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역사이야기 (책소개)/4.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의사 평전

동방박사님 2022. 11. 2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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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대한민국 독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매헌 윤봉길 의사의 전 생애를 담은 평전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선구적 농민운동가인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장절 겸 전승축하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수뇌부에 큰 상해를 입혔고, 이 거사는 대한민국 독립 운동에 활로를 만들었다. 2022년 올해는 상해 의거 90년을 맞이한다.

이 책은 대한민국 독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매헌 윤봉길 의사의 전 생애를 담은 평전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선구적 농민운동가인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장절 겸 전승축하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수뇌부에 큰 상해를 입혔고, 이 거사는 대한민국 독립 운동에 활로를 만들었다. 2022년 올해는 상해 의거 90년을 맞이한다.

목차

매헌 윤봉길 의사 기록사진 · 4
머리말(개정판) · 30
발간사(초판) · 50
책 머리에(초판) · 52

1 윤봉길 의사 탄생 시점의 대한제국 국내외 상황
제1절 조선왕조가 국운 쇠락의 시기에 접어들다 · 58
1 1860년대의 조선: 백성의 삶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민란이 계속해서 일어나다 · 60
2 조선의 개항 ‘함포외교’에 굴복해 일제에 문을 열다 · 63
3 조선을 둘러싸고 일본과 러시아의 다툼이 심해지다 · 68
제2절 조선왕국 자신을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개혁을 추진하다 · 73
1 조정 안팎에서 개혁이 추진되다 · 74
2 러일전쟁, 대한제국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다 · 78
제3절 대한제국, 격렬한 항일운동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다 · 82
1 일제, 대한제국을 자신의 ‘보호국’으로 만들다 · 83
2 대한제국,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다 · 86
3 국내에서 항일구국운동이 여러 형태로 전개되다 · 88
4 항일구국운동이 해외에서도 전개되다 · 93
5 대한제국, 경술국치를 당하다 · 96

2 윤봉길 의사의 출생과 유·소년기
제1절 비상한 시국에 비상한 사명을 받고 태어나다 · 102
1 “일본 제국주의를 놀라고 두렵게 한 영웅의 탄생” · 103
2 매헌의 집안 내력 · 105
3 매헌이 태어난 곳: “인걸은 지령(地靈)이다” · 108
제2절 3ㆍ1운동에 자극을 받아 일제 초등학교를 자퇴하다 · 112
1 일제의 무단통치가 시작되다 · 113
2 유아기부터 억센 뚝심을 보여주다 · 115
3 어머니와 큰아버지의 교육: 절의지사와 구국 영웅의 생애를 가르치다 · 119
4 덕산공립보통학교에서 식민지 교육에 반발하게 되다 · 122
5 3ㆍ1운동을 계기로 자퇴하다 · 126
제3절 조선의 전통 유학자가 세운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공부하다 · 128
1 〈동아일보〉와 〈개벽〉을 읽으며 새 세계에 접하다 · 129
2 성주록 선생의 오치서숙에서 공부하다 · 131
3 결혼: 무뚝뚝하면서도 다정다감했던 신랑 · 136
4 묘표 사건: “무지가 외침(外侵)보다 무섭다” · 141
5 성주록 선생으로부터 매헌이라는 호를 얻다 · 142

3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들다
제1절 야학당을 열고 무장투쟁론을 설파하다 · 146
1 스스로 서당을 열었다가 동지들과 함께 야학을 시작하다 · 147
2 무장투쟁론으로 기울어지다 · 152
제2절 『농민독본』을 짓다(1): 제1권과 제2권의 내용 · 156
1 〈조선농민〉으로부터 자극을 받다 · 157
2 『농민독본』의 내용 · 159
제3절 『농민독본』을 짓다(2): 제3권의 내용 · 169
1 인간평등사상 및 자유사상을 담다 · 170
2 조선농촌개조론을 전개하다 · 174
제4절 목계농민회 조직으로부터 월진회 출범으로까지 · 179
1 목계농민회를 조직하다 · 180
2 신간회에 관심을 갖다 · 183
3 윤독회와 위친계를 시작하다 · 184
4 부흥원을 설립하다 · 185
5 ‘반일적’ 학예회 개최로 경찰의 주목을 받다 · 186
6 월진회를 출범시키다 · 187
제5절 광주학생항일의거 등에 감동해 학생들에게 ‘항일전선’에 나서도록 격동시키다 · 191
1 일기를 쓰기 시작하다 · 192
2 광주학생운동과 매헌의 격정적인 연설 그리고 피검 · 196

4 중국으로 망명하다
제1절 “사나이가 집을 나섰으니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으리” · 200
1 자유와 생명의 이상향에 대한 꿈을 담은 이향시(離鄕詩)를 남기다 · 201
2 집을 떠나다: 중국 형가와의 비교 · 207
제2절 선천경찰서에서 고초를 겪은 뒤 동지들을 만나다 · 213
1 서울을 거쳐 신의주로 · 214
2 불심검문 때도 일본 경찰관에게 덤벼들다 · 215
3 김태식·선우옥·한일진 등과 독립운동에 대해 토론하다 · 217
제3절 청도에서의 생활: 조국을 향한 ‘강의(剛毅)한 사랑’을 다짐하다 · 221
1 자신은 빈궁하면서도 동지에게는 노자를 나눠주다 · 222
2 “굶주림과 추위 속에 유랑하다” · 224
3 어머니와 편지를 주고받다: “나 개인보다 조선 전체가 중요하다” · 226
4 어린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 230
제4절 상해에서의 생활(1):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접촉 그리고 노동자 생활에 초점을 맞춰 · 233
1 일제 당국의 수사를 교란하기 위해 엇갈리게 진술하다 · 235
2 안공근과 깊은 대화를 나누다 · 239
3 인삼 행상을 거쳐 모자공장에서 일하다가 그만두다 · 242
4 잠시 미국행을 생각하다 · 245
제5절 상해에서의 생활(2): 만보산사건과 만주사변에 분노하다 · 249
1 매헌, 만보산사건의 본질을 꿰뚫어보다 · 250
2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임정이 ‘한인애국단’을 결성하다 · 253

5 윤봉길 의사, 마침내 왜적 수뇌부에 폭탄을 던져 응징하다
제1절 이봉창 의사 의거에 큰 자극을 받다 · 258
1 한인애국단, 해외 동포의 지원을 받아 활동자금을 마련하다 · 259
2 한인애국단의 첫 사업, 이봉창 의사 의거: 윤봉길 의사를 격동시키다 · 263
제2절 일제, 상해사변을 일으킨 데 이어 괴뢰국 ‘만주국’을 세우다 · 274
1 계략을 꾸민 뒤 상해사변을 일으키다 · 275
2 일제, ‘만주국 건국’을 선언하다 · 279
제3절 김구 국무령과 긴밀하게 협의하며 상해의거를 준비하다 · 280
1 탄약창고 파괴계획에 참가하다 · 281
2 홍구의거를 준비하다 · 286
제4절 물통폭탄으로 침략군 수뇌부를 도륙하다 · 298
1 홍구공원에 입장하기까지: 김구와 윤봉길의 감동적인 작별 · 299
2 일본 국가가 합창될 때 수류탄을 던지다 · 301
제5절 일제의 한인 독립운동가 검거 선풍 속에 임정이 피난길에 오르다 · 310
1 동북아시아 3개국 그리고 서방세계에 큰 충격을 주다 · 311
2 김구, 가흥으로 피신하다 · 313

6 순국한 뒤 암장됐으나 일제 패망 이후 거족적 환영을 받으며 유해가 봉환되다
제1절 혹독한 수사를 거쳐 사형을 선고받다 · 318
1 헌병대에서 신문을 받다 · 319
2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다 · 324
3 시라카와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사형선고를 앞당기다 · 328
4 일제 내무성, 「사건의 전말」을 정리하다 · 331
제2절 김구 체포를 유도하기 위해 윤 의사의 사형 집행을 연기하다 · 334
1 왜 연기했을까? · 335
2 일제, 김구 국무령 추적을 계속하다 · 337
제3절 가나자와 육군작업장에서 순국하다 · 341
1 윤 의사를 일본으로 연행하다 · 342
2 일본인도 놀란 ‘강담ㆍ침착(剛膽·沈着)’한 최후 · 344
3 십자가 형틀에 묶인 채 순국하다 · 350
제4절 유해를 암장했으나 일제 패망 뒤 발굴되어 환국하다 · 353
1 매장에 관한 규정과 〈기타구니신문〉 보도를 다시 검토한다 · 354
2 일제, 윤 의사에게 보복하고 모욕을 가하다 · 356
3 가나자와 한인들, 마침내 암장지를 찾아내다 · 358
4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봉장(奉葬)되다 · 366

7 윤 의사 의거의 역사적 공헌
제1절 한인들, 크게 고무되어 임정을 적극 지원하다 · 373
1 민족주의 계열, 윤 의사를 격찬하다 · 374
2 공산주의 계열: 레닌주의의 관점을 보이다 · 377
3 해외 한인들, 임정을 적극 지원하다 · 381
제2절 중국인의 한인에 대한 태도가 크게 호전되고 동시에 중국인의 항일 의식을 고조시키다 · 384
1 중국인 태도 변화에 대한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증언 · 385
2 상해의 신문들, 윤 의사를 칭송하면서 스스로 반성하다 · 387
제3절 장개석정부, 한인 항일운동을 두 갈래로 나눠 지원하다 · 393
1 장개석정부, 처음에는 신중한 반응을 보이다 · 394
2 장개석, 김구의 면담 요청에 응하다: 그 시기는? · 398
3 면담이 성사되는 과정 · 401
4 중앙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이 설치되다 · 403
제4절 장개석 총통, 카이로선언에 한국 조항이 포함된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다 · 407
1 일제의 중국 침략과 미국 침략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조선=한국독립운동 · 408
2 카이로회담이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선언하다 · 415
3 루스벨트의 역할과 장개석의 역할 · 416

제5절 맺음말: 윤봉길 의사,자신을 버림으로써 민족을 살리고 또한 민족의 진로를 제시하다 · 426
1 윤 의사의 생애를 요약한다 · 427
2 현양사업이 뒤따르다 · 428

각주 · 436
매헌 윤봉길 의사 관련 자료 · 453
매헌 윤봉길 의사 연보 · 470
매헌 윤봉길 의사 현양사업 연보 · 472
이름 색인 · 474
항목 색인 · 484
 

저자 소개

저 : 김학준
 
943년 중국 심양에서 출생하여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인천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자랐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로 활동했다. 서울대학교대학원과 미국 켄트주립대에서 정치학 석사를 받고, 피츠버그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1983년도에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현재 단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지내고 있다. 1992년 상해 의거 60주년을 기념하여 이 책의 초판에 해당하...
 

출판사 리뷰

이 책은 대한민국 독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매헌 윤봉길 의사의 전 생애를 담은 평전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선구적 농민운동가인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장절 겸 전승축하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수뇌부에 큰 상해를 입혔고, 이 거사는 대한민국 독립 운동에 활로를 만들었다. 2022년 올해는 상해 의거 90년을 맞이한다.

대한민국 국민 중에 윤봉길 의사를 모르는 이가 없으나 정작 그의 생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대중은 의외로 드물다. 이 책은 윤봉길 의사가 태어나기 전의 조선과 대한제국의 상황, 윤봉길 의사의 출생과 어린 시절, 선구적 농민운동가로서의 활동과 업적 그리고 중국 망명 생활을 거쳐 상해 의거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순서대로 윤 의사의 일생을 볼 수 있게 집필 되어 있다. 상해 의거 후 윤봉길 의사의 심문, 처형, 암장 그리고 유해 발굴의 과정 역시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윤봉길 의사가 거행한 상해 의거가 대한민국 독립에 미친 역사적 의미와 공헌에 관한 내용도 읽어볼 수 있다. 결코 길지 않은 24년이라는 시간을 불꽃처럼 살다 떠난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업적, 공헌을 독자가 마치 한 권의 소설처럼 읽어 갈 수 있게 평하고 있다.

이 책은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 90주년을 기념하여 펴내는 기념 도서이기도 하다. 저자는 1992년 펴낸 초판 도서를 바탕으로 하되, 한자가 많던 초판본의 어려운 글과 말 대신 한글로 쉽게 풀어 대중이 더욱 가깝게 읽고 이해할 수 있게 정리했다. 또한 지난 30년 간 더해진 윤봉길 의사에 대한 연구, 새로이 발견된 자료 등을 보태어 집필했다. 크게 12가지 항목이다.

1. 윤 의사 고향에서의 수학과 활동
첫째, 상해에서 약 10개월 동안 매헌과 숙식을 같이했으며 그의 의거 뒤 그의 일기와 메모를 바탕으로 『윤봉길전』을 쓴 김광 선생은 매헌에 영향을 크게 끼친 스승으로 ‘이광운(李光雲)’을 지적하고 그에 대해 길게 설명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여타의 어떤 저술에서도 등장한 일이 없다. 매헌의 저술들을 두루 살핀 김희곤 교수 그리고 매헌을 깊이 연구하고 그에 대해 책을 쓴 김상기 교수는 그가 아마 매헌의 스승으로 널리 공인된 오치서숙(烏峙書塾)의 ‘성주록(成周錄)’일 것이라는 추론을 제시했는데, 이 주제는 앞으로 계속 연구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둘째, 이상재·윤규상의 『인간 윤봉길 연구』 그리고 그 책을 계승한 신호웅·이상재·윤규상의 『매헌 윤봉길 의사 일대기』를 비롯한 몇몇 책들은 매헌이 성주록 선생의 인도를 받아 충청남도 홍성의 유교부식회(儒敎扶植會)와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평생을 백부 윤 의사 연구에 바친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윤주(尹洲) 부회장은 그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반론했다. 매헌은 유교부식회와 무관했다는 것이다.
셋째, 김상기 교수를 비롯한 몇몇 연구자들은 매헌이 오치서숙에서 수학하기에 앞서 최은구의 서당에서 수학했다고 주장했다. 대조적으로, 윤주 부회장은 그 주장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2. 윤 의사의 출향 직후 신의주와 단동에서의 생활
첫째, 신호웅·이상재·윤규상 세 공저자는 윤 의사가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출향한 직후 경의선 열차로 신의주에 도착한 때로부터 약 6개월에 걸쳐 ‘신의주산업조합’에서 일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상기 교수는 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둘째, 기존의 저술들은 윤 의사가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넘어 단동(丹東)에 도착한 때로부터 일정한 기간(대체로 3개월 정도)에 걸쳐 만주의 한인 독립군 세력을 방문했다고 썼다. 저자(김학준) 그리고 저자의 초판에 바탕을 두고 저자와 함께 매헌의 약전을 쓴 이수항(李琇恒) 전 동아일보사 부국장도 그 저술들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윤봉길 상해의거 80주년에 맞춰 간행된 『매헌윤봉길전집』에 수록된 새로운 자료는 윤 의사가 단동에서 곧바로 청도(靑島)로 떠났음을 보여주었다. 이 자료에 근거해 김상기 교수는 기존의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기존의 저술들이 제시한 설명을 완전히 배척하기 어려운 만큼 이 주제는 앞으로 계속해서 연구될 만하다.

3. 윤 의사가 김구를 처음 만난 시점
윤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이면서 상해대한인거류민단(약칭 상해한인교민단) 단장이던 김구를 만남으로써 성사됐다. 그러면 그 만남은 언제 처음 이뤄진 것인가? 윤 의사의 상해에서의 여러 행적을 설명함에 있어서 중요한 이 물음에 대해 크게 보아 두 개의 대답이 제시되어왔다. 하나는 윤 의사가 1931년 6월 23일에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교민단 사무실을 찾아가 만났다는 설명이다. 다른 하나는 이봉창 의사가 1932년 1월 8일에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했다는 보도 이후의 어느 날일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 책의 제4장 제4절 제1항 그리고 제5장 제1절 제2항에서 논한다.

4. 윤 의사의 미국 유학 계획
김광 선생의 책 『윤봉길전』은 윤 의사가 1931년 5월 8일(음력, 양력으로는 6월 23일)에 상해에 도착한 때로부터 2개월 지난 시점에 세계혁명사를 공부할 목적으로 미국 유학을 결심했으나 1932년 1월 28일에 일본군이 상해를 침공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꿈꾸는 혁명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자각하면서 미국 유학 계획을 포기했다고 썼다. 윤 의사가 한때 미국 유학을 계획했다는 사실은 이 책에서 처음 밝혀졌을 뿐, 다른 어떤 책에서도 언급된 일이 없었다. 이후 연구자들은 윤 의사의 그 결심에 대해 관심을 쏟았으나 자료가 워낙 수효가 적고 보잘것없어 더 이상 진전을 보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하나의 연구 과제로는 남아 있다.

5. 윤 의사와 상해의 일제 탄약창고 폭파 계획
왕웅(王雄)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중국에서 장개석의 중국국민혁명군에 입대해 19로군 상해병기창에서 복무하던 한인 김홍일(金 弘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윤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에 앞서 자신과 김구가 상해의 일제 탄약창고 폭파 계획을 세웠으며 그 계획에 윤 의사가 참가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김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 계획에 대해서는 자세히 회고하면서도 윤 의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자연히 윤 의사가 과연 그 계획에도 참가했는지에 대한 관심이 제기됐다. 2015년에 국내에 소개된 『이화림 회고록』은 윤 의사가 자신과 함께 이 계획의 실천을 위한 방법을 연구했다고 증언함으로써 이 주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높여주었다.

6. 윤 의사 의거의 배경: 윤 의사의 동지, 김구, 그리고 중국 군부와의 관계
첫째, 윤 의사의 의거는 백범 김구의 자서전인 『백범일지』에서 함축된 ‘김구 주도, 윤봉길 행동’의 연장선 위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윤봉길의 선택, 김구 지원(또는 윤봉길과 그 주변 동지들의 선택, 김구 지원)’의 결과로 해석돼야 할 것인가의 물음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서상문 교수는 전자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중화민국 군부의 기획·지원 아래 김구와 윤봉길이 실행한 ‘한중 합작’이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태복 박사는 우리가 김구의 항일독립운동은 높이 평가하되 『백범일지』의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대담하게 제의하면서 아예 후자의 해석을 제시했다.

둘째, ‘중화민국 군부의 개입’이라는 주제와 관련해 좀 더 깊이 들어간 주제가 윤 의사가 투척한 폭탄의 제조 과정 및 운반 과정이었다. 중국 학자들 가운데 어떤 이는 이 과정에 상해 지하세계의 두목이던 왕아초(王亞樵)가 개입했다고 주장했고 이 주장이 꽤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윤주 부회장은 그 일련의 과정에 관한 기존의 여러 설명에 의문이 가는 부분들을 짚어내고 왕아초의 개입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7. 윤 의사 의거 후 김구와 장개석이 만난 시점
윤 의사 의거는 장개석 총통이 김구를 만나 한국의 독립운동을 논의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장개석도 김구도 그 만남의 시점을 전혀 밝히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자연히 이처럼 중요한 회담이 언제 열렸느냐에 대해 관심을 쏟고 연구했으며, 그 결과 대체로 일곱 개의 설이 제시됐다. 제7장 제3절 제2항에서 이 서로 다른 설들을 비교하기로 한다.

8. 윤 의사 의거가 장개석 총통과 정부 그리고 카이로선언에 미친 영향
첫째, 윤 의사의 의거가 장개석 총통과 중화민국 정부에 미친 영향의 범위에 관한 물음이다. 어떤 이들은 장 총통이 “중국군 30만 대군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고려의 한 청년이 해냈다”라거나 “중국의 100만 군인과 4억 국민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라고 칭송했다고 말한다. 반면에 어떤 다른 이들은 그가 실제로 그렇게 말한 사실이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윤병석 교수가 앞의 주장을 대표했으며, 서상문 교수와 배경한 교수가 뒤의 주장을 대표했다.

서 교수와 배 교수가 후자의 의견을 대표한다고 하여 그들이 윤봉길 의사 의거의 높은 뜻에 의문을 제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들은 윤 의사 의거의 역사적 의미를 높이 평가하는 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연구는 윤 의사 의거 이후 장개석 총통과 국민정부가 경쟁적인 서로 다른 한인 지도자들이 중국에서 전개한 항일독립운동을 어떠한 시각에서 접근했는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었고, 윤 의사 의거를 직접적으로 도운 김구 주석에 대한 지원은 그러한 틀 안에서 이해하도록 만들어주었다.

둘째,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이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총리와 함께 서명해 1943년 12월 1일에 발표한 카이로선언은 ‘코리아의 자유와 독립’을 다짐하는 구절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구절이 포함되는 과정에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의 물음이다. 어떤 이들은 윤 의사의 상해의거에 감동한 장 총통의 발언도 영향을 미쳤다고 해석하고, 다른 어떤 이들은 그것은 전적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Harry Hopkins)의 인식과 결정의 결과라고 해석한다. 신용하 교수와 박명희 박사는 앞의 해석을 제시했고, 유영익 교수와 정일화 박사는 뒤의 해석을 제시했다. 이 논쟁에 참여한 한시준 교수는 장 총통과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면서 앞의 해석을 강력히 뒷받침했다. 정병준 교수는 장 총통의 역할을 일정하게 인정하면서도 그의 한국에 대한 정책은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정책에 매여 있었다고 보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해석들이 제시되면서 새로운 논쟁이 시작됐다. 카이로회담에서 장 총통이 일정하게 역할을 수행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장 총통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한 배경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노력이 있었다고 평가한다. 반면에 홉킨스 특별보좌관의 역할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홉킨스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한 배경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이때에는 워싱턴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의 노력이 컸다고 평가한다. 개인적인 편차는 있지만 대체로 박명희 박사와 이상철 교수 및 이완범 교수 그리고 한시준 교수가 앞의 해석을 제시했으며, 특히 윤주 부회장은 앞의 해석을 강력히 지지하면서, 윤 의사의 의거를 의열투쟁의 수준을 넘어서서 우리 민족사의 큰 흐름을 바꿔놓은 ‘광복전쟁’으로 정의했다. 반면에 유영익 교수는 뒤의 해석을 제시했다.

9. 윤 의사 암장지를 누가 가르쳐주었나
일제는 윤 의사를 ‘처형’한 뒤(우리로서는 윤 의사가 순국한 뒤) 그 시신을 암장했다. 묘지를 만들어놓으면 ‘조선=한국인’들은 물론 중국인들과 심지어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존경의 상징이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일제가 패망한 뒤에야 그 암장지를 찾아내고 유해를 발굴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 대해 서로 다른 설명이 제시됐다. 일본에서 암장묘비 건립에 참여했으며 이후 묘비를 관리한 박인조(朴仁祚) 선생은 암장 당시에 입회해 독경했던 한 여승이 암장 장소를 알려주었다고 설명했고, 그리하여 이후 발행된 많은 책들에 그렇게 기술됐다. 그러나 유해 발굴을 주도했던 이강훈(李康勳) 전 광복회 회장은 윤 의사가 구금됐던 구금소 간수가 알려주었다고 증언했다. 윤주 부회장은 일본 측 자료들을 모두 섭렵한 뒤 ‘여승설’을 부인했다.

10. 윤 의사의 문인으로서의 자질
윤봉길 의사에 관한 기존의 연구는 거의 모두가 그의 성장 과정과 농촌운동, 독립사상을 품게 된 과정, 중국으로의 망명, 상해의거와 그것에 따른 재판과 순국 및 암장, 그리고 윤 의사 의거의 역사적 의미와 교훈 등에 초점을 맞췄다. 예외적으로 위에서 적시한 진영미·김승일 공역의 『시인 윤봉길과 지인의 서정시 340수』, 김승일 교수의 논문, 그리고 심경호 교수의 논문은 윤 의사의 시문(詩文)을 전면적으로 분석하면서 문학적 성격 그리고 윤 의사의 문인으로서의 자질을 새롭게 인식시킴으로써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

김승일 교수가 깨우쳐주었듯, 매헌은 ‘청년시인’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적지 않은 양의 시를 지었다. 『한시집(漢詩集)』, 『임추(壬推)』, 『명추(鳴推)』, 『옥타(玉唾)』, 『염락(濂洛)』 등 다섯 편으로 나뉘어 수록된 시집들에 담긴 시가 모두 그의 작품인 것은 아니다. 『염락』은 중국의 시를 모은 것이고, 『옥타』는 스승 성주록과 스승의 벗인 강치헌(姜致憲) 등이 쓴 한시를 포함했다. 『명추』는 끝부분에 재산 현황과 재산세 및 가족 현황 등 시가 아닌 자료를 포함했다. 칠언율시, 칠언절구, 오언절구 등의 형식으로 쓰인 시문들 가운데 어떤 시문들은 매헌의 작품으로 분명히 인정되지만, 어떤 다른 시문들은 매헌의 작품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이렇게 볼 때, 매헌의 시문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더욱 활발해져야 할 것이다.

11. 윤 의사 의거 직후 연행되는 사진
윤 의사가 의거 직후 연행되는 사진은 일제가 윤 의사의 이미지를 훼손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는 주장을 둘러싸고 논쟁이 일어났다. 상해 총영사를 역임한 강효백 박사는 2008년에 그 사진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했으며, 이 주장을 KBS가 크게 보도함으로써 확산됐다. 이에 대해, 윤주 부회장은 이 주장을 반박하는 작은 책자를 출판하면서, 연행 사진 속의 인물은 윤봉길 의사가 맞다는 근거로 일곱 가지를 제시했다. 김상기 교수는 명시적으로 어느 한쪽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글을 읽어보면 조작이 아니라는 심증을 갖게 된다. 정진석 교수는 여러 자료를 엄밀히 비교한 뒤 명백한 어조로 조작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이 논쟁은 제5장 제4절 제2항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12. 윤 의사에 대한 북한의 평가
이러한 쟁점들과 별도로 저자는 윤봉길 의사에 대한 북한의 인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널리 알려져 있듯, 북한의 관영사학은 항일독립운동의 모든 공(功)을 오로지 김일성 한 사람에게 돌리고 있으며 여타 항일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폄하하거나 또는 정당한 평가에 인색했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북한의 관영사학이 윤 의사의 의거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제에 관한 자료가 너무 부족해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지는 못했고 그저 단편적인 대답을 얻는 것으로 끝냈다.

[윤 의사의 시]

이향시(離鄕詩)
슬프다 내 고향아 자유의 백성 몰아
지옥 보내고 푸른 풀 붉은 흙엔 백골만 남네
고향아 네 운명이 내가 어렸을 때는 쾌락한
봄 동산이었고 자유의 노래터였네
지금의 고향은 귀 막힌 벙어리만 남아
답답하기 짝이 없구나
동포야 네 목엔 칼이 씌우고
입 눈엔 튼튼한 쇠가 잠겼네
고향아 옛날의 자유 쾌락이 이제는 어데 있는가?
악마야 간다. 나는 간다 인생의 길로 정의의 길로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면
유랑의 가는 길은 저 지평선 가리켜
오로지 사람다운 인류세계의 분주한 일꾼 되려네
갈 곳이 생기거든 나를 부르오
도로가 울툭불툭 험하거든
자유의 불꽃이 피려거든
생명의 근원이 흐르려거든
이곳이 나의 갈 곳이라네
떠나는 기구한 길 산 넘고 바다 건너
구렁을 넘어 뛰고 가시밭 밟아 가네
잘 있거라 정들인 고국강산아
-윤 의사가 1930년 고향을 떠나면서 남긴 시

학행(學行)
불후의 이름 선비의 기개를 밝히고 不朽聲名士氣明
선비의 기개 밝고 밝아서 영원히 맑네. 士氣明明萬古晴
만고의 맑은 마음 모두가 학문에 있으니 萬古晴心都在學
모든 것이 배워 행함에 있으니 그 이름 영원히 빛나리라 . 都在學行不朽聲
-윤 의사가 16세 때 오치서숙의 동접·노소 유생들과 함께 참가한 중추절 시회에서 독장원을 차지한 옥련환시(玉連環詩) 칠언절구

수심(修心)
목발이에 굽이굽이 흐르는 한 줄기 시냇물 沐溪一曲水
수덕산 심산계곡에서 샘솟아 흘러흘러 修德源自流
내 몸의 더러운 때 깨끗이 씻어내리고 滌吾身汚穢
그 시냇물 마르지 않고 영원히 흐르리. 無盡格千秋
-윤 의사가 약관(弱冠)에 지은 시로 깨끗한 수양을 강조하는 인생관을 부각시킴

강의한 사랑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윤 의사가 1930년 10월 18일 중국의 청도에서 어머니에게 쓴 편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