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역사이야기 (관심>책소개)/4.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평전

동방박사님 2022. 11. 29.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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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타락한 시대에 순결한 모습을 간직한 채 산화한 독립운동가

을사늑약 반대 운동과 을사오적 척살 운동, 신민회 창립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 주도,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 지도자 양성, 고종 망명 계획 추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참여,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과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의열투쟁, 그리고 한·중 연합군의 항일투쟁…….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해부터 예순여섯의 나이에도 관동군 사령관을 처단하고 침체된 독립투쟁을 되살리기 위해 만주로 가다가 밀정의 밀고로 붙잡혀 일제에 의해 뤼순감옥에서 고문 끝에 숨을 거둘 때까지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우당 이회영! 일제와 친일세력들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형제들과 모든 재산을 처분한 뒤 일가 60여 명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하는 등 남은 삶을 독립운동에 바친 그는 일제강점기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스스로 가시밭길을 선택한 독립운동가의 표상이다.

반강권과 반권위주의, 자유와 자주, 자치주의를 추구했던 이회영은 독립운동과 해방 뒤 새로운 국가 건설의 방략으로 아나키즘을 택했으며, 무장독립투쟁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러나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도 자신은 높은 자리에는 앉은 적이 없을 만큼 감투를 싫어했다.

이회영은 자신의 호인 ‘우당(友堂)’처럼 이념과 노선을 뛰어넘어 독립운동가들의 영원한 벗이고 따듯하고 든든한 안식처였다. 갖은 고난 속에서도 여유를 즐길 줄 아는 풍류객이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공적을 포장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어 살아가는 지도자였으며, 민족의 설움과 동지들의 아픔을 다독이며, 목숨을 건 투쟁을 마다하지 않는 그는 매국노와 친일파들에게 부끄러움을 안기고, ‘망국노(亡國奴, 나라가 망하여 침략자에게 예속되어 있는 국민)’의 자존과 명예를 지킨 독립운동가의 본보기였다.

??우당 이회영 평전??은 타락한 시대, 강권주의 시대에 치열하게 저항하다가 순결한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산화한 이회영의 “한 점의 오류도, 한 올의 삿됨도 보이지 않는” 삶을, 인물 평전의 대가이자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오롯이 들려준다.

 

목차

추천하는 말: 사람을 신뢰하고, 행동하는 실천가 우당 이회영 선생 5
재간에 즈음하여 9
책머리에: 삼한갑족의 노블레스로 오블리주를 실천한 아나키스트 11
1. 봉건질서를 부정하고 자유사상을 키우다 19
2. 청년 구국민족운동가로 성장하다 39
3. 일가 60여 명과 기약 없는 망명길에 오르다 69
4. 독립군 양성소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하다 93
5. 고종 황제의 망명을 추진하다 123
6. 임시‘정부’가 아니라 독립운동‘총본부’를 주창하다 153
7. 아나키즘에서 독립운동과 미래사회의 길을 찾다 179
8. 의열단에 바친 열정 그리고 이상촌의 꿈 203
9. 아나키즘의 사상적 연원과 우당의 활동 235
10. 다물단을 지휘하고 밀정을 처단하다 267
11. 아내를 서울로 보내고 톈진에서의 나날 285
12. ‘동방연맹’ 결성 그리고 풍찬노숙의 일월 309
13. 좌절을 모르는 불굴의 도전정신 335
14. 항일구국연맹과 흑색공포단을 지도하다 357
15. 마지막 불꽃을 사르러 가는 길에 순국하다 381
닫는 글: “무서운 깊이의 아름다운 표면” 413
[부록] 남편 영전에 바치는 이은숙의 조사 421
우관 이정규의 「추모 우당 이회영 선생」 426
우당 이회영 연보 438
주註 444
 

저자 소개

저 : 김삼웅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지금의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사건 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
 

출판사 리뷰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항일무장투쟁을 이끈 거대한 자유인이자,
독립운동가들의 따뜻한 안식처이자 편안한 벗이며,
우리나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 우당 이회영의 불꽃 같은 삶!

타락한 시대에 순결한 모습을 간직한 채 산화한 독립운동가


을사늑약 반대 운동과 을사오적 척살 운동, 신민회 창립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 주도,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 지도자 양성, 고종 망명 계획 추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참여,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과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의열투쟁, 그리고 한·중 연합군의 항일투쟁…….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해부터 예순여섯의 나이에도 관동군 사령관을 처단하고 침체된 독립투쟁을 되살리기 위해 만주로 가다가 밀정의 밀고로 붙잡혀 일제에 의해 뤼순감옥에서 고문 끝에 숨을 거둘 때까지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우당 이회영! 일제와 친일세력들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형제들과 모든 재산을 처분한 뒤 일가 60여 명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하는 등 남은 삶을 독립운동에 바친 그는 일제강점기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스스로 가시밭길을 선택한 독립운동가의 표상이다.

반강권과 반권위주의, 자유와 자주, 자치주의를 추구했던 이회영은 독립운동과 해방 뒤 새로운 국가 건설의 방략으로 아나키즘을 택했으며, 무장독립투쟁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러나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도 자신은 높은 자리에는 앉은 적이 없을 만큼 감투를 싫어했다.

이회영은 자신의 호인 ‘우당(友堂)’처럼 이념과 노선을 뛰어넘어 독립운동가들의 영원한 벗이고 따듯하고 든든한 안식처였다. 갖은 고난 속에서도 여유를 즐길 줄 아는 풍류객이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공적을 포장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어 살아가는 지도자였으며, 민족의 설움과 동지들의 아픔을 다독이며, 목숨을 건 투쟁을 마다하지 않는 그는 매국노와 친일파들에게 부끄러움을 안기고, ‘망국노(亡國奴, 나라가 망하여 침략자에게 예속되어 있는 국민)’의 자존과 명예를 지킨 독립운동가의 본보기였다.

『우당 이회영 평전』은 타락한 시대, 강권주의 시대에 치열하게 저항하다가 순결한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산화한 이회영의 “한 점의 오류도, 한 올의 삿됨도 보이지 않는” 삶을, 인물 평전의 대가이자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오롯이 들려준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들려주는 이회영의 삶과 사상

이 책을 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역사·언론 바로잡기와 민주화·통일운동에 큰 관심을 두고, 특히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을 50여 권 집필한 말 그대로 인물 평전 전문가이자 대가로 손꼽힌다.

저자는 ‘우당 이회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이회영의 생애는 오로지 항일투쟁이라는 일직선형이었다. 평생을 곁눈 팔지 않고 독립운동이라는 일직선을 우직하게 걸었다. 그의 신념과 사상적 지향이 컴퍼스의 바늘이나 정삼각형의 날카로운 직선형이라면, 다정다감하고 섬세한 성품은 계란과 같은 타원형이었다. 행동철학은 혁명가적이고 전사의 기질을 품었고, 품성은 낭만주의적이고 사색형이며 예술과 시문을 즐기는 풍류아였다.

망명지에서 배를 곯으면서도 난을 치고 퉁소를 부는 취향과 여유를 갖는 풍류묵객이었다. 공적으로는 신념과 대의를 위해 서릿발과 같은 준열함을 보이면서도, 사적으로는 마을 정자 앞에 우뚝 선 한 그루의 거목처럼 여유 있고 흔들리지 않아서 이념·출신·노유를 가리지 않고 그의 그늘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가 하면 아나키스트의 담백함과 초연함은 계산을 모르는 경륜가였다.”

이 책은 2011년에 출간되었다가 절판된 『이회영 평전: 항일무장투쟁의 전위, 자유정신의 아나키스트』(책보세)의 내용을 일부 수정·보완하고 사진 자료를 교체해서 새로 펴낸 개정판이다. ‘우당기념사업회’에서 제공해준 이회영과 관련한 소중한 자료들은 독자들이 이회영의 삶을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우리나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

이회영 가문은 우리나라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집안이다. 나라가 망하자 이회영 6형제는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했는데, 이때 재산을 팔아 만든 돈이 40만 원(지금의 화폐 가치로 따지면 무려 약 600억 원에서 수조 원에 이르는 큰돈)이다. 이 돈은 경학사, 신흥강습소(훗날 신흥무관학교로 개칭) 등을 설립·운영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하고, 독립운동가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데 쓰였다.

이들이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양성소였으며, 졸업생 3,500여 명은 만주 지역과 중국 관내에서 항일독립운동의 핵심이 되고 항일투쟁의 선봉대 역할을 했다. 의열단, 서로군정서, 통의부, 참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 만주 일대의 무장투쟁 단체에는 어김없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참여하고 중심이 되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같은 항일대첩도 신흥무관학교 교관 출신들이 주도했고, 임시정부의 광복군을 창설하는 데에도 핵심 역할을 했다. 신흥무관학교는 무장독립운동의 사관학교였다.

그러나 모든 재산과 기득권을 버리고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이회영 6형제 중 조국이 해방된 모습을 보거나 조국 땅을 다시 밟은 이는 다섯째 이시영뿐이었다. 둘째 이석영은 아사했고, 이회영 집안의 많은 이들이 타국 땅에서 쓸쓸하고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이렇듯 이회영 형제는 물론 그 후손들까지 대부분 독립운동에 혼을 쏟고 고초를 겪고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므로 이회영 일가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사회적·도덕적 책무를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다.

이념과 사상을 넘어선 독립지사들의 사랑방, 우당(友堂)

삼한갑족(옛적부터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을 일컫는 말)의 기득권을 버리고 택한 망명가의 삶, 망국노(亡國奴)의 삶은 궁핍하기 그지없었다. 현재 가치로 수백억 원이나 되는 독립운동자금은 경학사,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전신) 등을 운영하느라 금세 바닥나고, 그 뒤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간난신고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가장 많은 독립자금을 내놨던 둘째 형 이석영은 심지어 굶어 죽을 만큼 비참했다.

그러나 중국과 만주는 물론 국내에서 활동하는 독립지사들은 베이징에 오면 이회영의 집을 찾았다. 그 집에 모인 사람들은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등등 다양했지만, 이회영은 이념과 노선을 모두 포용했고, 그의 집은 사랑방 구실을 했다. 누추한 전셋집은 독립지사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이회영의 집에 모인 이들은 그대로 우리나라 독립운동 노선의 역사가 된다. 김규식, 김창숙, 안창호, 조소앙 등은 민족주의를 고수했고, 홍남표와 성주식 등은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유자명, 이을규, 이정규, 정현섭, 김종진 등은 아나키스트가 되었으며, 김원봉과 유석현 등은 일제를 공포에 떨게 한 행동가였으니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모든 노선이 이회영의 베이징 거처를 중심으로 나뉜 셈이다. 달리 말하면 모든 노선의 독립운동 세력이 이회영을 중심으로 모이고 흩어지면서 인연을 쌓아갔다.”

우당 내외는 궁핍한 형편 속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을 흔연히 대접하고, 부인 이은숙은 몇 차례나 비밀리에 고국에 입국해 자금을 구해 와 남편과 독립운동가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사는 것이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할 정도였으나 이회영은 궁한 기색 없이 독립지사들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했다. 이회영의 집은 ‘우당(友堂)’이라는 호에 어울리는 그야말로 ‘벗들의 집’이었다.

거대한 자유인, 아나키스트 이회영

이회영은 영원한 자유인이자 행동하는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의도적으로 무정부주의자가 되거나 갑자기 무정부주의 사상으로 전환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 밝혔듯이, 독립운동의 방향과 방법이 무정부주의자들의 주장과 상통하기 때문에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그는 또 독립된 나라의 미래상인 민족 구성원 전체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기 위해서는 아나키즘을 실현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저자는 이회영의 내면에 일찍이 아나키즘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평한다. 즉, 정통 유학인 성리학을 버리고 양명학을 택하고, 과거시험을 거부하고,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상하고, 신민회를 발기하고, 삼한갑족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망명을 택했으며, 자치기관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고종 황제의 망명을 추진하고, 임시정부보다는 자유연합 성격의 독립운동총본부 구성을 제의하고, 숱한 단체·기관을 조직하고도 높은 자리를 사양했던 모습 등에서 저자는 이회영의 아나키스트적인 성향이 나타난다고 보았다.

이회영은 반강권과 반권위주의, 자유와 자주, 자치주의를 추구했기에 아나키즘을 수용했고, 아나키스트들과 어울리면서 이를 독립운동과 해방 뒤 새로운 국가 건설의 방략으로 택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회영뿐만 아니라 많은 독립운동가가 항일투쟁의 이데올로기를 아나키즘에서 찾았고, 궁극적으로는 해방된 조국의 미래상으로 강제·강권·독점이 없는 민주사회 건설을 꿈꾸었다. 이것은 곧 이회영과 신채호, 유자명 등이 그리는 이상사회이기도 했다.

독립운동이라는 일직선을 걸어간 사람

젊은 시절에 동문수학하던 이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설 때 이회영은 달랐다. 집안의 노비를 해방하여 내보내고, 나이 많은 노비에게 경어를 쓰고, 남편과 일찍 사별한 여동생을 비밀리에 재가시키는 등 불평등한 봉건적 인습과 계급적 구속을 타파하려 노력했다. 양명학을 실천이념으로 받아들인 영향이 컸다.

을미사변 이후에는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반일민족운동의 중심에 서고, 안창호와 신채호·양기탁 등과 신민회를 조직한다. 구국투쟁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인삼밭을 일구고 제재소를 운영하기도 한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암살단을 조직하고, 헤이그 특사 파견을 주도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나라가 망하기 전까지 이회영은 구국운동에 전념했다.

경술국치가 있던 해 겨울에 중국으로 망명한 뒤부터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는 오로지 독립운동이라는 일직선을 걸어갔다. 그 길을 따라가면 다음과 같다. 경학사를 조직하고, 경학사를 기반으로 신흥강습소(이후 신흥중학,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이 바뀜)를 설립한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까지 독립군을 양성하고, 이들은 무장독립투쟁의 중심 역할을 한다. 고종 망명계획을 추진하다가 고종의 서거로 계획은 좌절된다.

1922년에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뒤 ‘행동하는 자유주의’ 아나키스트 운동의 일환으로 이상촌 건립을 추진하기도 한다. 의열단을 후원하고, 아나키스트 운동의 중심이 될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무련’)을 결성하고 기관지 [정의공보]를 발간하고,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을 모아 ‘신흥학우단’을 강화한다. 신흥학우단이 중심이 된 다물단을 조직·지도하고,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재만무련’)과 남화한인연맹을 결성한다.

한·중·일 아나키스트들과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비밀 행동조직 흑색공포단을 조직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66살의 나이에도 침체된 무장독립투쟁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만주에 항일의용군의 결성과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려고 만주로 떠났다가 밀정의 밀고로 다롄에서 검거되어 뤼순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순국한다.

이회영의 목표는 오로지 조국의 독립이었다. 어려서부터 익혀온 시·서·화는 일가를 이룰 만큼 뛰어나, 독립운동자금이 떨어지면 흥선대원군(석파 이하응)이 그린 난(석파란)을 위조·판매하기도 했다. 또 식량이 떨어지거나 괴로울 때면 손수 만든 퉁소를 불면서 마음을 달래고 젊은 독립운동가들의 향수를 달래주기도 했다. 그의 곁으로는 사람이 몰렸고, 그의 삶은 겨레의 사표가 되었다.
 

추천평

우당은 예순다섯 해를 사시면서 애국적으로 자유공동체를 지향하면서, 개인적으로는 다예다능(多藝多能)을 키우면서, 삶의 어느 한순간도 쉬지 않고 바쁘게 살아오셨다. 이런 우당의 인생과 사상, 행동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하지만 김삼웅 선생은 우당의 자료를 충실히 모아서 『우당 이회영 평전』을 펴냈다. 후손으로서 대단히 기쁘고 영광스럽다.
- 이종찬(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