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일본학 연구 (학부전공>책소개)/6.일본정치

유신 그리고 유신 (2022 홍대선) - 야수의 연대기

동방박사님 2023. 1. 3.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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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5.16은 한국판 ‘쇼와 유신’이었다!
메이지 유신에서 10월 유신까지, 『바람의 검심』에서 김재규까지…
괴물이 된 유신의 생성과 폭주, 부활과 소멸의 150년을 쫓는 본격 추적물!

‘유신’은 메이지 유신(일본)과 10월 유신(한국)의 정치적 사건만이 아니다. 『유신 그리고 유신』은 외세와 일본의 두 번의 만남(여몽연합군의 침공과 페리 제독의 흑선)에서 싹트기 시작한, 자기신성화와 자기파괴의 정념인 ‘유신’을 주인공 삼아 일본과 한국의 근현대사를 추적한다. 만주침략, 중일전쟁, 동남아시아 침략과 태평양전쟁… 일본의 폭주는 결국 가미카제와 ‘1억 옥쇄’ 그리고 미군의 원자폭탄 투하로 종결되었다. 그것은 한편 ‘유신’의 종말이었지만, ‘유신’은 바다 건너 한반도에서 부활하였다.

박정희와 김재규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유신의 세계관 안에서 성장했다. 한국은 ‘10월 유신’ 이전에 이미 ‘유신’과 만났었다. 박정희의 ‘5.16’은 당시 제3세계에 흔했던 여느 쿠데타와 달랐다. 메이지유신 전후의 사무라이들, 군부가 앞장선 혁명을 주창한 기타 잇키와 황도파 청년장교 등을 잇는 한국의 유신, 더 적나라하게는 일본에서 실패한 ‘쇼와 유신’의 한국판이었다. 일본의 유신이 폭주해 일본국민을 인질로 삼아 위기에 이르렀듯, 박정희의 유신도 폭주해 국민 살해의 임계점에 도달했었다. 부마항쟁 당시 몇 백만을 죽여도 괜찮다는 박정희의 뜻을 가까스로 막아낸 것은 마지막 ‘유신 지사’ 김재규였다.

 

목차

1장 씨앗: 바람이여, 흉포해져라
2장 잉태: 초대받지 않은 손님
3장 탄생: 신성한 타락
4장 팽창: 전쟁중독
5장 폭주: 정결한 세계를 지키는 야만
6장 광기: 순수의 시대
7장 임종: 덴노 헤이카 반자이
8장 부활: 윤리적 세계와 미학적 세계
9장 절정: 최고의 사랑, 완전한 사육
10장 완성: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다
후기: 유신의 제단

저자 소개 

저 : 홍대선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문학과 칼럼, 시나리오 등 다양한 글쓰기를 해왔다. 국내 최초 인터넷 신문인 《딴지일보》에서 일하며 쓴 <테무진 to the 칸>은 역대 최고 조회수를 기록했다. 인문교양 팟캐스트 〈안 물어봐도 알려주는 남 얘기〉 등의 진행자로도 활동했다. 지은 책으로 《1미터 개인의 간격》, 《어떻게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는가》, 《테무진 to the 칸》, 《축구는 문화다》, 《태양의 해적》 등이...
 

책 속으로

이 책의 주인공은 한국도 일본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유신 그 자체다. 나는 유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다룰 것이다. 이 책에서 유신은 사건이 아니다. 1868년의 일본 메이지 유신도 아니고, 1972년 남한에서 일어난 10월 유신도 아니다. 이 둘은 사건으로서의 유신이며, 사건의 명칭일 뿐이다. 근본적인 유신은 현실의 사건들을 만들어낸 상상력이다. 상상의 구체적 내용은 관념과 정념이다. 관념은 믿음이다. 유신의 믿음은 자신이 위대해지기 위해 남을 파괴해도 된다는 신앙이다. 정념은 욕망이다. 유신의 욕망은 스스로 아름다워지기 위해 죽어도 되는 자기파괴의 충동이다. 유신은 관념과 정념이 결합해 낭만의 들숨과 비극의 날숨을 얻은 인격적 생물이다. 우리는 유신의 탄생과 성장, 죽음 그리고 부활의 대서사시를 살펴볼 것이다. 유신은 일본에서 탄생하고 성장한 후 한국에서 완성되었다가 소멸했다. 유신은 낭만과 비극의 150년이다. 가깝고도 먼 두 나라의 살갗에 화상처럼 새겨진 강렬한 흔적이다.
---「1장 씨앗: 바람이여, 흉포해져라」중에서

요시다 쇼인은 그다지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그의 사상은 분량도 지나치게 짧고 비논리적이며 근거도 없다. 그 정도 수준의 학문을 가진 이는 어느 시대나 흔하디흔하다. 나는 요시다 쇼인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가 어째서 지금처럼 중요하게 취급되는지 되묻는 것이다. 한 인물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은 후대인의 취향이 결정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원래 ‘성지’를 만들어 찾아가기를 좋아한다. “일본을 일으켜 세운 유신→유신의 중심이 된 조슈 번→조슈 번 사무라이들의 사상과 패기→그들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 이렇게 순서를 거꾸로 되짚어 송하촌숙을 성지로 받들겠다면 그건 그들의 자유다. 같은 원리로 큰 강의 근원지가 되는 작은 샘물은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다만 진실은 수많은 물줄기와 지하수, 빗물이 모여 비로소 큰 강을 이룬다는 것이다.
---「2장 잉태: 초대받지 않은 손님」중에서

‘결과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일본을 통치하게 되었을 때,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했다. 그들은 미토 번사들의 최후 대신 자신들의 성공신화를 음미했다. 그 모든 무모함과 과격함은 결국 옳았다. 일본은 옳은 나라이므로 이제 밖/세계를 상대로, 즉 청나라와 러시아, 미국에 싸움을 걸어야 한다. ‘상대가 강대한데도 불구하고 / 옳은’ 전쟁이므로 싸운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에는 ‘상대가 강대한 만큼 무모한 전쟁이므로 / 옳다’는 무서운 관념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살아남지 못해 지워진 미토 번 대신 어쨌든 살아남아 역사에 길이 남은 죠슈와 사쓰마의 운명은 이후 일본이 겪은 폭주의 경로와 그 결과를 예고하는 불길한 징후로 남았다.
---「3장 탄생: 신성한 타락」중에서

청일전쟁의 기적 같은 승리는 제사에 하늘이 응답한 결과였지 않은가. 일본은 언제나처럼 또 다른 제사를 준비했다. 일본은 본격적인 전쟁국가로 진화한다. 역사 속에 출현한 전쟁국가는 전쟁기업의 형태를 띤다. 일례로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제국은 전쟁을 지속함으로써 성장동력을 유지했다. 전쟁 국가에 있어 전쟁은 어디까지나 도구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일본의 전쟁국가화는 전쟁을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모든 것을 제사에 쏟아붓고 결과를 하늘에 맡기는 관념적 의식이 시작되었다.
---「4장 팽창: 전쟁중독」중에서

일본 군부에 있어 재일 조선인은, 히틀러에게 있어 독일에 사는 유대인과 같은 의미의 땔감이었다. 일제 군부는 자신들이 도취한 유신의 정념에 일반 국민을 포섭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폭력의 공범으로 만드는 것’이다. 설득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며, 반박에 재반박을 반복해야 한다. 공범끼리는 토론할 필요가 없다. 외부의 더러움으로부터 신토를 지켜야만 하는 유신의 관념 안에서 학살은 성전(聖戰)이 되었다. 일본 군국주의는 조선인들의 시체 위에서 완성되었다. 그리고 정해진 수순처럼, 다음에 차릴 제사상을 일본인들의 시체로 채우게 된다. 관동대지진 2년 후 1925년, 유신은 군국주의 일본의 틀을 완성한다. 치안유지법을 통해서다. 치안유지법은 한국의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의 아버지다. 대지진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수습한다는 핑계로 실행된 치안유지법의 핵심은 두 가지다. 감히 천황제의 신성함을 의심하지 말 것 그리고 사유재산 제도를 부정하지 말 것이다.
---「5장 폭주: 정결한 세계를 지키는 야만」중에서

쇼와 천황은 군부대신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이 모르는 전쟁이 발발했는지. 스기야마 하지메는 천황 앞에서 이미 시작된 전쟁을 물릴 수는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한 달이면 중국 전토를 정복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며 천황을 위로했다. 일본 군부는 스기야마 하지메가 너무 낙관적이라며 냉정하게 분석하면 3개월은 걸릴 거라고 천황 앞에서 그를 나무랐다. 그로부터 4년 후, 스기야마 하지메는 쇼와 천황에게 어째서 아직도 중국이 정복되지 않았느냐는 질책을 들었다. 그렇게 유신은 중일전쟁, 아니 죽음의 길로 홀린 듯 빠져들었다. 태생부터 자살적인 유신의 숙명이었다. 중국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돈과 자원이 필요했다.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그리고 태평양을 점령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태평양 지배권을 놓고 미국과 싸워야 했다. 일본은 전쟁을 위해 전쟁을 벌이고,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지’하거나 ‘확대’하기 위해 또 전쟁을 시작했다. 그 종착역은 필연적 죽음이었으므로, 이제 유신 자체가 된 일본은 죽음을 짝사랑하기 시작한다. 옥쇄, 반자이 돌격, 가미카제는 모두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6장 광기: 순수의 시대」중에서

유신은 어째서 도조 히데키, 무타구치 렌야, 스기야마 하지메, 도미나가 교지와 같은 저질 인간들에게 운명을 맡기게 되었는가. 수십 년 전으로 되돌아가면 유신 지사들은 적어도 비겁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한다는 믿음에 따라 한뎃잠을 잤고, 방랑했고, 전투와 암살에 뛰어들었으며, 목숨을 내던졌다. 나는 이 죽음의 정념이 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아무리 유신 지사들을 비판해도 ‘남을 위해’ 죽기로 작정했었다는 사실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1940년대의 일본제국은 자신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인물들이 움직였다. 이는 사실 유신의 정해진 운명이다. 순수한 사람들의 투쟁과 순수성 투쟁은 다르다. 그러나 순수한 사람들의 투쟁은 순수성 투쟁을 불러온다. 순수성 투쟁의 시대엔 순수한 사람들이 승리하지 않는다. ‘순수하다고 주장하고 연기하는 자들’이 내부투쟁에서 승리한다. 그들이 정말로 순수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순수한 투쟁가는 행동하기 바빠서 말에 시간을 쓸 틈이 없기 때문이다.
---「7장 임종: 덴노 헤이카 반자이」중에서

빈농의 자식이 아니었다면, 박정희는 기타 잇키를 사상적 스승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2·26사건에서 결기부대가 구원하고자 했던 이들은 일본인의 다수를 차지하는 시골의 비참한 농민이었다. 물론 구원의 방식은 자의적이고, 폭력적이며, 강압적이다. 그리고 자기 파멸적이었다. 그래서 박정희는 사회주의자인가, 군국주의자인가? 욕망의 화신인가? 모두 아니다. 박정희의 복합성을 설명하는 하나의 단어, 그것은 ‘유신’이다.
---「8장 부활: 윤리적 세계와 미학적 세계」중에서

국민은 박정희가 ‘빨갱이’였고 ‘만주군’이었어도 1960년대에는 그가 유용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를 선택했다. 국민은 박정희를 충분히 사용했다고 판단하고 민주주의에 눈을 돌렸다. 이제 국민의 눈에는 민주주의와 미국식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기능이 추가된, 김대중이라는 신상품의 성능이 더 좋아 보였다. 박정희는 천황에 대한 사랑으로 천황을 납치하려고 한 조슈 번사들처럼, 국민을 위해 국민을 납치하려고 했다. 자신의 통치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만 국민은 모른다. 그렇다면 국민을 사육해야 한다. 그저 그런 사육은 억압일 뿐이다. 하지만 박정희에게 ‘완전한 사육’은 ‘사랑’이었다.
---「9장 절정: 최고의 사랑, 완전한 사육」중에서

대한민국 국민은 박정희만큼 전두환을 인정하지 않았다. 집권 7년 내내 전두환과 그의 아내 이순자는 조롱과 욕설의 대상이었다. 김재규가 민주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면, 그건 너무 멀리 엇나간 발언이다. 한국의 민주화는 어디까지나 국민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1987년 6월항쟁에서 국민이 전두환을 상대로 승리하게 된 요인에 김재규의 총탄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시간이 흐르고 한국인들이 과거를 침착하게 복기할 수 있게 된 현재 김재규가 재평가의 대상이 된 일은 당연하다. 이 책을 쓰는 지금, 김재규는 반역자로도 불리지만 동시에 의사(義士)로도 불린다. 그러나 나는 확언한다. 그는 의사가 아니라 지사이며, 최후의 유신 지사다.
---「10장 완성: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다」중에서

힘은 국민에게 있었다. 박정희가 산업화를 지도한 것이든 유도한 것이든, 혹은 그저 제안했을 뿐이든 땀 흘려 노동한 주체는 국민이었다. 이승만을 하와이로 쫓아내고 박정희가 들어설 자리를 마련한 것도, 투표로 박정희를 승인한 것도, 부마항쟁으로 박정희가 죽는 무대를 마련한 것도, 박정희의 자리를 차지한 신군부 독재를 몰아낸 것도 국민이다. 어쩌면 국민이 군부독재를 끝내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이제는 의미 없는 가정이 되어버렸다. 이미 게임은 끝났다. 국민은 언제나 옳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민은 언제나 예제에서 정답을 도출하는 수학 선생이 아니다. 국민은 정답을 맞추지 않는다. 정답을 만든다. 그러므로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도, 4년 만에 그를 끌어낸 것도 한결같이 정답이다.
---「후기: 유신의 제단」중에서
 

출판사 리뷰

이상하고 기묘한 정념, 죽음을 탐미하는 낭만과 폭력의 역사!
‘유신’의 눈으로 한일 근현대사의 주요 대목들을 조망한다.

일본 근현대사의 흥성과 파멸은 모두 ‘유신’ 때문이었다.
어떻게 한 나라의 역사가 이렇게 폭주할 수 있었는가, 에 대한 명쾌한 대답.

‘유신’은 메이지 유신(일본)과 10월 유신(한국)의 정치적 사건만이 아니다.
한국은 ‘10월 유신’ 이전에 이미 ‘5.16’으로 유신과 조우하였다.
한일 역사의 문제적 인물들을 움직인 동력, 그것이 ‘유신’이다.


#1 자네들은 ‘유신’을 계속하라!

1936년 2월 29일, 나흘 전 시작한 청년장교들의 쿠데타(2.26사건)가 이제 막 종막으로 치닫고 있었다. 일본국 육군 제1사단 보병제3연대 제6중대장 안도 데루조 대위는 황도파 청년장교의 한 명으로서 군부 내 라이벌인 통제파의 상급자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을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다. 안도는 쿠데타를 말렸으나 결국 쿠데타가 일어나자 누구보다 열심히 현장을 지휘하고 사수하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토벌군의 투항 권유 방송이 계속되자 안도는 부하들에게 투항을 명령한 뒤 자신의 목을 향해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즉사하는 데 실패하고 후에 사형 당했다).

안도 데루조는 자결을 말리는 부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전에 이 중대장을 혼낸 적이 있지. 중대장님, 언제 궐기하는 거냐고 말이야. 이대로 두면 농촌은 구할 수 없다면서. (*결국) 농민은 구하지 못하고 말았네.” 다른 부하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들은 ‘유신’을 계속하라.”

‘쇼와 유신’을 내걸고 궐기한 청년장교들과 그들의 사상적 지도자 기타 잇키는 이후 재판에서 사형과 투옥 등을 받으며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 당했다. 안도는 살아남은 부하들이 ‘유신’을 계속하기 바랐지만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안도 데루조의 유언과도 같은 말에서 ‘유신’은 우리가 익히 아는 역사책의 한 항목,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어떤 관념이고 정신이고 정념임이 드러난다. 그것은 자기가 속한 세계를 바꾼다는 믿음 아래 자기와 타인을 기꺼이 파괴해버리는 마음이다.

#2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다

유신은 선언이 아니다. ‘이제 일본이 재통일되었으니, 유신이란 것을 선포한다.’는 의식 같은 건 없었다. 지금은 메이지 유신 원년으로 불리지만, 1868년 당시는 한쪽에서는 신정부가 수립되고 다른 쪽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난세의 시기였다. 유신(維新)이라는 말은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서경(書經)》에 기록된 표현이다. 고대 중국의 주나라가 체제를 완전히 새롭게 정비해 멸망의 위기를 극복하고 되살아난 사건을 유신이라고 한다. 막부를 뒤집어엎은 신정부세력은 자신들의 성공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서경》에서 ‘유신’이라는 표현을 찾아 사용했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은 여러 유신 지사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투쟁한 결과 주어진 선물이었다. 수십 년이 지나 청년장교들의 2.26 쿠데타가 ‘쇼와 유신’을 내걸었던 것처럼,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유신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목숨을 걸고 행동에 나서는 이들의 대의명분이 되었다. 하지만 성공신화는 어느새 고스란히 실패담으로 이어졌다. 대의명분을 내걸고 일본제국의 번영과 성공을 부르짖으며 사실은 자기 앞가림에만 열중하거나, 자기 생각에 현실을 뜯어 맞추며 부하와 동료, 국민들을 태연히 위험에 빠트리는 자들이 일본을 이끌었다. 이상하고 기묘한 우연이 모여 일본의 성공을 이루었지만, 그것은 언제라도 허물어질 수 있는 위험한 질주였다. 일본 근현대사에 흔적을 남긴 문제적 인물들은 과감하게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으로 역사 진행을 앞당기거나 궤도를 이탈하곤 했다. 만주침략, 중일전쟁, 동남아시아 침략과 태평양전쟁… 거침없던 일본의 질주는 결국 가미카제와 ‘1억 옥쇄’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종결되었다. ‘유신’의 종말은 그만큼 파괴적이었다.

대한민국 독립에 공헌한(?) 비밀 독립지사로까지 불리는 무타구치 렌야는 버마와 인도의 접경지역에서 벌어진 임팔전투에서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황군은 먹을 것이 없어도 싸워야 한다. 무기가 없다, 탄약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 등은 퇴각의 이유가 될 수 없다. 탄약이 없다면 칼로, 칼이 없다면 맨손으로, 맨손도 안 되면 다리로 걷어차라, 다리도 당하면 이빨로 싸워라. 일본 남아에게 야마토 정신이 있다는 것을 잊었는가?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다.” 자기파괴적인 유신-관으로 무장한 일본은 이처럼 파괴적인 생각을 앞세워 미국, 중국, 소련 등과 전쟁을 시작했으나 세 방향 모두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유신이 마침내 당도한 초라한 결말이었다.

#3 성공한 ‘쇼와 유신’ 5.16과 유신 지사 박정희와 김재규

유신은 그냥 영영 사라지고 말았을까? 일본에서 파멸을 맞은 유신은 바다 건너 한반도에서 조용히 부활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마침내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역사에서 해방되었다.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를 경험한 이들과 달리, 한반도의 어느 세대는 ‘일제’를 조국으로 한 채 태어나 자랐다. 공과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어도, 해방 이후 지금 우리와 잇닿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만드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역시 박정희를 꼽을 수밖에 없다. 그 박정희와 박정희의 폭주를 막은 김재규는 각각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유신’의 세계관 안에서 성장하였다.

한국은 1972년의 ‘10월 유신’으로 명칭을 달기 이전에 이미 유신의 시대에 돌입해 있었다. 박정희와 그를 따르는 청년장교들의 ‘5.16’은 당시 제3세계에 흔했던 여느 군인들의 쿠데타와 달랐다. 메이지유신 전후의 사무라이들, 군국주의로 치닫던 시기의 황도파 청년장교들, 세계전쟁을 꿈꾼 이시와라 간지와 군부가 앞장선 혁명을 주창한 기타 잇키 등을 잇는 한국의 유신, 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해 일본에서는 실패한 ‘쇼와 유신’의 한국판이었다. 가난한 농민의 자제들인 사병들로부터 일본의 진짜 현실을 전해 듣고 새로운 일본의 장래를 추궁 당했던 안도 데루조와 황도파 청년장교들처럼, 박정희는 스스로 발견하고 체험한 가난한 대한민국의 농촌을 구원하고, 산업화된 대한민국을 건설하고 싶어 했다. 5.16 이후 전투적으로 진행된 산업 발전은 가까이는 만주국의 경험, 더 거슬러서는 전쟁과 국가총동원체제로 성장한 일본 유신의 한국판이었다.

하지만 자기파괴의 정념은 결국 한계에 도달한다. 일본의 유신이 폭주해 일본 국민 전체를 인질로 삼아 위기에 이르렀듯(이들은 1억 옥쇄를 진심으로 믿고 따르려 했고, 그 1억 명 속에는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정희의 유신 역시 폭주해 국민 살해의 임계점에 도달했었다. 부마항쟁 당시 몇 백 만 명을 죽여서라도 나라와 정권을 지키겠다는 박정희의 뜻을 가까스로 막아낸 것은, 한때 그가 사랑하고 믿었던 김재규였다. 러일 전쟁의 영웅 ‘노기 대장’을 가슴에 품고 성장했던 김재규는 ‘유신’의 세계관 안에서 성장했고, 그가 주군 대신 택한 ‘국민’을 위해 마지막 바친 충정은 몇 발의 탄환이었다. 김재규는 마지막 유신 지사였고, 박정희의 죽음으로 유신은 마침내 150여년 역사의 긴 질주를 끝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