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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에타 마리아 (2022) - 혁명을 삼킨 불굴의 왕비

동방박사님 2022. 11. 9.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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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평생 왕의 딸, 왕의 누이, 왕의 아내, 왕의 모후로 살다 가는 왕실 여성들. 하지만 혁명 앞에서는 예외였다. 숟가락을 들기만 해도 국민의 입에 그녀들의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니, 그녀들의 이름이 역사에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헨리에타 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성군으로 칭송받은 앙리 대왕의 딸이자, 절대주의의 기초를 다진 루이 13세의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오라비처럼 남편이 강력한 왕권을 토대로 백성들을 보살피기를 바랐다. 하지만 국민들은 그녀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았고, 역사는 그녀를 ‘남편을 홀려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악녀’로 기록했다. 온갖 음모와 계략, 혁명의 소용돌이 탓에 악녀가 됐고, 악녀가 됐기에 불행했지만, 불행을 견뎌내 꿋꿋이 살아남은 헨리에타 마리아. 책장을 넘기면, 역사가 담지 못한 그녀의 매력과 삶, 속사정을 생생히 들을 수 있다.

 

목차

도입부-그녀는 왜 악녀가 됐을까?

1장: 프랑스의 딸-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렸지만

2장: 잉글랜드의 신부-철천지원수 같은 너란 사람

3장: 조신(朝臣)들의 왕비-우리는 누가 더 사랑하는지 겨루는 것뿐

4장: 가톨릭교도들의 왕비-가톨릭의 구원자인가, 몰락의 주범인가

5장: 왕비의 개종자들-이것이 정녕 신의 뜻입니까?

6장: 전쟁 전날 Ⅰ-그녀들이 오면 안 된다!

7장: 전쟁 전날 Ⅱ-내가 죽든지, 네가 죽든지

8장: 왕비와 전쟁 Ⅰ-그 녀석을 벽으로 던져야 했다

9장: 왕비와 전쟁 Ⅱ-이웃집이 불에 탄다면 네 집은

10장: 망명의 왕비-죽으면 말할 수 없다

11장: 샤요의 여주인-눈이 아니라 영혼이 운다

12장: 마지막-신이 발휘한 마지막 기적

가계도

참고문헌
 

저자 소개 

1912년 헨리에타 마리아의 전기 를 집필했다. 헤인즈의 작품은 역사를 단순하고 파편적으로 바라보았다는 비판을 받지만, 1900년대 초반 작품 중에서 헨리에타 마리아의 공과를 분별하고 그녀의 일생을 가장 생생히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역 : 김연수
 
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출판사에서 근무한 뒤,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번역강좌를 수료했다. 현재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훌륭한 원서를 발굴하며, 브런치(필명: Rina Ka)에서 역사 인물의 일생을 사람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알리고 있다. 유럽사를 유독 좋아하며, 역사에서 소외된 인물을 소개하기 위해 무엇이든 한다.
 
 

책 속으로

그녀는 자신이 지은 죄보다 더 심하게 비난받았다. 찰스의 실책을 짊어진 희생양이 됐기 때문이다. 그녀의 비극적인 운명은 메리 스튜어트*나 마리 앙투아네트의 운명과 맞먹지만, 역사상 운 좋게 끔찍한 죽음을 피했기에 국민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했다. 만일 끔찍하게 죽었다면, 지금도 프랑스에서 숭상하는 남자의 딸로 태어나 잉글랜드의 왕비가 된 가장 매력적인 왕비는 후세의 재판소에서 전적으로 부당하지는 않더라도 몹시 부조리하게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 p.25

그때부터 두 사람의 애정이 점점 커져서 유럽인들이 감탄하였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미적 감각이 남다른 찰스는 아름다운 부인의 얼굴을 보면서 늘 기뻐했다. 재치 있고 영리한 왕비는 밝고 호방한 버킹엄이 달랜 만큼 침울한 남편의 성정을 달랬다. 이제 이간질하던 버킹엄이 사라지자 그는 부인만 바라보았고, 둘을 지켜보던 조신들은 다른 총신이 나타날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왕은 부인에게 애정을 퍼붓고 있기 때문이었다.”
--- p.92

앞으로 혁명을 피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지 못했다. 찰스와 헨리에타는 국민의 분노를 맞닥뜨려야 했고,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사람이 그토록 기대 걸던 교황은 두 사람을 운명에 맡겼고, 리슐리외는 가끔 약간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였어도 일단 적을 지지했으며 두 사람에게 적개심을 품었다. 지난 15년 동안 두 사람의 반대파만 한결같이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청교도인이 과격하게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 섬뜩해진 잉글랜드인 상당수가 왕을 고대 헌법의 수호자로 보고(왕 자신도 그렇게 여겼다) 왕 주위에 모였다. 그러나 지평선이 어두웠고, 결말로 치달을수록 더 어두워졌다. 엘리자베스 치세, 잉글랜드에 있던 파울 그레브너가 예언했다. “북부의 왕이 다스릴 것이다. 이름은 찰스로, 메리라는 가톨릭교도를 부인으로 맞이하면 아주 불행한 군주가 될 것이다.”
--- p.228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왕비와 응접실, 아이방, 예배당에 관심을 두던 참한 숙녀는 온데간데없었다. 전쟁 전날 런던에서 웅크리고 눈물 흘리던 왕비도 사라졌다. 대신 양보와 미봉책에 일절 관심도 보이지 않고, 요람에 누울 때부터 누린 사치, 미각적이고 육감적인 놀이도 바로 근절한 채 안락, 건강, 삶에 개의치 않고 남편을 돕기 위해 바다 너머로 나서는 엄중하고 결의에 찬 여인이 보였다. 앙리 4세의 딸은 위대한 아버지를 부쩍 닮아 있었다.
--- p.232

헨리에타는 왕이 리슐리외처럼 행동하면 재앙을 자초하리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했는데, 그러려면 엘리자베스 여왕의 뇌를 장착해야 했다. 헨리에타의 뇌는 빠릿빠릿하고 생기가 넘쳤으나 이러한 사실을 절대 심오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게다가 부르봉 사람인 그녀는 남편처럼 ‘왕은 폭군이 되면 안 되고 정의와 자비를 통해 백성을 다스리되, 왕은 명령하고 백성은 자기들과 관련 있는 문제가 아니면 묻지 말고 왕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라는 말을 정치적 신조로 삼았다.
--- p.258

헨리에타는 [부르봉의 정신을 불태우며] 말했다. 벗이 떠나자 벽으로 얼굴을 돌리고 다시 걷잡을 수 없이 울음을 토해냈다. 그녀를 더 슬프게 할 존재가 하나 더 남았다. 다행히 여태껏 인식하지 못했지만, 조만간 자신이 남편을 끔찍한 운명으로 몰리도록 부추겼다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깨닫는다.
--- p.298

프랑스에서 헨리에타를 위한 큰 애도식이 거행됐다. 그녀 개인이 사랑받았을 뿐 아니라, 왕과 국민들이 그녀를 잉글랜드 왕의 과부라기보다 자신들이 한없이 사랑하는 앙리 대왕의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자식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 p.358
 

출판사 리뷰

국민 스스로 왕의 목을 벤 최초의 혁명, 국민의 원성이 대륙으로 울려 퍼지는 가운데 혁명의 성패를 좌우한 여인 헨리에타 마리아가 있었다

세계사에 기록된 최초의 혁명


큰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가 세상을 떠나고, 병자호란 때 인조를 압박했던 도르곤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유럽 전체를 뒤흔든 혁명이 일어났다. 1649년 1월 30일, 영국의 왕 찰스 1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국민의 말을 듣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정치를 하고, 무모하게 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켰다는 죄목이었다. 1642년부터 1649년까지 국왕파와 의회파로 나뉘어 내전을 치렀고, 혜성처럼 나타난 올리버 크롬웰에게 국왕이 패배하면서 벌어진 결과였다.

17세기 영국, 찰스 스튜어트가 왕위를 물려받았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비어버린 국고와 모래 위를 간신히 붙드는 왕권, 종교 갈등으로 인한 내분뿐이었다. 장미전쟁 때 귀족 가문들이 몰살당한 이후 튜더 왕가의 국왕들이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며 종교를 개혁했지만, 종교 전쟁을 막지 못했다. 늦춘 것뿐이었다. 스코틀랜드 태생이었던 제임스 1세와 그의 아들 찰스 1세는 잉글랜드 내에서 입지가 미약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왕권신수설’을 내세워서 종교 갈등을 해결하려 했다. 제임스 1세는 국교회와 비국교회 사이의 줄타기를 유연하게 해냈지만, 아버지보다 우직했던 찰스 1세는 반대편을 능청스럽게 설득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그는 총신 버킹엄 공작과 상비군 문제로 의회의 반발을 샀고 찰스는 의회 해산으로 맞섰다. 찰스 1세는 11년간 의회 없이 혼자 통치하다가, 새로운 기도서 때문에 스코틀랜드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전쟁 자금을 모으기 위해 다시 의회를 소집했다.

역사가 숨긴 왕비의 사랑과 투쟁, 그리고 용기

의회는 찰스 1세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지 않았다. 대신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왕의 종교 문제였다. 의회는 가톨릭교도 왕비 때문에 왕이 가톨릭교에 관대하게 대한다는 이유로, 왕비 주위의 측근들을 핍박하고 왕비와 왕자들을 떼어놓으려 했다. 찰스 1세는 신실한 개신교도였지만, 가톨릭교도인 헨리에타 마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초반에는 총신들의 이간질 때문에 사이가 안 좋았지만, 예술적이고 고아한 국왕과 재치 있고 영리한 왕비는 점차 서로에게 감화됐다. 의회가 같은 가톨릭교도란 이유로 왕비와 아일랜드 반란군이 공모했다고 주장하고, 대간의서로 자신들의 불만을 열거하자, 화가 난 찰스가 의원들을 체포하려고 시도하면서 내전이 시작됐다.

헨리에타 마리아는 남편을 사랑했기에, 남편을 살리고 싶었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남편이 궁지에 몰리자, 전쟁 자금을 모으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그러나 헨리에타의 고국인 프랑스도, 같은 가톨릭교를 숭상하는 교황청도 그녀의 호소를 무시했다. 그들 입장에서 영국의 왕과 왕비는 이단에게 매몰된 사람들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1649년, 찰스 1세는 내전에서 패배해,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144년 전이었다. 헨리에타는 고국에서 남편의 비극적인 소식을 들었지만, 남편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죽기 전에 위용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편을 처형한 자가 죽을 때까지 끝까지 살아남아,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헨리에타 마리아는 ‘프랑스의 세종대왕’이라 불리는 앙리 대왕의 딸, 절대주의의 기초를 다진 루이 13세의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오빠처럼, 남편이 백성에게 선정을 베푸는 군주가 돼야 하고, 이를 위해 왕의 권력이 강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남편을 위해, 나라를 위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했다. 그리고 같은 가톨릭교도가 박해당하는 모습을 보고 동정심을 느꼈다.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를 원칙으로 삼은 헨리에타를 사랑한 찰스 1세는 아내의 의견을 수용했고, 박해당하던 가톨릭교도에게 자비의 손길을 내밀었다. 헨리에타 마리아는 청교도 신자인 의원들의 사냥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의회에 굴하지 않는 왕비를 보고 역사는 ‘남편을 홀려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악녀’라고 기록했다.

내전과 혁명의 경계에 선 왕비의 일대기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국왕과 의회의 내전을 ‘청교도 혁명’이라고 불렀다. 국왕의 폭정에 맞서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거친 ‘혁명’으로 기억됐으나, 20세기 후반부터 ‘수정주의 학파’가 득세하면서, 찰스 1세를 절대악, 찰스에게 맞선 올리버 크롬웰을 절대선을 보는 이분법적인 시선에서 벗어났다. 그로 인해 영국 학계에서는 청교도 혁명이 아니라 잉글랜드 내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찰스 1세를 순교자, 성군이 되고자 한 왕으로 조명하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그러나 영국에서 외지인이었던 헨리에타 마리아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갔다. 왕의 딸, 누이, 아내, 어머니로 기억될 뿐이었다. 잉글랜드 내전은 한때 유럽 대륙 전체를 뒤흔들었지만, 후대의 굵직한 전쟁들에 비하면 내막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생소한 청교도 혁명, 또는 ‘잉글랜드 내전’으로 불리는 사건을 찰스 1세의 왕비 헨리에타 마리아의 시선에서 조망한다. 20세기 초반의 작 역사를 단순하고 파편적으로 바라보았다는 비판을 받지만, 1900년대 초반 작품 중에서 헨리에타 마리아의 공과를 잘 분별하였다. 책장을 넘기면, 기존 역사책에서 담지 못한 그녀의 매력과 삶, 속사정을 생생히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