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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일본 도쿄 YMCA 원장인 니이호리 구니지가 일제하의 한국인 김교신의 신앙과 저항의 일생을 전기의 형식으로 쓴 것으로 일본의 신교출판사에서 지난 2004년 발간되었다. 당초 니이호리 구니지는 일본의 신앙잡지 「미루토스」에 우치무라 간조가 한국에 영향을 준 인물을 연구하며 김교신의 생애를 추적하다가, 점차 김교신에 대한 깊은 이해와 흥미를 가지게 되어 예정과는 달리 20여 회에 걸쳐 장기간 연재하게 되었다. 그사이 한국에 다녀와 김교신의 생가터와 양정고보가 있던 곳을 방문하는 등 김교신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 책의 존재를 한국에서 알게 된 김교신 선생의 넷째 딸인 김정옥은 8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몸소 일본어 사전을 찾아가며 이 책을 번역했다. 한국 기독교의 선각자 김교신 선생의 생애가 일본인에 의해 추적되고, 또 그에 대한 높은 평가가 이루어졌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목차
한국의 독자들에게
책머리에
Ⅰ
1. 성장과정
2. 일본유학
3. 우치무라 간조와의 만남
4. 지리박물과로의 전과
5. 6인의 동지들
Ⅱ
6. 무교회주의 깃발을 올리다
7. 양정고등보통학교
8. 우치무라 간조를 둘러싼 논쟁
9. 논쟁의 배경
10. 신앙의 싸움
11. 손기정
12. 총독부의 검열에 항거하여
13. 정릉리
14. 구로사키 고기치
15. 야나이하라 다다오
Ⅲ
16. 성서조선사건
17. 출옥, 새로운 사명에 살다
18. 십자가를 지고
19. 소천
20. 2001년 여름
글을 마치며
옮긴이의 글
참고문헌
주요등장인물
책머리에
Ⅰ
1. 성장과정
2. 일본유학
3. 우치무라 간조와의 만남
4. 지리박물과로의 전과
5. 6인의 동지들
Ⅱ
6. 무교회주의 깃발을 올리다
7. 양정고등보통학교
8. 우치무라 간조를 둘러싼 논쟁
9. 논쟁의 배경
10. 신앙의 싸움
11. 손기정
12. 총독부의 검열에 항거하여
13. 정릉리
14. 구로사키 고기치
15. 야나이하라 다다오
Ⅲ
16. 성서조선사건
17. 출옥, 새로운 사명에 살다
18. 십자가를 지고
19. 소천
20. 2001년 여름
글을 마치며
옮긴이의 글
참고문헌
주요등장인물
책 속으로
김교신 선생은 한국 무교회 운동의 창시자입니다. 그의 뜨거운 신앙심과 민족에 바친 애정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찬란하고 강렬하게 그 빛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김교신 선생은 성서에 계시된 복음의 진수를 정확하게 포착하여, 온갖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전도자·교육자로의 값진 생애를 온 힘을 기울여 완주해냈습니다. 이런 위대한 지도자를 한국에 보내주신 것은 한국의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교육계, 더 나아가 한국 민족 전체에 베푸신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 p.8
우치무라가 강단에 서면 사생결단의 싸움에 임하듯이 강의에 귀를 기울였다. 우치무라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700명 이상의 청중 가운데 제일 앞자리에 앉은 6척의 대장부가 팽팽한 활시위를 당기는 것 같은 눈길을 자기에게 쏘고 있다는 것을. 그 청년의 눈초리는 위로 뻗쳤고 이마는 넓고 콧대는 반듯했다. 힘있게 다문 입가에는 고스란히 그 의지가 나타나고 있었다. 특별히 인상에 남는 것은 예리한 눈빛이었다. 후에 제자들이 ‘양칼’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 같이, 교신의 특징의 하나는 매서운 눈빛이었다. --- p.29
일본의 식민지하에서 당시 조선의 사립학교는 거의 우수한 스포츠선수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유는 일본인에 대한 대항의식이었다. 식민지 지배하에서 스포츠는 민족의식을 일으키는 데에 안성마춤의 수단이었다. 양정고등보통학교는 육상경기에 탁월했다. 일본인 학생과 시합을 할 경우 농구나 럭비 등의 단체경기에서는 일본인 심판이 조선인에게 불리한 판정을 내리는 것이 흔했다. 하지만 육상경기, 그것도 마라톤의 경우는 조선인 학생의 실력이 제대로 평가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학교는 육상경기에 힘을 쏟아 올림픽 마라톤 선수를 여러 명 배출했다. 교신은 교실 수업뿐 아니라 마라톤 등 스포츠에도 학생들의 지도에 힘썼다. --- p.50
모처럼 재취임의 길이 열렸지만 교신이 교편을 잡은 것은 겨우 반년밖에 안된다. 가장 큰 이유는 교신이 동화정책에 철저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김교신’이란 이름을 한번도 바꾼 적이 없었다. 조선 민족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본인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 시대에 공식적인 장소에서 조선말을 사용하는 것은 엄하게 금지되고 있었다. 수업은 모두 일본말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교신은 끝내 조선말로 항의를 했다.
우치무라가 강단에 서면 사생결단의 싸움에 임하듯이 강의에 귀를 기울였다. 우치무라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700명 이상의 청중 가운데 제일 앞자리에 앉은 6척의 대장부가 팽팽한 활시위를 당기는 것 같은 눈길을 자기에게 쏘고 있다는 것을. 그 청년의 눈초리는 위로 뻗쳤고 이마는 넓고 콧대는 반듯했다. 힘있게 다문 입가에는 고스란히 그 의지가 나타나고 있었다. 특별히 인상에 남는 것은 예리한 눈빛이었다. 후에 제자들이 ‘양칼’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 같이, 교신의 특징의 하나는 매서운 눈빛이었다. --- p.29
일본의 식민지하에서 당시 조선의 사립학교는 거의 우수한 스포츠선수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유는 일본인에 대한 대항의식이었다. 식민지 지배하에서 스포츠는 민족의식을 일으키는 데에 안성마춤의 수단이었다. 양정고등보통학교는 육상경기에 탁월했다. 일본인 학생과 시합을 할 경우 농구나 럭비 등의 단체경기에서는 일본인 심판이 조선인에게 불리한 판정을 내리는 것이 흔했다. 하지만 육상경기, 그것도 마라톤의 경우는 조선인 학생의 실력이 제대로 평가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학교는 육상경기에 힘을 쏟아 올림픽 마라톤 선수를 여러 명 배출했다. 교신은 교실 수업뿐 아니라 마라톤 등 스포츠에도 학생들의 지도에 힘썼다. --- p.50
모처럼 재취임의 길이 열렸지만 교신이 교편을 잡은 것은 겨우 반년밖에 안된다. 가장 큰 이유는 교신이 동화정책에 철저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김교신’이란 이름을 한번도 바꾼 적이 없었다. 조선 민족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본인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 시대에 공식적인 장소에서 조선말을 사용하는 것은 엄하게 금지되고 있었다. 수업은 모두 일본말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교신은 끝내 조선말로 항의를 했다.
--- p.119
출판사 리뷰
이신순, 안중근과 같이 압제 당사자였던 일본인에 의해 존경받는 한국인 김교신
도쿄 YMCA 원장인 니이호리 구니지에 의해 조명된 한국의 기독교인 김교신의 생애를 전기 형식으로 엮었다. 일본 근대사의 거목 우치무라 간조와의 관계를 통해 그 영향을 받은 한국인 김교신이 어떻게 참된 기독교인으로써 한 시대를 살다 갔는지 조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당시 한국을 압제하였던 나라의 후손인 일본인에 의해 조명되고, 또한 그 정신적인 면이 높게 평가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저자인 니이호리 구니지는 2001년 한국을 방문하여 김교신 선생의 장녀인 김진술을 만나 직접 인터뷰를 하였다. 또한 1930년대 당시 정릉리에 있었던 김교신 선생의 집터와 양정고보의 교사가 있었던 만리동을 직접 방문하는 등 김교신에 대한 특별한 애정으로 이 글을 집필하였다.
야나이하라 다다오, 구로사키 고기치 등 일본 자료 인용으로 김교신에 대한 입체적 접근
이 책은 국내에서 발행된 김교신에 관한 자료들에서는 볼 수 없는, 당시 일본의 정황과 일본에서 발간된 자료를 잘 인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1940년 당시 김교신이 기획한 구로사키와 야나이하라 다다오의 조선에서의 강연이 진행된 전후 사정을 보다 상세히 살피고 있다. 이들의 신앙잡지인 「영원한 생명」, 「가신」에는 이들 각자의 일기가 실려 있어 일본 자료가 인용되어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또한 야나이하라 다다오의 조선 강연에서의 사진 같이, 국내에서 입수할 수 없었던 사진도 실려 있다.
그리고 경성 YMCA와 황성 YMCA와의 관계와 같은, 당시 조선 총독부의 기독교 관련 정책으로 인한 이들 기관의 미묘한 관계와 같은 부분도 세밀하게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부분은 김교신이 남긴 공개 일기만으로는 알 수 없는 당시의 구체적인 사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우치무라의 영향을 받았으나, 가장 한국적인 기독교인으로 남은 김교신
김교신이 어떻게 우치무라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이 책은 아주 자세하게 추적하고 있다. 저자는 그 결론으로 한국의 기독자로써의 김교신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혹자가 말하는 김교신의 ‘일본적 기독교’ 색채에 대해 부정하며 저자는 “교신은 우치무라에게서 애국을 배웠지만 그 중심은 조선 사람에게 적합한 것으로 바꾸어 살았다. 거기 조선 무교회주의의 뼈대가 있다. 교신은 틀림없는 조선 무교회주의자였다”라고 평가한다. 김교신이 단지 일본의 어떤 인물과 연관이 된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김교신 자체로 충분히 조망될 가치가 있는 숭고한 믿음의 사람으로 평가된 것에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도쿄 YMCA 원장인 니이호리 구니지에 의해 조명된 한국의 기독교인 김교신의 생애를 전기 형식으로 엮었다. 일본 근대사의 거목 우치무라 간조와의 관계를 통해 그 영향을 받은 한국인 김교신이 어떻게 참된 기독교인으로써 한 시대를 살다 갔는지 조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당시 한국을 압제하였던 나라의 후손인 일본인에 의해 조명되고, 또한 그 정신적인 면이 높게 평가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저자인 니이호리 구니지는 2001년 한국을 방문하여 김교신 선생의 장녀인 김진술을 만나 직접 인터뷰를 하였다. 또한 1930년대 당시 정릉리에 있었던 김교신 선생의 집터와 양정고보의 교사가 있었던 만리동을 직접 방문하는 등 김교신에 대한 특별한 애정으로 이 글을 집필하였다.
야나이하라 다다오, 구로사키 고기치 등 일본 자료 인용으로 김교신에 대한 입체적 접근
이 책은 국내에서 발행된 김교신에 관한 자료들에서는 볼 수 없는, 당시 일본의 정황과 일본에서 발간된 자료를 잘 인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1940년 당시 김교신이 기획한 구로사키와 야나이하라 다다오의 조선에서의 강연이 진행된 전후 사정을 보다 상세히 살피고 있다. 이들의 신앙잡지인 「영원한 생명」, 「가신」에는 이들 각자의 일기가 실려 있어 일본 자료가 인용되어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또한 야나이하라 다다오의 조선 강연에서의 사진 같이, 국내에서 입수할 수 없었던 사진도 실려 있다.
그리고 경성 YMCA와 황성 YMCA와의 관계와 같은, 당시 조선 총독부의 기독교 관련 정책으로 인한 이들 기관의 미묘한 관계와 같은 부분도 세밀하게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부분은 김교신이 남긴 공개 일기만으로는 알 수 없는 당시의 구체적인 사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우치무라의 영향을 받았으나, 가장 한국적인 기독교인으로 남은 김교신
김교신이 어떻게 우치무라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이 책은 아주 자세하게 추적하고 있다. 저자는 그 결론으로 한국의 기독자로써의 김교신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혹자가 말하는 김교신의 ‘일본적 기독교’ 색채에 대해 부정하며 저자는 “교신은 우치무라에게서 애국을 배웠지만 그 중심은 조선 사람에게 적합한 것으로 바꾸어 살았다. 거기 조선 무교회주의의 뼈대가 있다. 교신은 틀림없는 조선 무교회주의자였다”라고 평가한다. 김교신이 단지 일본의 어떤 인물과 연관이 된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김교신 자체로 충분히 조망될 가치가 있는 숭고한 믿음의 사람으로 평가된 것에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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