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서양사 이해 (독서>책소개)/1.로마제국사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

동방박사님 2022. 10. 20.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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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카이사르는 생전에 많은 양의 글을 남겼는데, 그가 쓴 글이나 책들 대부분은 소실되었고,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책은 『갈리아 전쟁기』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원로원파와 하나가 된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을 다룬『내전기』 단 두 권뿐이다. 두 권 모두 라틴어로 씌었으며, 특히『갈리아 전쟁기』는 '라틴 문학의 정수, 전쟁 문학의 명저' 등으로 평가받고 있다. 『갈리아 전쟁기』가 이민족과의 전쟁을 기록한 책이라면, 『내전기』는 동족과의 전쟁을 기록한 책이다. 따라서『갈리아 전쟁기』에서는 카이사르 자신이 펼친 군사적 전술과 전투 상황을 생생히 전해 주고 있다면,『내전기』에서는 동족과 싸워야 하는 고뇌와 긴박하게 돌아가는 로마 내부의 정세를 들려주며 순간순간 고민하며 망설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목차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

서문
문사 카이사르 - 전쟁터에서 글을 쓰다
무사 카이사르 - 군인의 윤리를 알다, 리더의 윤리를 알다
카이사르, 그의 삶과 죽음

제1권 기원전 58년
카이사르 42세, 갈리아 전쟁 1년째
침입자 헬베티족과의 전쟁 / 아리오비스투스와의 전쟁

제2권 기원전 57년
카이사르 43세, 갈리아 전쟁 2년째
벨가이 정복

제3권 기원전 56년
카이사르 44세, 갈리아 전쟁 3년째
알프스 산악 부족과의 전투 / 바다에서의 불리한 전투 / 부하 장교들의 승전보 / 모리니족 답사

제4권 기원전 55년
카이사르 45세, 갈리아 전쟁 4년째
게르만인과의 살육전 / 최초의 라인 강 도하 / 브리타니아 상륙 작전

제5권 기원전 54년
카이사르 46세, 갈리아 전쟁 5년째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 / 로마군 최대의 참사 / 네르비족의 총공격 / 갈리아인들의 음모

제6권 기원전 53년
카이사르 47세, 갈리아 전쟁 6년째
트레베리족의 반란 / 제2차 라인 강 도하 / 갈리아의 풍습과 제도 / 게르마니아의 풍습과 제도 /
암비오릭스 추격

제7권 기원전 52년
카이사르 48세, 갈리아 전쟁 7년째
갈리아 대반란의 조짐 / 아바리쿰 점렴 / 게르고비아에서의 패배 / 갈리아 총반란, 하이두이족 변절 / 알레시아 공방전

제8권 기원전 51년
카이사르 49세, 갈리아 전쟁 8년째
아울루스 히르티우스 서문 / 갈리아 평정을 위한 전투 / 갈리아 최후의 전투 / 임박한 내전

옮긴이의 글
카이사르 연표

[카이사르의 내전기]

서문
위기의 로마, 누구에게 손을 내밀 것인가
반역자가 된 카이사르, 전쟁을 선포하다
카이사르, 그의 삶과 죽음

제1권. 내전의 시작
로마 안에서의 음모
카이사르의 반격
코르피니움 정복
폼페이우스, 로마를 탈출하다
로마, 무혈입성하다
마실리아의 전운
일레르다, 카이사르를 고립시키다
브루투스의 해전 승전보
카이사르의 승리, 히스파이나 전투

제2권. 승리와 패배
마실리아 공성전
히스파니아 최종 장악
마실리아, 백기를 들다
쿠리오의 아프리카 전투
쿠리오의 죽음, 패배의 시작

제3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대격돌
전쟁을 준비하는 폼페이우스
에피루스 회담
카일리우스의 반란
안토니우스의 시련
마케도니아의 부정들
다라키움 공방전
카이사르의 작전, 실패하다
카이사르, 테살리아로 가다
품페이우스의 추격
최대의 결전, 파르살루스 대전투
폼페이우스의 최후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 연표

 

 

저자 소개

저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의 군인·정치가. BC 100년 7월 13일에 태어났다. 7월을 가리키는 영어의 July는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민중파인 마리우스와 인척 관계로 원로원파인 술라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는 민중파인 아내와의 이혼 명령을 거부하고 여러 곳을 떠돌며 숨어 지냈다. BC 78년 술라가 죽은 뒤 로마로 귀환, 정치생활을 시작하였으며 BC 69년에는 재무관, BC 65년 안찰관(按察官)을 거쳐...

역 : 김한영

서울 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예술 대학교에서 문예 창작을 공부했다. 그 후 오랫동안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며 문학과 예술의 곁자리를 지키고 있다.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 『단어와 규칙』, 『언어 본능』, 칼 세이건의 『에필로그』와 함께 『젊은 아인슈타인의 초상』, 『진화 심리학 핸드북』, 『헨리 데이비스 소로 평전』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제45회 한국 백상 출판 문화상 번역 부문을 수상했다.
 
 

출판사 리뷰

『로마인 이야기』를 읽었다면
이제는 『카이사르』를 읽을때다!


카이사르가 직접 쓴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 2권 세트
- 삼성경제연구소 CEO 독서클럽 선정 도서,
-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극찬한 세계 전쟁 문학의 고전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

고대의 위대한 장군이 자신의 출정을 직접 들려주는 유일한 책

기원전 100년 7월 12일에 태어나, 7월을 의미하는 영어 가 그의 이름 '율리우스Julius'에서 유래된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등의 말을 남기며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가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까지 8년 동안 지금의 서유럽에 해당하는 갈리아 지역에서 전쟁을 치르면서, 당시의 전투 상황과 정복 과정을 매년 한 권씩 기록하여 전쟁이 끝날 즈음인 기원전 51년 초에 로마에서 출간한 책이 바로 『갈리아 전쟁기』이다. 갈리아 전쟁의 승리는 그의 업적 중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번에 '사이' 출판사에서 펴낸 책은, 9세기부터 12세기 사이에 발행된 6권의 라틴어 원본을 비교하면서 영어로 번역한 H. J. 에드워즈의 '라틴어-영어 판본'인 『Caesar: The Gallic war』(Harvard University Press)를 주 텍스트로 삼았으며, 번역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라틴어 원본인 『Commentarii De Bello Gallico』와, 최근 20년 동안 출간된 영문판 4종을 함께 비교하며 번역하였다. 카이사르는 정치가로서는 공화정 체제의 파괴자로, 또는 제정帝政의 초석을 굳힌 자로 상반되게 평가된다. 정치가로서 카이사르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관점에 따라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제각기 다양한 의견을 보인다. 그러나 문사文士, 문인文人으로서의 그에 대한 평가만큼은 한결같다.

방대한 독서량, 폭넓은 저술 활동
언어 전달 능력과 문장력이 뛰어났던 카이사르의 독서량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키케로도 인정할 정도로 방대했다. 그는 갈리아 지역으로 떠나기 전까지 상당한 빚을 지고 있었는데, 그 빚의 상당수는 당시 값비싼 파피루스에 필사한 두루마리 책들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의 '자기 자신을 위한 독서 행위'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뒤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자신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때를 기다리며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독서량과 함께, 그는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도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수시로 글을 써 다양한 책을 출간했다.

전쟁터에서도 붓을 놓지 않는 문사(文士)
카이사르는 생전에 많은 양의 글을 남겼는데, 그가 쓴 글이나 책들 대부분은 소실되었고,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책은 『갈리아 전쟁기』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원로원파와 하나가 된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을 다룬『내전기』 단 두 권뿐이다. 두 권 모두 라틴어로 씌었으며, 특히『갈리아 전쟁기』는 '라틴 문학의 정수, 전쟁 문학의 명저' 등으로 평가받고 있다. 『갈리아 전쟁기』가 이민족과의 전쟁을 기록한 책이라면, 『내전기』는 동족과의 전쟁을 기록한 책이다. 따라서『갈리아 전쟁기』에서는 카이사르 자신이 펼친 군사적 전술과 전투 상황을 생생히 전해 주고 있다면,『내전기』에서는 동족과 싸워야 하는 고뇌와 긴박하게 돌아가는 로마 내부의 정세를 들려주며 순간순간 고민하며 망설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카이사르의 가장 위대한 업적, 갈리아 전쟁
갈리아는 지금의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독일, 스위스 일대를 포함하는 서유럽 지역으로, 이곳에는 기원전 60년 당시 100여 개 이상의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로마의 속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갈리아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은 수시로 로마의 국경 지대를 공격하면서 반란을 일으킨다. 카이사르는 이곳에서 그의 인생 6분의 1을 보내면서 그의 업적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게 된다. 카이사르는 이 전쟁으로 도시 국가 로마의 국경을 라인 강까지 확장시켜 로마인들에게 국경에 대해 넓은 시야를 갖게 해주었다. 또한 '로마인 최초'로 라인 강 도하를 두 차례, 도버 해협을 두 차례 건너면서 유럽 내륙에 처음으로 '그리스-로마 문화'가 전파되는 계기를 마련해 서유럽 문화권의 기초가 형성되는 틀을 제공하기도 했다. 영국의 '처칠 수상'은 영국의 역사는 카이사르가 도버 해협을 건너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까지 했다. 『갈리아 전쟁기』에서 카이사르는 '현장감 있는 전투 묘사'와 함께, 당시 로마군이 펼친 군사적 전략과 기술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또한 때론 불리한 전투 상황에서 공포에 떨며 우왕좌왕하는 로마군의 모습과(68, 115, 169페이지) 그로 인한 처참한 패배의 실상(203-214페이지), 그리고 총사즷관의 고뇌도 보여주고 있다. 반면 '부하들이 이룬 승리'에 대해서는 일일이 부하들과 병사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 공적을 글로 남겨 치하하고 있다(136페이지). 또한 적군의 용맹함도 인정하여 그 용맹함을 글 속에서 표현하고 있으며, 적군이 펼치는 전략적 우수함을 소개할 때는 자신의 놀라움을 감추지 않고 있다.

갈리아 전쟁의 내용
로마 속주의 국경을 침범한 헬베티족과 게르만족인 아리오비스투스와의 전투(제1권)를 펼친 후부터 카이사르는 적극적인 공세를 취한다. 먼저 북쪽의 벨가이를 공격했고(제2권), 알프스 산악 부족을 정복했고, 해전에 강한 베네티족과 대서양에서 전투를 펼쳐 임기응변의 전략으로 승리를 한다(제3권). 그런 다음 갈리아인을 지원하는 게르만인과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군단을 이끌고 라인 강과 도버 해협을 건넜다(제4권).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제5권)으로 갈리아 북서부에 대한 해외 세력의 개입을 차단했지만, 이때부터 '불길한 징조'(203페이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두 명의 부장과 로마군이 학살당하고 두 곳의 진지가 맹렬한 공격에 시달린 것이다. 이듬해의 원정(기원전 53년, 제6권)은 북쪽의 부족들을 정벌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다시 한 번 라인 강을 건너야 했다. 제7권은 베르킨게토릭스의 주도로 일어난 갈리아 대반란을 기록하고 있다. 아르베르니족과 핵심 부족들이 일으키고 로마와 우호관계를 유지한 하이두이족까지 가세한 갈리아 대반란은 로마의 지배를 벗어나려는 갈리아인들의 필사적인 저항이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제8권 첫머리에는 “이제 갈리아 전체가 복속되었다”라고 써 있지만 아직 몇몇 곳에서는 반란군 지도자들의 저항이 계속되었다. 8권의 마지막 몇 장은 기원전 50년의 상황을 보여준다. 이제 갈리아는 평온해졌지만 로마에서 벌어지는 몇몇 사건은 내전을 향해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는 마침내 루비콘 강을 건넌다.

카이사르의 내전기

루비콘 강 앞에 선 카이사르, 책을 집필하다

'카이사르의 암살 장면'을 순간 포착하여 네 컷으로 연속적으로 표현한 그림과, 폼페이우스의 암살 장면, 또한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가 처음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등 진귀한 시각 자료들이 풍성하게 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전투 상황을 보여주는 지도와 기원전 로마의 모습, 로마군의 무기 등의 그림들도 함께 실려 있어 독자들은 생생한 역사의 현장 속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무사武士로서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문사文士로서 뛰어난 문장력을 보이며 전쟁터에서도 집필을 멈추지 않았던 카이사르가, 긴박한 내전의 상황에서 직접 기록하여 2천 년 전에 출간한 책을 번역한 것이다. 카이사르는 여러 책을 집필했는데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책은『갈리아 전쟁기』와『내전기』단 두 권뿐이다.『갈리아 전쟁기』는 카이사르가 로마군을 이끌고 기원전 58년부터 8년간 지금의 서유럽 일대인 갈리아 지역을 정복하는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 객관적인 서술과 냉철한 관찰력, 절제된 문장 등으로 세계 전쟁 문학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국내에서는 올 7월에 '사이' 출판사에서 소개되어 한 달 반 동안 5천 부가 판매되는 등 꾸준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갈리아 전쟁기』의 끝과『내전기』의 시작 부분은 서로 내용이 이어진다.『갈리아 전쟁기』는 카이사르가 로마를 떠나 이민족들과 힘겨운 전쟁을 벌여 승리를 코앞에 두었을 때, 그를 해치기 위한 음모가 로마 안에서 진행되는 것을 카이사르가 알게 되는 상황에서 끝이 난다. 이어『내전기』는 로마 원로원들과 폼페이우스의 음모,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카이사르의 반격으로 글이 시작된다. 따라서 연대순으로 기록된 이 두 권의 책은 독립된 별개의 책이라기보다 전편, 후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민족과의 기나긴 전쟁'을 끝낸 카이사르 앞에 숨돌릴 틈도 없이 또 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동족과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 '내전'이다.

이민족과의 전쟁으로 영웅이 된 카이사르, 로마는 그를 두려워한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로마는 도시 국가에서 벗어나 광범위한 제국을 건설할 기초를 세우게 된다. 그러나 로마 내에서는 '그의 대중적 지지도와 명성, 그리고 점차 증가하는 군사력에 위협감을 느끼기 시작'하여 그를 '공공의 적'으로 선언하려고 한다. 갈리아 전쟁이 끝날 즈음 로마의 원로원과 카이사르 반대파들은 원로원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카이사르를 고립시키기 위해, 그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군사 지휘권도 반납하여 정해진 날짜까지 로마로 혼자 귀환할 것을 명하는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한다.즉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개선식을 치러야 할 카이사르를 해임, 소환하려 한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카이사르와 삼두동맹을 맺었으며 카이사르의 딸과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된 폼페이우스에게 접근하여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원로원과 힘을 합쳐 그를 몰아내자고 유혹한다. 카이사르의 승승장구에 위협을 느낀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의 손에 칼을 쥐어준다. 결국 양손에 군사력과 정치력을 동시에 쥐게 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배신하게 된다. 카이사르는 이처럼 자신을 해치려는 음모가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루비콘 강 앞에서 망설이는 카이사르, 과연 동족과 전쟁을 치러야만 하는가……?
원로원 최종 권고는 국가 비상시에만 공포되는 것으로, 지키지 않으면 반역자로 몰린다.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 그는 이제 '반역자, 반란자'의 신분이 된다. 그는 '갈리아와 로마의 국경인 루비콘 강' 앞에 선다. 그리고 망설인다. 카이사르가 강을 건넌다는 것은 내전을 치르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전의 진정한 비극'은 전쟁의 참혹한 실상뿐 아니라, 같은 민족이 둘로 나누어짐으로써 생겨가는 원한과 증오, 불신과 배신의 기나긴 여파다. 따라서 내전을 피하기 위해 루비콘 강을 건너지 말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정당한 권리와 로마 시민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 소수지도체제인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 체제를 무너뜨리고 국가 체제의 개조를 위해 내전을 감수하고라도 루비콘 강을 건널 것인가? 카이사르는 결국 결심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기원전 49년 1월 12일, 카이사르의 나이 50세가 되던 해 한겨울, 그는 결국 루비콘 강을 건넌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카이사르의 루비콘 강 도하'는 이렇게 이루어진다.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내전, 탈출과 추격의 연속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는 로마로 방향을 잡는다. 로마 내에서는 이미 카이사르가 진격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폼페이우스와 고위 관료들 대다수가 로마를 탈출한다. 이에 카이사르는 그들을 추격하여 지금의 스페인, 그리스로 이동한다. 도중에 폼페이우스 휘하의장수들이 수비하고 있는 스페인, 북아프리카 등지를 공격한다.카이사르는 내전을 치르는 동안 갈리아 전쟁에서처럼 승리의 연속을 구가하진 못한다. 그는 병사들의 수적 열세와 미숙하지 못한 전략 때문에 고전한다. 그의 부하장수들도 내전을 치르면서 전사한다. 그와 폼페이우스의 병력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각 총사령관의 나이는 폼페이우스 58세, 카이사르 52세로 서로 비슷했다. 그러나 육상 병력 '10 : 3', 해상 전력 '10 : 2', 자금 동원력 '10 : 2', 고급장교 비율 '8 : 2'로 모두 폼페이우스 측이 우세했다. 다만 실전에서의 경험이 풍부한 병사들은 '2 : 10'으로 카이사르 군대가 우세했다. 카이사르는 병사들의 열의와 경험만으로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지금의 스페인인 히스파니아에서 폼페이우스 군대와 싸우게 된 카이사르는 때마침 불어닥친 폭우로 고립된다. 이것을 본 폼페이우스 진영에서는 환호성을 지르며 자신들의 이겼다는 성급한 급보를 로마에 보낸다. 이 소식에 아직 어느 쪽에 가담할지 아직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던 원로원 의원들은 대부분 폼페이우스에게 합류한다. 키케로도 이때 폼페이우스에게로 마음을 정한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운하를 만들어 강의 물길을 바꾸어 오히려 적을 고립시킨다. 결국 폼페이우스 군대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지중해 서쪽을 장악한다. 이탈리아를 떠나 그리스의 디라키움으로 향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카이사르도 그리스에 도착한다. 그러나 카이사르 휘하의 기병대장 2명이 변절, 탈영하여 폼페이우스 측에 가담한다. 그들을 통해 디라키움 포위망에 대한 군사 정보가 다량으로 유출되면서 카이사르 군대는 무참히 죽게 된다. 단 하루 동안의 전투로 카이사르는 1000여 명의 병사와 32명의 군관과 백인대장을 읽었고, 33개의 부대기를 빼앗겼다. 또한 13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갈리아 전쟁을 함께 치른 뛰어난 장수인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와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는다. 그는 폼페이우스 측의 유혹에 넘어가 카이사를 배신하고 그들 편에 합류하여 내전 기간 동안 카이사르와 적대적 관계가 되어 치명적 패배를 안겨주기도 한다. 또한 폼페이우스 측은 카이사르가 제안하는 강화 협상을 끝내 모두 거부한다. 디라키움 공성전에서 무참히 패배한 카이사르는 그리스의 테살리아로 들어가 평평한 평지를 골라 그곳에서 폼페이우스를 맞아 결전을 치르기로 한다. 이 평원이 두 사람의 최대 격전지가 되면서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파르살루스 평원'이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선제 공격을 가한 카이사르 군대는 폼페이우스 기병을 인간 울타리에 몰아넣어 무력화시켜 결국 승리하게 된다. 이 전투를 지켜보던 폼페이우스는 패배를 직감하고 곡물 수송선에 몸을 숨겨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급히 도피한다. 기원전 48년 8월 9일에 치러진 이 전투는 결국 카이사르의 완승으로 끝나며, 내전에서의 승리를 위한 기초가 되었다.그러나 폼?이우스는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파르살루스 대전투에서 전운에 먹구름이 끼는 것을 감지한 폼페이우스는 몇 명의 부하만을 데리고 급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도피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이집트 장수들에 의해 배 위에서 목이 잘리면서 살해된다. 폼페이우스를 쫓아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한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의 잘려진 목이 전달된다. 카이사르는 그것을 폼페이우스의 아내에게 전해준다. 그의 인생 최대 라이벌이 된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알게 된 카이사르는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라는 단 한 문장으로 그의 죽음을 서술한다. 최대 정적이었지만 그의 죽음 앞에서 그는 환호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슬픔을 느낀다. 단 한 문장으로 그의 죽음을 기록하며 슬픔을 억누른다. 이로써 기원전 49년에서 시작되어 기원전 48년까지 진행된 내전은 폼페이우스의 죽음으로 제1막이 끝나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남동생이 이집트 왕권을 놓고 벌이는 내전에 개입하게 된다. 클레오파트라를 지지하게 되면서 그는 이집트 내전에 개입하게 되면서 그곳에서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치르게 된다. 역사에 의하면,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에 빠진 카이사르가 로마의 내전 상황임에도 알렉산드리아 전쟁에 개입하여 그녀를 왕위에 오르게 했다고 전한다. 『내전기』도 전쟁 후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집트를 유람하면서 기록한 것이라고도 한다. 카이사르는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고 내전이 종료된 후 그들을 로마로 불러들이기도 한다.

내전의 종료
폼페이우스의 죽음으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대결'은 끝이 나지만,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사방으로 흩어진 폼페이우스 측 잔당들과의 내전은 기원전 45년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쓴 『내전기』는 이후에 더 진행되는 '알렉산드리아 전쟁', '스페인 전쟁', '아프리카 전쟁' 등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 이후의 전쟁에 대해서는 그의 부하들이 집필했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글과 비교해 문학성도 떨어지며 명확한 서술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카이사르의 대표작『내전기』
카이사르는 자신이 직접 쓴 『내전기』에서 기원전 49년부터 기원전 48년까지의 내전 상황만을 기록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전은 기원전 45년에 끝이 나지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죽음과 자신이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하게 되는 상황에서 일단 집필을 끝낸다.
어쩌면 카이사르는 이후에 그가 치르게 된 전쟁들도 기록하려 했을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알렉산드리아 전쟁의 시작이었다.'로 끝을 맺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그에게 이후의 집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내전이 종료된 후 일 년 만에 암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갈리아 전쟁기』와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책으로, 내전 당시의 상황을 명확하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브루투스, 너마저!” 카이사르의 비극적 죽음
내전이 종료된 지 일년도 채 안되어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 회의장에서, 그것도 그의 정적이었던 폼페이우스의 입상 아래에서 23군데를 찔리면서 처참하게 죽음을 맞는다. 암살자 중엔 갈리아 전쟁과 내전을 함께 치른 그의 부하 장교들, 즉 마르크스 부루투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데키우스 브루투스, 마누카우스 바실루스 등이 포함되었다. 결국 그의 시신은 그의 노예 세 명에 의해 쓸쓸히 실려나가는 운명을 맞게 된다. (36-37페이지 그림). 그렇게 그의 56년 삶은 마감되며 로마는 공화정 체제가 무너지면서 또 다른 내전에 휩싸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