서지 않고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겠다는 것은 흔히 중도로 오해되곤 한다. 하지만 저자는 중도라는 딱지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가 옹호하는 정책이 결과적으로 정치적 중도에 가까울 수는 있겠지만, 그는 좌파와 우파 사이에 중도라는 레일을 얹고, 그 길만을 달리며 또 다른 평행선을 그으려는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하나의 노선을 접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소통행위'에 대한 철학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비로소, 저자가 의미하는 '기우뚱한 균형'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목차

머리말

1. 우충좌돌 지식인, 김훈과 홍세화 사이로
중도(中道), 힘과 부끄러움의 사잇길 | 중도(中刀), 너무 무겁지 않고 날렵하게 | 김훈, 위약(僞弱) 뒤에 숨은 당당함 | 홍세화, ‘똘레랑스’ 아래 흐르는 근본주의

2. 인문학, 보편주의와 실용주의 사이로
인문학, 솔직하게 위기를 받아들여라 | 고고한 교양의 고약한 함정 | 인문학, 보편주의와 실용주의 사이로

3. 인문학자, 메타세콰이어나무 숲 사이로
인문적 좌절과 환멸을 털고 | 이제까지의 인문으로 충분하다 | 나무들, 나무들에 마음을 뺏기며 | 캐나다를 위한 한탄 | 찢어진 모눈종이 | 인문학자, 메타세콰이어나무 숲 사이로

4. 인문학자, 솔직함과 뻔뻔함 사이로
요란한 주변과 고결한 중심 | 세계화, 보편학이 아닌 특수학에 주목하라구? | 우리 사회의 실용성, 그 무시무시함에 대하여 | 강남 좌파를 바라보는 모호한 잣대 | 애국주의, 포커페이스를 벗고 솔직해지자 | 인문학자, 솔직함과 뻔뻔함 사이로 | 세계화, 혹시 공공의 희생양? | 세계화 과정 속 고독한 전사들을 위해

5. 상품화, 위선과 위악 사이로
부박한 시대를 사는 뻔뻔한 방식 | 상품의 미학, 영혼을 잠식하다 | 마르쿠제의 ‘크고 헐렁한 바지’ | 『무소유』를 소유하는 시대에 살기

6. 희생양 만들기, 김일병과 전두환 사이로
희생양에 대한 진부한 설명은 집어치워라 | 사이버 희생양과 사이비 희생양 사이로 | 쓰레기만두, 원한과 폭력의 메커니즘 | 만인의, 만인에 의한, 만인을 위한 희생양

7. 민주주의, 우파 근본주의와 좌파 근본주의 사이로
실존을 긍정해? 혹은 체제를 긍정해? | 내 안의 파시즘? 네 안의 정치신학 | 대중독재론, 대중에 대한 지독한 오독 | 우파 근본주의와 좌파 근본주의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민주주의를 긍정하기로 하자

8. 교육, 자율과 공공 사이로
민주주의와 교육, 그 게임의 규칙 | 공병호와 복거일이 말하는 게임의 규칙 | 진보적 교육이론, 좀 공허하지 않은가 | 정운찬과 노무현에 대한 기대와 실망 | 열성과 아우성 사이에서 침묵하고 회의하기 | ‘희생양’도 못 되는 ‘희생소’의 비명

9. 소통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겸손하고 뻔뻔하며 쫀쫀한 방식
촛불의 바다, 소통의 부재 속에서 타오르다 | 힘과 폭력, 소통 아래 숨은 그림 찾기 | 강북 뉴타운, 소통의 부재 속에서 찾은 뻔뻔한 길 | 십대들이여, 꽉 막힌 교육을 뚫어라 | 우석훈과 박노자, 폭력적인 한국사회에 대한 폭력적 이해

저자 소개 

저 : 김진석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하대학교 철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철학자와 문학비평가의 길을 가며 텍스트를 분석했지만, 텍스트 해석만으로는 세상이 보이지 않았다. 정치로서의 삶과 직면해야 했다. 계간 『사회비평』 편집주간, 저널룩 『인물과 사상』과 계간 『황해문화』편집위원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Hermeneutik als Wille zur Macht』 『탈형이상학과 탈변증법』 『초월에...

출판사 리뷰

미국산 쇠고기 수입 논란, 대운하, 공교육 정상화 등 2008년 우리 사회의 논쟁은 끊이지 않는다. 각각의 논쟁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를 때마다 서로 반대 진영에게 던지는 논평은 날카롭고 비타협적이다. 수년 전 제도 정치에서 불어온 개혁의 바람 이후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다. 또한 웹2.0 세대의 양방향 토론 문화는 신선하면서도 거친 단면을 내보이며 매일 수천수만 건의 댓글을 생산하며 갈등의 불씨를 키우고 있다. 한국사회 논쟁의 역사에서 가히 전환기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금, 한 철학자가 자신이 15년간 고민해오던 정치철학적 개념을 내놓았다.
『기우뚱한 균형』은 한국사회의 우파와 좌파에게 권하는, 철학자 김진석의 정치비평이다. 책의 제목이 얼핏 철학적이고 서정적인 뉘앙스를 짙게 풍기므로 문학비평이나 인문비평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이러한 오해에 대해 저자는 “철학적이고 서정적인 말은 그 자체로 좋고 아름다울 수 있지만, 산문과 비평들의 제목으로 함부로 내걸리기 어려운 점이 있다”며 “사회적?정치적으로 민감한 상황에서는 시적 서정성이 오히려 모호함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고백했다. 그렇다면 왜, 김진석은 15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한국사회의 논쟁을 지켜보며 ‘기우뚱한 균형’을 이야기해왔을까. 이러한 궁금증은 현재 이 책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이유를 천천히 곱씹게 만든다.

김훈과 홍세화 사이로 걸어 들어간 철학자는 지금 어디에?

지금으로부터 15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독일 통일 이후 사회주의 국가들의 잇따른 몰락과 문민정부로 대표되는 한국사회의 정치구도가 급변하던 당시에 우리의 지식인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우파 지식인들은 “악의 승리를 만든 것은 선의 방관이었다”는 에드먼드 버크의 말을 다시금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좌파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들은 마르크스가 말한 “하늘 위로 공중분해되려던 견고한 가치들”이 행여 공중분해될까 우려하고 있었다. 1989년 독일에서 돌아와 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던 저자는 당시 사회를 바라보며 ‘기우뚱한 균형’의 화두를 고민하기 시작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우뚱한 균형’을 “제목으로 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고 느꼈다. 철학적으로도 부족한 점이 있었고, 사회적 구체성을 확보하기에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중략) 과정으로서의 현실성을 드러내는 까칠까칠한 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을 위한 작업의 대표적 이름이 ‘우충좌돌’이다. 먼저 우측에 부딪치기. 이제까지 주류였었고 앞으로도 한동안 강하게 남아 있을 우파에 부딪치기. 그 다음엔 좌측에도 부딪치기. 흔히 쓰는 ‘좌충우돌’에 대한 정치적 패러디인 셈이다.” 즉, 우리 사회의 논쟁에서 해법을 찾기 위해 저자는 김훈과 홍세화 사이로, 김일병과 전두환 사이로, 우파 근본주의와 좌파 근본주의 사이로, 자율과 공공 사이로, 우석훈과 박노자 사이로, 보편주의와 실용주의 사이로, 위선과 위악 사이로, 마지막으로 스스로의 솔직함과 뻔뻔함 사이로 우충좌돌하며 걷기 시작한다.

좌우간(左右間)을 걷는다는 말은, 철학자 김진석의 또 다른 중도 선언?

한국사회에서 좌파, 우파 어느 한 편에 서지 않고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겠다는 것은 흔히 중도로 오해되곤 한다. 얼핏 중도좌파 기든스의 『제3의 길』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결과적으로는 정치적 중도에 가까운 정책들이 옹호되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 책은 단순히 ‘정치적 중도를 위한 사용서는 아니”라고 못박는다. 그는 이어서 “현 상황에서 인권이나 개인의 권리에 관한 정책이 문제가 될 때, 나는 좌파적이거나 자유주의적 정책에 동의한다. 예를 들어 대체복무제의 도입에 찬성한다. 그러나 그 정책을 지지하는 글이나 주장이 완전무결한 평화를 전제하거나 목표로 삼을 때, 그래서 실재하는 모든 폭력을 엄격한 도덕주의의 관점에서 비난할 때, 나는 동의하기 힘들다”며 그가 주장하는 ‘기우뚱한 균형’의 구체적인 상을 선보인다. 정치적 역학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한편의 주장이 그야말로 말잔치에 불과함을 지적하며 그는 우파와 좌파를 막론하고 그들의 주장이 얄밉기도 하고 뻔뻔해 보이기도 하다며 사사건건 그들과 ‘삐딱하게’ 부딪친다. “그들 사이에서 부딪치며, 부딪치면서만, 겨우 균형은 기우뚱 잡히기 때문이다.”
우파와 좌파의 논리를 규명하는 철학자의 시선 한편에는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는, 날카로운 사회비평들이 기다린다. 여기서 그의 시각은 솔직하고 적나라하며 유머러스하다.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한편으로 ‘우충좌돌 지식인’,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문학자’로서의 관점을 반영하며 독자들에게 우리 사회를 보는 시선의 방식이 이처럼 다양하다는 것을 곱씹어 생각해보도록 돕는다. 여기서 그의 ‘기우뚱한 균형’은 실마리를 찾는다. 우리 사회의 논쟁이 끝없는 평행선을 달렸던 이유는 바로 우파와 좌파들이 낡은 패러다임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임을 전제하며 그는 ‘소통의 부재’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을 제시한다.

촛불집회를 이해하는 겸손하고 뻔뻔하며 쫀쫀한 방식

2008년, 우리 사회의 ‘소통의 부재’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바로 ‘촛불집회’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로 시작된 이 집회는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의 갈등이 정치적으로 조정되었던 과정이 총체적으로 실패했음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노무현 정부 때로 돌아가, 이라크 파병, 천성산 고속철도공사와 지율스님, 새만금 간척사업, 황우석의 배아복제, 한미FTA 등을 거치며 우리 사회(특히 지식인들)가 이와 같은 갈등과 대치를 단지 관전하며 사건별로 희생양(대표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양산되어온 풍경을 즐기기만 했던 것은 아닌가 날카롭게 지적한다.
현재 촛불집회에서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혹자는 제도정치로 돌아가 정당정치를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또 다른 일군의 지식인들은 일상정치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성급히 진단하기도 한다. 이 양편의 혼돈을 지켜보며 저자는 현재의 상황을 소통이 되지 않는 ‘지옥’이라고 단정짓는다. “지옥에서는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 원한과 분노가 꼬이고 꼬인 것이 소통을 막는다. 그래도 나는 소통이 잘 되지 않는 지옥 같은 한국 상황에서 이해하고 껴안아야 할 점이 많다고 본다. 사람들이 괜히 할 일 없이 바닥에서 기는 건 아니다. 제국주의적 경향에 비판할 점이 있더라도, 세계화 과정에서 실력을 키워야 할 점도 있다고, 쫀쫀하게 혹은 구차하게 이해하려고 한다. 이번 촛불집회에서도 시민들은 비폭력을 지켰다. 대단하지 않은가? 박노자가 말하듯, 사람들이 그저 억눌린 채 대한민국이라는 ‘불안의 지옥’과 ‘갑갑한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보여준 성숙한 태도를 보라. 불안과 공포 속에서도 그들이 사랑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감동과 경외를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그들은 이번에 불안과 공포를 떨쳐낼 수 있었다. 경찰과 대치하면서 그들이 보여준 자신감과 자존심은 그들이 이제까지처럼 불안과 공포에 짓눌려 있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그 자리에 참여해본 사람은 다 알 수 있는 일이다.”
소통이 되지 않는 현실을 포용하고 이해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저자의 말대로 “겸손하게 이해하려고 해볼 수 있고, 뻔뻔하게 이해해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쫀쫀하거나 구차하게 이해해야 할 때”도 있어서 정작 이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란 우스워 보일 수 있다. 저자는 그 우스워 보이는 균형 잡기를 15년 전 쯤 철학적이고 시적인 뉘앙스의 ‘기우뚱한 균형’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매번 균형을 잡기 위해 외줄을 탈 때마다 그는“어느새, 균형 잡는 일은 뻔뻔하고 쫀쫀하고 구차한 일이 되어버리기 일쑤”임을 절감한다. 그래도 저자는 기우뚱한 균형이 자신과 시대를 사랑하는 감각의 징표라고 믿고 있다. 십수 년의 지긋지긋한 논쟁 속에서도 우파와 좌파 양편에 애정이 있다면, 좋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