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책소개
"1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두 신학자의 만남"
10세기와 20세기 신학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두 사상가인 안셀무스(1033~1109)와 카를 바르트(1886~1968)의 사상적 교감이 이루어낸 현대 신학의 토대를 닦은 고전이다. 카를 바르트의 사상 체계는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안셀무스, 칼뱅으로 이어지는 교회 전통을 그 토대로 하는데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은 이러한 전통 신학이 어떻게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고 20세기 신학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프로슬로기온의 중심 모토인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을 주석하며 안셀무스의 입을 통해 성찰한다. 그는 ‘이성’과 ‘믿음’의 상호 관계에 관한 자신의 신학적 이해를 10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안셀무스의 사상 속에 정초하여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을 완성하였다. 이렇게 안셀무스의 신학체계가 자유주의 신학 이후의 20세기 신학에 어떻게 공헌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이 탄생하였다.
10세기와 20세기 신학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두 사상가인 안셀무스(1033~1109)와 카를 바르트(1886~1968)의 사상적 교감이 이루어낸 현대 신학의 토대를 닦은 고전이다. 카를 바르트의 사상 체계는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안셀무스, 칼뱅으로 이어지는 교회 전통을 그 토대로 하는데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은 이러한 전통 신학이 어떻게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고 20세기 신학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프로슬로기온의 중심 모토인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을 주석하며 안셀무스의 입을 통해 성찰한다. 그는 ‘이성’과 ‘믿음’의 상호 관계에 관한 자신의 신학적 이해를 10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안셀무스의 사상 속에 정초하여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을 완성하였다. 이렇게 안셀무스의 신학체계가 자유주의 신학 이후의 20세기 신학에 어떻게 공헌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이 탄생하였다.
목차
1판 서문
2판 서문
서론
제1부 신학적 체계
1. 신학의 필요성
2. 신학의 가능성
3. 신학의 조건들
4. 신학의 방식
5. 신학의 목표(증명)
제2부 하나님의 존재 증명
1. 증명의 전제들
1. 하나님의 이름
2.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
2. 증명의 전개(프로슬로기온 2~4장 주해)
1. 하나님의 보편적 존재성(프로슬로기온 2장)
2. 하나님의 특별한 존재(프로슬로기온 3장)
3.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가능성(프로슬로기온 4장)
역자 해제
부록
1. 하인리히 숄츠의‘안셀무스 논증을 비평하는 기본 원칙’
2. 바르트의 1959년 여름학기 세미나 준비
3. 1959년 여름 학기, 한 세미나 참가자의 질의와 바르트의 답변
참고문헌
1. 안셀무스 저서의 키워드
2. 안셀무스 참고문헌
3. 성서 참조
2판 서문
서론
제1부 신학적 체계
1. 신학의 필요성
2. 신학의 가능성
3. 신학의 조건들
4. 신학의 방식
5. 신학의 목표(증명)
제2부 하나님의 존재 증명
1. 증명의 전제들
1. 하나님의 이름
2.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
2. 증명의 전개(프로슬로기온 2~4장 주해)
1. 하나님의 보편적 존재성(프로슬로기온 2장)
2. 하나님의 특별한 존재(프로슬로기온 3장)
3.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가능성(프로슬로기온 4장)
역자 해제
부록
1. 하인리히 숄츠의‘안셀무스 논증을 비평하는 기본 원칙’
2. 바르트의 1959년 여름학기 세미나 준비
3. 1959년 여름 학기, 한 세미나 참가자의 질의와 바르트의 답변
참고문헌
1. 안셀무스 저서의 키워드
2. 안셀무스 참고문헌
3. 성서 참조
책 속으로
믿음과는 달리, 이해를 추구하는 것과 그것에 도달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은 냉혹한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바로 인간은 지적이기에, 기독교인은 하나님 자신과 자기가 생각한 하나님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p.19
믿음(fides)은 본질적으로 이해를 추구하는(quaerens intellectum) 것이다. 그러므로 안셀무스는 만일 우리가 믿음 안에서 확고히 된 후에, 믿고 있는 것들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태함 때문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믿음의 확신을 가질 때 우리는 믿음의 근거(fidei ratio)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p.21
필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사유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알아야 하고 증명해야만 한다. (중략) 어떠한 것도 실재의 궁극적 존재성을 가지지 않기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것에 대한 지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유일자로서 절대적 필연성을 지닌 지식의 대상이다. 만일 하나님을 믿음 안에서 계시에 기반을 두고 사유하지 않는다면, 이 믿음의 대상을 증명하는 필연성은 없을 것이다. ---p.155~156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안셀무스는 자신의 증명으로 다시 돌아간다. 자신을 창조자로 드러낸 하나님은 ‘더 이상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이’ 로 불린다. 따라서 그는 자신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하는 것을 금하는 이로서 우리와 조우한다. 그것을 아는 것은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 자신은 주님이라는 이름이고, 하나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존재 증명을 타당한 방식으로 알게 한다. ‘잘 이해한다’(bene intelligere)는 것은 대상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참되게 증명하고 이 참된 지식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금지하는 것을 듣고 인식하고 이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p.270~271
바르트가 파악한 안셀무스의 ‘증명하다’는 이와는 거리가 있다. 그에게 ‘증명하다’는 ‘증거 제시’가 아닌 ‘이해하다’를 의미한다. 바르트에게 ‘증거 제시’와 ‘이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증거’가 제2, 제3의 외부 인자를 통하여 그 대상의 논리적 타당성을 밝혀내는 것이라면 ‘이해’는 그 대상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이란, 바르트에 따르면 대상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믿음이란 “실제적이고 본질적인 의지의 활동”이다. 그러나 안셀무스에 따르면 이 의지의 활동은 씨앗과 힘든 경작 없이 열매를 얻을 수 없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받아들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께로 인간적 의지를 관철시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으로 의지적으로 순종해 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존재양태로의 제한된 참여이며, 하나님의 자존성과 자기영광과 하나님의 충만함에 제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p.279~280
인간의 유한성과 신의 무한성은 신의 선재적 은총으로 유발된 믿음을 통하여 맞닿을 수 있게 되고 무한과 유한의 맞닿은 이 지점에 대한 이성적 규범을 우리는 신학이라 부른다. 믿음은 신학의 기초 토대가 되며 반대로 믿음을 통하지 않은 어떠한 시도도 신의 무한에 다가갈 수 없다.
믿음(fides)은 본질적으로 이해를 추구하는(quaerens intellectum) 것이다. 그러므로 안셀무스는 만일 우리가 믿음 안에서 확고히 된 후에, 믿고 있는 것들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태함 때문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믿음의 확신을 가질 때 우리는 믿음의 근거(fidei ratio)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p.21
필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사유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알아야 하고 증명해야만 한다. (중략) 어떠한 것도 실재의 궁극적 존재성을 가지지 않기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것에 대한 지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유일자로서 절대적 필연성을 지닌 지식의 대상이다. 만일 하나님을 믿음 안에서 계시에 기반을 두고 사유하지 않는다면, 이 믿음의 대상을 증명하는 필연성은 없을 것이다. ---p.155~156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안셀무스는 자신의 증명으로 다시 돌아간다. 자신을 창조자로 드러낸 하나님은 ‘더 이상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이’ 로 불린다. 따라서 그는 자신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하는 것을 금하는 이로서 우리와 조우한다. 그것을 아는 것은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 자신은 주님이라는 이름이고, 하나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존재 증명을 타당한 방식으로 알게 한다. ‘잘 이해한다’(bene intelligere)는 것은 대상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참되게 증명하고 이 참된 지식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금지하는 것을 듣고 인식하고 이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p.270~271
바르트가 파악한 안셀무스의 ‘증명하다’는 이와는 거리가 있다. 그에게 ‘증명하다’는 ‘증거 제시’가 아닌 ‘이해하다’를 의미한다. 바르트에게 ‘증거 제시’와 ‘이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증거’가 제2, 제3의 외부 인자를 통하여 그 대상의 논리적 타당성을 밝혀내는 것이라면 ‘이해’는 그 대상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이란, 바르트에 따르면 대상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믿음이란 “실제적이고 본질적인 의지의 활동”이다. 그러나 안셀무스에 따르면 이 의지의 활동은 씨앗과 힘든 경작 없이 열매를 얻을 수 없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받아들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께로 인간적 의지를 관철시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으로 의지적으로 순종해 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존재양태로의 제한된 참여이며, 하나님의 자존성과 자기영광과 하나님의 충만함에 제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p.279~280
인간의 유한성과 신의 무한성은 신의 선재적 은총으로 유발된 믿음을 통하여 맞닿을 수 있게 되고 무한과 유한의 맞닿은 이 지점에 대한 이성적 규범을 우리는 신학이라 부른다. 믿음은 신학의 기초 토대가 되며 반대로 믿음을 통하지 않은 어떠한 시도도 신의 무한에 다가갈 수 없다.
---p.283
출판사 리뷰
"전쟁의 혼돈 속에서 불신앙과 무용신학의 도전을 극복하려하다"
바르트의 이러한 신학 변증은 1, 2차 세계 대전의 혼돈 속에서 구체화 된 것이다. 광기로 치달아 가는 독일 사회 속에서 교회와 신학의 죽음은 바르트로 하여금 새로운 신학 체계를 구상하도록 이끌었다. 1차 세계 대전과 히틀러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진 이성을 목도하며 바르트는 신학의 최후를 보았고, 하나님의 뜻을 감지하지 못하는 무용한 신학의 비참함을 그는 간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신학의 임무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더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것…"
바르트는 믿음이 신학의 기초 토대이며 반대로 믿음을 통하지 않은 어떠한 시도도 신의 무한에 다가갈 수 없다고 말한다. 신학을 이해하고 신학을 펼칠 수 있는 이들은 오직 자신 안의 희망의 이유, 즉 믿음을 가진 이들뿐이다. 바르트의 관점에서 본 안셀무스는 하나님의 존재 증거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의 은총에서 비롯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바르트의 이러한 신학 변증은 1, 2차 세계 대전의 혼돈 속에서 구체화 된 것이다. 광기로 치달아 가는 독일 사회 속에서 교회와 신학의 죽음은 바르트로 하여금 새로운 신학 체계를 구상하도록 이끌었다. 1차 세계 대전과 히틀러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진 이성을 목도하며 바르트는 신학의 최후를 보았고, 하나님의 뜻을 감지하지 못하는 무용한 신학의 비참함을 그는 간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신학의 임무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더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것…"
바르트는 믿음이 신학의 기초 토대이며 반대로 믿음을 통하지 않은 어떠한 시도도 신의 무한에 다가갈 수 없다고 말한다. 신학을 이해하고 신학을 펼칠 수 있는 이들은 오직 자신 안의 희망의 이유, 즉 믿음을 가진 이들뿐이다. 바르트의 관점에서 본 안셀무스는 하나님의 존재 증거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의 은총에서 비롯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46.기독교 신학연구 (독학>책소개) > 2.신학일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의 타락과 진화 (2019) (0) | 2024.06.18 |
---|---|
신학 공부를 위해 필요한 101가지 철학 개념 (2021) (0) | 2024.06.18 |
성산명경 (2024) (0) | 2024.06.08 |
신경의 형성 (2022) - 신경은 어떻게 신경이 되었는가? (1) | 2024.06.02 |
신사참배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 (2021) (1) | 2024.06.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