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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미국 무역과 외교 전쟁의 역사 : 개방과 배척, 패권과 공존의 100년

동방박사님 2022. 9. 13.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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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중미 ‘무역 전쟁’, ‘패권 경쟁’은 오랜 역사의 결과물이다
중미 교역 100년, 갈등의 뿌리가 된 사건과 인물들


‘세계 경제의 뇌관’으로 상징되는 중미 관계, 한국은 이 사이에서 어떤 외교를 펼쳐야 할까? 중국과 미국은 왜, 서로를 견제하게 되었을까? 이 질문의 해법을 찾으려면 두 강국이 품은 갈등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중국과 미국이 서로에게 가진 고정관념은 무엇인지, 어떤 관계를 이어왔는지 파악해야만 우리의 역할과 지혜를 찾을 수 있다.

미국 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는 중국 출신 교수 왕위안총은 본서에서 중국과 미국이 처음 만난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무역·외교사를 짚어보며 역사 속의 중미 관계를 생생하게 소개한다. 젊은 나라였던 미국은 중국에 처음 발을 디디며 상업적 이익이 목표였다. 늙은 제국이었던 청나라는 자만에 빠져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고 몰락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두 나라 교류의 시작은 우호적 만남이었으며 오랜 시간 우정을 나누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서로에게 날을 세우게 되었을까?

이 책은 중국과 미국의 만남과 충돌을 여러 사건을 통해 보여줌은 물론 동아시아 역사의 거대한 변화도 짚어낸다. 중미 갈등의 본질을 파악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데 커다란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목차

추천의 글
서문

1부. 천조와 외번: 청대 중국의 세계 질서

1장_ 청대 중국의 외교 시스템
2장_ 19세기 중반, 중미의 ‘중흥’

2부. 영혼과 은(銀): ‘중국풍’, 차와 아편

3장_ ‘중국풍’과 유럽의 중국몽
4장_ 중국차와 미국 영혼
5장_ 중국으로 가자!
6장_ 중국의 아편과 미국의 꿈

3부. 체제와 체면: 조약, 친구, 예의

7장_ 곽량(郭梁)의 죽음
8장_ 황제를 만나다: 중미 왕샤 조약의 체결
9장_ 미국, 구석에 숨다
10장_ 무릎을 꿇는 문제

4부. 오랑캐가 중국을 변화시키다(以夷變夏): 외교, 출국, 유학

11장_ ‘진정한 친구’: 중국 흠차대신으로 임명된 미국 공사
12장_ 변화와 존중: 앤슨 벌링게임의 강연
13장_ 위대한 사업, 천추의 한: 중국 청소년 유학생의 실패 267

5부. 샌프란시스코의 꿈: 재미 중국 노동자와 화교

14장_ 1882년 배화법 탄생 전후
15장_ 록 스프링스 참사의 배상 기록
16장_ 임(林)씨 집안의 딸: 우리는 누구인가?

6부. 문 앞의 아는 사람: 대포, 조약, 애프터눈 티

17장_ 조선 반도에서 중국과 미국의 만남
18장_ 황태후(老佛爺)의 부인 외교: 자희 태후와 콩거 공사 부인

결론: 담배부터 프레더릭 로의 중국 보고서까지

역자 후기
부록
참고 문헌

 

저자 소개

 
중국 산둥성 출신으로 베이징 대학교에서 석사를 마치고 미국 코넬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근세 중국사와 동아시아 외교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델라웨어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세대학교 한국학 연구원(2010~2011), 일본 도쿄 대학교 아시아 고등연구원 방문연구원(2011~2012)을 지냈으며 저서로 만주 정권이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조선과의 관계를 밝힌 《Remaking The Chin...
 
역 : 이화승 (李和承)
 
역사학자. 타이완 국립 사범대학교 역사연구소에서 중국 명·청사, 상업사를 전공했다. 《중국의 고리대금업》, 《상인 이야기》 등 저서와 《중국의 상업 혁명》, 《동양과 서양, 전통과 근대를 잇는 상인, 매판》, 《성세위언》, 《중국 경제사 연구의 새로운 모색》, 《제국의 상점》, 《장거정 평전》, 《조총과 장부》, 《관료로 산다는 것》 등 역서가 있다. 현재 서울 디지털 대학교 중국학과 교수이다.
 
 

책 속으로

중국과 서양은 17세기 초까지 서로 만난 적이 없었다. 각자 자신들의 질서를 확립했으며 여기에 공통분모는 없었다. 중국의 전통적인 세계 인식은 동시대 서양의 그것과 확연히 달랐다. 유럽 중심의 세계 지리 속 ‘아시아’ 혹은 ‘동아시아’라는 개념은 중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중략) 그러다 100여 년 후인 1793년 중국과 서양의 세계관이 크게 충돌한다.
--- p.30

중국 관리들은 매카트니에게 세 번 무릎을 꿇고 절한 뒤,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의 예를 요구했다. 이는 중국 중심의 ‘천조 시스템’에서 오랜 전통이었다. 조선, 베트남, 시암의 공사들이 그러했듯, 영국 왕이 보낸 ‘조공 사신’은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 p.31

조선이 빈번하게 조공 사절단을 파견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면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보살핀다는 ‘사대자소(事大字小)’의 호혜 의무를 실행하면서 문화적, 경제적 이익을 취했다. 조공과 무역, 예절과 은전, 정치와 경제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 p.45

청나라 중후반까지 광저우 일대 무역은 번성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묘사한 바로 그 모습이었다. 유럽 동인도 회사 상선이 줄지어 광저우 입구 주장강(珠江)에 도착했다. 이들은 중국 비단, 칠기, 자기와 차, 동남아의 향료 등을 유럽 대륙과 식민지로 싣고 갔다. 유럽, 아프리카 식민지, 아메리카 식민지와 중국, 일본 및 인도양 국가들이 원양 무역을 통해 긴밀하게 연결됐다. 이 시기 세계는 하나의 무역 시스템 속에서 발전했다.
--- p.81

1790년대 미국 상인은 매년 광저우에서 300~500만 파운드(약 1,360~2,267톤)의 차를 수입하면서 프랑스, 네덜란드를 앞지르고 영국을 압박했다. 1806년 미국은 매년 광저우에서 1,200만 파운드(약 5,443톤)의 차를 수입했고, 이는 영국령 인도 시장과 대서양 시장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를 뛰어넘은 실적이었다. 여기에 더해 남아메리카 등에 상품을 파는 중간 교역도 하면서 미국은 대서양 국제 무역에서도 새로운 강자가 됐다.
--- p.124

미국 관리들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국에 특별히 관심을 두었으며 중국에서 사업을 했던 외조부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그 사업이 바로 아편 장사였고 이 아편이 미국의 꿈을 현실화했다는 사실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의 중간 이름 ‘델라노(Delano)’는 외가 성을 이어받은 것이고, 이 집안은 중국 아편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인 가족 중 하나였다
--- p.128

다음 날 중국 측은 무역을 허가했다. 이로써 에밀리호가 겪었던 모든 사법적, 상업적 악몽은 끝났다. 곽량, 테라노바가 죽었지만 성조기는 여전히 주장강과 화물 창고 창공에서 휘날렸다. 십삼행 상인과 통역사들은 다시 양측을 바삐 오가며 새로운 거래를 진행시켰다. 양국은 사회?사법 제도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었지만, 적어도 사업에서는 서로 좋은 파트너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 p.165

1844년 후반기는 미국과 중국 두 나라 모두 만족한 시기였다. 미국은 중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교역 범위를 넓혔고, 중국은 오랑캐를 다독여 통제했다고 여겼다. 실제로 양국은 상상 속에서 상대를 그려 나갔다. 12년간의 왕샤 조약 유효 기간이 끝나면서 이러한 “상상 속의 상대”는 엄청난 충돌을 불러왔고 양국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 p.206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중국)의 대표로서 그의 첫 방문지는 바로 자신의 조국이자 ‘세계에서 가장 젊은 국가’인 미국이었다. 1868년 2월 벌링게임 사절단은 상하이에서 증기선을 타고 캘리포니아를 향해 유럽 외교의 첫발을 떼었다. 저 멀리 대양 끝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든 것이 미지수였지만 적어도 모두의 가슴속에는 아름다운 꿈이 있었다.
--- p.251

1872년 청나라는 최초로 30명의 유학생을 미국에 보냈다. 진시황 이래 천지개벽 같은 일로 증국번, 이홍장은 “중화 문화가 생긴 이래 처음이다”라며 흥분했다. ‘천조 대국’이 처음으로 스스로 몸을 낮추어 다른 나라에 배움을 구하러 간 것이다.
--- p.268

많은 분야에서 중국은 빈손에서 시작했으니 다른 곳에서 배워서 세계적 조류를 쫓아야 했고, 유럽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에 진입한 이후에는 더욱 그 학문적 주도권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런 현상은 20세기 후반 중국 개혁 개방 이후가 아니라 19세기 청나라 말기에 이미 시작됐다.
--- p.304

1861~65년에 걸쳐 벌어졌던 남북 전쟁이 끝나자 많은 백인이 전쟁터였던 동부를 떠났다. 그들은 새로 놓인 철도로 일주일 만에 서부에 도착하여 새로운 백인 이민자 그룹을 형성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에 와서도 일자리를 얻지 못한 그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부닥치자 그 책임을 중국 이민자에게 전가했다.
--- p.314

1885년 9월 2일 오전, 약 10명의 백인 광부가 6호 광구에서 중국 광부들과 충돌하여 중국 광부 3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잠시 소강상태가 있은 뒤 오후 2시 전후, 100여 명의 무장?비무장 백인 광부가 숙소를 포위한 채 약탈하고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무방비 상태였던 중국인 수백 명이 흩어져 부근 산으로 도망쳤고 폭도들은 뒤에서 총격을 가했다.
--- p.333

동아시아에 주재하는 미국 공사들이 조중 교섭에 개입했다. 국제 외교라는 큰 무대에서 조선이 점차 독립적 외교를 펼치면서 갈수록 중국과 거리가 멀어졌다. 청 조정은 이러한 상황을 원치 않았지만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 p.424

일본은 외교적으로 큰 승리를 거머쥐었다. 포츠머스 조약 2조에서 러시아 정부는 일본의 조선 정치?군사?경제상 이익을 인정하고, 일본이 조선을 지도?보호?감리 조치하는 데 동의했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절대적인 이익을 얻어냈다. 11월 17일 조선은 마침내 을사늑약(일본 측 표기 ‘일한보호조약’)으로 일본의 ‘보호국’이 됐다. 이를 묵인한 미국은 영국 등과 함께 조선에서 공관을 철수시켰다.
--- p.427

자희 태후는 부인 외교를 통해 정치가로서의 매력과 수완을 보여주었다. 한편으론 국제 정치에서 청나라 정계 핵심 인물이 느꼈어야 할 무력감도 짐작하게 한다. 태후의 부인 외교는 나름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멸망해가는 청 왕조의 운명을 돌이키지는 못했다.
--- p.432

미국은 1784년 중국과 교역을 시작한 이래 1844년 왕샤 조약을 체결했다. 1862년 초대 공사 벌링게임이 베이징에 부임한 이후에도 중국에 대한 미국의 핵심 과제는 오로지 상업 무역의 확대였다. 이 정책은 1862년 이래 40년간 계속됐다. (중략) 상업 무역을 발전시키는 일 외에 중국과 동아시아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제국주의 세력 중 하나로 성장했다.
--- p.440
 

출판사 리뷰

우리가 몰랐던 중미 무역과 외교, 그 애증의 역사

1881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담배 왕 제임스 듀크는 담배 자동화 기계 발명 소식을 듣고 흥분한다. 그리고 중국 지도 하단에 새겨진 축척과 ‘인구 4.3억’을 보고는 “여기가 우리가 담배를 팔아야 할 곳이다!”라고 소리친다.

미국에게 중국은 담배와 인삼, 모피를 팔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아편’을 팔 수 있는 곳이었다. 흔히 아편 전쟁은 영국과 중국의 대립이라 알려져 있지만 미국도 아편 공급에 합류했으며 아편 장사를 했던 미국 상인 중에는 현재 명문가의 조상들도 섞여 있다. 그리고 중국인이 아편을 태워 번 돈은 미국의 부흥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처럼 미국이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장사를 할 곳’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가치관을 전파할 곳’이었다.

그렇다면 중국에게 미국은 어떤 의미였을까? 청나라 시대 중국은 자신을 세계의 중심이라 여겼다. 중국 외에 다른 나라는 속국 아니면 오랑캐였으며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아편 전쟁은 중국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며 개방의 문을 강제로 열었지만 그렇다고 자존심과 교만함을 포기하진 않았다. 중국은 미국에 유학생을 보내면서도 유교의 가르침을 담은 책을 매일 외우도록 강요했다.

최초의 중국과 미국은 다른 목적으로 만났지만 그래도 물건과 문화를 나누는 우호적인 벗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미국은 아편 전쟁에 합류한, 중국 상인을 죽이고 중국인 이민자를 배척한 존재로 변화했다. 실용주의 노선을 걷던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유지하려는 제국주의 국가로 바뀌었고, 중국은 개혁과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그리고 그 둘은 서서히 서로에게 벽을 세우게 되었다. 이때 생긴 고정관념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국과 미국의 외교 비사와 무역 뒤의 진실

“중국을 존중합시다(Let her alone). 중국이 독립을 누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발전하게 합시다. 중국은 여러분들을 적대시하지 않습니다.”
-본문 262쪽

이 연설은 1868년 공친왕으로부터 중국의 흠차대신 임명을 받은 미국인 벌링게임이 미국과 서구 국가들에 향해 한 것이다. 당시 미국은 중국을 동등한 무역·외교 파트너로 여겼으며 중국 역시 신생 민주주의 국가였던 미국을 신뢰했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중국의 전통적 외교관과 미국의 실용주의는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점점 위기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 책은 지난 세기 있었던 중국과 미국의 외교 비사, 무역 과정을 매우 상세히 담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놀랍고도 흥미로운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역사적 장면 1: 1784년 미국 상선 한 척이 중국 광저우에 도착한다. 미국과 중국이 최초로 무역 교류를 하는 순간이다. 당시 미국이 대중국 무역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적 장면 2: 1793년 9월 14일, 건륭 황제는 영국 왕 조지 3세가 파견한 조지 매카트니 일행을 접견한다. 그러나 이 만남은 파탄으로 끝을 맺는다. 영국을 분노하게 만든 ‘삼궤구고두의 예’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중국과 유럽의 외교 체제는 어떻게 충돌했을까?

역사적 장면 3: 1867년 공친왕 혁흔은 미국인 벌링게임을 자국 외교관인 흠차대신으로 임명해 미국으로 보낸다. 왜 청나라는 미국인에게 중대한 임무를 맡겼을까?

역사적 장면 4: 1872년 청나라는 역사상 최초로 30명의 유학생을 미국에 보냈다. 그들은 왜 오랜 전통을 깨고 ‘오랑캐 나라’에 학생들을 보냈을까?

역사적 장면 5: 1882년 서부 개척을 위해 많은 중국 노동자를 끌어들였던 미국은 중국인을 배척하는 법인 ‘배화법’을 제정한다. 이후 이어진 미국의 반중국 기조의 배경은 무엇일까?

역사적 장면 6: 1901년 9월 이홍장은 청 조정을 대표하여 미국을 포함한 11개국과 치욕스러운 신축조약에 서명한다. 미국이 중국 침탈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민간인 살해, 서태후의 부인 외교, 이민자 차별 등
알려지지 않았던 두 나라의 사건들


《중국과 미국, 무역과 외교 전쟁의 역사》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사건이 등장한다. 양국 외교에 큰 영향을 끼쳤던 역사의 뒤편을 들여다본 것이다. 1821년에 발생한 에밀리호 사건은 중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달라진 시작이었다. 미국 상선 에밀리호의 선원이 광저우에서 민간인 여성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중국은 외국인 범죄에 대한 자국 사법권을 강화하게 되었고 미국은 중국에서의 치외법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1898년 12월 13일 자희 태후(서태후)는 영국?미국?프랑스?일본?러시아?독일?네덜란드 등 7개국 공사 부인들과 ‘애프터눈 티’ 모임을 갖는다. 외견상 평화로워 보이는 이 모임은 역사상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막후의 실권자 자희 태후는 왜 이런 만남을 계획했을까? 이는 의화단 사건과 연합군의 베이징 함락으로 위기에 처한 청나라를 살리려는 눈물겨운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1925년 5월 미시시피주 대법원은 중국인 2세 학생을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쫓아낸 학교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판결한다. 또 중국인 광부들이 백인 노조에 합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백인 광부들이 그들을 총으로 살해한 사건도 있었다. 중국인의 이민을 막고 노동자를 차별하는 법안도 만들어진다. 19~20세기 중국과 미국의 교류는 중국으로서는 치욕의 나날이었다. 그리고 중국은 이때의 기억을 뇌리에 깊이 새기게 된다.

역사 속의 조선,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

이 책에는 19~20세기 국제사회에서의 조선의 모습도 소개되어 있다. 당시 중국 중심의 외교 질서에서 탈피해 세계 무대로 진출하려던 조선(대한제국)의 꿈은 현실의 벽 앞에 자주 부딪힌다. 하지만 끊임없이 조선만의 전략을 찾아내려 노력한다. 이때의 미국과 일본의 막후 협상, 중국과 조선의 외교 대립 등을 살펴보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의미이자 묘미이다. 조선을 두고 중국과 미국은 다른 명분과 이해관계를 가지고 충돌했다. 이때의 모습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21세기에 한·중·미 삼국은 경제·외교적으로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서로의 이익에 따라 외교 정책을 바꾸고, 무역 상황에 따라 경제가 요동칠 만큼 큰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매번 선택의 순간을 마주할 것이고 갈등이 격화할수록 복잡해진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이런 고민 앞에서 양국 교류의 본질을 탐구하는 이 책은 의미 있는 통찰과 지혜를 제공할 것이다.
 

추천평

현재 지구촌 최대 관심사인 중미 갈등의 요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미국과 중국이 언제 어떻게 만나 어떤 궤적을 밟아왔는가를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크게 세 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첫 번째는 무엇보다 읽기 쉽다는 점이다.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지식을 대중이 쉽고 편하게 습득할 수 있도록 대중적인 글쓰기 방식을 택했다.

두 번째 장점은 역사학도의 전문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점이다. 일반인이나 외국인이 좀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중국과 미국의 많은 사료가 생동감 넘치게 등장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책이 갖는 최대의 장점은 중미 관계에 대한 통찰력 제공이다. 왕위안총은 1784년 미 상선 중국황후호가 중국 광저우에 도착하며 시작된 중미 관계 200여 년 역사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건 미국 입장에서 단 두 가지였다고 말한다. 하나는 상업적 이익을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가치관 전파다.

미국의 눈에 비친 중국은 돈을 벌어야 할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2018년부터 본격화한 중미 무역 전쟁이 그리 새로운 일만도 아니란 이야기다. 그때나 이제나 이익을 둘러싼 충돌만이 있을 뿐이라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 유상철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