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한국근대사 연구 (독서>책소개)/1.한국근대사

전범이 된 조선청년

동방박사님 2022. 5. 14.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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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2월 1일 민족문제연구소는 한국인 BC급 전범 이학래의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청년』을 발간했다. 이 책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강제동원 되어 타이에서 포로감시원으로 복무하다 전쟁 종료 후 BC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감형되어 수년 간 감옥 생활을 했던 한국인 BC급 전범 이학래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담고 있다.

『전범이 된 조선청년』은 일본에서 출판된 『한국인 전 BC급 전범의 호소』를 번역한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본군의 최말단에 속했던 한국인 포로감시원들이 일상적으로 포로를 대면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일제의 포로 정책의 책임을 떠안고 BC급 전범으로 처벌되었던 아픈 과거를 회고한다.

특히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는 일제가 자행한 여러 유형의 강제동원 가운데서도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분야라 할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3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범이 된 조선청년들-한국인 포로감시원의 기록’이라는 특별전을 개최하여 한국 사회에 이 문제를 환기한 바 있다. 이학래 선생의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청년』의 출판으로 다시 한 번 한국 사회에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가 재조명되기를 기대한다.

목차

책을 펴내며
한국 독자 여러분께

‘죽음의 철로’ 포로 감시원
포로 감시원이 되기까지
패전, 역전되는 입장
사형 판결과 ‘죽음을 각오한’ 여덟 달
스가모 프리즌Sugamo Prison이라는 곳
택시 회사 설립과 유골 송환 운동
조리條理를 요구하는 재판 투쟁
일본 정부의 대응을 요구하는 입법 운동으로

한국어판 후기
끝나지 않은 질문,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 우쓰미 아이코
오늘 하루, 이학래가 되어 보자 - 이상의
역자후기

특정 연합국 재판 피구금자 등에 대한 특별급부금 지급에 관한 법률안
이학래 연보
참고 문헌
이 책의 이해를 돕는 키워드
 

저자 소개

저 : 이학래
 
1925년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태어났다. 열일곱 살 때 일본군의 포로 감시원 모집에 응모하여, 1942년 9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군 군무원으로 타이·미얀마 철도 건설에 동원된 연합국 포로 감시 업무에 종사했다. 1947년 3월 20일 전범으로 체포되어 오스트레일리아 관할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7일 20년으로 감형되었다. ‘일본인’으로 취급되어 중형을 살았지만, 일본 정부는 ‘...
 

출판사 리뷰

『전범이 된 조선청년』
- 한국인 BC급 전범 이학래 회고록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는 전쟁으로 치달았다. 군사력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부문에 걸쳐 국가의 총력을 총동원하는 전쟁이었다. 일제가 일으킨 침략전쟁에 조선인들도 대거 동원됐다. 군인, 군속, 노동자, 일본군 ‘위안부’까지 일제가 강제동원한 조선인은 약 800만 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하고 잊혀진 사람들이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연합국 포로의 감시를 맡았던 민간인 군무원, 포로감시원이 그들이다.

‘지원’을 빙자한 강제동원, 포로감시원

1942년 5월 23일 매일신보 1면에 포로감시원을 모집한다는 기사가 머리기사로 실렸다. 민간인 군무원으로 수천 명을 채용한다고 했고, ‘반도청년의 더할 나위없는 영광’이라고 했다. 20~35세의 초등학교 졸업 이상의 청년들이 모집 대상이 되었다. 형식상으로는 모집이었으나 실제는 달랐다. 지역별로 인원을 배정한 후 각 지역의 관리와 경찰이 할당된 인원을 동원했다.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강제동원이었다.
징병제 시행이 발표된 시점에서 조선의 청년들은 언젠가 징병되어 전쟁터로 끌려가야 한다는 냉혹한 현실과 마주했다. 이때 포로감시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포로감시원이 되면 월급도 주고 가족도 보호해준다고 했다. 집안 살림에 보탬도 되고, 전쟁터에 나가 총알받이가 되는 것도 피할 수 있다면 포로감시원이 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들은 그렇게 포로감시원이 되었다.

열일곱 최연소의 나이로 포로감시원이 된 이학래
이학래는 열일곱의 나이로 최연소 포로감시원이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동원된 3,000여 명의 조선인 청년들과 함께 부산에 있는 일명 노구치부대의 훈련소로 끌려가 훈련을 받았다. 민간인 군무원 신분이었지만, 그들이 받은 건 철저한 군대식 교육이었다. 포로는 감시와 감독의 대상일 뿐, 포로를 인도적으로 처우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배우지 못했다. 포로에 맞서려면 폭력밖에 없다고 배웠다. 포로는 동물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포로보다 우월하게 보이려면 협박과 구타밖에 없다고, 그렇지 않으면 포로들이 너희들의 머리 위에 올라서게 될 거라고 배웠다.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각지로 파견되어 13만 5천여 명의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고 감독했다. 이학래도 타이에서 1만 1천명의 포로들을 만났다. 후일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로 유명해지는 ‘죽음의 철로’, 타이·미얀마철도 건설현장에 투입된 포로들이었다. 포로감시원은 일본군에 소속되었으나 이등병보다 못한 일본군의 최말단에 자리했다. 이학래는 상급자가 시키는 대로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일본인 A급 전범 18명 사형, 한국인 BC급 전범 23명 사형

전쟁이 끝나자 연합국은 태평양전쟁 과정에서 자행된 일본의 전쟁범죄 책임을 묻기 위해 재판을 시작했다. 동남아시아 49곳에서 BC급 전범재판이 벌어졌다. 재판 결과 5,700명이 BC급 전범으로 판결되었는데, 그중 148명이 조선인이었다. 그들 중 23명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125명은 무기 또는 유기징역에 처해졌다. 조선인 148명 중 129명이 이학래와 같은 포로감시원이었다.
포로감시원의 죄목은 포로 학대였다. 무리하게 노역을 강요하고 식량과 의약품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군의 명령과 포로 감시 체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포로 정책 책임자들이 대부분 빠져나간 가운데, 그 책임은 일상적으로 포로를 직접 대면해야했던 최말단의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에게 지워졌다.

전범이 된 조선청년 이학래,
우리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전범이 되어야 했을까?
이학래는 1947년 3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호주 군사법정에서 포로학대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재판에서 이학래는 환자에게 무리하게 노역을 시켜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변호사는 그가 말단의 군무원일 뿐, 포로와 관련하여 어느 것도 결정할 지위에 있지 않았다고 변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학래는 7개월간 사형수로 살았다. 이후 감형되어 수년간의 감옥 생활 끝에 석방되었다. 하지만 전범으로 낙인찍힌 그는 끝내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왜 일본의 전쟁 책임을 떠맡아야 했을까? 그들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전범이 되어야 했을까? 이학래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평생을 싸워왔다. ‘조선인 BC급 전범’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죽은 동료와 평생 동안 그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는 자신의 무고함만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평생 동안 일제의 침략전쟁에 자신의 한 손을 빌려주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반성과 각성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한국에서 이 책을 출판하는 것을 끝까지 망설였다. 한국의 독자들이 ‘전범’이 되어야했던 자신의 삶을 이해해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한국의 여러분도 이해해 주신다면 좋겠다”고.
여기 ‘역사의 희생자’가 겪은 파란만장한 삶이 있다. 그가 내민 손을 잡을 것인지는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자,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책을 내기로 결심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나를 움직이는 무언가를 반드시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오늘 하루, 이학래가 되어 보자

이 상 의(인천대학교 초빙교수)

1. 서

전범戰犯, 무서운 말이다. 더욱이 조선인 전범이라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데 수십 년간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면 참으로 두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로 다가올 것이다. 이 책은 구순을 넘긴 이학래가 자신과 동료들에게 ‘BC급 전범’이라는 낙인이 찍힌 과정과 이후의 파란만장한 생애에 대해 써내려간 글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거대한 역사의 회오리 속에 휘몰려 어찌할 수 없었던 인생에 대해서.
한국근현대사 강의를 진행하면서 그 중 한 주는 ‘BC급 전범이 된 조선인’에 대한 내용을 수업한다. 이를 통해 역사와 개인의 관계를 설명하곤 하는데, 한 학기 수업 중 학생들이 가장 진지하면서도 가슴 아리게 받아들이는 시간이다. 일본의 시종일관 무책임한 태도에 분개하는 학생도 있고, 국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음을 비판하는 학생도 있고, 역사의 비정함을 탓하는 학생도 있다. 토론의 결론은 대개 뒤틀린 역사 속의 억울한 희생자에 대한 안타까움과 이들에 대한 명예 회복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2. 전쟁 그리고 강제동원

청일전쟁, 러일전쟁, 1차대전,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전쟁과 영토 확대로 연속된 일본의 근대사는 우리의 근대사와 무관하지 않다. 그중에도 중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체제기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조선과 조선인을 동원하기 위해 황국신민 운운하면서 조선인의 정체성을 말살시켜간 시기다.
일제는 전시에 정부는 어떠한 것이든 다 동원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내용의 국가총동원법을 급조하고 그에 근거하여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여기에서 강제란 육체적인 강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체적인 구속이나 협박은 물론, 황민화 교육에 따른 정신적인 구속·회유, 취업사기, 법적인 강제에 의한 인력동원도 강제동원에 포함된다는 것이 학계의 견해다. 물리적 강제만이 아니라 본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반대되는 행위는 강제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3·1운동 이후의 민족분열통치를 일제가 ‘문화통치’라고 불렀다고 해서 우리가 문화적인 통치였다고 받아들여야 하는 건 아닐 게다. 마찬가지로 지원이라 부르면서 지원하지 않을 수 없는 여건을 만들어놓고 지원을 하도록 하면, 그것은 형식상은 지원이지만 실제로는 지원이 아닌 강제동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한 1938년부터 전쟁이 끝난 1945년까지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연인원 800만명에 가깝다. 그 중에는 이학래 등의 포로감시원도 포함되어 있다. 수많은 노무자가 있었는데 그중에 하필 포로감시 일을 맡은 군무원, 포로감시원이었다. 아니 그 일을 ‘지원’했다고 한다. 포로감시를 하고 싶어 지원했을까, 포로가 어떤 사람들인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고 지원했을까.
1942년 일제는 조만간 조선인 징병제를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다. 이전까지는 지원병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인 청년들을 부분적으로 병력에 동원했지만, 1944년부터는 전면적인 동원으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보름 후 신문에는 ‘모집! 포로감시원, 거듭되는 반도청년의 영광, 군속으로 수천 명 채용’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대상은 20~35세의 국민학교 졸업 이상의 남자로, 형식상은 모집이었으나 지역별로 인원을 배정하여 행정관리와 경찰이 할당된 인원을 동원했다. 징병제 시행을 앞두고 지원이라는 허울을 쓴 채 추진한 강제동원이었다.
언젠가는 동원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던 이들에게, 포로감시원에 지원하면 2년간 월급도 주고 가족도 보호해 준다는 말은 반가운 제안이었다. 2년만 무사히 지내면 집안 살림에 보탬도 되고, 징병이 되어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나가는 것을 피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솔깃한 조건이었다. 태평양전쟁기 13만 5천여 명의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고 노역시키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일본군 조직의 최말단에서 상관의 명령에 따라 포로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3,200여 명이 포로감시원이 되었고, 지금의 부산시민공원 자리에 있던 노구치부대의 임시군속훈련소에서 교육을 받았다. 군사훈련을 받았고, 포로가 되는 것은 수치라는 말, 체구가 큰 연합군 포로에 맞서려면 폭력밖에 없다는 말을 새겨들었다. 포로는 동물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만불손한 포로들이 무시하게 될 거라고, 포로보다 우월하게 보일 수 있는 방법은 구타와 협박을 동원하는 것이라고 수없이 들었지만, 전쟁포로를 어떻게 대우할지에 대한 제네바협약은 들어보지 못했다.
이렇게 이학래는 포로들을 만났다. 그들을 감시하고 관리하였다. 일본인 하사관 17명과 조선인 군무원 130명이 1만 1천명의 포로를 관리할 때 말이 통하지 않는 포로들, 덩치가 큰 포로들, 명예로운 대우를 원했던 포로들, 당당하게 휘파람 부는 낯선 포로들과 마주하였다.

3. 전후의 전범재판

2차대전이 끝나자 연합국은 태평양전쟁 진행과정에서 자행된 일본의 범죄와 그 책임을 묻기 위한 재판을 진행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7개국 주도로 동남아시아 49곳에서 BC급 전범재판이 행해졌다. 재판 결과 5,700명이 BC급 전범으로 판결되었는데, 그중에는 148명의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 중 23명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125명은 무기 또는 유기징역에 처해졌다. 일제의 전쟁 책임이 식민지 조선인에게 전가되었던 것이다. 특이하게도 전범 판결을 받은 조선인 148명 중 대다수인 129명이 포로수용소에서 일하던 군무원이었다.
재판은 일심즉결로 진행되었다. 대개의 경우 연합군 포로의 증언이 포로감시원의 생사를 결정하였다. 포로감시원은 일본군의 맨 앞에서 매일 포로와 마주했던 존재로서, 포로들은 그들을 눈앞에서 학대했던 감시원으로 고발하였다. 판사, 검사, 변호인은 연합군에서 지명하였고, 검사측 증인만 있었으며, 진술할 기회와 통역이 없는 법정도 있었다.
조국은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되었고 연합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포로감시원들은 귀국하지 못한 채 여전히 일본인으로서 연합국의 재판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조국을 ‘해방시킨’ 연합군에게 전범으로 판결을 받았고, 수형자가 되었고, 사형을 당했다.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논리를 배운 식민지민으로서, 황민화교육을 받고 일본을 위해 분투한 자신의 무지가 후회스럽다고 재판정에서 한탄한 사람도 있었다.
포로감시원의 죄목은 포로 학대였다. 노역을 강요하고 식량과 의약품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아 포로를 학대했다는 것이다. 포로가 되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금기시하는 일본군과 포로 학대를 범죄시하는 연합군의 인식 차이가 판결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일본군의 명령과 포로감시 체계에 따라 노역을 시켰고 일본에서 식량과 의약품이 보급되지 않아 포로들에게 줄 수 없었지만, 이러한 사정은 재판정에서 고려되지 않았다. 연합군은 독일 나치에 붙잡힌 영·미군의 포로 사망률이 3.6%였던 데 비해 일본군에 잡힌 포로의 사망률이 무려 27%에 달하는 데 분노하여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분풀이를 하고 싶었다.
이학래 역시 1947년 3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호주 군사법정에서 포로학대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검사는 수용소 포로가 죽은 책임을 이학래에게 물었다. 변호사는 그가 군속일 뿐 캠프를 지휘할 권한이 없었으며, 약품공급, 식량배급, 포로의 일상과 관련된 결정은 그의 직무 범위를 벗어난 일이라고 하였다. 재판 결과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유기징역으로 감형되고 석방되었으나 그는 지금도 여전히 정신적으로 그 처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4. 누가 이들을 역사의 희생양으로 만들었는가

도대체 일본은, 연합국은, 미군정은, 한국정부는, 그리고 우리는 무슨 짓을 한 것인가. 한국정부의 책임, 일본정부의 책임, 재판을 진행했던 연합국의 책임, 그리고 아, 우리의 책임은 없을까.

1) 연합국의 전범재판과 조선인의 이중 피해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연합군의 포로 4명 중 1명이 사망한 전쟁인 동시에 일제가 1,800만 명이 넘는 아시아 민중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전쟁이다. 연합국은 전범 재판에서 일본이 점령한 지역의 민간인에게 끼친 피해에 대해서는 비중 있게 언급하지 않았다. 중국과 필리핀을 제외하면 아시아의 피해국들은 그 재판에 참가하지 못했다. 연합국은 이 재판에서 조선과 타이완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언급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군인과 군무원을 일본인으로 심판하는 잘못을 범했다.
전범재판은 전쟁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를 처벌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 재판에는 국제정치의 틀에서 승자의 논리가 적용되었다. 조선인을 포로감시원으로 동원한 일본도, 조선인 포로감시원을 전범으로 처벌한 연합국도 모두 제국주의 시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식민지민을 수탈한 가해자였다. 재판에서는 전쟁에 강제동원된 식민지민으로서, 일본군의 명령에 의해 포로들을 관리했던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특수한 사정은 고려되지 않았다. 오히려 제국주의 침략 과정의 피해자였던 조선인이 가해자로 몰리면서 전범으로 희생되어 이중의 피해를 입게 되었다.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수용소에 배치된 이후 일본인과 연합군 포로 사이에서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위치에 놓여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이들은 가해자 일본에게 버림받고 피해자 연합군에게 비난받았다. 당시 포로감시원의 행위 그 자체는 존재했지만, 이들에게 씌워진 전쟁범죄의 책임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 이들이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책임을 진 전범이 되고, 나아가 사형을 선고할 정도로 무거운 책임을 물은 재판은 과연 정당한 것이었나. 연합국의 재판에서는 이들이 누구고 어디서 왔는지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전쟁범죄와 그 책임이 식민지민에게 전가되고, 개인의 인생이 무참히 짓밟힌 과정을 그들은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2) 일본의 전쟁책임 전가와 보상 회피
연합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거해 일본정부에 일본인의 형 집행을 위임하였다. 포로감시원들은 1952년 4월 조약의 발효와 함께 일본 동경에 있는 스가모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조약에는 이후의 형 집행은 일본인에 한한다고 규정되어 있었지만, 일본 법원은 이들이 선고 당시 일본인이었으므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여 형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이후 이들의 원호, 보상에 대해서는 일본국적을 상실했다는 이유를 들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들을 일본인으로 취급해 형 집행을 계속했던 일본정부가 이번에는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한 것이다. 이들은 일본인의 이름으로 동원되었고, 일본인이었다는 이유로 처벌받았고,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전후 보상에서 제외되었다. 일본인 군인, 군무원과 ‘전범’에게는 연금, 위로금, 유족연금이 지급되었고, 타이완인에게도 위로금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한국 국적자들에게는 아무런 배상이나 보상이 행해지지 않았다. 일본은 지금까지 한일회담 일괄타결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한일회담에서는 이들의 문제가 논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고, 일본정부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이학래를 비롯한 ‘한국인 BC급 전범’과 유족들은 1991년 11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전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사형당한 사람들과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람들에게 응당한 사죄와 보상을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긴 기간을 거쳐 나온 최고재판소의 결정은 기각이었다.
이러한 조치와는 반대로 일본정부는 1997년부터 연합군 포로의 초빙사업을 벌이고 그들에게 정중한 사과를 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2015년 미국에 방문한 일본총리 아베신조는 미군포로를 초청해 함께 만찬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포로감시를 시키고 책임을 떠넘겼던 조선인들은 방치하고 있다.
일본은 이들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일본군 조직의 맨 밑바닥에서 상관에게 명령받은 내용을 포로에게 전달하고 관리하는 것이 포로감시원의 일이었다. 그런데 일본 ‘천황’에게는 전쟁의 책임이 없고, 수많은 희생자를 내도록 명령한 일본군 실무자들도 면책이 되었지만, 가난을 벗고 징병을 피하기 위해 군속이 된 조선농촌의 17살 소년에게는 전쟁의 책임이 있다는 것인가. 지속적인 회유와 압박으로 동원된 이들이 왜 침략자 일본의 전쟁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가. 언제까지 이들을 외면하면서 역사의 희생양으로 만들 것인가. 한일 간에는 역사 차원에서 진정한 반성과 사과의 과정이 필요하다.

3) 한국사회의 방관 그리고 무책임
이학래는 전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8개월간 사형수로 수용되어 있었다. 나중에 20년형으로 감형되었고, 11년가량 구금되어 있다가 1956년 10월 가석방되었다. 그러나 ‘일제에 협력한 사람’이라는 낙인 때문에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눌러앉게 되었다. 한국현대사에서 친일문제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채 엉뚱한 곳으로 화살을 돌려 일제에 의한 희생자를 부일협력자로 취급하며 손가락질했기 때문이다.
친일세력 문제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민족이 짊어져야 하는 현실은 어디까지인가. 일제 지배로 인한 고통을 온몸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부일반역자라니, 화살의 방향이 잘못 되어도 너무나 잘못 되었다. 배신과 기만으로 자신의 안일만 꾀해온 진짜 친일세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사회가 오도되었다. 지켜주지 못한 이들에게 또 한 번 올가미를 씌워 귀국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우리 사회의 미숙함이 이들을 힘들게 했다면 이제라도 성숙함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이들에게 국가는 없었다. 아니 있었다. 일본정부를 비판하는 편지를 쓰면 빨갱이로 취급하여 고향의 가족을 못살게 굴고, 모처럼 귀국하면 형사가 따라 다니고, 일본정부에 마땅한 배상과 보상을 요구할 때 외교적으로 보호하기는커녕 일방적으로 청구권 협정을 맺어 아무런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게 한 국가가 있었다. 하지만 강제로 동원되는 것을 막아주고, 부당한 재판과 형 집행에서 보호해주고, 정당한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국가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러한 국가에 대해 이들은 끊임없이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다행히 2006년 한국정부의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이들을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하였다. 전후 재판에서 전범으로 판결 받은 포로감시원 129명 중 86명, 사형수 14명 중 13명에 대해 한국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이들이 2차대전의 전범이 아닌 ‘강제동원된 피해자’라고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인정’, 그 뿐이었다.
일본도 연합국도 해방 후 우리의 정치를 담당했던 미군도 한국정부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아직 다하지 못한 책임이 남아 있다.

5. 결

이들에겐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이들에겐 아직 식민지 지배가 끝나지 않았다. 이들은 아직 귀국하지 못했다. 17살 소년으로 강제동원되어 92살 노인이 되도록 귀국하지 못하는 이들을 언제까지 방치하고 외면할 것인가. 그를 가두었던 형무소마저 사라진지 오래인데 그에게 여전히 ‘히로무라’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고 있다. 이들이 차라리 해방되지 않은 조국을 원했어야 하는 것인가. 이들을 전범의 멍에에서 해방시키자. 하여 그를 ‘히로무라’ 아닌 ‘이학래’로 살도록 하자.
이학래는 비정상적인 역사의 희생양, 마침내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할 뒤틀린 역사의 상징이다. 이영채 교수는 말했다. “나는 이학래다.” 그래, 우리 모두 하루쯤은 이학래가 되어 보자. 그 기막힘, 그 억울함을 단 하루라도 겪어본다면 이들을 그렇게 내버려둘 수 있을까.
이학래는 이 책에서 “일본의 전범으로서 책임을 떠안고 죽어 간 동료들의 원한을 다소나마 풀어 주는 것이 살아남은 저의 책무입니다.”라고 한다. 고령의 몸으로 ‘조선인 BC급 전범’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죽은 동료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고 책임이라는 것이다. 60년 세월을 참고 또 참으면서 그 일을 위해 싸워온 그에게 전하고 싶다. “이학래님, 그 일은 우리의 책무이기도 합니다. 오래도록 지치지 않고 버텨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많이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