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대한민국명소 (2006~) (여행지)/1.서울시 관광

종각 피맛골 역사투어

동방박사님 2020. 2. 8.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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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종각역 시전행랑 (市廛行廊) 유적

국가에서 점포를 건설하여 상인들에게 임대하고 세금을 받는 관설 시장을 시전(市廛) 이라한다. 조선 태종 [태종 재위 1400~1418] 종로에 양쪽 건물이 길게 늘어선 행랑을 조성하여 이곳에서 장사를 하게 하였다

 

의금부 터 (義禁府 跡)

의금부는 조선시대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었으며, 금부, 금오, 왕부라 부르기도 하였다.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은 서울의 좌. 우포도청과 지방의 각 진영 및 군.현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 중죄인 즉,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은 국왕의 특별한 명령에 의해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앗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이승훈 베드로가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고, 1801년의 신유박해 때 권철신 암브로시오가 순교한 아래 많은 천주교 선교사와 지도층 신자들이 이곳에서 신앙을 지켰다. 1801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와 최창현 요한 회장도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문초를 당했고, 앵배르(범)라우렌시오 주교, 모방(나)베드로 신부, 샤스탕(정) 야고보 신부, 정하강 바오로 성인 등 주교나 신부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혹독한 국문과 문초를 겪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도 베르뇌(장) 시메온 주교, 브르트니에르(백) 유스토 신부, 도리(김)베드로 신부, 볼리외(서)루도비코신부들과 전장운 요한, 최형 베드로, 정의배 마르코 성인도 문초를 당하며 마지막까지 신앙을 지켰던 곳이 바로 포도청과 의금부이다.

 

 

조선시대의 청진지구

 

한양의 심장 운종가

조선시대 운종가(雲從街)는 시전이 설치돼 수많은 점포가 즐비하게 들어섰던 곳으로, 이름 그대로 ' 사람과 물화가 구름처럼 몰려드는' 경제 중심지였다. 조선의 정치1번지 육조거리와도 이어지며, 서울 600년의 모습이 지하(현 지표아래) 4~6m 깊이에 문화층별로 켜켜이 쌓인 채 보존돼 있는 ' 조선의 폼페이' 이기도 하다.

<청진 12-16 지구 문화재 보존 및 전시관>은 서울 특별시 종로구 청진동 119-1번지 일원에 위치한 청진 12-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에서 발견된 건물지, 우물, 도로 등 유구(遺構, 옛 건축물의 흔적)를 보존. 전시하는 공간이다. 우리가 발 디디고 서 있는 서울 땅, 그 아래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조선시대 운종가와 600년 역사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1400채 이상의 거대시장

청진동

 

사람만을 위한 길, 피맛길

피맛길은 너비2.5~3.8m의 작은 길이다 백성들이 고관대작의 행차를 피해 다니던 뒷골목으로, 그 명칭 또한' 높은사람들의 말을 피하다[避馬]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피맛길은 1412년(태종12)에 시전행랑을 조성하면서 만들어 졌다. 초기 피맛길의 너비는 약6m 정도였으며 육의전 장랑의 뒷물길로 조성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차츰 물길이 메워지고 앞 뒤 집들이 확장되면서 점점 좁아져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피맛길이 되었다. 피맛길은 서울의 모든 작은길이 그러하듯 건천으로서 비가 오면 물이 넘치고 마른 알은 하수를 한쪽으로 받아서 길로 이용했다.

 

피맛골 (避馬골)

조선 시대 종로는 궁궐과 관각가 가가워 가마나 말을 탄 고관대작의 왕래가 잦은 큰길이었다. 조선시대 하급관료나 서민들이 큰길을 가다가 고돤대작을 만나면 길가에 엎드려 예의를 표했는데. 이런 일이 빈번하자 번거로웠던 서민들이 아예 큰길 양쪽 뒤편의 좁은 골목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길을 따라 목로주점,  모주집,장국밥집이 연이어져 서민들에게 사랑받는 장소가 되었고, 마를 피하는 골목이라 하여 피맛골(避馬골) 또는 피마길이라고 불렀다. 

 

 

 

전옥서 터 (典獄署 )跡

전옥서는 형조에 속한 감옥으로, 죄인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던 관서였다. 전옥서는 남자 옥사와 여자 옥사로 구분 되어 있었고, 수감되는 죄수의 대부분은 상민이었다. 때에 따라 의금부나 육조, 왕실의 계보를 편찬하고 왕족의 허물을 살피던 관아였던 종부시, 사헌부 소속의 왕족이나 양반, 관리도 수감되었다. 박해 시기 많은 천주교인이 형조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