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대한민국 현대사 (독서>책소개)/1.해방전후.미군정

강상덕 평전

동방박사님 2022. 7. 17.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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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평생을 민족독립 쟁취에 바친 애국지사 김상덕,
그에 대한 기록물이 세상에 최초로 모습을 드러내다


애국자라는 수식어가 낯선 광복지사 영주 김상덕 선생은 우리에게 ‘반민특위위원장’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가 우리 근현대사의 물구나무선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독립지사 가운데 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에 관한 기록물은 여태까지 미비했다. 아주 멀지 않은 과거, 한국을 강제로 병탄한 일제의 식민통치가 엄혹했던 시절, 유학차 건너간 적도 도쿄에서 2.8독립선언(1919)을 주도했다가 피체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루고 나와 학업(와세다대학)도 중단한 채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하이에서 만주로, 다시 만주에서 난징, 충칭으로 대륙을 전전하며 온 청춘을 민족해방투쟁에 바친 독립투사가 바로 김상덕이다.

그는 지절을 지킨 다른 독립투사들과 마찬가지로 해방된 조국에서도 여전히 ‘목숨을 건’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이유는,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 청산작업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이후 김상덕의 일생은 시종여일 애국애족의 한길이었고, 그만큼 희생과 고난에 찬 가시밭길이었다. 김상덕이 걸었던 그 길은 바로 우리 민족해방투쟁의 길, 일제잔재청산의 길 그대로다. 그래서 이 책은 김상덕 개인을 평한 책을 넘어 우리 민족독립운동의 역사요, 민족반역자청산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험난한 역정에 동행했던 선생의 외아들 김정륙의 생생한 증언을 갈피갈피에 살려 넣은 이 책은 애국지사 김상덕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록이 될 것이다.

 

목차

책머리에
‘존재’는 낯익지만 ‘실체’는 낯선 독립지사
‘유통기한’ 끝나지 않은 삶과 가치관

01 주경야독의 고학생 김상덕,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을 주도하다
대가야의 후예, 경신에서 민족의식을 싹틔우다
도쿄의 2.8독립선언, 민족운동의 첫 횃불을 들다

02 상하이에서 만주까지, 민족해방운동과 항일투쟁
임시정부에서 의정원의원으로 활동하다
상해임시정부와 상해청년동맹회 그리고 의열단
만주로 간 투사 김상덕, 항일투쟁의 최전선에 서다

03 대륙을 전전하는 신산한 독립운동 그리고 임시정부 문화부장
대륙을 전전하는 독립운동과 가족의 희생
임시정부 문화부장 그리고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04 망명 27년 만에 쓸쓸히 환국하여 해방정국에서 입법의원으로 활동하다
해방의 감격 그러나 쓸쓸한 환국
요동치는 해방정국에서 입법의원으로 활동하다

05 제헌의원에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으로 활동하다
임시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제헌의회에 참여하다
헌법기초위원으로 친일파 청산에 진력하다

06 반민특위위원장으로 친일파 청산에 나서다
반민특위위원장 김상덕과 친일파 청산
외국에서는 반민족행위자를 어떻게 처벌했을까

07 이승만을 등에 업은 친일세력, 반민특위 와해공작에 나서다
친일세력, “김상덕을 암살하라”
이승만과 친일세력의 대대적인 반민특위 와해공작

08 반민특위 해체 이후 다시 친일파의 세상이 되다
통한의 특위위원장 사임 그리고 이승만의 특위 흔적 지우기
반민특위 해체는 “해방 이후 민족사의 제1대 치욕”

09 평생을 겨레에 바친 애국혼, 평양 재북인사묘역에 잠들다
낙선의 고배 그리고 6.25전쟁 중 납북
예순 다섯, 고투와 신산의 삶을 내려놓다

닫는 글_ “역사는 올바른 사람의 정당성을 증명해줄 것”

주석 | 김상덕 연보 |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자 : 김상웅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이자 정치평론가이다.『민주전선』 등 진보매체에서 활동했으며,『대한매일』 (서울신문) 주필로 있으면서 동호지필의 소임을 다하고자 했다. 제7대 독립기념관장, 성균관대학교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제주4·3사건희생자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이사,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
 

책 속으로

김상덕은 경신중학교에서 민족의식을 갖게 되면서 일본으로 건너가 신학문을 섭렵하고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경신중학교는 1910년 우사 김규식이 교감을 맡을 만큼 민족의식이 강한 학교였다. 뒷날 독립운동 진영에서 김규식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김상덕은 해방 뒤 귀국하여 경신학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교장이 되는 등 경신학교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뒷날 일제는 김상덕이 바로 그 경신학교에 다니면서 민족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1917년 3월 경신학교를 졸업한 그가 도쿄로 건너가서 ‘불령학생’들과 내왕하고 사상을 변화시켜 나갔는데, 그 출발점이 바로 경신학교라는 것이다. 이는 2년 뒤 도쿄에서 펼쳐진 2.8운동에 그가 참가한 바탕이 여기에서 만들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p.20 중에서

김상덕이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할 때는 만 31세의 청년이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독립지사인 김규식·여운형·홍범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 대회에 참석하여 국제정세, 특히 신생 러시아의 변화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1922년 3월 중순경 상하이로 돌아온 그는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이 그만큼 넓어졌고, 민족진영에서 위상이 높아졌으며, 각계각층 독립지사들과 폭넓게 교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독립운동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그만큼 높아졌다. ---p.51 중에서

독립운동가라면 어느 누구 하나 이 시기에 힘든 생활을 보내지 않았으랴만 김상덕 가족의 망명생활은 유난히 고단했다. 남편은 전적으로 독립운동에 매인 몸이다 니 생계를 돌볼 틈이 없고, 아내는 갓 고국에서 달려와 중국말도 서툰 시골 여성, 여기에 어린 자식이 셋이나 딸렸다. … 충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상덕은 아내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2년 가까이 계속되는 피난길에 어린 3남매를 이끌며 제대로 먹지 못하고, 약 한 첩 써보지 못한 채 아내는 쓰러졌다. 1939년 6월 7일 이전의 어느 날이다. ---p.84~86 중에서

김상덕은 국회에서 소수파에 속했다. 하지만 제헌국회는 아직 당파의식이 그렇게 심한 상황이 아니었고, 무소속이 85명에 이르면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가 반민특위위원장에 선출된 것도 이 같은 배경이 작용하였다. 김상덕은 선거가 끝난 뒤 군민들의 숙원사업인 ‘고령교에 건설하고, 준공하는 날 운집한 군민들에게 다리 밑의 모래밭을 가리키며 “사람과 차가 다닐 수 있는 다리는 저 작은 모래알이 뭉쳐서 이룬 거대한 힘이다. 우리 국민도 우등국민으로서 소양과 자질을 갖춰 인화?단결을 이룬다면 나라의 앞날이 창창하리라”고 역설하였다. 이 말은 그의 지론이 되었다. ---p.173 중에서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특별법의 법적근거마저 모두 제거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모두 자유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들이 각종 ‘완장’까지 차게 되면서 오히려 독립지사들을 적대시하고 탄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은 이승만 정권의 충복이 되어 그 비호 아래 애국지사 암살, 사법살인, 부정선거, 시민학생 살상, 전쟁 중 민간인 학살 등 천인공노할 새로운 범죄를 서슴없이 저질렀다.
---p.282 중에서
 

출판사 리뷰

김상덕은 1891년 12월 1일 경북 고령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영주이고 자는 현여I, 관은 경주다. 중국 망명 시절에는 김상철, 김재두라는 가명도 사용하였다. 1912년 고령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중퇴하고 서울로 올라가 경신중학교에 입학, 1917년에 졸업하였다. 이어 일본 도쿄로 건너가 세이토쿠 영어학교를 거쳐 와세다대학 경영학부에 들어갔다. 1919년 도쿄 2.8독립선언 실행위원으로 선언을 주도했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학을 중퇴하고 1920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만주로 활동무대를 옮겨 북만주 한국독립당에 참여, 무장투쟁을 지도하였다. 1933년 다시 난징에 내려와 신한독립당, 민족혁명당 간부로 활동하였다. 1942년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에 당선되어 임시정부 헌법 수개정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45년 임시정부 문화부장에 선임되어 국무위원으로 내각에 참여하던 중 해방을 맞아 27년 만에 환국하였다. 1946년 과도입법의원에 당선되고, 1947년 경신중하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 5.10총선에 출마, 경북 고령에서 당선되어 제헌의회 헌법기초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반민특위위원장에 선출되어 친일잔재 청산에 헌신하였다. 1950년 6.25전쟁 중에 납북되어 1956년 4월 28일 평양에서 별세하였다. 1958년 평양 재북인사묘역에 안장되고,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고난과 희생에 찬 애국애족의 한평생

광복지사 영주 김상덕 선생. ‘반민특위위원장’ 정도로만 알려진 김상덕은 우리 근현대사의 물구나무선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독립지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한국을 강제로 병탄한 일제의 식민통치가 엄혹했던 시절, 유학차 건너간 적도 도쿄에서 2.8독립선언(1919)을 주도했다가 피체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루고 나와 학업(와세다대학)도 중단한 채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하이에서 만주로, 다시 만주에서 난징, 충칭으로 대륙을 전전하며 온 청춘을 민족해방투쟁에 바친 독립투사가 바로 김상덕이다. 그런 그는 지절을 지킨 다른 독립투사들과 마찬가지로 해방된 조국에서도 여전히 ‘목숨을 건’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이유는,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 청산작업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해방된 조국은 미군정이 즉시 점령해버렸고, 우리 민족은 해방의 감격을 누리기도 전에 다시 피정복민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친일민족반역자들은 이때를 틈타 재빨리 미군정에 붙어 면죄부를 받고 재기의 끈을 붙잡았다. 게다가 미군정의 낙점을 받은 이승만은 국내 정치기반의 선점과 확대를 위해 미군정의 지침에 충실하게 따르는 한편 친일주구들을 핵심측근세력으로 끌어안았다. 미국의 지침에 따라 단정을 주도하여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친일주구들을 수족으로 부리는 대신 그들의 민족반역죄를 면죄하고 그들의 ‘지킴이’가 되어주었다.

반면에 김상덕이 국무위원(문화부장)으로 있던 임시정부는 온 겨레의 지지와 신망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향후 정국구상에 따라 ‘개인자격’으로 환국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이처럼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는 정국운영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채 친일민족반역자들이 다시 판을 치게 된 세상과 힘겨운 투쟁을 벌여야 했다. 제헌의회 반민특위위원장으로 바로 그 투쟁의 한가운데에 선 김상덕은 어떤 회유와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고 민족반역자 처단에 혼신의 힘을 다하며 반민특위를 이끌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자신의 친일 수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겨레의 여망을 안고 의회입법으로 설치된 반민특위를 국립경찰(대부분 친일주구 출신)을 동원한 폭력으로 짓밟고 말았다. 이에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려던 최소한의 공식적인 절차도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김상덕은 국회에서 통한의 사임연설을 하고 위원장직을 물러나야 했다.

김상덕의 일생은 시종여일 애국애족의 한길이었고, 그만큼 희생과 고난에 찬 가시밭길이었다. 김상덕이 걸었던 그 길은 바로 우리 민족해방투쟁의 길, 일제잔재청산의 길 그대로다. 그래서 이 책은 김상덕 개인을 평한 책을 넘어 우리 민족독립운동의 역사요, 민족반역자청산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험난한 역정에 동행했던 선생의 외아들 김정륙의 생생한 증언을 갈피갈피에 살려 넣은 이 책은 애국지사 김상덕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