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대한민국명소 (2006~) (여행지)/1.서울시 관광

공평도시유적 전시관

동방박사님 2020. 2. 9.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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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 도시유적전시관

보존의 상생 - 공평동 일대는 1978년 "공평구역 도심 재개발지구"로 총 19개 지구가 지정되었고, 2010년까지

6개 지구의 재개발사업이 완료되었다. 2014~15년 재개발 사업 시행에 따른 문화재 발굴조사가 제1.2.4 지구에서 진행되었다. 조사 결과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4개의 시대별 문화층에서 건물지와 도로 등 유구와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그중 유구의 상태가 가장 온전히 남아있는 iv문화층 (16~17세기) 유구를 전시관 내부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공평동 도시 유적관은 도심정비 사업에서 발굴되는 매장문화재를 최대한 " 원위치 전면 보존" 한다는 원칙을 적용한 첫 사례이다. 

 

 

 

능성 구 씨 가옥의 변천

능성구씨 가옥은 구수영의 증손인 구사안이 동생 구사맹에게 대지의 서쪽 일부를 떼어 주고 집을 지어 살게 하면서 잠룡지가潛龍之家와 태화 정가太華亭家로 나뉘었다. 인조는 왕이 되기 전 외활아버지인 구사맹의 집에서 자랐다. 태화정은 구사안의 손자 구인후가 만들었다. 능성 구 씨와 가옥은 조선 후기에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 씨의 순화궁이 되었다가 일제 강 번시에는 이완용의 소유로 넘어갔다. 이후 요릿집 명월관의 주인 안순환이 인수해 명월관의 별관으로 사용했는데, 이때 태화정이 있던 자리라 하여 이름을 태화관太華館으로 고쳤다. 1919년 3월 1일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이 이곳 태화관 2층 끝 방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1921년에는 사회복지기관인 태화 여자관이 설립되었고, 1982년 도시 재개발계획으로 태화 여자관이 철거된 후에 현재의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이 들어섰다.

 

 

능성 구 씨 가옥과 이문

공평동 유적의 이문안길 끝에는 구수영(具壽英 1456~1524)의 집이 자리했다. 구수영은 세종의 여덟째 아들인 영웅 대군의 사위로 중종반정에 가담해 정국공신에 오른 인물이다. 영웅 대군의 형인 세조가 구수영을 영웅 대군의 사윗감으로 정해주고 살 곳을  마련해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종로 시전 뒷길에 위치한 능 성구 가옥이다. 가옥에서 종로 방향으로 연결된 길의 중간 지점에 지금의 공평동 유적이 있고, 그 길을 따라 종로와 만나는 지점에 이문里門이 위치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문은 야간 통행자를 검문하기 위해 마을 입구에 세우는 것이었지만, 능성 구 씨 가옥은 인조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 때문에 가옥으로 들어가는 동네 입구에 이문을 세워 순라꾼도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엄격히 통제하였다.

 

 

 

마루

마루는 나무로 짜서 만든 바닥 또는 마루가 놓인 공간을 말한다. 긴 널을 나란희 가는 장마루와 井자 모양으로 틀을 짜고 짧은 나무를 끼워 만든 우물마루가 있다. 한국의 주택에서 마루는 온돌방과 결합하면서 독특한 의미와 기능을 가지고 발전해왔다. 마루방은 시원하여 여름철의 주된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집의 가운데에 놓인 큰 마루는 대청마루라 하여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기 때문에 누마루와 다락의 바닥에도 사용되었다. 습기를 피하기 위한 창고의 바닥에도 마루를 깔았다. 논돌이 널리 보급되기 이전에는 주택내의 여러 방이 마루방으로 구성되었다.  

 

 

도기

공평동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도자기다. 도자기는 원 재료인 흙의 종류와 굽는 온도 등에 따라 자기瓷器와 도기陶器로 구분한다. 조선시대 도자기는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지만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식기라 할 수 있다. 자기는 주로 발鉢, 잔盞, 접시蹀匙, 등 반상기에 해당하는 그릇으로 제작된 반면 도기는 물과 음식을 보관하는 항아리 형태의 저장기로 제작되었다. 발효음식 문화가 발달한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종류의 장醬과 음식을 발효시키는 용기로 도기항아리가 널리 스였다. 도기항아리는 곡식이나 젖갈 같은 다양한 식자재을 보관하기 위해 다양한 크기로 제작되었다. 한강변의 마포와 용산에 도기를 만드는 가마가 들어선 것도 도성과 그 주변에서 도기 항아리 수요가 높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조건시대 도기항아리는 내구성과 실용성을 높이기 위해 항아리 주둥이를 넓고 두툼하게 만들었다, 조선 후기에는 도기 표면에 유약을 입힌 옹기甕器가 널리 쓰였다.

 

 

명문자기

공평동 유적에는 글자나 부호 등 명문銘文이 표시된 다수의 백자, 분청자, 청자 등이 출토 되었다. 분청자의 명문은 내섬內贍 내자內子(內資의 오기), 경주慶州 등으로 그릇의 소비처와 생산지를 가리킨다. 백자의 굽 안쪽에는 天.地.玄.黃.左.右別. 등의 명문이 새겨진 것이 많은데, 이는 조선 전기 관요에서 제작된 것임을 의미한다 . 이로써 궁궐뿐아니라 공평동을 포함한 궁궐 주변에서도 관요 백자가 쓰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용 중에 명문이 표시되는 그릇도 있었다. 공평동 유적에는 백자의 굽에 먹으로 글씨나 부호를 표시한 묵서墨書 백자들도 다수 출토되었다. 묵서백자에는 '쟈근' '막비' '은비' '덕향' '귀금' '막더기' 등 여성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한글이 쓰여있었다. 당시에는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때 잔치를 벌일 때 이웃의 그릇을 빌려 쓰거나 그릇을 빌려주는 세기전貰器전 을 이용했다. 따라서 그릇을 되돌려 받기 위해서는 소유 관계를 나타내는 여러 표시가 필요했을 것이다. 

 

제기

조건은 예禮를 중시하는 성리학을 국가의 근보이념으로 삼았다. 예의 기본은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로 개인은 몰론 나라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무였다. 공평동 유적에서는 제사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접시, 청동발, 청동향로등의 제기가 출토되었다. 인근 청진 1지구 유적에서도 작爵 발鉢 .잔盞. 접시楪匙로 구성된 41점의 청동제기가 출토된 바 있다. 청동제기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그릇과 달리 신성한 의미를 품은 귀한 물건이었다. 금속재질의 그릇은 녹여서 다른 물건으로 만들 수 있는 긴요한 자원이므로 비록 파손되더라도 따로 모아 보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공평동유적에서 출토된 청동향로는 향로 주둥이 장식 일부가 떨어져 나간 상태로 확인되었다. 이외에도 공평동 유적에서는 흑갈색 유약을 입힌 흑갈유자기와 백자로 제작돤 것까지 다양한 재질의 향로가 출토되었다.

 

생활용품

공평동 유적에서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출토 되었다. 종류별로 나눠보면 자기류가 가장 많았다. 특히 문장 장식이 없는 백자류가 대다수로 상감백자. 청자.분청자. 흑유자 등과 함께 출토되었다. 백자 편병扁甁이나 항아리 뚜껑은 주로 경기도 광주의 관요官窯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기류는 일반적으로 그릇으로 쓰였지만, 가마에 구운 후에는 단단해지는 성질로 인해 얼마든 원하는 형태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릇 외에도 노리게 장식부터 화분, 도장, 의자, 인형 등 다양한 물건으로 만들어 졌다. 출토된 다양한 유물 중에는 용도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 동전모양으로 동그랗게 만든 다양한 크기의 질그릇현은 서울의 다른 여러 유적에서도 출토되었다. 이 유물의 용도에 대해서는 판놀이의 말, 징표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으마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다양한 상공업 물품들

공평동 유적에서는 시전 배후 공간이라는 장소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상공업 관련 물품들이 다수 발굴되었다. 드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화페로, 17세기 후반부터 도성을 중심으로 유통되었던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주를 이루었다. 출토된 상평통보에서 호조戶曹, 황해감영黃海監營, 진휼청, 통위영, 총융청 등의 글자를 확인할 수 있는데 화폐를 발행한 관청을 나타낸다. 또한 청나라 건륭제 때 만들어진 건륭통보와 일본 에도시대 화폐인 관영통보가 출토된 것을 미루어 조선시대 한양에서는 여러 관청과 지역에서 발행한 화폐는 몰론 적은 수량이나마 이웃나라의 화폐까지 거래되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시전 상품의 제작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는 다양한 재료와 도구들도 출토되었다. 이중 특히 원형철제편이  많았는데, 이는 철제품을 만들기 위한 덩이쇠로 제품의 원재료이기도 하다. 하지만 화폐로서의 효용가치도 높았다. 공평동 65번지 에는 철제 연알이 발견되었다. 연알은 악재를 가루로 빻거나 즙을 내는 데 사용했던 연의 부속품으로 연에 물체를 넣고 갈 때 굴리는 바퀴 모양의 쇠붙이를 가리킨다. 이외에도 돌을 깨거나 나무를 쪼갤때 사용하는 철정鐵釘, 무거운 물건을 계측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20.7cm 무게 4.5kg 의 대형 철제 추錘, 나무로 만들어진 신발본과 옷감을 짜는 베틀의 북도 출토되었다.  

 

 

 

중국에서 수입된 청화백자

공평동 유적에서는 중국에서 수입된 청화백자가 여러 점 출토되었다. 조선은 15세기 중반부터 청화백자를 생산하기시작했다. 순잭의 백자에 푸른 문양이 그려진 아름다운 청화백자는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당시 청화백자는 중국에서 수입된 값비싼 코발트 안료로 문양을 그렸기 때문에 조선에서 만들어진 청화백자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매우적었다. 조선의 청화백자를 구하기 어려웠던 한양의 부유층은 중국 청화백자를 썼다. 정부에서는 도성민의 사치를 막고 중국에서 들어오는 물건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못하도록 중국산 청화백자의 사용을 금지했을 정도로 다이 많은 청화백자가 중국에서 수입되었다. 

 

백자청유음각용문동체부편 白磁靑釉陰刻龍紋胴體部片

용 문양이 서로 마주보는 중국양저우 소장품과 공평고 유적 출토품

공평동 45번지에 출토된 백자청유음각용문동체부편白磁靑釉陰刻龍紋胴體部片은 중국 원나라때 제작된 고급백자로 원래 기종은 매병으로 추정된다. 외면 용무늬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청색의 유리질로 안료를 바르고 그 위에 투명한 유약을 씌웠다. 이전까지 원나라 때 만들어진 백자나 청화백자가 국내에서 출토된 사례는 보고된 바 없다. 이러한 종류의 매병은 중국에서 남유백룡문매병남藍釉白龍紋䊈甁으로 불리며, 매우 희귀하여 현재 유사한 작품이 프랑스 기메박물관과 중국 양저우박물관, 이화원에만 소장 되어 있다. 공평동 유적에서 출토된 것은 매우 작은 파편이지만 차후 조선과 명나라 뿐만 아니고 고려와 원나라 백자교류 관계를 실증할 수 있는 유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제일의 번화가, 시전거리

조선시대 시전의 형성과 변화

조선시대 건편방 지역에는 시전 중신가인 운종가雲從街가 위치하였는데 그 뒤편 북쪽이 바로 공평동 유적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공평동 유적은 시전의 연장선상에 있던 지역으로 볼 수 있다. 한양의 시전은 태종 12년(1412) 2월부터 1414년 사이에 여러 차례에 걸쳐 총 2천여 칸 규모로 건설되었다. 각종 상인들이 무질서하게 상행위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가에서 상점을 건축하여 빌려 주었는데 이 상점을 시전 행랑이라고 한다. 이때 건설된 행랑 중에 경복궁 남쪽의 혜정교로부터 종묘 앞의 누문구간과, 종로에서 광교에 이르는 구간이 시전 행랑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종로 1가에서 3가에 이르는 지역과 남대문로가 일대를 가리킨다. 이 구간 만으로는 늘어나은 시전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성종 3년(1472) 종묘 앞 일대를 시전 구간으로 추가하였다. 지금의 종로 4가에 해당하는 곳이다. 원래 이곳에는 1414년 공사로 이미 행랑이 건설되어 있었는데, 그 행랑의 용도를 변경하여 시전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조선 초에 건설된 시전 행랑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이에 대한 본격적인 복구는 17세기 초 광해군대에 이루어빈 것으로 추정된다. 18세기 초에는 시전이 취급하는 물품에 대한 등록이 이루어지고, 이를 계기로 일종의 전매특허권인 금난전권禁亂廛權이 명확한 권리로 성립되었다.18세기 말, 19세기가 되면서는시전이 아닌 점포상업과 개별 상인들에 의한 난전이 성행하면서 시전 이외에서도 상업이 활성화되었다.

 

시전 상점의 종류와 물품유통

시전은 도성 내 주민에게 생활 용품을 판매하고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하는 기능을 했다. 그 밖에 정부가 공납받은 물품 중에서 남은 것이나 중국 사신이 가저온 물건의 일부를 일반 주민에게 판매하는 일도 겸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전이 취급하는 물품의 종류와 품목은 점점 다양해졌다. 시전 형성 초기에는 각 시전 간에 규모와 영업의 차이가 크지 않았지만 점차 경제적, 사회적으로 확고한 지위를 갖는 시전들이 나타났다. 이들 중 비단(선전), 명주(면주전), 무명(면포전), 베(저포전), 종이(지전), 생선(어물전)을 파는 여섯 종류의 시전을 추려서 특별히 육의전六矣廛이라고 하였다. 육의전은 정부에 물품을 조달하는 국역의 의무를 지는 대신 정부로부터 취급 상품을 독점적으로 사고 팔 수 있는 금난전권의 특권을 부여 받았다. 한양 사람들이 시전에서 구입하는 물품은 여러 단계의 유통경로를 거친 것이다. 먼저 개성상인과 의주상인 같은 향상鄊商이나 배에 물건을 싣고 다니며 파는 선상船商이 상품을 가지고 한양에 들어와서 경강 등지에 여객 주인에게 상품울 넘기면, 여객주인은 이를 시전 상인에게 판매한다. 시전 상인은 한양의 소비자에게 상품을 직접 판매하거나 중간도매상인 중도아中都兒에게 넘긴다. 중도아 또한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거나 행상인에거 넘긴다.

 

시전상인 조직과 행랑구조

육의전처럼 큰 시전은 각 시전마다 상인 자치조직인 도중을 구성하였다. 이 조직은 정부에 대한 조달을 총괄하고 상품판매권을 독점하였다. 모든 시전 상인은 도중에 가입해 도원이 되었으며 엄격한 심사에 의해 그 자격이 주어졌다. 도중에 가입하는 경로는 기존 도원과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과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구분된다. 혈연관계의 경우는 상업 활동을 배우기 위해 15세가 되면 시전에 나와 일을 하면서 가업을 이을 준비를 시작하였다.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은 도중 총회의 투표를 통해 가입 여부가 결정되었는데 반대표가 3표 이상이면 가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도중에 가입한 도원은 도약의 규약을 준수하고 수리비, 경조금, 회의비 등의 경비를 부담할 의무가 있었다. 시전 건물은 물품의 매매가 이루어지는 행랑과 사무실겸 창고 역할을 하는 도가로 구성되었다. 행랑 건물은 대개 2층의 목조기와집으로 건설되어 1층은 점포로, 2층은 상품보관 창고로 이용되었다. 육의전 행랑의 규모는 1840년 화재 때 저포전의 소실 건물이 133칸, 진사전이 50칸, 상전이 120칸, 입전은 본청만 50칸에 이르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100칸 내외였을 것이며,작은 규모의 시전도20~30여 칸 정도 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근대 공평동 시전 거리의 변화

공평동 주변 시전 거리는근대와 일제강점 이후에도 여전히 조선 상업의 중심지이자 서울의 대표적 시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점차 기능적, 공간적으로 변화되어 갔다. 1906년에는 공평동 5번지에 사설 중앙시장이 설립되어 성황을 누리다가 1918년에 페지되었고, 그 이듬해 맞은편 대형 필지에 종로 공설시장이 개설되었다. 1916년부터는 종각에서 종로3가 및 지금의 우정국로 주변까지 야시장이 개설되어 1940년 폐쇄될 때까지 경성의 명물이 되었다. '신식시장'의 등장으로 상업공간은 주변 지역으로 점차 확장되어 갔다. 사전 행랑 자리는 털가죽 제품과 방석, 모기장 등 공산품을 파는 상점이아 상회호 바귀었으며 화신백화점과 동아백화점 같이 많은 수의 매점에서 필요한 상품을 동시에 구입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시장도 등장하게 된다.  

 

 

 

근대 공평동

조선시대 건평방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이 변화하면서 공평동公平洞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36년 공평정公平町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해방 이후 1946년 다시 공평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시기 공평동유적 주변 골목에는 법률사무소, 건축사무소, 인쇄소, 회관 등 다양한 근대적 시설이 새로이 자리잡앗고, 서민을 대상으로 한 설렁탕집, 선술집, 색주가와 요릿집, 기생조합도 모여 있었다. 또한 시전거리는 공산품 판매점이 늘어났고 야시장과 공설시장, 백화점이 등장하는 조선시대 시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18세기 ~19세기

복원대상으로 삼은 전동 골목길 지면은 16~17세기에 해당하며 해발 25.3m에 복원 되었다. 즉 실제 발굴된 지면보다 낮은 해발 22.5m에 복원 되었다. 즉 실제 발굴된 지면과 복원된 지면 높이는 약 3m 정도 차이가 난다. 한편 근대 공평동의 배경이 되는 19세기-일제강점기으 ㄴ16-17세기 지면보다 약 2m 높은 곳에 위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