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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북] 임오군란(1882)의 이해

동방박사님 2024. 8. 31.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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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 병사

임오군란壬午軍亂

참가자 조선군 / 장소 조선 조선

날짜 1882(고종 19) 723(음력 69) ~ 830(음력 717)

원인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

결과 중전 민씨의 피난, 흥선 대원군의 재집권

임오군란(壬午軍亂)1882년 훈련도감에서 해고된 구식 군인들의 13개월 동안 체불된 임금을 정부가 저급 불량쌀로 지급하여 일어난 난이다. 10년 전 실각했던 흥선대원군과 위정척사파들이 정권 재창출을 위해 중전과 외척 민씨 제거 및 비리 척결, 그리고 일본과 서양 세력에 대한 배척 운동으로 확대시켰고, 전임 선혜청 당상 김보현, 당시 선혜청 당상 겸 병조판서 민겸호, 선혜청 창고지기인 그 수하의 착복 비리와 부정 축재 사실까지 드러나며 관련자들이 살해됐다. 성공하는 듯했던 난은, 중전 민씨를 놓친 데다가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청나라군이 개입하며 진압됐다. 흥선대원군은 톈진으로 끌려가고 척화파들은 제거됐으며, 청나라와 결탁한 중전 민씨가 충주에서 환궁하면서 민씨 외척들이 조정을 완전 장악했다.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들도 조정의 중책을 맡게 됐으며, 난의 진압을 축하하기 위해 과거 시험이 열리며 이완용, 서재필 등이 출사하는 계기가 됐다.

배경

1873년 탄핵 등으로 흥선대원군이 세력을 잃고 지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점점 증가하는 서구 세력의 위협으로 백성들의 민심은 아직 쇄국에 머물러 있었고 흥선대원군 역시 최익현 등 척화파들과 계속 소통하면서 아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서계 문제가 대두돼 다시금 척화파들이 여론을 등에 업으려던 찰나, 운요호 사건으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며 조선은 쇄국을 버리고 개국, 개화로 향하게 됐다.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척화파는 관직에서 밀려나고 투옥되는 등, 고종 부부 측의 척족(戚族)(=성이 다른 일가)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온건개화파=시무개화파), 개화파(급진개화파=변법개화파)가 정치 전면에 나섰다. 민씨 정권은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서양 열강과의 불평등 통상조약을 연이어 맺었는데, 이는 척화파는 물론 민심의 반동을 불렀다. 삼정의 문란 때문에 가뜩이나 위태로운 조선에 사회적 혼란과 불안이 증폭됐고, 흥선대원군 등 척화파는 이러한 정세를 이용해 이재선 역모사건을 기도하는 등 끊임없이 정권 재창출을 노렸다.

민씨 정권은 아직 확고하지 않은 자기 정권 기반을 다지기 위해 내외로 자기 척족들과 개화파 관료들을 대거 기용하는 한편, 1881년 일본의 후원으로 신식군대 별기군을 창설했다. 총책임자는 민영환의 부친, 민겸호 대감이었다. 1882년에는 종래의 훈련도감·용호·금위·어영·총융 5영을 무위영, 장어영 2영으로 축소하면서 대량 해고 시키고 봉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등, 민씨 척족들의 사병과 다름없는 별기군과 달리 차별했다. 훈련도감 출신 구식 군인들은 당시 일본군을 모델로 신설된 별기군을 왜별기’(倭別技)라 낮춰 부르며 증오했는데 특히 봉급 연체를 초래한 정부 재정 위기의 원인이 민씨들의 탐욕에 있다고 생각했으며, 특히 선혜청 당상 겸 병조판서 민겸호와 선혜청 전임 당상이자 전 호조판서 김보현(당시 경기 관찰사)이 원흉으로 지목됐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친형이었지만 명성황후를 지지하여 문호개방에도 지지하고 있는 흥인군 이최응도 구식군대의 표적이 되었다. 흥인군은 흥선대원군의 친형이었지만 동생과는 사이도 좋지 않았고 명성황후를 지지하며 동생의 쇄국정책에도 반대하면서 대립과 갈등관계를 맺었다.

결과

전라도에서 세곡(나라에 조세로 바치는 곡식)선이 쌀을 싣고 도착했다. 대동법 실시 이후 정부 예산을 집행해온 선혜청은 도봉소(都捧所)에서 무위영 소속 옛 훈련도감 군병들에게 밀린 봉급 중 1개월분의 급료만 우선 지불했다. 그나마도 썩은 쌀에다 모래하고 겨를 잔뜩 섞어 지급하자 병졸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정당한 그들의 항의에 지급 담당관이 선혜청 당상 민겸호만 믿고 적반하장 식의 강압적으로 나오자, 격분한 병졸들이 마침내 소요를 일으켰다. 옛 훈련도감 포수 김춘영(金春永유복만(柳卜萬정의길(鄭義吉강명준(姜命俊홍만복 등을 필두로 한 군병들은 선혜청 창고지기와 무위영 영관(營官)에게 돌을 던지고 몰매를 때렸으며 도봉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이른바 도봉소 사건(都捧所事件)이었다.

선혜청 당상 민겸호는 곧 체포령을 내려 김춘영·유복만 등 주동자 네다섯을 포도청에 넘겼다. 그들은 혹독한 문초를 당했고 그 중 둘은 곧 사형되리라는 소문이 퍼졌다. 소요에 가담했던 군병들은 김장손(金長孫유춘만(柳春萬 : 유복만의 동생)을 중심으로 투옥자 구명을 위한 통문을 작성했다.

흥인군 이최응이 별파진(別破陣)을 동원해 소요를 초기에 진압하도록 고종에게 주청했다. 이를 알게 된 가담자들은 더욱 격분했으나 일단 이튿날 김장손과 유춘만이 자신들의 상관인 무위대장 이경하(李景夏)의 집으로 가 작성한 통문을 보이고 억울한 사정과 단호한 조치를 호소했다.

그러나 이경하는 달랑 직필 서신 한 통을 써주고 민겸호에게 직접 가라며 발을 뺐다. 할 수 없이 민겸호의 자택으로 향한 그들은 다짜고짜 민겸호의 집안으로 난입했으나 민겸호는 부재중이었고 대신 가재도구를 죄 때려부쉈다. 이판사판이 된 그들은 우선 운현궁으로 몰려갔다. 민씨들에게 밀려 10년 가까이 실각했던 흥선대원군에게 이는 재집권의 좋은 기회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흥선대원군은 밀린 봉급의 완전 지급을 약속하며 일단 별도의 명이 있을 때까지 그들을 대기토록 하고 김장손과 유춘만 등을 불러 심복 허욱(許煜)과 긴밀히 협력토록 했다.

뒷배를 얻은 병졸들은 곧 조직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일부는 동별영(東別營)의 무기고를 약탈하고 포도청을 파옥해 김춘영·유복만 등을 구출하는 한편, 일부는 의금부를 습격해 척사론자(斥邪論者)인 백낙관(白樂寬) 등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 또 일부는 전직 선혜청 당상 김보현이 관찰사로 있던 경기감영에 쳐들어 갔고 나머지는 강화유수(江華留守) 민태호를 비롯한 외척 수구당들의 집을 습격했다.

작은 배로 탈출한 일본 공사관원

대원군은 민심을 얻기 위해 일개 해직자 소요를 위정척사 운동으로 확대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 날 저녁 대원군의 수하들과 병졸들이 일본 공사관을 포위·습격했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등 공관원 전원은 제물포 항으로 도피했고 공사관은 불탔다. 민씨 척족의 사병과 다름없던 별기군과 충돌한 그들은 곧 별기군마저 제압하고 별기군 병영 하도감(下都監)에서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공병 소위를 비롯 일본인 열 세 명을 살해하는 등 정변을 조직적으로 전개시켰다.

윤웅렬

윤응열

흥선 대원군의 명이 떨어졌다. 이에 전 민씨는 일단 궐 뒷문으로 나가 무예별감 홍계훈에게 업혀 충주 장호원(長湖院)의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했다. 대신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이 궐에서 발각돼, 심하게 구타를 당한 끝에 중희당(重熙堂) 아래서 살해됐다.

처음엔 단순 해직자 소요에 지나지 않던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무위대장 이경하가 직접 동별영에 가 부하들을 진정시켜 보려했지만 허사였다. 뒤늦게 조정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미 죽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 및 도봉소 당상 심순택, 무위대장 이경하, 장어대장 신정희(申正熙) 등을 파직시키고, 무위대장 후임으로 대원군의 장자 이재면을 임명했다. 한편 개화당이자 별기군 영병관 윤웅렬이 일본공사 앞으로 서한을 보내 정변을 알렸으나, 이미 일본 공관원 전원은 제물포로 피했다.

고종은 대원군의 복귀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대원군은 부대부인(府大夫人,고종의 모친) 민씨와 장남 이재면을 데리고 입궐했다. 훈련도감 출신 난 가담자 200 명이 대원군을 호위했다. 다시 조정을 장악한 대원군은 고종에게 자책교지(自責敎旨)를 반포시켜 군란을 정당화하고, 5영의 복구와 통리기무아문의 폐지, 그리고 삼군부 설치를 발표했다. 이재면에게 훈련대장, 호조판서, 선혜청 당상을 겸임케 해 밀린 봉급의 지급은 물론 군사와 예산을 장악하려한 대원군은 중앙의 각 부서와 지방의 관찰사 등의 민씨 척족들을 파직하고 척화파를 임명했다.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난 가담자들에게 해산을 명하는 한편, 대대적인 사면령도 내렸다. 그럼에도 난 가담자 중 일부가 중전 민씨 처단까지 해산을 거부하자 대원군은 중전의 실종을 사망으로 단정하고 국모 상()을 공포해 해산을 관철했다.

청과 일본의 개입

청나라 제독 정여창

민씨 외척들은 당시 영선사로 청나라에 체류 중이던 김윤식, 어윤중 등에게 급보를 보내 청에 원조를 요청했다(요청을 수신한 것은 82/음력 619)

주일 청국 공사 여서창이 '일본 병선이 조선으로 가니 중국 병선을 앞서 파견해야 한다'는 내용을 본국에 타전함에 따라 이튿날 북양대신 이홍장의 직무대리 장수성이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에게 출동을 명령했다.

북양대신 직무대리 장수성은 오장경에게 덩저우의 회군(의용군) 3천 명을 조선에 파병토록 지시했다.

북양수사 대리 정여창이 북양함대의 함선 3(초용, 위용, 양위)에 병력 4~500명과 이홍장의 사신 자격으로 마건충을 싣고 1차로 제물포에 도착했다. 같은 날 이홍장의 참모 설목상이 제안하고 장수성, 그리고 영선사 김윤식의 찬성으로 흥선대원군 납치안이 채택됐다.

일본군 대대 병력 300 명이 제물포에 상륙했다. 20일 전, 공관을 미리 탈출한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 및 공사관원들은 즉시 정변을 본국에 타전했었고 이에 일본이 파병한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였다. 그러나 청의 신속한 군사행동과 10배에 달하는 병력 차이로 인해 적극적으로 자국민 보호나 난 진압 과정에 제 역할을 못했다.

현실을 인지한 일본의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경은 대원군의 쿠데타 정권을 인정하는 비밀 훈령을 작성했다.

하나부사 공사에게 훈령이 도착했다.

회군 대장 오장경이 정여창의 배를 타고 영선사 김윤식을 대동해 회군 3천 명으로 남양만(현 경기도 화성시)에 상륙했다.

한양에 입성한 오장경은 흥선대원군을 초청해 불러놓고는 억류시켰다. 그리고는 그대로 톈진으로 배에 태워 보냈다.

왕십리와 이태원 일대에 주둔하던 난 가담자들은 청국군의 공격을 받아 170여 명이 체포되고 11명이 사형됐다.

조선 정부와 일본 제국은 제물포조약을 체결했다.

결과 및 평가

일개 군 해직자 소요 사건으로 시작돼 척화파 쿠데타로 발전한 이 사건의 결과, 대내적으로는 척화파가 완전히 물러나고 다수파이자 외척인 온건개화파(사대당,수구당)가 정권을 잡아 청나라 양무 운동 모델의 근대화를 추진하게 됐으며 소수 급진개화파(개화당)들이 근대화에 채찍을 가하는 형태가 됐다. 이는 또다른 불씨를 낳게 돼 결국 갑신정변으로 이어졌고 정변 실패 후 민씨 척족들이 조정을 완전히 장악해 궁궐은 사대당 일색이 된다. 별기군은 해체된 채 개화파들의 주청으로 병조 산하에 훈련원을 둬 다시 신식 군대를 양성하려 했으나, 민겸호의 아들인 민영환을 위시한 민씨 외척들은 1884년 해방영(海防營)을 통해 다시 군권을 장악했다.

청나라 내정고문 마젠창

한편 대외적으로는 청과 결탁한 민씨 정권이 정권 유지를 위해 더욱 청에 의존하면서 청의 내정 간섭이 심화됐다. 청나라는 원세개의 군대를 조선에 상주시키고 군사 고문을 보내 조선 군대를 감시하고, 마젠창(馬建常)과 묄렌도르프를 내정 및 재정 고문으로 파견해 내정과 외교에 깊이 간섭했다. 특히 청나라 조정의 사주를 받은 묄렌도르프는 당오전(當五錢)을 발행시켜 조선 경제를 교란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또한 823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체결로 청국 상인의 통상 특권을 규정하고, 청의 북양 대신과 조선 국왕을 동격으로 놓는 등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명문화했다(속방조관). 거기에 영약삼단(另約三端)이란 족쇄를 조선 조정에 채워 마음대로 외교 활동도 할 수 없게 했다. 영약 삼단의 내용은 이렇다.

조선 공사는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찾아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회의나 연회석상에서 조선 공사는 청국공사의 밑에 자리한다.

조선 공사는 중대 사건이 있을 때 반드시 청국 공사와 미리 협의한다.

830일 임오군란 때 일본인 사상자 및 공사관 등 일본 재산에 대한 손해배상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 조약 및 조·일수호조규속약(朝日修好條規續約)이 체결돼 조선 반도는 청일 양국 세력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민겸호와 김보현 피살 당시 일화

난병이 궁전으로 올라가 민겸호를 만나 그를 잡아끌자 당황하면서 흥선대원군을 쳐다보며, "대감 나를 제발 살려주시오."라고 호소했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쓴웃음을 지으며 "내 어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소"라고 말했다. 그는 계단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대원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병들은 계단 밑에서 그를 죽이고 총칼로 시체를 난도질했다. "중궁은 어디 있느냐"며 소리치는 등 언사가 좋지 않았고, 처참한 광경은 계속됐다.

임오군란이 터지자 김보현은 경기 감영에 있다가 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예궐을 서둘러 승정원에 들렸다. 조카 김영덕이 승지로 입직하던 중이었는데 가지 못하게 말렸다.

오늘의 사변을 알지 못하고 들어가시렵니까?

그러자 김보현은 옷자락을 걷어붙이고 나오면서 말했다.

내가 재상의 위치를 갖추었고 또 직책까지 맡고 있는데, 국가에 변이 생기면 비록 죽는다고 해서 회피하면 되겠느냐? 

그런 뒤 입궐하려다가 돌층계에서 맞아 죽었다. 흥선대원군을 보자 살려달라고 애걸했으나 대원군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그를 외면했다. 입궐 직전 김보현은 당일부로 경기도관찰사에서 해임돼 명예직인 지중추부사로 전임됐던 차였다.

민겸호의 사체는 원한에 찬 난병들에 의해 총칼로 다시금 난도질 당했다. 그들은 김보현 역시 박살하고, 시체를 발로 차며 입을 찢어 엽전을 집어넣고 총의 개머리판으로 마구 쑤셔 넣는데, 돈이 가슴으로 튀어나왔을 정도였다 한다.그의 시체는 민겸호의 시체와 함께 한성부 궁궐 개천에 버려졌다. 그때 큰 비가 내려서 물에 개천이 가득찼으며 날씨까지 흐리고 더웠다.매천 황현에 의하면 '이런 시기에 시체가 개천에 수일 동안 버려져 살이 물에 불어 허옇게 흐물거렸는데, 마치 고기를 썰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씻어놓은 것 같기도 했다'고 한다.삼정의 문란의 원흉인 이들의 죽음을 놓고 백성들은 탐욕스러운 자들의 말로라며 조롱했고 어린아이들조차 시신들을 쳐다보며 비웃었다고 황현은 기록했다.

새로운 해석

200671, 명성황후(대한제국 건국 전이므로 아직 중전 민씨)의 피난 행적이 적힌 임오유월일기(壬午六月日記)가 발견됐다. 당시 중전 민씨를 호종한 누군가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일기에는 51일간 일행의 숙소와 일정, 중전의 건강 상태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청나라군이 서울에 입성한 날의 기록에는 '명성황후가 사람을 시켜 경성에 붙은 방문을 베껴오도록 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중전 민씨가 직접 청의 개입을 유도했다는 기존의 학설에 반례가 될 수 있다. 일기에는중궁전하(명성황후)를 위한 탄원서를 청국 오장경 제독에게 전했는데, 곧 받들어 모셔오라는 희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중전 민씨의 환궁은 오장경과 연락이 된 후 였음을 알게 한다.

현재 이 자료는 대전광역시 한밭도서관 대전광역시향토사료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2008122일 은진 송씨 제월당가 기탁유물 특별전시회에서 처음으로 민간에 공개됐다.

 [Sources Wikipedia]

 

책소개

‘세계사와 포개 읽는 한국 100년 동안의 역사’ 세 번째 책으로 이 책에서 다루는 기간은 1873년부터 1884년까지의 10여 년이다. 사건을 중심으로 보면 1876년의 강화도조약 직전부터 1882년의 임오군란과 그 후유증까지다. 이 시기 조선은 쇄국을 내세운 대원군이 실각하고 아무런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개국을 강요당했으며, 고종과 민씨 세력의 샛별인 민영익을 매개로 개화파가 활동을 개시했다. 이 책은 서세동점의 전제인 동양의 산업혁명 부재 문제와 주자성리학에 매몰돼 있던 조선의 현실을 지적하고 고종 친정 초기의 개국 과정을 검토한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개국은 당사자인 조선이나 그 종주국을 자처한 청은 물론이고 조선과 먼저 수교한 일본이나 미국 등이 모두 러시아와 전 세계에 걸쳐 대결을 벌이던 영국의 기획에 놀아난 것임이 드러난다.

목차

제1장 동양에서는 왜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제2장 강화도조약 체결하다
제3장 근대 문물 수용에 나선 조선
제4장 주자성리학 유토피아, 조선
제5장 서양 열강 끌어들여 러시아를 막아라
제6장 1880년대 조선의 참모습
제7장 개화당의 등장
제8장 고종, 개화의 길로 방향 전환
제9장 서양 열강과 수교하다
제10장 생계형 폭동, 국제문제로 비화시킨 대원군
제11장 나라를 결딴낸 제물포조약·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제12장 수신사 박영효, 일본에 간 까닭은
제3권 연표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 : 김용삼
 
대전고, 중앙대 문예창작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조선일보 기자, 시사월간지 [월간조선] 편집장, 경기도 대변인, 경기콘텐츠진흥원 감사를 역임했다. [월간조선] 기자로 활동하며 50여 개국 현지 취재를 통해 전·현직 국가원수 4명을 특종 인터뷰했다. 또한 황장엽 망명사건 특종보도로 제1회 대한민국 언론상 수상, 2008년 해양사상 보급에 공헌한 공로로 장보고대상을 수상했다. 2013년 『이승만과 기업가...

책 속으로

첫째, 강화도조약은 동아시아에서 전개된 영-러 대결이라는 국제 정세를 일본이 교묘하게 이용한 결과였다. 둘째, 러시아의 한반도 병합을 저지하기 위한 영국의 음모가 작용했다는 사실이다. 즉, 강화도조약은 일본이 주도했지만 배후 조종자는 영국이며, 조선과 일본의 관계 정립보다 훨씬 거대한 영-러 그레이트게임 차원에서 벌어진 고차원적 국제 외교 게임이었다는 뜻이다.

--- p.6

일본 지도부는 영국의 책략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다. 일본은 러시아가 한반도로 남진하는 것을 봉쇄하려는 영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편승해 실리를 챙겼고, 다른 쪽에선 러시아와 비밀 거래를 서슴지 않았다. 일본은 영-러 ‘그레이트게임’을 적절하게 이용해 실리를 챙겼다. 조선만 세상 물정 모르고 어물거리다 조약을 강제당한 것이 강화도조약 체결의 본질이다.
--- p.7

과학기술의 빛나는 성과물인 측우기와 해시계를 발명한 나라가 농업 생산성에서 동아시아 꼴찌 수준을 면치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류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문명국에서 서양처럼 출판을 통한 지식혁명은 왜 일어나지 않았을까?
--- p.30

운요호 사건의 파장으로 일본이 강화도로 와서 조약 체결을 요구하자 오경석은 이 기회에 일본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조선을 강제 개국시켜 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같은 날 오경석은 모리야마에게 “개화인을 만나 개화 이야기를 나누니 몹시 유쾌하다”라는 말도 남겼다. 그리고 이날부터 오경석이 조선의 개국을 위해 일본에 적극 협조하는 관계가 형성된다.
--- p.49

2월 13일 제3차 회담은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날선 공방전이 벌어졌다. 구로다 전권은 “조선 정부가 조약을 체결하면 일본 대표단은 곧바로 귀국할 것이지만, 체결이 안 되면 일본군이 귀국을 침략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 p.52

여기서 중대한 하자가 발생했다. 만국공법 체제에 무지했던 조선은 제4, 제5조를 부산의 왜관처럼 원산·제물포에도 왜관을 추가 설치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부산 왜관에는 세관도 없고 대일 무역에 대해 관세도 부과하지 않았다. 이러한 왜관 무역 정신에 입각해 조선은 세 곳의 개항장에 세관을 설치하지 않았고, 수출입품에 대한 관세도 부과하지 않았다.
--- p.62~63

이동인의 친영 정책은 세계의 패권국 영국과 손잡고 청·러시아·일본으로부터 조선이 독립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 하지만 그의 실종으로 인해 세계 패권국과의 연계가 끊어지면서 조선의 운명은 ‘고난의 행군’의 길로 향하게 된다.
--- p.200

윌리스 제독이 주장한 둘째 항목은 세계 어느 나라도 그런 내용을 포함시켜 조약을 체결한 사례가 없었다.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윌리스는 안면몰수하고 “서양 공법에 이러저러한 내용이 있으니 이를 허가하라”라고 조선 정부를 압박했다. 만국공법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캄캄절벽이었던 조선의 대신들은 영국이 압박을 가하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 p.224

미국이 조선에서 획득한 이권은 서양 열강이 중국에서 얻은 것처럼 무력을 동원한 강제 탈취가 아니라 조선 정부의 호의에 의해 정당하게 부여받은 것이다. 조선 정부가 미국인에게 다양한 이권을 부여한 것은 조선이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아 국가 존립이 위태롭게 될 경우 미국이 개입과 거중조정을 통해 구제해 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 p.228

민겸호는 대원군에게 뛰어들어 머리를 도포 소맷자락 속으로 들이민 채 “대감! 날 좀 살려주시오” 하고 울부짖었다. 대원군이 “내가 어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소?” 하고 차갑게 웃으며 거절했다. 대원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난병들이 민겸호를 발로 걷어차 층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는 화승총 개머리판에 얼굴이 짓이겨지고 총검으로 난자당한 후 시체가 토막토막 잘렸다.
--- p.247

문제의 조항에 근거해 영국은 1885년 조선이 러시아와 밀약을 체결하자 군함을 파견해 거문도를 점령했다. 조선 입장에서 보면 이 사건은 영국의 조선 영토 침략 및 무단 점거였지만, 영국은 “조-영 신조약에 의거한 정당한 입항”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 p.326

조-영 신조약(파크스조약)은 조선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최악의 조약이었다. 이 조약이 모태가 되어 미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러시아 등 서양 각국에 동일한 이권과 혜택을 제공해야 했다. 조선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아니라 조-영 신조약을 통해 완전 무장해제당했다. 변변한 방호 장구도 없이 벌거숭이 상태로 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이권을 뜯어먹히는 ‘국제적 호구’로 전락한 것이다.
--- p.330~331

영국을 끌어들여 청의 압력을 물리치고 자주독립을 이루겠다는 개화당의 의도는 순수했는지 몰라도, 영국에게 실컷 이용만 당한 끝에 무지막지한 피해를 당했다. 서양 열강과 대등한 조약을 체결해 국제사회에서 독립을 공인받으면 국제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개화당의 순진무구한 생각은 무지갯빛 환상이었음을 영국이 적나라하게 깨닫게 해준 것이다.
--- p.331
 

출판사 리뷰

1840년 중-영 아편전쟁과 1854년 미국 페리 함대에 의한 일본의 개항은 19세기 서세동점을 상징하는 사건들이다. 중국과 일본에 몰려온 이 서세동점의 파고는 서양 세력에게는 보잘 것 없는 ‘계륵’에 불과했던 조선도 피할 수 없었다. 이 책에서는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몰려들어 침탈을 개시한 원인부터 살핀다. 먼 거리를 손쉽게 이동해 동양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한 배와 동양의 무력을 압도한 총포 등은 모두 산업혁명을 뒷받침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게다가 서양 세력은 이를 기반으로 이미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식민지를 건설해 자본을 축적하고 있었다. 이른바 제국주의다.

우리의 상황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도 더 열악했다. 이 시기에는 이미 인구 규모부터 우리를 압도하는 상황이었다. 두 나라가 속절없이 서양 세력에 무너진 가운데 우리는 이런 정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개항 이전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주자성리학 이데올로기다. 국제 정세의 엄청난 변화에 눈감게 만든 것도 자기중심적 주자성리학 이데올로기였고, 그것이 불러일으킨 망상이 중국의 정통성을 우리가 이었다는 ‘소중화’ 의식이었다. 서양 산업혁명의 토대가 됐던 개인의 창의성을 말살한 것은 주자성리학의 신분 질서였다. 그런 조건에서 대원군의 쇄국은 필연적인 결론이었고, 중국이나 일본보다 더 심한 쇄국 상황에서 강요당한 개국은 엄청난 혼란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개국이 일본 개국의 판박이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은 페리의 미국 함대가 자기네에게 강요했던 것을 그대로 복사해 무력시위를 하며 조약을 강요했다. 대비가 전혀 없었던 조선은 과거 왜관을 통한 교역 정도를 생각하며, 완전히 새로운 국제법 질서에 대한 인식 없이 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한번 열린 개방의 물결은 되돌릴 수 없었다. 조선은 일본에 이어 미국과 수교했다. 미국은 중국으로 가는 중간 기착지의 필요성 때문에 일본의 개국을 강요하기는 했지만, 이미 일본의 항구를 연 이상 조선과의 수교가 절실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에 챙겨야 할 대단한 이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배후에 있는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유럽, 중앙아시아, 동아시아로 장소를 옮기며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무대로 러시아와 ‘그레이트게임’으로 불리는 세력 대결을 벌이고 있었는데, 동아시아에서 러시아 남하를 차단하기 위한 길목으로 조선을 점찍고 미국을 앞세워 자국의 진출 발판을 마련하려 한 것이다. 일본의 진출 역시 영국의 교사 내지 방조에 의한 것이었으며, 영국과 미-일의 협조 관계는 훗날 영일동맹과 미-일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외교전의 중요한 한 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뒤늦은 개화’에 뛰어들었다. 이미 선택지는 없었을 것이다. 쇄국을 추진했던 대원군이 실각해 반작용도 있었을 것이고, 개항으로 인해 이미 대세는 결정된 것이었다. 고종과 민 왕후의 측근인 약관의 민영익은 단숨에 정국의 중심에 섰고, 그는 역시 연소한 김옥균·박영효 등과 어울리며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고자 했다. 개화파가 태동하고, 고종은 밀려오기 시작한 외세를 다른 외세를 이용해 제어한다는 허망한 노력에 매달린다.

이 책은 그런 10여 년 동안 조선에서 펼쳐지는 ‘참상’을 하나하나 살핀다. 대외 문제에 ‘폭탄’이 떨어진 상황에서 정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새로운 집권자인 민 왕후 세력은 권력 누리기에만 혈안이 되어 민생은 더욱 도탄에 빠진다. 새로운 국제 질서에 익숙하지 못한 국가의 헛발질들은 그 자체로도 안쓰럽지만, 그것은 고스란히 국민의 부담으로 넘어간다. 그 틈을 노린 일본은 줄기차게 침략의 야욕을 드러낸다. 한 세기 반 전, 그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했어야 하는가? 고종과 민 왕후와 대원군은, 정부 고관들은, 지식인들은, 그리고 민초들은? 먼저 필요한 것은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다. 이 책은 기초 사실들과 함께 그런 상황에서 실제로 그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4259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