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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사상'적 측면에서 일본 우익을 연구한 첫 성과물로, 좌익과 우익의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우익'을 '사상'적 측면에서 독립된 연구대상으로 취급한 연구서이다. 일본 ‘우익사상’의 성립과 전개, 그리고 종언까지의 역사를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가 논의 대상으로 삼는 '우익'은 이권을 노려서 보수세력의 앞잡이가 된 우익이나 정치결사를 표방하는 폭력단이 아닌, ‘우익사상’의 본래적인 뜻이다. 일본에 우익사상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이유를 찾아 메이지 정부에 대한 바대세력이 우와 좌로 갈라서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 아직 우도 좌도 아닌 반체제 사상들의 카오스 속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던 갖가지 엄청난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제1부 「사상으로서의 우익」에서는 근대 일본의 권력구조를 우와 좌로 구분하는 대신, 우익과 좌익을 적당히 이용하면서 권력을 좌지우지해온 리버럴을 중심에 놓은 구도를 그려 그 역학을 선명히 해부하고, 제2부에는 다양한 양상을 보인 우익사상에 관한 개별적인 연구를, 제3부는 한국에서도 관심이 높은 ‘만주국’의 성립과 우익사상의 관련을 고찰한 글을 모았다. 제4부는 1990년대의 사회상황을 관찰하면서 “우익은 이제 존재의의를 잃어버렸다”고 주장한다. 일본 우익사상에 대한 연구는 일본의 내셔널리즘와 근현대사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연구가 될 것이다.
제1부 「사상으로서의 우익」에서는 근대 일본의 권력구조를 우와 좌로 구분하는 대신, 우익과 좌익을 적당히 이용하면서 권력을 좌지우지해온 리버럴을 중심에 놓은 구도를 그려 그 역학을 선명히 해부하고, 제2부에는 다양한 양상을 보인 우익사상에 관한 개별적인 연구를, 제3부는 한국에서도 관심이 높은 ‘만주국’의 성립과 우익사상의 관련을 고찰한 글을 모았다. 제4부는 1990년대의 사회상황을 관찰하면서 “우익은 이제 존재의의를 잃어버렸다”고 주장한다. 일본 우익사상에 대한 연구는 일본의 내셔널리즘와 근현대사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연구가 될 것이다.
목차
한국어판 출간에 부쳐
제1부 사상으로서의 우익
서문
제1장 우익이란 무엇인가
제2장 우익의 성립과 그 이후
제3장 우익의 사상
1. 사생일여 | 2. 낭만주의 | 3. 농본주의 | 4. 천황론 | 5. 제2유신론 | 6. 내셔널리즘 | 7. 아시아주의
제2부 우익의 논리와 활동
제1장 신우익과 신좌익의 역전현상
제2장 국가개조운동의 성립?노장회에서 유존사로
제3장 흑룡회와 사회민주당의 분립
제4장 우익사상 연구의 갈림길
제5장 근대 일본의 흑막풍토
제6장 내셔널리즘 재평가의 흐름
제3부 일본 우익과 만주 문제
제1장 일본 농본주의와 대륙?가토 간지를 둘러싸고
제2장 만주국의 건국과 그 사상적 기저
제3장 만철 조사부론
제4장 미쓰카와 가메타로와 삼국간섭
제4부 우익의 종언
제1장 기리야마 가사네의 『파르티잔 전설』을 둘러싸고
제2장 “우익은 끝났다”는 이야기
제3장 스즈키 구니오의 『탈우익선언』을 둘러싸고
저자 후기
옮긴이의 말
최초 수록 지면
찾아보기
제1부 사상으로서의 우익
서문
제1장 우익이란 무엇인가
제2장 우익의 성립과 그 이후
제3장 우익의 사상
1. 사생일여 | 2. 낭만주의 | 3. 농본주의 | 4. 천황론 | 5. 제2유신론 | 6. 내셔널리즘 | 7. 아시아주의
제2부 우익의 논리와 활동
제1장 신우익과 신좌익의 역전현상
제2장 국가개조운동의 성립?노장회에서 유존사로
제3장 흑룡회와 사회민주당의 분립
제4장 우익사상 연구의 갈림길
제5장 근대 일본의 흑막풍토
제6장 내셔널리즘 재평가의 흐름
제3부 일본 우익과 만주 문제
제1장 일본 농본주의와 대륙?가토 간지를 둘러싸고
제2장 만주국의 건국과 그 사상적 기저
제3장 만철 조사부론
제4장 미쓰카와 가메타로와 삼국간섭
제4부 우익의 종언
제1장 기리야마 가사네의 『파르티잔 전설』을 둘러싸고
제2장 “우익은 끝났다”는 이야기
제3장 스즈키 구니오의 『탈우익선언』을 둘러싸고
저자 후기
옮긴이의 말
최초 수록 지면
찾아보기
책 속으로
우익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본을 지배했다는 설이 있다. 생각건대 이는 전후 민주주의가 창조한 신화다. 그것이 신화인 까닭은, 좌익이 전후 일본을 지배했다는 언설을 대치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좌익은 전후 일본을 지배하지는 않았다. 전후 일본의 지배자는 진주군 및 진주군과 결탁한 리버럴liberal들이었으며, 그들은 진주군과 손을 잡음으로써 처음은 민주화, 후에는 우경화를 추진했다. 좌익은 그 출발점에서 리버럴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다. 〔……〕 극단적으로 말하면, 근대 일본의 정치란 좌우 양익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노릇이었다. 리버럴은 때로는 극우를 잘라버리면서 오른쪽으로 다가섰고, 때로는 극좌를 잘라버리면서 왼쪽에 동조해서 권력을 유지해왔다. 그들은 그 균형감각으로 인해 계속 지배계급이 되어왔다. 그들은 좌우 양익의 틈새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문명개화의 논리, 바꿔 말하면 근대화─자본주의화, 중앙집권화, 탈아화(脫亞化), 합리주의화─를 밀고 나갔다.
리버럴이 틈새에 낀 좌우 양익이라는 구도는, 그러나 좌우익의 논리를 약간 벗어날 것이다. ‘좌익’ ‘우익’이라는 말은 프랑스혁명 후의 의회에서 의장의 왼쪽 자리를 급진파 자코뱅당이 차지하고, 오른쪽 자리를 보수파가 차지한 것에서 유래했다. 그 후 급진파 자코뱅당의 계보를 잇는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좌익이 되고 이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우익이 되었다. 그렇다면 보수파와 우익은 거의 동의어가 될 것이며 리버럴=보수파를 사이에 낀 좌익과 우익이라는 구도는 당연히 성립될 수 없다.
그런데 일본에서 보수파는 꼭 우익과 동의어가 아니었다. 보수파는 리버럴이었고 리버럴들은 좌우익을 거의 같은 거리에 두었는데, 그것은 일본이 선진자본주의 열강 밑에서 늦게 근대화를 추진해야 했다는 특수사정 때문이었다. 즉, 근대화론자인 리버럴이 근대 일본의 지배계급이 되는 것을, 이 특수사정이 요청한 것이다. 그런고로 근대화 노선을 밀고 나가는 메이지(明治) 국가체제에 대한 반대자가 두 방향으로 나뉘게 되었다. 대충 말하자면 ‘민족’의 입장에서 근대화에 반대하는 우익과, ‘계급’의 입장에서 반대하는 좌익이 그 두 방향이다.
물론 우익과 좌익이 각각 발생한 경위를 살펴보면 우익의 경우에는 ‘민족’의 입장보다 먼저 ‘국권’의 입장이 있고, 좌익의 경우 ‘계급’의 입장보다 먼저 ‘민권’의 입장이 있다고 하는 게 적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불완전하나마 네이션 스테이트(근대국가)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국가의 독립을 주장하는 국권론자와 개인의 독립을 주장하는 민권론자는 다 근대국가의 이데올로기를 나눠 가진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아직 메이지국가의 반체제파가 아니라 메이지 국가체제의 보완자(補完者)에 지나지 않았다. --- pp.16-18, 제1부 제1장 우익이란 무엇인가
우익의 낭만주의는 좌익의 리얼리즘과 대항관계에 있었는데, 그렇다면 우익에 있어서 좌익의 반(反)자본주의, 즉 사회주의에 해당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꼭 있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없으면 우익사상은 자본주의 옹호로 간주되어버릴 것이며, 실제로 체제에 편입된 우익은 자본가계급의 앞잡이로 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익에도 반자본주의사상이 있었다. 농본주의가 그것이다. 반배금주의(反拜金主義)라는 유치한 말도 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안 될 것이다. 혁명사상으로서의 내용을 갖추고 있는 것은 곤도 세이쿄(權藤成卿, 1868~1936)와 다치바나 고자부로(橘孝三郞, 1893~1974)의 농본주의이며, 그들 다음가는 사람으로 나카자토 가이잔(中里介山, 1885~1944), 시모나카 야사부로, 니시다 덴코(西田天香, 1872~1968)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반자본주의사상이 왜 농본주의의 형태를 취해야 했을까. 그것은 일본의 근대화가 공업화를 위한 노동력으로 농민을 농촌에서 흡수하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이다. 농촌은 항상 피폐하고 도쿄는 자본주의의 도읍으로서 농촌을 착취하면서 불건전하게 비대해졌다. --- pp.64-65, 제1부 제3장 우익의 사상
일본 내셔널리즘이 구미 선진자본주의 열강의 압박 밑에서 저항으로 성립한 사상이었던 것처럼 아시아에서도 내셔널리즘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때 메이지유신으로 겨우 식민지화를 면한 일본 사람들이 그 후에도 여전히 식민지 상태에 놓여 있거나 식민지화되려고 했던 아시아의 내셔널리즘운동에 동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니, 식민지화되는 것에 대한 위기감은 일본에도 오랫동안 남아 있었으니 이것을 동정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일본이 선진자본주의 열강의 위협에서 완전히 탈각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는 구미를 모방하면서 탈아화(脫亞化)하는 것쳀었지만, 그것은 내셔널리스트=우익이 채택할 길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익은 또 하나의 길, 즉 같은 상태에 놓여 있는 아시아와 연대하는 길을 택해야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동정 때문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아시아와 연대하게 된 것이다. 〔……〕 어쨌든 아시아주의는 여기에서 성립된다. 이것은 내셔널리즘과 같은 사상의 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아시아주의는 당연한 것처럼 우익을 특징짓는 사상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화, 즉 탈아화가 진행됨에 따라 우익의 내셔널리즘과 아시아주의 사이에 균열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시아의 내셔널리즘 운동이 타도의 대상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포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의 근대화가 선진자본주의 열강의 아시아 침략을 모방하는 것이었으니만큼 당연한 사태였으며 이 시점에서 아시아의 부흥, 그리고 이를 위해 연대를 바라는 아시아주의와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모순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때 우익은 아시아주의를 포기했다. 〔……〕 하지만 우익은 아시아주의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시아주의를 유지하는 척하면서 침략적 일본에 저항하지 않는 아시아를 찾아 손을 잡았다. 이것은 아시아주의의 타락이지만, 그것이 타락이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아시아주의자를 소외해온 지배계급이 기꺼이 아시아주의자를 환영하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대동아공영권(1940)과 대동아문학자대회(1942)가 그 시늉의 전형이다. --- pp.87-89, 제1부 제3장 우익의 사상
흑룡회와 사회민주당은 모두 메이지 34년, 즉 20세기의 막이 오른 1901년에 결성되었다. 이 두 조직이 근대 일본의 우익과 좌익의 대극을 형성했다는 것이 오늘날의 정설이다. 하지만 이 조직명은 흑룡회 주간 우치다 료헤이와 사회민주당의 실질적 중심인물 고토쿠 슈스이라는 인명으로 대치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우치다의 스승인 도야마 미쓰루와 고토쿠 슈스이의 스승 나카에 조민이 우익과 좌익의 원류에 위치한다는 설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우익과 좌익의 정의는 서로가 그렇게 정한 게 아니라 지배계급이 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 우와 좌를 적당히 잘라버리면서 권력을 유지한 게 바로 근대 일본의 리버럴이었다. 그 경우 우익은 흑룡회, 우치다 료헤이 등이며 『러시아 망국론』이었다. 좌익은 사회민주당, 고토쿠 슈스이 등이며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였다. 리버럴은 그 조직과 인물과 사상의 총체를 보고 자기들의 사정에 맞는 것은 적당히 넘기면서 이용하고, 불편한 부분은 잘라버리고 탄압했다. 〔……〕 리버럴의 이러한 권력지배원리는 어느 시대에나 적용되어왔다. 메이지 말년, 좌의 고토쿠 슈스이 등은 대역사건으로 탄압당했다. 다른 한편으로 우의 우치다 료헤이의 경우 그들이 추진해온 일한합방론이, 일한병합이라는 정치적 현실로 인해 유명무실화되고 말았다. 우익에서의, 또는 좌익에서의 변혁에 구애받는 이상 리버럴의 손에서 권력을 탈환하지 못한다. 그들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기 위해는 그들의 권력지배원리를 거꾸로 이용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흑룡회와 사회민주당 사이에서 사상을 형성한 기타 잇키였다. 또는 미쓰카와 가메타로나 오카와 슈메이였다. 즉, 그들 ‘유존사의 삼위일체’는 당시의 신우익이자 신좌익이었다.
어찌 되었든 흑룡회와 사회민주당은 그 원류인 도야마 미쓰루와 나카에 조민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알 수 있듯이, 원래는 다 메이지국가에 대한 반체제운동이었다. 아시즈 우즈히코는 일찍이 도야마 미쓰루와 나카에 조민이 사상적으로, 즉 민권운동, 조약개정문제, 동아경륜(東亞經綸)에 관해서 큰 차이가 없었다고 강조한 바 있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아시아주의의 전망」은 아시즈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그토록 친했던 도야마 미쓰루와 나카에 조민이 우치다와 슈스이의 시대에 이르러 “갈라서서 다시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일본만이 아니라 아시아에 있어서 불행한 일이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 pp.133-135, 제2부 제3장 흑룡회와 사회민주당의 분립
우익이 근대 일본의 악업에 자주 협력해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위 우익에 속하는 사상가의 사상을 전부 다 타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혹 그것이 타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면, 그 타기할 만한 우익이 도와준 근대 일본의 악업을 진주군의 도움 없이는 막지 못했던 좌익의 사상도 역시 근대 일본에 있어서는 무효였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나는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다. ‘소위’ 우익에 속하는 사상가의 사상을 금기시하는 데서 사상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신성시하는 데서 사상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우익의 사상이란 무엇인가를 정확히 파악하는 작업이 꼭 이루어져야 한다.
아마 그 작업을 통하지 않으면 소위 우익에 속하는 사상가의 사상이, 우익에 대한 기성관념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고 현재 우익이라 불리고 있는 고다마 요시오(兒玉譽士夫, 1911~1984)나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 1899~1995)가 사상으로서의 우익의 타락한 모습임을 알지 못할 것이다. --- pp.154-155, 제2부 제4장 우익사상 연구의 갈림길
이와 같이 민족의 문제는 ‘사상(捨象)’되기는커녕 근대주의를 대신하는 테제가 된 것 같은 인상조차 있는데, 그 폐해가 벌써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셔널리즘이 근대주의와의 상극 끝에 진테제(종합)를 도출하는 매개가 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가치가 되어버릴 법한 경우까지 생기고 있다. 예를 들어 다키자와 마코토의 『평전 우치다 료헤이』의 어떤 부분이 그 경우에 해당한다. 다키자와는 우치다 등의 흑룡회가 메이지 말기에 조선의 이용구 등의 일진회와 손을 잡고 추진한 일한‘합방’이, 당시의 지배계급에 의해 한국‘병합’으로 바뀌어버린 것에 언급하면서, 합방운동의 좌절은 우치다에게 있어 “천황의 신용에 관계되는 국제적 신의(信義)의 문제”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치다의 입장은 “국제적 도의를 잊은 사람”인 가쓰라 다로(桂太郞, 1848~1913)와 대조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일한합방운동의 좌절을 단순히 국제적 신의의 문제로만 집약해버릴 수 있는가. 우치다 료헤이에게는 그것만의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키자와가 근대주의와 내셔널리즘의 상극에서 진테제를 도출하려고 한다면, 그것을 단지 국제적 신의의 문제로 처리해버리는 행위가 내셔널리스트로서의 타락임을 지적하면서 그런 내셔널리즘이 어떤 문제성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비판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치다의 그런 발상과 그가 관동대지진 때 제출한, 조선인 박살을 시인하는 건백서는 반드시 상통하는 데가 있을 것이고 다키자와가 그것을 비판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는 것이다. --- pp.173-174, 제2부 제6장 내셔널리즘 재평가의 흐름
그런데 소제목 ‘우익은 끝났다는 이야기’ 아래에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우익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혁명(공산주의)을 표방한 좌익이 끝났으니 그 대항세력으로서의 우익도 끝났다는 식의 정세론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우익이 표방했던 내셔널리즘은 지금은 이제 보수세력으로서의 모토지마 히토시나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1932~)가 충분히 맡고 있다는 본질론에서 하는 말이다.
모토지마 시장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충혼비에 대한 공금지출을 인정하고 ‘나가사키 히노마루 기미가요 추진본부’의 회장도 맡고 있다. 이시하라 신타로 중의원의원은 반미적 내셔널리즘, 나아가서는 “일본은 결국 미국 이상으로 아시아가 없으면 자라나지 못한다”(『‘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 1989)는 아시아주의까지 주장하고 있다. 우도 아니고 좌도 아니고 항상 그것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본의 보수세력=지배층이 이와 같이 우익의 대의명분이었던 내셔널리즘이나 아시아주의를 맡아버린 것이다. 이때 우익 자신의 사상적 정체성은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우익은 소련을 구체적인 적으로 지목하는 것에서 자기확인을 할 수가 있었지만, 그 소련도 해체되고, 그에 따라 좌익도 소멸해버렸다.
그런 시기에 반미와 애국을 표방해온 아카오 빈(赤尾敏)이 세상을 뜨고(1990년 2월 6일, 91세), 도야마 미쓰루의 손자이며 『지쿠젠 현양사(筑前玄洋社)』를 쓴 도야마 모토카즈(頭山統一)가 아오야마 묘지(靑山墓地)에 있는 도야마 미쓰루의 묘 앞에서 자살하고(1990년 2월 16일, 54세), 전후 최대의 우익이론가였던 아시즈 우즈히코가 죽고(1992년 6월 10일, 82세), 신우익의 대표적 존재였던 노무라 슈스케가 아사히신문사에서 자결(1993년 10월 20일, 58세)했다. 그것은 바로 우익의 종언을 고하는 것 같은 죽음의 연속이었다.
리버럴이 틈새에 낀 좌우 양익이라는 구도는, 그러나 좌우익의 논리를 약간 벗어날 것이다. ‘좌익’ ‘우익’이라는 말은 프랑스혁명 후의 의회에서 의장의 왼쪽 자리를 급진파 자코뱅당이 차지하고, 오른쪽 자리를 보수파가 차지한 것에서 유래했다. 그 후 급진파 자코뱅당의 계보를 잇는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좌익이 되고 이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우익이 되었다. 그렇다면 보수파와 우익은 거의 동의어가 될 것이며 리버럴=보수파를 사이에 낀 좌익과 우익이라는 구도는 당연히 성립될 수 없다.
그런데 일본에서 보수파는 꼭 우익과 동의어가 아니었다. 보수파는 리버럴이었고 리버럴들은 좌우익을 거의 같은 거리에 두었는데, 그것은 일본이 선진자본주의 열강 밑에서 늦게 근대화를 추진해야 했다는 특수사정 때문이었다. 즉, 근대화론자인 리버럴이 근대 일본의 지배계급이 되는 것을, 이 특수사정이 요청한 것이다. 그런고로 근대화 노선을 밀고 나가는 메이지(明治) 국가체제에 대한 반대자가 두 방향으로 나뉘게 되었다. 대충 말하자면 ‘민족’의 입장에서 근대화에 반대하는 우익과, ‘계급’의 입장에서 반대하는 좌익이 그 두 방향이다.
물론 우익과 좌익이 각각 발생한 경위를 살펴보면 우익의 경우에는 ‘민족’의 입장보다 먼저 ‘국권’의 입장이 있고, 좌익의 경우 ‘계급’의 입장보다 먼저 ‘민권’의 입장이 있다고 하는 게 적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불완전하나마 네이션 스테이트(근대국가)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국가의 독립을 주장하는 국권론자와 개인의 독립을 주장하는 민권론자는 다 근대국가의 이데올로기를 나눠 가진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아직 메이지국가의 반체제파가 아니라 메이지 국가체제의 보완자(補完者)에 지나지 않았다. --- pp.16-18, 제1부 제1장 우익이란 무엇인가
우익의 낭만주의는 좌익의 리얼리즘과 대항관계에 있었는데, 그렇다면 우익에 있어서 좌익의 반(反)자본주의, 즉 사회주의에 해당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꼭 있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없으면 우익사상은 자본주의 옹호로 간주되어버릴 것이며, 실제로 체제에 편입된 우익은 자본가계급의 앞잡이로 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익에도 반자본주의사상이 있었다. 농본주의가 그것이다. 반배금주의(反拜金主義)라는 유치한 말도 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안 될 것이다. 혁명사상으로서의 내용을 갖추고 있는 것은 곤도 세이쿄(權藤成卿, 1868~1936)와 다치바나 고자부로(橘孝三郞, 1893~1974)의 농본주의이며, 그들 다음가는 사람으로 나카자토 가이잔(中里介山, 1885~1944), 시모나카 야사부로, 니시다 덴코(西田天香, 1872~1968)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반자본주의사상이 왜 농본주의의 형태를 취해야 했을까. 그것은 일본의 근대화가 공업화를 위한 노동력으로 농민을 농촌에서 흡수하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이다. 농촌은 항상 피폐하고 도쿄는 자본주의의 도읍으로서 농촌을 착취하면서 불건전하게 비대해졌다. --- pp.64-65, 제1부 제3장 우익의 사상
일본 내셔널리즘이 구미 선진자본주의 열강의 압박 밑에서 저항으로 성립한 사상이었던 것처럼 아시아에서도 내셔널리즘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때 메이지유신으로 겨우 식민지화를 면한 일본 사람들이 그 후에도 여전히 식민지 상태에 놓여 있거나 식민지화되려고 했던 아시아의 내셔널리즘운동에 동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니, 식민지화되는 것에 대한 위기감은 일본에도 오랫동안 남아 있었으니 이것을 동정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일본이 선진자본주의 열강의 위협에서 완전히 탈각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는 구미를 모방하면서 탈아화(脫亞化)하는 것쳀었지만, 그것은 내셔널리스트=우익이 채택할 길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익은 또 하나의 길, 즉 같은 상태에 놓여 있는 아시아와 연대하는 길을 택해야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동정 때문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아시아와 연대하게 된 것이다. 〔……〕 어쨌든 아시아주의는 여기에서 성립된다. 이것은 내셔널리즘과 같은 사상의 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아시아주의는 당연한 것처럼 우익을 특징짓는 사상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화, 즉 탈아화가 진행됨에 따라 우익의 내셔널리즘과 아시아주의 사이에 균열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시아의 내셔널리즘 운동이 타도의 대상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포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의 근대화가 선진자본주의 열강의 아시아 침략을 모방하는 것이었으니만큼 당연한 사태였으며 이 시점에서 아시아의 부흥, 그리고 이를 위해 연대를 바라는 아시아주의와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모순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때 우익은 아시아주의를 포기했다. 〔……〕 하지만 우익은 아시아주의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시아주의를 유지하는 척하면서 침략적 일본에 저항하지 않는 아시아를 찾아 손을 잡았다. 이것은 아시아주의의 타락이지만, 그것이 타락이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아시아주의자를 소외해온 지배계급이 기꺼이 아시아주의자를 환영하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대동아공영권(1940)과 대동아문학자대회(1942)가 그 시늉의 전형이다. --- pp.87-89, 제1부 제3장 우익의 사상
흑룡회와 사회민주당은 모두 메이지 34년, 즉 20세기의 막이 오른 1901년에 결성되었다. 이 두 조직이 근대 일본의 우익과 좌익의 대극을 형성했다는 것이 오늘날의 정설이다. 하지만 이 조직명은 흑룡회 주간 우치다 료헤이와 사회민주당의 실질적 중심인물 고토쿠 슈스이라는 인명으로 대치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우치다의 스승인 도야마 미쓰루와 고토쿠 슈스이의 스승 나카에 조민이 우익과 좌익의 원류에 위치한다는 설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우익과 좌익의 정의는 서로가 그렇게 정한 게 아니라 지배계급이 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 우와 좌를 적당히 잘라버리면서 권력을 유지한 게 바로 근대 일본의 리버럴이었다. 그 경우 우익은 흑룡회, 우치다 료헤이 등이며 『러시아 망국론』이었다. 좌익은 사회민주당, 고토쿠 슈스이 등이며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였다. 리버럴은 그 조직과 인물과 사상의 총체를 보고 자기들의 사정에 맞는 것은 적당히 넘기면서 이용하고, 불편한 부분은 잘라버리고 탄압했다. 〔……〕 리버럴의 이러한 권력지배원리는 어느 시대에나 적용되어왔다. 메이지 말년, 좌의 고토쿠 슈스이 등은 대역사건으로 탄압당했다. 다른 한편으로 우의 우치다 료헤이의 경우 그들이 추진해온 일한합방론이, 일한병합이라는 정치적 현실로 인해 유명무실화되고 말았다. 우익에서의, 또는 좌익에서의 변혁에 구애받는 이상 리버럴의 손에서 권력을 탈환하지 못한다. 그들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기 위해는 그들의 권력지배원리를 거꾸로 이용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흑룡회와 사회민주당 사이에서 사상을 형성한 기타 잇키였다. 또는 미쓰카와 가메타로나 오카와 슈메이였다. 즉, 그들 ‘유존사의 삼위일체’는 당시의 신우익이자 신좌익이었다.
어찌 되었든 흑룡회와 사회민주당은 그 원류인 도야마 미쓰루와 나카에 조민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알 수 있듯이, 원래는 다 메이지국가에 대한 반체제운동이었다. 아시즈 우즈히코는 일찍이 도야마 미쓰루와 나카에 조민이 사상적으로, 즉 민권운동, 조약개정문제, 동아경륜(東亞經綸)에 관해서 큰 차이가 없었다고 강조한 바 있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아시아주의의 전망」은 아시즈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그토록 친했던 도야마 미쓰루와 나카에 조민이 우치다와 슈스이의 시대에 이르러 “갈라서서 다시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일본만이 아니라 아시아에 있어서 불행한 일이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 pp.133-135, 제2부 제3장 흑룡회와 사회민주당의 분립
우익이 근대 일본의 악업에 자주 협력해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위 우익에 속하는 사상가의 사상을 전부 다 타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혹 그것이 타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면, 그 타기할 만한 우익이 도와준 근대 일본의 악업을 진주군의 도움 없이는 막지 못했던 좌익의 사상도 역시 근대 일본에 있어서는 무효였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나는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다. ‘소위’ 우익에 속하는 사상가의 사상을 금기시하는 데서 사상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신성시하는 데서 사상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우익의 사상이란 무엇인가를 정확히 파악하는 작업이 꼭 이루어져야 한다.
아마 그 작업을 통하지 않으면 소위 우익에 속하는 사상가의 사상이, 우익에 대한 기성관념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고 현재 우익이라 불리고 있는 고다마 요시오(兒玉譽士夫, 1911~1984)나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 1899~1995)가 사상으로서의 우익의 타락한 모습임을 알지 못할 것이다. --- pp.154-155, 제2부 제4장 우익사상 연구의 갈림길
이와 같이 민족의 문제는 ‘사상(捨象)’되기는커녕 근대주의를 대신하는 테제가 된 것 같은 인상조차 있는데, 그 폐해가 벌써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셔널리즘이 근대주의와의 상극 끝에 진테제(종합)를 도출하는 매개가 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가치가 되어버릴 법한 경우까지 생기고 있다. 예를 들어 다키자와 마코토의 『평전 우치다 료헤이』의 어떤 부분이 그 경우에 해당한다. 다키자와는 우치다 등의 흑룡회가 메이지 말기에 조선의 이용구 등의 일진회와 손을 잡고 추진한 일한‘합방’이, 당시의 지배계급에 의해 한국‘병합’으로 바뀌어버린 것에 언급하면서, 합방운동의 좌절은 우치다에게 있어 “천황의 신용에 관계되는 국제적 신의(信義)의 문제”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치다의 입장은 “국제적 도의를 잊은 사람”인 가쓰라 다로(桂太郞, 1848~1913)와 대조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일한합방운동의 좌절을 단순히 국제적 신의의 문제로만 집약해버릴 수 있는가. 우치다 료헤이에게는 그것만의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키자와가 근대주의와 내셔널리즘의 상극에서 진테제를 도출하려고 한다면, 그것을 단지 국제적 신의의 문제로 처리해버리는 행위가 내셔널리스트로서의 타락임을 지적하면서 그런 내셔널리즘이 어떤 문제성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비판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치다의 그런 발상과 그가 관동대지진 때 제출한, 조선인 박살을 시인하는 건백서는 반드시 상통하는 데가 있을 것이고 다키자와가 그것을 비판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는 것이다. --- pp.173-174, 제2부 제6장 내셔널리즘 재평가의 흐름
그런데 소제목 ‘우익은 끝났다는 이야기’ 아래에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우익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혁명(공산주의)을 표방한 좌익이 끝났으니 그 대항세력으로서의 우익도 끝났다는 식의 정세론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우익이 표방했던 내셔널리즘은 지금은 이제 보수세력으로서의 모토지마 히토시나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1932~)가 충분히 맡고 있다는 본질론에서 하는 말이다.
모토지마 시장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충혼비에 대한 공금지출을 인정하고 ‘나가사키 히노마루 기미가요 추진본부’의 회장도 맡고 있다. 이시하라 신타로 중의원의원은 반미적 내셔널리즘, 나아가서는 “일본은 결국 미국 이상으로 아시아가 없으면 자라나지 못한다”(『‘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 1989)는 아시아주의까지 주장하고 있다. 우도 아니고 좌도 아니고 항상 그것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본의 보수세력=지배층이 이와 같이 우익의 대의명분이었던 내셔널리즘이나 아시아주의를 맡아버린 것이다. 이때 우익 자신의 사상적 정체성은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우익은 소련을 구체적인 적으로 지목하는 것에서 자기확인을 할 수가 있었지만, 그 소련도 해체되고, 그에 따라 좌익도 소멸해버렸다.
그런 시기에 반미와 애국을 표방해온 아카오 빈(赤尾敏)이 세상을 뜨고(1990년 2월 6일, 91세), 도야마 미쓰루의 손자이며 『지쿠젠 현양사(筑前玄洋社)』를 쓴 도야마 모토카즈(頭山統一)가 아오야마 묘지(靑山墓地)에 있는 도야마 미쓰루의 묘 앞에서 자살하고(1990년 2월 16일, 54세), 전후 최대의 우익이론가였던 아시즈 우즈히코가 죽고(1992년 6월 10일, 82세), 신우익의 대표적 존재였던 노무라 슈스케가 아사히신문사에서 자결(1993년 10월 20일, 58세)했다. 그것은 바로 우익의 종언을 고하는 것 같은 죽음의 연속이었다.
--- pp.276-277, 제4부 “우익은 끝났다”는 이야기
출판사 리뷰
지난 10월 9일, 일본의 총리로 선출된 하토야마 유키오와 이명박 대통령 간의 한일 정상회담이 서울에서 열렸다. ‘동아시아 공동체’를 화두로 삼은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알 수 있듯 21세기 들어 이웃나라 일본과의 우호적 관계가 증대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과거사 문제 등을 비롯한 분쟁의 불씨가 아직 꺼지지 않은 것도 사실.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 히노마루·기미가요의 법제화 문제, 신가이드라인 관련법과 헌법 개정 논의, 역사인식 논쟁 등은 여전히 논란거리이다. 특히 이 논란의 중심에는 ‘내셔널리즘’을 축으로 하는 일본 우익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우익사상을 역사적으로 재검토하는 일은 21세기 일본의 거취를 전망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시점에 일본 우익사상의 성립과 전개, 그리고 종언까지의 과정을 흥미롭게 풀어쓴 책이 출간되어 눈길을 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이 바로 그것(문학과지성사 刊, 2009).
일본의 대표적 지성 마쓰모토 겐이치,
일본 우익사상의 성립과 전개, 그리고 종언을 말하다
일본 레이타쿠 대학 교수이자 문예평론가 마쓰모토 겐이치의 저서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요시카와 나기 옮김)은, 1976년에 일본에서 『사상으로서의 우익(思想としての 右翼)』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간되었다. ‘사상’적 측면에서 일본 우익을 연구한 첫 성과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꾸준히 판을 거듭해 출간되고 있다(이 책은 초판인 1976년 판에 「우익의 종언」(1995년 집필)이 추가된 2000년의 개정판을 바탕으로 일부 구성을 바꿔 번역?출간되었다). 이 책 이전까지 ‘사상’적 측면에서의 우익 연구가 일본의 국가주의 운동이나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연구의 일부로 행해져왔다면, 이 책 이후부터는 좌익과 우익의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려는 학자들에 의해 ‘우익’이 ‘사상’적 측면에서 독립된 연구대상으로 취급되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일본 우익 연구의 한 축을 담당하는 중요한 저술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책의 저자 마쓰모토 겐이치(松本健一)는 『젊은 기타 잇키』로 세상에 충격을 주며 평단에 등단해, 이후 역사 속에 매몰된 인물을 발굴한 평전, 일본의 메이지유신이나 개국(開國)을 다룬 저작 등을 속속 출간하며 그 날카로운 통찰력과 실증적 연구로 뒷받침된 폭넓은 지식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사회학자 다케우치 요는 그를 가리켜 “전전파의 다케우치 요시미와 전중파의 하시카와 분조의 계보를 잇는, 뛰어난 전후파 사상사연구자이자 문예평론가”라고 평했으며, 주간지 『아에라AERA』(아사히신문사)는 2007년 10월 15일호에서 “우도 좌도 아닌, 일본을 그려내는 지성”이라는 제목으로 그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렇듯 일본 ‘우익사상’의 성립과 전개, 그리고 종언까지의 역사를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서술하고 있는 이 책에서 저자가 고찰 대상으로 삼고 있는 우익은, 우리가 주로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타락한 우익,’ 즉 이권을 노려서 보수세력의 앞잡이가 된 우익이나 정치결사를 표방하는 폭력단이 아니다. 그가 주로 천착하는 연구 대상은 바로 ‘우익사상’의 본래적인 뜻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일본에 우익사상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이유를 찾아 메이지 정부에 대한 반대세력이 우와 좌로 갈라서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아직 우도 좌도 아닌 반체제 사상들의 카오스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던 갖가지 엄청난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책의 제1부 「사상으로서의 우익」에서 저자는 근대 일본의 권력구조를 우와 좌로 구분하는 대신, 우익과 좌익을 적당히 이용하면서 권력을 좌지우지해온 리버럴을 중심에 놓은 구도를 그려 그 역학을 선명히 해부한다. 제2부에는 다양한 양상을 보인 우익사상에 관한 개별적인 연구를, 제3부는 한국에서도 관심이 높은 ‘만주국’의 성립과 우익사상의 관련을 고찰한 글을 모았다. 제4부는 1990년대의 사회상황을 관찰하면서 “우익은 이제 존재의의를 잃어버렸다”고 주장하는 글이다.
특히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사상’이란, “궁극에 가서는 논리가 아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 주체의 에토스 문제다. 사람은 살아가는 자세로 자신의 사상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 이를 바탕으로 저자는 ‘사상’으로서의 일본 우익을 내부인의 냉철한 눈으로 써내려가며, “우익을 금기시하는 태도는, 그것을 신성시하는 태도와 마찬가지로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기실 비판이 아니라 사상적 대결을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혹 ‘타락한’ 우익이 아닌, 본래적인 뜻의 우익이 어느 사이에 잘못된 방향으로 빠져버렸다면 우리는 “내가 그때 살았더라면 나도 그런 길을 밟았던 게 아닐까?” 하는 반성과 함께 그 역사적 과정을 냉정하게 비판해야 한다. 그것이 저자의 기본적 자세이며 이 점에서 이 책은 다른 많은 우익연구와 구별된다.
우익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내리든 간에 우익사상은 일본의 근·현대 과정에서 형성된 ‘내셔널리즘의 한 소산’이며, 일본의 근대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쳐왔다. 따라서 일본 학자의 눈을 통해 일본 우익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이 책은,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대표적 지성 마쓰모토 겐이치,
일본 우익사상의 성립과 전개, 그리고 종언을 말하다
일본 레이타쿠 대학 교수이자 문예평론가 마쓰모토 겐이치의 저서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요시카와 나기 옮김)은, 1976년에 일본에서 『사상으로서의 우익(思想としての 右翼)』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간되었다. ‘사상’적 측면에서 일본 우익을 연구한 첫 성과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꾸준히 판을 거듭해 출간되고 있다(이 책은 초판인 1976년 판에 「우익의 종언」(1995년 집필)이 추가된 2000년의 개정판을 바탕으로 일부 구성을 바꿔 번역?출간되었다). 이 책 이전까지 ‘사상’적 측면에서의 우익 연구가 일본의 국가주의 운동이나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연구의 일부로 행해져왔다면, 이 책 이후부터는 좌익과 우익의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려는 학자들에 의해 ‘우익’이 ‘사상’적 측면에서 독립된 연구대상으로 취급되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일본 우익 연구의 한 축을 담당하는 중요한 저술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책의 저자 마쓰모토 겐이치(松本健一)는 『젊은 기타 잇키』로 세상에 충격을 주며 평단에 등단해, 이후 역사 속에 매몰된 인물을 발굴한 평전, 일본의 메이지유신이나 개국(開國)을 다룬 저작 등을 속속 출간하며 그 날카로운 통찰력과 실증적 연구로 뒷받침된 폭넓은 지식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사회학자 다케우치 요는 그를 가리켜 “전전파의 다케우치 요시미와 전중파의 하시카와 분조의 계보를 잇는, 뛰어난 전후파 사상사연구자이자 문예평론가”라고 평했으며, 주간지 『아에라AERA』(아사히신문사)는 2007년 10월 15일호에서 “우도 좌도 아닌, 일본을 그려내는 지성”이라는 제목으로 그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렇듯 일본 ‘우익사상’의 성립과 전개, 그리고 종언까지의 역사를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서술하고 있는 이 책에서 저자가 고찰 대상으로 삼고 있는 우익은, 우리가 주로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타락한 우익,’ 즉 이권을 노려서 보수세력의 앞잡이가 된 우익이나 정치결사를 표방하는 폭력단이 아니다. 그가 주로 천착하는 연구 대상은 바로 ‘우익사상’의 본래적인 뜻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일본에 우익사상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이유를 찾아 메이지 정부에 대한 반대세력이 우와 좌로 갈라서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아직 우도 좌도 아닌 반체제 사상들의 카오스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던 갖가지 엄청난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책의 제1부 「사상으로서의 우익」에서 저자는 근대 일본의 권력구조를 우와 좌로 구분하는 대신, 우익과 좌익을 적당히 이용하면서 권력을 좌지우지해온 리버럴을 중심에 놓은 구도를 그려 그 역학을 선명히 해부한다. 제2부에는 다양한 양상을 보인 우익사상에 관한 개별적인 연구를, 제3부는 한국에서도 관심이 높은 ‘만주국’의 성립과 우익사상의 관련을 고찰한 글을 모았다. 제4부는 1990년대의 사회상황을 관찰하면서 “우익은 이제 존재의의를 잃어버렸다”고 주장하는 글이다.
특히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사상’이란, “궁극에 가서는 논리가 아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 주체의 에토스 문제다. 사람은 살아가는 자세로 자신의 사상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 이를 바탕으로 저자는 ‘사상’으로서의 일본 우익을 내부인의 냉철한 눈으로 써내려가며, “우익을 금기시하는 태도는, 그것을 신성시하는 태도와 마찬가지로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기실 비판이 아니라 사상적 대결을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혹 ‘타락한’ 우익이 아닌, 본래적인 뜻의 우익이 어느 사이에 잘못된 방향으로 빠져버렸다면 우리는 “내가 그때 살았더라면 나도 그런 길을 밟았던 게 아닐까?” 하는 반성과 함께 그 역사적 과정을 냉정하게 비판해야 한다. 그것이 저자의 기본적 자세이며 이 점에서 이 책은 다른 많은 우익연구와 구별된다.
우익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내리든 간에 우익사상은 일본의 근·현대 과정에서 형성된 ‘내셔널리즘의 한 소산’이며, 일본의 근대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쳐왔다. 따라서 일본 학자의 눈을 통해 일본 우익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이 책은,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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