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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투퀴디데스의 역사는 틀렸다?
투퀴디데스와 그의 저작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고대 헬라스(그리스) 시대 역사서 가운데서도 가장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역사서로 각광받는 저술이다. 그런데 투퀴디데스의 역사 서술이 틀렸다,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으니, 바로 이 책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Thucydides: The Reinvention of History)》의 저자 도널드 케이건이다. 위대한 전통의 권위라도 과도하게 존경하지 말라는 투퀴디데스의 주장을 이어받은 케이건은 투퀴디데스의 저작을 단순히 이해하는 데서 더 나아가 투퀴디데스가 이 방대한 책을 쓰면서까지 세상에 외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며, 그의 역사 서술은 올바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는 투퀴디데스의 생각과 의도,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중요한 서술을 케이건 식의 해법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독자들로 하여금 투퀴디데스의 ‘진실’과 케이건의 ‘진실’을 마주하도록 하면서, 이 둘의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만들고 있다. 특히 케이건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투퀴디데스가 주장한 중요한 핵심 주장 여섯 가지의 ‘진실’을 파헤쳐나간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들의 역사를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며, 투퀴디데스의 고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원전을 읽고자 하는 열망 또한 생길 것이다.
투퀴디데스와 그의 저작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고대 헬라스(그리스) 시대 역사서 가운데서도 가장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역사서로 각광받는 저술이다. 그런데 투퀴디데스의 역사 서술이 틀렸다,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으니, 바로 이 책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Thucydides: The Reinvention of History)》의 저자 도널드 케이건이다. 위대한 전통의 권위라도 과도하게 존경하지 말라는 투퀴디데스의 주장을 이어받은 케이건은 투퀴디데스의 저작을 단순히 이해하는 데서 더 나아가 투퀴디데스가 이 방대한 책을 쓰면서까지 세상에 외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며, 그의 역사 서술은 올바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는 투퀴디데스의 생각과 의도,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중요한 서술을 케이건 식의 해법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독자들로 하여금 투퀴디데스의 ‘진실’과 케이건의 ‘진실’을 마주하도록 하면서, 이 둘의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만들고 있다. 특히 케이건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투퀴디데스가 주장한 중요한 핵심 주장 여섯 가지의 ‘진실’을 파헤쳐나간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들의 역사를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며, 투퀴디데스의 고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원전을 읽고자 하는 열망 또한 생길 것이다.
목차
서론
1장 수정주의 역사가 투퀴디데스
2장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1 - 케르퀴라 위기
3장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2 - 케르퀴라 위기에서 메가라 봉쇄령까지
4장 페리클레스의 전쟁 전략
5장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는 민주정이었나
6장 클레온은 운이 좋아 승리했는가
7장 암피폴리스의 투퀴디데스와 클레온
8장 시켈리아 원정은 어떻게 결정되었나
9장 시켈리아의 재앙은 누구의 책임인가
결론
옮긴이의 글 - 수정주의 역사가 투퀴디데스를 읽는 즐거움
본문의 주
찾아보기
1장 수정주의 역사가 투퀴디데스
2장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1 - 케르퀴라 위기
3장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2 - 케르퀴라 위기에서 메가라 봉쇄령까지
4장 페리클레스의 전쟁 전략
5장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는 민주정이었나
6장 클레온은 운이 좋아 승리했는가
7장 암피폴리스의 투퀴디데스와 클레온
8장 시켈리아 원정은 어떻게 결정되었나
9장 시켈리아의 재앙은 누구의 책임인가
결론
옮긴이의 글 - 수정주의 역사가 투퀴디데스를 읽는 즐거움
본문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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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투퀴디데스를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는 사상의 세계뿐 아니라 행동의 세계에서 살아간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투퀴디데스가 자신이 묘사하는 사건과 같은 시대에 살았고 일부 사건의 참가자였음을 명심해야 한다. 투퀴디데스는 자신이 살았던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 투퀴디데스가 사건을 이해한 방식은 동시대인과 일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투퀴디데스는 어디에서 책을 썼는가? 어떤 종류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는가? 이런 요소들이 투퀴디데스의 관점을 형성하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가? 투퀴디데스가 고대 역사가를 통틀어 정확성과 객관성에 가장 높은 가치를 부여했던 사람이지만, 그 역시 감정과 결점을 지닌 인간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서문」
우리는 투퀴디데스도 무오류가 아니며, 다른 모든 저자를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내린 결론도 검증해봐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작업을 한 뒤 그 결과를 투퀴디데스의 해석과 비교한 이후에야 비로소 투퀴디데스의 정신에 더 온전하게 접근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차이와 충돌을 살펴봄으로써 투퀴디데스의 가장 창조적인 기여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투퀴디데스는 자기 시대에 통용되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믿었고, 사건에 대한 이해를 교정하기 위해 역사를 서술하고 논증했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점을 이해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왜 투퀴디데스가 그토록 자주 동시대인의 견해와 확연하게 다른 의견을 제시했는지 물을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투퀴디데스의 방법과 목적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서문」
투퀴디데스의 글을 맨 처음 읽은 고대의 독자는 당시 벌어진 사건들, 예컨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초래한 사건들을 우리보다 훨씬 잘 알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투퀴디데스가 메가라 봉쇄령을 매우 짧게 다루더라도 동시대 독자들은 반대의 증거를 충분히 갖고 있었으며, 투퀴디데스도 그 점을 알고 있었다. 투퀴디데스가 특이한 곳에 강조점을 둔 것은 속임수가 아니라 해석을 위해서였다. 또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우리가 투퀴디데스의 해석을 반박할 수 있게 도와주는 증거를 거의 대부분 투퀴디데스 본인이 제공한다는 점이다. 투퀴디데스 스스로 투퀴디데스식 해석의 목적을 알려주고 있다. 투퀴디데스가 목적한 바는 자신이 발견한 진실을 우리 앞에 제시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투퀴디데스의 진실이 꼭 우리의 진실일 필요는 없다. 투퀴디데스의 역사 서술을 유익하게 사용하려면 그가 제시하는 증거와 그가 덧입힌 해석을 구분해야만 한다. 오직 그 후에야 투퀴디데스가 바란 대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영원한 유산”으로 사용할 수 있다. ---「결론」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직전의 사건들은 부수적인 원인으로 여겼고, 아테나이가 페르시아 전쟁 때부터 힘을 키웠다는 사실을 “가장 진실한 원인”으로 제시했다.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가 이룬 세력 성장을 스파르타가 저지할 방법도, 또 그로 인해 야기된 두려움을 누그러뜨릴 방도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투퀴디데스는 일단 아테나이 제국이 존재하게 된 다음에는 전쟁이 불가피했다고 독자들이 생각하기를 원했다는 결론만이 가능하다. ---「2장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1」
투퀴디데스는 자신이 쓴 역사책 곳곳에서 대립하는 정치 견해들을 제시해 극적 효과를 내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경우도 이런 방법을 쓰기에 안성맞춤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독자는 단순히 페리클레스의 정책이 옳았고 불가피했음을 받아들이도록, 페리클레스를 반대하던 자들은 단순히 근시안이며 자기만 생각하고 용기와 결단력과 지혜가 없는 사람들로 여기도록 요구받는다. 오직 페리클레스만이 발언을 허락받았고, 그의 강력한 언어는 역사가 투퀴디데스의 철저한 옹호 덕분에 더욱 증폭되었다. ---「4장 페리클레스의 전쟁 전략」
투퀴디데스는 기원전 5세기 말의 타락한 민주정을 기원전 5세기 중반 위대한 아테나이를 이룩한 민주정과 같은 반열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두 정치 체제가 근본적으로는 같다는 사실을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투퀴디데스는 정치 영역에서 성공하려면 희귀할 정도로 탁월한 지혜가 필요하며, 그러한 지혜를 가진 자는 소수라고 확신했다. 그런 정치적인 재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을 재능 있는 희귀한 개인의 의견보다 우위에 두는 민주정은 성공할 가망이 없다. 재능 없는 시민들이 정치 천재에게 지도권을 내어준 다음에야 나라가 성공할 길이 열린다. 투퀴디데스가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를 민주정이 아니라고 부인한 것이야말로 당시 사람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졌던 견해를 수정하려는 특히 대담한 시도였다. ---「5장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는 민주정이었나」
클레온의 동시대인 중 다수가 거의 항상 클레온 편에 섰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은 대개 클레온이 제시한 정책을 기꺼이 따랐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비길 데 없이 높은 명예를 안겨주었다. 심지어 클레온이 큰 패배를 당하고 죽은 뒤에도 존경받고 성공한 장군에게 바치는 명예를 그에게 선사했다. 이와 달리 투퀴디데스는 클레온의 생애를 서술하면서 동시대의 견해를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해석을 제시했다. ---「7장 암피폴리스의 투퀴디데스와 클레온」
아테나이인은 공공 묘역에 비석을 세우고 시켈리아에서 싸우다 죽은 장군들의 이름을 새겼는데, 여기에 데모스테네스의 이름은 넣었지만 니키아스의 이름은 고의로 누락했다. 아테나이인이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들은 분명히 아테나이가 당한 재앙을 두고 니키아스에게 특별한 책임을 물었다. 이는 투퀴디데스의 결론과는 매우 다르다. ---「9장 시켈리아의 재앙은 누구의 책임인가」
나는 지금까지 투퀴디데스가 동시대 아테나이인이 가졌던 일반적 견해를 수정하려 애썼고 이는 여전히 논란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 책에서 검토한 중요한 사례들을 볼 때 투퀴디데스의 관점보다 동시대인들의 견해가 진실에 더 가깝다고 본다. 이 책에서 제시한 결론이 투퀴디데스가 내놓은 결론과 다르고, 또 많은 현대 학자와도 달라서 독자들은 이 책이 건방지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전쟁사》를 쓴 수정주의 역사가인 투퀴디데스 자신이 가장 위대한 전통의 권위조차 과도하게 존경하지 말라고 제일 앞에 서서 외치고 있다. (중략) 우리가《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연구한 뒤 투퀴디데스와 다른 결론을 내린다고 해서 그가 이룬 성취가 조금이라도 퇴색하지는 않는다. 투퀴디데스는 역사를 연구하고 질문을 제기하는 하나의 유형을 창출해 인간의 사고를 가다듬고 그 품격을 높였다. 그의 저작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결론」
케이건은 투퀴디데스가 발견한 ‘진실’이 우리의 ‘진실’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이에 독자는 케이건의 ‘진실’이 우리의 ‘진실’일 필요가 없다고 응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략) 케이건은 투퀴디데스의 추방에 가장 앞장선 이가 클레온이었으리라 추측했고, 클레온에 대한 투퀴디데스의 악의적인 평가는 역사 서술을 통한 보복이라고 주장한다. (중략) 그러나 우리는 케이건에게 되물을 수 있다. 투퀴디데스가 클레온에게 악감정을 가졌을 수는 있다. 그런데 그것이 꼭 잘못된 판단일까? 투퀴디데스의 평가처럼, 클레온을 민회의 호전성을 충동질하는 위험한 선동정치가로 보는 것이 오히려 올바른 판단이 아닐까? (중략) 혹 케이건은 역사에서 교훈을 끌어오는 데 그치지 않고, 과거에 현대를 투영해 과거를 단순화하고 원하는 답만 챙기는 것은 아닐까? (중략) 케이건의《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는 이렇게 과거의 위대한 역사가와, 40년 넘게 그 역사가를 연구한 현대의 일급 학자의 대화를 제공하며, 거기에 일반 독자 역시 대화 참여자로 끌어들이는 미덕을 갖춘 책이다.
우리는 투퀴디데스도 무오류가 아니며, 다른 모든 저자를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내린 결론도 검증해봐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작업을 한 뒤 그 결과를 투퀴디데스의 해석과 비교한 이후에야 비로소 투퀴디데스의 정신에 더 온전하게 접근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차이와 충돌을 살펴봄으로써 투퀴디데스의 가장 창조적인 기여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투퀴디데스는 자기 시대에 통용되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믿었고, 사건에 대한 이해를 교정하기 위해 역사를 서술하고 논증했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점을 이해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왜 투퀴디데스가 그토록 자주 동시대인의 견해와 확연하게 다른 의견을 제시했는지 물을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투퀴디데스의 방법과 목적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서문」
투퀴디데스의 글을 맨 처음 읽은 고대의 독자는 당시 벌어진 사건들, 예컨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초래한 사건들을 우리보다 훨씬 잘 알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투퀴디데스가 메가라 봉쇄령을 매우 짧게 다루더라도 동시대 독자들은 반대의 증거를 충분히 갖고 있었으며, 투퀴디데스도 그 점을 알고 있었다. 투퀴디데스가 특이한 곳에 강조점을 둔 것은 속임수가 아니라 해석을 위해서였다. 또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우리가 투퀴디데스의 해석을 반박할 수 있게 도와주는 증거를 거의 대부분 투퀴디데스 본인이 제공한다는 점이다. 투퀴디데스 스스로 투퀴디데스식 해석의 목적을 알려주고 있다. 투퀴디데스가 목적한 바는 자신이 발견한 진실을 우리 앞에 제시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투퀴디데스의 진실이 꼭 우리의 진실일 필요는 없다. 투퀴디데스의 역사 서술을 유익하게 사용하려면 그가 제시하는 증거와 그가 덧입힌 해석을 구분해야만 한다. 오직 그 후에야 투퀴디데스가 바란 대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영원한 유산”으로 사용할 수 있다. ---「결론」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직전의 사건들은 부수적인 원인으로 여겼고, 아테나이가 페르시아 전쟁 때부터 힘을 키웠다는 사실을 “가장 진실한 원인”으로 제시했다.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가 이룬 세력 성장을 스파르타가 저지할 방법도, 또 그로 인해 야기된 두려움을 누그러뜨릴 방도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투퀴디데스는 일단 아테나이 제국이 존재하게 된 다음에는 전쟁이 불가피했다고 독자들이 생각하기를 원했다는 결론만이 가능하다. ---「2장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1」
투퀴디데스는 자신이 쓴 역사책 곳곳에서 대립하는 정치 견해들을 제시해 극적 효과를 내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경우도 이런 방법을 쓰기에 안성맞춤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독자는 단순히 페리클레스의 정책이 옳았고 불가피했음을 받아들이도록, 페리클레스를 반대하던 자들은 단순히 근시안이며 자기만 생각하고 용기와 결단력과 지혜가 없는 사람들로 여기도록 요구받는다. 오직 페리클레스만이 발언을 허락받았고, 그의 강력한 언어는 역사가 투퀴디데스의 철저한 옹호 덕분에 더욱 증폭되었다. ---「4장 페리클레스의 전쟁 전략」
투퀴디데스는 기원전 5세기 말의 타락한 민주정을 기원전 5세기 중반 위대한 아테나이를 이룩한 민주정과 같은 반열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두 정치 체제가 근본적으로는 같다는 사실을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투퀴디데스는 정치 영역에서 성공하려면 희귀할 정도로 탁월한 지혜가 필요하며, 그러한 지혜를 가진 자는 소수라고 확신했다. 그런 정치적인 재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을 재능 있는 희귀한 개인의 의견보다 우위에 두는 민주정은 성공할 가망이 없다. 재능 없는 시민들이 정치 천재에게 지도권을 내어준 다음에야 나라가 성공할 길이 열린다. 투퀴디데스가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를 민주정이 아니라고 부인한 것이야말로 당시 사람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졌던 견해를 수정하려는 특히 대담한 시도였다. ---「5장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는 민주정이었나」
클레온의 동시대인 중 다수가 거의 항상 클레온 편에 섰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은 대개 클레온이 제시한 정책을 기꺼이 따랐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비길 데 없이 높은 명예를 안겨주었다. 심지어 클레온이 큰 패배를 당하고 죽은 뒤에도 존경받고 성공한 장군에게 바치는 명예를 그에게 선사했다. 이와 달리 투퀴디데스는 클레온의 생애를 서술하면서 동시대의 견해를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해석을 제시했다. ---「7장 암피폴리스의 투퀴디데스와 클레온」
아테나이인은 공공 묘역에 비석을 세우고 시켈리아에서 싸우다 죽은 장군들의 이름을 새겼는데, 여기에 데모스테네스의 이름은 넣었지만 니키아스의 이름은 고의로 누락했다. 아테나이인이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들은 분명히 아테나이가 당한 재앙을 두고 니키아스에게 특별한 책임을 물었다. 이는 투퀴디데스의 결론과는 매우 다르다. ---「9장 시켈리아의 재앙은 누구의 책임인가」
나는 지금까지 투퀴디데스가 동시대 아테나이인이 가졌던 일반적 견해를 수정하려 애썼고 이는 여전히 논란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 책에서 검토한 중요한 사례들을 볼 때 투퀴디데스의 관점보다 동시대인들의 견해가 진실에 더 가깝다고 본다. 이 책에서 제시한 결론이 투퀴디데스가 내놓은 결론과 다르고, 또 많은 현대 학자와도 달라서 독자들은 이 책이 건방지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전쟁사》를 쓴 수정주의 역사가인 투퀴디데스 자신이 가장 위대한 전통의 권위조차 과도하게 존경하지 말라고 제일 앞에 서서 외치고 있다. (중략) 우리가《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연구한 뒤 투퀴디데스와 다른 결론을 내린다고 해서 그가 이룬 성취가 조금이라도 퇴색하지는 않는다. 투퀴디데스는 역사를 연구하고 질문을 제기하는 하나의 유형을 창출해 인간의 사고를 가다듬고 그 품격을 높였다. 그의 저작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결론」
케이건은 투퀴디데스가 발견한 ‘진실’이 우리의 ‘진실’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이에 독자는 케이건의 ‘진실’이 우리의 ‘진실’일 필요가 없다고 응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략) 케이건은 투퀴디데스의 추방에 가장 앞장선 이가 클레온이었으리라 추측했고, 클레온에 대한 투퀴디데스의 악의적인 평가는 역사 서술을 통한 보복이라고 주장한다. (중략) 그러나 우리는 케이건에게 되물을 수 있다. 투퀴디데스가 클레온에게 악감정을 가졌을 수는 있다. 그런데 그것이 꼭 잘못된 판단일까? 투퀴디데스의 평가처럼, 클레온을 민회의 호전성을 충동질하는 위험한 선동정치가로 보는 것이 오히려 올바른 판단이 아닐까? (중략) 혹 케이건은 역사에서 교훈을 끌어오는 데 그치지 않고, 과거에 현대를 투영해 과거를 단순화하고 원하는 답만 챙기는 것은 아닐까? (중략) 케이건의《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는 이렇게 과거의 위대한 역사가와, 40년 넘게 그 역사가를 연구한 현대의 일급 학자의 대화를 제공하며, 거기에 일반 독자 역시 대화 참여자로 끌어들이는 미덕을 갖춘 책이다.
---「옮긴이의 글: 수정주의자 투퀴디데스를 읽는 즐거움」
출판사 리뷰
1.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역사가 투퀴디데스의 역사는 틀렸다
- 도널드 케이건이 밝혀낸 수정주의 역사가 투퀴디데스의 본질
투퀴디데스와 그의 저작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고대 헬라스(그리스) 시대 역사서 가운데서도 가장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역사 서술로 인해 2,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을 매혹하고 있는 역사가이며 고전이다. 그런데 투퀴디데스의 역사 서술이 틀렸다,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으니, 바로 이 책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Thucydides: The Reinvention of History)》의 저자 도널드 케이건이다.
투퀴디데스는 누구인가. 기원전 431년부터 기원전 404년까지 27년에 걸쳐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8권의 역사책으로 기록한 그는 비록 이보다 60년 먼저 일어난 페르시아 전쟁의 역사를 기록한 헤로도토스에게 역사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빼앗겼지만, 신들의 개입과 무관하게 인간의 의지로 만들어가는 객관적인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실증적·과학적 역사관의 창시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의 저작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무릇 인간사가 그러하듯이 미래에 똑같거나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벌어질 일을 명확히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였고, 그 자신이 “영원한 유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저작이다. 이 책은 오랫동안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기록한 유일무이한 사료로 인정받아왔는데, 특히 동서양의 대립이 스파르타와 아테나이가 대립한 것과 비슷했던 냉전시대에 큰 관심을 받았다. 미 국무장관을 지낸 조지 마셜이 “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대와 아테나이의 몰락을 적어도 한 번이라도 되새겨보지 않은 사람이 현대 국제관계의 몇몇 기본 문제들을 매우 지혜롭게 혹은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긴 것처럼, 이 책은 오랫동안 역사 연구자뿐 아니라 정치 지도자와 정치학자 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쳐왔다.
투퀴디데스와 그의 저서는 오랫동안 고전으로 인정받아서, 그동안 사실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의가 많지 않았다. 위대한 전통의 권위라도 과도하게 존경하지 말라는 투퀴디데스의 주장을 이어받은 케이건은 투퀴디데스의 저작을 단순히 이해하는 데서 더 나아가 투퀴디데스가 이 방대한 책을 쓰면서까지 세상에 외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며, 그의 역사 서술은 올바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동시대인이 제시했거나 받아들였던 설명과 투퀴디데스의 서술을 비교하는 수고로운 작업을 20년 동안 진행해왔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을 기술하면서 자신이 들은 것들을 기록하며 이 모든 일은 신이 한 일이라고 설파했지만, 그 자신이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장군으로 선출된 경험이 있는 투퀴디데스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관련된 사료를 모으고 선별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 책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자 노력했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의 저서를 통해 들려주려 한 역사는 무엇일까?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으며, 아테나이는 페리클레스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지만 그의 사후 똑똑하지 못한 후계자들이 그의 정책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전쟁이 장기화되고 결국 아테나이의 패배로 이어진 것이라 주장한다. 케이건은 이러한 주장은 당대 통용되던 역사적 해석과 다르며, 투퀴디데스는 이러한 당대의 해석을 잘못되었다고 믿고 사건에 대한 당대인의 이해를 교정하기 위해 역사를 서술했음을 밝혀냄으로써 마침내 ‘투퀴디데스는 최초의 수정주의 역사가’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특히 케이건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투퀴디데스가 주장한 중요한 핵심 주장 여섯 가지의 ‘진실’을 파헤쳐나간다. 전쟁 발발 원인은 무엇인가, 페리클레스의 전쟁 전략은 타당했는가, 아테나이의 정체(政體)는 민주정이었나, 클레온에 대한 평가는 무엇이 올바른가, 시켈리아(시칠리아) 원정 결정은 누가 했으며, 또 이 원정이 재앙으로 끝나게 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해당 주제마다 투퀴디데스와 당대인의 이해와 얼마나 다르며, 투퀴디데스의 서술 기법에서 나타난 오류는 무엇인지를 살핌으로써 튀퀴디데스가 수정주의 역사가임을 논증한다.
투퀴디데스의 생각과 의도,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중요한 서술을 케이건 식의 해법으로 풀어나간 이 책의 미덕은 독자 또한 투퀴디데스의 ‘진실’과 케이건의 ‘진실’을 마주하면서 이 둘의 진실을 나(독자)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또 다른 이 책의 장점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해, 그리고 투퀴디데스와 페리클레스를 비롯한 동시대인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당대인과 호흡하며 그들의 역사를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할 뿐 아니라 투퀴디데스의 고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원전을 읽고 싶어지도록 만든다는 데 있다.
2. 투퀴디데스는 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집필했는가
- 투퀴디데스가 수정한 여섯 가지 ‘사건’의 ‘진실’을 통해 살펴본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탄생의 비밀
1)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불가피한 전쟁이었나?
케이건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투퀴디데스가 주장한 핵심 여섯 가지를 택해 이 주장이 왜 틀렸는지를 조목조목 들려준다. 먼저, 전쟁 발발 원인에 대해 살펴보면,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나이의 힘이 날로 커지고 헬라스 대부분이 이미 아테나이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모습을 두려워한 스파르타가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불가피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대인 대다수는 전쟁은 피할 수 있었으며, 메가라 봉쇄령을 비롯한 페리클레스의 실책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보는데, 케이건 역시 이러한 당대의 인식이 더 올바른 판단이라 본다.
2) 페리클레스의 전쟁 전략은 타당했는가?
페리클레스는 전쟁 발발 후 절제 정책으로 스파르타를 압박했고, 그러는 동안 스파르타에 평화파가 득세해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 내다봤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스파르타가 지속적으로 항전해 결국 그의 전쟁 전략은 실패했으며, 그 또한 전쟁 발발 2년 6개월 후 사망한다. 대다수 당대인은 페리클레스의 정책으로 전쟁이 발발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전쟁이 장기전에 들어갔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투퀴디데스는 페리클레스의 정책은 타당했으며, 문제는 페리클레스 사후 그의 계획과 정반대로 나아간 무능한 아테나이 민주정 후계자들에게 있다고 책임을 전가한다. 케이건은 투퀴디데스의 주장의 빈틈을 통해 그의 주장이 올바른 해석이 아니었음을 논증한다.
3)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는 민주정이었나?
투퀴디데스는 “페리클레스는 평화로운 때에 폴리스를 이끌면서 온건한 정책을 유지하고 폴리스를 안전하게 지켰다. 그가 이끄는 동안 아테나이는 가장 위대한 폴리스가 되었다”며, 그가 이끌던 시기에 “아테나이는 명목상 민주정이었으나 사실 점점 제1시민이 통치하는 정체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 달리 페리클레스 시대는 명백하게 민주정이었다고 케이건은 반박한다. 투퀴디데스가 민주정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치 영역에서 성공하려면 탁월한 지혜(페리클레스)가 필요하며 정치적 재능을 갖추지 못한 다수의 의견을 우위에 두는 민주정은 성공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설파하기 위해 이런 주장을 펼쳤다고 말한다.
4) 클레온이 운이 좋아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평가는 올바른가?
페리클레스 사후 아테나이는 페리클레스의 온건 정책을 따르는 니키아스파와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는 클레온파로 나뉘었고, 아테나이는 클레온의 정책에 손을 들어주었다. 투퀴디데스는 클레온을 “시민 중 가장 난폭하고 당시 누구보다 가장 크게 시민에게 영향을 끼쳤다”라고 평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그에 대해 편견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을 하나하나 살피면 클레온에 대한 아테나이 사람들의 믿음과 더불어 이를 왜곡하는 투퀴디데스의 수정 의견을 확인할 수 있다. 케이건은 투퀴디데스가 클레온을 폄하하는 까닭은 페리클레스가 실수한 것이 아님을 주장하기 위함이라 말한다. 특히 투퀴디데스 본인이 장군으로 선출된 당시 암피폴리스 전투를 서술한 부분에서는 전쟁에서 진 자신을 변론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주장에 ‘객관적’이라는 외피를 씌우고 클레온의 정책이 틀렸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활용한다. 그럼에도 클레온의 죽음을 애도하는 아테나이 사람들의 모습은 그를 존경하고 성공한 장군으로 대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5·6) 시켈리아 원정 결정은 누가 했으며, 이 원정이 재앙으로 끝나게 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투퀴디데스는 페리클레스 사후 아테나이의 최종적 패배를 초래한 많은 실수 중에서도 시켈리아 원정을 꼭 집어서 이야기한다. 아테나이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 섬으로 대규모 원정대를 보내고 추가 원정대까지 파견했지만, 결국 전멸하고 만 이 재앙과도 같은 사건은 이후 아테나이를 더욱 쇠퇴의 길로 인도했다. 이 원정 작전이 실패한 까닭에 대해 투퀴디데스는 원정군을 내보낸 아테나이인이 실수한 것이라 결론짓는다. 과연 그러한가? 케이건은 투퀴디데스의 기술 내용을 따라가며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하고, 투퀴디데스가 “자기 시대에 그런 일을 당하기에 가장 부적절한 사람”이라 불렀던 니키아스에게 책임이 있음을 밝혀낸다. 니키아스는 시켈리아 원정 전까지 아테나이의 존경받는 장군이었지만, 시켈리아 전사자를 기록한 비문에 그의 이름을 고의로 누락할 만큼 당대인들은 그에게 원정에 대한 오판과 실책의 책임을 물었는데, 케이건은 이들의 평가가 더 적절했고, 투퀴디데스의 서술은 이러한 평가를 ‘수정’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이상의 논점을 살펴봄으로써 케이건은 투퀴디데스의 관점보다 당대인들의 견해가 진실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투퀴디데스는 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당대의 역사 해석을 수정하려고 했을까? 여섯 가지 질문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투퀴디데스는 ‘페리클레스’와 그가 이끈 독재정이 틀렸다는 당대의 해석과 주장이 틀렸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역사를 수정해서 기술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주장은 2,400년 동안 정설로 굳어져왔다. 하지만 이제 케이건의 집요한 사료 읽기를 통해 결국 그가 당대인의 생각을 비롯해 이후 이 책을 “영원한 유산”으로 읽을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수정된 역사의 실체를 밝힐 수 있었으며, 투퀴디데스 또한 하나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재구성한 수정주의 역사가임을 밝힐 수 있었다.
추천의 글
진정 인상적인 책이다. 총체적이면서도 압축적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역사를 아울렀다. 드라마틱한 전쟁에 대한 객관적이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관점을 확인할 수 있다. 케이건의 역사 서술은 탁월하다.
- 북리스트
도널드 케이건이 고전학자, 국제관계 이론가, 군사사학자로서 그 누구에 비길 수 없는 전문 지식에 근거해 쓴 이 책은 전쟁을 둘러싼 헬라스인들의 계산 착오와 오만, 전략적 과욕의 서사시를 관통하며 투퀴디데스의 고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대한 깊은 고찰과 더불어 역사를 읽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 워싱턴포스트
- 도널드 케이건이 밝혀낸 수정주의 역사가 투퀴디데스의 본질
투퀴디데스와 그의 저작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고대 헬라스(그리스) 시대 역사서 가운데서도 가장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역사 서술로 인해 2,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을 매혹하고 있는 역사가이며 고전이다. 그런데 투퀴디데스의 역사 서술이 틀렸다,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으니, 바로 이 책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Thucydides: The Reinvention of History)》의 저자 도널드 케이건이다.
투퀴디데스는 누구인가. 기원전 431년부터 기원전 404년까지 27년에 걸쳐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8권의 역사책으로 기록한 그는 비록 이보다 60년 먼저 일어난 페르시아 전쟁의 역사를 기록한 헤로도토스에게 역사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빼앗겼지만, 신들의 개입과 무관하게 인간의 의지로 만들어가는 객관적인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실증적·과학적 역사관의 창시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의 저작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무릇 인간사가 그러하듯이 미래에 똑같거나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벌어질 일을 명확히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였고, 그 자신이 “영원한 유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저작이다. 이 책은 오랫동안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기록한 유일무이한 사료로 인정받아왔는데, 특히 동서양의 대립이 스파르타와 아테나이가 대립한 것과 비슷했던 냉전시대에 큰 관심을 받았다. 미 국무장관을 지낸 조지 마셜이 “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대와 아테나이의 몰락을 적어도 한 번이라도 되새겨보지 않은 사람이 현대 국제관계의 몇몇 기본 문제들을 매우 지혜롭게 혹은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긴 것처럼, 이 책은 오랫동안 역사 연구자뿐 아니라 정치 지도자와 정치학자 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쳐왔다.
투퀴디데스와 그의 저서는 오랫동안 고전으로 인정받아서, 그동안 사실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의가 많지 않았다. 위대한 전통의 권위라도 과도하게 존경하지 말라는 투퀴디데스의 주장을 이어받은 케이건은 투퀴디데스의 저작을 단순히 이해하는 데서 더 나아가 투퀴디데스가 이 방대한 책을 쓰면서까지 세상에 외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며, 그의 역사 서술은 올바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동시대인이 제시했거나 받아들였던 설명과 투퀴디데스의 서술을 비교하는 수고로운 작업을 20년 동안 진행해왔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을 기술하면서 자신이 들은 것들을 기록하며 이 모든 일은 신이 한 일이라고 설파했지만, 그 자신이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장군으로 선출된 경험이 있는 투퀴디데스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관련된 사료를 모으고 선별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 책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자 노력했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의 저서를 통해 들려주려 한 역사는 무엇일까?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으며, 아테나이는 페리클레스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지만 그의 사후 똑똑하지 못한 후계자들이 그의 정책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전쟁이 장기화되고 결국 아테나이의 패배로 이어진 것이라 주장한다. 케이건은 이러한 주장은 당대 통용되던 역사적 해석과 다르며, 투퀴디데스는 이러한 당대의 해석을 잘못되었다고 믿고 사건에 대한 당대인의 이해를 교정하기 위해 역사를 서술했음을 밝혀냄으로써 마침내 ‘투퀴디데스는 최초의 수정주의 역사가’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특히 케이건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투퀴디데스가 주장한 중요한 핵심 주장 여섯 가지의 ‘진실’을 파헤쳐나간다. 전쟁 발발 원인은 무엇인가, 페리클레스의 전쟁 전략은 타당했는가, 아테나이의 정체(政體)는 민주정이었나, 클레온에 대한 평가는 무엇이 올바른가, 시켈리아(시칠리아) 원정 결정은 누가 했으며, 또 이 원정이 재앙으로 끝나게 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해당 주제마다 투퀴디데스와 당대인의 이해와 얼마나 다르며, 투퀴디데스의 서술 기법에서 나타난 오류는 무엇인지를 살핌으로써 튀퀴디데스가 수정주의 역사가임을 논증한다.
투퀴디데스의 생각과 의도,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중요한 서술을 케이건 식의 해법으로 풀어나간 이 책의 미덕은 독자 또한 투퀴디데스의 ‘진실’과 케이건의 ‘진실’을 마주하면서 이 둘의 진실을 나(독자)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또 다른 이 책의 장점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해, 그리고 투퀴디데스와 페리클레스를 비롯한 동시대인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당대인과 호흡하며 그들의 역사를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할 뿐 아니라 투퀴디데스의 고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원전을 읽고 싶어지도록 만든다는 데 있다.
2. 투퀴디데스는 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집필했는가
- 투퀴디데스가 수정한 여섯 가지 ‘사건’의 ‘진실’을 통해 살펴본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탄생의 비밀
1)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불가피한 전쟁이었나?
케이건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투퀴디데스가 주장한 핵심 여섯 가지를 택해 이 주장이 왜 틀렸는지를 조목조목 들려준다. 먼저, 전쟁 발발 원인에 대해 살펴보면,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나이의 힘이 날로 커지고 헬라스 대부분이 이미 아테나이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모습을 두려워한 스파르타가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불가피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대인 대다수는 전쟁은 피할 수 있었으며, 메가라 봉쇄령을 비롯한 페리클레스의 실책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보는데, 케이건 역시 이러한 당대의 인식이 더 올바른 판단이라 본다.
2) 페리클레스의 전쟁 전략은 타당했는가?
페리클레스는 전쟁 발발 후 절제 정책으로 스파르타를 압박했고, 그러는 동안 스파르타에 평화파가 득세해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 내다봤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스파르타가 지속적으로 항전해 결국 그의 전쟁 전략은 실패했으며, 그 또한 전쟁 발발 2년 6개월 후 사망한다. 대다수 당대인은 페리클레스의 정책으로 전쟁이 발발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전쟁이 장기전에 들어갔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투퀴디데스는 페리클레스의 정책은 타당했으며, 문제는 페리클레스 사후 그의 계획과 정반대로 나아간 무능한 아테나이 민주정 후계자들에게 있다고 책임을 전가한다. 케이건은 투퀴디데스의 주장의 빈틈을 통해 그의 주장이 올바른 해석이 아니었음을 논증한다.
3)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는 민주정이었나?
투퀴디데스는 “페리클레스는 평화로운 때에 폴리스를 이끌면서 온건한 정책을 유지하고 폴리스를 안전하게 지켰다. 그가 이끄는 동안 아테나이는 가장 위대한 폴리스가 되었다”며, 그가 이끌던 시기에 “아테나이는 명목상 민주정이었으나 사실 점점 제1시민이 통치하는 정체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 달리 페리클레스 시대는 명백하게 민주정이었다고 케이건은 반박한다. 투퀴디데스가 민주정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치 영역에서 성공하려면 탁월한 지혜(페리클레스)가 필요하며 정치적 재능을 갖추지 못한 다수의 의견을 우위에 두는 민주정은 성공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설파하기 위해 이런 주장을 펼쳤다고 말한다.
4) 클레온이 운이 좋아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평가는 올바른가?
페리클레스 사후 아테나이는 페리클레스의 온건 정책을 따르는 니키아스파와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는 클레온파로 나뉘었고, 아테나이는 클레온의 정책에 손을 들어주었다. 투퀴디데스는 클레온을 “시민 중 가장 난폭하고 당시 누구보다 가장 크게 시민에게 영향을 끼쳤다”라고 평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그에 대해 편견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을 하나하나 살피면 클레온에 대한 아테나이 사람들의 믿음과 더불어 이를 왜곡하는 투퀴디데스의 수정 의견을 확인할 수 있다. 케이건은 투퀴디데스가 클레온을 폄하하는 까닭은 페리클레스가 실수한 것이 아님을 주장하기 위함이라 말한다. 특히 투퀴디데스 본인이 장군으로 선출된 당시 암피폴리스 전투를 서술한 부분에서는 전쟁에서 진 자신을 변론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주장에 ‘객관적’이라는 외피를 씌우고 클레온의 정책이 틀렸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활용한다. 그럼에도 클레온의 죽음을 애도하는 아테나이 사람들의 모습은 그를 존경하고 성공한 장군으로 대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5·6) 시켈리아 원정 결정은 누가 했으며, 이 원정이 재앙으로 끝나게 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투퀴디데스는 페리클레스 사후 아테나이의 최종적 패배를 초래한 많은 실수 중에서도 시켈리아 원정을 꼭 집어서 이야기한다. 아테나이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 섬으로 대규모 원정대를 보내고 추가 원정대까지 파견했지만, 결국 전멸하고 만 이 재앙과도 같은 사건은 이후 아테나이를 더욱 쇠퇴의 길로 인도했다. 이 원정 작전이 실패한 까닭에 대해 투퀴디데스는 원정군을 내보낸 아테나이인이 실수한 것이라 결론짓는다. 과연 그러한가? 케이건은 투퀴디데스의 기술 내용을 따라가며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하고, 투퀴디데스가 “자기 시대에 그런 일을 당하기에 가장 부적절한 사람”이라 불렀던 니키아스에게 책임이 있음을 밝혀낸다. 니키아스는 시켈리아 원정 전까지 아테나이의 존경받는 장군이었지만, 시켈리아 전사자를 기록한 비문에 그의 이름을 고의로 누락할 만큼 당대인들은 그에게 원정에 대한 오판과 실책의 책임을 물었는데, 케이건은 이들의 평가가 더 적절했고, 투퀴디데스의 서술은 이러한 평가를 ‘수정’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이상의 논점을 살펴봄으로써 케이건은 투퀴디데스의 관점보다 당대인들의 견해가 진실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투퀴디데스는 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당대의 역사 해석을 수정하려고 했을까? 여섯 가지 질문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투퀴디데스는 ‘페리클레스’와 그가 이끈 독재정이 틀렸다는 당대의 해석과 주장이 틀렸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역사를 수정해서 기술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주장은 2,400년 동안 정설로 굳어져왔다. 하지만 이제 케이건의 집요한 사료 읽기를 통해 결국 그가 당대인의 생각을 비롯해 이후 이 책을 “영원한 유산”으로 읽을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수정된 역사의 실체를 밝힐 수 있었으며, 투퀴디데스 또한 하나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재구성한 수정주의 역사가임을 밝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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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인상적인 책이다. 총체적이면서도 압축적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역사를 아울렀다. 드라마틱한 전쟁에 대한 객관적이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관점을 확인할 수 있다. 케이건의 역사 서술은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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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케이건이 고전학자, 국제관계 이론가, 군사사학자로서 그 누구에 비길 수 없는 전문 지식에 근거해 쓴 이 책은 전쟁을 둘러싼 헬라스인들의 계산 착오와 오만, 전략적 과욕의 서사시를 관통하며 투퀴디데스의 고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대한 깊은 고찰과 더불어 역사를 읽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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