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인물사 연구 (독서>책소개)/2.한국인물평전

이승만 시간을 달린 지도자 1 (2024) - 성장부터 해방까지 1875~1945

동방박사님 2024. 6. 12.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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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승만이라는 현대사의 최고봉

필자는 대한민국 ‘발전’의 최고봉인 이승만을 탐험하게 됐다. 2010년 출범한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초대 원장을 맡으면서 필자는 이 높디높은 봉우리를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이 책을 내는 2024년으로부터 14년 전 일이었다. 봉우리가 높은 만큼 탐험은 힘들었다. 물살이 센 깊은 계곡을 넘기도 했고, 멀고도 긴 능선을 하염없이 걷기도 했다. 돌계단을 밟다 헛디뎌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고, 나무뿌리를 부여잡고 미끄러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봉우리를 찾아 만났다.

이승만이라는 봉우리는 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모습이 달리 보일 뿐만 아니라, 봉우리에 이르는 길도 여럿 존재한다. 이리 갈지 저리 갈지 논쟁 끝에 다투기도 했으며 때로는 혼자 가야만 할 경우도 없지 않았다. 여럿이 갈 땐 즐겁기도 했지만, 이 길이 맞나 하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혼자 갈 땐 물론 불안감이 더 커지기도 했다. 계곡 속에서 봉우리가 보이지 않을 땐 우왕좌왕 맴돌며 길을 헤쳐나가야만 했다. 그리하여 14년 동안 오르고 올랐다. 이 책은 이렇게 만난 이승만이라는 봉우리를 필자가 찾아간 기록이다.

목차

서문: 이승만이라는 현대사의 최고봉

01. 이승만 연구, 역사적 진실 밝히기 위해 ‘전쟁’도 불사해야
02. 이승만 90 평생에 동아시아 국가 중 대한민국만 운명 바뀌어
03. 시대 배경에 자신의 선택을 교차하면 11단계의 삶
04. 과거급제로 집안 일으키려던 이승만의 꿈, 갑오개혁으로 좌절
05. 배재학당에서 ‘영어’는 물론 정치적인 ‘자유’를 배우다
06. 요즘 국회 격인 중추원 첫 회의서 고종 거스른 발언으로 체포
07. 이승만, 감옥에서 권총 들고 탈옥하다 붙잡혀 종신형 선고받아
08.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주옵소서… 우리나라를 구해주옵소서”
09. 교인의 두 가지 문제는 ‘정치상 조급함’과 ‘교회에 편벽됨’이라
10. 옥중 이승만, 1903년 2월 3일 제국신문 논설 ‘국문교육’을 쓰다
11. 이승만, 순 한글로 쓴 ‘청일전기(淸日戰記)’ 1900년 옥중 탈고
12. 1904년 옥중 이승만 ‘문화재급’ 책 ‘독립정신’ 원고 완성
13. 이승만의 ‘옥중잡기’ 중 ‘러시아 피터 대제의 유언’과 우크라 전쟁
14. 1904년 8월 9일 이승만, 5년 7개월 복역한 감옥 문을 나오다
15. 이승만이 ‘상동청년학원’ 교장 취임 3주 후 급히 미국으로 떠난 까닭
16. 이승만·윤병구, 1905년 8월 4일 미 대통령 루스벨트 만나 대한 독립 요청
17. WP 1905년 1월 17일 이승만 인터뷰 기사, 일(日) 만행 세계에 고발
18. 이승만 아들 7살 태산, 미국 온 지 10개월 만에 디프테리아로 사망
19. 이승만, 1912년 프린스턴 박사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 출판
20. 1910년 귀국한 이승만, 서울 YMCA ‘한국인 총무’ 겸 ‘학감’으로 활약
21. 1912년 감리교 총회 참석 이승만, 윌슨 가족 만난 후 박용만과 하와이로
22. 이승만 정착한 1913년 하와이, 미주(美洲) 한인의 66% 6,000명 거주
23. 하와이 정착 두 달 만에 ‘105인 사건’ 다룬 ‘한국교회핍박’ 출판
24. 이승만 하와이 한인 위해 언론·출판·교육·교회 ‘다양한 활동
25. 이승만의 ‘실력양성’ vs 박용만의 ‘무장투쟁’, 이승만 완승으로 끝나
26. 1차 세계대전 종전의 산물 ‘위임통치청원’을 3.1운동 전후 활용한 이승만
27. 이승만, 외교활동 지원 대중운동 국내에서 도모, 3.1운동 신학설
28. 이승만·서재필, 미주 3·1운동인 ‘필라델피아 한인대회’ 주도
29. 이승만, 1919년 9월 11일 ‘통합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
30. 2012년 12월 민족문제연구소 ‘백년전쟁’ 영상, 이승만을 왜곡·날조
31.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6개월 만에 갈등과 반목으로 좌절
32. 이승만, 승전 강국 상대 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 독립외교 또 실패
33. ‘태평양잡지’ 1923년 3월호, 이승만의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 게재
34. 1925년부터 1932년까지, 이승만 인생 최악의 시기를 건너다
35. 이승만 연구의 보물단지, 1985년 이상수가 저술한 ‘송철 회고록’
36.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 회의 활동, 이승만 독립외교의 금자탑
37. 1933년 제네바, 59세 이승만·34세 프란체스카 결혼으로 이끌어
38. 1938년 광화문 본뜬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국가 표지석이 없다
39. 1941년 7월 출판 ‘Japan Inside Out’ 일본의 미국 공격 예언
40. 1940년대 이승만, 워싱턴서 임정승인 외교·대일 무장투쟁 병행
41. OSS, ‘미주 한인청년과 광복군’ 활용한 이승만의 무장투쟁 수용
42. 엘저 히스, 이승만 마지막 독립운동이 냉전의 전초전임을 상징
43. 이승만 33년 독립운동 끝에 미군정사령관 하지의 도움으로 귀국

이승만 연보(年譜)
색인(Index)

저자 소개

저 : 류석춘

류석춘은 연세대학교 사회학 교수다. 1986년 미국 일리노이대학교(Urbana)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87년부터 연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 분야는 발전사회학, 경제사회학, 동남아시아연구 등이다. 『한국사회학』 및 『동남아시아연구』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1993년 영국 옥스포드대학교, 1999년 교토 동지사대학교, 2002년 필리핀국립대학교, 2009년 호주국립대학교 및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Sa...
 

책 속으로

이승만의 90 평생이 지나가는 동안 중국에서는 전통 왕조가 신(神)을 죽이고 등장한 근대 ‘공산주의’라는 악마에게 자리를 뺐겼다. 반면, 같은 기간 일본은 서양의 근대를 추격하던 제국주의가 원자폭탄으로 끝장나고 대신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세계 최고 일본(Japan as number one)’이 들어섰다. 조선은 식민지를 거쳐 해방과 독립을 차례로 맞았고, 마침내 당신이 건국한 ‘자유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 사이 북한은 듣도 보도 못한 ‘왕조 공산주의’라는 괴물을 잉태했다. 요약해 보자. 이승만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90년 세월 동안 중국은 계속 엉망이었고, 일본은 세상이 바뀌어도 여전히 잘나갔다. 대한민국만 운명이 바뀌고 있었다.
--- p.19

이승만은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은 간성 군수 ‘서상대’와 독립협회 동지 ‘최정식’과 같은 감방에서 울적한 나날을 보냈다… 최정식은… 어느날 ‘탈옥하자’는 권유를 이승만에게 먼저 꺼냈다. ‘… 당신과 나는 민회(民會: 만민공동회)의 이름있는 사람인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려 하오?’ 한시바삐 뛰쳐나가 민중운동을 재개하고 싶었던 이승만은 즉시 호응하여 ‘다시 만민공동회를 모아 독립협회를 부흥하자’며 탈옥을 굳게 맹세하고, ‘주상호(周商鎬)’에게 권총을 부탁했다. 주상호는 뒷날 국어학자로 유명한 ‘주시경(周時經)’이다. 이승만과 고향(황해도 봉산)이 같고 한 살 아래인 주시경은 배재학당과 독립협회, 독립신문 활동을 함께 한 평생동지다. 탈옥을 모의한 주시경은 이승만이 탈옥 후 진행할 대중집회도 준비하면서 권총 두 자루를 몰래 감방에 들여보냈다.
--- p.52

1905년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유학 온 30살 이승만은 학부 유학을 시작한 지 5년 6개월 만인 1910년 35살에 국제정치학 박사가 되는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다. 이 5년 6개월이라는 시간은 묘하게도 이승만이 감옥에 갇혀있던 5년 7개월이라는 시간과 거의 같은 시간이다. 감옥에서의 독학까지 포함하면 결국 이승만은 만 11년을 꼬박 공부에만 전념한 셈이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유생 이승만이 신학문을 배우려 20살에 배재학당 문을 두드린 지 15년 만에 신학문의 챔피언으로 등극한 셈이다.
--- p.129

1912년 8월 14일 헤이스팅스에 도착한 이승만은 박용만과 5일간에 걸쳐 개인적, 민족적 여러 현안을 의논한 끝에 하와이로 건너가 장기적인 독립운동의 거점을 함께 만들기로 약속했다. 독자들도 알다시피 박용만은 이승만의 아들 태산과 함께 이승만의 옥중 원고 ‘독립정신’을 미국으로 가져온 장본인이다. 그만큼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였다. 박용만과 헤어진 이승만은 뉴저지주 캄덴(Camden)시 YMCA에 머물면서 신변을 정리하고 1913년 1월 10일 동부를 떠나 시카고 및 LA를 거쳐 1월 1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행 여객선 시에라(The Sierra)호에 올랐다. 마침내 1913년 2월 3일 이승만은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두 달 먼저 와 있던 박용만의 주선으로 엄청난 인파의 하와이 교민이 부두에서 이승만을 환영했다.
--- p.147

마침내 1919년 9월 11일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출범했다.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외무총장 박용만, 군무총장 노백린 등으로 내각이 구성됐다.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이 동거하는 불안한 통합이었다. 박용만과 신채호는 끝내 참여를 거부했다. 한성정부 승인에 반대한 노령의 문창범도 이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월 출범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역사에서 매우 큰 위상을 갖는다. 주권재민을 강조한 3·1정신을 계승하였으며, 노령(이동휘)·한성(이승만)·상해(안창호) 세 임시정부를 통합해 국내외 독립운동을 지도하는 최고의 단체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바로 이 단체의 최고지도자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날개를 단 셈이었다.
--- p.197~198

세 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글이 ‘공산당의 당부당’이다. 이 글은 1917년 레닌의 공산혁명이 러시아에서 성공한 지 6년이 지나면서 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가 공산주의라는 사탕발림에 속고 있을 때, 그리하여 독립운동의 대세마저 공산주의로 돌아서고 있을 때, 공산주의를 객관적으로 그리고 냉정하게 평가한 글이다. 비록 현실 정치에서 잠시 패배했지만, 미래를 내다보는 선각자 이승만의 통찰력이 빛나는 글이다. 공산주의는 이 글에서 이승만이 지적한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며 결국 1989년 종말을 맞았다. 이승만의 Japan Inside Out이 6개월 후 일본의 미국 공격을 내다본 글이라면, ‘공산당의 당부당’은 소련 공산주의의 몰락을 66년 전에 내다본 글이다.
--- p.228

일본 천황은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무조건 항복’을 방송으로 선언했다. 미국 워싱턴의 이승만은 이 뉴스를 1945년 8월 14일 밤 11시에 들었다. 이승만은 벌떡 일어나 프란체스카의 손을 붙잡고 소리쳤다. “이봐, 일본이 항복했어. 우린 귀국하는 거야.” 그리곤 말을 잇지 못했다. 평생을 기다린 일이 막상 닥치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임병직 일행이 들이닥치고서야 이승만은 다시 말문이 열렸다. “병직이, 이젠 돌아가자, 돌아가자.”
--- p.303

출판사 리뷰

이승만이라는 현대사의 최고봉

이승만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최고 봉우리다. 이 봉우리는 너무 높아 평지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다. 각자의 위치에 따라 주변의 야트막한 산들만이 보일 뿐이다. 날씨에 따라 그리고 각도에 따라 낮은 산 너머 높디높은 봉우리가 스쳐 보일 때도 있지만, 시선을 빼앗는 주변의 구조물 그리고 비바람과 안개, 구름 등과 같은 주변 환경 때문에 우리는 이 봉우리의 존재 자체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각자의 일상이 요구하는 관심과 주의로 인해 우리는 이 봉우리의 존재를 찬찬히 살필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일상을 벗어나 조금 높은 고지를 찾게 되면 이 봉우리는 어김없이 나타나 우리 시야를 장악한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이 봉우리는 돋보인다. 우뚝 선 이정표가 되어 모든 이에게 다가온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방향을 제시한다. 존재를 한번 인식하고 나면 이 봉우리는 비바람을 뚫고도 보인다. 아무리 많은 야트막한 산들이 시야를 가려도 이 봉우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구조물은 생기고 없어지지만, 이 봉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항상 거기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

필자에게 다가온 이승만도 그랬다. 대한민국의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그것이 다른 나라의 경우와 비교해 어떻게 같고 다른지 연구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돋보인 인물은 박정희였다. 물론 박정희 주변을 둘러싼 크고 작은 봉우리들도 많았다. 그 봉우리들을 뚫고 존재를 확인하게 된 박정희라는 크나큰 봉우리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나는 이승만이라는 더 큰 봉우리가 존재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박정희 뒤에 우뚝 서 있는 이승만이라는 더 큰 봉우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마침내 필자는 대한민국 ‘발전’의 최고봉인 이승만을 탐험하게 됐다. 2010년 출범한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초대 원장을 맡으면서 필자는 이 높디높은 봉우리를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이 책을 내는 2024년으로부터 14년 전 일이었다. 봉우리가 높은 만큼 탐험은 힘들었다. 물살이 센 깊은 계곡을 넘기도 했고, 멀고도 긴 능선을 하염없이 걷기도 했다. 돌계단을 밟다 헛디뎌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고, 나무뿌리를 부여잡고 미끄러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봉우리를 찾아 만났다.

이승만이라는 봉우리는 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모습이 달리 보일 뿐만 아니라, 봉우리에 이르는 길도 여럿 존재한다. 이리 갈지 저리 갈지 논쟁 끝에 다투기도 했으며 때로는 혼자 가야만 할 경우도 없지 않았다. 여럿이 갈 땐 즐겁기도 했지만, 이 길이 맞나 하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혼자 갈 땐 물론 불안감이 더 커지기도 했다. 계곡 속에서 봉우리가 보이지 않을 땐 우왕좌왕 맴돌며 길을 헤쳐나가야만 했다. 그리하여 14년 동안 오르고 올랐다. 이 책은 이렇게 만난 이승만이라는 봉우리를 필자가 찾아간 기록이다. 앞서간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러분들의 지도와 도움을 받았지만, 특별히 감사를 표해야 할 분들이 있다. 2023년 타계하신 유영익 교수는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석좌교수를 오래 하시며 필자가 이승만을 탐험하는 길로 들어서도록 이끌어 주셨다. 유영익 교수의 선구적 업적이 없었다면 필자는 이승만이라는 현대사의 봉우리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손세일 선생의 역저 《이승만과 김구》 전집이 없었다면 필자의 이승만 현대사 최고봉 탐험 길은 더욱 험난했었을 터다.-이 책의 서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