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조선시대사 이해 (책소개)/5.조선역사문화

사도세자의 죽음과 그 후의 기억 (2015) - 『현고기(玄皐記)』번역(飜譯)과 주해(註解)

동방박사님 2024. 5. 29.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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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1762년의 임오화변이라 불리는 사도세자 피화의 전말, 그리고 사도세자 추왕(追王)을 둘러싼 쟁론 및 그 경과 등을 적은 기록서인 『현고기(玄皐記)』를 번역한 책이다. 『현고기는 본래 「원편」과 「속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후대의 필사 과정에서 임오화변이나 시(時)·벽(僻) 당쟁에 관련된 여러 기록이 부가되기도 하였다.

「원편」에서는 진종(眞宗)의 서거와 사도세자의 출생, 궁중의 암투와 사도세자의 행적, 세자 보호세력과 반(反)세자세력의 동정과 갈등 양상, 영조대 후반부의 정국 동향, 세손의 대리청정, 영조의 승하 직전 전위(傳位)의 전교 등을 연대순으로 기재하였다. 「속편」에서는 정조의 즉위와 즉위 이후 내려진 여러 처분, 김귀주 등에 대한 유배, 시파와 벽파의 동정과 갈등 양상, 현륭원 조성의 과정, 정조의 원행(園行), 영남유생 1만 명의 선세자 신원 상소 등 정조 때의 여러 사실을 수록하였다.

목차

머리말
『현고기』 해제
권1. 원편(原編) 상(上): 고조되는 사도세자의 위기

효장세자의 죽음과 사도세자 출생 이전 상황
사도세자의 출생과 어린 시절
신임의리를 둘러싼 갈등과 음해
1749년 대리청정 이후 고조되는 부자간 갈등
사도세자 보호세력의 동향
사도세자 음해세력의 준동
1759년 세자에게 충고하는 상소들
영특하고 총명한 세자가 점점 병들다
1760년 세자의 온천 행차
사도세자와 음해세력의 갈등
사도세자에 관한 날조된 소문들
사도세자의 평행 행차의 실상
평양 행차를 비판하는 상소들
1761년 5월 8일 유신(儒臣)·대신(臺臣) 청대(請對)
사도세자의 행적을 비판하는 상소문
세자를 비판하는 상소문을 본 영조의 처분
1761년 10월 9일 세자의 영조 알현
1762년 나경언 고변 사건과 세자의 고뇌

권2. 원편(原編) 하(下):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과 세손 시절의 정조
세자를 폐하는 반교문(頒敎文)
역모죄로 추궁당하는 사도세자
뒤주 속에 갇힌 세자의 죽음
세자를 보호하려는 신료들의 충정
세자의 죽음을 방조한 사람들
세자의 죽음 후 세자 궁료 및 민심의 동향
세자 보호를 자처했던 조재호의 몰락
세자의 죽음이 몰고온 정치적 파장
임오의리(壬午義理), ‘애통은 애통이요, 의리는 의리다’
갑신처분(甲申處分), 사도세자의 아들에서 효장세자의 아들로
세자의 죽음을 방조한 이들의 두려움
영조의 후회
홍봉한을 위기에 빠뜨린 최익남의 상소
공홍파(攻洪派)의 공격과 홍봉한의 실세(失勢)
살홍파(殺洪派)의 대두
홍봉한을 역적으로 탄핵한 김구주의 상소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추도 및 세자 보호세력의 신원(伸寃)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홍인한의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
홍인한을 비판하는 서명선의 상소
심상운의 상서와 세손의 정치적 위기
임오년 기록의 세초(洗草)와 갑신처분의 재확인

권3. 속편(續編) 상(上): 정조 즉위 전후의 역모 사건과 사도세자
영조의 승하와 정조의 즉위
효장세자 및 사도세자의 추숭
홍봉한의 죄상에 관한 논란
김상로, 문녀, 문성국 처벌
사도세자 관련 상소자들을 처형하다
환관 김수현 옥사
문성국이 참소한 본말을 전교하다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한 홍인한 등의 죄를 논한 정조의 윤음
세손을 음해하려 한 심상운의 죄상
임오년의 일과 송시열을 거론한 이응원의 상소
역적을 토벌한 교서를 반포하고 문녀를 사사하다
홍봉한에 대한 탄핵이 일어나자 김구주를 유배 보내다
김구주와 정이환에 대한 정조의 조처를 비판하는 한후익의 상소
자객을 동원하여 궁궐을 범한 홍상범 등의 옥사
은전군 찬이 김구주와 연루되어 죽다
역적의 토벌을 주장하는 이복원의 상소
홍국영이 갑자기 사직하다
김하재와 이율의 옥사
문효세자와 구선복의 죽음
역적의 발본색원을 주장한 심낙수의 상소
영남 유생 조덕린, 황익재의 복관을 논의하다

권4. 속편(續編) 하(下): 사도세자의 추숭을 둘러싼 갈등
현륭원으로의 이장
현륭원 지문과 모년 의리의 재조명
묘소를 옮기며 지은 만장들
김상로의 무덤을 파내다
은언군 이인 처벌을 둘러싼 갈등
자신의 죄를 변명하는 김한기의 상소
정휘량과 신만의 죄를 재론한 윤숙의 상소
경연 복설을 주장하는 유성한의 상소와 이를 둘러싼 갈등
토역론을 주장하는 영남 남인의 만인소
김종수를 성토하는 박종악의 상소
금등의 문자를 공개하다
사도세자 추숭과 옥책문
부록 1. 오회연설(五晦筵說)을 붙임
부록 2. 영남 유생(嶺南儒生) 이휘병(李彙炳) 등 만인상소(萬人上疏)
부록 3. 광무(光武) 연간 관련 기사
부록 4. 시벽 본말(時?本末)

저자 소개

저 자 소 개
김용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학사. 연세대학교 사학과 석사, 박사 현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朝鮮後期 政治史 硏究 I: 仁祖代 政治論의 分化와 變通論』 (2006), 『목민고, 목민대방(역주)』 (2012), 「조선후기 당론서의 객관적 연구는 가능한가?」(2012), 「‘당론서(黨論書)’를 통해서 본 회니시비(懷尼是非): 『갑을록(甲乙錄)』 과 『사백록(俟百錄)』 비교」(2012) 원재린 ...

책 속으로

‘우리 저하께서 대조의 인정을 받지 못해서 장차 어떤 화변(禍變)이 어디에서 일어날지 모른다’고 운운합니다. 이렇게 낭자한 말을 오직 저하께만 고하지 않아서 저하는 모르십니다. 신이 저하를 위해서 한마디 하고 죽어서 저하께서 알게 하려고 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빨리 경계하시고, 크게 징계하시어, 두려움으로 스스로를 다스려서 공손히 아들로서의 직분을 닦으소서.
사람이 죽는 것은 또한 중대한 일이니, 반드시 백 가지 이익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뭇 욕망을 모두 정화(淨化)한 연후에야 한 번 죽음을 결단할 수 있는데, 지금 신이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죽음에 임해서 드는 한 가지 생각은 오히려 신의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이로써 미루어보면 대조의 저하에 대한 사랑이 어찌 이와 다르겠습니까. 오직 저하께서 우러러 본받을 줄 모르니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 p.33

세자가 일찍이 궁료와 더불어 조용히 대화하였다. 말하기를,
“내가 어렸을 때는 성격이 자못 너그러웠고, 대조께서도 또한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근래에는 노여움이 다시 격해지니 어떻게 다스려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세자 시강원 신료 모(某)가 대답하기를,
“절대로 참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세자가 말하기를,
“이런 말을 들으니 마음이 매우 우울하다. 노여움이 일어나면 무엇이 무엇인지를 구별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해야 참을성이 생기겠는가?”라고 하였다.
세자 익위사의 신하들을 둘러보면서 말하자, 시직(侍直) 한건이 말하기를,
“참는 것은 진실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주(人主)의 분노는 필부나 서인(庶人)과 달라서 다치게 하는 것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분노가 비록 일어날 때라도 반드시 자애하는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 p.38

“동궁이 어떤 사람과 즐겁게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심화(心火)가 치밀어오르자, 철편(鐵鞭)을 휘둘러 그 옆에 있던 사람이 맞아 죽었다. 애증을 분간하지 못한 것이 마치 날씨가 갠 날에 밝았다가 어두운 구름이 갑자기 가리는 것과 같았다. 시전(市廛)의 물화(物貨)를 거두어들이고, 인명을 살상하는 각궁(角弓)을 빼앗은 것 등은 모두 궁례의 무리가 일찍이 한 번 토색한 것으로 인해서 드디어 제멋대로 널리 거두어들여 강탈해서 스스로 이익을 취하고 나쁜 소문은 동궁에게 돌아가게 한 것이다”고 운운하였다. --- p.51

세자가 갇힌 지 9일 만에 죽었다[卒]. 죽은 뒤 곧 위호(位號)를 회복시켜주었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더하였다. 궁관(宮官)에게 상복을 입도록 하였고 빈궁과 세손을 다시 입궁하게 하였다. 세자가 대리청정하던 것을 거두고 주상이 정사에 복귀하였는데 나라의 경사라 칭하며 진하(陳賀)하였다.
7월 23일에 장례를 지냈다. 주상이 친히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처음에는 장례 도구를 간소하고 소박하게 하라고 명하였으나 이내 다시 후하게 지내라고 명하였다. 관을 내릴 때 주상이 왕림하여 지켜보았고, 신주를 친히 쓰며 말하기를,
“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모두 한 것이니, 너는 슬퍼하지 마라”고 하니, 좌우가 모두 비통해 하였다. --- p.83

세자가 죽자 서명응의 부인 이씨가 여러 날 동안 소식(素食)을 하였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세자가 관서(關西)를 다녀온 일에 대해 서명응이 상소하였는데 세자의 허물을 드러내는 말이 많았다. 사람들은 서명응의 상서에 세자를 동요하려는 뜻이 있으므로 장차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야 말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오랜 친구들이 서둘러 절교하는가 하면 혼인을 약속한 이들이 취소하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어울리려 하는 이가 없었고, 문에는 찾아오는 빈객이 없었으며,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을 때는 교유문(敎諭文)을 지으려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사람들이 그를 위태롭게 여겼다. 이와 같았는데도 이씨가 소식을 행하였으니, 진실로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떳떳한 마음을 가졌다고 하겠다. --- p.114

저들 무리가 처음에는 이와 같이 혼란스럽고 무서운 말을 하여서 한번 시험해보려고 하다가 내가 엄히 배척하는 바람에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자, 다시 방향을 바꾸어서 영합하려는 계책을 썼다. 그리하여 직숙(直宿) 중 술자리에서 이들 두 역적이 사람을 물리치고 사사로이 기사년(1689, 숙종 15)의 여론(餘論)을 의논하여 또 나의 귀에 흘러들어오게 함으로써 후일 나의 환심을 사고 은총을 얻는 바탕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홍상간의 공초(供招)에서 과연 민항렬과 모의한 일이 있다고 하였는데, 또 민항렬의 공초에서도 과연 모처(某處)에 말을 전한 일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 그 음험하고 참담하며 교묘하고 간악한 전후의 정절(情節)은 참으로 전고에 일찍이 없었던 난신적자(亂臣賊子)의 그것이라고 하겠다. --- p.194

“전하는 그 몸이 존귀한 임금의 지위에 계시고, 유성한의 무리가 북면(北面)하여 신하로서 섬긴 지 지금까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그런데도 오히려 더욱 방자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천만 부당하게도 허황되고 사실무근인 여악(女樂)이란 두 글자로써 위로 주상을 무함하고 전국에 반포하여 후세에 보이려고 하였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지난날 거짓말로 속이는 것이 어디엔들 이르지 못하였겠으며, 지난날 무고하고 핍박함이 어느 곳엔들 미치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거짓말로 속이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속임을 징험할 수 있고, 지금 무고하여 핍박한 것으로 보아 당시 무고하여 핍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p.283

사람으로서 인륜이 없으면 사람이 되지 못하고 나라에 인륜이 없으면 나라가 되지 못한다. 하물며 임금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만약 효친(孝親)·존현(尊賢)의 도리를 조금이라도 다하지 못했다고 한탄하는 자가 있어 조정에서 손뼉 치고 입을 놀린다면 나라는 그 나라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경들이 어찌 연교(筵敎)를 기다려서 알겠는가. 인륜이 있는 뒤에 사람이 되고 나라가 된다. 경들이 반나절 동안 관을 벗고 단지 명을 기다린다고만 말하면 과연 대의(大義)에 무슨 도움이 되며 나에게는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경들은 그 (의리를) 천명하고 발휘할 방도를 생각하라.”
--- p.313

출판사 리뷰

이 책은 1762년의 임오화변이라 불리는 사도세자 피화의 전말, 그리고 사도세자 추왕(追王)을 둘러싼 쟁론 및 그 경과 등을 적은 기록서인 『현고기(玄皐記)』를 번역한 책이다. 『현고기는 본래 「원편」과 「속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후대의 필사 과정에서 임오화변이나 시(時)·벽(僻) 당쟁에 관련된 여러 기록이 부가되기도 하였다.

「원편」에서는 진종(眞宗)의 서거와 사도세자의 출생, 궁중의 암투와 사도세자의 행적, 세자 보호세력과 반(反)세자세력의 동정과 갈등 양상, 영조대 후반부의 정국 동향, 세손의 대리청정, 영조의 승하 직전 전위(傳位)의 전교 등을 연대순으로 기재하였다. 「속편」에서는 정조의 즉위와 즉위 이후 내려진 여러 처분, 김귀주 등에 대한 유배, 시파와 벽파의 동정과 갈등 양상, 현륭원 조성의 과정, 정조의 원행(園行), 영남유생 1만 명의 선세자 신원 상소 등 정조 때의 여러 사실을 수록하였다.

부록류에는 1800년 정조가 승하하기 직전 연신(筵臣)들에게 자신의 임오의리를 설명한 ‘오회연설(五晦筵說)’, 1855년에 사도세자의 추존(追尊)을 청하는 ‘영남유생 만인소(萬人疏)’, 1899년에 사도세자의 묘호(廟號)를 결국 장조(莊祖)로 추왕(追王)한 것 등 정조 승하 이후 전개된 사도세자 관련 사안, 세자 보호세력인 홍봉한에 대한 대처를 둘러싸고 노론이 시파와 벽파로 분열하게 된 과정과 시·벽파 인사들의 동향을 설명한 「시벽본말(時僻本末)」 등이 있다.

『현고기』에서 거론된 내용은 왕실과 연결되어 있는 노·소론 핵심가문의 내밀한 기문(記聞)을 출처로 한 경우가 많아서 상당수가 정권 핵심과 연계된 고급 정보들이다. 이 때문에 『현고기』에는 연대기 자료에서는 잘 파악되지 않는 임오화변 관련 속사정, 특히 영조를 포함한 궁중 인사들과 사도세자의 호오(好惡) 관계, 이와 관련된 중요한 일화, 노론 시파·벽파의 분열, 소론 준론과 노론 및 남인의 연대 등 임오화변의 전말을 이해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들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까지도 여러 논란이 재생산되고 있는 임오화변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고기』를 읽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 책이 『현고기』의 일독에 도움이 됨으로써 임오화변에 대한 풍부한 인식에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임오화변의 전모를 파헤치다

영조는 천인 출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우여곡절을 거쳐 이복형 경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뒤, 52년 가까이 재위하였다. 그런데 자신이 후계자로 지명한 세자를 8일 동안이나 뒤주에 가두어놓고 굶겨 죽였다. 사도세자의 죽음, 이것은 조선후기 정치적 갈등이 가장 극단적으로 표출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상식적으로만 본다면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모친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閑中錄)』 과 정조가 작성한 『현륭원지문(顯隆園誌文)』 을 비롯하여 다양한 입장의 당론서가 존재한다. 여기에 번역한 『현고기(玄皐記)』 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정치적 음모의 소산이라는 입장의 당론서다. 그 작성자로 알려진 박함원(朴涵源)·박종겸(朴宗謙) 부자는 소론 준론(峻論) 계열의 관인이었다. 숙종대 서인과 남인이 교대로 집권한 환국의 와중에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는데, 소론은 탕평론(蕩平論)을 제창한 당파였다. 경종·영조대 소론 준론은 숙종대 제창된 탕평론을 가장 원론적으로 실천하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런데 소론 준론에 대한 반대 세력이 노론은 물론 소론 내에도 광범위하게 존재하였다. 이들의 갈등은 결국 사도세자와 영조의 갈등으로 전이되어, 사도세자의 죽음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당쟁망국론의 극복과 조선후기 정치사를 이해하는 방법

조선왕조가 멸망한 뒤, 당쟁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당쟁망국론이 횡행하였다. 당쟁망국론은 일제강점기에 당파성 이론으로 확대?재생산되어 식민사관의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되었다. 해방 이후 역사학계에서 식민사관을 비판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당쟁망국론은 아직도 지식인들 사이에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고, 교과서에서도 그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조선후기에는 경제, 사회, 문화는 발전하였지만 정치는 당쟁과 같은 무의미한 권력투쟁만을 반복하였을 뿐, 이러한 사회변동을 제도로 수렴하지 못하여 결국 조선왕조 국가는 식민지로 전락하였다는 구도가 그것이다. 당쟁은 당시 지배층이 사리사욕만을 추구한 결과였으며, 그 결과 정치는 당리당략에 의해 좌우되었을 뿐이라는 인식이다. 이러한 사고는 오늘날 정치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으로 연결된다.

조선후기에 당쟁이 정치의 주된 부분이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당시에 권력자들, 또는 권력을 추구하는 자들이 사적인 이익과 권력욕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모략과 음모가 난무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조선시대 정치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 가운데는 국가의 위기를 직시하고 봉건사회의 모순을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관인(官人)·유자(儒者)들 또한 존재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양반 지주 출신이면서도, 양반·지주의 특권을 제거 내지 약화시키려는 제도 개혁을 주장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세력에 끈질기게 맞서서 관철시켰던 정론가들도 있었다.

조선후기 정치사는 표면상 붕당의 이합집산으로 표출되었으므로, 각 당파의 당론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고는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정치사 전공자가 아니라면 당론서를 직접 보고 당시의 정치적 맥락에서 독해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에 당론서 번역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조선후기 정치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서 당쟁망국론을 극복하고, 정치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을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