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대한민국 현대사 (독서>책소개)/1.해방전후.미군정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2021) - 중등학교 입학부터 취업 이후까지

동방박사님 2024. 7. 4.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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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학적부·교지·동창회 명부에 졸업생 구술까지
숫자로 확인하는 일제하 민족차별의 실상


일제강점기 한국사회에서는 신분차별, 성차별, 빈부차별, 학력차별, 민족차별 등 각종 차별이 행해지고 있었다. 그중 일제강점기의 차별을 표상한 것은 민족차별이었다. 그럼에도 법제나 구조에 주목한 민족차별 연구들은 있으나 이를 전면적·체계적으로 해부한 연구는 의외로 빈약하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민족차별의 양상, 구조와 특성 등을 체계적·실증적으로 해부하려 시도한 연구서란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특히 식민지사 연구에 천착해온 지은이는 명시적인 법규범이나 제도를 통한 법적 민족차별이나 정치경제적 불평등 구조와 위계관계에 의해 결과적으로 발생하는 구조적 민족차별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편견이나 혐오에 의해 일상적·무의식적으로 자행되는 관행적 민족차별의 문제를 특별히 주목해 구명했다.

목차

책머리에
표와 그림 목록

들어가며: 한국근대사와 식민지 민족차별

1장 학생 선발·교육과 관행적 민족차별

학생 선발·교육의 사례와 강상江商
신입생 선발과 노골적 민족차별
학생지도와 실질적 민족차별
학생평가와 묵시적 민족차별

2장 학생의 중퇴와 민족차별

중퇴의 사례와 강상
중등학생 전반의 중퇴 추세
강상 학생의 중퇴 추세
경제 사유 중퇴와 구조적 민족차별
성적 사유 중퇴와 관행적 민족차별
성행 사유 중퇴와 관행적 민족차별
보론: 건강·입대 사유 중퇴와 민족 간 차이

3장 학생의 취업과 민족차별

졸업생 진로의 사례와 강상
졸업 직후 진로의 민족 간 차이와 구조적 민족차별
취업경쟁과 관행적·구조적 민족차별
일제 말기 한국인 졸업생의 성장과 식민지적 위계구조
보론: 한국인 졸업생의 해방 후 직종 변화와 지위 상승

4장 교사의 민족차별 언행과 동맹휴학

동맹휴학과 학생들의 문제의식
교사 배척 동맹휴학의 원인별 양상
배척 대상 교사의 민족차별 언행과 폭력성
민족차별 언행의 논리

5장 관행적 민족차별과 법·구조·의식의 문제

관행적 민족차별의 일상화 기제
민족차별적 교육제도와 구조
민족차별 의식: 한국 멸시·차별관과 인종론적 문명론·민족성론

나오며: 차별문제의 성찰과 일상의 민주화
부록: 일제강점기 중등학교 규율의 사례

저자 소개

저 : 정연태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한국역사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 1995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단독 저서로는 《한국근대와 식민지 근대화논쟁: 장기 근대사론을 제기하며》(푸른역사, 2011), 《식민권력과 한국농업: 일제 식민농정의 동역학》(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이 있으며, 공저로는 《한국 근대사회와 문화 Ⅱ》(서울대학....

책 속으로

관행적 민족차별은 식민자의 일상적 언행을 통해 표출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법적 영역에서는 포착할 수 없는 식민지 민족차별의 다채로운 양상과 특성을 드러내준다. 예컨대, 관행적 민족차별은 공적 활동영역에서든 사적 생활영역에서든 지배민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피지배민족에 대하여 일상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경멸하는 시선, 무시하는 태도, 모욕적인 언행, 배제와 차별 대우, 심지어 구타와 폭력 등을 통해 표현되었다.
--- p.25

민족 무차별 동화(一視同仁)를 표방했던 일제로서는 식민 통치의 실제와 이념 간의 이중성, 모순을 합리화, 정당화하는 논리가 필요하였다. 그 논리가 ‘시세와 민도의 차이론’이었다. 이에 따르면, 민족차별이라고 비판됐던 각종 법·제도·정책 등은 민족차별의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일제 본국과 식민지 한국 사이, 그리고 재한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격차를 반영한 불가피한 결과, 심지어 그런 격차를 고려한 선의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 p.32

경성제국대학은 한국인 입학생 수를 정원의 3분의 1로 할당했고, 대구상업학교는 한·일의 신입생 비율을 절반씩으로 정하였다. 경성공업전문학교는 설립 당시에 일본인 학생이 전체 정원의 3분의 1을 넘지 않는다는 규정을 정했음에도 불문율처럼 한국인 입학생의 비율을 정반대인 3분의 1로 유지하였다.
--- p.42

선발과목에 일본어가 포함된 것은 물론 다른 과목도 모두 일본어로 시험을 치러야 했기에 한국인 학생은 원천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 p.42

한국인 학생들은 사상검열조차 거쳐야 했다. 학교 당국은 출신 학교장이 학업성적, 품행(성행과 조행), 가정형편 등을 기록한 소견표를 작성해 상급 지원 학교에 직접 전달하도록 하였다. …… 1939년에 이르면, 이전까지 중요 참고자료였던 소견표가 중등학교 입학시험 성적에 포함되었다. 소견표가 총점 1,000점 중 200점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 소견표는 지원자의 초등학교 성적과 가정의 재산 상태를 판정할 뿐 아니라 사상을 검열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 p.43

1939년에는 소견표와 같이 입학시험으로 채택되고 그 비중도 200점에 달하였다. 이 당시 구두시험에서는 지원자의 언어, 상식, 지조, 성행을 평가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 핵심은 황국신민의 자질과 시국 인식을 포함한 사상을 검증하는 것이었다.
--- p.43

실업학교 가운데 일본인이 선호했던 5년제 상업학교의 경우를 보면, 1927~37년간 한국인의 입학 경쟁률은 보통 5대 1에서 6대 1 전후였던 반면, 일본인의 그것은 2대 1 전후에 불과하였다.
--- p.44

입학 사정에서 ‘재산상태’ 중시 방침은 민족 간 경제적 불평등성이 심각했던 당시 실정을 고려하면, 입학 사정의 민족차별성을 은폐하거나 정당화하는 데 활용될 수 있고 실제 그러했기 때문이다.
--- p.49

민족별 전체 중퇴생 가운데 성적 사유 중퇴의 비율을 비교해보면, 일본인은 23.1퍼센트로, 한국인 10.7퍼센트에 비해 두 배 이상 높았던 것이다. 민족차별적 선발로 인해 한국인 지원자보다 성적이 훨씬 떨어지는 일본인 지원자가 다수 합격한 결과와 무관치 않은 현상이다.
--- p.49

졸업생 1인당 평균 징계 건수를 보면, 한국인이 0.25건(118건/481명)인 데 반해, 일본인은 0.13건(39건/300명)으로, 한국인의 약 절반 정도에 불과하였다. 특히 일제 말기 한국인의 징계 건수는 증가하였다.
--- p.52

한국인 상급생이 일본인 하급생을 ‘제재’하고, 일본인 상급생은 한국인 하급생을 대상으로 ‘제재’하던 풍토였음에도 유독 한국인 학생만이 하급생 구타로 인해 징계를 당한 점이다. 이런 현상은 학교 당국과 일본인 교사의 민족차별적 처분과 관련되지 않고는 이해하기 힘들다.
--- p.54

일제와 학교 당국이 민족 간 합격률의 격차가 자유경쟁의 결과라고 주장한 것은 입학 이후 한국인 학생의 성적이 일본인 학생의 그것에 비해 월등하게 뛰어났던 사실과 모순된다. …… 한국인 학생의 평균성적은 총 97개 학년도 중 1924년 졸업생의 3학년 때와 1939년 졸업생의 5학년 때를 제외한 95개 학년도에서 일본인 학생보다 높았다. 그조차 일본인 학생 성적과의 격차가 5점 이상인 경우가 41개 학년도나 되었다. 반면 1점 이하의 작은 격차가 난 것은 7개 학년도에 불과하였다.
--- p.59

체조·무도와 교련 과목의 성적평가에서 민족차별이 가해졌다. …… 교련 성적은 현역 배속장교에 의해, 그리고 무도 성적은 대부분 현직 경찰인 일본인 유도·검도강사에 의해 평가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인 학생이 유독 교련과 체조·무도 과목의 성적에서 일본인 학생보다 상대적으로 큰 차이로 뒤졌고, 그것도 항상 뒤졌다는 사실은 민족차별적인 평가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 p.66

한·일 학생 간 학업성적 평균점수의 격차가 1점 미만인 졸업 기수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임에도 일본인 학생의 조행등급이 한국인 학생의 그것보다 훨씬 양호하게 분포되어 있는 것이다. 민족별 조행등급 분포에서 상등급인 ‘갑’과 ‘을상’에는 일본인 학생이, 하등급인 ‘을하’와 ‘병’에는 한국인 학생이 더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 p.71

중퇴 사유의 비중에서 민족 간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한·일 중퇴 사유의 비중을 비교해보면, 가정 사정, 사망, 비행 사유 중퇴의 비중은 서로 엇비슷했지만, 나머지에서는 차이가 컸다. 한국인 학생은 결석, 사상·운동, 사범학교 입학 사유 중퇴의 비중이 높은 반면, 일본인 학생은 성적, 전학, 입대, 질병 사유 중퇴의 비중이 높았던 것이다.
--- p.96

제1기의 징계 퇴학 처분은 일제강점기 강상에서 유일하게 일어난 동맹휴학(1923) 주모자 8명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강상의 동맹휴학은 3·1운동 참여자를“ 모두 난신적자에 속한다”고 한 일본인 교사의 망언에 분노하여 일어난 것이다.
--- p.109

유지諭旨(권고) 퇴학, 즉 사실상 강제 퇴학을 시키는 과정에서도 민족차별 양상이 나타났다. 유지 퇴학을 당한 한국인 학생은 총 17명이었다. 이 중 14명의 유지 퇴학 사유가 ‘비행’이었다. 반면 비행 사유 일본인 중퇴생은 23명이었는데, 그중 겨우 3명만이 유지 퇴학 처분을 받았고, 나머지는 징계 퇴학 대신에 ‘가정 사정’ 등의 명목으로 자퇴하였다.
--- p.112

조선식산은행의 사례 연구……에 따르면, 식산은행은 채용계획을 세울 때부터 민족차별을 노골화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전에 한국인과 일본인의 채용 비율을 2대 8로 정한 뒤, 농업학교와 상업학교에 인원을 배정해 추천을 의뢰하였다. …… 그런데 학교의 추천을 통한 지원자 가운데 채용되지 않는 경우는 한국인 지원자에게만 생겼고, 일본인 지원자에게는 거의 없었다. 그 결과 채용이 결정된 일본인 졸업생들의 평균 학업성적은 한국인 졸업생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 p.134

일제는 식민지 지배기구인 금융조합의 하급 실무를 담당할 한국인을 필요로 했고, 강상 졸업생은 그런 정책적 필요에 따라 비경쟁적·독점적 취업선을 확보했기 때문에 일본인 졸업생보다 월등히 높은 취업률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 p.140

상위군 사이에서 민족 간 취업경쟁이 예상된 조선·식산·저축은행 취업자는 상위 10퍼센트군 6명, 10~30퍼센트군 2명이다. 그중 일본인 졸업생 취업자 수는 4명이다. 상위 30퍼센트 성적군의 한·일 졸업생 전체 가운데 일본인 졸업생의 비율이 겨우 24.4퍼센트(78명 중 19명)에 불과했음에도 한국인 취업자 수와 같은 것이다. 심지어 중위군에서도 일본인 졸업생 1명이 조선은행 본점에 입사하였다.
--- p.151

일본인 졸업생은 상위군의 조선·식산·저축은행 취업률과 하위군의 일반회사·상점 취업률에서 한국인 졸업생보다 압도적 우세를 보였다. 민족 간 취업경쟁에서 추천서 등 학업성적 외적 변수가 취업 여부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p.153

학업성적 평균에서는 제2기(1924년 졸업) 3학년과 제15기(1939년 졸업) 5학년을 제외한 모든 학년도의 모든 학년에서 한국인 학생이 일본인 학생보다 훨씬 우월했음에도 조행평가 등급 평균에서는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학생보다 우월했던 학년도의 수가 오히려 더 많았다.
--- p.153

금융조합만 하더라도 한국인은 1935년 현재 전체 이사 가운데 20.5퍼센트를 차지하는 데 불과하였다. 이후 한국인 이사가 증가했음에도 1941년 현재 전국 금융조합 총수 723개 가운데 한국인 이사는 201명에 지나지 않았다.
--- p.169

맹휴 가운데 다수가 교장과 교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 교사 배척 문제는 앞서 언급한 민족차별·말살의 문제, 전제적·독선적·억압적·폭력적 학생지도의 문제, 열악한 교육 조건과 시설의 문제 등과 복합적으로 연관된 경우가 많았다.
--- p.185

주로 ‘망국민’ ‘야만인(종)’이라 부르거나 민족성 운운하면서 한국 민족과 한국인 일반을 비하하는 언사를 남발하였다. 그리고 조그만 과실만 있으면, ‘망국민, 한국인은 할 수 없다’고 민족 전체를 매도하였다. 심지어 한국인 학생을 ‘야만’이니 ‘도야지’로 부르면서 모욕하기도 하였다.
--- p.203

일본인 교사의 민족차별 언사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핵심 용어가 있다. 야만인(종), 민족성, 망국민이 그것이다.
--- p.205

1934년 현재 일본인 대상의 중학교 11개교 모두와 고등여학교(이하 ‘고녀’로 줄임) 27개 중 26개가 공립학교였다. 반면 한국인 대상의 고보는 26개 중 15개, 여고보는 17개 중 7개만이 공립학교였다. 그 결과 …… 1934년 현재 인구 1만 명당 일본인 중학생은 186.7명인 데 반해, 한국인 고보 재학생은 6.8명에 지나지 않았다.
--- p.217

한국 멸시관 …… 출발은 후대에 날조된 진구神功왕후의 삼한정벌설이었다. 진구왕후가 신라를 정벌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한반도 남부인 삼한을 200여 년간 지배했고, 고구려, 백제도 일본에 복속해 조공을 바쳤다는 것이다. 한국 멸시관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한반도 조공국사관은 이런 날조된 역사를 토대로 형성됐고, 그 반대로 일본 우월관의 상징인 신국神國사관이 등장하였다. 이 같은 한국 멸시관은 임진왜란 이후 확대됐고, 일본의 전통극인 조루리淨瑠璃나 가부키歌舞伎를 통해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일본인의 사고를 지배하였다.
--- p.234

문명론의 관점에서 일본의 인종적 우열의식에 대전환을 초래한 것은 청일전쟁이었다. 일본은 후쿠자와福澤諭吉가 문명과 야만의 의로운 전쟁이라고 불렀던 청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문명국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고 자부하게 되었다. 그 후 일본사회에서는 독립심, 진취 기상, 무혼武魂의 일본인상과 의뢰심, 무기력, 문약文弱의 한국인상이 형성되었다.
--- p.235

출판사 리뷰

중등교육과 취업의 전 과정의 민족차별을 체계적으로 입증

이 책은 식민지 민족차별의 실상을 밝히기 위해 먼저 미시적 사례 연구를 전개했다. 사례연구의 대상으로 강경상업학교를 최종 선택했다. 충남 소재의 강경상업학교는 1920년 전국 7번째로 설립된 데다가 당시 재학생의 한·일 민족 간 비율이 비슷해, 민족차별의 문제를 살펴보기에 적합한 실업학교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중등학교는 전체 한국인 가운데 1퍼센트 미만만이 졸업장을 가졌을 만큼 우수 인재가 모였던 교육공간이었다.

이 책은 강경상업학교에서 교육 당국·학교·교사의 학생 선발과정, 지도·교육과정, 평가과정, 학사징계·중퇴 과정, 그리고 학생의 취업과정, 취업 후 직종 배치와 직위 변화 등 한국인 학생이 학교 입학부터 졸업 이후까지 거의 모든 과정, 국면에서 민족차별이 일상적으로 자행됐음을 체계적·객관적으로 증명하고자 했다. 이 책에서 제시한 60개가 넘는 통계표는 민족차별의 실상을 구체적 데이터에 입각해 입증하고자 한 노력의 일 단면이라 하겠다.

방대한 자료에 학생일기, 졸업생 면담까지 더해 심층 분석

해방 이전 25년간 강경상업학교 한·일 졸업생 977명, 중퇴생 512명 등, 총 1,489명의 학적부를 데이터베이스화해 분석했다. 학적부를 활용한 기존 연구에서는 거의 시도되지 않았을 정도로 장기간에 걸친 방대한 규모의 학적부를 분석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중퇴생 학적부에 대한 분석은 이 책에서 최초로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 근대사 연구에서는 최초로 교지校誌 첨부 〈동창회 회원명부〉들, 해방 전후 동창회 발행의 〈동창회 명부〉들을 모두 데이터베이스화해 미시적 분석에 활용했다. 이외에도 교지, 학생일기, 해방 후 한국인이나 일본인 졸업생의 동창회보 등을 수집해 분석했다. 뿐만 아니라 해방 이전 강상 출신 한국인 졸업생들과 면담하거나 일본 동경에까지 건너가 일본인 졸업생과 면담해 구술 자료를 확보함으로써 문헌자료의 한계를 보충했다.

동맹휴학 일반에 대한 분석으로 교사사회의 관행적 민족차별 논리 구명

이 책은 특히 민족차별 관련 동맹휴학의 실태를 정리해, 배척 대상 교사들의 관행적 민족차별 언행과, 이를 관통하는 관행적 민족차별의 논리를 구체적·체계적으로 추적해갔다. 이를 위해 각종 신문에서 동맹휴학 관련 기사(1920~38년)를 모두 찾아내 분류, 분석했고, 각종 교사校史, 조선총독부측 자료 등을 보조 자료로 활용했다. 이를 통해 관행적 민족차별에는 교사의 전제와 독선과 억압과 폭력이 수반되는 경향을 보였다는 사실도 구명했다. 나아가 교사들의 언행에는 ① 문명 대 야만의 이분법에 기초한 야만인(종)론, ② 한국인의 결함과 부정성을 드러내기 위한 민족성론, ③ 망국의 현실을 인정하고 자책케 하는 망국민론亡國民論이란 민족차별 논리가 깔려 있음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일본인 교사사회에 퍼져있던 일본의 한국 멸시·차별관을 주목

이 책은 특히 일본인 교사를 포함한 재한 일본인들의 내면의식을 지배하던 민족차별의식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형성, 체계화, 확산됐고, 어떤 특성을 지녔는지를 검토했다. 그중에서도 ① 일본의 한국 멸시·차별관은 신화와 날조된 역사에 기반한 한반도 조공국사관朝貢國史觀에서 출발해, 청일·러일전쟁 이후 일본판 오리엔탈리즘인 인종론적 문명론, 마찬가지로 인종론적 성격을 띤 국민성론,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결합하거나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했다는 사실, ② 이런 발전 과정을 통해 ‘문명 일본 대 야만 한국’ ‘일본인의 우수한 민족성 대 한국인의 열등한 민족성’이란 민족 서열화 구도의 한국 멸시·차별관이 체계화·심화돼, 일본사회와 재한 일본인사회에 확산됐다는 점, ③ 일본인 교사들도 이러한 한국 멸시·차별관을 내면화해, 민족차별 언행을 일상적으로 표출했다는 점을 주목했다. 이를 통해 민족차별은 근대 이후 일본판 오리엔탈리즘과 결합해 심화, 확산된 한국 멸시·차별관이라는 역사의식의 문제임을 확인했다.

지은이는 이 책의 독자들이 한국사회가 과거 일제강점기에 당했던 민족차별의 쓰라린 경험을 기억하고 타자를 비판하는 데 머물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오히려 그런 경험과 기억 속에서 조선족, 탈북민, 장애인, 성소수자 등 오늘날 한국사회의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에 대한 차별 문제를 성찰하고 극복하는 길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데, 그리고 한국사회가 사회적 민주화와 일상의 민주화를 성취해가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