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동양철학의 이해 (독서>책소개)/2.한국철학사상

퇴계이황 시선

동방박사님 2021. 12. 22.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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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퇴계의 시는 한마디로 ‘온유돈후(溫柔敦厚)’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급박하지 않고 항상 온화하며, 또한 시심이 두터워 너그러웠던 것이다. 때문에 퇴계의 시는 자신의 각고하고 정심한 성품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 점에서 시만 짓는 선비들과는 처지가 달랐다. 도학자로서의 깊은 사색이 밑바탕이 되었기에 더욱더 소중한 것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이취(理趣)를 드러내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두고두고 새겨 읽을 만하고 선인의 탁월한 삶의 지혜가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퇴계는 선비이자 대학자이며 순정(純靜)한 기품을 지닌 시인이었다. 그의 사상은 이후 영남학풍의 사표가 되었다. 나아가 도학과 심학을 결합시키면서 예교를 확립하는 데 노력함으로써 후대의 유가의 스승으로 길이 추앙받게 되었던 것이다.

목차

본집
길 선생 정려를 지나면서·15
월영대에서·17
서당에서·18
태안에서 새벽에 거닐며 경명 형님이 그리워·19
청평산을 지나다가·20
독서당 뒷산에 올라 임형수에게·25
저물녘에 거닐며·26
황중거의 방장산유록에다·28
농암 선생께·29
반악의 전기를 읽고서·30
말 위에서·31
백운동 서원의 여러 학도들에게·32
퇴계에서·33
도연명의 시집에서 ‘집을 옮기고 지은 시’를 차운하여·34
도연명의 시집에서 ‘음주’ 이십 수를 화답하여·35
계당에서 우연히·38
화담집 뒤에다·40
붉은 복사꽃 아래에서 김계진에게·41
셋집에서 일찍 일어나·42
꿈속에서도 날 보고 싶어 시를 지었다는 제자 태수에게·43
용수사에서 농암 선생께·44
인간 세상의 참된 사내·45
도학을 강론하며·46
연말이라 집으로 돌아가는 제자들에게·47
서재에서·48
도산서당·49
언덕을 넘어 서당에 이르며·50
김을 빨리 맨다고 뿌리를 남겨서야·52
꿈속에 궁궐 들어가·53
용수사에서 글을 읽는 손자 안도에게·54
잘못된 책을 불태웠다는 소식을 듣고·55
역동서원이 이루어졌기에·56
말세의 학문들은·57
고향 서재에 작은 매화가 피었다기에·58
서울에서 내가 매화에게·59
매화가 나에게·60
도산 달밤에 매화를 읊어·61

외집
탁청정 주인이 내게 편지를 보냈는데 강고에 임시로 머물러 있다고 비웃는 내용이 있으므로 재미삼아 절구 두 수를 지어 주다·65
조사경이 병 때문에 청량산으로 가자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기에, 금협지가 화답한 운으로 시를 지었다·67
들못·69
김유지의 탁청정에 걸라고 시를 지어 부치다·70
율곡에게 지어 주다·72
산에서 나온 다음날 황중거에게 차운하여 답하다·74
계재에서 정자중에게 부치다·76
매화와 함께 시를 부치면서·77
신해년 이른 봄에·79
금문원의 심경 절구에 차운하다·83
조사경을 생각하며·85
정원의 매화·86
조사경에게 부치다·87
조사경이 부용봉을 읊은 여러 시에 차운하다·88
유이득이 그린 두 마리의 소 그림에 쓰다·91
한사형과 남시보의 시에 차운하여 답하다·92
계장에서 백강이 찾아온 것을 기뻐하다·93

별집
의령공의 삼우대·97
곤양에서 관포 어득강 선생이 지은 동주서원 열여섯 수의 절구에 차운하다·100
곤양에서 어관포 선생을 모시고 까치섬에 노닐다. 이 날 밀물과 썰물에 대해서 논하다·104
꿈 속에서 지은 시에 보태어 짓다·106
형님이 진휼경차관의 임무를 띠고 선산에 와서 성묘를 한다고 들었지만·108
전의현 남쪽을 가다가 산골에서 굶주린 사람들을 만나다·110
병으로 눕고 더위에 지쳐 금호자 임형수를 그리워하다가 책상 위에서 오산록을 집어 들어 읽고는 그 뒤에 쓰다·111
남경림이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어 서쪽으로 가게 되었으므로 지어
주다·112
청심루에 묵다·114
꿈을 적다·114
양생론·116
선조의 묘에 술을 뿌려 제사지내며·119
한가롭게 지내며·121
임대수가 찾아와 시에 대하여 논함을 기뻐하다·124
한윤명이 내 글씨를 구하기에·129
남시보가 보내준 시를 받들어 답하다·133

속집
반궁·137
해바라기·138
만취당의 시를 차운하다·139
양지현 청감당에서 남경림의 운으로 짓다·140
우연히 읊다·141
또 의고시에 화운하다·142
양벽정에서 조계임의 시를 차운하다·144
사락정에 제하여 부치다·145
삼월 병중에 뜻을 말하다·149
절구·151
규암의 시에 차운하다·154
임사수가 서당에서 인상인을 데리고 와서 시권에다 시를 지어 달라고 청하니 세 수이다·156
관음원에서 비를 피하다·158
사인거사 노인보가 찾아왔기에 앞의 운을 써서 짓다·159
계장에서 우연히 쓰다·161
동암에서 뜻을 말하다·162
사물을 관조하다·163
황중거가 보내준 시에 차운하다·164
어제 농암선생을 뵙고 물러나와 느낀 바 있어 두 수를 짓다·165
동래 여조겸·167
상산 육구연·168
동짓달 열엿새에 눈이 오다·169
손자 아몽의 이름을 안도라 짓고는 절구 두 수를 지어 그 뜻을 보여주다·173
죽마 타고 같이 놀던 벗들·174
책을 읽고 보내온 조카의 시를 보고·175

부록
퇴계의 생애와 시/윤기홍·179
연보·183
原詩題目 찾아보기·185
 

저자 소개

저 : 퇴계 이황 (退溪 李滉 (1501-1570))
 
등으로 합격, 32세에 문과 초시 2등으로 합격하고 다음 해인 33세(1533)에 반궁(泮宮)에 유학하며 경상도 향시에 합격한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와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36세에 선무랑과 성균관전적을 거쳐 9월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37세에 선교랑, 승훈랑, 승의랑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 박씨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난다.

39세에 3년 상을 마치고 홍문관부수찬을 거쳐 수찬지제교로 승진해 40세에는 사간원정언, 승문원교검,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교리에 임명되었고 42세에는 홍문관부교리, 충청도·강원도어사로 순찰했으나, 43세에 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임했다. 이후 종친부전첨, 세자시강원필선, 사간원사간, 성균관사성 등에 여러 차례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44세 10월에 상경한 후 중종이 승하하자 부고와 시장을 집필했다. 47세 7월에 안동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했다. 홍문관응교에 제수되어 상경해 사퇴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48세에 외직을 자청해 단양군수로 취임했다. 10월에 풍기군수로 전임했다. 49세에 소수 서원을 개칭해 사액 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9월에 신병으로 사임해 귀향했다. 그러나 신병을 이유로 세 번이나 사직원을 제출한 후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퇴계로 돌아와 임소를 이탈했다는 죄목으로 직첩을 박탈당했다. 50세에 예안 하명동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학문에 전념한다. 53세 4월에 성균관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한다.

54세에 형조·병조참의,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썼으나 이듬해 병으로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한다. 56세에 도산에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찬 완성하고 다음 해인 57세에 도산 서당을 지을 터를 마련하고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저술했다. 58세에 대사성에 임명되자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59세에 휴가를 얻어 귀향한 후 관직을 사임하고 『송계원명리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을 저술했다.

60세에 고봉 기대승(奇大升)과 편지로 사단칠정론(四端七情)을 변론했다. 도산서당(陶山書院)이 완공된다. 61세에 「도산기(陶山記)」를 저술했다. 64세 2월에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의 발문을 썼으며 65세에 『경현록(景賢錄)』, 『역학계몽(易學啓蒙)』, 『명당실어(名堂室語)』 등을 저술했다. 66세에 공조판서와 홍문관·예문관대제학에 제수되었고, 다음 해인 67세에 다시 예조판서, 경연춘추관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명하고 8월에 귀향, 역동 서원(易東書院)을 새로 건축했다.

68세에 선조 원년 의정부우찬성과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자 6월에 소명을 어기지 못해 상경해 양관의 대제학을 겸임했다. 재임 중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했다. 69세(1569)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명하고 귀향했다. 70세 7월 역동 서원에 가서 『심경(心經)』을 강의하고, 8월 역동 서원의 낙성식에 참여했다. 11월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을 개정하다 병이 심상치 않자 12월 봉화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큰아들을 사직, 귀가하게 해 장례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명문(銘文)과 자명(自銘)을 몸소 짓고, 임종 직적 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말과 함께 한서암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영의정에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계몽전의』, 『송계원명이학통론』, 『퇴계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