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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역사적 사실을 시가(詩歌)가 아닌 실증적 학문의 대상으로 삼은 최초의 역사서이며, 고대 그리스 산문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역사서이다. 헤로도토스는 시간 순서대로 사건을 나열하던 기존의 역사서 기술 방식에서 벗어나 서사시나 희곡처럼 극적인 구성에 따라 사건을 배치하는 방식을 전반부에 도입했다. 이로써 기존의 역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문학적 예술성이 가미되었다. 이 책은 헤로도토스의 원전 중 흥미진진한 이야기 전개와 대격전이 이루어졌던 전투를 중심으로 구성하였으며, 모든 페이지에 컬러 자료 사진과 지도를 수록하여 보다 이해하기 쉽고 보다 흥미롭게 『페르시아 전쟁사』를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목차
이 책을 읽기 전에
제1권 제국의 주인
제2권 나일강의 선물
제3권 왕 중의 왕
제4권 물과 땅의 전쟁
제5권 이오니아의 난
제6권 다리우스의 창끝이 가리킨 곳
제7권 영웅의 전투
제8권 불타버린 항만
제9권 플라타이아이 전투
페르시아 전쟁 연표
헤로도토스와 「페르시아전쟁사」
제1권 제국의 주인
제2권 나일강의 선물
제3권 왕 중의 왕
제4권 물과 땅의 전쟁
제5권 이오니아의 난
제6권 다리우스의 창끝이 가리킨 곳
제7권 영웅의 전투
제8권 불타버린 항만
제9권 플라타이아이 전투
페르시아 전쟁 연표
헤로도토스와 「페르시아전쟁사」
책 속으로
노새의 예언
스파르타는 아르고스와 티레아 지방의 귀속 문제로 한창 전쟁 중이었다. 티레아는 본래 아르고스의 땅이었으나 스파르타가 이곳을 분리 점령하면서 양국 간에 영토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아르고스는 빼앗긴 티레아 땅 일부를 되찾고자 스파르타와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양측은 각각 병사 300명씩 선발해 전투를 벌이고, 승리하는 쪽이 티레아를 차지하기로 했다. 결전의 날, 양국 병사 600명이 전장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본대는 각자의 영토에 남아 결과를 기다려야 하며, 전장 근처에도 가면 안 된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자국 군대가 불리해지면 지원하고자 달려나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자칫 대규모 전쟁으로 바뀔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전쟁은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아르고스의 병사 두 명과 오트리아데스라는 스파르타 병사 한 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미 승패가 판가름 났다고 생각한 아르고스 병사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본국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오트리아데스는 혼자 그곳에 남아 죽은 아르고스 병사들의 갑옷을 수거해 자국 진영으로 가지고 왔다.
다음날, 아르고스와 스파르타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아르고스는 살아남은 자의 수가 더 많으니 자기편이 승리했다고 주장했고, 스파르타는 상대는 비록 도망쳐 달아났지만 자기편 병사는 끝까지 남아 적의 전사자 무기까지 빼앗아왔으므로 자국이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말다툼 끝에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이 두 번째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승리하면서 티레아의 지배권은 스파르타에게 돌아갔다.
이 일이 있은 후, 아르고스 사람들은 길게 기르던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버리고, 티레아를 되찾기 전까지 다시는 머리를 기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부녀자들의 머리 장식도 금지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때까지 짧은 머리를 고수했던 스파르타 사람들이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첫 번째 전쟁에서 혼자 살아남았던 스파르타 병사 오트리아데스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다른 전우들이 죽어갈 때 혼자 살아남은 것이 부끄러워 티레아에서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 「노새의 예언」 중에서
살라미스 해전
살라미스는 동과 서에 해협이 있는데, 양쪽 다 폭이 매우 좁았다. 그리스 지휘관들은 우선 코린토스인의 함대를 서쪽 해협으로 보내 그곳에 주둔한 페르시아 함대 200척과 대적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머지 함대는 중앙에 맞서 길게 진을 쳤다. 이에 페르시아 함대는 세 겹 횡렬로 배치했던 대열을 다시 조정했다. 오른쪽은 페니키아의 함대가, 왼쪽은 이오니아인의 함대가 그리스 연합군과 맞서게 했다. 그런데 이때 파도가 너무 강했던 탓인지, 아니면 훈련이 부족했던 때문인지 자기편 배끼리 서로 부딪치는 혼란이 일어났다. 게다가 너무 많은 함대가 동시에 배열되어 있어서 한 번 일어난 혼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렇게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에 그리스 연합 함대는 페르시아 진영을 향해 질서정연하게 돌진했다. 결국, 페르시아 함대는 끝까지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리스 연합군과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스 연합 함대는 페르시아 진영을 향해 불화살과 돌을 쏘는 등 맹공격을 퍼붓고 뱃머리의 금속 부분을 이용해 페르시아 함선의 선체를 쳐서 깨뜨리고 침몰시켰다. 페르시아 진영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페르시아의 몇몇 지휘 함대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퇴각하자 나머지 함대에는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러는 사이, 아테네 함대는 퇴각하는 페르시아 함대의 옆으로 바짝 따라 붙었다. 페르시아 함대는 반격을 시도하고 진형을 갖추려 용을 써봐도 오히려 자기편 배끼리 뒤엉키기만 할 뿐이었다. 마치 좁은 문틈에 몸이 끼인 거인처럼 페르시아는 속수무책으로 아테네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페르시아 진영이 일방적인 공격을 받으면서 점차 전투 능력을 상실하자, 아테네 함선에 타고 있던 격투 부대가 페르시아 함대로 도선해 남아 있는 병력을 깨끗이 처치해 버렸다. 아테네 함선에는 격투 부대원이 모두 열여덟 명 승선했는데, 이 가운데 열 명은 경무장 병사이고, 네 명은 중무장 병사, 네 명은 궁수였다.
그리스 연합군의 몇몇 함대가 페르시아군을 더욱 압박하기 위해 중앙 전선을 빠져나가 페르시아군 진형 오른쪽에 포진한 페니키아 함대로 다가갔다. 페니키아 함대를 중앙으로 몰아 페르시아 함대를 완전히 섬멸할 생각이었다. 페르시아 함대 가운데 가장 강력하기로 유명했던 페니키아 함대는 그곳으로 출격한 아테네 함대의 공격에 진형이 흐트러진 지 이미 오래였다.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아테네 중앙 부대의 출현이 설상가상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해서 오른쪽 진형을 완전히 무너뜨린 아테네 함선이 다시 중앙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승패가 갈린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오니아인의 함대가 먼저 퇴각해 버리자 나머지 부대도 완전히 의욕을 상실한 채 본영을 향해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 해전에서 파괴된 페르시아 함선은 무려 200척에 달했으나 그리스는 단지 40척을 잃었을 뿐이었다. 다리우스의 아들이자 크세르크세스의 형제였던 아리아비그네스가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이 밖에 수많은 페르시아, 메디아 그리고 아시아 연합군이 목숨을 잃었다. 물론 그리스 측 전사자 수는 극히 적었다. 수영에 능한 그리스 병사들은 육박전을 하다 사망하는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가까운 해안으로 헤엄쳐 도망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수영을 할 줄 몰랐던 페르시아 병사들은 바다에 빠져죽고 말았다.
스파르타는 아르고스와 티레아 지방의 귀속 문제로 한창 전쟁 중이었다. 티레아는 본래 아르고스의 땅이었으나 스파르타가 이곳을 분리 점령하면서 양국 간에 영토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아르고스는 빼앗긴 티레아 땅 일부를 되찾고자 스파르타와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양측은 각각 병사 300명씩 선발해 전투를 벌이고, 승리하는 쪽이 티레아를 차지하기로 했다. 결전의 날, 양국 병사 600명이 전장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본대는 각자의 영토에 남아 결과를 기다려야 하며, 전장 근처에도 가면 안 된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자국 군대가 불리해지면 지원하고자 달려나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자칫 대규모 전쟁으로 바뀔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전쟁은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아르고스의 병사 두 명과 오트리아데스라는 스파르타 병사 한 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미 승패가 판가름 났다고 생각한 아르고스 병사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본국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오트리아데스는 혼자 그곳에 남아 죽은 아르고스 병사들의 갑옷을 수거해 자국 진영으로 가지고 왔다.
다음날, 아르고스와 스파르타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아르고스는 살아남은 자의 수가 더 많으니 자기편이 승리했다고 주장했고, 스파르타는 상대는 비록 도망쳐 달아났지만 자기편 병사는 끝까지 남아 적의 전사자 무기까지 빼앗아왔으므로 자국이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말다툼 끝에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이 두 번째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승리하면서 티레아의 지배권은 스파르타에게 돌아갔다.
이 일이 있은 후, 아르고스 사람들은 길게 기르던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버리고, 티레아를 되찾기 전까지 다시는 머리를 기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부녀자들의 머리 장식도 금지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때까지 짧은 머리를 고수했던 스파르타 사람들이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첫 번째 전쟁에서 혼자 살아남았던 스파르타 병사 오트리아데스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다른 전우들이 죽어갈 때 혼자 살아남은 것이 부끄러워 티레아에서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 「노새의 예언」 중에서
살라미스 해전
살라미스는 동과 서에 해협이 있는데, 양쪽 다 폭이 매우 좁았다. 그리스 지휘관들은 우선 코린토스인의 함대를 서쪽 해협으로 보내 그곳에 주둔한 페르시아 함대 200척과 대적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머지 함대는 중앙에 맞서 길게 진을 쳤다. 이에 페르시아 함대는 세 겹 횡렬로 배치했던 대열을 다시 조정했다. 오른쪽은 페니키아의 함대가, 왼쪽은 이오니아인의 함대가 그리스 연합군과 맞서게 했다. 그런데 이때 파도가 너무 강했던 탓인지, 아니면 훈련이 부족했던 때문인지 자기편 배끼리 서로 부딪치는 혼란이 일어났다. 게다가 너무 많은 함대가 동시에 배열되어 있어서 한 번 일어난 혼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렇게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에 그리스 연합 함대는 페르시아 진영을 향해 질서정연하게 돌진했다. 결국, 페르시아 함대는 끝까지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리스 연합군과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스 연합 함대는 페르시아 진영을 향해 불화살과 돌을 쏘는 등 맹공격을 퍼붓고 뱃머리의 금속 부분을 이용해 페르시아 함선의 선체를 쳐서 깨뜨리고 침몰시켰다. 페르시아 진영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페르시아의 몇몇 지휘 함대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퇴각하자 나머지 함대에는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러는 사이, 아테네 함대는 퇴각하는 페르시아 함대의 옆으로 바짝 따라 붙었다. 페르시아 함대는 반격을 시도하고 진형을 갖추려 용을 써봐도 오히려 자기편 배끼리 뒤엉키기만 할 뿐이었다. 마치 좁은 문틈에 몸이 끼인 거인처럼 페르시아는 속수무책으로 아테네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페르시아 진영이 일방적인 공격을 받으면서 점차 전투 능력을 상실하자, 아테네 함선에 타고 있던 격투 부대가 페르시아 함대로 도선해 남아 있는 병력을 깨끗이 처치해 버렸다. 아테네 함선에는 격투 부대원이 모두 열여덟 명 승선했는데, 이 가운데 열 명은 경무장 병사이고, 네 명은 중무장 병사, 네 명은 궁수였다.
그리스 연합군의 몇몇 함대가 페르시아군을 더욱 압박하기 위해 중앙 전선을 빠져나가 페르시아군 진형 오른쪽에 포진한 페니키아 함대로 다가갔다. 페니키아 함대를 중앙으로 몰아 페르시아 함대를 완전히 섬멸할 생각이었다. 페르시아 함대 가운데 가장 강력하기로 유명했던 페니키아 함대는 그곳으로 출격한 아테네 함대의 공격에 진형이 흐트러진 지 이미 오래였다.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아테네 중앙 부대의 출현이 설상가상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해서 오른쪽 진형을 완전히 무너뜨린 아테네 함선이 다시 중앙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승패가 갈린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오니아인의 함대가 먼저 퇴각해 버리자 나머지 부대도 완전히 의욕을 상실한 채 본영을 향해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 해전에서 파괴된 페르시아 함선은 무려 200척에 달했으나 그리스는 단지 40척을 잃었을 뿐이었다. 다리우스의 아들이자 크세르크세스의 형제였던 아리아비그네스가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이 밖에 수많은 페르시아, 메디아 그리고 아시아 연합군이 목숨을 잃었다. 물론 그리스 측 전사자 수는 극히 적었다. 수영에 능한 그리스 병사들은 육박전을 하다 사망하는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가까운 해안으로 헤엄쳐 도망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수영을 할 줄 몰랐던 페르시아 병사들은 바다에 빠져죽고 말았다.
--- 「살라미스 해전」 중에서
출판사 리뷰
『페르시아 전쟁사』는 역사적 사실을 시가(詩歌)가 아닌 실증적 학문의 대상으로 삼은 최초의 역사서이며, 고대 그리스 산문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을 쓴 헤로도토스를 훗날 키케로는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헤로도토스는 일생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냈고, 모함을 받아 반평생 타국을 떠도는 삶을 살았다. 이 때문에 중앙 유럽과 동아시아를 포함해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지역을 여행했다. 『페르시아 전쟁사』에는 그가 여행한 20여 개 민족의 생활상과 사회 모습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오늘날 전해지는 『페르시아 전쟁사』는 훗날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이 아홉 권으로 재편집한 것이다. 서술과 작가의 평가를 적절히 결합한 서사시 기록 방식을 따른 이 작품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가 있는데, 전반부에 해당되는 1권에서 5권 27절까지에는 페르시아 전쟁의 사실적 사건을 뼈대로 이집트와 흑해 연안, 아라비아 반도, 리비아 등을 여행하며 수집한 지리, 인문, 정치, 관습, 종교 등의 정보를 기술했다.
헤로도토스는 시간 순서대로 사건을 나열하던 기존의 역사서 기술 방식에서 벗어나 서사시나 희곡처럼 극적인 구성에 따라 사건을 배치하는 방식을 전반부에 도입했다. 이로써 기존의 역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문학적 예술성이 가미되었다. 5권 28절부터는 본격적인 전쟁 이야기가 펼쳐지는 후반부가 시작된다. 이 부분은 헤로도토스 자신의 엄격한 검증과 객관적인 태도가 더욱 돋보인다. 특히 테르모필레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 대한 묘사는 웅대한 스케일과 생생하고 박진감 넘치는 표현으로 고대 역사서의 백미로 꼽힌다. 9권 플라타이아이 전투, 미칼레 전투를 끝으로 『페르시아 전쟁사』의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이번에 시그마북스에서 출간한 『(고대 동서양 문명의 대격돌) 페르시아 전쟁사』는 헤로도토스의 원전 중 흥미진진한 이야기 전개와 대격전이 이루어졌던 전투를 중심으로 구성하였으며, 모든 페이지에 컬러 자료 사진과 지도를 수록하여 보다 이해하기 쉽고 보다 흥미롭게 『페르시아 전쟁사』를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오늘날 전해지는 『페르시아 전쟁사』는 훗날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이 아홉 권으로 재편집한 것이다. 서술과 작가의 평가를 적절히 결합한 서사시 기록 방식을 따른 이 작품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가 있는데, 전반부에 해당되는 1권에서 5권 27절까지에는 페르시아 전쟁의 사실적 사건을 뼈대로 이집트와 흑해 연안, 아라비아 반도, 리비아 등을 여행하며 수집한 지리, 인문, 정치, 관습, 종교 등의 정보를 기술했다.
헤로도토스는 시간 순서대로 사건을 나열하던 기존의 역사서 기술 방식에서 벗어나 서사시나 희곡처럼 극적인 구성에 따라 사건을 배치하는 방식을 전반부에 도입했다. 이로써 기존의 역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문학적 예술성이 가미되었다. 5권 28절부터는 본격적인 전쟁 이야기가 펼쳐지는 후반부가 시작된다. 이 부분은 헤로도토스 자신의 엄격한 검증과 객관적인 태도가 더욱 돋보인다. 특히 테르모필레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 대한 묘사는 웅대한 스케일과 생생하고 박진감 넘치는 표현으로 고대 역사서의 백미로 꼽힌다. 9권 플라타이아이 전투, 미칼레 전투를 끝으로 『페르시아 전쟁사』의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이번에 시그마북스에서 출간한 『(고대 동서양 문명의 대격돌) 페르시아 전쟁사』는 헤로도토스의 원전 중 흥미진진한 이야기 전개와 대격전이 이루어졌던 전투를 중심으로 구성하였으며, 모든 페이지에 컬러 자료 사진과 지도를 수록하여 보다 이해하기 쉽고 보다 흥미롭게 『페르시아 전쟁사』를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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