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인물사 연구 (책소개)/2.한국인물평전

해공 신익희 평전 (2022) - 독립운동과 민주화의 큰 별

동방박사님 2024. 6. 12.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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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격동기 한국 현대사의 큰 별 신익희, 그의 빛나는 업적과 아까운 죽음
해공 신익희의 생애를 한국 현대사의 관점으로 집대성한 역작


해공 신익희(1894~1956)는 식민지 → 해방 → 분단 → 단정수립이라는 변혁기의 중심인물로서, 조국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다가 1956년 대통령선거 도중에 63세를 일기로 급서하였다. 생애의 전반기 대부분을 독립전장에서, 후반기는 이승만의 폭정에 맞선 민주전선에서 싸웠다. 임시정부의 요인으로서 두 차례의 국회의장을 지내고 민주세력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민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후보까지 이른 인물은 그가 유일하다. 신익희의 돌연한 죽음은, 이런 의미에서 큰 국가적 손실이자 정치사의 비극이었다.

이 책은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초석을 놓은 신익희의 전체 생애에서 한국 현대사 속 그의 빛나는 업적을 기리며, 급작스러운 그의 죽음으로 한국 정치사에 어떠한 비극을 맞게 되었는지 알아본다.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를 연구하면서 이 시대 인물들을 탐구해온 저자가 그간 발행되었던 신익희 관련 저서를 모두 참고하여 한국 현대사의 관점에서 집대성하면서, 신익희의 생애를 생생하게 알 수 있는 인용문들을 적절히 뽑아 게재하였다.

목차

글머리에 독립운동과 민주화의 큰 별 해공 신익희 선생

제1부 독립운동의 큰 별로 떠올라

01 총명한 아이로 자란 성장기:
학덕의 아버지와 현숙한 어머니
02 일본 유학 시기:
와세다대학, 학업과 비밀결사
03 3·1 혁명의 마그마 역할로:
보성전문학교의 명교수가 되다
04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의원으로 ‘임시헌장’을 기초하다
05 임시정부 분열 속 새 길을 모색하다:
국민대표회의도 결렬되고
06 민족운동진영 통합운동에 앞장서서:
한국혁명당 창당을 주도하고
07 임시정부에 돌아오다:
‘한중문화협회’를 조직, 운영하면서

제2부 해방조국 민주화의 큰 별로 살다

08 해방된 조국에서 새로운 시작:
임시정부 요인들, ‘개인자격’으로 귀국
09 독자노선을 추구하다:
민족진영 통합을 위한 ‘독촉국민회’ 조직
10 입법부의 수장으로:
국회의장에 선출되다
11 정치 격랑기에 국정의 중심을 잡아:
백범 김구 암살 비보에 추도사를 쓰다
12 6·25 전쟁의 와중에:
이승만,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도주하고
13 높아진 정치적 위상에 따른 탄압:
26개국을 순방하며 거둔 외교성과
14 야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되다:
전통야당의 원조 민주당의 창당
15 서거 그리고 추모사업:
63세, 호남선 열차에서 눈을 감다

남은 이야기 민주적인 리더십을 기리며
해공 신익희 선생 연보

저자 소개

저 : 김삼웅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 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국립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바른 역사 찾기에 힘써왔고,...

책 속으로

와세다대학에서 그는 학구적인 면모와 리더십으로 한인 유학생들은 물론 일인 학생과 교수들로부터 주목의 대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10여 명 유학생 모두가 우수했고, 1914년 4월에 창간한 《학지광》은 연 2회 발행되는 초라한 모습이지만 일본 내 조선인들의 대변지 역할을 하는 데 모자라지 않았다. 《학지광》의 발행에 그는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투자하였다.
---「02 일본 유학 시기」중에서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 일본 도쿄에서 학우들의 2·8 독립선언 소식이 중국신문에 보도되었다. 여운형을 비롯하여 신한혁명당 간부들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숙의하였다. 방략 중에는 국내에 거대한 조직망을 갖고 국민의 신뢰가 높은 손병희를 모셔다 독립운동기구를 구성하자는 내용도 담겼다. 2·8에 이어 터져 나올 것으로 기대했던 국내의 봉기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상주喪主의 복색을 하고 1919년 2월 말 귀국 길에 올랐다. 만주에서 처음으로 3·1 혁명의 소식을 들었다. 그 며칠 뒤 서울행 기차에서 평양시민의 독립만세 시위행렬을 지켜보게 되었다.
---「03 3·1 혁명의 마그마 역할로」중에서

임시의정원은 밤을 새워 토의를 거듭한 끝에 신익희 등이 기초한 전문 10조로 된 임시헌장을 심의·통과시켰다. 국호제정과 관련하여 대한민국·조선민국·고려공화국 등이 제안되어 역시 토론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확정하였다. ‘대한’이라는 국호를 둘러싸고 일부 의정원의원이 망한 대한제국의 국호를 다시 쓸 이유가 있는가를 따지고, 다수 의원들은 망한 대한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의미와 함께 ‘한韓’이라는 명칭은 삼한 이래 우리 민족의 고유한 이름이라는 사적史的 고찰이 전개되었는데, 결국 ‘대한제국’의 ‘제帝’ 자 대신 ‘민民’의 시대를 연다는 뜻에서 ‘대한민국’으로 결정한 것이다.
---「04 임시정부에 참여하여」중에서

신익희의 한결같은 바람은 중국혁명세력과 협력하여 무장부대를 육성하는 일이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 총통이 1926년 북벌을 시작하자 국민정부 측과 연대의 길을 찾았다. 마침 1924년 산시성 정부의 자문위원으로 있을 때 신익희의 정의감과 공정성을 높이 산 위유런于右任이 국민정부(난징 정부)의 심계원장으로 있으면서 그에게 심계원에 특별자리를 만들어 근무를 청하였다. 아무리 혁명기라고 하지만 자국 원수의 엄청난 기밀비의 감사를 외국인에게 맡긴 것이다.
---「05 임시정부 분열 속 새 길을 모색하다」중에서

민족혁명당은 창당이념을 민족혁명과 민주주의혁명을 동시에 수행하여 ‘조선혁명을 완성’하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이어서 민족혁명은 ‘일제 식민지통치의 전복과 민족자주 정권의 건립’을, 민주주의혁명은 ‘봉건유제의 완전 숙청과 인민자유정권의 건립’을 내세웠다. 또한 ‘혁명원칙’은 “민족의 자주독립 완성, 봉건제도 및 반혁명세력의 숙청과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건설,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삭剝削하는 경제제도의 소멸과 민족 각개의 생활상 평등의 경제조직 건립”이었다. 이것이 신익희가 평소에 꿈꾸었던 신념이고 철학이었다.
---「06 민족운동진영 통합운동에 앞장서서」중에서

모스크바 3상회담이 진행 중인 시점에서 반탁운동에 불을 지른 이 기사는 3상회담의 내용을 신탁통치만으로 국한시키면서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하고,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처럼 전한 날조된 기사였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12월 25일자 미국발 기사라면서 정확한 출처도 밝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 기사가 나가게 된 배경을 놓고 국내 언론을 통제하던 미군정 당국의 단순 실수설, 반소·반탁 감정을 형성하기 위한 국내외의 모종의 음모설 등이 지금까지 제기되고 있다.
---「08 해방된 조국에서 새로운 시작」중에서

제2대 총선 후 두 달도 안 되어 벌어진 6·25 전쟁만 아니었으면 한국의 정치는 민주와 진보의 방향으로 크게 발전하고, 이승만의 전횡은 많이 제지되었을 것이다. 전체 210석 가운데 무소속에서 126명이 당선됨으로써 정파성이 크게 희석되었다. 이런 정계의 격랑 속에서 신익희는 의정의 중심축이 되었다. 6·25 직전 북한은 기동훈련의 명분으로 군을 38선 인근으로 집결시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국방당국은 근거 없는 ‘태평가’에 취해 몽롱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여기에 대통령과 국방장관 등 군통수권자들의 무능·무책임으로 북한군은 손쉽게 남한의 대부분을 점령할 수 있었다.
---「11 정치 격랑기에 국정의 중심을 잡아」중에서

민주당 창당은 그동안 개인의 인기만을 무기로 삼았던 무소속 정치인의 몰락과 정책정당의 탄생을 가져온 한국정치사의 전환을 이룬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승만 정권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과 견제에 나섬으로써 본격적인 양당체제의 확립에 기여했으며 수권 대체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이렇게 출발한 민주당은 지방조직을 급속도로 강화시켰다. 그러나 새로 출발한 민주당 내에는 민주계와 원내자유당계의 갈등이 조성되어 신구파의 파벌이 형성되고, 1954년의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극심한 대립과 암투가 벌어졌다.
---「14 야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되다」중에서

1956년 5월 3일 화창한 봄날이었다. 오후 2시 한강 백사장에서 민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와 부통령후보 장면의 정견발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오전부터 서울역에서 한강에 이르는 도로는 사람의 행렬로 가득했다. 그쪽으로 가는 전차와 버스는 초만원을 이루었다. 인파에 놀란 당국이 노량진행 전차의 운행을 중지시키고 뒤이어 버스와 택시도 중지시키자 시민들은 걸어서 한강 백사장으로 모여들었다. 정오가 지나면서 서울 시내에는 행인이 사라지고 시장·백화점·극장 등도 한산해졌다.
---「14 야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되다」중에서

열차가 이리역에 도착하자 측근들이 급히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그는 끝내 회생하지 못했다. 의사는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라고 진단하였다. 5월 5일 어린이날, 유해를 실은 구급차는 궂은 비 내리는 이리→강경→논산→공주→금강→조치원→수원을 거쳐 서울역에 도착했다. 가는 곳곳마다 서거 소식을 듣고 뛰어나온 시민들로 가득했다.
---「15 서거 그리고 추모사업」중에서

출판사 리뷰

신익희의 홀연한 죽음이 가져온 한국 정치의 비극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외침이 정권교체를 열흘 남기고 무산되기까지


1956년 당시 야당인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신익희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로 선풍을 일으켰다. 서울 인구가 150만 정도이고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 상황에서도, 서울 한강변 모래밭에 40만 인파가 모여 신익희의 후보 유세를 들었다. 명연설을 마치고 다음 유세차 탑승한 열차 안에서 신익희는 급서하고 만다. 헌정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꼭 열흘 남긴 채 주역이 사라짐으로써 한국현대사는 급변하게 된 것이다.

우리 현대사는 국가적으로 대단히 불행한 과정이었다. 무엇보다 외세가 만든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민족자주의 민주공화제를 실행할 지도자들이, 여운형·김구에 이어 신익희가 서거하면서 차례로 사라졌다. 신익희가 건재하여 그때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으면, 이승만의 독재와 부패의 늪지에서 기형적으로 성장한 정치군인들의 쿠데타와 같은 변태는 발생하지 못하고 민주주의가 발전했을 것이다. 신익희의 돌연한 서거로 한국의 민주주의가 오래 지체된 것은 한국 현대사의 불행이었다.

27년간 쉼 없는 독립운동으로 보낸 청장년 시절

신익희는 일본 유학 시절에 조선유학생 학우회에서 활동하면서 기관지 《학지광》을 펴냈고, 비밀결사 조선학회를 조직하면서 2·8 독립선언과 3·1 운동의 초석이 되었으며,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이승만이 야기한 분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임시정부 분열 속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도 하고 한국혁명당 창당을 주도했으며, 좌우통합의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을 지냈으며, 조선의용대에 결성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동해 오자 한중문화협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의 후원단체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42년부터는 임시정부에서 내무부장에 선임되어 해방을 맞기까지 다시 임시정부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논리정연하고 심금을 울리는 언변의 소유자

와세다대학 시절 신익희의 별명은 ‘메기의 입’이었다. 몸가짐이 다부진 데다, 입을 굳게 다물고 듣기를 다하여 쉽게 입을 열지 않고, 상대의 말이 끝나면 논리 정연한 언변을 토하여 붙은 별명이다. 그는 아무리 전문적인 내용이라도 상대가 알아듣기 쉽도록 전달하였다. 제헌국회 때는 우리말 표현이나 법률적·사무적인 일에 서투른 이승만 의장을 대신해 신익희 부의장이 능수능란하게 사회를 진행하기도 할 정도였다. 또한 대통령후보가 되어 한강변에서 40만 인파를 상대로 한 심금을 울린 명연설 등도 이때부터 다듬어진 변술이었다.

서거 후 치러진 선거에서도 명백했던 신익희 지지표

신익희 서거 열흘 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총 투표자 906만 7,000여 표 중 유효 721만여 표, 무효 185만 6,800표, 기권 54만 표가 나왔다. 무효표와 기권표를 합하면 239만 6,000여 표가 신익희의 추모 표라고 볼 수 있다. 이승만 500만 표, 조봉암 216만 표를 두고 볼 때 그가 살아서 투표가 이루어졌다면 능히 이승만을 압도했을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서울에서 이승만은 20만여 표밖에 안 되는데 추모표가 28만여 표에 이르렀다. 살아 있는 대통령보다 죽은 후보의 추모표가 더 많이 나온 것이다.

“이만한 리더십을 가진 정치인이 한국현대사에 또 있을까”
이승만을 견제하여 입법부의 독립성을 지켜낸 기상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신익희의 민주적인 리더십은 두 가지 측면에서 도드라진다. 하나는 지극히 권위적인 행정부 수반 이승만과 대좌하여 입법부의 독립성과 권위를 지켜낸 점이다. 국회가 반민특위를 구성하여 친일분자들을 처리할 때, 이승만 세력이 두 차례에 걸쳐 날조한 국회프락치사건으로 현역의원 13명을 구속하는 등 국회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리고 부산정치파동 당시 정부안의 일부 극우세력이 국회해산을 모의할 때, 이 대통령과 만나 부당한 처사를 따지는 등 견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승만과 마주 앉아 당당히 일대일로 사리를 따질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정치인이 바로 그였다는 평가이다.

놀라울 만큼 청렴한, ‘수신제가修身齊家’의 전형

다른 하나는 공직자로서 청렴성을 지키면서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지도자의 전형을 보인 것이다. 자기가 만든 국민대학과 떠맡아서 육성한 신문사를 관계자들에게 넘겨준 것이나 사저를 공관으로 만들어 국가에 헌납하고 전세생활을 감당한 것은, 본인도 본인이지만 가족의 공감이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남들은 권력을 잡으면 없던 재산도 만드는 판에 외국인이 넘겨준 집을 의장공관으로 삼고 명의를 국가에 넘긴 것이다. 그만큼 그는 ‘수신제가’의 수범을 보여주었다. 찾아오는 공무원들에게는 ‘염생위廉生威’ 세 글자를 써 주거나 당부하였다. 바르고 곧은 관리가 되라는 뜻이었다.

현실에 바탕을 둔, 그러나 원칙을 지키는 정치를 보여주다
이승만 독재에 맞선 원칙주의자


그는 또한 대단히 실사구시적인 정치지도자였다. 흔히 다수의 정치인들이 예나 지금이나 구름 잡는 식의 허장성세를 일삼는 데 비해 그는 항상 현실에 바탕을 둔 정책과 방략을 추구했다. 하지만 원칙이 짓밟힐 때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부산 피난 시절 이승만이 영구집권을 획책하며 발췌개헌에 이어 사사오입 개헌을 감행하자 분연히 일어나 여야, 무소속의원 60명을 이끌고 호헌동지회를 조직했다. 호헌동지회는 한국 전통야당의 원조격인 민주당의 뿌리가 되었다.

분단정부에 참여한 현실주의와 이중성에 대한 평가

신익희는 전통적 소양과 근대적 소양을 균형 있게 접목시키고, 외교·법률·내무에 능통한 문인적 풍모이면서도 군사·무력의 중요성을 아는 지도자, 풍찬노숙의 민족운동가와 합리적 선택에 능한 현실정치인의 면모가 적절히 배합된 드문 인물로 꼽힌다.

김구 주석과 김규식 부주석 등 임시정부 지도부는 단독정부 불참 노선을 택했지만 그는 현실정치에 참여한다. 남북협상과 관련해서 ‘여호모피론與狐謀皮論’, 즉 “여우와 더불어 값진 모피를 얻을 의논을 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라는 주장을 편 것이다. 이러한 분단정부 참여는 임시정부 주류와는 엇박자의 행보였으므로 ‘노선 선택의 이중성’이라는 평가도 따른다. 환경의 불가피한 반영 또는 발전적 전환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비평적 분석을 요구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