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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교토에서 본 한일통사』는 매년 수십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들이 방문하지만 이름난 절이나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에 그쳐 미처 발견하지 못한 교토의 한일관계의 현장과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1592년 3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20만 대군을 출병시킨 곳이 바로 교토라고 이야기한다.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근대화 혁명 메이지 유신이 진행됐던 20년간, 쇼군(將軍)과 덴노(天皇)의 지지자들이 서로 죽고 죽였던 도시의 뒷골목이었으며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 그 수로 부하장수의 전공을 가늠했고, 뒤를 이은 도쿠가와 바쿠후의 쇼군들이 만들어놓은 조선인의 귀와 코를 묻은 무덤이 있는 곳 등 역사의 눈으로 한일관계 속의 교토를 바라보고 있다.
10여 년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학생과 일반인을 위한 ‘역사기행’을 인솔해 온 저자가 교토의 거리가 아닌 역사의 현장으로 두 나라의 관계를 기억하게 하는 책이다.
저자는 1592년 3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20만 대군을 출병시킨 곳이 바로 교토라고 이야기한다.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근대화 혁명 메이지 유신이 진행됐던 20년간, 쇼군(將軍)과 덴노(天皇)의 지지자들이 서로 죽고 죽였던 도시의 뒷골목이었으며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 그 수로 부하장수의 전공을 가늠했고, 뒤를 이은 도쿠가와 바쿠후의 쇼군들이 만들어놓은 조선인의 귀와 코를 묻은 무덤이 있는 곳 등 역사의 눈으로 한일관계 속의 교토를 바라보고 있다.
10여 년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학생과 일반인을 위한 ‘역사기행’을 인솔해 온 저자가 교토의 거리가 아닌 역사의 현장으로 두 나라의 관계를 기억하게 하는 책이다.
목차
책을 내면서
창신의 역사, 교토 2000년
옛스러우면서도 새로운 교토
도래인과 한반도의 영향, 교토의 문명
누가 교토를 개척했는가?
일본의 지성이 흠모한 신라의 걸물(傑物)
무사의 세상, 교토의 변신
무사의 등장과 바쿠후의 성립
전국동란과 선종사원의 융성
임진왜란과 교토의 조일 갈등
풍운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교토 개조
교토에 떠도는 조선인의 원혼
교린교역과 교토의 활력
지략과 간계가 뒤엉킨 임진왜란의 강화회담
갈등을 평화로 포장한 사절외교
비단·인삼·은화의 교역과 교토의 번영
메이지 유신과 교토의 재생
유신의 활극, 무너지는 교토
교토의 재생, 근대도시로의 변신
한국강점, 교토의 충혼과 애련
제국일본의 한국침략
충혼과 애련을 증언하는 유적
한국지배, 교토 한국인의 생활
일본에 온 한국인, 그들의 삶
한국인 노동자의 생활과 저항
한국인 유학생의 애환과 민족운동
상생공영, 한일연대의 교토
제국일본의 붕괴와 민국일본의 전개
상생공생을 촉구하는 한일연대의 사적
마치며
참고문헌
찾아보기
창신의 역사, 교토 2000년
옛스러우면서도 새로운 교토
도래인과 한반도의 영향, 교토의 문명
누가 교토를 개척했는가?
일본의 지성이 흠모한 신라의 걸물(傑物)
무사의 세상, 교토의 변신
무사의 등장과 바쿠후의 성립
전국동란과 선종사원의 융성
임진왜란과 교토의 조일 갈등
풍운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교토 개조
교토에 떠도는 조선인의 원혼
교린교역과 교토의 활력
지략과 간계가 뒤엉킨 임진왜란의 강화회담
갈등을 평화로 포장한 사절외교
비단·인삼·은화의 교역과 교토의 번영
메이지 유신과 교토의 재생
유신의 활극, 무너지는 교토
교토의 재생, 근대도시로의 변신
한국강점, 교토의 충혼과 애련
제국일본의 한국침략
충혼과 애련을 증언하는 유적
한국지배, 교토 한국인의 생활
일본에 온 한국인, 그들의 삶
한국인 노동자의 생활과 저항
한국인 유학생의 애환과 민족운동
상생공영, 한일연대의 교토
제국일본의 붕괴와 민국일본의 전개
상생공생을 촉구하는 한일연대의 사적
마치며
참고문헌
찾아보기
출판사 리뷰
16세기 최악의 국제약탈전쟁 : 임진왜란
역사란 기억의 묶음이다. 과거의 사실보다 그 기억으로서 존재한다. 1592년부터 7년간 한반도에서 벌어진 하나의 전쟁을 한국은 ‘임진왜란’, 일본은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중국은 ‘원조선(援朝鮮, 조선을 구해주었다는 뜻)’이라고 부른다. 어떻게 기억되는가에 따라 이름마저 달라지는 역사인식은 오늘날 역사분쟁이 끊이지 않는 근본 원인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의 예는 역설적으로 한국과 일본이 뗄 수 없는 역사적 공동체 운명으로 얽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14만 명의 조선인이 끌려간 노예사냥전쟁이자, 조선의 책·그림·도자기 등 문화예술품은 물론 가축과 나무까지 가져간 국제약탈전쟁이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빼앗은 인적?물적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근세문화를 발전시킨 반면, 조선은 그 손실을 치유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아야만 했다. 어쩌면 이후의 역사에서 두 나라가 서로 다른 운명을 걷게 된 것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전쟁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오늘날 교토의 도시경관을 만든 사람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정권을 잡자, 강력한 권력을 휘둘러 자신의 화려한 거처를 만들고, 성벽을 쌓고, 곳곳에 산재하던 사원을
한 데 옮기는 등의 대규모 토목공사를 끊임없이 벌였다. 급히 공사하느라 멀쩡한 건물의 담벼락과 지붕을 뜯어다 썼다니! 잘 닦인 길로 구획된 계획도시이자 ‘꽃비단’ 같다고 찬양되던 우아한 고도(古都) 교토를 단 6년 동안 완전히 지워버린 셈이다. 그 기간은 히데요시가 최고권력자인 쇼군으로 교토에 군림했던 기간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렇듯 철저히 난폭한 방식으로 교토를 개조한 것만 봐도 당시 무장들의 일처리가 어떠했나 잘 알 수 있다. 히데요시는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 그 수로 부하장수의 전공을 가늠했고, 뒤를 이은 도쿠가와 바쿠후의 쇼군들은 그때 벤 조선인의 귀와 코를 묻은 무덤〔耳塚〕을 참배하도록 통신사를 압박했다. 조선침략이 시작된 곳도 무고한 민중의 잘린 귀가 묻힌 곳도 모두 교토다.
한국과 일본, 운명의 갈림길 : 메이지 유신
바쿠후를 무너뜨리고 덴노에게 정권을 돌려주려는 정치혁명, 메이지 유신이 전개된 1850년대 중반부터 1870년대 중반까지 혁명의 현장, 교토에서는 보수와 개혁, 폭력과 탄압, 배반과 타협, 혁명과 전쟁의 드라마가 숨 가쁘게 전개되었다. 지금도 거리 곳곳에서 유신지사 아무개가 은거했던 곳, 아무개가 죽은 곳 등을 알리는 표석을 발견할 수 있다.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고 덴노가 권력을 되찾아 황도(皇都)의 자존심을 세웠지만, 메이지덴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쿄로 천도하면서 교토는 정치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비록 정치의 중심지는 도쿄에 양보했지만, 역사와 문화, 그리고 경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업을 벌이며 다시 한번 활기찬 대도시를 건설했다. 특히 산을 뚫어 터널을 내고 바로 오사카 등 항구와 연결되는 교역로를 개척한 비와코 소수(疏水)공사로 오늘날 오랜 역사에 기반한 거대한 관광산업을 일궈냈다.
메이지 유신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근대화운동이다.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해 부국강병을 추구하면서 서구 열강과 함께 제국주의의 길을 갔다. 반면 조선은 그런 일본의 확장정책에 희생되어 국권을 빼앗겼으니 우리에게도 메이지 유신은 의미심장한 역사의 분수령이다.
역사란 기억의 묶음이다. 과거의 사실보다 그 기억으로서 존재한다. 1592년부터 7년간 한반도에서 벌어진 하나의 전쟁을 한국은 ‘임진왜란’, 일본은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중국은 ‘원조선(援朝鮮, 조선을 구해주었다는 뜻)’이라고 부른다. 어떻게 기억되는가에 따라 이름마저 달라지는 역사인식은 오늘날 역사분쟁이 끊이지 않는 근본 원인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의 예는 역설적으로 한국과 일본이 뗄 수 없는 역사적 공동체 운명으로 얽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14만 명의 조선인이 끌려간 노예사냥전쟁이자, 조선의 책·그림·도자기 등 문화예술품은 물론 가축과 나무까지 가져간 국제약탈전쟁이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빼앗은 인적?물적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근세문화를 발전시킨 반면, 조선은 그 손실을 치유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아야만 했다. 어쩌면 이후의 역사에서 두 나라가 서로 다른 운명을 걷게 된 것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전쟁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오늘날 교토의 도시경관을 만든 사람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정권을 잡자, 강력한 권력을 휘둘러 자신의 화려한 거처를 만들고, 성벽을 쌓고, 곳곳에 산재하던 사원을
한 데 옮기는 등의 대규모 토목공사를 끊임없이 벌였다. 급히 공사하느라 멀쩡한 건물의 담벼락과 지붕을 뜯어다 썼다니! 잘 닦인 길로 구획된 계획도시이자 ‘꽃비단’ 같다고 찬양되던 우아한 고도(古都) 교토를 단 6년 동안 완전히 지워버린 셈이다. 그 기간은 히데요시가 최고권력자인 쇼군으로 교토에 군림했던 기간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렇듯 철저히 난폭한 방식으로 교토를 개조한 것만 봐도 당시 무장들의 일처리가 어떠했나 잘 알 수 있다. 히데요시는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 그 수로 부하장수의 전공을 가늠했고, 뒤를 이은 도쿠가와 바쿠후의 쇼군들은 그때 벤 조선인의 귀와 코를 묻은 무덤〔耳塚〕을 참배하도록 통신사를 압박했다. 조선침략이 시작된 곳도 무고한 민중의 잘린 귀가 묻힌 곳도 모두 교토다.
한국과 일본, 운명의 갈림길 : 메이지 유신
바쿠후를 무너뜨리고 덴노에게 정권을 돌려주려는 정치혁명, 메이지 유신이 전개된 1850년대 중반부터 1870년대 중반까지 혁명의 현장, 교토에서는 보수와 개혁, 폭력과 탄압, 배반과 타협, 혁명과 전쟁의 드라마가 숨 가쁘게 전개되었다. 지금도 거리 곳곳에서 유신지사 아무개가 은거했던 곳, 아무개가 죽은 곳 등을 알리는 표석을 발견할 수 있다.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고 덴노가 권력을 되찾아 황도(皇都)의 자존심을 세웠지만, 메이지덴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쿄로 천도하면서 교토는 정치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비록 정치의 중심지는 도쿄에 양보했지만, 역사와 문화, 그리고 경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업을 벌이며 다시 한번 활기찬 대도시를 건설했다. 특히 산을 뚫어 터널을 내고 바로 오사카 등 항구와 연결되는 교역로를 개척한 비와코 소수(疏水)공사로 오늘날 오랜 역사에 기반한 거대한 관광산업을 일궈냈다.
메이지 유신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근대화운동이다.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해 부국강병을 추구하면서 서구 열강과 함께 제국주의의 길을 갔다. 반면 조선은 그런 일본의 확장정책에 희생되어 국권을 빼앗겼으니 우리에게도 메이지 유신은 의미심장한 역사의 분수령이다.
'40.한일관계사 연구 (전공분야>책소개) > 4.한일관계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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