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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제는 역사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뒤집어야 할 때다!
서양 사관이 지배해온 문명사의 통념을 뒤흔드는 새로운 세계사!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와 문명에 대한 역사는 얼마나 신뢰할 만한가. 중국의 역사학자 쑨룽지가 펴낸 이 책 『신세계사』 시리즈(전 3권)는 기존 역사학에 내재된 오류를 바로잡는 글로벌 관점의 세계사 책이다. “시오노 나나미를 읽었을 때처럼 신선하고, 재러드 다이아몬드와 유발 하라리를 합쳐놓은 것처럼 거침없다!”는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의 평처럼 이 책 『신세계사』는 인류의 기원에서부터 이주와 정착, 농경과 목축을 통한 도시의 생성과 문명의 탄생, 전쟁과 교류를 통한 문화의 전파, 종교와 철학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장대한 세계사를 흥미롭게 펼쳐 놓는다.
글로벌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 이 책 『신세계사』는 신랄한 통찰의 자세로 기존 세계사의 서사 전통을 철저하게 뒤집는다. 치밀한 고증을 통한 세심한 분석과 대담한 가설, 도전적이고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견해,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한 수많은 사실들로 충만한 이 책은 참신하면서도 놀라움으로 넘쳐나 독자들을 흥분되는 문명 여행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서양 사관이 지배해온 문명사의 통념을 뒤흔드는 새로운 세계사!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와 문명에 대한 역사는 얼마나 신뢰할 만한가. 중국의 역사학자 쑨룽지가 펴낸 이 책 『신세계사』 시리즈(전 3권)는 기존 역사학에 내재된 오류를 바로잡는 글로벌 관점의 세계사 책이다. “시오노 나나미를 읽었을 때처럼 신선하고, 재러드 다이아몬드와 유발 하라리를 합쳐놓은 것처럼 거침없다!”는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의 평처럼 이 책 『신세계사』는 인류의 기원에서부터 이주와 정착, 농경과 목축을 통한 도시의 생성과 문명의 탄생, 전쟁과 교류를 통한 문화의 전파, 종교와 철학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장대한 세계사를 흥미롭게 펼쳐 놓는다.
글로벌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 이 책 『신세계사』는 신랄한 통찰의 자세로 기존 세계사의 서사 전통을 철저하게 뒤집는다. 치밀한 고증을 통한 세심한 분석과 대담한 가설, 도전적이고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견해,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한 수많은 사실들로 충만한 이 책은 참신하면서도 놀라움으로 넘쳐나 독자들을 흥분되는 문명 여행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목차
통섭역사학으로서의 『신세계사』 _최재천(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변혁의 시대, 새로운 세계를 여는 역사를 읽다 _강인욱(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문: 『신세계사』의 새로움
한국어판 서문: 공동으로 직면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하여
제1장 지구의 역사와 선사시대의 인류
대지의 형성 | 생물권의 대변천사 | 사람과에서 인류의 위치 | 인류의 시초에 대해 명확히 말할 수 있을까 | 구석기시대에도 많은 논쟁거리가 존재한다
제2장 ‘4대 문명 고국’이라는 기존의 틀을 깨다
낡은 개념 | 돌파 · 혁신 · 발명으로 문명의 기원을 정의하다 | 환메소포타미아 유역의 산측 지대 | 구석기시대 말기에서 신석기시대로의 돌파 | 신석기 문화의 무토기 시기와 유토기 시기 | 요르단 이스라엘 고지와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상류의 접합지 | 오늘날 터키 선사시대 유적지와 환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관련성 | 환메소포타미아 유역 산측 지대의 동쪽 날개 |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 문명의 서광 | 고대 서남아시아의 문명 기원 모델은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지니는가 | 농경 문명과 방목 문명인 이집트 | 환아라비아 유목-방목 복합 지대 | 2차 생산물 혁명 | 환아라비아 유목-방목 복합 지대의 2차 생산물 혁명 | 2차 생산물 혁명이 중국에서는 어떤 형태를 취했나 | 문명 고국 인도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 서반구에는 적용되지 않는 ‘대하 유역 문명’이라는 개념
제3장 재차 기초를 다진 고대 인도 문명
인더스강 유역 문명의 지리적 · 시간적 계통 | 산측에서 충적평야로 | 인더스강 유역의 도시혁명 | 인더스강 유역 고대 문명과 영향을 주고받았던 주변 지역 | 인더스강 유역 문명의 특징 | 인더스강 유역의 고대 문명은 누가 세운 것일까 | 인도가 아리아인의 본향이라는 설 | 아리아인 전입의 미스터리 | 아리아인의 도래보다 더 근본적인 변혁 | 인도의 지리적 · 역사적 판도 | 인도 문명의 토대가 동쪽으로 이동하다 | 물과 불이 동시에 용납되다 | 추가적인 관찰
제4장 중국 문명의 기원에 관한 몇 가지 문제
4대 우상에 가려진 중국 문명의 기원 탐색 | 의고파의 공헌과 함정 | 황토 지대의 신화 | 다중심론인가, 뭇별이 달을 에워싼 것인가 | 양사오는 중국 신석기 전성기의 중앙 표준시간대 | 룽산은 중국 후기 신석기시대의 중앙 표준시간대 | 떠나지 않는 대중앙주의의 망령 | 중국의 삼대와 서양의 삼대 | 중국 문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 중국 문명 기원론에 대한 도전
제5장 중남아메리카의 고대 문명
인류는 언제 서반구로 진입했을까 | 서반구에서 이루어진 인간 · 시간 · 공간의 상호작용의 제약과 특징 | 지구가 빙하기에서 벗어나고 인류가 구석기시대에서 벗어나다 | 신대륙에서의 농목업을 향한 과도기 | 중앙아메리카의 선사시대에서 문명으로의 과도기 | 올멕은 중앙아메리카 문명의 어머니인가 | 중앙아메리카의 고전기 | 중앙아메리카의 후고전기 | 안데스 문명 스케치
제6장 오세아니아의 문명
대양을 따라 꽃망울을 터뜨린 남도어족 | 타이완이 남도어족의 본향인가 | 남양 해역을 우선 지나가다 | 태평양 진입의 발판이었던 뉴기니 | 태평양 심장에 자리한 폴리네시아 | 홀시된 미크로네시아
제7장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 고대 문명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
수메르인이 최초로 기초를 닦은 이들일까 | 설형문자와 『수메르 왕명표』 | 초기 왕조 스케치 | 수메르의 전국 시대와 아카드의 통일 | 수메르의 부흥기, 우르 제3왕조 | 아모리인과 셈어족 | 아모리 왕국들과 바빌론제국 이전 | 수메르-아카드-바빌론의 신 | 『길가메시』 서사시 | 메소포타미아 고대 문명의 숫자 체계, 천문, 역법
제8장 고대 이집트: 명계를 동경한 태양의 나라
하늘의 태양, 땅의 강, 인간 세상의 왕은 각각 하나뿐 | 나일강, 시리우스, 시나이반도 | 아시아 · 아프리카 두 대륙과 관계 있는 고대 이집트어 | 선사시대에서 초기 왕조 시대로 | 고왕국과 대피라미드 시대 | 전해지는 사료와 연대기의 문제 | 고대 이집트의 신들 | 고왕국 구조의 와해 | 중왕국 시대: 표면 아래의 지속적인 변혁 | 힉소스인의 침입 | 하늘로 올라가기와 저승으로 내려가기
제9장 청동기시대 중후기의 고대 근동
고대 근동의 무대에 등장한 인도유럽인 | 아시아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이집트 신왕국 | 이집트사의 아마르나 시대 | 카데시 전투 | 히타이트의 서쪽 지역과 에게해의 관계 | 말석에 자리한 바빌론 | 청동기시대의 총붕괴
제10장 에게해의 고대 문명
트로이 전쟁 | 미노스의 미궁 | 그리스인이 도래하기 이전 | 에게해의 헬레니즘화 | 고전 그리스를 향한 과도기
제11장 고대 근동이 철기시대로 진입하다
청동에서 철로: 신 · 구 질서의 교체 | 신제국 이전의 아시리아 | 철기시대에 이르러 실력을 떨치기 시작한 아시리아 | 바빌론에 대해서는 뜻대로 할 수 없었던 아시리아 | 동쪽과 북쪽에서 비롯된 근심 | 아시리아 시대에 대한 평가 | 가나안, 페니키아와 이스라엘 | 철기시대로 진입한 이집트
제12장 페르시아제국과 페르시아 전쟁
이란의 첫 번째 문명: 엘람 | 이란인은 언제 이란고원으로 진입했을까 | 페르시아제국의 탄생 | 페르시아인이 근동의 통치자가 되다 | 다리우스의 왕위 찬탈 | 이란과 근동은 ‘국경 밖’과 ‘중앙’의 관계였을까 | 세계사에서 조용히 사라진 바빌론 | 페르시아 전쟁의 범위와 원인 | 이오니아 반란 | 페르시아인이 그리스 본토를 침범하다 | 페르시아에 반격을 가한 델로스 동맹 | 그리스의 내부 불화와 페르시아 총독
제13장 ‘고전기의 그리스’를 새롭게 정의하다
그리스 세계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 그리스 정체성: 기초 텍스트와 공동 기념일 | 아테네 중심의 고전관을 수정할 수 있을까 | 스파르타는 어떻게 군사국가가 되었나 | 아테네의 직접민주제 | 아테네의 황금시대인 아테네제국 | 그리스의 외침과 내분
제14장 인류사의 ‘축의 시대’
조로아스터교의 정신적 유산 | 고대 인도의 베다 시대 | 고대 인도의 종교 쇄신 | 마우리아 왕조와 불교 | 중국에서의 축의 시대 | 이스라엘 백성의 얘언 운동: 역사 일원론의 선민관 | 히브리 『구약성경』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 고대 그리스 철학 여행: 신화 → 물활론 → 개별자와 보편자
제15장 알렉산더와 헬레니즘 시대
마케도니아의 굴기 | 알렉산더가 세계를 정복하다 | 후계자들의 각축 | 헬레니즘 세계의 만화경 | 헬레니즘의 확장과 심화 | 고전 그리스 문명의 점진적 변화
제16장 로마의 성장
이탈리아의 지리 형세와 종족 분포 | 로마 건국자는 호걸인가, 악당인가 | 왕정 시대의 수수께끼 | 로마가 라틴 평원의 맹주가 되다 | 공화국 초기의 계급투쟁 | 로마가 이탈리아를 통일하다 | 공화국 중기: 평민은 진정으로 귀족과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되었는가 | 로마가 서지중해를 차지하다 | 로마가 지중해의 맹주가 되다 | 제국의 확장이 시민권의 확장이었을까 | 새로운 시대가 구체제를 부식시키다 | 공화제에서 제정으로의 탈바꿈
변혁의 시대, 새로운 세계를 여는 역사를 읽다 _강인욱(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문: 『신세계사』의 새로움
한국어판 서문: 공동으로 직면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하여
제1장 지구의 역사와 선사시대의 인류
대지의 형성 | 생물권의 대변천사 | 사람과에서 인류의 위치 | 인류의 시초에 대해 명확히 말할 수 있을까 | 구석기시대에도 많은 논쟁거리가 존재한다
제2장 ‘4대 문명 고국’이라는 기존의 틀을 깨다
낡은 개념 | 돌파 · 혁신 · 발명으로 문명의 기원을 정의하다 | 환메소포타미아 유역의 산측 지대 | 구석기시대 말기에서 신석기시대로의 돌파 | 신석기 문화의 무토기 시기와 유토기 시기 | 요르단 이스라엘 고지와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상류의 접합지 | 오늘날 터키 선사시대 유적지와 환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관련성 | 환메소포타미아 유역 산측 지대의 동쪽 날개 |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 문명의 서광 | 고대 서남아시아의 문명 기원 모델은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지니는가 | 농경 문명과 방목 문명인 이집트 | 환아라비아 유목-방목 복합 지대 | 2차 생산물 혁명 | 환아라비아 유목-방목 복합 지대의 2차 생산물 혁명 | 2차 생산물 혁명이 중국에서는 어떤 형태를 취했나 | 문명 고국 인도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 서반구에는 적용되지 않는 ‘대하 유역 문명’이라는 개념
제3장 재차 기초를 다진 고대 인도 문명
인더스강 유역 문명의 지리적 · 시간적 계통 | 산측에서 충적평야로 | 인더스강 유역의 도시혁명 | 인더스강 유역 고대 문명과 영향을 주고받았던 주변 지역 | 인더스강 유역 문명의 특징 | 인더스강 유역의 고대 문명은 누가 세운 것일까 | 인도가 아리아인의 본향이라는 설 | 아리아인 전입의 미스터리 | 아리아인의 도래보다 더 근본적인 변혁 | 인도의 지리적 · 역사적 판도 | 인도 문명의 토대가 동쪽으로 이동하다 | 물과 불이 동시에 용납되다 | 추가적인 관찰
제4장 중국 문명의 기원에 관한 몇 가지 문제
4대 우상에 가려진 중국 문명의 기원 탐색 | 의고파의 공헌과 함정 | 황토 지대의 신화 | 다중심론인가, 뭇별이 달을 에워싼 것인가 | 양사오는 중국 신석기 전성기의 중앙 표준시간대 | 룽산은 중국 후기 신석기시대의 중앙 표준시간대 | 떠나지 않는 대중앙주의의 망령 | 중국의 삼대와 서양의 삼대 | 중국 문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 중국 문명 기원론에 대한 도전
제5장 중남아메리카의 고대 문명
인류는 언제 서반구로 진입했을까 | 서반구에서 이루어진 인간 · 시간 · 공간의 상호작용의 제약과 특징 | 지구가 빙하기에서 벗어나고 인류가 구석기시대에서 벗어나다 | 신대륙에서의 농목업을 향한 과도기 | 중앙아메리카의 선사시대에서 문명으로의 과도기 | 올멕은 중앙아메리카 문명의 어머니인가 | 중앙아메리카의 고전기 | 중앙아메리카의 후고전기 | 안데스 문명 스케치
제6장 오세아니아의 문명
대양을 따라 꽃망울을 터뜨린 남도어족 | 타이완이 남도어족의 본향인가 | 남양 해역을 우선 지나가다 | 태평양 진입의 발판이었던 뉴기니 | 태평양 심장에 자리한 폴리네시아 | 홀시된 미크로네시아
제7장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 고대 문명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
수메르인이 최초로 기초를 닦은 이들일까 | 설형문자와 『수메르 왕명표』 | 초기 왕조 스케치 | 수메르의 전국 시대와 아카드의 통일 | 수메르의 부흥기, 우르 제3왕조 | 아모리인과 셈어족 | 아모리 왕국들과 바빌론제국 이전 | 수메르-아카드-바빌론의 신 | 『길가메시』 서사시 | 메소포타미아 고대 문명의 숫자 체계, 천문, 역법
제8장 고대 이집트: 명계를 동경한 태양의 나라
하늘의 태양, 땅의 강, 인간 세상의 왕은 각각 하나뿐 | 나일강, 시리우스, 시나이반도 | 아시아 · 아프리카 두 대륙과 관계 있는 고대 이집트어 | 선사시대에서 초기 왕조 시대로 | 고왕국과 대피라미드 시대 | 전해지는 사료와 연대기의 문제 | 고대 이집트의 신들 | 고왕국 구조의 와해 | 중왕국 시대: 표면 아래의 지속적인 변혁 | 힉소스인의 침입 | 하늘로 올라가기와 저승으로 내려가기
제9장 청동기시대 중후기의 고대 근동
고대 근동의 무대에 등장한 인도유럽인 | 아시아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이집트 신왕국 | 이집트사의 아마르나 시대 | 카데시 전투 | 히타이트의 서쪽 지역과 에게해의 관계 | 말석에 자리한 바빌론 | 청동기시대의 총붕괴
제10장 에게해의 고대 문명
트로이 전쟁 | 미노스의 미궁 | 그리스인이 도래하기 이전 | 에게해의 헬레니즘화 | 고전 그리스를 향한 과도기
제11장 고대 근동이 철기시대로 진입하다
청동에서 철로: 신 · 구 질서의 교체 | 신제국 이전의 아시리아 | 철기시대에 이르러 실력을 떨치기 시작한 아시리아 | 바빌론에 대해서는 뜻대로 할 수 없었던 아시리아 | 동쪽과 북쪽에서 비롯된 근심 | 아시리아 시대에 대한 평가 | 가나안, 페니키아와 이스라엘 | 철기시대로 진입한 이집트
제12장 페르시아제국과 페르시아 전쟁
이란의 첫 번째 문명: 엘람 | 이란인은 언제 이란고원으로 진입했을까 | 페르시아제국의 탄생 | 페르시아인이 근동의 통치자가 되다 | 다리우스의 왕위 찬탈 | 이란과 근동은 ‘국경 밖’과 ‘중앙’의 관계였을까 | 세계사에서 조용히 사라진 바빌론 | 페르시아 전쟁의 범위와 원인 | 이오니아 반란 | 페르시아인이 그리스 본토를 침범하다 | 페르시아에 반격을 가한 델로스 동맹 | 그리스의 내부 불화와 페르시아 총독
제13장 ‘고전기의 그리스’를 새롭게 정의하다
그리스 세계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 그리스 정체성: 기초 텍스트와 공동 기념일 | 아테네 중심의 고전관을 수정할 수 있을까 | 스파르타는 어떻게 군사국가가 되었나 | 아테네의 직접민주제 | 아테네의 황금시대인 아테네제국 | 그리스의 외침과 내분
제14장 인류사의 ‘축의 시대’
조로아스터교의 정신적 유산 | 고대 인도의 베다 시대 | 고대 인도의 종교 쇄신 | 마우리아 왕조와 불교 | 중국에서의 축의 시대 | 이스라엘 백성의 얘언 운동: 역사 일원론의 선민관 | 히브리 『구약성경』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 고대 그리스 철학 여행: 신화 → 물활론 → 개별자와 보편자
제15장 알렉산더와 헬레니즘 시대
마케도니아의 굴기 | 알렉산더가 세계를 정복하다 | 후계자들의 각축 | 헬레니즘 세계의 만화경 | 헬레니즘의 확장과 심화 | 고전 그리스 문명의 점진적 변화
제16장 로마의 성장
이탈리아의 지리 형세와 종족 분포 | 로마 건국자는 호걸인가, 악당인가 | 왕정 시대의 수수께끼 | 로마가 라틴 평원의 맹주가 되다 | 공화국 초기의 계급투쟁 | 로마가 이탈리아를 통일하다 | 공화국 중기: 평민은 진정으로 귀족과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되었는가 | 로마가 서지중해를 차지하다 | 로마가 지중해의 맹주가 되다 | 제국의 확장이 시민권의 확장이었을까 | 새로운 시대가 구체제를 부식시키다 | 공화제에서 제정으로의 탈바꿈
줄거리
『신세계사 1』의 내용 소개
새로운 역사의 서막: 인류의 시작부터 로마의 등장까지
쑨룽지는 『신세계사』를 총 3권으로 집필했다. 현재 1, 2권은 대만에서 출간되었고, 3권은 출간을 준비 중이다. 시리즈의 시작인 이 책 『신세계사 1』은 아프리카에서 이주한 인류의 족적에서부터 이탈리아를 평정하고 지중해의 맹주가 된 로마의 등장까지, 총 16개의 장으로 나누어 다루고 있다.
제1장 지구의 역사와 선사시대의 인류
최신의 인지고고학을 인용해, 인류가 언제 어디서 상징적 사유로의 문턱을 처음 넘었는지 탐구한다. 홀시할 수 없는 것은 고기후학과 역사 생태의 상호작용이다. 빙하기의 종결은 구석기에서 세석기(細石器)로의 이행을 촉진했다. 그런데 빙하기가 종결된 뒤 급격히 기온이 내려가는 ‘영거 드라이아스기’가 발생하여 지중해 동부 연안의 환경 부담력이 저하됨에 따라 이 지역의 옛 채집수렵민은 농경과 목축을 발전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제2장 ‘4대 문명 고국’이라는 기존의 틀을 깨다
근동 농목혁명의 최초 발생지는 어느 정도 해발고도가 있는 환메소포타미아 산측 지대(산의 측면 지대)로, 한작농업이 이루어진 지역을 의미한다. 이후 대하(大河) 유역에서는 관개농업이 이루지면서 ‘도시혁명’의 기초를 다졌다. 그사이 4000년 동안 ‘2차 생산물 혁명’을 거쳤다. ‘산측설’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설’을 대체하고, 4대강 유역에서 문명이 기원했다는 설의 빈약함을 설명한다.
4대 문명 고국은 오롯이 농경 문명의 각도에서 세계사를 보고자 하는 집념이다. 이러한 집념은 유목-방목 지대를 주변화하고자 한다. 북쪽과 남쪽에서 구대륙 농경 문명 지대를 끼고 있는 유라시아 대초원과 북아라비아 스텝 및 그 인근의 사막 오아시스 지대가 없었다면 세계사가 과연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생각해보자. 만약 그랬다면 고대 세계의 장의사라고 할 수 있는 흉노는 없었을 테고 실크로드도 없었을 것이며,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몽골제국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고대의 유대 신앙 및 그것이 지중해화 된 기독교 버전도 없었을 것이며, 이슬람 세계는 더더욱 출현했을 리가 없다. (93p)
제3장 재차 기초를 다진 고대 인도 문명
인더스강 유역 고대 문명의 최초 유적지 메르가르를 통해 고대 근동을 서양 문명의 창시자로 간주하는 계보학에 대해 비판한다. 쑨룽지는 이란 고원 산측에서 생겨난 ‘밀과 양의 문화’가 양쯔강 유역에서 비롯된 ‘쌀과 돼지의 문화’에 의해 보충되었음을 지적한다. 인도의 하라파 문명과 베다 시대의 유물을 통해 석기-청동기-철기시대라는 전통적인 진화 순서가 전복됨을 밝힘으로써 철기 시대 역시 원시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자 체계인 브라흐미 문자 이전에 존재했던 (지금까지 해독되지 않은) 문자의 흔적을 통해 문명의 역사에 대해 또 다시 질문을 던진다.
제4장 중국 문명의 기원에 관한 몇 가지 문제
고대 근동과 고대 인도를 참고삼아 중국 문명의 기원이라는 까다로운 문제를 다룬다. 근동의 농업혁명은 산측 지대에서 발생했고, 약 4000년이 지난 후 대하 유역에서 이를 이어받아 관개농업으로 바꾸었고 도시혁명을 이루었다. 이 사례는 농업이 탄생한 지역이라고 해서 반드시 문명이 탄생한 지역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논벼는 작은 하곡이 교차하는 부근에서 탄생했다. 또한 벼농사가 한작농업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 정반대의 양상을 띠었으며 벼농사 이전에 채집경제가 성행했음을 밝힌다. 이는 중화문명의 요람이 대하 유역인 황허라는 설을 전면으로 부정한다.
제5장 중남아메리카의 고대 문명
서반구의 문명 돌파에 대해 다룬다. 인류가 서반구에 진입했을 때는 이미 구석기시대가 지난 뒤였고, 콜럼버스 이전의 아메리카는 기껏해야 야금술의 문턱에 이르러 있었다. 따라서 콜럼버스 이전의 아메리카사 전체는 온통 석기시대뿐이다. 고인디언 문명 역시 문자의 문턱에 놓여 있었으므로 전체적으로 선사시대로 간주된다. 중고 시대 세계의 6대 도시 가운데 하나를 건설했고, 역법의 정확함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서반구 문명은 유럽인에 의한 서반구 정복의 배경 지식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고대 아메리카 문명의 발전 단계는 수메르 문명 혹은 이집트의 초기 왕조 시기에 상당하기 때문에 서반구는 역사 표준시간대를 따로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 비교적 엄격한 기준에 따라서, 고대 아메리카 문명을 선사시대사에 편입시키는 사람도 있다. 고대 아메리카 문명은 문자 이전의 것으로, 그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적으로 고고학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연성이 부족한 기준에 대해 쑨룽지는 수정을 요구한다.
제6장 오세아니아의 문명
지구의 남은 부분을 인류가 마지막으로 가득 채운 것에 관한 내용이다. 오세아니아의 네 지역, 인도네시아, 미크로네시아, 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를 다룬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섬에 분포하는 어족인 남도어족이 대양을 따라서 꽃망울을 터뜨렸는데,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온 원주민이 있는 뉴기니를 경유했고, 양자는 뒤섞여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다. 쑨룽지는 이 장에서 20세기에 유행했던 견해, 즉 남도어족의 이주가 모두 타이완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견해를 수정한다. 한편 최신의 유전학 연구 성과를 채택해, 또 다른 이민 노선은 중국 대륙에서 출발해 통킹만을 거쳐 인도네시아로 향한 것이었음을 지적한다.
제7장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 고대 문명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 문명의 기원부터 청동기 시대의 종결까지를 다룬다. 농목혁명의 탄생지였던 산측의 서쪽 지대가 나날이 건조해지면서 ‘환아라비아 유목-방목 복합 지대’가 형성되었다. 이 지대에서는 농경과 목축 중에서 ‘목축’으로 치우치게 되었으며, 관개농업 지대의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삼각주 및 나일강 유역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는 ‘목축’이 ‘농경’에 뒤떨어지는 저급 단계가 결코 아니며 양자가 동등하게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이 복합 지대는 셈어족의 본향이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이 셈족화되면서 일력과 월력을 융합하고 연주기와 월주기를 모두 중시하게 된다. 봄갈이와 추수를 해야 하는 농경민에게는 1년 전체의 달력이 필요했지만, 유목민은 달의 삭망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달신의 중요성이 태양신을 압도했으며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오늘날 전 지구에서 통용되는) 60진법 시간 계산법 역시 30일 월주기의 뚜렷한 흔적이다.
제8장 고대 이집트: 명계를 동경한 태양의 나라
대하 유역의 모든 문명 중에서 이집트 문명은 농작물에 물을 대기 위한 인공 수로를 만들지 않은 유일한 문명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대비해서, 나일강의 주기적 범람은 ‘연주기’였으므로 이집트에서는 순양력을 사용했다. 이집트는 세계사에서 처음으로 달 주기의 단점을 극복하고 태양력을 처음으로 채택한 고대 문명이 되었다.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고, 땅에는 하나의 강만 있었다. 양자의 규칙을 장악해 태양력을 발명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일강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세상이 하나의 영역이고 왕은 오직 한 명’인 대통일 구조가 만들어졌다. (…) 이집트는 태양의 나라였다. 파라오는 태양신의 화신이었다. 하늘에 있는, 파라오의 아버지 역시 태양이었다. 모든 백성의 신 역시 태양이었다. 후에 이집트 달의 신은 그 기능이 소멸되고 다른 직분을 맡게 되었다. (…) 태양의 나라 이집트는 명계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오시리스, 마아트, 토트는 모두 명계에 존재한다. 명계는 죽은 이의 영혼을 시험하는 곳일 뿐 영원한 형벌의 장소가 아니다. 고대에 달을 숭배했던 유목-방목민의 계승자가 이슬람교라면, 이집트 태양교의 계승자는 기독교다. (272~302p)
제9장 청동기시대 중후기의 고대 근동
고대 바빌론제국의 쇠락, 인도유럽어 집단의 도래, 히타이트, 미타니, 카시트-바빌론 등의 왕국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청동기 시대 중기로 진입한 이후 근동의 변수는 인도유럽인의 도래였다. 인도유럽어족은 가설적인 본향으로부터 사방으로 확산되었는데, 주류의 설명에 따르자면 이들의 본향은 지금의 우크라이나와 캅카스 이북이다. 이곳에서 출발해 유럽과 인도에 이르렀으며, 고대의 서남아시아로도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인도유럽인의 도래로 인해 청동기시대 중기의 근동에는 세 왕국이 더해지는데, 바로 히타이트, 미탄니, 카시트다.
제10장 에게해의 고대 문명
트로이 전쟁과 그리스 이전의 크레타섬 문명에 대해 살펴본다.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것으로는 에게해 동북쪽의 섬 문명과 에게해 중부의 키클라데스 문명이 있다. 전자는 트로이 문화권에 속하는데, 트로이와 마찬가지로 파괴되었다. 키클라데스 문명은 나름의 특징을 지녔지만, 후기에는 크레타의 문화 패권에 흡수되었다.
기원전 3000년부터 기원전 2000년 사이에 그리스 집단이 에게해 지역으로 진입하기 시작한다. 그중 하나인 미케네인이 크레타의 패권을 대신했고 크레타 문화도 흡수한다. 하지만 청동기시대 총붕괴 시기에 멸망한다. 이것이 ‘도리아의 침입’과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론이 없지만, 근거가 될 만한 충분한 단층이 출현한다. 이전에는 크레타의 선형문자를 사용해 그리스어를 기록했고, 이후는 페니키아 자모를 사용했다. 새로운 신도 출현했고, 그리스가 고전기로 향하던 과도기에는 지중해에서의 식민(植民)도 이루어진다.
제11장 고대 근동이 철기시대로 진입하다
히타이트제국이 최초로 철기를 발명했다는 예전 교과서의 낡은 설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다. 사실 청동기시대 총붕괴를 겪으면서 역사에서 가장 철저히 사라진 게 바로 히타이트다. 이 총붕괴 과정에서 이집트가 해양 민족의 대침입을 국경 밖에서 막아냈고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을 비롯해 셈족 대이동의 세찬 흐름이 있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대에서 아시리아 외에는 죄다 전멸했다. 아시리아는 난관을 돌파한 덕분에 철기시대 초기의 제일 강자가 되어 고대 근동을 통일하고 이집트를 점령한다.
청동기시대에는 철기가 없었으며 철기의 제조가 혁명을 가져왔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사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철을 사용한 흔적은 기원전 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철은 주조해서 만드는 게 아니라 단조해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생산비용이 높은 편이라서 보급되지 못했다.
그런데 청동에서 철로의 이행이 처음에는 결코 진보를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후퇴와 같았다. 이전까지는 청동기시대 총붕괴의 원인에 대해, 철기를 사용하는 해양 민족의 침입을 구문명이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 설은 일찌감치 성립할 수 없게 되었다. 비교적 새로운 견해에 따르면, 총붕괴 시기에 구리와 주석의 공급원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확실히 출토물 중에는 기존의 청동기가 끊임없이 다시 주조되었고 장신구가 철제로 대체된 흔적이 있다.
청동기시대 총붕괴는 근동의 기존 국제 질서를 완전히 쓸어버렸고, 에게해 지역에서는 심지어 400년 가까이 암흑 시대가 빚어졌다. 이는 오늘날 금융위기 폭풍이 사회·경제 질서의 해체를 초래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청동은 고대 사회 경제 질서의 기초였고, 총붕괴는 기초 층위의 와해였다. (358~360p)
제12장 페르시아제국과 페르시아 전쟁
페르시아인이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고 고대 근동을 접수한 내용을 살펴본다. 바빌론을 제외하면 페르시아제국의 수도들은 모두 이란 지역에 있었다. 이란 지역의 수도들 역시 자그로스 산등성이 가까이에 자리했는데, 산 주변의 오래된 문명 지대를 제어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원나라 때의 다두(大都)·상두(上都)·허린(和林)이 철의 삼각편대를 이루고 그 배후에 그것을 뒷받침하는 광대한 몽골 부락이 국경 밖의 권력 집단으로 존재하면서 문명 지대의 중화(中華)를 제어했던 것과 같다. 페르시아사의 중요한 사건은 모두 제국 서부에서 일어났다. 오래된 나라가 이곳에 많을뿐더러 부상하고 있던 그리스와 이 지역이 오랫동안 갈등을 빚어왔기 때문이다. 쑨룽지는 이 장에서 기존 역사서의 편견을 버리고, 페르시아제국의 시각에서 페르시아 전쟁을 새롭게 조명한다.
제13장 ‘고전기의 그리스’를 새롭게 정의하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본다. 직접민주제로 나아간 아테네와 군사국가가 된 스파르타. 그리스 세계는 이탈리아 남부의 대그리스를 포함한다. 페르시아가 그리스 본토를 침범한 시기에 카르타고 역시 시칠리아의 그리스 도시국가를 공격했다. 때문에 시칠리아는 페르시아 전쟁의 서부 전장으로 여겨진다. 중심론을 제거하려는 어떠한 시도로도 아테네의 중심적 지위를 흔들 수는 없다.
아테네에서처럼 집중적으로 솟아나온 창조적인 에너지는 인류 역사상 단지 몇 차례만 출현했다. 하지만 아테네의 황금시대는 이 제국이 동맹국의 자원을 착취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아테네의 전성기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끝난다. 스파르타의 패권은 오래지 않아 테베에 넘어가고 테베를 이어 마케도니아가 흥기한다. 고전 그리스인은 대부분 마케도니아인을 동포로 여기지 않았으며, 마케도니아의 군주제를 페르시아와 한통속인 것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바로 이 주변화된 야만의 나라가 세계사를 ‘헬레니즘 시대’로 이끌었다.
제14장 인류사의 ‘축의 시대’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제시한 ‘축의 시대’라는 명제는 예수의 강림을 세계사의 ‘축’으로 간주한 헤겔의 기독교 중심론을 수정한다. 칼 야스퍼스는 이 정의를 확장해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에 존재했던 세계 각지의 사상을 포괄했다. 축의 시대는 오래된 정신 질서를 뒤집고 신화 시대의 종결을 선고했는데, 그 성취는 바로 인간의 ‘정신화’다. 이로 인해 눈부셨던 상고 시대가 역사의 배경막으로 떠밀려 들어가게 된다. 쑨룽지는 이란의 조로아스터교, 히브리의 예언 운동, 고대 인도 후기 베다 시대, 불교와 자이나교의 등장, 중국의 제자, 고대 그리스의 사상과 철학자들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한다.
제15장 알렉산더와 헬레니즘 시대
마케도니아가 페르시아제국을 멸망시킴으로써 그리스 문화는 근동·이란·인도, 심지어 중앙아시아까지 확산된다. 이는 인류사에서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려는 첫 번째 시도이자 전체 여정의 절반에 해당한다. 나머지 절반은 두 세기 이후에 한(漢)제국이 동쪽에서 출발해 헬레니즘 세계와 만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알렉산더 사후에 후계자들이 천하를 나눔으로써 셀레우코스·프톨레마이오스·안티고노스 3대 왕조 및 여러 왕국과 도시국가 연맹과 신전국가가 형성되었다. 이 시대의 특징은 시민이 자신이 소속된 도시국가에 대한 지배를 상실하고 왕국의 통치자가 ‘구세주’로 신격화되었다는 것이다. 예술은 정치를 비판하는 것에서 소시민을 조롱하는 내용으로 바뀐다. 종교의 경우, 각지의 비의가 뒤섞여 나타났는데 대부분 개인의 영생 획득과 관련된 것으로, 운명의 신에 대한 숭배가 나날이 성행했다. 철학자들은 세계시민주의를 외쳤지만, 실질적으로는 외부 세계에 동요되지 않도록 마음을 조절할 것을 주장했다. 과학 연구가 철학으로부터 독립했는데, 알렉산드리아 등의 중심지에서 과학이 꽃핀 결과 과학은 철학의 원자론으로부터 독립해 나오고 원자론은 숙명론 철학의 인질이 되었다.
제16장 로마의 성장
근동의 고대 문명에서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면 세계사 서쪽 끝 무대의 중앙이 서지중해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이며 로마 시대를 맞이한다. 반도 서쪽의 라틴 평원에 자리한 로마의 성장과정은 라틴 평원과 이탈리아반도를 순서대로 통일한 뒤 남쪽으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지정학적으로 로마는 그리스 세력을 평정해야만 했다. 또 하나 정치 체제와 법제를 통해 로마를 이해하자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두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로마제국의 건립은 진·한제국처럼 ‘군웅을 평정하고 천하를 하나로 만든 것’이 아니라 시민권의 확장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로마의 건국 초기 단계는 경계가 엄밀한 그리스 도시국가보다 낙후되어 있었는데, 로마 시민권을 지닌 동시에 라틴 동맹과 ‘라틴 시민권’을 교환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일련의 시민권 제도가 형성되었다. 또 하나의 잘못된 견해는 로마공화국을 아테네 같은 그리스 도시국가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리스 도시국가 평민의 투쟁 목적은 최종적으로 민회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로마의 평민은 최고 등급의 로마 시민권을 지녔지만 원로 계급과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는 없었다. 그들의 투쟁은 떨어져나가서 따로 국가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귀족들이 타협한 선은 평민들에게 원로원과 대립하는 평민회 및 집정관과 대립하는 호민관을 세울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공화제에 의해 타도된 고대 왕정의 유물인 집정관은 결국 쓸모없는 것이 되고, 로마제국은 공화제의 무거운 짐을 짊어진 제정 시대로 접어든다.
새로운 역사의 서막: 인류의 시작부터 로마의 등장까지
쑨룽지는 『신세계사』를 총 3권으로 집필했다. 현재 1, 2권은 대만에서 출간되었고, 3권은 출간을 준비 중이다. 시리즈의 시작인 이 책 『신세계사 1』은 아프리카에서 이주한 인류의 족적에서부터 이탈리아를 평정하고 지중해의 맹주가 된 로마의 등장까지, 총 16개의 장으로 나누어 다루고 있다.
제1장 지구의 역사와 선사시대의 인류
최신의 인지고고학을 인용해, 인류가 언제 어디서 상징적 사유로의 문턱을 처음 넘었는지 탐구한다. 홀시할 수 없는 것은 고기후학과 역사 생태의 상호작용이다. 빙하기의 종결은 구석기에서 세석기(細石器)로의 이행을 촉진했다. 그런데 빙하기가 종결된 뒤 급격히 기온이 내려가는 ‘영거 드라이아스기’가 발생하여 지중해 동부 연안의 환경 부담력이 저하됨에 따라 이 지역의 옛 채집수렵민은 농경과 목축을 발전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제2장 ‘4대 문명 고국’이라는 기존의 틀을 깨다
근동 농목혁명의 최초 발생지는 어느 정도 해발고도가 있는 환메소포타미아 산측 지대(산의 측면 지대)로, 한작농업이 이루어진 지역을 의미한다. 이후 대하(大河) 유역에서는 관개농업이 이루지면서 ‘도시혁명’의 기초를 다졌다. 그사이 4000년 동안 ‘2차 생산물 혁명’을 거쳤다. ‘산측설’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설’을 대체하고, 4대강 유역에서 문명이 기원했다는 설의 빈약함을 설명한다.
4대 문명 고국은 오롯이 농경 문명의 각도에서 세계사를 보고자 하는 집념이다. 이러한 집념은 유목-방목 지대를 주변화하고자 한다. 북쪽과 남쪽에서 구대륙 농경 문명 지대를 끼고 있는 유라시아 대초원과 북아라비아 스텝 및 그 인근의 사막 오아시스 지대가 없었다면 세계사가 과연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생각해보자. 만약 그랬다면 고대 세계의 장의사라고 할 수 있는 흉노는 없었을 테고 실크로드도 없었을 것이며,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몽골제국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고대의 유대 신앙 및 그것이 지중해화 된 기독교 버전도 없었을 것이며, 이슬람 세계는 더더욱 출현했을 리가 없다. (93p)
제3장 재차 기초를 다진 고대 인도 문명
인더스강 유역 고대 문명의 최초 유적지 메르가르를 통해 고대 근동을 서양 문명의 창시자로 간주하는 계보학에 대해 비판한다. 쑨룽지는 이란 고원 산측에서 생겨난 ‘밀과 양의 문화’가 양쯔강 유역에서 비롯된 ‘쌀과 돼지의 문화’에 의해 보충되었음을 지적한다. 인도의 하라파 문명과 베다 시대의 유물을 통해 석기-청동기-철기시대라는 전통적인 진화 순서가 전복됨을 밝힘으로써 철기 시대 역시 원시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자 체계인 브라흐미 문자 이전에 존재했던 (지금까지 해독되지 않은) 문자의 흔적을 통해 문명의 역사에 대해 또 다시 질문을 던진다.
제4장 중국 문명의 기원에 관한 몇 가지 문제
고대 근동과 고대 인도를 참고삼아 중국 문명의 기원이라는 까다로운 문제를 다룬다. 근동의 농업혁명은 산측 지대에서 발생했고, 약 4000년이 지난 후 대하 유역에서 이를 이어받아 관개농업으로 바꾸었고 도시혁명을 이루었다. 이 사례는 농업이 탄생한 지역이라고 해서 반드시 문명이 탄생한 지역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논벼는 작은 하곡이 교차하는 부근에서 탄생했다. 또한 벼농사가 한작농업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 정반대의 양상을 띠었으며 벼농사 이전에 채집경제가 성행했음을 밝힌다. 이는 중화문명의 요람이 대하 유역인 황허라는 설을 전면으로 부정한다.
제5장 중남아메리카의 고대 문명
서반구의 문명 돌파에 대해 다룬다. 인류가 서반구에 진입했을 때는 이미 구석기시대가 지난 뒤였고, 콜럼버스 이전의 아메리카는 기껏해야 야금술의 문턱에 이르러 있었다. 따라서 콜럼버스 이전의 아메리카사 전체는 온통 석기시대뿐이다. 고인디언 문명 역시 문자의 문턱에 놓여 있었으므로 전체적으로 선사시대로 간주된다. 중고 시대 세계의 6대 도시 가운데 하나를 건설했고, 역법의 정확함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서반구 문명은 유럽인에 의한 서반구 정복의 배경 지식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고대 아메리카 문명의 발전 단계는 수메르 문명 혹은 이집트의 초기 왕조 시기에 상당하기 때문에 서반구는 역사 표준시간대를 따로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 비교적 엄격한 기준에 따라서, 고대 아메리카 문명을 선사시대사에 편입시키는 사람도 있다. 고대 아메리카 문명은 문자 이전의 것으로, 그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적으로 고고학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연성이 부족한 기준에 대해 쑨룽지는 수정을 요구한다.
제6장 오세아니아의 문명
지구의 남은 부분을 인류가 마지막으로 가득 채운 것에 관한 내용이다. 오세아니아의 네 지역, 인도네시아, 미크로네시아, 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를 다룬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섬에 분포하는 어족인 남도어족이 대양을 따라서 꽃망울을 터뜨렸는데,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온 원주민이 있는 뉴기니를 경유했고, 양자는 뒤섞여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다. 쑨룽지는 이 장에서 20세기에 유행했던 견해, 즉 남도어족의 이주가 모두 타이완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견해를 수정한다. 한편 최신의 유전학 연구 성과를 채택해, 또 다른 이민 노선은 중국 대륙에서 출발해 통킹만을 거쳐 인도네시아로 향한 것이었음을 지적한다.
제7장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 고대 문명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 문명의 기원부터 청동기 시대의 종결까지를 다룬다. 농목혁명의 탄생지였던 산측의 서쪽 지대가 나날이 건조해지면서 ‘환아라비아 유목-방목 복합 지대’가 형성되었다. 이 지대에서는 농경과 목축 중에서 ‘목축’으로 치우치게 되었으며, 관개농업 지대의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삼각주 및 나일강 유역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는 ‘목축’이 ‘농경’에 뒤떨어지는 저급 단계가 결코 아니며 양자가 동등하게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이 복합 지대는 셈어족의 본향이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이 셈족화되면서 일력과 월력을 융합하고 연주기와 월주기를 모두 중시하게 된다. 봄갈이와 추수를 해야 하는 농경민에게는 1년 전체의 달력이 필요했지만, 유목민은 달의 삭망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달신의 중요성이 태양신을 압도했으며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오늘날 전 지구에서 통용되는) 60진법 시간 계산법 역시 30일 월주기의 뚜렷한 흔적이다.
제8장 고대 이집트: 명계를 동경한 태양의 나라
대하 유역의 모든 문명 중에서 이집트 문명은 농작물에 물을 대기 위한 인공 수로를 만들지 않은 유일한 문명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대비해서, 나일강의 주기적 범람은 ‘연주기’였으므로 이집트에서는 순양력을 사용했다. 이집트는 세계사에서 처음으로 달 주기의 단점을 극복하고 태양력을 처음으로 채택한 고대 문명이 되었다.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고, 땅에는 하나의 강만 있었다. 양자의 규칙을 장악해 태양력을 발명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일강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세상이 하나의 영역이고 왕은 오직 한 명’인 대통일 구조가 만들어졌다. (…) 이집트는 태양의 나라였다. 파라오는 태양신의 화신이었다. 하늘에 있는, 파라오의 아버지 역시 태양이었다. 모든 백성의 신 역시 태양이었다. 후에 이집트 달의 신은 그 기능이 소멸되고 다른 직분을 맡게 되었다. (…) 태양의 나라 이집트는 명계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오시리스, 마아트, 토트는 모두 명계에 존재한다. 명계는 죽은 이의 영혼을 시험하는 곳일 뿐 영원한 형벌의 장소가 아니다. 고대에 달을 숭배했던 유목-방목민의 계승자가 이슬람교라면, 이집트 태양교의 계승자는 기독교다. (272~302p)
제9장 청동기시대 중후기의 고대 근동
고대 바빌론제국의 쇠락, 인도유럽어 집단의 도래, 히타이트, 미타니, 카시트-바빌론 등의 왕국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청동기 시대 중기로 진입한 이후 근동의 변수는 인도유럽인의 도래였다. 인도유럽어족은 가설적인 본향으로부터 사방으로 확산되었는데, 주류의 설명에 따르자면 이들의 본향은 지금의 우크라이나와 캅카스 이북이다. 이곳에서 출발해 유럽과 인도에 이르렀으며, 고대의 서남아시아로도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인도유럽인의 도래로 인해 청동기시대 중기의 근동에는 세 왕국이 더해지는데, 바로 히타이트, 미탄니, 카시트다.
제10장 에게해의 고대 문명
트로이 전쟁과 그리스 이전의 크레타섬 문명에 대해 살펴본다.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것으로는 에게해 동북쪽의 섬 문명과 에게해 중부의 키클라데스 문명이 있다. 전자는 트로이 문화권에 속하는데, 트로이와 마찬가지로 파괴되었다. 키클라데스 문명은 나름의 특징을 지녔지만, 후기에는 크레타의 문화 패권에 흡수되었다.
기원전 3000년부터 기원전 2000년 사이에 그리스 집단이 에게해 지역으로 진입하기 시작한다. 그중 하나인 미케네인이 크레타의 패권을 대신했고 크레타 문화도 흡수한다. 하지만 청동기시대 총붕괴 시기에 멸망한다. 이것이 ‘도리아의 침입’과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론이 없지만, 근거가 될 만한 충분한 단층이 출현한다. 이전에는 크레타의 선형문자를 사용해 그리스어를 기록했고, 이후는 페니키아 자모를 사용했다. 새로운 신도 출현했고, 그리스가 고전기로 향하던 과도기에는 지중해에서의 식민(植民)도 이루어진다.
제11장 고대 근동이 철기시대로 진입하다
히타이트제국이 최초로 철기를 발명했다는 예전 교과서의 낡은 설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다. 사실 청동기시대 총붕괴를 겪으면서 역사에서 가장 철저히 사라진 게 바로 히타이트다. 이 총붕괴 과정에서 이집트가 해양 민족의 대침입을 국경 밖에서 막아냈고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을 비롯해 셈족 대이동의 세찬 흐름이 있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대에서 아시리아 외에는 죄다 전멸했다. 아시리아는 난관을 돌파한 덕분에 철기시대 초기의 제일 강자가 되어 고대 근동을 통일하고 이집트를 점령한다.
청동기시대에는 철기가 없었으며 철기의 제조가 혁명을 가져왔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사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철을 사용한 흔적은 기원전 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철은 주조해서 만드는 게 아니라 단조해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생산비용이 높은 편이라서 보급되지 못했다.
그런데 청동에서 철로의 이행이 처음에는 결코 진보를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후퇴와 같았다. 이전까지는 청동기시대 총붕괴의 원인에 대해, 철기를 사용하는 해양 민족의 침입을 구문명이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 설은 일찌감치 성립할 수 없게 되었다. 비교적 새로운 견해에 따르면, 총붕괴 시기에 구리와 주석의 공급원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확실히 출토물 중에는 기존의 청동기가 끊임없이 다시 주조되었고 장신구가 철제로 대체된 흔적이 있다.
청동기시대 총붕괴는 근동의 기존 국제 질서를 완전히 쓸어버렸고, 에게해 지역에서는 심지어 400년 가까이 암흑 시대가 빚어졌다. 이는 오늘날 금융위기 폭풍이 사회·경제 질서의 해체를 초래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청동은 고대 사회 경제 질서의 기초였고, 총붕괴는 기초 층위의 와해였다. (358~360p)
제12장 페르시아제국과 페르시아 전쟁
페르시아인이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고 고대 근동을 접수한 내용을 살펴본다. 바빌론을 제외하면 페르시아제국의 수도들은 모두 이란 지역에 있었다. 이란 지역의 수도들 역시 자그로스 산등성이 가까이에 자리했는데, 산 주변의 오래된 문명 지대를 제어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원나라 때의 다두(大都)·상두(上都)·허린(和林)이 철의 삼각편대를 이루고 그 배후에 그것을 뒷받침하는 광대한 몽골 부락이 국경 밖의 권력 집단으로 존재하면서 문명 지대의 중화(中華)를 제어했던 것과 같다. 페르시아사의 중요한 사건은 모두 제국 서부에서 일어났다. 오래된 나라가 이곳에 많을뿐더러 부상하고 있던 그리스와 이 지역이 오랫동안 갈등을 빚어왔기 때문이다. 쑨룽지는 이 장에서 기존 역사서의 편견을 버리고, 페르시아제국의 시각에서 페르시아 전쟁을 새롭게 조명한다.
제13장 ‘고전기의 그리스’를 새롭게 정의하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본다. 직접민주제로 나아간 아테네와 군사국가가 된 스파르타. 그리스 세계는 이탈리아 남부의 대그리스를 포함한다. 페르시아가 그리스 본토를 침범한 시기에 카르타고 역시 시칠리아의 그리스 도시국가를 공격했다. 때문에 시칠리아는 페르시아 전쟁의 서부 전장으로 여겨진다. 중심론을 제거하려는 어떠한 시도로도 아테네의 중심적 지위를 흔들 수는 없다.
아테네에서처럼 집중적으로 솟아나온 창조적인 에너지는 인류 역사상 단지 몇 차례만 출현했다. 하지만 아테네의 황금시대는 이 제국이 동맹국의 자원을 착취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아테네의 전성기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끝난다. 스파르타의 패권은 오래지 않아 테베에 넘어가고 테베를 이어 마케도니아가 흥기한다. 고전 그리스인은 대부분 마케도니아인을 동포로 여기지 않았으며, 마케도니아의 군주제를 페르시아와 한통속인 것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바로 이 주변화된 야만의 나라가 세계사를 ‘헬레니즘 시대’로 이끌었다.
제14장 인류사의 ‘축의 시대’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제시한 ‘축의 시대’라는 명제는 예수의 강림을 세계사의 ‘축’으로 간주한 헤겔의 기독교 중심론을 수정한다. 칼 야스퍼스는 이 정의를 확장해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에 존재했던 세계 각지의 사상을 포괄했다. 축의 시대는 오래된 정신 질서를 뒤집고 신화 시대의 종결을 선고했는데, 그 성취는 바로 인간의 ‘정신화’다. 이로 인해 눈부셨던 상고 시대가 역사의 배경막으로 떠밀려 들어가게 된다. 쑨룽지는 이란의 조로아스터교, 히브리의 예언 운동, 고대 인도 후기 베다 시대, 불교와 자이나교의 등장, 중국의 제자, 고대 그리스의 사상과 철학자들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한다.
제15장 알렉산더와 헬레니즘 시대
마케도니아가 페르시아제국을 멸망시킴으로써 그리스 문화는 근동·이란·인도, 심지어 중앙아시아까지 확산된다. 이는 인류사에서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려는 첫 번째 시도이자 전체 여정의 절반에 해당한다. 나머지 절반은 두 세기 이후에 한(漢)제국이 동쪽에서 출발해 헬레니즘 세계와 만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알렉산더 사후에 후계자들이 천하를 나눔으로써 셀레우코스·프톨레마이오스·안티고노스 3대 왕조 및 여러 왕국과 도시국가 연맹과 신전국가가 형성되었다. 이 시대의 특징은 시민이 자신이 소속된 도시국가에 대한 지배를 상실하고 왕국의 통치자가 ‘구세주’로 신격화되었다는 것이다. 예술은 정치를 비판하는 것에서 소시민을 조롱하는 내용으로 바뀐다. 종교의 경우, 각지의 비의가 뒤섞여 나타났는데 대부분 개인의 영생 획득과 관련된 것으로, 운명의 신에 대한 숭배가 나날이 성행했다. 철학자들은 세계시민주의를 외쳤지만, 실질적으로는 외부 세계에 동요되지 않도록 마음을 조절할 것을 주장했다. 과학 연구가 철학으로부터 독립했는데, 알렉산드리아 등의 중심지에서 과학이 꽃핀 결과 과학은 철학의 원자론으로부터 독립해 나오고 원자론은 숙명론 철학의 인질이 되었다.
제16장 로마의 성장
근동의 고대 문명에서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면 세계사 서쪽 끝 무대의 중앙이 서지중해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이며 로마 시대를 맞이한다. 반도 서쪽의 라틴 평원에 자리한 로마의 성장과정은 라틴 평원과 이탈리아반도를 순서대로 통일한 뒤 남쪽으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지정학적으로 로마는 그리스 세력을 평정해야만 했다. 또 하나 정치 체제와 법제를 통해 로마를 이해하자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두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로마제국의 건립은 진·한제국처럼 ‘군웅을 평정하고 천하를 하나로 만든 것’이 아니라 시민권의 확장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로마의 건국 초기 단계는 경계가 엄밀한 그리스 도시국가보다 낙후되어 있었는데, 로마 시민권을 지닌 동시에 라틴 동맹과 ‘라틴 시민권’을 교환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일련의 시민권 제도가 형성되었다. 또 하나의 잘못된 견해는 로마공화국을 아테네 같은 그리스 도시국가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리스 도시국가 평민의 투쟁 목적은 최종적으로 민회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로마의 평민은 최고 등급의 로마 시민권을 지녔지만 원로 계급과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는 없었다. 그들의 투쟁은 떨어져나가서 따로 국가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귀족들이 타협한 선은 평민들에게 원로원과 대립하는 평민회 및 집정관과 대립하는 호민관을 세울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공화제에 의해 타도된 고대 왕정의 유물인 집정관은 결국 쓸모없는 것이 되고, 로마제국은 공화제의 무거운 짐을 짊어진 제정 시대로 접어든다.
출판사 리뷰
“『로마인 이야기』처럼 신선하고 『총, 균, 쇠』, 『사피엔스』처럼 거침없다!”
인류의 역사와 문명의 진보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한 명저!
“이제는 역사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완전히 뒤집어야 할 때가 되었다!”
이 한 문장은 저자 쑨룽지가 왜 『신세계사』 시리즈(전 3권)를 집필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와 문명에 대한 역사는 얼마나 신뢰할 만한가. 20세기까지 인류 문명의 역사를 대변해온 서양 중심론과 민족주의에 기댄 세계사는 낡아빠진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오래도록 진실로 여겨져 왔던 4대 문명 기원론도 실제로는 20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파생되어 나온 어두운 역사의 잔재 중 하나라는 건 이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교양이나 전공서로 출판된 대부분의 세계사가 역사의 오류나 진실에 대한 수정 없이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역시 지금의 현실이다. 잠깐 시간을 내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고대문명 발상지’라고 검색해보라. 나일강, 인더스강, 황하, 티크리스 유프라테스강 등의 4대 강 유역의 문명에 대한 정보가 여전히 주를 이룬다. 하지만 실제로 현재의 고고학계나 역사학계에서 세계 고대문명의 발상지는 최소한 20곳 이상이라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중국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자랐고 대만과 미국에서 수학한 후, 스탠퍼드대학교 및 미국과 캐나다의 대학교에서 오래도록 강의해온 역사학자 쑨룽지는 동서양의 역사적 관점을 균형적으로 볼 수 있는 특별한 이력의 소유자다. 쑨룽지는 이 책 『신세계사』에서 동양 혹은 서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사료에 근거한 글로벌 사관을 바탕으로 인류의 기원에서부터 이주와 정착, 농경과 목축을 통한 도시의 생성과 문명의 탄생, 전쟁과 교류를 통한 문화의 전파, 종교와 철학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장대한 세계사를 흥미롭게 펼쳐낸다. 진화사, 정치사, 전쟁사에서 종교사, 사상사, 사회사, 문화사까지, 이 책 『신세계사』는 “통섭역사학”의 진면모를 보여준다.
“시오노 나나미를 읽었을 때처럼 신선하고, 재러드 다이아몬드와 유발 하라리를 합쳐놓은 것처럼 거침없다!”는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의 평처럼 이 책 『신세계사』는 근래의 인류의 문명사를 다루는 책 중에 눈에 띄는 노작이다. 경희대학교 사학과 강인욱 교수는 “첫째 민족주의를 탈피해 글로벌로의 접근, 둘째 문헌을 탈피한 서술, 셋째 전통적인 세계사 역사 쓰기의 탈피, 넷째 시공을 초월한 문명 간의 비교”를 이 책의 ‘새로움’으로 꼽으면서 “미국과 유럽 중심의 세계가 바뀌는 지금 우리에게는 새로운 세계 역사에 대한 관점이 필요하다. 역사에서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고 싶다면, 또 서구나 중화 문명 중심의 세계관에서 탈피하고 싶다면 먼저 이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라고 추천했다.
쑨룽지는 책의 서문에서 “‘옛것’을 장악하는 것은 바로 ‘지금’이다”라고 말한다. 역사는 지나간 것이지만 항상 신선하다. 시대마다 과거 역사에 대한 각각의 다른 인식과 해석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세계사가 특히 그러한데,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습관적으로 시간의 축에 따라 역사를 나열하고 서양 중심의 사고에 따라 내용을 배열한다. 현대의 많은 글로벌 역사학자들이 이를 반성하고 한층 더 넓은 시야로 관용적이고 균형 잡힌 역사관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쑨룽지가 그들 중 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글로벌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 이 책 『신세계사』는 신랄한 통찰의 자세로 기존 세계사의 서사 전통을 철저하게 뒤집는다. 치밀한 고증을 통한 세심한 분석과 대담한 가설, 도전적이고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견해,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한 수많은 사실들로 충만한 이 책은 참신하면서도 놀라움으로 넘쳐나 독자의 사유 영역을 한층 더 확장시킨다.
인류의 역사와 문명의 진보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한 명저!
“이제는 역사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완전히 뒤집어야 할 때가 되었다!”
이 한 문장은 저자 쑨룽지가 왜 『신세계사』 시리즈(전 3권)를 집필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와 문명에 대한 역사는 얼마나 신뢰할 만한가. 20세기까지 인류 문명의 역사를 대변해온 서양 중심론과 민족주의에 기댄 세계사는 낡아빠진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오래도록 진실로 여겨져 왔던 4대 문명 기원론도 실제로는 20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파생되어 나온 어두운 역사의 잔재 중 하나라는 건 이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교양이나 전공서로 출판된 대부분의 세계사가 역사의 오류나 진실에 대한 수정 없이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역시 지금의 현실이다. 잠깐 시간을 내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고대문명 발상지’라고 검색해보라. 나일강, 인더스강, 황하, 티크리스 유프라테스강 등의 4대 강 유역의 문명에 대한 정보가 여전히 주를 이룬다. 하지만 실제로 현재의 고고학계나 역사학계에서 세계 고대문명의 발상지는 최소한 20곳 이상이라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중국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자랐고 대만과 미국에서 수학한 후, 스탠퍼드대학교 및 미국과 캐나다의 대학교에서 오래도록 강의해온 역사학자 쑨룽지는 동서양의 역사적 관점을 균형적으로 볼 수 있는 특별한 이력의 소유자다. 쑨룽지는 이 책 『신세계사』에서 동양 혹은 서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사료에 근거한 글로벌 사관을 바탕으로 인류의 기원에서부터 이주와 정착, 농경과 목축을 통한 도시의 생성과 문명의 탄생, 전쟁과 교류를 통한 문화의 전파, 종교와 철학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장대한 세계사를 흥미롭게 펼쳐낸다. 진화사, 정치사, 전쟁사에서 종교사, 사상사, 사회사, 문화사까지, 이 책 『신세계사』는 “통섭역사학”의 진면모를 보여준다.
“시오노 나나미를 읽었을 때처럼 신선하고, 재러드 다이아몬드와 유발 하라리를 합쳐놓은 것처럼 거침없다!”는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의 평처럼 이 책 『신세계사』는 근래의 인류의 문명사를 다루는 책 중에 눈에 띄는 노작이다. 경희대학교 사학과 강인욱 교수는 “첫째 민족주의를 탈피해 글로벌로의 접근, 둘째 문헌을 탈피한 서술, 셋째 전통적인 세계사 역사 쓰기의 탈피, 넷째 시공을 초월한 문명 간의 비교”를 이 책의 ‘새로움’으로 꼽으면서 “미국과 유럽 중심의 세계가 바뀌는 지금 우리에게는 새로운 세계 역사에 대한 관점이 필요하다. 역사에서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고 싶다면, 또 서구나 중화 문명 중심의 세계관에서 탈피하고 싶다면 먼저 이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라고 추천했다.
쑨룽지는 책의 서문에서 “‘옛것’을 장악하는 것은 바로 ‘지금’이다”라고 말한다. 역사는 지나간 것이지만 항상 신선하다. 시대마다 과거 역사에 대한 각각의 다른 인식과 해석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세계사가 특히 그러한데,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습관적으로 시간의 축에 따라 역사를 나열하고 서양 중심의 사고에 따라 내용을 배열한다. 현대의 많은 글로벌 역사학자들이 이를 반성하고 한층 더 넓은 시야로 관용적이고 균형 잡힌 역사관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쑨룽지가 그들 중 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글로벌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 이 책 『신세계사』는 신랄한 통찰의 자세로 기존 세계사의 서사 전통을 철저하게 뒤집는다. 치밀한 고증을 통한 세심한 분석과 대담한 가설, 도전적이고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견해,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한 수많은 사실들로 충만한 이 책은 참신하면서도 놀라움으로 넘쳐나 독자의 사유 영역을 한층 더 확장시킨다.
추천평
근자에 이처럼 거침없는 역사책을 읽은 기억이 있는가? 이 책은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합쳐 놓은 것과 같다. 저자는 생명의 기원에서 근대사까지, 진화사, 정치사, 전쟁사에서 종교사, 사상사, 사회사, 문화사까지 학문의 경계를 무시하고 마구 넘나든다.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올린다. 각오하시라. 동서고금은 물론, 오대양 육대주를 마구 넘나드는 아찔한 롤러코스터 역사 여행이 시작된다. 반드시 메모장을 겸비하고 여행을 떠나기 바란다. 저자의 현란한 운전 솜씨에 정신이 팔리면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길을 잃기 십상이다. 나만의 이정표를 만들며 따라가야 한다. 그래야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평범한 책에서는 맛보지 못할 짜릿한 독서의 흥분을 느낄 것이다. 자, 긴 역사 기행을 떠날 준비가 되셨는가? Bon Boyage!
- 최재천(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1권을 읽자마자 『신세계사』 2권의 출간이 기다려진다. 미국과 유럽 중심의 세계가 바뀌는 지금 우리에게는 새로운 세계 역사에 대한 관점이 필요하다. 역사에서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고 싶다면, 또 서구나 중화 문명 중심의 세계관에서 탈피하고 싶다면 먼저 이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 강인욱(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 고고학자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올린다. 각오하시라. 동서고금은 물론, 오대양 육대주를 마구 넘나드는 아찔한 롤러코스터 역사 여행이 시작된다. 반드시 메모장을 겸비하고 여행을 떠나기 바란다. 저자의 현란한 운전 솜씨에 정신이 팔리면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길을 잃기 십상이다. 나만의 이정표를 만들며 따라가야 한다. 그래야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평범한 책에서는 맛보지 못할 짜릿한 독서의 흥분을 느낄 것이다. 자, 긴 역사 기행을 떠날 준비가 되셨는가? Bon Boyage!
- 최재천(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1권을 읽자마자 『신세계사』 2권의 출간이 기다려진다. 미국과 유럽 중심의 세계가 바뀌는 지금 우리에게는 새로운 세계 역사에 대한 관점이 필요하다. 역사에서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고 싶다면, 또 서구나 중화 문명 중심의 세계관에서 탈피하고 싶다면 먼저 이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 강인욱(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 고고학자
책소개
『최재천의 공부』의 저자, 이화여대 석좌교수인 최재천 교수,
차이나는 클라스, 고고학자 강인욱 교수가 추천한
『신세계사』 시리즈의 두 번째 책 출간!
“서양 사관이 지배해온 문명사의 통념을 뒤흔든다!”
2020년 출간되어 역사 해석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던 동양의 역사학자 쑨룽지의 『신세계사』 시리즈 두 번째 책이 출간되었다. 제1권이 이제껏 우리가 배워왔던 서양 중심론과 민족주의에 기댄 세계 문명론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다면, 제2권은 로마, 쿠샨, 파르티아, 진한 제국으로 대변되는 4대 제국에 영향을 끼친 헬레니즘 문화를 시작으로, 고대 세계의 종식을 불러온 흉노의 출현과 그들로 인해 어떻게 세계 민족 지도가 바뀌어 되었는지를 면밀하게 살펴본다.
세계 역사에서 흉노의 행적이 묘연했던 건 지금껏 역사에서 4대 제국 문명 사슬의 중간지대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지만, 대초원을 지배했던 흉노는 훗날 돌궐로 넘어가기 전까지 굽타 제국을 위협했던 장의사 역할을 한 역사의 중추세력이었다. 또한 지금의 스웨덴 지역에서 살아가던 고트족이 로마를 붕괴시켜 중세 시대를 촉발했다는 기존 역사 담론을 해체하고, 비잔틴 제국, 카롤링거 시대를 거치면서 어떻게 현대 유럽의 지도가 형성되었는지를 상세하게 기술한다. 유럽이 1천 년에 걸쳐 변모하던 이 시기에 즈음하여, 이슬람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도 다룬다.
이슬람 문명의 황금기라 불리는 대식 제국이 수학과 과학 분야에서 어떻게 세계 최고의 문화를 이루어낼 수 있었는지, 그리고 이후 오스만 제국, 무굴 제국 등으로 분할되어 종말을 맞이했는지까지 상세히 서술한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변모 형태를 통해 인도의 역사를 조망한다. 힌두교와 불교와 자이나교의 갈등을 통해 기존에 알려진 인도 역사에 대한 해석을 뒤집으면서 『신세계사 2』는 최종장을 기약하며 막을 내린다.
중국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자랐고 대만과 미국에서 수학한 후, 스탠퍼드대학교 및 미국과 캐나다의 대학교에서 오래도록 강의해온 역사학자 쑨룽지는 동서양의 역사적 관점을 균형적으로 볼 수 있는 특별한 이력의 소유자다. 쑨룽지는 이 책 『신세계사 2』에서 동양 혹은 서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사료에 근거한 글로벌 사관을 바탕으로 전쟁과 교류를 통한 문화의 전파, 국가의 소멸과 탄생, 종교의 부흥에까지, 장대한 세계사를 흥미롭게 펼쳐낸다. 진화사, 정치사, 전쟁사에서 종교사, 사상사, 사회사, 문화사까지, 이 책 『신세계사 2』는 “통섭역사학”의 진면모를 보여준다.
쑨룽지는 책의 서문에서 “‘옛것’을 장악하는 것은 바로 ‘지금’이다”라고 말한다. 역사는 지나간 것이지만 항상 신선하다. 시대마다 과거 역사에 대한 각각의 다른 인식과 해석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세계사가 특히 그러한데,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습관적으로 시간의 축에 따라 역사를 나열하고 서양 중심의 사고에 따라 내용을 배열한다. 현대의 많은 글로벌 역사학자들이 이를 반성하고 한층 더 넓은 시야로 관용적이고 균형 잡힌 역사관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쑨룽지가 그들 중 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글로벌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 이 책 『신세계사 2』는 신랄한 통찰의 자세로 기존 세계사의 서사 전통을 철저하게 뒤집는다. 치밀한 고증을 통한 세심한 분석과 대담한 가설, 도전적이고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견해,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한 수많은 사실들로 충만한 이 책은 참신하면서도 놀라움으로 넘쳐나 독자의 사유 영역을 한층 더 확장시킨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금’은 점점 ‘옛것’으로부터 멀어진다. 따라서 역사는 ‘새로움’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날이 새로워질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계속 공부해야만 하는 이유다.”
- 저자의 말 중에서
차이나는 클라스, 고고학자 강인욱 교수가 추천한
『신세계사』 시리즈의 두 번째 책 출간!
“서양 사관이 지배해온 문명사의 통념을 뒤흔든다!”
2020년 출간되어 역사 해석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던 동양의 역사학자 쑨룽지의 『신세계사』 시리즈 두 번째 책이 출간되었다. 제1권이 이제껏 우리가 배워왔던 서양 중심론과 민족주의에 기댄 세계 문명론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다면, 제2권은 로마, 쿠샨, 파르티아, 진한 제국으로 대변되는 4대 제국에 영향을 끼친 헬레니즘 문화를 시작으로, 고대 세계의 종식을 불러온 흉노의 출현과 그들로 인해 어떻게 세계 민족 지도가 바뀌어 되었는지를 면밀하게 살펴본다.
세계 역사에서 흉노의 행적이 묘연했던 건 지금껏 역사에서 4대 제국 문명 사슬의 중간지대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지만, 대초원을 지배했던 흉노는 훗날 돌궐로 넘어가기 전까지 굽타 제국을 위협했던 장의사 역할을 한 역사의 중추세력이었다. 또한 지금의 스웨덴 지역에서 살아가던 고트족이 로마를 붕괴시켜 중세 시대를 촉발했다는 기존 역사 담론을 해체하고, 비잔틴 제국, 카롤링거 시대를 거치면서 어떻게 현대 유럽의 지도가 형성되었는지를 상세하게 기술한다. 유럽이 1천 년에 걸쳐 변모하던 이 시기에 즈음하여, 이슬람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도 다룬다.
이슬람 문명의 황금기라 불리는 대식 제국이 수학과 과학 분야에서 어떻게 세계 최고의 문화를 이루어낼 수 있었는지, 그리고 이후 오스만 제국, 무굴 제국 등으로 분할되어 종말을 맞이했는지까지 상세히 서술한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변모 형태를 통해 인도의 역사를 조망한다. 힌두교와 불교와 자이나교의 갈등을 통해 기존에 알려진 인도 역사에 대한 해석을 뒤집으면서 『신세계사 2』는 최종장을 기약하며 막을 내린다.
중국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자랐고 대만과 미국에서 수학한 후, 스탠퍼드대학교 및 미국과 캐나다의 대학교에서 오래도록 강의해온 역사학자 쑨룽지는 동서양의 역사적 관점을 균형적으로 볼 수 있는 특별한 이력의 소유자다. 쑨룽지는 이 책 『신세계사 2』에서 동양 혹은 서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사료에 근거한 글로벌 사관을 바탕으로 전쟁과 교류를 통한 문화의 전파, 국가의 소멸과 탄생, 종교의 부흥에까지, 장대한 세계사를 흥미롭게 펼쳐낸다. 진화사, 정치사, 전쟁사에서 종교사, 사상사, 사회사, 문화사까지, 이 책 『신세계사 2』는 “통섭역사학”의 진면모를 보여준다.
쑨룽지는 책의 서문에서 “‘옛것’을 장악하는 것은 바로 ‘지금’이다”라고 말한다. 역사는 지나간 것이지만 항상 신선하다. 시대마다 과거 역사에 대한 각각의 다른 인식과 해석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세계사가 특히 그러한데,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습관적으로 시간의 축에 따라 역사를 나열하고 서양 중심의 사고에 따라 내용을 배열한다. 현대의 많은 글로벌 역사학자들이 이를 반성하고 한층 더 넓은 시야로 관용적이고 균형 잡힌 역사관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쑨룽지가 그들 중 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글로벌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 이 책 『신세계사 2』는 신랄한 통찰의 자세로 기존 세계사의 서사 전통을 철저하게 뒤집는다. 치밀한 고증을 통한 세심한 분석과 대담한 가설, 도전적이고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견해,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한 수많은 사실들로 충만한 이 책은 참신하면서도 놀라움으로 넘쳐나 독자의 사유 영역을 한층 더 확장시킨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금’은 점점 ‘옛것’으로부터 멀어진다. 따라서 역사는 ‘새로움’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날이 새로워질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계속 공부해야만 하는 이유다.”
- 저자의 말 중에서
목차
한국어판 서문
제2권에 대한 안내
제17장 구대륙을 가로지른 문명의 사슬: 4대 제국과 실크로드
진(秦)과 대진(大秦) | 공화정의 짐을 짊어진 제정 | 한 나라에 체제와 주인이 각각 둘 | 진나라 군주제의 ‘혁명성’은 로마를 능가했을까? | 로마 제정 하에서의 시민권 확장 | 진나라의 중국 통일은 전제정치의 최고봉 | 진한 제국의 판도 | 최대치로 확장된 로마 제국 영토 | 중앙아시아의 헬레니즘 왕국 | 월지인과 스키타이인, 인도 파르티아인 | 서기 1~3세기의 쿠샨 제국 | 제2의 페르시아 제국: 파르티아 | 유라시아 대륙의 대동맥: 실크로드 | 실크로드가 만들어 낸 이름, China
제18장 미륵과 메시아: 세계적 구세주형 종교의 탄생
그리스 아시아 문명 | 헬레니즘의 통치자는 ‘구세주’ | 동방화인가? 그리스화인가? | 인도 그리스인의 조로아스터교화 및 불교화 | 인도 스키타이인의 종교 혼합 정책 | 쿠샨 왕조, 대승 불교학, 미륵교 | 미륵, 미트라(베다 시대), 미트라 | 그리스 로마 문명 | ‘메시아’를 향한 유대인의 열망 | 분노와 공의의 하나님이 인자의 하나님으로 | 기독교와 유대인의 이별 | 초대 기독교의 성경 제작 운동 | 그리스 로마 철학으로 도식화한 기독교 | ‘삼위일체설’의 지식 고고학 | 비의(秘儀) 형식을 차용한 기독교 | 로마 국교로 받아들여진 기독교 | 기독교, 그리고 기독교의 뿌리인 고대 유대 신앙
제19장 제국의 멸망: 흉노는 고대 세계의 장의사
내륙 아시아의 ‘흉노 시대’ | 중국의 ‘삼국시대’와 로마의 ‘삼국시대’ | 로마 제국의 중흥과 중화 제국의 성공 | 중화 제국보다 더욱 철저하게 흩어진 로마 제국 | 사산 제국과 굽타 제국의 근심거리 ‘흉노’ | 흉노는 고대 세계의 장의사였을까?
제20장 아프리카 고대사의 형태와 후기 고대사의 노선
가장 핵심적인 대륙이자 가장 오래된 인류 | 블랙 아프리카의 지리 형태와 역사 생태 | 종족과 어족 사이의 경쟁인가, 아니면 다원적 발전인가? | 나일강 중심의 ‘고대’ | 또 다른 나일강 고대 왕국 | 악숨 왕국 | 동아프리카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제21장 고대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트족
‘476년’이 갖는 역사적 의미 | 게르만족의 남쪽 이주설 | 로마의 고트 전선과 다뉴브 집단 | 적인가? 동지인가? 재앙의 씨앗인가? 나라의 기둥인가? | ‘로마적’ vs ‘고트적’ 개념의 구축 | 고트족에게 좋은 일만 하다 끝난 흉노 제국 | 동게르만족과 고대 로마가 함께 멸망하다 | 역사는 고트족에게 공정해야 한다
제22장 서로마의 유산은 누구에게로?
프랑크인의 등장 | 로마교황청으로 기운 프랑크족 | 로마교황청 대신 서북부를 수호한 아일랜드 성공회 | 유산된 원서지역 기독교 문명? | 지고지상 독보적 위치의 로마교황청 | ‘카롤링거와 교황청의 중심축’이 싹트다 | 샤를마뉴가 재건한 ‘서로마 제국’ | 소위 말하는 ‘카롤링거 문예 부흥’ | 서방 기독교 세계를 구축한 ‘라틴 공동체’ | 속도를 더해간 두 기독교 세계의 해산
제23장 끊임없이 변모했던 나라, 비잔틴
난공불락의 성, 콘스탄티노플 | 동쪽이 받쳐주니 서쪽이 무너지다 | 일신론 국교는 천하를 통일했나, 분열했나? |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중흥 | 아바르인과 랑고바르드인의 침입 | 발칸의 슬라브화 | 헤라클리우스의 중흥 | 비잔틴의 ‘탈 로마화’의 향방 | 제국에서 일방으로 축소되어도 여전히 짊어졌던 ‘제국’ 방어 임무 | 비잔틴의 중고화(中古化)? | 신규 이주민, 불가리아 | 이사우리아 왕조의 ‘문화 대혁명’ | 지중해 북부를 잃고 발칸을 광복시킨 비잔틴 | 비잔틴의 포교 공세 | 새옹이 얻은 말이 화근이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 최고조에 이른 ‘이이제이’ 정책 | 유라시아 최강국이 된 비잔틴 | 지는 해가 한없이 아름다울까?
제24장 아라비아인의 ‘다르 알 이슬람’
이슬람 굴기 이전의 아라비아인 | 아라비아반도의 바둑판 | 헤자즈 지구의 굴기 | 무함마드와 그의 포교 | 신흥종교에 남은 옛 종교의 흔적 | 이슬람의 지도권 다툼 | 최후의 계시 | 비잔틴 제국의 4분의 3을 집어삼킨 아라비아 | 아라비아인이 사산 제국을 전멸하다 | ‘정통 칼리프’ 시대의 폐막 | 제1차 이슬람 분쟁(the First Fitna) | 제2차 이슬람 분쟁(the Second Fitna) | 우마이야 대식 제국의 영토 확장 | 시아파의 계보와 갈래 | 우마이야 정권의 몰락 | 몇 가지 관점
제25장 이슬람 문명의 황금시대
크게 변화한 이슬람 제국의 형태 | 제국 서부의 균열 | 아바스 칼리프조의 전성기 | 과학연구의 불꽃이 된 ‘지혜의 집’ | 종교학 체계가 완비된 시기 | 한쪽만 살아남아야 했던 양대 황금시대 | 바그다드 중앙 정권의 흔들림에서 항복까지 | 당나라와 꽤 비슷한 붕괴 | 정권-종족-문화의 대대적인 교체 전야 | 이슬람 문명의 중앙집권화 | 이란 문예 부흥 | ‘범 이란문화권’의 마지막 형태가 된 돌궐 페르시아 공생체
제26장 서유럽 열국의 탄생
샤를마뉴 제국의 붕괴 | 마자르의 근심과 ‘도이치’의 탄생 | 교황청이 외면한 ‘신성’ 로마제국 | 산산이 조각 난 밀레니엄의 꿈, 로마의 혼이 끊기다 | 바이킹의 시대 | 바이킹족의 엣 기독교 문명과 그 종식 | ‘프랑스’의 조산을 초래한 ‘북부 야만족’의 재앙 | 사방에서 재난이 들이닥친 영국제도 | 잉글랜드의 열국 시대를 끝낸 북부 야만족 | ‘노르만인 정복’으로 가는 길 | 이탈리아 남단: 또 다른 ‘노르만 정복’ | 이베리아: 기독교의 반격
제27장 슬라브 세계의 형성
슬라브인의 역사적 배경 | 슬라브인의 원류에 얽힌 불가사의 | 갑작스럽게 등장한 기이한 현상 | ‘슬라브인’ 좋을 일만 한 아바르인 | 아바르인의 퇴장과 슬라브인의 등장 | ‘슬라브’ 국가로 변모한 불가리아 | ‘대 모라비아’의 불가사의 | 게르만 집단에 편입된 보헤미아, 이를 피한 폴란드 | ‘슬라브인 자체의 건국 역량 유무’에 관한 논쟁 | 발칸이라는 만화경 | 북부 야만족과 ‘루스’의 건국 | 루스가 기독교 세계의 일원이 되다 | 슬라브 세계의 각 방면의 관찰
제28장 인도 역사에 내재된 발전 로직
인도사의 어느 단계가 ‘고전 시대’에 해당할까? | 고전 산스크리트어의 황금시대 | 신 브라만교의 안정기 | 힌두교의 바크티화와 샤크티화 | 카스트 네트워크의 정밀화 | 카스트 제도 내용의 궤변 | 카스트화의 통제 불능 | 경전의 미궁 | ‘부다페스트식’ 인지 유형 | 역대 인도 역사의 사이비적 이미지 바로잡기 | 북부 변방과 힌두교의 탄트라화
제29장 인도 역사의 ‘중고화’
카나우지 제왕의 위업 | 라지푸트족의 굴기 | 힌두교가 광복한 북부 영토와 서부 땅 | 서북부 모퉁이에서 침투한 이슬람의 삼중 공세 | 석양의 불교국: 벵골국 | ‘제3의 물결’ 불교가 벵골에서 티베트로 전파되다 | 힌두교가 대 벵골을 ‘광복’하다 | 상좌부의 중심축: 스리랑카와 버마 | 인도와 ‘대인도 문화권’
제2권에 대한 안내
제17장 구대륙을 가로지른 문명의 사슬: 4대 제국과 실크로드
진(秦)과 대진(大秦) | 공화정의 짐을 짊어진 제정 | 한 나라에 체제와 주인이 각각 둘 | 진나라 군주제의 ‘혁명성’은 로마를 능가했을까? | 로마 제정 하에서의 시민권 확장 | 진나라의 중국 통일은 전제정치의 최고봉 | 진한 제국의 판도 | 최대치로 확장된 로마 제국 영토 | 중앙아시아의 헬레니즘 왕국 | 월지인과 스키타이인, 인도 파르티아인 | 서기 1~3세기의 쿠샨 제국 | 제2의 페르시아 제국: 파르티아 | 유라시아 대륙의 대동맥: 실크로드 | 실크로드가 만들어 낸 이름, China
제18장 미륵과 메시아: 세계적 구세주형 종교의 탄생
그리스 아시아 문명 | 헬레니즘의 통치자는 ‘구세주’ | 동방화인가? 그리스화인가? | 인도 그리스인의 조로아스터교화 및 불교화 | 인도 스키타이인의 종교 혼합 정책 | 쿠샨 왕조, 대승 불교학, 미륵교 | 미륵, 미트라(베다 시대), 미트라 | 그리스 로마 문명 | ‘메시아’를 향한 유대인의 열망 | 분노와 공의의 하나님이 인자의 하나님으로 | 기독교와 유대인의 이별 | 초대 기독교의 성경 제작 운동 | 그리스 로마 철학으로 도식화한 기독교 | ‘삼위일체설’의 지식 고고학 | 비의(秘儀) 형식을 차용한 기독교 | 로마 국교로 받아들여진 기독교 | 기독교, 그리고 기독교의 뿌리인 고대 유대 신앙
제19장 제국의 멸망: 흉노는 고대 세계의 장의사
내륙 아시아의 ‘흉노 시대’ | 중국의 ‘삼국시대’와 로마의 ‘삼국시대’ | 로마 제국의 중흥과 중화 제국의 성공 | 중화 제국보다 더욱 철저하게 흩어진 로마 제국 | 사산 제국과 굽타 제국의 근심거리 ‘흉노’ | 흉노는 고대 세계의 장의사였을까?
제20장 아프리카 고대사의 형태와 후기 고대사의 노선
가장 핵심적인 대륙이자 가장 오래된 인류 | 블랙 아프리카의 지리 형태와 역사 생태 | 종족과 어족 사이의 경쟁인가, 아니면 다원적 발전인가? | 나일강 중심의 ‘고대’ | 또 다른 나일강 고대 왕국 | 악숨 왕국 | 동아프리카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제21장 고대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트족
‘476년’이 갖는 역사적 의미 | 게르만족의 남쪽 이주설 | 로마의 고트 전선과 다뉴브 집단 | 적인가? 동지인가? 재앙의 씨앗인가? 나라의 기둥인가? | ‘로마적’ vs ‘고트적’ 개념의 구축 | 고트족에게 좋은 일만 하다 끝난 흉노 제국 | 동게르만족과 고대 로마가 함께 멸망하다 | 역사는 고트족에게 공정해야 한다
제22장 서로마의 유산은 누구에게로?
프랑크인의 등장 | 로마교황청으로 기운 프랑크족 | 로마교황청 대신 서북부를 수호한 아일랜드 성공회 | 유산된 원서지역 기독교 문명? | 지고지상 독보적 위치의 로마교황청 | ‘카롤링거와 교황청의 중심축’이 싹트다 | 샤를마뉴가 재건한 ‘서로마 제국’ | 소위 말하는 ‘카롤링거 문예 부흥’ | 서방 기독교 세계를 구축한 ‘라틴 공동체’ | 속도를 더해간 두 기독교 세계의 해산
제23장 끊임없이 변모했던 나라, 비잔틴
난공불락의 성, 콘스탄티노플 | 동쪽이 받쳐주니 서쪽이 무너지다 | 일신론 국교는 천하를 통일했나, 분열했나? |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중흥 | 아바르인과 랑고바르드인의 침입 | 발칸의 슬라브화 | 헤라클리우스의 중흥 | 비잔틴의 ‘탈 로마화’의 향방 | 제국에서 일방으로 축소되어도 여전히 짊어졌던 ‘제국’ 방어 임무 | 비잔틴의 중고화(中古化)? | 신규 이주민, 불가리아 | 이사우리아 왕조의 ‘문화 대혁명’ | 지중해 북부를 잃고 발칸을 광복시킨 비잔틴 | 비잔틴의 포교 공세 | 새옹이 얻은 말이 화근이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 최고조에 이른 ‘이이제이’ 정책 | 유라시아 최강국이 된 비잔틴 | 지는 해가 한없이 아름다울까?
제24장 아라비아인의 ‘다르 알 이슬람’
이슬람 굴기 이전의 아라비아인 | 아라비아반도의 바둑판 | 헤자즈 지구의 굴기 | 무함마드와 그의 포교 | 신흥종교에 남은 옛 종교의 흔적 | 이슬람의 지도권 다툼 | 최후의 계시 | 비잔틴 제국의 4분의 3을 집어삼킨 아라비아 | 아라비아인이 사산 제국을 전멸하다 | ‘정통 칼리프’ 시대의 폐막 | 제1차 이슬람 분쟁(the First Fitna) | 제2차 이슬람 분쟁(the Second Fitna) | 우마이야 대식 제국의 영토 확장 | 시아파의 계보와 갈래 | 우마이야 정권의 몰락 | 몇 가지 관점
제25장 이슬람 문명의 황금시대
크게 변화한 이슬람 제국의 형태 | 제국 서부의 균열 | 아바스 칼리프조의 전성기 | 과학연구의 불꽃이 된 ‘지혜의 집’ | 종교학 체계가 완비된 시기 | 한쪽만 살아남아야 했던 양대 황금시대 | 바그다드 중앙 정권의 흔들림에서 항복까지 | 당나라와 꽤 비슷한 붕괴 | 정권-종족-문화의 대대적인 교체 전야 | 이슬람 문명의 중앙집권화 | 이란 문예 부흥 | ‘범 이란문화권’의 마지막 형태가 된 돌궐 페르시아 공생체
제26장 서유럽 열국의 탄생
샤를마뉴 제국의 붕괴 | 마자르의 근심과 ‘도이치’의 탄생 | 교황청이 외면한 ‘신성’ 로마제국 | 산산이 조각 난 밀레니엄의 꿈, 로마의 혼이 끊기다 | 바이킹의 시대 | 바이킹족의 엣 기독교 문명과 그 종식 | ‘프랑스’의 조산을 초래한 ‘북부 야만족’의 재앙 | 사방에서 재난이 들이닥친 영국제도 | 잉글랜드의 열국 시대를 끝낸 북부 야만족 | ‘노르만인 정복’으로 가는 길 | 이탈리아 남단: 또 다른 ‘노르만 정복’ | 이베리아: 기독교의 반격
제27장 슬라브 세계의 형성
슬라브인의 역사적 배경 | 슬라브인의 원류에 얽힌 불가사의 | 갑작스럽게 등장한 기이한 현상 | ‘슬라브인’ 좋을 일만 한 아바르인 | 아바르인의 퇴장과 슬라브인의 등장 | ‘슬라브’ 국가로 변모한 불가리아 | ‘대 모라비아’의 불가사의 | 게르만 집단에 편입된 보헤미아, 이를 피한 폴란드 | ‘슬라브인 자체의 건국 역량 유무’에 관한 논쟁 | 발칸이라는 만화경 | 북부 야만족과 ‘루스’의 건국 | 루스가 기독교 세계의 일원이 되다 | 슬라브 세계의 각 방면의 관찰
제28장 인도 역사에 내재된 발전 로직
인도사의 어느 단계가 ‘고전 시대’에 해당할까? | 고전 산스크리트어의 황금시대 | 신 브라만교의 안정기 | 힌두교의 바크티화와 샤크티화 | 카스트 네트워크의 정밀화 | 카스트 제도 내용의 궤변 | 카스트화의 통제 불능 | 경전의 미궁 | ‘부다페스트식’ 인지 유형 | 역대 인도 역사의 사이비적 이미지 바로잡기 | 북부 변방과 힌두교의 탄트라화
제29장 인도 역사의 ‘중고화’
카나우지 제왕의 위업 | 라지푸트족의 굴기 | 힌두교가 광복한 북부 영토와 서부 땅 | 서북부 모퉁이에서 침투한 이슬람의 삼중 공세 | 석양의 불교국: 벵골국 | ‘제3의 물결’ 불교가 벵골에서 티베트로 전파되다 | 힌두교가 대 벵골을 ‘광복’하다 | 상좌부의 중심축: 스리랑카와 버마 | 인도와 ‘대인도 문화권’
출판사 리뷰
『신세계사 2』의 내용 소개
『신세계사』 시리즈(총 3권)의 두 번째 책인 『신세계사 2』는 1권에 이어 17장에서 29장까지, 총 1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7장 구대륙을 가로지른 문명 사슬: 4대 제국과 실크로드
고대 유라시아 대륙의 4대 제국, 진한제국, 쿠샨, 파르티아, 로마를 하나의 문명지대로 연결해 고대 세계의 최종적이면서도 최고의 골격으로 삼았다. 알렉산더가 개척한 헬레니즘이 이 문명에 끼친 상이한 영향과 그로 인해 달라진 정치체제를 비교해본다.
제18장 미륵과 메시아: 세계적 구세주형 종교의 탄생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은 헬레니즘을 중앙아시아까지 전파했다. 헬레니즘은 지중해에서 ‘그리스 로마 문명’을 위한 길을 닦았고, 페르시아에서 내륙 아시아 및 인도 일대에서 현지의 요소와 융합해 ‘그리스 아시아 문명’을 만들어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구세주론이 성행했고,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헬라화 된 정권은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의 영향을 융합해 원시불교를 미륵 숭배로 변모시켰다.
제19장 제국의 멸망: 흉노는 고대 세계의 장의사
4대 제국 문명지대의 해체와 고대 세계의 종식을 다루며 이 과정에서 흉노가 어떻게 장의사 역할을 했는지 논증한다. 4세기 말 흉노의 서부 이주가 유럽 민족의 대이동을 유발한 나비효과의 시작점이 되었고, 훗날 또 다른 이주를 유발하게 되는 고트인 또한 조직을 갖춘 알프스산 북부 대제국을 이루었다. 세계 역사에서 흉노의 행적이 묘연해진 것은 지금껏 역사에서 4대 제국 문명 사슬의 중간 지대를 소홀히 다뤘기 때문이다.
제20장 아프리카 고대사의 형태와 후기 고대사의 노선
북아프리카는 지중해의 일부분이지만 고대 이집트 역사의 전반부는 서남아시아 역사에 편입되는 요소가 다소 많았고 그리스와 로마에 정복된 뒤로는 지중해 역사로 이전되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줄곧 나일강 상류에서 아프리카 내륙에 이르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흐름은 누비아의 역사로 확대 발전되었다. 누비아에서 사하라 남부에 연접한 주랑走廊을 가로지르면 서아프리카에 이른다. 서아프리카 문명의 발전은 어쩌면 현지의 요인으로 말미암은 결과일 수 있다. 선사 시대 블랙 아프리카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어 인류의 탄생지가 될 수 있었지만 역사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 왕성했던 생명력은 아프리카를 바이러스 자생의 온상이 되게 했다. 지리적 구조 또한 역사 시대의 인류의 생존에는 극단적으로 불리한 요소가 되었다.
제21장 고대 세계에서 탈피하지 못한 고트족
이 장에서는 ‘게르만인이 로마를 멸망시킨 사건이 상고 시대에서 중고 시대로 넘어가는 분수령’이라는 잘못된 관점을 수정했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로마와 운명을 함께한 것은 고트족이었다. 제국 말기 역사의 ‘흉노라는 삽입곡’은 로마 변방의 우환이었던 고트족을 통일하여 로마에 위협을 가했다. 하지만 흉노제국이 붕괴하자 고트족 출신 집단이 서로마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으면서 ‘최후의 로마인’ 역할을 감당했고 이로써 서로마의 멸망을 476년까지 미룰 수 있었다.
고트족이 미래 유럽의 문을 연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건 고대 말기의 신학 논쟁에 지나치게 깊이 발을 들여놨기 때문이다. 그들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개종하기도 한 아리우스파를 신봉했지만,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아리우스파에 찬동했던 로마 황제 발렌스를 죽였는데, 그 바람에 니케아 신조 복권을 도모했던 테오도시우스 1세가 등극하였고, 결국에는 그의 신앙이 국교로 확정되었다. 이는 훗날 고트족이 로마에 입성한 뒤로도 로마인과 ‘정체성 충돌’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제22장 서로마의 유산은 누구에게로?
동게르만족(고트족)이 고대 로마와 함께 멸망한 이상 훗날 새로운 서유럽의 문을 여는 주인공은 서게르만족이 된다.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속속 라인강을 건너온 프랑크족은 신속하게 로마 교회로 개종한 뒤 기존 갈리아성의 로마 지주와 손잡고 날로 라틴화하였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뒤 남은 로마 국교(즉, 로마 교황청)는 ‘서로마 제국’을 부활시킬 필요가 생겼는데 그때 교황청의 눈에 들어온 것이 프랑크 왕국이었고 둘은 힘을 합쳐 새로운 중심축을 형성, 미래의 유럽을 탄생시킨 배아로 성장한다. 이 과정에서 영국 제도의 ‘원서遠西 기독교’는 교황청 대신 편서 지역 변두리에서 가업인 기독교를 수호하는 역할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황청과도 경쟁해야 하는 이중의 짐을 져야 했다.
제23장 끊임없이 변모했던 나라, 비잔틴
비잔틴은 오랜 기간 발칸과 소아시아라는 두 반도를 손에 넣기도 했지만, 중심지로부터 해안으로 밀려나고, 다시 중심지를 탈환하지만 이내 잃고 마는 운명을 맞이해야 했다. 그리고 후반부로 가서는 십자군과 오스만에 의해 분할되는 등 그 형태가 만화경처럼 끊임없이 변하였다. 이는 세계 역사상 보기 드문 방국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고대 로마 말기 기독교의 국교화는 사상 통일을 위한 것이었지만 오히려 분열을 조장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 교회의 삼위일체론과 동방의 기독교 단성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동방을 이슬람의 손에 빼앗기고 만다. 신의 완전성은 훗날 중앙에서 성상 파괴 운동으로 변했다. 삼위일체론을 적극 지지했던 서방 라틴 교회는 끝내 사이가 틀어졌다. 9세기, 비잔틴은 슬라브에 동화한 그리스반도 중심부를 수복하였고 그 포교 공세는 대 모라비아를 향했다. 훗날 비록 라틴 교회에 패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 낸 슬라브 교리로 불가리아와 루스를 얻을 수 있었다.
제24장 아라비아인의 ‘다르 알 이슬람’
고대 로마의 ‘3세기 위기’ 때는 삼국이 대치하는 정세가 펼쳐지는데 그중 하나는 아라비아인에 의해 세워졌다. ‘고대’가 종식된 후 7세기에 이슬람이 권토중래하면서 아라비아인은 비잔틴의 4분의 3을 점령하고 전체 사산 제국을 병탄한 뒤 페르시아만에서 대서양에 이르는 칼리프(선지자의 대리인) 정권을 세웠다. 초기에는 선지자의 후예들, 즉 지도자 계층에서 배제된 이들이 이맘 전승의 지하 정권인 시아파를 형성하여 수니파로 불리는 칼리프 정권과 대립하였다. ‘다르 알 이슬람(이슬람의 땅)’의 추가 확장은 비잔틴과 프랑크 왕국, 토번 제국, 하자르 칸국, 북인도의 라지푸트족에 의해 가로막혔다.
제25장 이슬람 문명의 황금시대
아바스 정권 초기, 문화적 전성기로 접어든 대식 제국은 수도 바그다드에 과학연구 센터인 ‘지혜의 집’을 세워 중고시대 최고의 과학연구 혁명을 일으켰다. 그것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헬레니즘의 과학 유산을 종합하고 인도의 수학과 중국의 제지술을 받아들였다. 해당 기간에는 또한 이슬람 성훈학과 성률파가 절정기를 맞이하였는데 종교와 과학이라는 이 두 개의 황금시대는 둘 중 하나만 살아남게 된다. 종교가 과학을 억눌렀기 때문이다. 당시 바그다드 중앙이 쇠퇴하면서 과학연구와 문예 창조의 중심이 코르도바로부터 카이로, 트랜스옥시아나 일대로 확대되었다. 후자는 특히 ‘이란 문예 부흥’의 장소가 되었고 이는 오랜 기간 아라비아 패권에 억눌렸던 이란 문화의 부활을 의미했다. 대식의 쇠락은 또 다른 의미에서 다르 알 이슬람이 대식 제국과 지리적 경계를 공유했던 데서 벗어나 밖으로는 유라시아 대초원과 남아시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까지 전파된 계기가 되었다.
제26장 서유럽 열국의 탄생
샤를마뉴 제국은 동과 서의 두 부분으로 분열되면서 각각 훗날의 독일과 프랑스의 배아가 된다. 제국의 쇠락기에 유럽은 삼면이 동방의 마자르와 북방의 바이킹, 남방의 무어인(무슬림)이라는 적에 둘러싸이지만, 샤를마뉴의 후예는 이들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 유럽은 새로운 지도자를 기다렸고 시국은 새로운 유럽의 탄생을 부르짖었다.
10세기에는 동프랑크 영토의 오토 대제가 최종적으로 마자르라는 위협을 해결하고 새로운 신성로마 황제로 등극한다. 그러나 이미 부패의 온상이 되어버린 로마 교황청으로부터는 새로운 보편 세계적 제국 중건에 필요한 협조를 얻어낼 수 없었다. 해당 대업은 물론 도이치의 탄생을 촉진하였지만 독일과 이탈리아 두 땅은 오랫동안 응집되지 못했다.
서프랑크의 땅에서는 바이킹의 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한 파리 백작의 무리가 별도로 프랑스 왕통을 세웠다. 바이킹의 위협으로 잉글랜드 7국은 하나의 나라로 합병되었지만 노르망디에 거주하던 바이킹이 훗날 해협을 건너와 이 나라를 수중에 넣는다. 이는 오늘날 영국의 시초가 되었지만 동시에 영국과 프랑스 간 오랜 갈등이 잉태된 순간이었다.
또 다른 ‘노르만의 정복’은 이탈리아반도 남부에서 발생했다. 그들은 무어인을 쫓아내고 더 나아가 비잔틴을 공격했다. 비교적 효과가 있었던 건국 운동은 이베리아반도 기독교의 ‘광복 운동Reconquista’으로 남부 무슬림의 땅을 잠식하였으며 오늘날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나라를 구축하였다.
제27장 슬라브 세계의 형성
슬라브인은 6세기에 비잔틴의 시야에 등장하여 아바르인의 뒤를 이어 변방의 우환이 되었다. 아바르인과 슬라브인의 관계는 흡사 흉노와 고트족 사이의 관계와도 같아, 아바르인은 그들 아래에 있던 슬라브인을 위한 길을 닦는 역할만 하고는 정작 자기 자신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아바르인이라는 조류가 빠져나가자 동유럽 전체에는 슬라브라는 개펄이 맨몸을 드러내었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세계사적으로도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 근원은 명확하지 않다. 슬라브인의 초창기 역사는 그야말로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다. 초기 대국인 ‘대모라비아’의 지리적 위치도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헝가리인들은 슬라브인을 서와 남의 두 지파로 나누었다. 서쪽 지파인 보헤미아는 신성로마제국(게르만계)으로 흘러 들어갔고 폴란드는 직접 로마 교황청을 통해 기독교로 개종하여 게르만과 얽히는 것을 피했다. 남부 지파는 그리스반도로 들어가 비잔틴화하였다.
슬라브 역사는 그들이 나라를 건설하는 것에 소질이 없었는가 하는 문제, 즉 오늘날 러시아의 원류가 동슬라브인이 북유럽인(바이킹)을 초빙하여 그들을 위해 나라를 세우게 했는지에 관한 문제를 포함한다.
제28장 인도 역사에 내재된 발전 로직
4대 제국이 병립하는 시기에 이르면 쿠샨은 내륙 아시아와 북인도를 아우르는 비非 본토 왕조(비 전형적)가 되어 불교를 대승 불교의 방향으로 바꾸었다. 그 속에는 헬레니즘과 이란의 요소가 복잡다단하게 섞여 있다. 불교는 점차 탈인도화하여 실크로드의 종교가 되었다. 쿠샨 왕조가 불교를 숭상하기 전, 불교는 이미 마우리아 왕조의 국교가 되어 마가다 문화의 토양을 조성하였다. 그것의 쇠락 추세는 쿠샨의 뒤를 이어 굴기한 굽타 왕조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당시 범梵(브라만) 문화는 고대 베다 신앙과 함께 권토중래하여 힌두교의 ‘고전 시대’를 이루었지만 이는 오히려 양대 서사시와 『푸라나』로 재편된 신 브라만교(힌두교)였다. 그것은 이 전적들을 통해 새로운 구주救主를발전시켜 경건 운동의 숭배 대상으로 삼았으며 이로써 불교와 자이나교에 맞섰다. 신 브라만교는 또한 자이나교와 불교의 채식 신앙을 흡수하였지만, 채식은 오히려 카스트 계급의 높낮이를 정하는 기준이 되고 말았다.
힌두교는 남방에서 세력을 얻었고 비非 아리안 여신 숭배를 받아들여 육체 혐오를 극단화한 고대 인도 신앙을 샤크티 숭배로 전환시켜 결국 더러운 것을 숭배하는 밀교로 변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더러운 것에 대한 공포증을 기초로 일어난 기존의 브라만 신앙과 ‘힌두교’ 안에서 공존하였다.
제29장 인도 역사의 ‘중고화’
기존의 인도 역사에 대한 해석을 뒤집었다. 불교는 힌두교에 대한 혁명이 아니고 후발주자인 힌두교에 의해 국교의 지위가 빼앗긴 경우다. 지역적으로는 북인도 평원의 ‘중국’이 끝내 동방의 ‘대 마가다(불교의 탄생지)’를 압도한 셈이다. 이러한 추세는 후 굽타 시대의 카나우지 제업帝業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와 평행적으로 ‘중국’ 지역의 브라만 패권이 공고해지고 전에는 도달하지 못했던 지역까지 처음으로 진군하게 되었다. 이러한 발전을 가능하게 한 것은 고대 ‘크샤트리아’가 중고시대의 라지푸트족 신분에서 ‘재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라지푸트의 굴기는 우선 ‘백흉노’의 침입과 관련되어 있다. ‘흉노 시대’가 문명지대에 남긴 흔적은 획일화한 잣대로 세계사의 구간을 나누게 했다. 그다음은 이슬람의 침입이다. 이슬람은 ‘세계 중고사’의 현상이므로 인도에서는 ‘중고 전기’를 대체한 라지푸트족의 굴기가 ‘중고 후기’에 해당한다. 세 번째는 불교 밀승이 토번으로 유입되어 오늘날 티베트 문명의 바탕이 된 부분이다. 토번 제국의 굴기는 이슬람 제국과 마찬가지로 대략 세계사의 중고 시기에 해당한다. 네 번째로는 상좌부 불교가 스리랑카에서 인도차이나반도로 유입되어 버마를 중심으로 점차 해당 반도의 문화적 토양(베트남 제외)이 되었다는 점이다. 버마인이 인도차이나반도로 남하한 것은 서기 1000년 전후의 일이다. 그 밖에 세계사가 중고시대에 이르면 비로소 남양南洋의 ‘대인도 문화권’이 출현하게 된다.
『신세계사』 시리즈(총 3권)의 두 번째 책인 『신세계사 2』는 1권에 이어 17장에서 29장까지, 총 1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7장 구대륙을 가로지른 문명 사슬: 4대 제국과 실크로드
고대 유라시아 대륙의 4대 제국, 진한제국, 쿠샨, 파르티아, 로마를 하나의 문명지대로 연결해 고대 세계의 최종적이면서도 최고의 골격으로 삼았다. 알렉산더가 개척한 헬레니즘이 이 문명에 끼친 상이한 영향과 그로 인해 달라진 정치체제를 비교해본다.
제18장 미륵과 메시아: 세계적 구세주형 종교의 탄생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은 헬레니즘을 중앙아시아까지 전파했다. 헬레니즘은 지중해에서 ‘그리스 로마 문명’을 위한 길을 닦았고, 페르시아에서 내륙 아시아 및 인도 일대에서 현지의 요소와 융합해 ‘그리스 아시아 문명’을 만들어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구세주론이 성행했고,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헬라화 된 정권은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의 영향을 융합해 원시불교를 미륵 숭배로 변모시켰다.
제19장 제국의 멸망: 흉노는 고대 세계의 장의사
4대 제국 문명지대의 해체와 고대 세계의 종식을 다루며 이 과정에서 흉노가 어떻게 장의사 역할을 했는지 논증한다. 4세기 말 흉노의 서부 이주가 유럽 민족의 대이동을 유발한 나비효과의 시작점이 되었고, 훗날 또 다른 이주를 유발하게 되는 고트인 또한 조직을 갖춘 알프스산 북부 대제국을 이루었다. 세계 역사에서 흉노의 행적이 묘연해진 것은 지금껏 역사에서 4대 제국 문명 사슬의 중간 지대를 소홀히 다뤘기 때문이다.
제20장 아프리카 고대사의 형태와 후기 고대사의 노선
북아프리카는 지중해의 일부분이지만 고대 이집트 역사의 전반부는 서남아시아 역사에 편입되는 요소가 다소 많았고 그리스와 로마에 정복된 뒤로는 지중해 역사로 이전되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줄곧 나일강 상류에서 아프리카 내륙에 이르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흐름은 누비아의 역사로 확대 발전되었다. 누비아에서 사하라 남부에 연접한 주랑走廊을 가로지르면 서아프리카에 이른다. 서아프리카 문명의 발전은 어쩌면 현지의 요인으로 말미암은 결과일 수 있다. 선사 시대 블랙 아프리카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어 인류의 탄생지가 될 수 있었지만 역사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 왕성했던 생명력은 아프리카를 바이러스 자생의 온상이 되게 했다. 지리적 구조 또한 역사 시대의 인류의 생존에는 극단적으로 불리한 요소가 되었다.
제21장 고대 세계에서 탈피하지 못한 고트족
이 장에서는 ‘게르만인이 로마를 멸망시킨 사건이 상고 시대에서 중고 시대로 넘어가는 분수령’이라는 잘못된 관점을 수정했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로마와 운명을 함께한 것은 고트족이었다. 제국 말기 역사의 ‘흉노라는 삽입곡’은 로마 변방의 우환이었던 고트족을 통일하여 로마에 위협을 가했다. 하지만 흉노제국이 붕괴하자 고트족 출신 집단이 서로마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으면서 ‘최후의 로마인’ 역할을 감당했고 이로써 서로마의 멸망을 476년까지 미룰 수 있었다.
고트족이 미래 유럽의 문을 연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건 고대 말기의 신학 논쟁에 지나치게 깊이 발을 들여놨기 때문이다. 그들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개종하기도 한 아리우스파를 신봉했지만,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아리우스파에 찬동했던 로마 황제 발렌스를 죽였는데, 그 바람에 니케아 신조 복권을 도모했던 테오도시우스 1세가 등극하였고, 결국에는 그의 신앙이 국교로 확정되었다. 이는 훗날 고트족이 로마에 입성한 뒤로도 로마인과 ‘정체성 충돌’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제22장 서로마의 유산은 누구에게로?
동게르만족(고트족)이 고대 로마와 함께 멸망한 이상 훗날 새로운 서유럽의 문을 여는 주인공은 서게르만족이 된다.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속속 라인강을 건너온 프랑크족은 신속하게 로마 교회로 개종한 뒤 기존 갈리아성의 로마 지주와 손잡고 날로 라틴화하였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뒤 남은 로마 국교(즉, 로마 교황청)는 ‘서로마 제국’을 부활시킬 필요가 생겼는데 그때 교황청의 눈에 들어온 것이 프랑크 왕국이었고 둘은 힘을 합쳐 새로운 중심축을 형성, 미래의 유럽을 탄생시킨 배아로 성장한다. 이 과정에서 영국 제도의 ‘원서遠西 기독교’는 교황청 대신 편서 지역 변두리에서 가업인 기독교를 수호하는 역할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황청과도 경쟁해야 하는 이중의 짐을 져야 했다.
제23장 끊임없이 변모했던 나라, 비잔틴
비잔틴은 오랜 기간 발칸과 소아시아라는 두 반도를 손에 넣기도 했지만, 중심지로부터 해안으로 밀려나고, 다시 중심지를 탈환하지만 이내 잃고 마는 운명을 맞이해야 했다. 그리고 후반부로 가서는 십자군과 오스만에 의해 분할되는 등 그 형태가 만화경처럼 끊임없이 변하였다. 이는 세계 역사상 보기 드문 방국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고대 로마 말기 기독교의 국교화는 사상 통일을 위한 것이었지만 오히려 분열을 조장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 교회의 삼위일체론과 동방의 기독교 단성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동방을 이슬람의 손에 빼앗기고 만다. 신의 완전성은 훗날 중앙에서 성상 파괴 운동으로 변했다. 삼위일체론을 적극 지지했던 서방 라틴 교회는 끝내 사이가 틀어졌다. 9세기, 비잔틴은 슬라브에 동화한 그리스반도 중심부를 수복하였고 그 포교 공세는 대 모라비아를 향했다. 훗날 비록 라틴 교회에 패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 낸 슬라브 교리로 불가리아와 루스를 얻을 수 있었다.
제24장 아라비아인의 ‘다르 알 이슬람’
고대 로마의 ‘3세기 위기’ 때는 삼국이 대치하는 정세가 펼쳐지는데 그중 하나는 아라비아인에 의해 세워졌다. ‘고대’가 종식된 후 7세기에 이슬람이 권토중래하면서 아라비아인은 비잔틴의 4분의 3을 점령하고 전체 사산 제국을 병탄한 뒤 페르시아만에서 대서양에 이르는 칼리프(선지자의 대리인) 정권을 세웠다. 초기에는 선지자의 후예들, 즉 지도자 계층에서 배제된 이들이 이맘 전승의 지하 정권인 시아파를 형성하여 수니파로 불리는 칼리프 정권과 대립하였다. ‘다르 알 이슬람(이슬람의 땅)’의 추가 확장은 비잔틴과 프랑크 왕국, 토번 제국, 하자르 칸국, 북인도의 라지푸트족에 의해 가로막혔다.
제25장 이슬람 문명의 황금시대
아바스 정권 초기, 문화적 전성기로 접어든 대식 제국은 수도 바그다드에 과학연구 센터인 ‘지혜의 집’을 세워 중고시대 최고의 과학연구 혁명을 일으켰다. 그것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헬레니즘의 과학 유산을 종합하고 인도의 수학과 중국의 제지술을 받아들였다. 해당 기간에는 또한 이슬람 성훈학과 성률파가 절정기를 맞이하였는데 종교와 과학이라는 이 두 개의 황금시대는 둘 중 하나만 살아남게 된다. 종교가 과학을 억눌렀기 때문이다. 당시 바그다드 중앙이 쇠퇴하면서 과학연구와 문예 창조의 중심이 코르도바로부터 카이로, 트랜스옥시아나 일대로 확대되었다. 후자는 특히 ‘이란 문예 부흥’의 장소가 되었고 이는 오랜 기간 아라비아 패권에 억눌렸던 이란 문화의 부활을 의미했다. 대식의 쇠락은 또 다른 의미에서 다르 알 이슬람이 대식 제국과 지리적 경계를 공유했던 데서 벗어나 밖으로는 유라시아 대초원과 남아시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까지 전파된 계기가 되었다.
제26장 서유럽 열국의 탄생
샤를마뉴 제국은 동과 서의 두 부분으로 분열되면서 각각 훗날의 독일과 프랑스의 배아가 된다. 제국의 쇠락기에 유럽은 삼면이 동방의 마자르와 북방의 바이킹, 남방의 무어인(무슬림)이라는 적에 둘러싸이지만, 샤를마뉴의 후예는 이들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 유럽은 새로운 지도자를 기다렸고 시국은 새로운 유럽의 탄생을 부르짖었다.
10세기에는 동프랑크 영토의 오토 대제가 최종적으로 마자르라는 위협을 해결하고 새로운 신성로마 황제로 등극한다. 그러나 이미 부패의 온상이 되어버린 로마 교황청으로부터는 새로운 보편 세계적 제국 중건에 필요한 협조를 얻어낼 수 없었다. 해당 대업은 물론 도이치의 탄생을 촉진하였지만 독일과 이탈리아 두 땅은 오랫동안 응집되지 못했다.
서프랑크의 땅에서는 바이킹의 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한 파리 백작의 무리가 별도로 프랑스 왕통을 세웠다. 바이킹의 위협으로 잉글랜드 7국은 하나의 나라로 합병되었지만 노르망디에 거주하던 바이킹이 훗날 해협을 건너와 이 나라를 수중에 넣는다. 이는 오늘날 영국의 시초가 되었지만 동시에 영국과 프랑스 간 오랜 갈등이 잉태된 순간이었다.
또 다른 ‘노르만의 정복’은 이탈리아반도 남부에서 발생했다. 그들은 무어인을 쫓아내고 더 나아가 비잔틴을 공격했다. 비교적 효과가 있었던 건국 운동은 이베리아반도 기독교의 ‘광복 운동Reconquista’으로 남부 무슬림의 땅을 잠식하였으며 오늘날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나라를 구축하였다.
제27장 슬라브 세계의 형성
슬라브인은 6세기에 비잔틴의 시야에 등장하여 아바르인의 뒤를 이어 변방의 우환이 되었다. 아바르인과 슬라브인의 관계는 흡사 흉노와 고트족 사이의 관계와도 같아, 아바르인은 그들 아래에 있던 슬라브인을 위한 길을 닦는 역할만 하고는 정작 자기 자신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아바르인이라는 조류가 빠져나가자 동유럽 전체에는 슬라브라는 개펄이 맨몸을 드러내었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세계사적으로도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 근원은 명확하지 않다. 슬라브인의 초창기 역사는 그야말로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다. 초기 대국인 ‘대모라비아’의 지리적 위치도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헝가리인들은 슬라브인을 서와 남의 두 지파로 나누었다. 서쪽 지파인 보헤미아는 신성로마제국(게르만계)으로 흘러 들어갔고 폴란드는 직접 로마 교황청을 통해 기독교로 개종하여 게르만과 얽히는 것을 피했다. 남부 지파는 그리스반도로 들어가 비잔틴화하였다.
슬라브 역사는 그들이 나라를 건설하는 것에 소질이 없었는가 하는 문제, 즉 오늘날 러시아의 원류가 동슬라브인이 북유럽인(바이킹)을 초빙하여 그들을 위해 나라를 세우게 했는지에 관한 문제를 포함한다.
제28장 인도 역사에 내재된 발전 로직
4대 제국이 병립하는 시기에 이르면 쿠샨은 내륙 아시아와 북인도를 아우르는 비非 본토 왕조(비 전형적)가 되어 불교를 대승 불교의 방향으로 바꾸었다. 그 속에는 헬레니즘과 이란의 요소가 복잡다단하게 섞여 있다. 불교는 점차 탈인도화하여 실크로드의 종교가 되었다. 쿠샨 왕조가 불교를 숭상하기 전, 불교는 이미 마우리아 왕조의 국교가 되어 마가다 문화의 토양을 조성하였다. 그것의 쇠락 추세는 쿠샨의 뒤를 이어 굴기한 굽타 왕조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당시 범梵(브라만) 문화는 고대 베다 신앙과 함께 권토중래하여 힌두교의 ‘고전 시대’를 이루었지만 이는 오히려 양대 서사시와 『푸라나』로 재편된 신 브라만교(힌두교)였다. 그것은 이 전적들을 통해 새로운 구주救主를발전시켜 경건 운동의 숭배 대상으로 삼았으며 이로써 불교와 자이나교에 맞섰다. 신 브라만교는 또한 자이나교와 불교의 채식 신앙을 흡수하였지만, 채식은 오히려 카스트 계급의 높낮이를 정하는 기준이 되고 말았다.
힌두교는 남방에서 세력을 얻었고 비非 아리안 여신 숭배를 받아들여 육체 혐오를 극단화한 고대 인도 신앙을 샤크티 숭배로 전환시켜 결국 더러운 것을 숭배하는 밀교로 변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더러운 것에 대한 공포증을 기초로 일어난 기존의 브라만 신앙과 ‘힌두교’ 안에서 공존하였다.
제29장 인도 역사의 ‘중고화’
기존의 인도 역사에 대한 해석을 뒤집었다. 불교는 힌두교에 대한 혁명이 아니고 후발주자인 힌두교에 의해 국교의 지위가 빼앗긴 경우다. 지역적으로는 북인도 평원의 ‘중국’이 끝내 동방의 ‘대 마가다(불교의 탄생지)’를 압도한 셈이다. 이러한 추세는 후 굽타 시대의 카나우지 제업帝業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와 평행적으로 ‘중국’ 지역의 브라만 패권이 공고해지고 전에는 도달하지 못했던 지역까지 처음으로 진군하게 되었다. 이러한 발전을 가능하게 한 것은 고대 ‘크샤트리아’가 중고시대의 라지푸트족 신분에서 ‘재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라지푸트의 굴기는 우선 ‘백흉노’의 침입과 관련되어 있다. ‘흉노 시대’가 문명지대에 남긴 흔적은 획일화한 잣대로 세계사의 구간을 나누게 했다. 그다음은 이슬람의 침입이다. 이슬람은 ‘세계 중고사’의 현상이므로 인도에서는 ‘중고 전기’를 대체한 라지푸트족의 굴기가 ‘중고 후기’에 해당한다. 세 번째는 불교 밀승이 토번으로 유입되어 오늘날 티베트 문명의 바탕이 된 부분이다. 토번 제국의 굴기는 이슬람 제국과 마찬가지로 대략 세계사의 중고 시기에 해당한다. 네 번째로는 상좌부 불교가 스리랑카에서 인도차이나반도로 유입되어 버마를 중심으로 점차 해당 반도의 문화적 토양(베트남 제외)이 되었다는 점이다. 버마인이 인도차이나반도로 남하한 것은 서기 1000년 전후의 일이다. 그 밖에 세계사가 중고시대에 이르면 비로소 남양南洋의 ‘대인도 문화권’이 출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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