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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방군 (2023) - WEHRMACHT

동방박사님 2024. 7. 24.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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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왜, 어떻게 승리하고 패배했는지를 객관적으로 분석한 책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대 중 하나로 평가받는
독일 국방군의 모든 것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독일은 연합국과 베르사유 조약을 맺었다. 조약의 결과로 빌헬름 2세가 폐위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했으며 독일은 감당하기 어려운 전쟁배상금의 의무를 지게 되었다. 국가방위군으로 명칭이 바뀐 독일군은 10만 명으로 제한되었으며 전차와 중포 등을 소유할 수 없으며 독일 내 치안과 국경 방위로 임무가 축소되었다.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이 허용한 제한된 범위 내에서 전투력과 장비들을 극대화시키고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분석해 현대적 군으로 탈바꿈하려는 노력을 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한 독일은 재무장의 길을 걸으면서 독일 국방군(Wehrmacht)으로 거듭나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된다.

이 책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독일 국방군’에 대한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 독일 국방군의 탄생 배경과 창설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서 보여준 놀라운 활약과 승리, 독일 국방군의 특성, 패배와 그들이 남긴 유산, 그들을 둘러싼 새로운 진실과 교훈까지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연합군에 비해 인적·물적 자원이 현저히 부족했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수행한 전쟁을 개관하고 위대한 승리의 요인과 비참하게 패배한 원인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히틀러가 독일군을 정치적으로 장악하는 과정과 유명한 독일군 장군들이 히틀러의 정권에 어떻게 영혼을 팔게 되었는가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정치지도자가 군대를 정치적인 목적과 수단으로 사용할 때, 또한 군 장성들이 잘못된 정치지도자에 대해 유약한 태도를 보일 때 국가의 운명에 어떠한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저자는 전쟁의 승리와 패배의 요인을 전략적·작전적·전술적인 차원(제병협동전술에서 각개전투까지)에서 분석하고 있다. 한 전역이 끝난 후 그 전역에 대한 신속한 분석을 통해 다음 전역에서 단점을 보완하는 과정과 내용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독일군의 군사사상과 기갑 및 기계화부대의 발전 과정, 전격전 및 전술 교리의 발전 과정 및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기술해 국방 및 전쟁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연구된 자료들과 1990년에 소련을 비롯한 연합국의 기록문서들이 개방되면서 수집된 객관적이고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각에서 독일군을 재조명한 책으로, 지금까지 전쟁에 참가했던 장군들이 자신의 입장을 미화한 자서전이나 참가국들이 자국의 전승을 포장해 기술한 전사를 주로 접해온 독자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과 독일 국방군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목차

감사의 글
서문
서론

제1부 독일 국방군의 창설
제1장 독일 국방군의 기원
제2장 전격전의 신화와 실제

제2부 독일 국방군의 공격
제1장 폴란드 침공
제2장 노르웨이 원정
제3장 서부 전역에서의 승리
제4장 발칸 반도 침공
제5장 북아프리카 전역
제6장 동부 전선 I (1941-1942년)
제7장 동부 전선 II (1942년)

제3부 독일 국방군의 특성
제1장 히틀러의 전쟁 지휘
제2장 최고사령부
제3장 독일군 초급 지휘관
제4장 독일군 부사관과 병사
제5장 독일 육군과 나치즘

제4부 독일 국방군의 방어
제1장 임기응변의 승리
제2장 동부 전선 방어(1943-1945년)
제3장 히틀러 육군의 무장
제4장 게릴라전
제5장 독일군과 무장친위대
제6장 물량전
제7장 베를린 함락
제8장 독일군의 유산

부록
부록 1_초기 기갑사단
부록 2_후기 기갑사단
부록 3_기계화보병사단
부록 4_차량화보병사단
부록 5_보병사단
부록 6_국민척탄병사단
부록 7_무장친위대 기갑사단
부록 8_사단 전투력
부록 9_기갑사단의 전차 수량
부록 10_연도별 독일의 전차 수량
부록 11_대전차 전술
부록 12_독일군 계급
부록 13_계급 비교
부록 14_희생자 수

저자 소개

저 : 팀 리플리 (Tim Ripley)
전업 작가이자 사진기자이기도 한 팀 리플리는 동시에 뛰어난 전사연구자로, 1990년 이래 발칸 반도와 중동 지역 등 세계 각지의 분쟁 지역을 다룬 저작물들을 다수 출판해오고 있다. 직접 현장을 누비며 취재한 기사는 《Jane's Defence Weekly》, 《Air Forces Monthly》, 《International Air Power Review》 같은 군사전문 잡지뿐 아니라 《The Sunday Tele...
 
역 : 박영록
육군사관학교(33기)를 졸업했고, 독일 전투병과학교의 대대 장 과정과 지휘참모대학의 장군참모과정을 수료했으며, 충남대학교 안보대학원에서 군사학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약 15년간 기계화보병여단의 작전과장 및 여단장, 사단 및 기동군단의 작전참모의 직책을 수행했다. 약 10년간 보병학교 및 기 계화학교에서 전술학 교관, 교무처장, 전투발전처장으로 주로 기계화부대 전술을 가르치고 연구했고, 제3사관학교 훈육 장교와 서...

책 속으로

독일군의 역사는 많은 핵심적인 인물의 운명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구데리안, 롬멜, 만슈타인의 이름은 전차와 전격전이라는 단어만큼이나 독일 육군의 동의어이다. 전쟁사가 남긴 변함없는 교훈 중 하나는 전장 상황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요소가 어떠한 다른 전쟁 수단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육군은 구데리안 등 핵심적인 인물에 의하여 전사에 빛나는 위대한 승리를 달성했으나 나치 체제에 대한 군 장성들의 도덕적인 유약함이 궁극적인 패배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됐다.
--- 「서문」 중에서

히틀러는 패배를 우려하는 장군들과 군인들, 즉 육군 최고 사령부 참모총장인 브라우히치, 그의 후계자인 할더, 룬트슈테트, 심지어 만슈타인까지 불신했다. 그는 지휘의 핵심축을 점차 하급 제대 지휘관에게 돌리기를 원했고,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업무에 대한 총통의 명령을 개인적으로 하달하기 위해 전령들을 도처에 파견했다. 어떤 경우에는 히틀러가 직접 전화해, 불만을 표출하는 장군들에게 추상같은 명령을 하달했다. 그는 1944년 여름에 “장군참모단을 해체해야 한다”라며 분노했다.
--- p.290

전쟁 후 개최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의 재판관 중 한 명인 제프리 로렌스(Geoffrey Lawrence) 판사는 독일군 장군들에게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그들은 수백만의 남성, 여성 그리고 아이들에게 안겨준 불행과 고통에 상당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은 명예로운 직업인 군인의 명예를 실추시켰습니다. 군사적인 지침 이외에도 히틀러와 나치 동료들의 호전적인 야심은 탁상공론이고 무익했습니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이 명령에 복종하겠다는 군인의 맹세를 조롱했습니다. 자신들의 방어에 적합할 때는 복종해야 했다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히틀러의 잔혹한 범죄에 직면했을 때는 불복종했다고 말합니다. 진실은 그들이 이 모든 범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거나, 침묵하고 묵인했다는 것입니다.”
--- p.472

이 책은 지금까지 연구된 자료들과 1990년에 소련을 비롯한 연합국의 기록문서들이 개방되면서 수집된 객관적이고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각에서 독일군을 재조명한 책이다. 지금까지 전쟁에 참가했던 장군들이 자신의 입장을 미화한 자서전이나 참가국들이 자국의 전승을 포장해 기술한 전사를 주로 접해온 독자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과 독일군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 「역자 후기」 중에서

출판사 리뷰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딛고 20년 만에
어떻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대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는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1919년 패전한 독일과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했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 내 치안과 국경을 방위하는 국가방위군을 10만 명으로 제한했고 전투기, 전차, 방공포, 대전차포, 중포와 화학무기를 보유할 수 없게 했다. 더불어 중화기의 배치를 엄격하게 제한했고 무기 수입 및 생산을 금지했다. 연합군은 독일의 군사 능력을 한정시켜 향후 독일이 침략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베르사유 조약은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제2차 세계대전의 초기 독일의 승리를 달성하는 촉진제가 됐다. 독일군은 미래의 잠재적인 침략자들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베르사유 조약이 허용한 제한된 범위 내에서 전투력과 장비들을 극대화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독일군은 조약의 제한 범위 내에서 가능한 한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치밀하게 분석했다. 장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에 대한 사후 검토 보고서를 작성했고, 전역과 전투를 상세하게 연구해 유럽의 저명한 군사 저널에 기고했다. 또, 전쟁의 가장 중요한 작전 수행을 준비하고 검토하기 위해 대규모 워게임에 참가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독일군은 전쟁에 참가했던 그 어떤 나라의 군대보다 제1차 세계대전을 광범위하게 연구했다.

1920년대의 독일군을 창건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독일군 참모총장인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ckt)였다. 독일군에게 강한 공격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독일군에 처음으로 기동화를 도입했으며 기병을 현대화해 기동수단을 할당하고 화력을 보강하는 등 전간기 독일군의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933년 집권한 히틀러가 2년 후 공식적으로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면서 독일군은 재무장의 길을 걷게 됐다. 국민의 전폭적 지지와 불황을 타개하려는 산업계의 지원으로 급속도로 군사 확장을 시작한 독일은 징집제를 부활하고 전술, 전략 등 군사 교리를 정비하고 군비를 확장했다.

독일은 전쟁을 피하려는 영국과 프랑스 등 미래의 적들 보다 몇 년 앞서 전쟁을 준비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1939년 9월 독일군보다 준비가 덜 된 인접국들이 준비를 끝내고 독일의 주도권을 빼앗기 전에 그들을 점령할 수 있다고 판단해 도박을 벌였다. 합리적인 계획만큼이나 전쟁 초기에 나타난 결과는 전 세계의 힘의 균형을 파괴시킨 전격전 전략이었다.

전격전이란?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군을 상징하는 단어는 전격전(Blitzkrieg)이다.

전격전은 지상에서 대규모 기갑부대가 적의 방어 진지를 강타해 적을 마비시키고 후방 지역에 공포와 파괴를 확산시키며 공중에서는 수백 대의 급강하폭격기 슈투카가 적의 전투 대열과 피난민들을 폭격하는 모습을 그려보는 역동적인 용어이다. 하인츠 구데리안은“우리가 속전속결로 승리했기 때문에 우리의 적들이 전격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라고 했으며 히틀러도“한 이탈리아인이 전격전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우리는 전격전을 신문을 보고 알았다”라고 말했듯 전격전은 독일에서 만들어진 용어가 아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위해 만들어진 전술도 아니었다. 지정학적으로 항상 서부와 동부 전선에서 잠재적인 적과 대치하고 있었던 독일은 잠재적으로도, 수적으로도 열세였기 때문에 전투력을 극대화시킬 만한 군사력 운용 방법을 찾아야 했다. 18세기 프리드리히 대제, 19세기 몰트케,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슐리펜 등은 기동성과 대담성에서 해법을 찾았다. 이전의 전쟁을 분석한 독일은 젝트, 베크, 베르너 폰 프리치와 같은 지휘관들의 지휘 아래 유연한 전술적 사고, 모든 제대의 주도권 행사 및 공세적인 전투 지휘에 기반을 둔 독일군의 군사 교리를 정립했다. 이 결과 전격전은 제2차 세계대전의 3대 전격전으로 알려진 1939년 폴란드 공격, 1940년 프랑스 전역 그리고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전격전은 항상 적의 물리적인 자산을 파괴하기보다는 적의 정신적인 응집력과 의지를 파괴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합리적인 지휘체계를 갖고 있던 독일군과 명장들은
어떻게 20세기에 출현한 가장 사악한 정권인 히틀러의 나치에게
영혼을 팔았는가?


히틀러가 독일의 최고 권력자로 군을 장악하면서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충성하도록 모든 군인에게 “나는 독일 제국과 국민의 최고 지도자이며 독일군의 통수권자인 아돌프 히틀러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용감한 병사로서 나의 생명을 바칠 것을 하나님 앞에 성스럽게 맹세한다”라는 충성 맹세를 강요했다. 독일을 거침없이 전쟁으로 몰아가던 1936년부터 1938년에, 조직적으로 자신에게 대항해 독일군을 동원할지도 모르는 마지막 고위층 장군들의 기반을 약화시키거나 제거했다. 1936년 라인 지방을 재점령했고, 1938년 3월에 오스트리아를 확보한 그 후 4년 동안 히틀러와 히틀러의 독일군은 승리의 가도를 달렸다. 히틀러와 나치 통치 집단에 대한 반대는 가망이 없어 보였다. 1942년까지 폴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및 소련에서 히틀러가 거둔 승리는 그에게 완전한 승리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장군들은 히틀러가 독일을 파멸로 이끌고 있다고 항상 경고했지만, 그는 계속 승리했다. 그는 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절대우위의 전투력을 보유한 군대들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독일인들과 일반 병사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마술사가 됐다.

이 같은 인기를 바탕으로 히틀러는 진급과 돈으로 장군들을 자신에게 충성하게 만들었다. 장군들에게는 진급과 함께 명예, 특권 및 부가 함께 따라왔다. 원수의 연봉은 2000년도 기준으로 약 20만 달러에 달했다. 이 외에도 새로 진급한 원수는 부동산을 구입할 수 있는, 세금이 면제된 현금을 받았다.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와 빌헬름 카이텔 원수는 현재 가치로 100만 달러 상당의 첫 수당을 받았고, 리터 폰 레프 원수는 50만 달러 상당의 첫 수당을 받았다. 카이텔은 후에 추가 수당으로 300만 달러 이상을 받았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보잘것없는 월급을 견뎌야 했던 장교들에게는 엄청난 액수였다. 그 당시 독일의 산업 근로자들의 1개월 평균 봉급은 140달러였다.

이렇게 히틀러에게 영혼을 팔았던 독일 장군들은 승리했을 때 히틀러에게 영혼을 팔았고, 사태가 악화되었을 때는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독일 장군의 정치적인 약점은 용서될 수 있지만, 그들의 도덕적인 파산은 해명하기가 어렵다. 전쟁이 끝난 후 그들은 다만 직업 군인이었을 뿐이고 나치와 무장친위대의 잔인한 행동은 자신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 주장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독일 장교들과 부대가 소련에서 나치의 킬러 부대들과 함께 협조된 작전을 했던 열정은 그들이 열등한 민족으로 취급한 유대인과 슬라브족의 말살 작전에 얼마만큼 적극적인 동참했는가를 증명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